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파이어
카밀라 샴지 지음, 양미래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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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선과 편견에 대한 시의적절한 응답"

인종주의와 종교적, 정치적 근본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

 

 

2017년에 나온 이 소설이 나오자마자 현지의 다양한 매체에서 '올해 최고의 책' '주목할 책' 읽어야할 책' 등등 찬사를 받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고대 비극 <안티고네> 를 현대판으로 완벽히 재해석했다는 평에서 확 끌렸던 작품이었다. 전에 고대 그리스 비극전집을 읽으며 왜 그 옛날 작품들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기에 현대판에 대한 기대가 저절로 움텄다. 기원전 비극작품들이 인간사회에서 일어날법한 갈등의 최극단 지점까지 몰고간 후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유효한 질문들이었기에 다양한 버전으로 끊임없이 재탄생되고 있는 것을 알기에 또한 더욱 이 작품이 궁금했었다.

<안티고네> 는 연극으로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는 고대그리스비극작품이기도 한데, [운명과 분노] 라는 소설을 읽었을때 남자주인공이 새롭게 쓴 소설 속 희곡을 읽을 때에도 몹시 감탄했던 작품이고 개인적으로도 오래 기억할 계기가 있던 작품인지라 이렇게 새롭게 읽게되어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여전히 묵직하면서 안타까웠다...

<안티고네> 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죽음 후 고향으로 돌아오나 왕권다툼으로 두 오빠는 이미 죽어 있고 왕권은 숙부인 클레온이 차지한 상태였다. 두 오빠중 추방당했던 한 오빠의 시신은 반역자의 시신이라 하여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채 버려져 있었던지라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장례치러준 댓가로 감옥에 갇혀 죽음에 이르고 안티고네를 사랑했던 클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약혼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현재의 정치적 법에 의해 반역자의 시신을 거부하는 것이 옳은가, 가족으로서의 인륜적 예법에 의해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만든 법과 인간이 지켜온 도의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시하는 것이냐를 묻는, 지금도 대답하기 무척 어려운 질문이다.

이스마 의 가족은 파키스탄 출신 영국시민권자다. 하지만, 이스마의 아버지가 테러조직에서 활동하다 사망했고 이로 인해 가족은 힘든 삶을 버텨내야 했다. 이스마가 대학공부를 접고 세탁부로 일하며 키워낸 어린 쌍둥이 동생 아니카와 파베이즈는 영혼의 단짝 같은 사이다. 아니카가 대학생이 되고 파베이즈가 진로를 탐색하기 시작했을 때 이스마에게도 기회가 왔고 미국유학을 떠나게 된다. 아니카는 법대생이 되고 파베이즈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 있을때 아버지의 업적을 제대로 알려주겠다며 한남자가 접근하고 파베이즈는 그에게 급속히 빠져들어 급기야 IS에 가입하러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상이 아닌 현실을 마주했을때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되고 아니카는 파베이즈의 장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카라마트는 파키스탄 출신 영국시민권자다. 하지만, 이슬람종교를 거부하고 영국인으로서의 가치를 최우선에 둔 정치활동으로 내무장관직까지 오른 상류층 인물이다. 무슬림들에게 욕을 먹고 친지들에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그는 영국적 가치가 이슬람 종교보다 더 무슬림들을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에게 하나뿐인 아들 에이먼은 외형적으론 아버지를 빼닮았으면서 내면적으론 섬세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니카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니카의 가족사를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정치적 삶과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의 삶 사이에서 고민에 빠지고 그는 다른 무엇보다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

안티고네 - 아니카

폴리네이케스 - 파베이즈

이스메네 - 이스마

클레온 - 카라마트

하이몬 - 에이먼

주요인물들의 이름에서부터 핵심적 갈등까지 소설의 구성은 기가막히게 <안티고네> 비극을 현대판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이스마가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면, 그들은 침묵을 유지함으로써 이스마 쪽에서 무언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더 말하면, 마치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p. 15)

이 소설의 배경은 2015년이다. IS의 폭력이 세상을 흔들고 있던 때였고,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들은 어딜가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스마가 유학차 미국비행기를 타려 했을때 영국공항 검문소에서 보낸 긴 시간은 이스마의 처지를 분명히 드러나게 했고, 결국 다음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이스마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다.

