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 코드
맹성렬 지음 / 지식여행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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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구체설과 대륙 간 고대 문명 교류가 아틀란티스 진실에 접근하다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왜 2,500년 전에 등장했으며,

고대사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책을 읽기 전 제목만 봤을 때, 떠오른 책은 '다빈치 코드' 였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내용상 연결되는 책은 제카리아 시친의 '지구연대기 시리즈' 였다.

저자는 소설 '다빈치 코드' 처럼 암호를 풀듯 고대유물에 숨어 있는 힌트들을 찾아 아틀란티스 의 진실을 추적한다. 그리고 아틀란티스 의 존재유무를 넘어 구대륙과 신대륙간의 문명확산과 우리가 아는 고대 그 이전에 이미 고도로 발달된 선진문명이 있었음을 증명해내고 싶어한다. 그러한 주장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에 수메르문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제카리아 시친의 주장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저자는 다행히?! 외계인문명전파설을 주장하진 않는다. ㅎㅎ 저자는 과학적 논리와 고대자료를 바탕으로 고대문명의 존재를 주장한다. 시작은 플라톤 에서부터이다.

과학혁명 이전까지 서구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티마이오스>는 세계의 창조와 생성, 천체의 움직임, 인간의 영혼, 4원소설로 보는 세계의 근본 요소와 운동, 감각적 지각, 인간의 몸과 질병 등을 다루었다. 이는 '국가'의 존재 가치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서 최초로 아틀란티스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크리티아스>에서는 구체적으로 '국가'의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그 대표적 모델 중 하나로 꼽은 것이 아틀란티스 였다. (p. 16)

플라톤의 저서들은 지금까지도 철학의 고전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가' 를 비롯해서 다양한 대화편들을 남겼는데, <티마이오스> 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져 왔던 것으로 안다. 라파엘의 그림 '아테네 학당' 에서 플라톤이 들고 있는 책이 <티마이오스> 라고 하는데, 플라톤의 대표적인 책이 왜 <국가> 가 아니라 <티마이오스> 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대충 찾아봤을 때 <티마이오스> 는 자연과학적인 내용을 주로 하고 있는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책의 내용에 오류가 많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중요성이 떨어지고 플라톤의 대표작으로서의 위치도 잃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읽히는 플라톤의 주요 저서들은 '철학' 분야라서 나는 플라톤의 자연과학쪽 저서들에 대해서는 알아볼 생각도 안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보니 <티마이오스> 가 굉장히 궁금해진다. 우주의 지적 설계론을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티마이오스> 에서 초반에 아틀란티스 내용이 나온다니 더욱 ㅎㅎ

저자는 플라톤의 이 책에서 언급된 아틀란티스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리라 주장한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소개한 <티마이오스>에는 두 가지 큰 주제가 담겨 있다. 첫째는 이 세상의 근간이 수학 체계로 이루어져 있어 수학 문제를 풀어 우주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영혼불명 사상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플라톤이 스스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선대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의 사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이는 피타고라스 이다. 수학자, 철학자, 그리고 종교 교단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는 기원전 582년 경에 이오니아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타인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젊은 시절에 이들의 권유로 이집트유학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에서 부지런히 많은 신전을 방문해서 지식을 쌓았다고 알려졌다. 그가 이집트에 머문지 20여 년이 지난 기원전 525년에 페르시아 캄비세스2세가 이집트를 침공했으며 신전에 체류하는 많은 지식인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여기에 피타고라스도 포함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그는 비록 포로였지만 학자로서 대접받았고 칼데아의 과학자들이나 현자들과 12년간 교유했다고 한다. (p. 35,36)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대부분 관련학자들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로 지목받는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에서 대학자로 숭앙받았는데 그가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다듬어진 지구 구체설을 저술로 소개하고 나중에 그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p. 48,49)

 

고대 철학자들/과학자들이 한 이야기를 읽을 때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기원전 그 시절에 이미 지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하학적 기초, 천체의 관측을 통한 다양한 계산들, 어느 종교이든 종교라면 가지고 있는 특성의 핵심사상, 그리고 정체 까지 거의 모든 것들이 이미 그때 다 있었다. 전기가 없고 자동차가 없고 핸드폰이 없다고 그 시대가 지금보다 덜 문명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판이다.

저서를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사상들은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 그나마 많이 알려졌는데, 피타고라스에 대해서는 정말 궁금한만큼 알려진 것이 없어 늘 신비스러운 것 같다. 피타고라스가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주변 문명들의 최신정보를 다 배우고 다닌 사람이었다니... 역시 갑자기 깨우치는 건 없나 보다. 많이 배우는 만큼 많이 깨닫게 되는게 아닐까.

