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28가지 스캔들 테마로 읽는 역사 3
그레이엄 도널드 지음, 이영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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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28가지 스캔들

허위와 날조의 기록부터 추악한 살인사건의 진상까지

역사 속 28가지 미스터리의 진실을 밝힌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가 바뀌면 역사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는지라, 그렇게 뒤바뀌는 역사적 판단 속에서 다시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것들이 어디 한두가지 이겠는가? 그러나 기록이 사라지고 ~카더라 소식만 풍문처럼 전해질때 역사의 어떤 장면들은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대단한 신비적 요소가 있지 않아도 비양심적인 한두명의 의식적인 의도로 당시에 감쪽같이 진실을 묻어 놓으면 후대는 그것을 답이 모호한 역사적 미스터리로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계사는 서양사와 동의어이다. 세계사 라는 역사는 유럽과 북미의 역사이다. 세계사 속에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아시아 의 역사는 없다. 이 책의 원제는 'The Mysteries of History' 이다. 영국의 저술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에서 기존 상식적 역사들과 배치되는 근거들을 밝힌 글이 우리에게는 세계사의 미스터리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서양인이 신기하게 보았던 다른 대륙의 이야기는 사실 그들이 오해한 것들일 뿐이었다. 자신들이 오해한 걸 자신들이 미스터리라고 얘기하며 진실을 밝힌다는 것도 사실 웃픈 현실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지적해낸다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어차피 서양인들이 오해하거나 말거나 다른 대륙에 사는 현지인들은 그들이 오해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실은 이것이라고 말해봤자 서양인들은 들어주지도 믿어주지도 않을테니, 오해한 서양인들 중 누군가가 사실은 이렇다 라고 말해주어야 그나마 들어주고 생각해볼테니 말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잔 다르크를 15세기 초의 여성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니었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전투에 출정한 적도 없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적도 없는 듯 하다. (p.13)


영국인인 저자가 영국와 역사적으로 오랜 숙적 관계인 프랑스의 잔다르크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는 점이 이 책을 시작부터 가볍게 만든다. 아마도 영국내에서 읽힐때는 더 잘 팔렸을 원인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당시 프랑스인들이 처한 시대상황은 영웅이 필요했기에 적절한 인물을 골라 영웅신화를 창조해냈고, 이 영웅신화를 지금도 역사로 배우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그런 영웅신화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서 영웅이 창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드라큘라 백작 부인으로 유명한 바토리가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하는 등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선정적인 판타지일 뿐이다. 바토리는 자신의 재산을 노린 이들의 탐욕과 정치적 조작의 희생양이 되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포함한 몇 개 국어에 능통할뿐 아니라 당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자기분수알기' 를 거부하는 독립적인 여성인 바토리에게 자기 분수를 알게 할 어떤 조치가 내려져야 했다. (p. 23~25)


TV를 잘 보는 편은 아닌데, 일요일 오전에 하는 서프라이즈 라는 프로그램은 종종 본다. 거기서 이 부인의 얘기를 봤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짧은 드라마식으로 보여주는 그 프로그램에서 의외로 많은 반전 상식들을 얻게 되곤 하는데, 티비로 볼때도 못믿을 이야기겠구나 싶었던 것이, 당시 시대에서 너무 뛰어났던 여인을 응징한 설화라는 내용을 읽고보니 더욱 씁쓸해진다.


'닌자' 역시 유럽인들이 그 용어를 만들어낼 때까지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던 말이다. 'Japan'도 실은 중국에서 기원한 지명이었지만, 여행업을 부흥시키고 싶었던 일본 상업 분야에서 일부러 채택하여 사용해왔다. 옛날부터 일본 원주민들은 자기 나라를 니폰Nippon 이나 니혼Nihon으로 불렀다. 둘 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나타내는 동일한 상형문자 日本 의 음독이다. 둘 중에서 일본의 기성 세대는 니폰을, 젊은 세대는 니혼을 선호한다. '재팬'을 빵의 일종으로 여길수도 있다.('재팬' 의 'pan'은 스페인어로 '빵'이라는 뜻이다) 고대에 훨씬 대국이었던 중국은 일본을 작고 순종적이라는 의미에서 '왜 倭'라고 칭했다. 그런데 이 업신여기는 듯한 용어가 야기하는 외교적 문제로 인해, 중국은 왜를 버리고 일출을 뜻하는 중국어 '지푼Jihpun' 을 선호하게 된다. 이 용어에는 '해가 떠오르는 땅'이라는 시적인 의미가 가미돼 있다. 당시 중국과 교역하던 서양인들은 일본에 대해 왜나 지푼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p. 38)


