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28가지 스캔들 테마로 읽는 역사 3
그레이엄 도널드 지음, 이영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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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28가지 스캔들

허위와 날조의 기록부터 추악한 살인사건의 진상까지

역사 속 28가지 미스터리의 진실을 밝힌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가 바뀌면 역사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는지라, 그렇게 뒤바뀌는 역사적 판단 속에서 다시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것들이 어디 한두가지 이겠는가? 그러나 기록이 사라지고 ~카더라 소식만 풍문처럼 전해질때 역사의 어떤 장면들은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대단한 신비적 요소가 있지 않아도 비양심적인 한두명의 의식적인 의도로 당시에 감쪽같이 진실을 묻어 놓으면 후대는 그것을 답이 모호한 역사적 미스터리로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계사는 서양사와 동의어이다. 세계사 라는 역사는 유럽과 북미의 역사이다. 세계사 속에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아시아 의 역사는 없다. 이 책의 원제는 'The Mysteries of History' 이다. 영국의 저술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에서 기존 상식적 역사들과 배치되는 근거들을 밝힌 글이 우리에게는 세계사의 미스터리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서양인이 신기하게 보았던 다른 대륙의 이야기는 사실 그들이 오해한 것들일 뿐이었다. 자신들이 오해한 걸 자신들이 미스터리라고 얘기하며 진실을 밝힌다는 것도 사실 웃픈 현실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지적해낸다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어차피 서양인들이 오해하거나 말거나 다른 대륙에 사는 현지인들은 그들이 오해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실은 이것이라고 말해봤자 서양인들은 들어주지도 믿어주지도 않을테니, 오해한 서양인들 중 누군가가 사실은 이렇다 라고 말해주어야 그나마 들어주고 생각해볼테니 말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잔 다르크를 15세기 초의 여성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니었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전투에 출정한 적도 없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적도 없는 듯 하다. (p.13)


영국인인 저자가 영국와 역사적으로 오랜 숙적 관계인 프랑스의 잔다르크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는 점이 이 책을 시작부터 가볍게 만든다. 아마도 영국내에서 읽힐때는 더 잘 팔렸을 원인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당시 프랑스인들이 처한 시대상황은 영웅이 필요했기에 적절한 인물을 골라 영웅신화를 창조해냈고, 이 영웅신화를 지금도 역사로 배우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그런 영웅신화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서 영웅이 창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드라큘라 백작 부인으로 유명한 바토리가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하는 등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선정적인 판타지일 뿐이다. 바토리는 자신의 재산을 노린 이들의 탐욕과 정치적 조작의 희생양이 되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포함한 몇 개 국어에 능통할뿐 아니라 당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자기분수알기' 를 거부하는 독립적인 여성인 바토리에게 자기 분수를 알게 할 어떤 조치가 내려져야 했다. (p. 23~25)


TV를 잘 보는 편은 아닌데, 일요일 오전에 하는 서프라이즈 라는 프로그램은 종종 본다. 거기서 이 부인의 얘기를 봤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짧은 드라마식으로 보여주는 그 프로그램에서 의외로 많은 반전 상식들을 얻게 되곤 하는데, 티비로 볼때도 못믿을 이야기겠구나 싶었던 것이, 당시 시대에서 너무 뛰어났던 여인을 응징한 설화라는 내용을 읽고보니 더욱 씁쓸해진다.


'닌자' 역시 유럽인들이 그 용어를 만들어낼 때까지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던 말이다. 'Japan'도 실은 중국에서 기원한 지명이었지만, 여행업을 부흥시키고 싶었던 일본 상업 분야에서 일부러 채택하여 사용해왔다. 옛날부터 일본 원주민들은 자기 나라를 니폰Nippon 이나 니혼Nihon으로 불렀다. 둘 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나타내는 동일한 상형문자 日本 의 음독이다. 둘 중에서 일본의 기성 세대는 니폰을, 젊은 세대는 니혼을 선호한다. '재팬'을 빵의 일종으로 여길수도 있다.('재팬' 의 'pan'은 스페인어로 '빵'이라는 뜻이다) 고대에 훨씬 대국이었던 중국은 일본을 작고 순종적이라는 의미에서 '왜 倭'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 업신여기는 듯한 용어가 야기하는 외교적 문제로 인해, 중국은 왜를 버리고 일출을 뜻하는 중국어 '지푼Jihpun' 을 선호하게 된다. 이 용어에는 '해가 떠오르는 땅'이라는 시적인 의미가 가미돼 있다. 당시 중국과 교역하던 서양인들은 일본에 대해 왜나 지푼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p. 38)


일본이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섬이었기에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 되었는데... 그 위치가 조금만 더 남쪽이거나 서쪽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태양' 신의 후예로 여기지 않게 되었을까? 일본 지명에 대한 이야기는 '닌자' 미스터리를 시작하는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라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내게는 일본 지명 자체가 미스터리다. 너무 자만심 가득한 이름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닌자' 는 <두 번 사는 인생> (1964) 이라는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여 19세기 서구 영어 사용자층이 만들어낸 말이다. '닌자' 의 이미지도 물론 서양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일본에서도 진짜 자객들은 신무기인 총이나 폭탄이 등장하자마자 이것들을 바로 주요 무기로 선택했다고 한다. 검은옷을 입고 지붕을 날아다니며 검과 표창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라테 가 포악한 사무라이의 대나무 갑옷을 뚫을 수 있도록 일본 봉건 시대에 개발되었다는 설도 사실이 아니다. 당시에는 사무라이의 갑옷도 보강된 가죽과 금속판을 소재로 만들어졌고, 가라테도 일본 초기에 개발된 무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무술은 당나라(618~907) 소림사 승려들이 고대 독립국 류큐 왕국의 섬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소개되어 수 세기 동안 '중국 공수도'로 알려져 왔다. 일본 교육부가 1922년에 오키나와의 무예 고수 후나코시를 초빙하여 무예 시범을 보이게 하자, 일본은 이 중국의 맨손 무술에 열광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적대 관계가 지속되어 왔기에, 일본인들은 이 새로운 취미의 명칭을 중국과 연관이 없어 보이게 하려고 '맨손' 이라는 뜻의 가라테로 바꾸기로 했다. (p. 43)


가라테의 기원이 중국무술이다 라는 얘기를 중국학자나 한국학자가 했다면 일본이 득달같이 일어나 반기를 들었을 테지만, 그들이 선망하는 영국인이 말했기에 아마도 아무런 대꾸 없이 무반응으로 이 책이 읽히게 되겠지 싶다. 일본에서 이 책이 읽힌다면 말이다.


마르코 폴로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은 이 늙은 허풍재이와 그의 여행기이자 회고록인 <백만 가지 이야기>(보통 동방견문록 으로 불린다)로부터 전해진 것들이다. 초기 회의주의자들은 이 제목을 <백만 가지 허풍>으로 바꾸기도 했다. 전체 원고 중 18개 문장만이 1인칭으로 전달되는 이 원고가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폴로에게 큰돈을 벌어다 주었으며, 아직도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랍다. (p. 79)

실제로 폴로 집안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멀리 갔다고 쳐도, 칸을 알현한 최초의 유럽인 혹은 이탈리아인은 그들이 아니었다. 폴로가 태어나기 8년전인 1246년에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출신인 지오반니 다 피안 델 카르핀이 이미 교황 인노첸시오4세의 친서 서신을 가지고 징기스칸의 손자 귀위크 칸을 알현한 적이 있다. 귀위크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라는 카르핀의 청을 거절하면서, 오히려 교황과 모든 서역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기대한다고 답했다. 그런 다음 귀위크는 인노첸시오4세가 불분명하게 이해하는 용어가 없도록, 몽고어, 아랍어, 라틴어로 사본을 만든 편지와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 마르코가 태어난 해인 1254년에는 플랜더스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루부룩의 윌리엄이 바투 칸 과 몽케 칸 을 만난 뒤 40쪽 짜리 책인 <루부룩의 윌리엄 동방 여행기> 를 펴냈다. 이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직도 중세 지리학 문헌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은 이 책에서 재정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폴로가 출간에 도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p. 81)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대해 왜 의심을 품어보지 않았나? 서양인들이 보고싶은 데로 보고 판단하고 싶은데로 판단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도 높은 책이었던 그 책에 대해 내용을 제대로 보기는 했던가? 책 내용이 뭔지도 모른채, 그저 중국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으로 마르코 폴로를 그가 쓴 책인 동방견문록이 역사적 사료인 것처럼 배우지 않았나?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방문한 적도 없다는데?!


폴로가 칸과 교황을 중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중국 쪽이나 바티칸 쪽에 그 접촉을 확인해 주는 기록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양저우시의 기록에도 그의 통치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가 중국의 주변을 여기저기 여행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조차 심각한 의문점들을 제기한다. 그가 여행을 다녔다는 지역들을 가기 위해 소요된 시간이, 이미 알려져 있는 거리나 다른 이들이 충분히 입증한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17년 동안 머물렀다는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칸의 영토에서 사용되던 언어에 친숙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외교적 논의를 이끌었을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책 안에서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명칭들을 사용하지 않고 페르시아어 명칭들만을 가용하고 있다. 중국의 중요 지역들의 위치와 관련하여 그가 알고 있던 지식에도 허점이 있다. 그 기간의 어떤 중국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르코 폴로가 그 나라 땅을 밟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많은 역사가들은 폴로가 흑해보다 더 멀리 나간 적이 없으며, 흑해 근해에서 동방국들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 거기서 만난 이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교황청은 모든 이가 사망할 때 그들 재산의 1%를 거둘 권한이 있었다.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이 눈을 희번덕이며 그의 모든 재산목록을 상세하게 작성해두었는데 그 꼼꼼한 목록 가운데 그 주인을 중국과 연관시켜 주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중세의 유럽과는 매혹적으로 다른 중국에서 17년을 보냇으면서, 어떻게 중국 물건을 하나도 집에 안 가져올 수 있었는지 상상이 가는가? (p. 82~85)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바티칸 기록에 중국과 왕래했던 폴로 이전 사람의 기록은 있어도 중재자로 많은 일을 했다던 폴로의 이름은 바티칸 기록에도 전혀 없는데, 왜 폴로 혼자 주장한 그 책이 아무런 증거도 확인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걸까? 역사는 승자가 보고싶은 것만 보여주려 한다. 주류는 그런 것이다. 그 주류에 휩쓸리지 않는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자들의 자성을 기대해 볼 뿐...


