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그림 -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김한들 지음 / 원더박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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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저자의 직업은 큐레이터다. 화가보다도 어쩌면 가장 많은 작품을 보는 사람이 아마도 큐레이터일 것이다. 드라마에서 고급지게 표현되는 전문직 큐레이터가 보는 그림은 어떨지 궁금했다. 저자는 현대미술사와 비평 강의를 하는 교수이기도 하고,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쓰기도 한다.


책을 읽어보니 이제 갓 서른즈음 되었을 법한 나이로 짐작된다. 십대 후반부터 유학생활을 했고, 방학이면 유럽을 여행했고, 졸업 후 바로 취직이 되었으며,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자연이 생각났을때 제주도에 전시관 겸 사무실을 살뻔할 만큼의 경제적 기반이 있고, 한강에 걸어서 혹은 뛰어서 운동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인 압구정에서 싱글라이프를 살고 있는 여성이다. 내가 왜 이렇게 책의 본질적 내용과 상관없는, 책에서 부수적으로 조금씩 어쩌다 등장한 이런 조건들을 늘어놓고 있느냐하면, 처음엔 자꾸 저자의 본심을 외면하고 저자가 가진 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봤던 나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어차피 여유가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 아닌가?! 하루하루 먹고살기 팍팍하고 오늘내일 어찌살지 답답한 일상에 미술이 예술이 끼어들 틈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보고 예술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막상 보고나니 경험하고 나니 그림이 삶에 주는 영향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문자는 말보다 좁고 말은 그림보다 좁았다. 문자로 씌여진 것들에서 행간을 읽는 것보다 말로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나았고, 말로 규정되지 전의 그림들이 주는 생각들이 더 낫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삶의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문제였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그림이 주는 위안이 필요했을 수도 있는데... 잘 몰라도 그림을 보며 느끼는 개개인의 생각들은 다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므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다 혼자보는 것이다.


그림 보는 게 좋아지면서 이런저런 그림관련 책들을 읽었었다. 고전적 그림에 대한 해설서부터 역사적 그림에 대한 풀이가 좋은 책도 있었고, 미술사적 인문학책도 좋았는데, 그림에 대한 해석을 너무 개인기분파로 하거나 상관없는 글과 그림을 엮어내는 책들은 읽기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달랐다.


이 책은 예사롭지 않다. 큐레이터 체험 에세이도, 작품 감상 에세이도 아닌 이 책은, 미술과 시가 일상인 사람, 그가 인용한 화가 모란디의 말처럼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과 주변과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한 기록이다. (p. 4)


문소영 미술전문기자가 쓴 추천사 의 이 부분이,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의 시간이 저녁이면 좋겠습니다' 라는 머릿말의 저자의 말이,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음을 책을 다 읽고 확실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의 스펙들에서 느끼던 내 개인적 삐딱함을 순화시켜줄 만큼 그림을 사랑하는 진심이 있었고, 공감력 떨어지는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그림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적 감성이 있었다. 확 타올랐다가 곧 꺼지는 열정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엮어대는 가벼움이 아니라, 부엌에서 대를 이어 지켜내는 불씨 같은 열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에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는지 차분하게 다가오는 의미감이 있었다.


그리움은 그림, 글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는다' 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긁는다' 는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 따위로 바닥을 문지르는 행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종이 위에 형태로 긁어내면 그림, 문자로 긁어내면 글, 그리고 마음 속에 긁어 새기면 그리움이다. (p. 86)


'긁는다' 에서 그림과 글과 그리움이 생겨났다라... 점토판에 기호를 새기고 절벽 바위에 그림을 새기던 것에서 그리움이 나왔던가... 무언가를 남긴다는 행위는 곧 그리움 이던가... 그리움은 추억과는 또다른 느낌의 말이다. 그리움은 애정과는 또다른 느낌의 말이다. '곁에 있어도 나는 네가 그립다' 라는 말처럼 그리움은 저자가 그림을 보며 느끼는 마음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을까.


슬픔이 가진 힘을 믿는다. 앞으로 나아감도 슬픔을 버릴 때가 아니라 슬픔을 안고 극복해 낼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계단이 된다. 그것을 밟고 서서 조금 더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시면 그만이다. (p. 102)


이 책은 우울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큼하지도 않다. 그저 아침의 찬란한 빛보다는 한낮의 환한 빛보다는 저녁의 어스름한 빛을 보며 읽는 것이 어울리는 책이다. 아주 깜깜한 밤이 되기 전의 그 시간의 분위기를 가진 책이다. 별빛이 오기전 노을이 어울리는 그런...