일본이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섬이었기에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 되었는데... 그 위치가 조금만 더 남쪽이거나 서쪽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태양' 신의 후예로 여기지 않게 되었을까? 일본 지명에 대한 이야기는 '닌자' 미스터리를 시작하는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라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내게는 일본 지명 자체가 미스터리다. 너무 자만심 가득한 이름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닌자' 는 <두 번 사는 인생> (1964) 이라는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여 19세기 서구 영어 사용자층이 만들어낸 말이다. '닌자' 의 이미지도 물론 서양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일본에서도 진짜 자객들은 신무기인 총이나 폭탄이 등장하자마자 이것들을 바로 주요 무기로 선택했다고 한다. 검은옷을 입고 지붕을 날아다니며 검과 표창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라테 가 포악한 사무라이의 대나무 갑옷을 뚫을 수 있도록 일본 봉건 시대에 개발되었다는 설도 사실이 아니다. 당시에는 사무라이의 갑옷도 보강된 가죽과 금속판을 소재로 만들어졌고, 가라테도 일본 초기에 개발된 무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무술은 당나라(618~907) 소림사 승려들이 고대 독립국 류큐 왕국의 섬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소개되어 수 세기 동안 '중국 공수도'로 알려져 왔다. 일본 교육부가 1922년에 오키나와의 무예 고수 후나코시를 초빙하여 무예 시범을 보이게 하자, 일본은 이 중국의 맨손 무술에 열광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적대 관계가 지속되어 왔기에, 일본인들은 이 새로운 취미의 명칭을 중국과 연관이 없어 보이게 하려고 '맨손' 이라는 뜻의 가라테로 바꾸기로 했다. (p. 43)


가라테의 기원이 중국무술이다 라는 얘기를 중국학자나 한국학자가 했다면 일본이 득달같이 일어나 반기를 들었을 테지만, 그들이 선망하는 영국인이 말했기에 아마도 아무런 대꾸 없이 무반응으로 이 책이 읽히게 되겠지 싶다. 일본에서 이 책이 읽힌다면 말이다.


마르코 폴로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은 이 늙은 허풍재이와 그의 여행기이자 회고록인 <백만 가지 이야기>(보통 동방견문록 으로 불린다)로부터 전해진 것들이다. 초기 회의주의자들은 이 제목을 <백만 가지 허풍>으로 바꾸기도 했다. 전체 원고 중 18개 문장만이 1인칭으로 전달되는 이 원고가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폴로에게 큰돈을 벌어다 주었으며, 아직도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랍다. (p. 79)

실제로 폴로 집안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멀리 갔다고 쳐도, 칸을 알현한 최초의 유럽인 혹은 이탈리아인은 그들이 아니었다. 폴로가 태어나기 8년전인 1246년에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출신인 지오반니 다 피안 델 카르핀이 이미 교황 인노첸시오4세의 친서 서신을 가지고 징기스칸의 손자 귀위크 칸을 알현한 적이 있다. 귀위크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라는 카르핀의 청을 거절하면서, 오히려 교황과 모든 서역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기대한다고 답했다. 그런 다음 귀위크는 인노첸시오4세가 불분명하게 이해하는 용어가 없도록, 몽고어, 아랍어, 라틴어로 사본을 만든 편지와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 마르코가 태어난 해인 1254년에는 플랜더스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루부룩의 윌리엄이 바투 칸 과 몽케 칸 을 만난 뒤 40쪽 짜리 책인 <루부룩의 윌리엄 동방 여행기> 를 펴냈다. 이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직도 중세 지리학 문헌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은 이 책에서 재정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폴로가 출간에 도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p. 81)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대해 왜 의심을 품어보지 않았나? 서양인들이 보고싶은 데로 보고 판단하고 싶은데로 판단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도 높은 책이었던 그 책에 대해 내용을 제대로 보기는 했던가? 책 내용이 뭔지도 모른채, 그저 중국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으로 마르코 폴로를 그가 쓴 책인 동방견문록이 역사적 사료인 것처럼 배우지 않았나?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방문한 적도 없다는데?!