미국인들은 아직도 도시 이름에서 우주 비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만큼 이 인물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지만 그는 아메리카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 따라서 이런 현상은 의아하기만 하다. (p. 87)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의 위임을 받아 항해를 떠났던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남아메리카 북쪽에 닿았다. (p. 88)

지명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인물은 좀 덜 알려진 부유한 스리스틀 상인 로버트 아메리크 이다. 아메리크는 1497년5월에 존 캐봇이 래브라도에 도착했을 때 타고 간 마테오 선을 후원했다. 베스푸치 보다 2년 먼저 신대륙에 도착한 캐봇은 북아메리카 해안선을 탐사했다. 따라서 신대륙의 지명은 오랜 전통에 따라, 캐봇의 후원자인 로버트 아메리크의 성이 붙여진 것이다. 지명을 정하는 전통을 살펴보는 것이 이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는 탐헌가나 후원자의 이름이-성이 아닌- 지명이 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초반에 헨리 허드슨이 현재의 뉴욕이 된 지역에서 새로운 강을 발견했을 때, 그 강은 헨리강이 아니라 허드슨강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아메리카 지명의 영예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자격없는 어깨에 올라간다면, 신대륙은 아메리카가 아닌 베스푸치로 불려야 될 것이다. (p. 89)

진짜 미스터리는 어떻게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에 대한 모든 영예를 거머쥐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당시 영국과 신흥국 미국 사이에 대서양을 가로질러 피어오르던 적대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1775년과 1783년 사이의 전쟁이 끝난 후(미국 독립전쟁), 미국은 영국과 관련된 사람이나 일을 모두 피했다. '마스터' 같은 단어가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보스'에 자리를 내주고, 흰 가발을 쓰고 대중앞에 나설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은 언어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개심의 대상이되었다. 혁명 후 미국은 시베리아인, 일본 원주민, 바이킹 등의 발견을 등한시하며, 영국인이 아닌 콜럼버스와 영국의 지원을 받았던 존 캐벗 사이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주인공을 결정하려 했다. 승자는 미국 해안 근처에도 가지 못한 콜럼버스가 되었고, 독립전쟁을 통해 혐오한는 영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게 된 미국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콜럼버스의 영토, 콜럼비아 라고 불렀다. (p. 93)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섬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노예로 전락시킨 죄로 족쇄를 차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콜럼버스의 잔학 행위들이 알려지가, 그의 명예가 허울을 벗게 되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콜럼버스의 기념일에 실시하는 행사가 꾸준하게 취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뉴욕 시민들은 센트럴 파크에서 콜럼버스 동상을 없애달라고 유욕시장에게 요청하는 상당히 많은 시위들을 벌였다. (p. 95)


아메리카 대륙이 미지의 땅으로 불리던 시절에도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사람들과 교류하던 구대륙의 민족들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과 미국의 패권은 자신들의 대륙과 그 대륙을 발견한 역사를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으로만 채워놓았다. 콜럼버스도 베스푸치도 미국땅은 밟은적이 없다. 하지만 독립한 신생국이 선택한 두 이름은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아메리카 가 아니라 베스푸치 (혹은 여성형으로 베스푸치아?) 로 불렸을 수 도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좀 웃긴다. 선택한 역사만 진짜 역사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 자체가 웃긴 상황이긴 하지만...


기원전 338년의 기록에 보면, 베이징의 황제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전시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호주의 동부 해안선 지도가 그려져 있는 2,000년 된 중국 화병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수 있듯, 고대 중국인들도 호주를 자주 방문했다. 중국에서 호주를 본격적으로 처음 탐사한 것은 1422년 정화장군에 의해서였다. 이 중국인들이 오기 5,000년 전에 이미 아시아와 다른 많은 지역에서 사냥꾼 겸 상인들이 자기 나라의 사냥견들을 데리고 들어왔으며, 그중 야생으로 도주한 일부 개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딩고로 진화했다. 유럽인들이 들어온 것은 한참 후였다. (p. 98)

쿡이 용감한 항해자였고 꼼꼼한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호주 발견에 대한 영예를 얀스존으로부터 빼앗아 갔는지는 미스터리이지 않은가? 당시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자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역사서들 안에 그저 '요리하듯' 쿡을 최초의 발견자 자리에 집어넣고, 네덜란드인인 얀스존은 빼버린 것이다. (p. 101)


호주를 발견한 사람이 제임스 쿡 이라는 영국인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는데, 호주 역시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들과 교류하던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도 제임스 쿡은 아니라는데.. 그들 자체의 역사보다 그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 당시 패권국의 누군가여야 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발견자들의 이름을 봐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그러한 역사적 명예?! 조차도 가져야 했나 보다. 승자들은.


'걸어가는 모아이'가 나오는 노래가 여러 곡 있었는데, 뱃노래 같은 노동요로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동안 박자와 리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라파누이의 언어에는 심지어 '다리 없이 걷기'를 의미하는 '네케네케'라는 표현도 있다. 흥미롭게도 마오리 언어에서 '네케'는 뱀을 의미한다. 민족학자 겸 모험가인 토르 헤예달이 레오나르도 하오아 파코미오 라는 섬 주민에게 '네케네케'의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일어서서 양팔은 옆으로 펼치고 몸의 모든 부분과 무릎을 꽉 붙인 채 심술궂은 펭귄처럼 약 2.5cm씩 몸을 흔들며 움직였다. 파코미오는 정상적인 자세로 돌아온 후, 그것이 그 말이 의미하는 동작이라고 하더니, '이 세상에 누가 그렇게 걷고자 하겠어요' 라고 되물었다. (p. 126)


그런 모습으로 걸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모아이 석상이다. 해변가에 늘어서 있는 모아이 석상의 미스터리를 푼다고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그러다 2011년 두 학자가 원주민 들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어 그 모습으로 석상을 옮기는 실험을 했고, 그렇게 미스터리는 풀렸다. 석상을 세워 양쪽에 밧줄을 연결해 마치 석상이 뒤뚱거리며 걷듯이 앞으로 이동시킬 수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밝혀내지 못하면 미스터리이고 원주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미스터리의 답은 절대 모를 것이라는 오만이 이토록 오해 석상의 이동방법을 미스터리로 남겨두었던 것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1670년에 탄생시킨 초대형 베스트셀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쓸때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기초로 삼았다. 만일 토머스 노스 경이 1579년에 이 <영웅전>의 번역본을 간행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대중문화 속에서 그렇게 잘못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p. 135)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대작이고 대부분이 엄청나게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많은 부분을 고대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랬고 리어왕도 그랬다. 또 다른 작품들도.... 물론, 신화나 설화 몇줄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셰익스피어 혼자서 창작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사실 그 능력이 좀 작게 느껴지기는 한다는 말이다.


이집트 독사에 물리면 죽음이 빠르고 편하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클레오파트라처럼 평온하게 누워있을 수 없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2~8시간을 보내야 한다. 따라서 그녀가 자살했다면 아마 다른 수단을 썼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통치자들은 모두 마지막 순간이 오면 먹을 수 있도록 효과가 빠른 독을 가까이에 간직했다. 클레오파트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발에 꽂는 머리핀에 독약을 넣어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독사에게 물렸다는 터무니 없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석상을 과감하게 로마 전역에 전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녀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고, 거기에 이집트 코브라가 그녀의 오른팔뚝 위를 두르고 올라갔다가 그녀의 가슴께로 머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의 동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라, 옥타비아누스가 굴복시킨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엉뚱한 쪽으로 생각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 의해 죽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내리자, 옥타비아누스 일당은 그런 여세를 계속 몰아갈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p. 140)


로마가 이집트를 굴복시켰을때의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그대로 우리까지 전수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굴복시킨 자가 마음대로 왜곡시킨 그 모습 그대로 이야깃거리로서 역사를 대하고 있는 만큼 이집트나 로마나 다 우리에겐 너무 먼 역사라서일까? 하지만, 그 역사를 지지기반으로 삼은 세력들이 세계를 쥐어잡고 있으므로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으면 안되지 않을까?


모차르트가 음악적 천재라는 것은 아마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그의 교향곡 중 절반이 8세에서 19세 사이에 지어졌다. 한편 그는 배설물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광적인 변태여서, 그와 비슷한 성향인 어머니와 교환한 편지 내용들은 여기서 언급되거나 인용될 수 없을 정도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뮤지크(소야곡)를 작곡해 낸 똑같은 머리가 자신의 B플랫 장조 캐논 231번에는 '레크 미히 임 아르슈 Leek mich im Arsch'(내 엉덩이를 핥아줘) 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정도만 말하고 싶다. 여기에 밝힐 수 없는 제목으로 이 곡의 후속곡을 쓰기도 했다. (p. 143)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간에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특별한 증거는 없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이미 매독, 장티푸스, 천연두, 기관지염, 폐렴, 세 차례의 류마티즘 열병을 겪다가 1791년11월에 들어 급작스럽게 쇠락해졌다. 당시 겨우 35세였다. 그는 2주 만에 몸 전체가 부어오르더니 의식불명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는다. 실은 병상에 눕기 시작할때부터 자기 아내 콘스탄체에게 횡설수설하면서 독살설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p. 144)

모차르트는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돼지고기에 종종 감염되는 선모충이 제대로 조리가 안 된 음식에 살아 남아서 인간을 감염시킬 경우 실제로 모차르트가 겪은 것과 유사한 증상이 유발된다. (p. 146)


모차르트의 독살설에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아내가 나쁜 아내라는 증거도 아무것도 없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건강한 경쟁자 였으나 악의적인 소문에 피폐한 최후를 맞이했고, 모차르트 사후 그의 아내가 남편의 작품들을 잘 관리한 덕에 그의 죽음이 그의 명성으로 남게 했음에도 극적인 이야기를 원했던 대중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희곡과 영화의 장면들이 사실처럼 역사에 남게 되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비단 승자만이 아니다.