 

 

기원전 2세기경 크라테스의 지도를 보면 구형의 지구에 지중해주변 국이 있는 구대륙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지중해를 중심에 두고 다른 곳은 다 바다라는 인식이 중세까지도 이어졌던 것으로 알았는데, 기원전에 이미 신대륙을 그린 지도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중세는 참...정말... 암흑기다.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과 근대 초기 관련학자들의 견해를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오늘날 주류 학계 일각에서 고대 이집트 학문 수준을 상당히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주류 과학사가들은 고대 이집트와 비교할 때 고대 그리스의 과학기술 수준을 당시의 학자들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그들 문명과 비교해볼 때 고대 이집트 문명 수준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을 여기저기 수도 없이 남겼다. (p. 72,73)

저자는 책에서 자주 주류학자들의 아집을 꼬집는다. 서양중심의 역사관에서 핵심적 고대문명은 고대그리스문명이다. 하지만 그리스와 이집트와 터키는 지척에 있는 사이로 그리스만 딱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왔으며, 사실 그리스는 그중에서는 가장 나중 문명이었다. 만약 이집트와 터키가 유럽으로 인정받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고대사의 역사와 인류문명사의 흐름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자신들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한 역사연구가 아닌 연구를 한다면 참 좋을 텐데...

기원전 1500년경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 핫셉수트가 파견한 선단이 3년 동안 대양 항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p. 129)

최근에는 핫셉수트 시대보다 500여 년 전인 기원전 2000년경 대양 항해가 이루어졌다는 결정적 증거도 나왔다. (p. 136)

토르 헤위에르달의 주장대로라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선왕조 시대인 기원전 3000년 훨씬 이전에 대서양을 건너 남미의 티티카카호까지 다녀온 셈이 된다. 그 정도로 오래전에 이집트인들에게 정말로 이런 항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p. 144)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코카인과 담배성분이 나왔을 때 기존 학설이 흔들렸다고 한다. 기존엔 구대륙과 신대륙 간의 교류는 없다 였는데, 코카인과 담배는 남미에 있던 식물이었기에 남미와 이집트 간의 교류가 없었다면 미라에서 이 성분들이 검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기록으로 아는 고대 그 이전의 고대 시대에 신대륙과 구대륙간의 교류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역사는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서양 한가운데 넓은 지역이 만여 년 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주장은 한때 그 가능성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대서양 해저의 철저한 탐사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새롭게 파악된 지질학적 구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판 이론 등에 의하면 플라톤이 묘사한 것처럼 거대한 땅덩이가 대서양 해저에 가라앉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p. 156)

아틀란티스 대륙은 신화적 소재였다. 영화나 만화 소설에서 사용해봄직한 판타지적 요소였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없어진 대륙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아틀란티스 가 허구인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꾸준히 찾아낸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다속으로 가라앉은 땅덩이가 아닐 뿐이다. 그렇다면 아틀란티스 대륙이 어디에 있느냐고?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그것이 실제이건 가상이건 관계없이 고대 이집트 신관으로부터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이집트 기록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했을 수도 있지만 코카인 교역과 관련되어 지브롤터 해협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가정한다면 비록 그것이 플라톤에 의해 각색되었다 하더라도 당연히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중남미 또는 남미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언급하던 시기인 기원전 5세기경에 중남미에는 테오티우아칸, 올멕, 고전기 마야 문명이 있었다. 그리고 남미에는 선잉카 문명이 있었다. 이들 문명 또는 그 이후 파생된 문명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어쩌면 1만년 전에 존재했다는 아틀란티스 문명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p. 158)

저자는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이집트 의 기록을 거슬러올라가 아틀란티스 의 실존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그 아틀란티스가 어디에 있었느냐를 찾아내야 할 차례이므로, 고대그리스/고대이집트 문명 못지 않은 문명을 이룩했던 곳, 바로 중남미/남미 문명에서 그 자체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힌트들을 찾아간다.