폴로가 칸과 교황을 중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중국 쪽이나 바티칸 쪽에 그 접촉을 확인해 주는 기록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양저우시의 기록에도 그의 통치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가 중국의 주변을 여기저기 여행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조차 심각한 의문점들을 제기한다. 그가 여행을 다녔다는 지역들을 가기 위해 소요된 시간이, 이미 알려져 있는 거리나 다른 이들이 충분히 입증한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17년 동안 머물렀다는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칸의 영토에서 사용되던 언어에 친숙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외교적 논의를 이끌었을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책 안에서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명칭들을 사용하지 않고 페르시아어 명칭들만을 가용하고 있다. 중국의 중요 지역들의 위치와 관련하여 그가 알고 있던 지식에도 허점이 있다. 그 기간의 어떤 중국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르코 폴로가 그 나라 땅을 밟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많은 역사가들은 폴로가 흑해보다 더 멀리 나간 적이 없으며, 흑해 근해에서 동방국들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 거기서 만난 이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교황청은 모든 이가 사망할 때 그들 재산의 1%를 거둘 권한이 있었다.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이 눈을 희번덕이며 그의 모든 재산목록을 상세하게 작성해두었는데 그 꼼꼼한 목록 가운데 그 주인을 중국과 연관시켜 주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중세의 유럽과는 매혹적으로 다른 중국에서 17년을 보냇으면서, 어떻게 중국 물건을 하나도 집에 안 가져올 수 있었는지 상상이 가는가? (p. 82~85)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바티칸 기록에 중국과 왕래했던 폴로 이전 사람의 기록은 있어도 중재자로 많은 일을 했다던 폴로의 이름은 바티칸 기록에도 전혀 없는데, 왜 폴로 혼자 주장한 그 책이 아무런 증거도 확인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걸까? 역사는 승자가 보고싶은 것만 보여주려 한다. 주류는 그런 것이다. 그 주류에 휩쓸리지 않는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자들의 자성을 기대해 볼 뿐...


미국인들은 아직도 도시 이름에서 우주 비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만큼 이 인물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지만 그는 아메리카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 따라서 이런 현상은 의아하기만 하다. (p. 87)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의 위임을 받아 항해를 떠났던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남아메리카 북쪽에 닿았다. (p. 88)

지명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인물은 좀 덜 알려진 부유한 스리스틀 상인 로버트 아메리크 이다. 아메리크는 1497년5월에 존 캐봇이 래브라도에 도착했을 때 타고 간 마테오 선을 후원했다. 베스푸치 보다 2년 먼저 신대륙에 도착한 캐봇은 북아메리카 해안선을 탐사했다. 따라서 신대륙의 지명은 오랜 전통에 따라, 캐봇의 후원자인 로버트 아메리크의 성이 붙여진 것이다. 지명을 정하는 전통을 살펴보는 것이 이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는 탐헌가나 후원자의 이름이-성이 아닌- 지명이 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초반에 헨리 허드슨이 현재의 뉴욕이 된 지역에서 새로운 강을 발견했을 때, 그 강은 헨리강이 아니라 허드슨강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아메리카 지명의 영예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자격없는 어깨에 올라간다면, 신대륙은 아메리카가 아닌 베스푸치로 불려야 될 것이다. (p. 89)