이슬람 사원이 가까워지자 에이먼은 사원을 피해가기 위해 길을 건넜다가, 사원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원래 걷던 길로 다시 건너왔다. 영국의 한 언론에서 카라마트를 극단주의자로 낙인찍으려 했을 때, 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가 시달려야만 했던 인종차별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카라마트에게 등을 돌리고 투표를 통해 몰아낸 쪽은, 그가 유권자들을 위해 추진한 온갖 좋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카라마트가 이슬람 사원의 관습보다 교회의 관습을 치켜세우면서 완벽히 계몽된 자의 태도를 내보이고, 영국 무슬림들이 다른 영국 국민들처럼 대우받고 싶다면 그들 스스로 암흑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p. 86)

이슬람 종교를 믿으며 살던 이민자들의 삶도 힘들었지만, 이슬람을 버리고 교회를 선택한 사람의 삶도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한쪽에선 배신자 소리를 듣고 한쪽에선 여전히 의심을 했기에 더욱 열심히 영국적 가치과 교회적 가치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아들 에이먼은 완전한 영국인이었으나 이민자의 아픔에 눈돌릴 수 없었고, 완전한 영국인이었기에 영국적 가치를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믿었던 가치는 같으면서도 달랐고 다르면서도 같았기에 어느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파베이즈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언제나 갈망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갈망은 주로 결핌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은 해가 거듭될수록,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세계가 점점 더 분리되어갈수록 한층 짙어지기만 했다. 자기의 존재가 단순힌 쌍둥이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집안 여자들이 서로 공유하는 온갖 비밀들은 알고 있지만 아버지들이 아들들에게 알려주는 비밀은 하나도 모르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p. 175)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조부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조부모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누나가 양육을 책임졌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는 파베이즈에게 생각보다 깊은 상처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상처에 독처럼 스며든 IS모집책 남자는 파베이즈를 단숨에 홀려버렸다.

파룩은 파베이즈가 책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역사를 들려주었다. 이슬람의 부상을 지켜보며 기독교계에서 느꼈던 공포, 천년 동안 유지된 이슬람 패권, 결국 거세당한 내시처럼 도덕적인 삶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린 오스만족과 무굴족에 의해 낭비되어버린 천년의 세월, 그 후 기독교인들이 지난 수세기동안 겪었던 치욕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면서 촉발된 유혈충돌, 즉 '문명화 사업'이라는 인종차별적인 구호 아래 행해진 제국주의와 실제로는 불안정을 초래하는 무의미한 국경과 종속국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경제모델을 바꾸고 있을 뿐이었으면서 그들에게 독립을 '부여'하는 척했던 기만적이고도 잔인한 장난까지.

그가 파베이즈에게 전한 모든 교훈의 핵심에는 '남자가 되는 법' 이 있었다. (p. 177)

칼리프 세계가 그 개인의 죽음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았다.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 나를 대신해 검을 휘둘러주고 묵종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국가를 가진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신이시여, 그것은 혈관에 피가 차오르며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p. 204)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란 파베이즈에게 강인한 남성상과 아버지 또는 형으로써 접근해온 파룩이 알려주는 모든 것들이 파베이즈에는 신세계였다. 파룩의 말로 재구성된 역사는 그럴법했고, '알라신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우월한 존재로 만드셨으니,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해야 마땅하다' 는 코란 구절은 열아홉살 소년에게 갑자기 넘치는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파룩이 말했던 부유하고 평화롭고 이상적인 새로운 국가는, 파베이즈를 기다리고 있다던 그런 유토피아는 없었다.

파샤는 그의 본국인 파키스탄으로 송환될 것입니다. 우리 영국은 평생토록 영국 땅에 등 돌렸던 이들이 죽음의 순간에 이 땅을 더럽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p. 253 - 카라마트)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하면 어떤 것까지 감수할 수 있죠? 당신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게 상대방이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으로 남아주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분명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p. 258 - 아니카)

전, 저보다 아버지가 더 걱정돼요. 그게, 아버지 같은 사람의 위치엥서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사실, 지금 영국 정보는 자국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면 다른 나라로 보내버리는 정부처럼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건 곧 영국 정부가 자기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정부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건 절대 좋게 보일 수가 없어요. 제 주변 사람들도 그런 말을 하기 시작했거요. 혹시라도 아버지 참모들이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아들인 제가 할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평판이 저에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요. (p. 287 - 에이먼)

 

카라마트는 끝까지 영국인으로서 영국법을 최우선에 두었다. 아니카는 쌍둥이 동생의 시신이라도 가족묘에 안장하고 싶었다. 에이먼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셋의 의견차이는 좁혀지기엔 너무 멀어져 있기만 했다.