팀 아이텔은 평소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스냅숏을 찍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화면 속 배경과 인물을 점차 간소화하여 절제된 구성의 화면을 만든다. 결국 어디인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보편적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딘가 익숙하고 나와 닮은 듯한 장소와 인물에 자신을 반영하게 된다. 해석의 문은 활짝 열린다. 사실 예술은 우리 삶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 단어로 정의 내리기에는 범위가 넓고 경계가 모호하며 그림으로 묘사하기에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어쩌면 이렇게 축약과 함축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다 말해 주지 않기에 여운을 남긴다. 남아 있는 운치는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내 안에 머문다. 그리고 반복적인 회상은 결국 내가 나아간다는 방증이 되어 준다. 나는 거기서 더 큰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 오늘도 문득문득 떠올려 보는 것이다. (p. 109~110)


책속에 많은 그림이 등장하진 않는다. 4명의 화가의 작품이 조금 실려 있다. 그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작가들의 특성과 그들이 그린 그림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굳이 그림을 보지 않아도 저자가 인용한 몇점의 그림만으로도 왠지 그 느낌이 전달되고 있어서 좋았다. 그중 팀 아이텔 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것이 가장 좋았다.


누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물으면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플라뇌르!

플라뇌르는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 단어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도시의 곳곳을 특별한 목적없이 순간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걷다가 예쁜 빵집이 보이면 가게 앞에 서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피고, 좁은 골목이 보이면 그 끝은 어디일지 몸을 옆으로 뉘어 넣고 걸어가 본다. 빠르게 또는 느리게 걸으며 인상적인 장소는 기록으로 남긴다. 평범해 보이는 순간을 관찰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술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그들을 도시를 몸소 경험하며 그 속에서 미적, 시적 영감을 얻는 자들로 묘사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린 태도가 참으로 부럽고 가지고 싶다. 확고한 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 의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신선하고 새롭게 만드는 힘이 생겨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p. 177~178)


비교적 작고 짧은 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뇌르'적 태도를 이미 갖추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그림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호기심은 그림을 걷는 플라뇌르인 저자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그림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그림에 대한 기대가 늘 샘솟고 그림과 관련된 글을 쓰며 정리하는 생활을 살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본 젊은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가 보는 그림들이 궁금해지면서 언젠가 어느 전시회에서 팜플렛에 저자의 이름이 있다면 그림들을 보기도 전에 그 그림들이 좋아질 것 같다.

 

저자가 좋아하는 화가들인 전병구, 박광수, 카츠의 그림들도 좋았지만,

팀 아이텔의 그림들이 가장 좋았다.

나중에 팀 아이텔 전시회를 한다면 보러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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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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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꾸준히 한 일은 '니아 먹는일'

본격 나이 탐구 에세이

지금 사는 세상은 젊으나 늙으나 처음 살아보는 세상이다

 

 

저자는 갱년기 안면홍조는 수줍음으로, 가슴 두근거림은 설렘으로 포장 중 이라는 작가이다.

자신의 소개를 이처럼 하는 것으로 책의 분위기는 유쾌한 분위기는 시작부터 드러난다.

다양한 글을 쓰는 작가이고 두 아들의 엄마이자 주부로서 바쁘게 살던 50대 초반의 저자는 몇년전 폐경을 맞은 후 갱년기에 접어든 몸의 쇠퇴에 대해 나이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지금의 생활에 대해 지금의 나이에서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생각들을 적은 글이 이 에세이 집이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호르몬의 흥망성쇠가 뚜렷다다고 볼 수 있다. 평생 생성되는 정자와 달리 난자는 유한개이고 그 유한성의 끝은 폐경이다. 사춘기는 남녀 모두 겪지만 갱년기는 폐경후 여성의 몸과 정신에 어쩌면 사춘기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족적을 남긴다. 딱 갱년기에 접어든 저자의 나이는 이런저런 변화의 시점이다. 50대의 여성이 쓴 에세이를 몇 권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갱년기 삶의 우울함을 떨쳐낸 극복기 처럼 쓴 에세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저자는 일찌감치 자신의 자리를 챙겨가는 삶을 살아왔고 그랬기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갱년기 우울증은 겪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갱년기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저자의 에세이를 시작하는 그림 몇 페이지는 어찌됐든 저자에게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처방약이 필요했음을 저자의 스타일대로 보여주고 있다.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걸 아시는지? '늙다'는 움직임과 과정이지만 '젊다'는 어떤 상태나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늙어갈' 수는 있지만 '젊어질' 수는 없다 (p. 10)

본문 첫 페이지에서 본문 글도 아닌 ( ) 안에 쓰여진 보조문장이 wow 싶었다. 그랬구나...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랐다. '늙다' 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것이, 그래서 늙어갈 수는 있지만 젊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동사와 형용사의 구분이 신선하면서도 굉장히 의미가 강한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중요한 건 '변화'다. 변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변하지 않음'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우정', '한결같은 마음, '언제나 처음처럼' 등등의 말을 여기저기다 마구잡이로 갖다 썼다. 좋은 말,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그런 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게다가 변하지 않는 것이 꼭 옳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음이 아집과 관성, 무기력의 증거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귀찮아서 안 변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변하려면 안 쓰던 것을 신경을 써야 하고 모르던 것을 새로 알아야 한다. '아, 아무일이라도 생겨라' 하는 마음이 젊은 마음이다. '제발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으면' 하면 늙은 것이다. (p. 45~46)

소설과 극본, 시나리오를 두러 써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자의 문장은 재치있으면서 편한하게 읽힌다. 나이들수록 변화는 귀찮거나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꼰대가 되기는 쉬워도 어른이 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변화가 전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변하는 게 좋은 것이 있고 변하지 않아야 좋은 게 있다. 그 구분을 할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변화를 위해 배울 준비가 되있는 자세가 겸손이 아닐까.