진짜 미스터리는 어떻게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에 대한 모든 영예를 거머쥐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당시 영국과 신흥국 미국 사이에 대서양을 가로질러 피어오르던 적대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1775년과 1783년 사이의 전쟁이 끝난 후(미국 독립전쟁), 미국은 영국과 관련된 사람이나 일을 모두 피했다. '마스터' 같은 단어가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보스'에 자리를 내주고, 흰 가발을 쓰고 대중앞에 나설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은 언어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개심의 대상이되었다. 혁명 후 미국은 시베리아인, 일본 원주민, 바이킹 등의 발견을 등한시하며, 영국인이 아닌 콜럼버스와 영국의 지원을 받았던 존 캐벗 사이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주인공을 결정하려 했다. 승자는 미국 해안 근처에도 가지 못한 콜럼버스가 되었고, 독립전쟁을 통해 혐오한는 영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게 된 미국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콜럼버스의 영토, 콜럼비아 라고 불렀다. (p. 93)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섬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노예로 전락시킨 죄로 족쇄를 차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콜럼버스의 잔학 행위들이 알려지가, 그의 명예가 허울을 벗게 되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콜럼버스의 기념일에 실시하는 행사가 꾸준하게 취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뉴욕 시민들은 센트럴 파크에서 콜럼버스 동상을 없애달라고 유욕시장에게 요청하는 상당히 많은 시위들을 벌였다. (p. 95)


아메리카 대륙이 미지의 땅으로 불리던 시절에도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사람들과 교류하던 구대륙의 민족들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과 미국의 패권은 자신들의 대륙과 그 대륙을 발견한 역사를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으로만 채워놓았다. 콜럼버스도 베스푸치도 미국땅은 밟은적이 없다. 하지만 독립한 신생국이 선택한 두 이름은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아메리카 가 아니라 베스푸치 (혹은 여성형으로 베스푸치아?) 로 불렸을 수 도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좀 웃긴다. 선택한 역사만 진짜 역사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것 자체가 웃긴 상황이긴 하지만...


기원전 338년의 기록에 보면, 베이징의 황제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전시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호주의 동부 해안선 지도가 그려져 있는 2,000년 된 중국 화병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수 있듯, 고대 중국인들도 호주를 자주 방문했다. 중국에서 호주를 본격적으로 처음 탐사한 것은 1422년 정화장군에 의해서였다. 이 중국인들이 오기 5,000년 전에 이미 아시아와 다른 많은 지역에서 사냥꾼 겸 상인들이 자기 나라의 사냥견들을 데리고 들어왔으며, 그중 야생으로 도주한 일부 개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딩고로 진화했다. 유럽인들이 들어온 것은 한참 후였다. (p. 98)

쿡이 용감한 항해자였고 꼼꼼한 지도 제작자였다는 사실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호주 발견에 대한 영예를 얀스존으로부터 빼앗아 갔는지는 미스터리이지 않은가? 당시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자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역사서들 안에 그저 '요리하듯' 쿡을 최초의 발견자 자리에 집어넣고, 네덜란드인인 얀스존은 빼버린 것이다. (p. 101)


호주를 발견한 사람이 제임스 쿡 이라는 영국인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는데, 호주 역시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들과 교류하던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도 제임스 쿡은 아니라는데.. 그들 자체의 역사보다 그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 당시 패권국의 누군가여야 했다는 사실은 그 어느 발견자들의 이름을 봐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그러한 역사적 명예?! 조차도 가져야 했나 보다. 승자들은.


'걸어가는 모아이'가 나오는 노래가 여러 곡 있었는데, 뱃노래 같은 노동요로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동안 박자와 리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라파누이의 언어에는 심지어 '다리 없이 걷기'를 의미하는 '네케네케'라는 표현도 있다. 흥미롭게도 마오리 언어에서 '네케'는 뱀을 의미한다. 민족학자 겸 모험가인 토르 헤예달이 레오나르도 하오아 파코미오 라는 섬 주민에게 '네케네케'의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일어서서 양팔은 옆으로 펼치고 몸의 모든 부분과 무릎을 꽉 붙인 채 심술궂은 펭귄처럼 약 2.5cm씩 몸을 흔들며 움직였다. 파코미오는 정상적인 자세로 돌아온 후, 그것이 그 말이 의미하는 동작이라고 하더니, '이 세상에 누가 그렇게 걷고자 하겠어요' 라고 되물었다. (p. 126)