마야의 천문학자이자 신관들은 태양과 달 그리고 태양계 주요 행성들의 운행을 기록하여 책자로 남겼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와 같은 천문학 서적들은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과 특히 카톨릭 성직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를 주도한 이가 디에고 드 란다 주교였는데 1562년 그의 지시로 대다수의 문헌들이 사라졌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우리는 이런 유형의 문헌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것들은 미신과 악마의 거짓말들에 불과했으므로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엄청나게 안타까워 했고 낙담했다. - (p. 164)

당시의 기록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기록들만으로도 마야의 달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 정밀하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자료들이 있었다면 천문학의 발달이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우주에 대한 정보는 훨씬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문명이 문명을 파괴한다는 것은 결국 문명을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메조아메리카의 피라미드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남미에 피라미드가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앞에서 보았듯 남미에도 피라미드가 있긴 있다. 그것도 꽤 많다. 문제는 너무 오래되어서 그 형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경우처럼 주류 학계에서 쉽사리 공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는 안데스 서쪽에서도 한동안 있어왔다. 남미 해안가를 따라 안데스 기슭에는 많은 피라미드가 존재하지만 최근까지 그것이 피라미드라는 인식이 없었다. (p. 186)

고고학이나 역사학이 인기가 없는 학문분야인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잉카/마야/아즈텍 문명 이름은 들어봤지만 딱 이름까지다. 그 문명들이 얼마나 우수했고 얼마나 오래됐으며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대이집트 피라미드 보다도 더 오래된 것 같은데 인정받지 못하는 피라미드들, 연구되지 못하는 유적들... 그렇게 우리는 문명의 기원을 잘못 알고 있는채로 왜곡된 인식을 물려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이 파괴하고 자신들이 무시하던 문명을 자신들보다 우수하고 자신들보다 먼저였다는 것을 밝혀낼 용감하고 양심적인 학자들이 많이 나와주어야 할텐데...

많은 이가 청동기 문명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갖는다. 우리가 공부한 역사책에 구리합금을 쓰던 미개인들이 보다 단단한 철기를 쓰는 문명인들에게 도태되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수준이 낮아서 구리합금을 고집했던 것으로 보면 오해다. 구리는 여러 측면에서 그들의 실질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생활을 만족시켜주는 최적의 금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구리합금이 당시에 사용했던 철기보다 결코 무르지 않았다. 이른바 철기 시대에 사용했던 철은 단철로 모스 경도가 4~4.5에 불과했으며 이에 비해 당시 사용사던 청동은 모스 경도가 5.5~6정도나 되었다. 이런 경향은 서구에서도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처럼 매우 높은 경도의 철을 사용하게 된 것은 불과 수 세기 전부터인 것이다. 그래서 로마 시대의 보병들이 철기를 사용할 때 장교들은 이보다 훨씬 단단한 고급 제품인 청동제 칼을 차고 다녔다. 청동이 철기로 대치된 것은 단지 철이 훨씬 구하기 쉽고 공정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p. 198)

획일적 사고방식은 여러모로 잘못된 것이 많다. 인류의 발전이 네발 원숭이에서 구부러진 유인원에서 두발로 걷는 인간이 되는 일직선상에 그려진 인류의 발달그림은 잘못된 그림이다. 다양한 인류의 조상들은 동시대에 뒤섞여 살아왔다. 석기-청동기-철기 의 순서대로 역사가 발달된 것처럼 생각했던 것도 잘못된 것이었다. 필요에 의해 동시에 사용가능했고 선택적이었지 그 순서가 발달의 순서와 일치한다고 할 순 없었다. 따라서 고대문명이 지금보다 원시문명일 것이라는 생각도 오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타리카의 '석구'를 만든 이들이 남미에서 왔다는 주장을 소개한 바 있다. 이제 여기에선 그 '남미' 기술이 태평양 저쪽 어디선가 왔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에 태평양 그 어디에서도 이런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는 문명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그 기원은 잊힌 과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p. 219)

새로운 기술은 어딘가에서 배워왔을 것이라고, 그 곳을 찾아가서 새로운 것을 발견 하면 그 기술은 또 어딘가에서 배워왔을 것이라고, 이런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편하고 쉬운 선택적 결정일뿐 결코 과학적이라고 볼 수 없다. 메조아메리카와 고대남미문명들은 놀라울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기술들을 갖고 있었고 그 기원 연대조차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대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초고대 문명이 1만년 전 존재했다는 증거들이 산재해있는데 이렇게 계속 묵혀지고 있다는게 의아할 정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라투스트라가 '농업이 기원전 7000년경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 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에 의해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까지도 관련 주류 학계에서는 농업의 기원을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요인에서 찾아왔으며 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차탈회윅크에서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최초의 농업이 시작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p. 236)