나이가 든다 해도 쇠락과 비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채워지는 내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일을 믿으며 오늘을 산다. 연습이란 그런 것이다. (p. 139)

저자는 에너자이저 경향이 있어 보인다. 아들 둘이 고학년이 되었을때 자신만을 위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다양한 운동도 꾸준히 배우고, 그림도 배우며 일정시간은 카페에서 글도 쓴다. 그러한 여력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러한 에너지가 있었기에 남들보다 활기찬 갱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나이들어 가면서 비움보다는 자신을 위한 채움을 하고 있다. 나이든다고 늙어간다고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나이대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들이 비움을 강조한다. 뭔 문제만 있으면 비우라고들 한다. 하지만 채워진게 있어야 비울수도 있는 법이다. 바쁘고 열심히 사느라 비워진 내안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나이들어가며 받게되는 선물같은 시간들이다. 누군가를 위한 시간보다 나를위한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을 쇠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할 듯하다.

운동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녔다. 가기 싫은 발걸음을 어떻게든 스포츠센터까지 옮기게 만든 에너지가 뭐였을까?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두 돌 된 애를 어린이집에 맡겼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운동한다고 애를 맡겼으니 그 시간에 꼭 운동해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이 있었다. '엄마가 얼른 몸도 마음도 튼튼해질게. 그래서 더 많이 놀아줄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정신과 약과 비싼 상담 치료 대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p. 155)

두 아들이 어릴때 저자는 우울증을 겪었다. 바쁘고 치이는 반복되는 일상이 하릴 없이 눈물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약은 듣지 않았고 상담은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의사의 권유로 운동을 하면서, 처음엔 그야말로 꾸역꾸역 다니면서 몇년이 지나서야 운동의 건강한 매력이 저자에게 통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저자는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을 하고 이제는 하루라도 빠지면 몸이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적응이 됐다. 그 사이 몸도 정신도 건강해졌다.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 와 초보엄마의 좌절감은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적인 병은 뚜렷이 신체적으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기에 경제적 부담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헛돈 쓰는 것 같고 소용없는 것 같고 그래서 더 나아지지 않는 악순환...

운동이 효과적이고 좋은 것이라는 건 알지만 꾸준히 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신체를 가진 나로서는 저자의 노력에 감탄할 뿐이다. ;;;

나는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살기란 얼마나 불편할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몸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없는 임신부가 이용하기에 대중교통은 얼마나 불친절한지 체험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평안에 손톱만큼이라도 지장을주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지 느끼게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약자, 주변부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 (p. 222)

나는 나이든 싱글이나 결혼한 신혼부부 지인이 생기면 아이를 꼭 낳으라고 조언하곤 한다. 결혼을 했건 안했건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내가 성장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자란다. 신체적 성장이 멈추면서 정신적 성장도 멈추었던 것이,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이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질 텐데...

평범한 사람이 무언가 계속 노력해서 '발전' 이라는 걸 하려면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한다.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재미도 있다. 그리고 재미가 있어야 계속할 수 있다. (p. 248)

완벽주의는 힘들다. 나이들면 더 힘들다. 그래서 나이들면서 좀 덜 하라고 내려놓으라고들 이야기 한다.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룰 꿈을 갖기 보다는 선택적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으나 늙으나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은 삶의 활력소이다. 하고 싶은 것을 잘해서 발전하고 싶은 것은 때로는 에너지가 되고 때로는 강박이 된다. 어느 나이에 무엇을 하던 재미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다.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나도 재미를 느끼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더 잘하고 싶어서 어느 순간 재미는 사라지고 힘들어지곤 하는데, '재미' 를 꼭 염두에 두어야 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마음은 18세 풍랑기 이고 장래 희망은 웃긴 할머니 인 저자의 유쾌 발랄 인생 성장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나이 먹을 수록 소화력도 떨어지는데 나이 때문에 체하면 정말 약도 없지 않겠는가 ㅎㅎ 누구나 공평하게 매년 한살씩 먹는 것 같지만, 그 나잇값을 하기는 쉽지 않다. 약이 없으니 조심해야지. 나이를 자~알 먹어 가는 과정중에 저자의 갱년기 에세이는 따듯한 공감과 편안한 일상을 공유하는 책이라 재밌게 읽었다. 설날 이라는 나이먹는 명절을 보내자마자 이 책을 읽고 나니 왠지 더 쑥쑥 읽히고, 명절의 피곤함도 가시게 해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 나이를 잘 먹어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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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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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렬한 사회 비판과 해학적 인물 묘사로 만들어낸 가장 '디킨스다운' 소설이자 19세기 최고의 영국문학 완역본