기자 대피라미드는 그 지역의 재료를 사용한 230만 개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대부분은 평균 2.5톤의 석회암 벽돌이지만, 일부 내부 화강함 벽돌드른 그 무게가 15톤에서 70톤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철기시대 이전 사람들이 어떻게 벽돌들의 이음매가 딱 오차2mm미만이 되도록 그 많은 석회암들을 정확하게 잘라낼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그 암석으로 된 벽돌들을 채석장에서 옮겨 계속 쌓여 올라가던 피라미드의 측면을 따라 끌어올렸는지도 의문이다. (p. 188)

석회암은 작업 시 파편이 튀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300만 개가량되는 벽돌을 생산했을 경우 수백만 개의 파편이나 부서진 벽돌이 생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파편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p. 191)

프랑스 과학자 다비도비츠는 건설 현장보다 아래쪽에 있는 와디에서 위로 옮기려면 힘이 더 많이 듦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화강암벽돌을 조달하기로 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상태에 의문을 품게 됐다. 와디에 갔을 때 그는 거기에서 돌을 채석했거나 깎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부식과 연마라는 유화 과정을 거쳐 부드러운 물결무늬의 표면을 남기는 무른 석회암이 거기서 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가 그 다음 단계로 발견한 것은, 나무틀의 내용물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 벽화에 쓰여 있는 '액체 돌' 이라는 상형문자였다. (p. 192)


모아이 석상의 이동 미스터리처림 이집트 대피라미드의 벽돌에 대한 미스터리도 이미 당대인들이 다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비도비츠는 석회암 가루와 잡석이 와디에서 운송돼 와서 나일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거대한 웅덩이에서 녹여진 다음 나트론과 섞였다는 가설을 세웠따. 나트론은 이집트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었던 천연 소다가루로 미라의 방부제로도 사용되었다. 나일강 물이 증발되고 나면, 제작자들의 손에는 석회석 시멘트 형태가 남게 된다. 이제 그 가루는 바구리들에 담겨 구조물 위로 옮겨져서 기름칠이 칠해진-마르는 동안 달라붙지 말라고-얇은 나무틀에 넣어진다. 이 초기 단계 벽돌들을 이집트의 태양아래 놓고 잘 말리면, 그것들 자체가 다른 벽돌들의 주조를 위한 틀 역할을 한다. 새 벽돌들이 놓일 때마다 벽돌들의 그미한 수축으로 인해 그 사이에 공예적인 이음매 같은 1~2mm의 선이 남게 된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것이 바로 벽돌 사이에 선이 생기게 된 과정이다. 다비도비츠는 실험단계로 넘어가, 이런 방식으로 몇 개의 석회암 벽돌을 만든 다음 피라미드에 보이는 동일한 이음매를 재현했다. 그의 벽돌들은 육안으로 보면 천연 석회암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p. 192)


수천년 전 혹은 수만년전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원시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거대한 구조물들을 보면서 밧줄과 통나무 같은 도구들만 떠올리며 무식한 방법으로 이동시키고 건축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미스터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굉장히 과학을 잘 이용했었음을 많은 유적/유물들이 알려주고 있다. 수천년전 고도로 발달된 제련술의 증거들이 최근 고고학에서 밝혀지고 있고, 피라미드의 인공벽돌 제조법 또한 그들이 화학적 원리를 알았건 몰랐건 간에 여하튼 고대인들은 충분히 과학을 이용하고 있었다. 고대인들을 무식하게 보고 현대인들만 유식하다는 입장에서 보니 고대 유적/유물들이 모두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것이다.


유대-기독교의 문화에서 유대인들이 이 피라미드 건설 현장의 노예였다는 설은 유명하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신분 구조가 성경이나 토라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AD1세기에 활약했던 요세푸스는 BC4세기 헤로도토스의 저서를 자기 책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중요 노선에 따라 역사서를 썼다. BC449년과 BC430년 사이에 이집트를 방문했던 헤로도토스는 대 파리미드의 건설을 지시했던 케옵스 왕(=쿠푸왕)의 이미 훼손된 명성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대부분 머릿속에서 지어낸 쿠푸 왕의 많은 잔인한 이야기를 나열하면서, 그가 허영심을 위한 기념물로 대피라미드를 세우려고 백성들을 노예화시켰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의 윤색은 더욱 치밀하고 복합적으로이루어졌다. (p. 195)

하지만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는 노예가 없었다. 매점 같은 식당 구역에 쌓인 쓰레기 더미는 풍부하고 다양한 식단을 보여주고 있고, 그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수의 묘실들은 노예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존경과 경의의 장례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증거에 따르면, 기자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들은 헌신적이고 자유로운 이집트 노동자들이었음을 알 수있다. (p. 196)


역사에서 윤색을 완전히 거두어낼 수 있을까? 대중들이 학자들처럼 자료 원본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확인해가면 역사서를 읽을 수도 없을진대, 도대체 제대로 된 역사의 진실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고대의 역사서를 쓸 당시에도 이미 마음먹고 왜곡해서 쓴 역사서라면;;; 그나마 내가 선택하고 있는 방법이라면 다양한 역사서를 읽는 것이다. 교차검증이 가능하도록...


'종교재판'이라는 단어에는 늘 '스페인'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스페인 재판소가 종교재판을 집행한 유일한 곳이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실 스페인은 후발주의자 였다. 당시에는 포르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모든 카톨릭 국가에서 종교재판을 실시햇다. 그렇다면, 스페인 종교재판이 그중 제일 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심한 비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16세기 당시 나머지 유럽 지역들이 스페인이 군대와 해상에서 패권을 잡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과 여교황 요안나의 근거없는 낭설을 퍼뜨리던 개신교 선전 운동가들의 파괴적인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p. 198)


나는 종교재판 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그저 유럽 중세시대에 무차별적인 폭력수단으로 종교가 이용되었던 것일뿐 그것이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유럽인들은 '스페인' 을 떠올리나 보다. 스페인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남미에 무슨짓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정도 오명은 감수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스톤헨지의 모양은 본래의 형태가 아니다. 스톤헨지의 큰 입석들의 출처로 보이는 인근의 에이브베리에 있는 환상열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이 두 곳에서 만나고 있는 기념물들이 사실 20세기의 창작물이라고 많은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p. 211)

1934년 마멀레이드 잼 사업을 크게 하던 알렉산더 케일러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에이브베리의 총3.7㎢ 규모의 부지를 그 안의 마을과 함께 통째로 사버렸따. 그리고 그 부지의 5,000년 전 모습을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p. 211)

스톤헨지 부지는 에이브베리보다 규모가 훨씬 작지만, 똑같은 '재구상' 작업을 비록 작은 수준으로나마 거쳤다. 존 컨스터블이 1835년에 이 장소를 그려놓은 그림을 인터넷으로 빠르게 검색해 볼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돌들이 대부분이 붕괴 직전의 상태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스톤헨지가 국내외 관심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자, 1901년에 그곳을 '정돈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움직임은 많은 분야에서 좋은 호응을 받지 못했다. (p. 213)

따라서 우리 앞에 있는 이 기념물은 그것의 수천 년 전의 모습을 20세기의 상상력으로 복원한 결과물이다. (p. 214)


헐. 그야말로 헐. 이었다. 스톤헨지를 모티브로 한 창작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고대 환상 열석 연구드를 하면서 스톤헨지가 빠지는 경우가 있던가? 그런데 지금의 스톤헨지가 재구성된 것이라면 그냥 커다란 돌 덩어리이지 고고학적 의미는 없어진 것 아닌가? 형태가 변한 유적지가 과연 어떤 과거를 알려줄 수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스톤헨지의 위상이 드높기만 한 것을 보면 영국의 태양이 아직은 완전이 지지는 않은 것이리라.


남아메리카를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남아메리카 문화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영향에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는 칠레에서 두드러지고 아르헨티나의 관광객들도 아일랜드식 술집과 음식점들이 많은 것에 놀랄 것이다. 남아메리카와 아일랜드를 묶고 있는 연결성의 기원은 15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스페인과 아일랜드 남부의 카운티들은 강력한 동업 조합들을 결성하였고, 이는 중요도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아일랜드 디아스포라로 이어졌다. 이는 같은 세기에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를 침략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의 뒤를 따라 발생했다. (p. 226~227)


아일랜드는 국가다. 아일랜드는 영국이 아니다. 아일래드와 영국은 굉장히 인접해 있는 섬들이라 나는 같은 국가겠거니 하며 합쳐셔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엄연히 다른 각자의 국가였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한국와 일본처럼. 하지만 아일랜드는 영국에 비해 세계적으로 국가적 위상이 낮은 편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역사는 세계사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국의 근간을 이룬 사람들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었지만, 미국은 미국일뿐인 것으로 여겨진다.