그런 모습으로 걸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모아이 석상이다. 해변가에 늘어서 있는 모아이 석상의 미스터리를 푼다고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그러다 2011년 두 학자가 원주민 들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어 그 모습으로 석상을 옮기는 실험을 했고, 그렇게 미스터리는 풀렸다. 석상을 세워 양쪽에 밧줄을 연결해 마치 석상이 뒤뚱거리며 걷듯이 앞으로 이동시킬 수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밝혀내지 못하면 미스터리이고 원주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미스터리의 답은 절대 모를 것이라는 오만이 이토록 오해 석상의 이동방법을 미스터리로 남겨두었던 것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1670년에 탄생시킨 초대형 베스트셀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쓸때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기초로 삼았다. 만일 토머스 노스 경이 1579년에 이 <영웅전>의 번역본을 간행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대중문화 속에서 그렇게 잘못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p. 135)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대작이고 대부분이 엄청나게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많은 부분을 고대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랬고 리어왕도 그랬다. 또 다른 작품들도.... 물론, 신화나 설화 몇줄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셰익스피어 혼자서 창작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사실 그 능력이 좀 작게 느껴지기는 한다는 말이다.


이집트 독사에 물리면 죽음이 빠르고 편하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클레오파트라처럼 평온하게 누워있을 수 없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2~8시간을 보내야 한다. 따라서 그녀가 자살했다면 아마 다른 수단을 썼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통치자들은 모두 마지막 순간이 오면 먹을 수 있도록 효과가 빠른 독을 가까이에 간직했다. 클레오파트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발에 꽂는 머리핀에 독약을 넣어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독사에게 물렸다는 터무니 없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석상을 과감하게 로마 전역에 전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녀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고, 거기에 이집트 코브라가 그녀의 오른팔뚝 위를 두르고 올라갔다가 그녀의 가슴께로 머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의 동상을 만들었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라, 옥타비아누스가 굴복시킨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엉뚱한 쪽으로 생각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 의해 죽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내리자, 옥타비아누스 일당은 그런 여세를 계속 몰아갈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p. 140)


로마가 이집트를 굴복시켰을때의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그대로 우리까지 전수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굴복시킨 자가 마음대로 왜곡시킨 그 모습 그대로 이야깃거리로서 역사를 대하고 있는 만큼 이집트나 로마나 다 우리에겐 너무 먼 역사라서일까? 하지만, 그 역사를 지지기반으로 삼은 세력들이 세계를 쥐어잡고 있으므로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으면 안되지 않을까?


모차르트가 음악적 천재라는 것은 아마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그의 교향곡 중 절반이 8세에서 19세 사이에 지어졌다. 한편 그는 배설물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광적인 변태여서, 그와 비슷한 성향인 어머니와 교환한 편지 내용들은 여기서 언급되거나 인용될 수 없을 정도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뮤지크(소야곡)를 작곡해 낸 똑같은 머리가 자신의 B플랫 장조 캐논 231번에는 '레크 미히 임 아르슈 Leek mich im Arsch'(내 엉덩이를 핥아줘) 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정도만 말하고 싶다. 여기에 밝힐 수 없는 제목으로 이 곡의 후속곡을 쓰기도 했다. (p. 143)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간에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특별한 증거는 없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이미 매독, 장티푸스, 천연두, 기관지염, 폐렴, 세 차례의 류마티즘 열병을 겪다가 1791년11월에 들어 급작스럽게 쇠락해졌다. 당시 겨우 35세였다. 그는 2주 만에 몸 전체가 부어오르더니 의식불명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는다. 실은 병상에 눕기 시작할때부터 자기 아내 콘스탄체에게 횡설수설하면서 독살설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p. 144)

모차르트는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다. 돼지고기에 종종 감염되는 선모충이 제대로 조리가 안 된 음식에 살아 남아서 인간을 감염시킬 경우 실제로 모차르트가 겪은 것과 유사한 증상이 유발된다. (p. 146)


모차르트의 독살설에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아내가 나쁜 아내라는 증거도 아무것도 없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건강한 경쟁자 였으나 악의적인 소문에 피폐한 최후를 맞이했고, 모차르트 사후 그의 아내가 남편의 작품들을 잘 관리한 덕에 그의 죽음이 그의 명성으로 남게 했음에도 극적인 이야기를 원했던 대중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희곡과 영화의 장면들이 사실처럼 역사에 남게 되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비단 승자만이 아니다.