차가운 도시 밑바닥에서 피오오른 선한 용기와 삶의 희망

영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단권 완역본



원전 완역본! 중요하다. 제목이 널리 알려지고 익숙한 책일수록 그 책이 축약본인지 중역본인지 완역본인지 아는 것은 내용 이해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원전 완역본 이라 할지라도 출판사와 번역가에 의해 얼마나 충실하게 번역되었는지도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현대지성 에서 나오고 있는 클래식 시리즈는 무척 반갑다. 익숙한 고전들에 대해 원전을 완역해 내고 있는 이 시리즈는 이전의 번역본들이 했던 실수들을 (원전에서 멀어졌던 번역을 다시 원전에 가깝게)수정하면서 현대적인 매끄러운 문장들로 가독성도 높이고 있었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중 4권 읽어봤는데, 그중 2권은 이전에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봤던 책이서 더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읽었던 4권 모두 좋았어서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어나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이자 영국인이 사랑하는 소설가라는 찰스 디킨스(1812~1870)의 작품을 원전 완역본으로 읽었던 첫 책은 '두 도시 이야기' 였다. 혁명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리와 런던을 오가는 러브스토리이자 역사소설 같기도 한 이 작품은 '가장 디킨스 답지 않은' 소설이라는데, 디킨스의 첫 책으로 읽고나니 내게 작가의 첫인상은 만연체의 지루한 문장임에도 몰입하게 되는 서사적 매력을 가진 소설가였다. 그런데 <올리버 트위스트> 를 읽으며 인상을 확 바꿔갖게 되었다. 완전 호감 급상승!!!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범죄자들과 런던 인구의 하류층에서 선정되었다는 것이 아주 조잡하고 충격적인 설정으로 보일 것이다. 사익스는 도둑이고, 페이긴은 장물아비이며, 소년들은 소매치기에다가, 주인공 소녀는 매춘부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가장 추하고 불쾌한 이야기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선한 교훈이 얻어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이것이 널리 인정되고 확립된 진리라고 항상 믿어왔다. 이런 정신으로, 나는 모든 역경에서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선의 원리를 소년 올리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의 보편적 본성에는 최상과 최악의 색조들이 뒤섞여 있다. 상당 부분이 추악한 색조를 띠지만, 가장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자, 변칙이며, 일견 불가능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그것이 의심받는다면 나로서는 도리어 기쁘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상황이야말로 그것이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는 충분한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 ( 저자 서문 中)


디킨스는 서문에서 자신의 의도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하고 있다. 잡지에 연재되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 내면서 그동안의 독자들의 반응을 고려했을 이 서문은 저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구상했고 이런 인물들을 골랐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 의도만으로도 왜 영국인들이 디킨스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동정했다. 이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는 묘비명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디킨스는 누구도 애정어린 눈으로 보지 않았던 계층을 따뜻하게 보고 있던 작가였고, 따듯이 봐줄수 없는 사람들도 그 나름의 개연성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작가였다.


노부인은 지혜와 경험이 풍부한 여성으로, 무엇이 아이들에게 좋고 자기 자신에게 좋은지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주급에서 자기 몫을 더 크게 떼고 난 후, 교구 아이들에게 원래보다 훨씬 더 적은 몫을 할당했다. 노부인은 어떻게든 악착같이 끝을 모를 정도로 아이들의 몫을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뜯어내고 있었는데, 대단한 경험주의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p. 24)


디킨스 만의 풍자와 해학이 어떤 것인지 시작부터 느낄 수 있었던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우리나라 판소리를 생각나게 했다.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 표현방식에 있어 웃음이 나게 하고, 시작을 항상 주변적인 배경설명부터 해서 인물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까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고아 농장' 이라 할 수 있는 어린 고아들의 보육시설 책임자인 노부인에 대한 표현방식은 당시 빈민시설들에 대한 설명과 관리인들에 대한 표현에세 내내 유지되는데 그 반어적 설명들이 그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배로 느낄 수 있게 했다.


낡은 밧줄의 실밥을 푸는 간단한 과정 속에서 교육과 기술이라는 두 가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올리버는 말단 교구관의 지시에 따라 꾸벅 감사인사를 올린 다음, 서둘러 커다란 보호소 건물로 끌려가서 거칠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 축복받은 나라의 자상한 법률에 따른 사례를 어디에서 이토록 고귀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다니! 가엾은 올리버! 올리버는 행복하게도 주위를 의식하지 못한 채 잠이 푹 들어서 생각도 못했겠지만, 바로 그 날 이사회가 올리버의 미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렸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이사회의 신사들은 아주 현명하고 깊은 철학을 지닌 분들로, 구빈원에 관심을 두게 되자 단번에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점인데, 바로 가난한 사람들은 구빈원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빈원은 공공오락을 제공하고 공짜 술집이자 1년 내내 아침, 점심, 저녁, 차를 얻어먹는 곳이니, 놀고먹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은 낙원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사회의 신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구빈원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든가, 아니면 바깥에서 빠르게 굶어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규칙을 세웠다. (p. 32~33)