각 역사마다 스페인 침공군들은 잉카나 멕시코 아즈텍인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에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인들이 매우 미개해서 비교적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던 스페인 사람들을 이교도 신들의 현현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진실과 매우 다르다. 실제로 두 침략군들을 스페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조차 과장돼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페인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스페인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당시 아라곤 공국과 카스티야 공국의 표면적으로만 결합된 상태에 있던 독립 공국들의 불안하 동맹이었다. (p. 227)


유럽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가장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국가개념이다. 유럽의 역사는 지금의 국가형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국경선은 세계대전 지나고서 정해진 것이다. 유럽은 한덩어리로 서로 얼키고 설켜서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마을단위의 연합체로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영국에 가면 런던출신 웨일즈출신 이라 하고 이탈리아에 가면 시칠리아출신 로마출신 이라 하고 스페인도 카탈루니아출신 바스크출신 이라고 하지, 영국인 이탈리아인 스페인 이라고 자신들을 표현하지 않는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다 그렇다. 유럽은 땅덩어리 자체도 생각보다 작은데 작은나라들이 또 그렇게나 많은데 그 작은 나라들 안에서도 자신들을 국가의 소속이 아닌 지역출신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국가개념이 약한 만큼 유럽연합이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즈텍의 지도자 몬테주마는 코르테즈를 켓잘코틀의 화신으로 여겼고, 잉카인들은 피사로를 비라코차의 살아있는 현현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 종족 모두 침략자들엥게 금을 퍼부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전혀 없는 데 비해, 이를 반박하는 증거는 많다. 이는 두 사람이 탐욕에 눈이 멀어 그들에게 가한 대대적인 살육을 스페인 역사가들이 은폐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그 일들이 일어나고 수십 년이 흐른 뒤에 등장했다. 더구나 잉카인과 아즈텍인들이 침략자들의 끔찍한 행동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끌리어 그들을 신성시 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p. 229)

약간은 칙칙한 얘기지만 아일랜드의 디아스포라를 유발한 1845년의 감자기근의 원인이 감자 역병균이라는 곰팡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졌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아일랜드에 유입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최근에 연구자들은 그것이 남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되었고, 아일랜드 항구로 거래하러 온 프레인 배에 실려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p. 234)


스페인은 남미를 멸망시켰고, 남미의 곰팡이는 아일랜드를 굶주림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지금 남미에는 로마의 문화였을 테지만 지금은 로마에서 사라진 라틴문화가 자리잡고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잉카와 아즈텍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그들의 억울함은 풀길이 없어 보인다... 일본식민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온갖 왜곡과 오해들이 사실인것처럼 진실로 남아서...


미스터리의 세계사라고 하지만 사실 미스터리 라는 신비스러움 보다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들을 파헤쳐내고 있는 책이었다. 세계사라고 하기엔 영국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들 위주였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나 앞으로도 그닥 중요해보이지 않는 사건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흥미보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는 안타까움과 유럽사가 세계사인 것을 재확인하는 씁쓸함을 주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널리 알려져 있는 역사들이 사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으로서 읽을가치는 충분한 책이었다. 설사 저자의 말도 사실이 아니고 그저 역사적으로 널리 퍼진 스캔들을 모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너무나 확고하게 믿는 지식들이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자세를 갖도록 해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식을 넘어 지혜로 가는 길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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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코드
맹성렬 지음 / 지식여행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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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구체설과 대륙 간 고대 문명 교류가 아틀란티스 진실에 접근하다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왜 2,500년 전에 등장했으며,

고대사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책을 읽기 전 제목만 봤을 때, 떠오른 책은 '다빈치 코드' 였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내용상 연결되는 책은 제카리아 시친의 '지구연대기 시리즈' 였다.

저자는 소설 '다빈치 코드' 처럼 암호를 풀듯 고대유물에 숨어 있는 힌트들을 찾아 아틀란티스 의 진실을 추적한다. 그리고 아틀란티스 의 존재유무를 넘어 구대륙과 신대륙간의 문명확산과 우리가 아는 고대 그 이전에 이미 고도로 발달된 선진문명이 있었음을 증명해내고 싶어한다. 그러한 주장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에 수메르문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제카리아 시친의 주장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저자는 다행히?! 외계인문명전파설을 주장하진 않는다. ㅎㅎ 저자는 과학적 논리와 고대자료를 바탕으로 고대문명의 존재를 주장한다. 시작은 플라톤 에서부터이다.

과학혁명 이전까지 서구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티마이오스>는 세계의 창조와 생성, 천체의 움직임, 인간의 영혼, 4원소설로 보는 세계의 근본 요소와 운동, 감각적 지각, 인간의 몸과 질병 등을 다루었다. 이는 '국가'의 존재 가치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서 최초로 아틀란티스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크리티아스>에서는 구체적으로 '국가'의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그 대표적 모델 중 하나로 꼽은 것이 아틀란티스 였다. (p. 16)

플라톤의 저서들은 지금까지도 철학의 고전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가' 를 비롯해서 다양한 대화편들을 남겼는데, <티마이오스> 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져 왔던 것으로 안다. 라파엘의 그림 '아테네 학당' 에서 플라톤이 들고 있는 책이 <티마이오스> 라고 하는데, 플라톤의 대표적인 책이 왜 <국가> 가 아니라 <티마이오스> 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대충 찾아봤을 때 <티마이오스> 는 자연과학적인 내용을 주로 하고 있는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책의 내용에 오류가 많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중요성이 떨어지고 플라톤의 대표작으로서의 위치도 잃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읽히는 플라톤의 주요 저서들은 '철학' 분야라서 나는 플라톤의 자연과학쪽 저서들에 대해서는 알아볼 생각도 안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보니 <티마이오스> 가 굉장히 궁금해진다. 우주의 지적 설계론을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티마이오스> 에서 초반에 아틀란티스 내용이 나온다니 더욱 ㅎㅎ

저자는 플라톤의 이 책에서 언급된 아틀란티스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리라 주장한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소개한 <티마이오스>에는 두 가지 큰 주제가 담겨 있다. 첫째는 이 세상의 근간이 수학 체계로 이루어져 있어 수학 문제를 풀어 우주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영혼불명 사상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플라톤이 스스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선대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의 사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이는 피타고라스 이다. 수학자, 철학자, 그리고 종교 교단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는 기원전 582년 경에 이오니아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타인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젊은 시절에 이들의 권유로 이집트유학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에서 부지런히 많은 신전을 방문해서 지식을 쌓았다고 알려졌다. 그가 이집트에 머문지 20여 년이 지난 기원전 525년에 페르시아 캄비세스2세가 이집트를 침공했으며 신전에 체류하는 많은 지식인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여기에 피타고라스도 포함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그는 비록 포로였지만 학자로서 대접받았고 칼데아의 과학자들이나 현자들과 12년간 교유했다고 한다. (p. 35,36)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대부분 관련학자들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로 지목받는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에서 대학자로 숭앙받았는데 그가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다듬어진 지구 구체설을 저술로 소개하고 나중에 그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p. 48,49)

 

고대 철학자들/과학자들이 한 이야기를 읽을 때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기원전 그 시절에 이미 지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하학적 기초, 천체의 관측을 통한 다양한 계산들, 어느 종교이든 종교라면 가지고 있는 특성의 핵심사상, 그리고 정체 까지 거의 모든 것들이 이미 그때 다 있었다. 전기가 없고 자동차가 없고 핸드폰이 없다고 그 시대가 지금보다 덜 문명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판이다.

저서를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사상들은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 그나마 많이 알려졌는데, 피타고라스에 대해서는 정말 궁금한만큼 알려진 것이 없어 늘 신비스러운 것 같다. 피타고라스가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주변 문명들의 최신정보를 다 배우고 다닌 사람이었다니... 역시 갑자기 깨우치는 건 없나 보다. 많이 배우는 만큼 많이 깨닫게 되는게 아닐까.

 

 

기원전 2세기경 크라테스의 지도를 보면 구형의 지구에 지중해주변 국이 있는 구대륙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지중해를 중심에 두고 다른 곳은 다 바다라는 인식이 중세까지도 이어졌던 것으로 알았는데, 기원전에 이미 신대륙을 그린 지도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중세는 참...정말... 암흑기다.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과 근대 초기 관련학자들의 견해를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오늘날 주류 학계 일각에서 고대 이집트 학문 수준을 상당히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주류 과학사가들은 고대 이집트와 비교할 때 고대 그리스의 과학기술 수준을 당시의 학자들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그들 문명과 비교해볼 때 고대 이집트 문명 수준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을 여기저기 수도 없이 남겼다. (p. 72,73)

저자는 책에서 자주 주류학자들의 아집을 꼬집는다. 서양중심의 역사관에서 핵심적 고대문명은 고대그리스문명이다. 하지만 그리스와 이집트와 터키는 지척에 있는 사이로 그리스만 딱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왔으며, 사실 그리스는 그중에서는 가장 나중 문명이었다. 만약 이집트와 터키가 유럽으로 인정받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고대사의 역사와 인류문명사의 흐름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자신들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한 역사연구가 아닌 연구를 한다면 참 좋을 텐데...