기자 대피라미드는 그 지역의 재료를 사용한 230만 개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대부분은 평균 2.5톤의 석회암 벽돌이지만, 일부 내부 화강함 벽돌드른 그 무게가 15톤에서 70톤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철기시대 이전 사람들이 어떻게 벽돌들의 이음매가 딱 오차2mm미만이 되도록 그 많은 석회암들을 정확하게 잘라낼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그 암석으로 된 벽돌들을 채석장에서 옮겨 계속 쌓여 올라가던 피라미드의 측면을 따라 끌어올렸는지도 의문이다. (p. 188)

석회암은 작업 시 파편이 튀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300만 개가량되는 벽돌을 생산했을 경우 수백만 개의 파편이나 부서진 벽돌이 생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파편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p. 191)

프랑스 과학자 다비도비츠는 건설 현장보다 아래쪽에 있는 와디에서 위로 옮기려면 힘이 더 많이 듦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화강암벽돌을 조달하기로 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상태에 의문을 품게 됐다. 와디에 갔을 때 그는 거기에서 돌을 채석했거나 깎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부식과 연마라는 유화 과정을 거쳐 부드러운 물결무늬의 표면을 남기는 무른 석회암이 거기서 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가 그 다음 단계로 발견한 것은, 나무틀의 내용물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 벽화에 쓰여 있는 '액체 돌' 이라는 상형문자였다. (p. 192)


모아이 석상의 이동 미스터리처림 이집트 대피라미드의 벽돌에 대한 미스터리도 이미 당대인들이 다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비도비츠는 석회암 가루와 잡석이 와디에서 운송돼 와서 나일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거대한 웅덩이에서 녹여진 다음 나트론과 섞였다는 가설을 세웠따. 나트론은 이집트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었던 천연 소다가루로 미라의 방부제로도 사용되었다. 나일강 물이 증발되고 나면, 제작자들의 손에는 석회석 시멘트 형태가 남게 된다. 이제 그 가루는 바구리들에 담겨 구조물 위로 옮겨져서 기름칠이 칠해진-마르는 동안 달라붙지 말라고-얇은 나무틀에 넣어진다. 이 초기 단계 벽돌들을 이집트의 태양아래 놓고 잘 말리면, 그것들 자체가 다른 벽돌들의 주조를 위한 틀 역할을 한다. 새 벽돌들이 놓일 때마다 벽돌들의 그미한 수축으로 인해 그 사이에 공예적인 이음매 같은 1~2mm의 선이 남게 된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것이 바로 벽돌 사이에 선이 생기게 된 과정이다. 다비도비츠는 실험단계로 넘어가, 이런 방식으로 몇 개의 석회암 벽돌을 만든 다음 피라미드에 보이는 동일한 이음매를 재현했다. 그의 벽돌들은 육안으로 보면 천연 석회암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p. 192)


수천년 전 혹은 수만년전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원시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거대한 구조물들을 보면서 밧줄과 통나무 같은 도구들만 떠올리며 무식한 방법으로 이동시키고 건축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미스터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굉장히 과학을 잘 이용했었음을 많은 유적/유물들이 알려주고 있다. 수천년전 고도로 발달된 제련술의 증거들이 최근 고고학에서 밝혀지고 있고, 피라미드의 인공벽돌 제조법 또한 그들이 화학적 원리를 알았건 몰랐건 간에 여하튼 고대인들은 충분히 과학을 이용하고 있었다. 고대인들을 무식하게 보고 현대인들만 유식하다는 입장에서 보니 고대 유적/유물들이 모두 미스터리하게 보이는 것이다.


