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을 더듬을 때 나는 이미 기억 속에 있다. 나는 기억하는가. 기억되는가.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생ㅇ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p. 1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죽음. 그래, 죽음이다.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만 지금 여기를 포위하기 때문에. 미완성일 때에만 온전해서 끝내 나라고는 호명될 수 없는 것. 내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나조차 나일 수 없게 하는 것. (p. 17)
그만. 멈추고 싶다. 멈춰 있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춰지지 않아서 멈춘 것을 멈추려고. 그만.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p. 25)
질문은 상충하는 두개의 선택지가 아니고, 선택할 수 없어서 무수해진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의미가 혼동된다. 그에 관하여, 그의 고통에 관하여, 나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p. 38)
나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쓸모없어지는 것. 의자에 고요히 앉으려던 것뿐인데 이미 고통이 거기에 앉아 있는 것.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가는 것. (p. 40)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만 겨우 삶을 생각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죽음만을 생각하는 동안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잊었다. (p. 55)
나는 책상 앞으로 달려가 다급히 쓴다.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마지막에 도달하지 않는다. (p. 69)
이것은 누구의 단어인가. 누구의 문장인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녀는 그저 한번만 그 안에서 온전히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완성된 문장의 힘에 붙들려, 문장이 단언하는 바를 믿고 싶었을 뿐인데. 존재에 미치지 못하거나 존재를 초과해버리는 단어를 읊조리면,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가는 음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실리지 않아, 차라리 그녀는 언어를 잃고 싶다. 아무리 말해도 말해질 수 없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고 싶다. (p. 82)
무엇을 쓰고 싶지. 아니면 무엇을 읽고 싶지.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멈추지 않고 쓸 뿐이고, 쓴다는 행위는 쓰이거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p. 94)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p.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