신랄한 비난보다 비트는 문장이 상황을 더 극적이게 만든다. 어린 올리버의 처지는 더 딱하게 다가오고 구빈원 관계자들은 더 악독하게 다가오지만 그 총체적인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자꾸 나오니 이런것이 풍자와 해학인가 싶으면서 디킨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이 광경을, 배 속에서는 고기와 술이 썩어나고 얼음 같은 피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좀 보았으면 싶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개도 거들뗘보지 않을 진수성찬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말이다. 허기로 잔뜩 독이 오른 올리버가 고기뼈를 갈기갈기 찢어내듯 뜯어먹는 끔찍한 탐욕의 광경을 직접 목도하면 그 감상이 어떨까? 이보다 더 바라는 소원이 딱 하나 있다면 그 철학자도 똑같은 음식을 올리버와 똑같이 탐욕스럽게 먹는 것이다. (p. 59)


어린 올리버가 구빈원에서 장의사 도제로 넘겨져 받은 첫 식사는 살점이 너덜너덜 붙은 고기뼈였다. 구빈원에서는 멀건 귀리죽만 먹었는데, 주인네가 먹고 남긴 뼈다귀부스러기도 걸리버에는 처음 먹어보는 진수성찬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든 이들이 직접 겪어보기를 디킨스는 톡 쏘아붙인다기 보다는 은근히 힐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은 성실한 영국인들이 가장 먼저 당당하게 내세우는 자랑거리이므로, 모든 공적이고 애국적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이러한 행위가 칭찬받을 만하다는 점을 굳이 독자들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자기 보호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사실은 심오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철학자들이 모든 대자연의 행위와 행동의 주된 원인으로 규정한 공리주의 법칙을 입증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철학자들은 아주 현명하게도 대자연의 절차를 공리와 이론의 문제로 좁혀놓았고, 대자연의 높은 지혜와 이치만을 단순하고 멋지게 칭찬함으로써 감정이나 너그러운 기분, 충동의 문제는 고려대상에서 치워버린 것이다. (p. 142)


올리버가 런던으로 도망쳐와서 소매치기 패거리들에 섞이게 되고 처음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했을 때 너무 놀라 달아나다가 도둑으로 오인받아 잡히게 되는데, 이때 정작 소매치기를 했던 소년들은 올리버를 쫒기게 두고 도망간다. 이 상황을 두고 저자는 철학과 사상을 들먹여가며 풀어내는데 그 고급적 비꼬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저절로 피식피식 웃게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작품 전체내내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이런 날에는 굶주림에 지친 부랑자들이 수도 없이 텅 빈 거리에서 눈을 감는다. 이들의 죄가 무엇이건 이보다 더 쓰라린 세상에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터였다. (p. 258)


풍자와 해학 사이 끼어있는 이런 문장들은 순간순간 짧고 굵게 가슴을 파고든다. 웃다가 접하는 참혹함은 훨씬 더 극적으로 비통하게 느껴진다.


"구빈원 밖 구제라는 게요, 잘만 관리하면 교구의 안전 장치가 되지요. 가장 큰 원칙은 극빈자들에게 정확히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만 주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지쳐서 구걸하러 오지 않거든요" 교구관이 우월한 지식을 뽐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p. 262)


비참한 극빈자들의 삶을 우롱하는 극빈자 관계자들의 대화는 갈수록 기가 막히지만, 저자는 결말에 가서 기가막히게 마무리 처리도 깔끔했다.


"그 아이의 이야기 중에서 안 좋아 보이는 부분은 증명이 가능하고, 좋아 보이는 부분은 전혀 증명을 할 수가 없어요" (p. 338)


올리버가 전혀 증명할 수 없는 좋아보이는 부분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안좋아보이는 부분을 증명하던 허울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저자의 스토리구성능력은 탁월했다. 짜임새가 딱딱 들어맞아서 600여페이지 두께의 내용을 지치지 않고 읽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자신감에 찬 사람들만큼이나 가장 천박하고 타락한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약점이 바로 자존심이다. 낸시는 도둑과 악당들의 비참한 동료이자 천한 소굴에 버려진 부랑자였고, 늘 교수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을 오가는 인간쓰레기들과 한패였다. 이렇게 타락한 존재조차도 자존심 때문에 여성스러운 감정을 미미하게나마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낸시는 이런 감정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감정이야말로 낸시에게도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닳고 닳아서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된 인간성이었다. (p. 448)