유대-기독교의 문화에서 유대인들이 이 피라미드 건설 현장의 노예였다는 설은 유명하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신분 구조가 성경이나 토라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AD1세기에 활약했던 요세푸스는 BC4세기 헤로도토스의 저서를 자기 책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중요 노선에 따라 역사서를 썼다. BC449년과 BC430년 사이에 이집트를 방문했던 헤로도토스는 대 파리미드의 건설을 지시했던 케옵스 왕(=쿠푸왕)의 이미 훼손된 명성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대부분 머릿속에서 지어낸 쿠푸 왕의 많은 잔인한 이야기를 나열하면서, 그가 허영심을 위한 기념물로 대피라미드를 세우려고 백성들을 노예화시켰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의 윤색은 더욱 치밀하고 복합적으로이루어졌다. (p. 195)

하지만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는 노예가 없었다. 매점 같은 식당 구역에 쌓인 쓰레기 더미는 풍부하고 다양한 식단을 보여주고 있고, 그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수의 묘실들은 노예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존경과 경의의 장례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증거에 따르면, 기자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들은 헌신적이고 자유로운 이집트 노동자들이었음을 알 수있다. (p. 196)


역사에서 윤색을 완전히 거두어낼 수 있을까? 대중들이 학자들처럼 자료 원본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확인해가면 역사서를 읽을 수도 없을진대, 도대체 제대로 된 역사의 진실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고대의 역사서를 쓸 당시에도 이미 마음먹고 왜곡해서 쓴 역사서라면;;; 그나마 내가 선택하고 있는 방법이라면 다양한 역사서를 읽는 것이다. 교차검증이 가능하도록...


'종교재판'이라는 단어에는 늘 '스페인'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스페인 재판소가 종교재판을 집행한 유일한 곳이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실 스페인은 후발주의자 였다. 당시에는 포르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모든 카톨릭 국가에서 종교재판을 실시햇다. 그렇다면, 스페인 종교재판이 그중 제일 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심한 비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16세기 당시 나머지 유럽 지역들이 스페인이 군대와 해상에서 패권을 잡는 것을 싫어했다는 사실과 여교황 요안나의 근거없는 낭설을 퍼뜨리던 개신교 선전 운동가들의 파괴적인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p. 198)


나는 종교재판 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그저 유럽 중세시대에 무차별적인 폭력수단으로 종교가 이용되었던 것일뿐 그것이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유럽인들은 '스페인' 을 떠올리나 보다. 스페인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남미에 무슨짓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정도 오명은 감수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스톤헨지의 모양은 본래의 형태가 아니다. 스톤헨지의 큰 입석들의 출처로 보이는 인근의 에이브베리에 있는 환상열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이 두 곳에서 만나고 있는 기념물들이 사실 20세기의 창작물이라고 많은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p. 211)

1934년 마멀레이드 잼 사업을 크게 하던 알렉산더 케일러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에이브베리의 총3.7㎢ 규모의 부지를 그 안의 마을과 함께 통째로 사버렸따. 그리고 그 부지의 5,000년 전 모습을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p. 211)

스톤헨지 부지는 에이브베리보다 규모가 훨씬 작지만, 똑같은 '재구상' 작업을 비록 작은 수준으로나마 거쳤다. 존 컨스터블이 1835년에 이 장소를 그려놓은 그림을 인터넷으로 빠르게 검색해 볼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돌들이 대부분이 붕괴 직전의 상태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스톤헨지가 국내외 관심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자, 1901년에 그곳을 '정돈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움직임은 많은 분야에서 좋은 호응을 받지 못했다. (p. 213)

따라서 우리 앞에 있는 이 기념물은 그것의 수천 년 전의 모습을 20세기의 상상력으로 복원한 결과물이다. (p. 214)


헐. 그야말로 헐. 이었다. 스톤헨지를 모티브로 한 창작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고대 환상 열석 연구드를 하면서 스톤헨지가 빠지는 경우가 있던가? 그런데 지금의 스톤헨지가 재구성된 것이라면 그냥 커다란 돌 덩어리이지 고고학적 의미는 없어진 것 아닌가? 형태가 변한 유적지가 과연 어떤 과거를 알려줄 수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스톤헨지의 위상이 드높기만 한 것을 보면 영국의 태양이 아직은 완전이 지지는 않은 것이리라.