기원전 1500년경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 핫셉수트가 파견한 선단이 3년 동안 대양 항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p. 129)

최근에는 핫셉수트 시대보다 500여 년 전인 기원전 2000년경 대양 항해가 이루어졌다는 결정적 증거도 나왔다. (p. 136)

토르 헤위에르달의 주장대로라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선왕조 시대인 기원전 3000년 훨씬 이전에 대서양을 건너 남미의 티티카카호까지 다녀온 셈이 된다. 그 정도로 오래전에 이집트인들에게 정말로 이런 항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p. 144)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코카인과 담배성분이 나왔을 때 기존 학설이 흔들렸다고 한다. 기존엔 구대륙과 신대륙 간의 교류는 없다 였는데, 코카인과 담배는 남미에 있던 식물이었기에 남미와 이집트 간의 교류가 없었다면 미라에서 이 성분들이 검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기록으로 아는 고대 그 이전의 고대 시대에 신대륙과 구대륙간의 교류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역사는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서양 한가운데 넓은 지역이 만여 년 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주장은 한때 그 가능성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대서양 해저의 철저한 탐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새롭게 파악된 지질학적 구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판 이론 등에 의하면 플라톤이 묘사한 것처럼 거대한 땅덩이가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p. 156)

아틀란티스 대륙은 신화적 소재였다. 영화나 만화 소설에서 사용해봄직한 판타지적 요소였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없어진 대륙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아틀란티스 가 허구인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꾸준히 찾아낸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다속으로 가라앉은 땅덩이가 아닐 뿐이다. 그렇다면 아틀란티스 대륙이 어디에 있느냐고?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그것이 실제이건 가상이건 관계없이 고대 이집트 신관으로부터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이집트 기록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했을 수도 있지만 코카인 교역과 관련되어 지브롤터 해협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가정한다면 비록 그것이 플라톤에 의해 각색되었다 하더라도 당연히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중남미 또는 남미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언급하던 시기인 기원전 5세기경에 중남미에는 테오티우아칸, 올멕, 고전기 마야 문명이 있었다. 그리고 남미에는 선잉카 문명이 있었다. 이들 문명 또는 그 이후 파생된 문명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어쩌면 1만년 전에 존재했다는 아틀란티스 문명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p. 158)

저자는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이집트 의 기록을 거슬러올라가 아틀란티스 의 실존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그 아틀란티스가 어디에 있었느냐를 찾아내야 할 차례이므로, 고대그리스/고대이집트 문명 못지 않은 문명을 이룩했던 곳, 바로 중남미/남미 문명에서 그 자체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힌트들을 찾아간다.

마야의 천문학자이자 신관들은 태양과 달 그리고 태양계 주요 행성들의 운행을 기록하여 책자로 남겼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와 같은 천문학 서적들은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과 특히 카톨릭 성직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를 주도한 이가 디에고 드 란다 주교였는데 1562년 그의 지시로 대다수의 문헌들이 사라졌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우리는 이런 유형의 문헌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것들은 미신과 악마의 거짓말들에 불과했으므로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엄청나게 안타까워 했고 낙담했다. - (p. 164)

당시의 기록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기록들만으로도 마야의 달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 정밀하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자료들이 있었다면 천문학의 발달이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우주에 대한 정보는 훨씬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문명이 문명을 파괴한다는 것은 결국 문명을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메조아메리카의 피라미드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남미에 피라미드가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앞에서 보았듯 남미에도 피라미드가 있긴 있다. 그것도 꽤 많다. 문제는 너무 오래되어서 그 형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경우처럼 주류 학계에서 쉽사리 공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는 안데스 서쪽에서도 한동안 있어왔다. 남미 해안가를 따라 안데스 기슭에는 많은 피라미드가 존재하지만 최근까지 그것이 피라미드라는 인식이 없었다. (p. 186)

고고학이나 역사학이 인기가 없는 학문분야인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잉카/마야/아즈텍 문명 이름은 들어봤지만 딱 이름까지다. 그 문명들이 얼마나 우수했고 얼마나 오래됐으며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대이집트 피라미드 보다도 더 오래된 것 같은데 인정받지 못하는 피라미드들, 연구되지 못하는 유적들... 그렇게 우리는 문명의 기원을 잘못 알고 있는채로 왜곡된 인식을 물려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이 파괴하고 자신들이 무시하던 문명을 자신들보다 우수하고 자신들보다 먼저였다는 것을 밝혀낼 용감하고 양심적인 학자들이 많이 나와주어야 할텐데...

많은 이가 청동기 문명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갖는다. 우리가 공부한 역사책에 구리합금을 쓰던 미개인들이 보다 단단한 철기를 쓰는 문명인들에게 도태되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수준이 낮아서 구리합금을 고집했던 것으로 보면 오해다. 구리는 여러 측면에서 그들의 실질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생활을 만족시켜주는 최적의 금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구리합금이 당시에 사용했던 철기보다 결코 무르지 않았다. 이른바 철기 시대에 사용했던 철은 단철로 모스 경도가 4~4.5에 불과했으며 이에 비해 당시 사용사던 청동은 모스 경도가 5.5~6정도나 되었다. 이런 경향은 서구에서도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처럼 매우 높은 경도의 철을 사용하게 된 것은 불과 수 세기 전부터인 것이다. 그래서 로마 시대의 보병들이 철기를 사용할 때 장교들은 이보다 훨씬 단단한 고급 제품인 청동제 칼을 차고 다녔다. 청동이 철기로 대치된 것은 단지 철이 훨씬 구하기 쉽고 공정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p. 198)

획일적 사고방식은 여러모로 잘못된 것이 많다. 인류의 발전이 네발 원숭이에서 구부러진 유인원에서 두발로 걷는 인간이 되는 일직선상에 그려진 인류의 발달그림은 잘못된 그림이다. 다양한 인류의 조상들은 동시대에 뒤섞여 살아왔다. 석기-청동기-철기 의 순서대로 역사가 발달된 것처럼 생각했던 것도 잘못된 것이었다. 필요에 의해 동시에 사용가능했고 선택적이었지 그 순서가 발달의 순서와 일치한다고 할 순 없었다. 따라서 고대문명이 지금보다 원시문명일 것이라는 생각도 오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타리카의 '석구'를 만든 이들이 남미에서 왔다는 주장을 소개한 바 있다. 이제 여기에선 그 '남미' 기술이 태평양 저쪽 어디선가 왔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에 태평양 그 어디에서도 이런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는 문명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그 기원은 잊힌 과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p. 219)

새로운 기술은 어딘가에서 배워왔을 것이라고, 그 곳을 찾아가서 새로운 것을 발견 하면 그 기술은 또 어딘가에서 배워왔을 것이라고, 이런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편하고 쉬운 선택적 결정일뿐 결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없다. 메조아메리카와 고대남미문명들은 놀라울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기술들을 갖고 있었고 그 기원 연대조차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대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초고대 문명이 1만년 전 존재했다는 증거들이 산재해있는데 이렇게 계속 묵혀지고 있다는게 의아할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라투스트라가 '농업이 기원전 7000년경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 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에 의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까지도 관련 주류 학계에서는 농업의 기원을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요인에서 찾아왔으며 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탈회윅크에서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최초의 농업이 시작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p. 236)

터키에서 발견된 차탈회위크 와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인류문명사의 순서를 바꿔놓을 것이다. 이미 인류가 모여살기 시작하고 재배/사육을 하고 잉여의 부로 계급이 생기고 종교가 생겼다는 순서는 이 유적으로 인해 완전히 흔들렸다. 농업이후 종교가 아니라 종교 이후 농업이었다. 집단생활 이후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유적 연구 결과에 따라 신석기 혁명은 혁명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발굴 기록에 따르면 각 원형 구조물은 일정 기간 사용되다가 흙으로 메워졌고, 바로 그 위에 비슷한 방식의 구조물이 다시 세워졌다. 특이한 점은 원형 구조물 건축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퇴보했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형 구조물이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도 매우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갈수록 조악해졌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거석, 도상학, 유적지의 전반적 개념과 배치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비슷하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견은 인류 사회의 발전에서 결정적 단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게 해준 아주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농경사회의 도래로 인한 식략의 과잉에 의해 도시가 성립했다는 기존 학설이 수렵 채집 사회가 만든 이 도시의 발견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인구 밀지비에 의한 도시 형성이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위한 대규모 신전 건립과 유지를 위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바로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이어져 농업혁명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떻게 이러한 건축에 필요한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농업이 나타나기 전에 가능했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p. 240, 241)

원시적인 농업은 수렵채취보다 많은 식량을 얻기 힘들었고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쪽이 나았다고 한다. 빙하기에서 간빙기로의 전환시대에 있었기에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식량부족이 농업을 촉발시켰다고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요인들은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이 증명하는 것들에 대한 반론보다는 증거로서 활용될 수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 문화가 티티카카호의 갈대 문화와 매우 유사함에 주목한 바 있다. 그런 교류가 있었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집트 문화영웅 오시리스가 1만5천년 전 활동했다고 했는데 티티카카호 근처 티와나쿠 유적이 이 시기와 대략 맞아떨어진다. (p. 277)

고대의 신구대륙에 고갈 도금법 지식이 공유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콜럼버스 시대 훨씬 이전부터 신구대륙 간 접촉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유력한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p. 280)

구대륙가 신대륙의 건축물, 특히 피라미드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문명 확산론적 관점에서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주장해왔다. (p. 280)

문명 확산론자들이 주장하는 또다른 신·구대륙 간 교류 증거로 금속 죔쇠 사용이 있다. 양 대륙의 석축 벽 건축에 나타나는 또하나의 주목할 만한 유사성은 '돌기양식'을 꼽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터키나 이집트, 그리고 페루 간에는 상호 상징적 연관성이 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물론 주류 학계에선 이런식의 문제 제기도 무시할 것이다. (p. 282,283)

양 대륙의 유사한 유적이나 유물에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게재되어 있으면 그것을 교류의 증거라고 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기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것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라면 상호 연관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형태와 크기의 조형물이 유사한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상호 독립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 (p. 286)

 

 

 

거의 2만여 년 전... 아마도 그 즈음 전 세계는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 상당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검토해본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그랫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옳았다고 판단된다. (p. 295)

 

저자는 중남미/남미 고대 유적의 설명되지 않는 유적들과 고대그리스/이집트/메소포타미아 의 밝혀지지 않은 유적들이 서로 교류했기에 동시대 유사한 발달문명을 공유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이야기한 아틀린티스 이야기는 문장 그 자체로 진실이라기 보다는 당대에 이미 다른 대륙에 다른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문명은 대서양을 건넜든 태평양을 건넜듯 아메리카대륙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즉, 아틀란티스 대륙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

 

 

 

우리는 태평양을 중간에 둔 세계지도에 익숙하다. 그래서 지중해유럽과 중남미 는 멀게만 보인다. 하지만 대서양을 양쪽으로 갈라놓지 않은 세계지도를 봤을때 지중해에서 중남미로 가는 길은 갈만해 보인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겠지만, 고대문명이 서로 교류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충분하다.