디킨스가 이 작품의 여자주인공으로 표현한 인물은 낸시 였다. 소매치기일당의 멤버이자 난폭한 사익스의 애인인 낸시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면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밑바닥삶이었던 낸시의 현실적 존재감과 올리버와 엮이면서 순간순간 드러나는 인간애의 비현실적 감정은 디킨스가 논리로 설명되지 않지만 인정할수밖에 없는 감정을 지닌 인물로 내세운 대표적 캐릭터다. 그리고 읽다보면 어쩔수 없다는 낸시의 선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꾸준한 선함의 상징으로서의 올리버보다 더 종교적일 수 있는 인물인 것도 같다. 작품속에서 올리버는 지상에 강림한 천사같은 순수 그 자체 이지만, 타락한 천사같은 낸시를 보며 더 반성적인 삶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엔 올리버로 시작해서 내내 올리버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뒤로 갈수록 주변인물들과 삶이 조명되면서 올리버는 부수적인 존재로 밀려난다. 하지만 모든 사건의 중심엔 올리버가 있고, 모든 사람들의 엮어주는 존재는 여전히 올리버다. 수없이 악한 상황에 내몰리면서도 한번도 악함에 물들지 않는 올리버는 종교적 상징 같기도 하고 현실적 꿈 같기도 하다. 올리버의 환경을 통해 본 당시 극빈자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올리버의 삶을 통해 본 상징적 희망이라도 심어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작품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너~무 깔끔한 마무리라 읽는 내내 무겁게 마음을 누르던 안타까움들이 희석되는 듯 했다. 전에 읽었던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와 <올리버 트위스트> 는 한 작가의 작품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깔끔한 서사구조와 몰입도 높은 전개로 디킨스의 매력을 느끼기엔 둘 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현실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되, 시선이 따뜻한 작가를 좋아하는데 그런 작가 리스트에 디킨스의 이름을 굵직하게 새기게 한 <올리버 트위스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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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마녀 새소설 4
김하서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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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두 여자의 간절함이 빛의 위로가 되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새소설 시리즈의 4권인 이 책은 앞서 읽었던 3권 <밤의 행방> 을 생각나게 했다.

<밤의 행방> 에서의 죽음을 미리 보는 나뭇가지 '반' 과 <빛의 마녀> 에서의 마녀 니콜은 판타지적 요소를 사용하는 듯 하면서도 차라리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잔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앞서 나온 1권 과 2권도 그러할지 궁금해진다.


마녀 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상되는 것들은 대부분 어둡고 음습하고 잔악하고 괴이한 여하튼 나쁜것들의 총체적 집합체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마녀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종교재판은 사실 나약한 제물을 골라 공개살인한 집단폭력일 뿐이었기에 언제부터인가 마녀는 약간은 억울하고 슬프고 한서린 성격도 부여받은 듯 하다. 하지만 그래도 마녀는 어둠의 존재였다. 그런데 이 소설은 <빛의 마녀> 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소설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밤의 행방> 도 <빛의 마녀> 도 제목을 참 잘 지었다. ㅎㅎ


나는 순진함 속에 고집스러운 악의로 가득 찬 그 애들의 검은 눈동자가 좋아요. 그 애들을 보고 있으면 벼랑으로 무섭게 질주하는 검은 야생마가 떠올라요. 내가 야생 흑마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떨리고 흥분되죠. 그 애들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p. 10)


금발에 초록눈을 가진 영국인 니콜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200년 넘게 숨어살고 있는 마녀라고 말한다. 쇄골과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에 새겨진 표식을 문신이 아니라 뜨거운 불로 지져 생긴 화인 즉 마녀라는 존재임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니콜은 자신의 딸 샬럿이 야생마 같았다고 생각하지만, 벼랑끝으로 달려가는 검은 야생마는 니콜 자신이었다.


열두 시간 만에 만난 그녀의 주치의는 이제 아이 머리가 보이니 최대로 힘을 줘보자고 했다. 그녀는 너무 고통에 지친 나머지 그 말에 아무런 감응을 받지 못했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오직,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이었다. 수간호사가 그녀의 배를 사정없이 누르고 주치의는 노련하게 아이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똑같은 과정을 세 번 거친 후에야 아이의 머리가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의 어깨, 가슴, 배, 엉덩이, 다리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고통이 썰물처럼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희미하고 생경해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p. 23)


태주는 불안한 여자였다. 임신하고 나서는 세상에 얼마나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들 깨닫고 늘 웅크리며 태동에 집착했다. 태주의 불안을 먹고 자란 아이는 태어나고 26시간만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태주는 한겨울에 맨발로 병원앞에 피켓을 들고 서기 시작했다. 그러다 니콜을 만났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에게 벌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혼자 살아남은 어미의 애끓는 가슴. 유리 조각이 깔린 길을 온종일 걸어 피투성이가 되어도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어요. 그녀의 불행이 자기에게 옮겨붙을가 봐 달아나기 바빴죠. 사람들의 염려는 틀리지 않아요. 불행은 회색 먼지 같아서 누구의 어깨에나 내려앉아요. 그게 불행의 법칙이에요. 부자든, 가난하든, 젊었든, 늙었던, 공평하게, 예고 없이, 순식간에 악의 꽃을 피우죠. (p. 27)


니콜은 한눈에 태주를 알아보았다. 자신과 같은 상처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러나 마녀도 영원히 불멸할 수는 없어요. 안 그러면 세상은 넘쳐나는 마녀들과 인간의 숨은 욕망이 결탁해 광기와 피로 어지럽혀지겠죠. 마녀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어요. 그들에게 붙잡히면 정말 먼지처럼 사라지죠. 마녀사냥꾼. 그들만이 마녀를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멸시킬 수 있죠. 누구도 모르는 마녀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도 오랜 시간 마녀사냥꾼에게 쫓기며 살아왔어요.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p. 36)


니콜이 두려워하는 니콜만을 쫓아다니는 에드워드를 니콜은 기억하지 못한다. 에드워드가 누구인지. 에드워드였던 사람은 기억하면서 지금의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니콜의 약점이라서...