남아메리카를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남아메리카 문화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영향에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는 칠레에서 두드러지고 아르헨티나의 관광객들도 아일랜드식 술집과 음식점들이 많은 것에 놀랄 것이다. 남아메리카와 아일랜드를 묶고 있는 연결성의 기원은 15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스페인과 아일랜드 남부의 카운티들은 강력한 동업 조합들을 결성하였고, 이는 중요도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아일랜드 디아스포라로 이어졌다. 이는 같은 세기에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를 침략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의 뒤를 따라 발생했다. (p. 226~227)


아일랜드는 국가다. 아일랜드는 영국이 아니다. 아일래드와 영국은 굉장히 인접해 있는 섬들이라 나는 같은 국가겠거니 하며 합쳐셔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엄연히 다른 각자의 국가였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한국와 일본처럼. 하지만 아일랜드는 영국에 비해 세계적으로 국가적 위상이 낮은 편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역사는 세계사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국의 근간을 이룬 사람들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었지만, 미국은 미국일뿐인 것으로 여겨진다.


각 역사마다 스페인 침공군들은 잉카나 멕시코 아즈텍인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에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인들이 매우 미개해서 비교적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던 스페인 사람들을 이교도 신들의 현현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진실과 매우 다르다. 실제로 두 침략군들을 스페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조차 과장돼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페인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스페인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당시 아라곤 공국과 카스티야 공국의 표면적으로만 결합된 상태에 있던 독립 공국들의 불안하 동맹이었다. (p. 227)


유럽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가장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국가개념이다. 유럽의 역사는 지금의 국가형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국경선은 세계대전 지나고서 정해진 것이다. 유럽은 한덩어리로 서로 얼키고 설켜서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마을단위의 연합체로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영국에 가면 런던출신 웨일즈출신 이라 하고 이탈리아에 가면 시칠리아출신 로마출신 이라 하고 스페인도 카탈루니아출신 바스크출신 이라고 하지, 영국인 이탈리아인 스페인 이라고 자신들을 표현하지 않는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다 그렇다. 유럽은 땅덩어리 자체도 생각보다 작은데 작은나라들이 또 그렇게나 많은데 그 작은 나라들 안에서도 자신들을 국가의 소속이 아닌 지역출신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국가개념이 약한 만큼 유럽연합이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즈텍의 지도자 몬테주마는 코르테즈를 켓잘코틀의 화신으로 여겼고, 잉카인들은 피사로를 비라코차의 살아있는 현현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 종족 모두 침략자들엥게 금을 퍼부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전혀 없는 데 비해, 이를 반박하는 증거는 많다. 이는 두 사람이 탐욕에 눈이 멀어 그들에게 가한 대대적인 살육을 스페인 역사가들이 은폐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그 일들이 일어나고 수십 년이 흐른 뒤에 등장했다. 더구나 잉카인과 아즈텍인들이 침략자들의 끔찍한 행동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끌리어 그들을 신성시 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p. 229)

약간은 칙칙한 얘기지만 아일랜드의 디아스포라를 유발한 1845년의 감자기근의 원인이 감자 역병균이라는 곰팡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졌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아일랜드에 유입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최근에 연구자들은 그것이 남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되었고, 아일랜드 항구로 거래하러 온 프레인 배에 실려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p. 234)


스페인은 남미를 멸망시켰고, 남미의 곰팡이는 아일랜드를 굶주림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지금 남미에는 로마의 문화였을 테지만 지금은 로마에서 사라진 라틴문화가 자리잡고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잉카와 아즈텍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그들의 억울함은 풀길이 없어 보인다... 일본식민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온갖 왜곡과 오해들이 사실인것처럼 진실로 남아서...


미스터리의 세계사라고 하지만 사실 미스터리 라는 신비스러움 보다는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들을 파헤쳐내고 있는 책이었다. 세계사라고 하기엔 영국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들 위주였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나 앞으로도 그닥 중요해보이지 않는 사건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흥미보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는 안타까움과 유럽사가 세계사인 것을 재확인하는 씁쓸함을 주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널리 알려져 있는 역사들이 사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으로서 읽을가치는 충분한 책이었다. 설사 저자의 말도 사실이 아니고 그저 역사적으로 널리 퍼진 스캔들을 모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너무나 확고하게 믿는 지식들이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자세를 갖도록 해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식을 넘어 지혜로 가는 길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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