300여페이지의 본문 뒤에 붙은 주석과 참고문헌 페이수가 무려 106페이지다.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확인했을지 저자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본업이 공학교수인만큼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기에 허황된 가설을 주장하기 보다는 다양한 근거들로 논리를 세워나가는 내용들이 설득력 있었다. 신화라고 생각했던 트로이도 실존하는 지역이었음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을 보면, 아틀란티스 대륙도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땅속 어디에선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땅속이 저자가 말하는 그곳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보이긴 한다. 흥미로운 주제로 재밌게 읽혀지는 신선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며 들었던 생각중에 하나로 고대 역사의 신비는 아틀란티스 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 에는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실려 있고, 가야의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외국인 공주와 결혼했으며, 신라유물중에 유리공예품과 황금보검은 로마문화와 켈트문화까지 신라에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 교류하기 전에 서양과 닿아있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역사는 여전히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기에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현재를 새로보게 한다. 이 매력적인 학문이 좀더 활발하게 연구되어져서 더 많은 것들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특히, 가장 확실하게 새로운 고대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에 대해서 진척된 연구결과들이 어서 세상에 발표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틀란티스 대륙도 신화에서 역사로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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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파이어
카밀라 샴지 지음, 양미래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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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선과 편견에 대한 시의적절한 응답"

인종주의와 종교적, 정치적 근본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

 

 

2017년에 나온 이 소설이 나오자마자 현지의 다양한 매체에서 '올해 최고의 책' '주목할 책' 읽어야할 책' 등등 찬사를 받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고대 비극 <안티고네> 를 현대판으로 완벽히 재해석했다는 평에서 확 끌렸던 작품이었다. 전에 고대 그리스 비극전집을 읽으며 왜 그 옛날 작품들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기에 현대판에 대한 기대가 저절로 움텄다. 기원전 비극작품들이 인간사회에서 일어날법한 갈등의 최극단 지점까지 몰고간 후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유효한 질문들이었기에 다양한 버전으로 끊임없이 재탄생되고 있는 것을 알기에 또한 더욱 이 작품이 궁금했었다.

<안티고네> 는 연극으로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는 고대그리스비극작품이기도 한데, [운명과 분노] 라는 소설을 읽었을때 남자주인공이 새롭게 쓴 소설 속 희곡을 읽을 때에도 몹시 감탄했던 작품이고 개인적으로도 오래 기억할 계기가 있던 작품인지라 이렇게 새롭게 읽게되어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여전히 묵직하면서 안타까웠다...

<안티고네> 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죽음 후 고향으로 돌아오나 왕권다툼으로 두 오빠는 이미 죽어 있고 왕권은 숙부인 클레온이 차지한 상태였다. 두 오빠중 추방당했던 한 오빠의 시신은 반역자의 시신이라 하여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채 버려져 있었던지라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장례치러준 댓가로 감옥에 갇혀 죽음에 이르고 안티고네를 사랑했던 클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약혼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현재의 정치적 법에 의해 반역자의 시신을 거부하는 것이 옳은가, 가족으로서의 인륜적 예법에 의해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만든 법과 인간이 지켜온 도의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시하는 것이냐를 묻는, 지금도 대답하기 무척 어려운 질문이다.

이스마 의 가족은 파키스탄 출신 영국시민권자다. 하지만, 이스마의 아버지가 테러조직에서 활동하다 사망했고 이로 인해 가족은 힘든 삶을 버텨내야 했다. 이스마가 대학공부를 접고 세탁부로 일하며 키워낸 어린 쌍둥이 동생 아니카와 파베이즈는 영혼의 단짝 같은 사이다. 아니카가 대학생이 되고 파베이즈가 진로를 탐색하기 시작했을 때 이스마에게도 기회가 왔고 미국유학을 떠나게 된다. 아니카는 법대생이 되고 파베이즈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 있을때 아버지의 업적을 제대로 알려주겠다며 한남자가 접근하고 파베이즈는 그에게 급속히 빠져들어 급기야 IS에 가입하러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상이 아닌 현실을 마주했을때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되고 아니카는 파베이즈의 장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카라마트는 파키스탄 출신 영국시민권자다. 하지만, 이슬람종교를 거부하고 영국인으로서의 가치를 최우선에 둔 정치활동으로 내무장관직까지 오른 상류층 인물이다. 무슬림들에게 욕을 먹고 친지들에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그는 영국적 가치가 이슬람 종교보다 더 무슬림들을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에게 하나뿐인 아들 에이먼은 외형적으론 아버지를 빼닮았으면서 내면적으론 섬세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니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니카의 가족사를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정치적 삶과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의 삶 사이에서 고민에 빠지고 그는 다른 무엇보다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

안티고네 - 아니카

폴리네이케스 - 파베이즈

이스메네 - 이스마

클레온 - 카라마트

하이몬 - 에이먼

주요인물들의 이름에서부터 핵심적 갈등까지 소설의 구성은 기가막히게 <안티고네> 비극을 현대판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이스마가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면, 그들은 침묵을 유지함으로써 이스마 쪽에서 무언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더 말하면, 마치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p. 15)

이 소설의 배경은 2015년이다. IS의 폭력이 세상을 흔들고 있던 때였고,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은 어딜가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스마가 유학차 미국비행기를 타려 했을때 영국공항 검문소에서 보낸 긴 시간은 이스마의 처지를 분명히 드러나게 했고, 결국 다음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이스마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다.

이슬람 사원이 가까워지자 에이먼은 사원을 피해가기 위해 길을 건넜다가, 사원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원래 걷던 길로 다시 건너왔다. 영국의 한 언론에서 카라마트를 극단주의자로 낙인찍으려 했을 때, 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가 시달려야만 했던 인종차별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카라마트에게 등을 돌리고 투표를 통해 몰아낸 쪽은, 그가 유권자들을 위해 추진한 온갖 좋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카라마트가 이슬람 사원의 관습보다 교회의 관습을 치켜세우면서 완벽히 계몽된 자의 태도를 내보이고, 영국 무슬림들이 다른 영국 국민들처럼 대우받고 싶다면 그들 스스로 암흑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p. 86)

이슬람 종교를 믿으며 살던 이민자들의 삶도 힘들었지만, 이슬람을 버리고 교회를 선택한 사람의 삶도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한쪽에선 배신자 소리를 듣고 한쪽에선 여전히 의심을 했기에 더욱 열심히 영국적 가치과 교회적 가치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아들 에이먼은 완전한 영국인이었으나 이민자의 아픔에 눈돌릴 수 없었고, 완전한 영국인이었기에 영국적 가치를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믿었던 가치는 같으면서도 달랐고 다르면서도 같았기에 어느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파베이즈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언제나 갈망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갈망은 주로 결핌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은 해가 거듭될수록,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세계가 점점 더 분리되어갈수록 한층 짙어지기만 했다. 자기의 존재가 단순힌 쌍둥이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집안 여자들이 서로 공유하는 온갖 비밀들은 알고 있지만 아버지들이 아들들에게 알려주는 비밀은 하나도 모르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p. 175)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조부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조부모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나가 양육을 책임졌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는 파베이즈에게 생각보다 깊은 상처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상처에 독처럼 스며든 IS모집책 남자는 파베이즈를 단숨에 홀려버렸다.

파룩은 파베이즈가 책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역사를 들려주었다. 이슬람의 부상을 지켜보며 기독교계에서 느꼈던 공포, 천년 동안 유지된 이슬람 패권, 결국 거세당한 내시처럼 도덕적인 삶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린 오스만족과 무굴족에 의해 낭비되어버린 천년의 세월, 그 후 기독교인들이 지난 수세기동안 겪었던 치욕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면서 촉발된 유혈충돌, 즉 '문명화 사업'이라는 인종차별적인 구호 아래 행해진 제국주의와 실제로는 불안정을 초래하는 무의미한 국경과 종속국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경제모델을 바꾸고 있을 뿐이었으면서 그들에게 독립을 '부여'하는 척했던 기만적이고도 잔인한 장난까지.

그가 파베이즈에게 전한 모든 교훈의 핵심에는 '남자가 되는 법' 이 있었다. (p. 177)

칼리프 세계가 그 개인의 죽음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았다.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 나를 대신해 검을 휘둘러주고 묵종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국가를 가진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신이시여, 그것은 혈관에 피가 차오르며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p. 204)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란 파베이즈에게 강인한 남성상과 아버지 또는 형으로써 접근해온 파룩이 알려주는 모든 것들이 파베이즈에는 신세계였다. 파룩의 말로 재구성된 역사는 그럴법했고, '알라신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우월한 존재로 만드셨으니,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해야 마땅하다' 는 코란 구절은 열아홉살 소년에게 갑자기 넘치는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파룩이 말했던 부유하고 평화롭고 이상적인 새로운 국가는, 파베이즈를 기다리고 있다던 그런 유토피아는 없었다.

파샤는 그의 본국인 파키스탄으로 송환될 것입니다. 우리 영국은 평생토록 영국 땅에 등 돌렸던 이들이 죽음의 순간에 이 땅을 더럽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p. 253 - 카라마트)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하면 어떤 것까지 감수할 수 있죠? 당신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게 상대방이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으로 남아주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분명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p. 258 - 아니카)

전, 저보다 아버지가 더 걱정돼요. 그게, 아버지 같은 사람의 위치엥서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사실, 지금 영국 정보는 자국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면 다른 나라로 보내버리는 정부처럼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건 곧 영국 정부가 자기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정부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건 절대 좋게 보일 수가 없어요. 제 주변 사람들도 그런 말을 하기 시작했거요. 혹시라도 아버지 참모들이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아들인 제가 할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평판이 저에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요. (p. 287 - 에이먼)

 

카라마트는 끝까지 영국인으로서 영국법을 최우선에 두었다. 아니카는 쌍둥이 동생의 시신이라도 가족묘에 안장하고 싶었다. 에이먼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셋의 의견차이는 좁혀지기엔 너무 멀어져 있기만 했다.