마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사람들의 숨은 열망, 검은 유혹, 악의를 현실로 만들어줄 뿐이죠. 잊지 말아요.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건 오직 검은색 뿐이라는 걸. 별이 아름다운 건 그 뒤에 존재하는 어둠 때문이에요. (p. 51)

마녀는 고독한 삶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도 누군가의 이해와 친구가 필요해요. 다만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녀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p. 67)


니콜은 끊임없이 자기자신은 마녀라고 마녀는 이렇다고 이야기한다. 태주에게 죽은 아기를 되살릴 방법이 있다고 접근하고 태주는 니콜이 마녀라는 것을 믿을만큼 간절했다.


그날은 노오란 개나리가 만발한 눈부신 봄날이었다. 모든 불운한 일들은 눈부신 빛 아래 일어난다. 불운은 더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빛을 선택한다. (p. 79)


소설속에서 노란색은 불행의 색이다. 니콜의 남편이 바람피우던 여자에게 선물한 꽃이 노란 장미였고, 태주의 귀가 안들리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 노란 병아리였다. 노란 색은 눈부신 색이다. 봄의 색이다. 한겨울 맨땅바닥에 맨발로 서있는 여자 태주와 계절과 상관없이 사는 니콜에게 봄의 색은 불행의 색이다.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 해봤니 비오는날 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렸다면 흐름에 방해가 되려나 ㅎㅎ


우리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늘 우리를 쫓는 마녀사냥꾼이에요. 그들은 우리가 잠든 순간에도 우리를 쫓고 있어요. 그들을 잊고 사는 순간에도 그들은 우리를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요. 제일 끔찍한 사실은 마녀사냥꾼은 한 마녀만 쫓는다는 거예요. 보통 사냥꾼하곤 다르게 타협이라는 게 안 통해요. 사냥을 멈추는 순간은 그들이 쫓는 마녀가 잡힐 때뿐이죠. 에드워드는 나를 쫓는 마녀사냥꾼이에요. (p. 109)


니콜은 에드워드 몰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한국까지 왔고, 에드워드도 마지막에는 니콜을 찾아낸다. 니콜이 그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불행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 자신이 초래한 불행을...

이 슬프고 가슴아픈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한놈만 패' 라는 영화대사가 떠올라 나도모르게 피식 웃었지만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은 아니었다. 정말 잠깐 이었을뿐 바로 소설속에 다시 빠져들었으므로 나는 작가에게 당당하다!


나는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를 모두 들이켰어요. 나에게 슬픔은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켜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쓰고 뜨거운 것을 가슴속에 단숨에 밀어 넣는 거죠. 그리고 숨을 참듯 그 순간을 견디는 거예요. 슬픔은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하지만 결국엔 혀끝에 진한 향기가 남게 돼요. 에드워드와 나는 슬픔을 나누듯 에스프레소를 나눠 마셨어요. (p. 140)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여자가 나눠가질 수 있는 불행은 딱 에스프레소 한잔 만큼의 양이었을까... 그 진한 향기도 곧 기억하지 못하게 된 여자는 자신이 마녀라고 믿게 되버렸다.


태주는 작은 빛이 방금 묻어준 새의 영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그 빛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묻힌 것을 알았다. 주위를 돌아보자 여자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 걸까. 스산한 풍경 어디에도 집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태주는 검푸른 하늘의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p. 248)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한채 형벌의 길을 가던 태주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멈출 수 있었다. 태주가 꾼 꿈은 니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니콜은 늘 천사의 꿈을 꾸었다.


그날 짧은 순간 봤던 황금빛 드넓은 밀밭을 찾을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떠돌 거예요. 그곳을 찾으면 나는 진짜 자유로운 바람의 딸이 될 거예요. 바람이 되면 당신에게도 찾아갈게요. (p. 264)


깜깜한 우주를 통과해 이 세상에 온 천사가 눈에 보이는 듯해 태주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태주는 어린 엄마의 등을 쓸어주며 가슴에 수천 개의 꽃잎이 날리는 듯 벅차올랐다.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태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믿는 순간, 당신이 바라는 걸 이루게 될 거예요.