터키에서 발견된 차탈회위크 와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인류문명사의 순서를 바꿔놓을 것이다. 이미 인류가 모여살기 시작하고 재배/사육을 하고 잉여의 부로 계급이 생기고 종교가 생겼다는 순서는 이 유적으로 인해 완전히 흔들렸다. 농업이후 종교가 아니라 종교 이후 농업이었다. 집단생활 이후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유적 연구 결과에 따라 신석기 혁명은 혁명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발굴 기록에 따르면 각 원형 구조물은 일정 기간 사용되다가 흙으로 메워졌고, 바로 그 위에 비슷한 방식의 구조물이 다시 세워졌다. 특이한 점은 원형 구조물 건축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퇴보했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형 구조물이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도 매우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갈수록 조악해졌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거석, 도상학, 유적지의 전반적 개념과 배치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비슷하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견은 인류 사회의 발전에서 결정적 단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게 해준 아주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농경사회의 도래로 인한 식략의 과잉에 의해 도시가 성립했다는 기존 학설이 수렵 채집 사회가 만든 이 도시의 발견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인구 밀지비에 의한 도시 형성이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위한 대규모 신전 건립과 유지를 위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바로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이어져 농업혁명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떻게 이러한 건축에 필요한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농업이 나타나기 전에 가능했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p. 240, 241)

원시적인 농업은 수렵채취보다 많은 식량을 얻기 힘들었고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쪽이 나았다고 한다. 빙하기에서 간빙기로의 전환시대에 있었기에 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식량부족이 농업을 촉발시켰다고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요인들은 괴베클리 테페의 유적이 증명하는 것들에 대한 반론보다는 증거로서 활용될 수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 문화가 티티카카호의 갈대 문화와 매우 유사함에 주목한 바 있다. 그런 교류가 있었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집트 문화영웅 오시리스가 1만5천년 전 활동했다고 했는데 티티카카호 근처 티와나쿠 유적이 이 시기와 대략 맞아떨어진다. (p. 277)

고대의 신구대륙에 고갈 도금법 지식이 공유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콜럼버스 시대 훨씬 이전부터 신구대륙 간 접촉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유력한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p. 280)

구대륙가 신대륙의 건축물, 특히 피라미드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문명 확산론적 관점에서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주장해왔다. (p. 280)

문명 확산론자들이 주장하는 또다른 신·구대륙 간 교류 증거로 금속 죔쇠 사용이 있다. 양 대륙의 석축 벽 건축에 나타나는 또하나의 주목할 만한 유사성은 '돌기양식'을 꼽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터키나 이집트, 그리고 페루 간에는 상호 상징적 연관성이 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물론 주류 학계에선 이런식의 문제 제기도 무시할 것이다. (p. 282,283)

양 대륙의 유사한 유적이나 유물에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게재되어 있으면 그것을 교류의 증거라고 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기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것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라면 상호 연관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형태와 크기의 조형물이 유사한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상호 독립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 (p. 286)

 

 

 

거의 2만여 년 전... 아마도 그 즈음 전 세계는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 상당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검토해본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그랫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옳았다고 판단된다. (p. 295)

 

저자는 중남미/남미 고대 유적의 설명되지 않는 유적들과 고대그리스/이집트/메소포타미아 의 밝혀지지 않은 유적들이 서로 교류했기에 동시대 유사한 발달문명을 공유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이야기한 아틀린티스 이야기는 문장 그 자체로 진실이라기 보다는 당대에 이미 다른 대륙에 다른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문명은 대서양을 건넜든 태평양을 건넜듯 아메리카대륙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즉, 아틀란티스 대륙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다.

 

 

 

우리는 태평양을 중간에 둔 세계지도에 익숙하다. 그래서 지중해유럽과 중남미 는 멀게만 보인다. 하지만 대서양을 양쪽으로 갈라놓지 않은 세계지도를 봤을때 지중해에서 중남미로 가는 길은 갈만해 보인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겠지만, 고대문명이 서로 교류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충분하다.

300여페이지의 본문 뒤에 붙은 주석과 참고문헌 페이수가 무려 106페이지다.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확인했을지 저자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본업이 공학교수인만큼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기에 허황된 가설을 주장하기 보다는 다양한 근거들로 논리를 세워나가는 내용들이 설득력 있었다. 신화라고 생각했던 트로이도 실존하는 지역이었음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을 보면, 아틀란티스 대륙도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땅속 어디에선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땅속이 저자가 말하는 그곳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보이긴 한다. 흥미로운 주제로 재밌게 읽혀지는 신선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며 들었던 생각중에 하나로 고대 역사의 신비는 아틀란티스 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 에는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실려 있고, 가야의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외국인 공주와 결혼했으며, 신라유물중에 유리공예품과 황금보검은 로마문화와 켈트문화까지 신라에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 교류하기 전에 서양과 닿아있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역사는 여전히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기에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현재를 새로보게 한다. 이 매력적인 학문이 좀더 활발하게 연구되어져서 더 많은 것들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특히, 가장 확실하게 새로운 고대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에 대해서 진척된 연구결과들이 어서 세상에 발표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틀란티스 대륙도 신화에서 역사로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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