카라마트는 사진을 들고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내 소중한 아들, 카라마트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로서 느낄 수 있는 호사스러운 감정을 마지막으로 오래도록 만끽했다.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아들, 자신이 지나온 다리들을 불 지르며 하늘에 불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아들. (p. 316)

이 소설의 제목은 홈 파이어 다. 작가는 제목에 대해 'home fire' 는 'keep the home fire burning' 즉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home on fire' 즉 '집이 불에 타다' 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후자의 뜻에서 '집'은 문자 그대로 집일 수도, 가족일 수도, 국가일 수도 있다고 한다. 카라마트는 아들이 불을 지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불에 탄것은 아들의 삶이 아닌 것 같다.

파베이즈 파샤는 제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생전에 그 애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가 무슨 일을 했으며, 시리아에 있는 동안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범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의 누이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봐왔을 그 여자는 그동안 끔찍한 시련을 겪었고, 극심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순간에도 조국이며, 정부며, 약혼자로부터도 외면당했습니다. 감히 누군가를 사랑하려 했다는 죄로 천으로 머리를 가린 상태에서 악담을 들었고, 자기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바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쌍둥이의 시신을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지탄받았으며, 사적인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내무장관의 결정에 대해 전적으로 합법적인 항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매도당했습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혐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국가, 영국이 정말로 그런 국가입니까? 무분멸한 사랑도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유로 말입니다. 쌍둥이가 살아있었을 때, 그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를 설득해서 집으로 데려오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쌍둥이가 사망한 지금, 그 무조건적인 사랑은 영국 정부를 설득해서 시신을 집으로 송환해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죄라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아버지, 말씀해주세요. 대체 무엇이 죄란 말입니까? (p. 323)

에이먼이 아버지 몰래 파키스탄으로 출국하며 한 인터뷰 내용은 카라마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정치적으로도 아버지로서도 에이먼의 선택과 인터뷰는 핵폭탄이었다. 나는 이스마의 뒤늦은 선택에도 아니카의 섣부른 선택에도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다. 나는 카라마트의 정치적 선택에도 에이먼의 순진한 선택에도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선택들은 각각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들은 전부 제각각의 이유로 납득이 되었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대비극 <안티고네> 가 던진 질문들은 현대소설 <홈 파이어> 에서 현실감있게 다시 등장했다. 누구의 선택을 지지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굉장히 긴 고민의 시간을 갖게하는 묵직함은 이 작품을 쉽게 잊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녀야말로 황금 같은 명예를 받아 마땅하지 않아?

이런 소문이 어둠속을 은밀히 떠돌고 있어요.

아버지, 제게는 아버지의 성공보다 더 소중한 재물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들에게 성공하는 아버지의 영광보다

더 자랑스러운 게 어디 있으며, 아버지들에게

성공하는 자식들보다 더 자랑스러운게 어디 있겠어요?

하오니 앞으로는 아버지 말씀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한 가지 생각만 마음 속에 품지 마세요.

누군가 자기만 현명하고, 언변과 조언에서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검증해보며 속이 비어 있음이 드러나지요.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양보할 줄 아는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겨울철 급류 가에서 굽힐 줄 아는 나무들은

그 가지들을 온전히 보존하지만,

반항하는 나무들은 뿌리째 넘어지고 말지요.

마찬가지로 돛의 아딧줄을 당기기만 하고

늦춰주지 않는 사람은 배와 함께 넘어져

용골을 타고 항해를 계속하게 될 거에요.

하오니 노여품을 푸시고 생각을 바꿔 보세요.

저 같은 젊은이도 의견을 말씀드릴 수 있다면,

다 알고 태어나는 것이 단연코 최선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좋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에게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소포클레스 비극전집 (숲 출판사 / 천병희 역) p.123 <안티고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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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버리기로 했다 - 불편한 사람과 상처 없이 멀어지는 관계 정리법
양지아링 지음, 허유영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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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사람과 상처 없이 멀어지는 관계 정리법

상대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헤어짐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심리서들을 종종 읽는다. 읽다보니 시대가 변한것을 조금 느낀다. 몇년전만 해도 심리서들은 위안.위로.격려 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리.결단.나 중심인 듯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본책들에서 더 많이 발견하긴 했다. 이번 책은 타이완 책이다. 아무래도 서양 저자 심리서들은 문화적으로 수용이 잘 안 될때가 있는데, 동양권 심리서들은 공동체중심,가족중심 이라는 공통문화가 있어서인지 마치 국내저자가 쓴 것처럼 위화감 없이 읽혀서 좋다.

"관계에도 분리수거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정리·정돈하는 것과 같다" 라는 관계정리의 해법을 담은 책들 중에서 최광현 저자 책이 참 좋았는데 이 책도 비슷하면서 좀더 부드러운 책이라 잘 읽혔다. '자존감 수업' 이라는 책으로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윤홍균 저자의 추천글을 보면서 왠지 좀더 믿음이 가기도 했다. 내용은 최광현 저자 비슷하고 표현은 윤홍균 저자 비슷한 느낌이랄까.

대부분의 대중심리서들이 그러하듯이 이책에도 많은 사례들이 들어있다. 밍위안, 리홍, 윈팅 등 이름만 낯설뿐 내용은 너무나 익숙해서 대만 사람들도 우리와 굉장히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만족스럽지 않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구속하기만 하는 관계는 감정의 불랙홀이 되어 당신의 자아와 행복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용감하게 잘라내고 그 자리를 비워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관계와 경험이 들어와 당신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당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 배운 개념과 기술을 실생활에서 연습한다면 당신은 미소가 많아지고 시간이 여우로워지며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깨끗한 집뿐 아니라 내면의 차분함 역시 필요하다. 심리적인 공간에 과거의 관계를 쌓아놓지 말라. '참을 수 없는' 관계는 서로의 행복을 가로막을 뿐이다. 인간관계를 대청소하고 이제야말로 내게 맞는 사람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자. (p. 10)

서문에서부터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이런 태도 마음에 든다. 잘못된 죄책감없이 마음의 청소를 하는데 이 책을 활용하라는 저자의 제안이 반갑다. 책에서라도 누군가는 이렇게 분명히 말해줘야 한다. 그런 관계는 끊어버리라고.

우리 사회 전체가 '분리' 를 초조하고 불안한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바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튼튼한 물건도 오래되면 낡고 닳아 없어지는데 하물며 날마다 변하는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인생에서 겪고 넘어가기 마련인 단계마다 생각이 바뀌고 필요한 것이 달라지며, 이것이 인간관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시련이 된다. 관계가 변하는 것은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다. (p. 23)

사람은 변한다. 그게 당연한 거다. 계절이 변하는게 당연한 듯이. 그런데 너와나는 변치 말자고, 우리는 변치 말자고, 네마음은 변치 말라고, 내마음은 안변할거라고 관계에서는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 왜 변했냐고 어떻게 그럴수 있냐는 물음은 잘못된 거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당연한데 죽음을 언급하길 꺼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변하기 마련인데 변함을 언급하길 꺼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심리적 공간을 정리하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내면의 신념을 정리하고 무조건적으로 타인의요구에 맞추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매번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대를 떨쳐낼 용기는 필요하다. 그래도 상대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헤어짐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p. 40)

내 인생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생각해야 한다. 의외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관계에 허덕이고 치이고 힘든 거다. 이기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나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 선택을 책임지는 것도 온전히 내몫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소모시키기만 하는 사람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죄악감' 이다. 죄악감 때문에 차마 인연을 끊거나 상대와 거리를 두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남의 요구를 거절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p. 91)

죄악감은 관계 속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반응이다. 죄악감은 타인의 평가에 너무 연연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죄악감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감정이다. 죄악감이 성립하려면 우선 이 말 속에 담긴 가치판단 기준과 게임의 룰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죄악감을 느끼게 하는 건 어떤 일 자체가 아니며 그 사람이 어떤 관점이나 논리를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은 일이라도 어떤 사회 혹은 환경에 사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죄악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애초에 그것이 죄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죄악감은 사람의 행동과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p. 93~95)

죄악감은 우리가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기존 방법을 고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더 나은 발전을 꿈꾸며 현 상황을 초월해 성장하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죄인' 이라고 자책할 필요 없다.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 (p. 99)

 

'죄악감' 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다. 죄책감 이라고 할 때보다 어감이 뭔가 좀더 '죄' 같고 무거운 느낌이다. 책임의 문제보다 '죄'로 다루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려 한다. 그래서 더욱 '정리' 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인간의 본성으로 타고 나는 감정이 아닌 후천적으로 학습되어 세뇌되어지고 교육되어진 이 죄악감 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떨쳐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포함한 많은 심리서들이 알려준다. '죄'가 아니라고. '죄인' 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 부터 챙기라고. 그래야 일단 살 수는 있다고. 살아야 나아갈 수 있다.