카라마트는 사진을 들고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내 소중한 아들, 카라마트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로서 느낄 수 있는 호사스러운 감정을 마지막으로 오래도록 만끽했다.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아들, 자신이 지나온 다리들을 불 지르며 하늘에 불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아들. (p. 316)

이 소설의 제목은 홈 파이어 다. 작가는 제목에 대해 'home fire' 는 'keep the home fire burning' 즉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home on fire' 즉 '집이 불에 타다' 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후자의 뜻에서 '집'은 문자 그대로 집일 수도, 가족일 수도, 국가일 수도 있다고 한다. 카라마트는 아들이 불을 지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불에 탄것은 아들의 삶이 아닌 것 같다.

파베이즈 파샤는 제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생전에 그 애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가 무슨 일을 했으며, 시리아에 있는 동안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범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의 누이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봐왔을 그 여자는 그동안 끔찍한 시련을 겪었고, 극심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순간에도 조국이며, 정부며, 약혼자로부터도 외면당했습니다. 감히 누군가를 사랑하려 했다는 죄로 천으로 머리를 가린 상태에서 악담을 들었고, 자기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바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쌍둥이의 시신을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지탄받았으며, 사적인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내무장관의 결정에 대해 전적으로 합법적인 항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매도당했습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혐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국가, 영국이 정말로 그런 국가입니까? 무분멸한 사랑도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유로 말입니다. 쌍둥이가 살아있었을 때, 그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를 설득해서 집으로 데려오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쌍둥이가 사망한 지금, 그 무조건적인 사랑은 영국 정부를 설득해서 시신을 집으로 송환해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죄라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아버지, 말씀해주세요. 대체 무엇이 죄란 말입니까? (p. 323)

에이먼이 아버지 몰래 파키스탄으로 출국하며 한 인터뷰 내용은 카라마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정치적으로도 아버지로서도 에이먼의 선택과 인터뷰는 핵폭탄이었다. 나는 이스마의 뒤늦은 선택에도 아니카의 섣부른 선택에도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다. 나는 카라마트의 정치적 선택에도 에이먼의 순진한 선택에도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선택들은 각각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들은 전부 제각각의 이유로 납득이 되었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대비극 <안티고네> 가 던진 질문들은 현대소설 <홈 파이어> 에서 현실감있게 다시 등장했다. 누구의 선택을 지지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굉장히 긴 고민의 시간을 갖게하는 묵직함은 이 작품을 쉽게 잊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녀야말로 황금 같은 명예를 받아 마땅하지 않아?

이런 소문이 어둠속을 은밀히 떠돌고 있어요.

아버지, 제게는 아버지의 성공보다 더 소중한 재물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들에게 성공하는 아버지의 영광보다

더 자랑스러운 게 어디 있으며, 아버지들에게

성공하는 자식들보다 더 자랑스러운게 어디 있겠어요?

하오니 앞으로는 아버지 말씀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한 가지 생각만 마음 속에 품지 마세요.

누군가 자기만 현명하고, 언변과 조언에서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검증해보며 속이 비어 있음이 드러나지요.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양보할 줄 아는것은 수치가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겨울철 급류 가에서 굽힐 줄 아는 나무들은

그 가지들을 온전히 보존하지만,

반항하는 나무들은 뿌리째 넘어지고 말지요.

마찬가지로 돛의 아딧줄을 당기기만 하고

늦춰주지 않는 사람은 배와 함께 넘어져

용골을 타고 항해를 계속하게 될 거에요.

하오니 노여품을 푸시고 생각을 바꿔 보세요.

저 같은 젊은이도 의견을 말씀드릴 수 있다면,

다 알고 태어나는 것이 단연코 최선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좋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에게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소포클레스 비극전집 (숲 출판사 / 천병희 역) p.123 <안티고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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