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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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처럼 끊임없이 재생되고 뒤섞이는

죽음에 대한 충동과 삶에 대한 열망

자신을 구하고 싶은 절실한 이들을 위한 단 하나의 소설

 

 

내가 기억을 더듬을 때 나는 이미 기억 속에 있다. 나는 기억하는가. 기억되는가.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생ㅇ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p. 1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죽음. 그래, 죽음이다.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만 지금 여기를 포위하기 때문에. 미완성일 때에만 온전해서 끝내 나라고는 호명될 수 없는 것. 내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나조차 나일 수 없게 하는 것. (p. 17)

그만. 멈추고 싶다. 멈춰 있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춰지지 않아서 멈춘 것을 멈추려고. 그만.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p. 25)

질문은 상충하는 두개의 선택지가 아니고, 선택할 수 없어서 무수해진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의미가 혼동된다. 그에 관하여, 그의 고통에 관하여, 나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p. 38)

나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쓸모없어지는 것. 의자에 고요히 앉으려던 것뿐인데 이미 고통이 거기에 앉아 있는 것.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가는 것. (p. 40)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만 겨우 삶을 생각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죽음만을 생각하는 동안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잊었다. (p. 55)

나는 책상 앞으로 달려가 다급히 쓴다.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마지막에 도달하지 않는다. (p. 69)

이것은 누구의 단어인가. 누구의 문장인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녀는 그저 한번만 그 안에서 온전히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완성된 문장의 힘에 붙들려, 문장이 단언하는 바를 믿고 싶었을 뿐인데. 존재에 미치지 못하거나 존재를 초과해버리는 단어를 읊조리면,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가는 음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실리지 않아, 차라리 그녀는 언어를 잃고 싶다. 아무리 말해도 말해질 수 없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고 싶다. (p. 82)

무엇을 쓰고 싶지. 아니면 무엇을 읽고 싶지.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멈추지 않고 쓸 뿐이고, 쓴다는 행위는 쓰이거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p. 94)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p. 95)

120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문장마다 빗금치어진 무제 를 제외하면 116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95페이지에 다다라서야 작가는 고백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 소설의 표현방식을 따라하며 소감을 적어보자면,

나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기시작했고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데도 소설인지 모르겠다. 소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소설을 끝까지 읽기로 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인물도 없고 사건도 없고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계속 생각한다.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 한다. 죽음은 때로는 꿈에서 때로는 음악에서 때로는 환영에서 때로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작가의 머리에 번뜩인다. 작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생각일 뿐 일어나지 않았기에 작가는 계속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죽음이라는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사건이 되고 시간이 되어 줄거리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줄거리가 없다. 즉 아무 사건도 없다. 그 어떤 명징한 사물조차 등장하지 않고 소제목처럼 붙어 있는 피아노연주곡을 들으며 남긴 감상인가 싶었더니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냥 책으로 내면서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음악이랑 글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은 자동피아노 인가. 대체 피아노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작가는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작가가 만약 바이올린을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바이올린이 되었을까 작가가 만약 첼로를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첼로가 되었을까. 아니다. 피아노는 자동피아노가 있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현을 직접 켜야 하므로 자동악기가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생긴 자동악기를 만들면 되는것 아닌가. 나는 지금 소설에 대한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일까. 그냥 작가를 흉내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생각을 되짚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마음을 공감해보려는 것일까. 나는 소설을 읽었다. 다 읽었기에 이렇게 이 소설에 대해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것이 과연 읽힐 수 있을까?

연재를 마친 뒤 한해가 지나 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개고를 위해 작품을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를 돌아보기가 쉽지 않아 원고 검코를 마냥 미뤄온 탓이었다. 개고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동피아노]의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내가 본 것이 바로 그렇게 찢기고 훼손된 언어였다. 끝없는 동어반복, 논리와 인과가 없는 진술, 상충되고 모순적인 사유가 끓어넘치는 정념에 매몰된 채 뒤범벅되어 있는 광경은 처참했다. 소설을 써오는 내내 심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없지만, 내게는 내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 문학적으로 제련된 작품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봄에 쓴 [자동피아노]는 내가 작가로서 세워둔 최후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증상이었다.

작가의 말 中

저자는 '작가의 말' 에서 자신이 그동안 극심한 자살충동과 우울과 불안증세가 있어왔음을, 치료를 받았고 호전되기를 딱히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죽음보다 삶을 생각하게 되었음을, 그리하여 평생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변하였듯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죽고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그 충동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작가의 글을 소설이라고 읽어야 할지 일기라고 에세이라고 읽어야할지 독백 혹은 고백이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가가 썼으므로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소설책이라고 출판되었으니 소설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소설은 허구인데 허구가 아닌 글을 담고 있는 이 책을소설이라 부른다면 허구라고 부른다면 작가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엇고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러한 작가를 보며 이 소설은 무엇인걸까. 이책이 소설인지 아닌지 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소설이건 증상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 읽는다면 어느정도 공감을 한다거나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삶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므로. 하지만 소설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이 소설이 얼마나 많이 울려 퍼질지는 모르겠다. 물론 저자는 그닥 많이 울려퍼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 않긴 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이 책에 공감한다는 것은 저자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므로 저자는 자신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는 것 같으므로. 하지만 자동피아노라는 것이 원래 연주자 없이 관객도 없이 그저 저 혼자 음악소리를 내는 것이니, 작가가 없어도 독자가 없어도 이 글이 책이 되어 나온이상 죽음에 대한 생각의 돌림노래는 계속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어주는 관객이 없기를 바라며 울려 퍼지는 죽음의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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