가족(형제나 부모)은 끊을 수 없는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데 가족과의 이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건 아닌지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가족과의 이별에는 절충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바로 상대와 마주치는 횟수를 줄이면서 천천히 거리를 넓히고,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마음속으로 혼자 이별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어느 한쪽이든 손을 놓으면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 없다. 반드시 상대의 동의를얻어야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면, 마은의 문을 닫아걸었다면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도 이미 관계를 끊은 것과 같다. (p. 167~168)

개인중심 문화인 서양과 달리 공동체중심 문화인 동야에서는 특히 가족관계에서 생기는 문제가 많다. 고부갈등, 장서갈등은 사실 약한 갈등이다. 부모자식간의 갈등과 형제자매간의 갈등은 정말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인지조차 못하기 마련이다. 문제가 터졌을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이 갈등의 가장 난점은 변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에 있다. 우정에서 사랑으로 갈수도 없고 부부에서 남남으로 갈수도 없는 관계다. 무엇보다 부모나 형제자매는 죄악감을 심어준 당사자라는 것에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혼자만의 이별이라도 해야 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심리의 문제는 사실 생존의 문제다.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아무 대가 없이 무엇이든 다 가질 수는 없다. 잘라내고 버려야만 새로운 것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관계에서 '취함' 과 '버림' 은 꼭 붙어 다니는 세트 상품과 같다. 억지로 떼어내 둘 중 하나만 사려고 하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용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목청껏 외쳐보자. "내 인생에서 내게 맞는 사람만 남기겠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며, 이런 단호한 용기가 당신을 관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p. 198)

어른아이 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원래 있었던 단어인 것처럼 익숙해진 시대이다. 내면아이 라는 말이 심리학 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책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대이다. 어른이 되었어도 내면에 자리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고, 어른이 되었어도 아이와 같은 어른아이가 있다. 제대로 성숙한 어른은 가능하긴 한 걸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어른으로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성장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질지라도 성숙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행복은 잘라내야 하는 것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유지해야 하는 것을 열심히 회복하는 것이다. 취함과 버림의 균형을 유지하며 인연이란 만남일 뿐 아니라 때로는 이별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길 바란다. 관계가 추억속에서 아름답게 살아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떠나든 남든 당신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야 한다. 인생에서 내게 맞는 사람만 남기고 나를 소모시키는 사람은 잘라내라. 그래야만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p. 200)

행복은 인간의 본능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부자나 명예 보다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행복은 다 다른 모습이다. 사람이 다 다르게 생겼듯이 그들이 원하는 행복도 다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모두 원하는 삶이 있다. 살고 싶은 모습의 삶을 간직하고 있다. 저자는 행복하고 싶다면 집안을 청소하듯 관계도 청소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 청소도구로서 이 책을 읽으며, 책 속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깨끗해진 관계가 어떻게 삶을 변화시켰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사례는 정말 그 자체만으로 큰 힘이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모두 다 와닿을 수도 있지 하나도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례들에서 느껴지는 공감만으로도 이 책은 참 따듯한 책이다. 관계를 끊으라는 차가운 조언을 하는 이 책이 왜 따듯한 책인지는 읽고나면 안다.

정리란 관계의 재정립을 넘어 자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p.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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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의 월든
서머 레인 오크스 지음, 김윤경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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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자라거든요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 속에 포함된 '월든' 을 보는 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의 '월든' 을 다들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월든' 이 1854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니까, 150년도 더 이전의 책이다. 문명 사회를 떠나 외딴 숲속 호숫가에서 자연인으로 살았던 시간들을 써낸 그 책이 벌써 그렇게 오래되었다니... 그 시절 이미 문명사회를 떠나 자연속에서의 삶을 추구했다고 하니... 그보다 더 현란한 사회 속에 사는 우리는 너무 자연을 잊고 있는게 아닐까... 그때처럼 자연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저자는 도시속에서 소로와 비슷한 경험을 이루어내고자 한다. 그렇게 이 책은 도시 속에 살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너무나 멀리 식물과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식물을 가까이 끌어당기에 만들어 주는 책이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숲과 밭과 함께 했고, 직업상 도시로 이사오면서 멀어졌던 자연을 아파트 안에서의 가드닝을 통해 여전히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다. 풀한포기 화분 하나에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1000그루를 훌쩍 넘는 약 550종의 식물이 아파트안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원래의 직업(패션업계, 영화제작 등등)에서 지금의 직업(건강, 웰빙, 소통)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해온 것도 식물의 영향이 큰 듯 하다. 그리고 그동안 식물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해 온 만큼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도 그러한 활동 중의 하나이다.

근처에서 숲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시에서 자연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식물을 실내로 가져오는 것이다. 실내 식물은 내 안에 잠재된 다른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움으로써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준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든 온전한 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내식물은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가 대지를 소중히 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p. 65)

저자는 자연에 있을 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저자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저자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인터뷰들이 책속에 짤막하게 인용되어 있는데, 대부분 힘들었던 삶에서 식물로 인해 어떤 치유를 받았는지 고백하고 있는 글들이다. 마음이 아플때도 몸이 아플때도 식물은 의외로 큰 치유력을 발휘한다. 은은하지만 강하게.

비의학 용어인 '식물맹' 은 1998년 식물학자 제임스 완더시와 엘리자베스 슈슬러가 만든 용어로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을 봐도 알아차라지 못하는 증상'을 일컫는다. (p. 78)

식물맹은 생각 이상으로 우리 삶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식물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면 식물이 우리 삶을 넘어 생태계에 미치는 중요성도 보지 못할 수 있다. 피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예로 환경보호와 정책에 대한 관심과 재정적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정부에서 정한 멸종위기종 중 57퍼센트가 식물이지만 절멸 및 멸종위기종에 배정된 자금 중 식물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비용은 4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p. 80)

 

'식물맹' 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는데, 생각해보니 중요한 단어인 것 같다. 우리 주변엔 식물맹이 정말 많은데 아무도 식물맹이 자신인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이라고는 집안에 화분 몇 개 들여놓고 죽지않을만큼만 겨우 돌보고 있는 나도 식물맹에 속하는 것 같다. 식물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과연 환경보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길가에 꽃이 있는지 가로수잎이 변했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바쁜 일상만 반복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얼마나 생각할 수 있을까? 생태계의 진정한 위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심각할 수 있다. 식물이 멸종하면 생태계는 무너진다. 주변 식물들에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반성을 해본다;;;

원예의 달인이든 초보자든 식물과 호흡을 맞춰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물을 '적극적으로 관찰' 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탈하다 보면 원예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속도를 늦추고 순간을 음미함으로써 마음이 차분해진다. 번잡한 도시에서도 식물을 관찰하다 보면 틈틈이 평온한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식물은 행복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좋은 동지가 되어준다. 우리는 그저 자연을 마음에 담겠다고 결심만 하면 된다. (p. 86)

사실 식물을 키우는 것은 큰 도전은 아니다. 봄이면 꽃화분 하나 들여놓고 싶고 여름이면 시원스런 나무 그늘이 그립고 가을이면 과실이 달린 나무를 보고싶고 겨울이면 설경속의 푸르름을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 들때 그런 생각이 들때 가까운 화원에 가거나 가까운 수목원에 가면 된다. 집안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하지만 식물은 일단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꽃을 보다가 화분을 보다가 작은 것부터 하나둘씩 집안에 들여놓고 하루에 몇분이라도 가만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품에 안기진 못해도 자연을 눈에 담을 수는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식물을 보는 시간은 의외로 마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해준다.

식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순응하며 우리를 도와줄 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처리가 무척 능숙하고 조용하고 우아해서 그 비범한 능력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탓에 우리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식물을 심미성이나 유용성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 세계에 직접 들어가 그 안에 담긴 억겁의 자연 '지식'을 해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식물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식물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지 인지하게 될 것이다. (p. 120)

천연자원을 생각할때 보통 화석연료부터 생각나는 것 같다. 하지만 식물은 천연자원으로서 굉장히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먹거리부터 섬유, 가구, 생활용품, 연료 등등 안 쓰이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자원고갈문제를 이야기할때 식물을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식물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던가? 정말 너무 당연하게 이용하고만 있지 않은가?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물들에게 놀라곤 한다. 그래서 동물보다 사실 식물이 더 신비롭지 않냐고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가 먹여주고 보살펴주지 않아도 식물은 알아서 번식하고 자라고 적응한다. 심지어 극한 환경에서조차도 식물의 생명력은 놀랍다. 식물의 이용가치로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식물 자체의 가치를 잊고 사는 것도 큰 문제이다.

식물은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일으키는' 기적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식물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이는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명백한 메시지이다. 식물은 곧 생명이다. (p. 180)

그렇다. 식물은 생명이다!!! 자연 이라고 말할 때 식물의 위치를 병풍처럼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식물이 정말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발이 달려 돌아다니는 것만 눈에 보이게 움직이는 것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식물은 끊임없이 호흡하고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생.명.체. 다. 식물을 생명체로 인식하고 존중하기 시작하면 자연에 대한 환경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꼭 필요한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지만, 필요할 때 도움을 조금 얻는 것 빼고는 그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드물다. 세상의 모든 실내식물은 절대로 자연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산지에서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해 화원 너머에 있는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는 렌즈가 되어준다. 심지어 조용하고 은근한 방식으로 우리가 더 좋은 지구의 지킴이가 될 수 있도록 자극한다. 이것이 내가 식물에게서 배운 종요한 교훈 중 하나다. (p. 245)

작은 것에서 시작한 호기심과 관심이 얼마나 큰 발견과 깨달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우리는 다양한 사례들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 안에 작은 식물과 함께 살기를 시작하면서 생겨난 관심과 호기심이 지구를 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에게 늘 과도한 강탈을 해오고 있으면서도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고맙다고도 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아예 생각조차 잘 하지 않았다. 자연과 떨어져 사는 도시에서의 삶은 더욱 그러한 태도를 굳어지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콘크리트바닥의 일부 혹은 아파트시멘트벽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을 늘 생각하면 좋겠지만,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 부담스럽다면 일단, 작은 식물부터 가까이두고 찬찬히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음... 일단 우리집 화분들부터 잘 챙겨봐야 겠다;;;

땅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생 견딜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복 재생되는 자연의 후렴구에는 무한한 치유의 힘이 있다.

밤이 끝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의 끝에 봄이 찾아온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레이첼 카슨-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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