마녀 니콜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바람은 태주의 머리칼을 흔들고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을 향해 떠나갔다. 햇살이 금가루처럼 그들 머리 위로 따사롭게 내려앉았다. (p. 267)


니콜이 여전히 바람처럼 떠돌고 있을지 아니면 천국을 찾았을지 알수 없다. 하지만 태주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홀가분해졌다. 이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니콜의 독백은 서서히 미쳐가는 한 여자의 내면을 읽는 듯 했고 미칠만큼 컸던 상처의 크기를 가늠해보게 했다. 태주의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이 혼자만의 고통이었기에 가슴아팠고 처절함이 쓰리게 다가왔다. 니콜도 태주도 한 아이의 엄마였고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였다. 그녀들의 상처가 상실된 모성이었을지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이었을지 어느쪽이 더 컸을지 모르겠다. 혹은 둘다였을지도... 스스로 마녀가 되고자 했으나 그녀들은 빛의 마녀였다. 한명은 빛을 쫓아가고 한명은 빛에 눈을 뜬, 어둠에 있어봤기에 마녀이고 어둠에서 나왔기에 빛의 마녀가 되었다.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 라는 자음과 모음의 젊은 작가 새소설 시리즈는 창작과 비평 출판사의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 이라는 소설Q 시리즈의 젊은 작가 작품들을 생각나게 했다.

창비의 소설Q시리즈는 1,2,3권을 읽어보니 예민하거나 참신하거나 독특하게 기존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소설의 다양한 표현법이 새로웠고, 자음과모음의 새소설시리즈는 3,4권을 읽어보니 현실문제를 직시하되 타성에 젖지 않은 작품을 써내는 젊은 작가들의 발견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두 소설시리즈에는 관심이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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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게 길을 묻다 -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존재의 발견 (10주년 컬러 개정판)
김용규 지음 / 비아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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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존재의 발견

숲의 가르침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사랑하는 힘을 회복하다

 

 

'숲 철학자' 라 불리는 저자의 이 책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후로도 꾸준히 읽혀져 십년만에 개정판으로 새로 나오게 됐다고 한다.

30대에 벤처기업 CEO가 되기까지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가 40을 앞두고 홀연 숲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숲에서 글을 쓰고 숲의 가르침을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 그 어떤 때보다 정말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은 자기계발서로서가 아니라 숲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었다. 언제는 유행처럼 반려동물 붐이 일면서 동물관련 책들이 쏟아지더니 최근에는 식물로 그 방향이 바뀐 듯한 느낌에 이런 저런 식물 생태계 관련 책들로 관심이 가던 차였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자기계발서 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성찰을위한 자기계발이라 힐링서처럼 읽히기도 하는 책이었다. 그리고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간 사람을 보면 후렴구처럼 떠올려지는 '월든 의 소로' 라는 표현처럼 저자는 '여우숲 의 소로' 였다.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규명하여 전하려 할 때 인과의 요소만을 주로 따지는 것은 서양의 전통적 방식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순하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속하고 명쾌하며 효율적입니다. 이 방식은 살펴보려는 사물이나 생명, 사태 등이 전부 대상화되는 특성을 갖습니다. 한편 동양의 전통적 방식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연 緣 이라는 요소를 함께 넣어 사태를 살핍닏. '인-과'라는 직선성보다 '인-연-과'라는 곡선상은 더디고 덜 선명하며 자못 복잡하여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보다 풍성합니다. 헤아려보려는 그 무엇을 단순히 대상화하는 것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 존재 그 자체로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p. 5)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이 책의 첫문장첫단락인 위 구절이었다.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하면서 저자의 관점을 잘 드러낸 부분이기도 했지만, 내게도 가장 와 닿은 부분이었다. 서양 동양 굳이 나눌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건 다른것이므로 어쩔 수없이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할때가 있는데, 요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동양적 마인드 일것 같다. 자연친화적이면서, 집단적이 아닌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공동체 문화가 필요한 때인듯 싶어서...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루쉰은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곳이 길이 된다 했지만, 그 길이 반드시 내게도 희망일 수는 없습니다. 그 길이 내게 더 이상 희망일 수 없을때, 그 길은 죽은 길이 되고 절망이 됩니다. 한때 희망이라고 믿었던 길 위에서 우리는 지금 절망의 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 걷던 길 위에서 그런 곤란함과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 (p. 13, 14)

 

여러 사람들이 앞서 다지고 간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이 반드시 내게도 옳은 길일 수는 없다. 누구나 성공가도를 추구하지만 모두 같은 모습의 성공을 원한다면 결국 탈락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탈락은 실패인가? 길은 한 갈래만 있지 않다. 고속도로가 막히면 국도로도 하고 논밭사잇길로도 간다. 산을 오르는 길이 어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겠는가? 남들이 다져놓은 편한길만 찾다가는 작은 돌에 걸려 넘어져도 다리가 부러질 수 있다. 내 발로 흙길을 조금씩 다져가는 길을 가야한다는 것은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이렇게 글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은 왜일까...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고유하고 유일합니다. 누구도 다른 누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근원성입니다. 나는 생명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특성을 바로 대체 불가능성에서 찾습니다. 그대라는 존재를 대체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정치·경제·사회질서가 요구하는 표준과 규격을 따르도록 훈련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유일함을 존중받지 못하는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결국 '나'라는 씨앗 안에 무엇이 접혀 있었는지를 잊게 되었습니다. (p. 32)

태어나는 모양과 자리와 시간이 다를 뿐, 생명 모두의 씨앗 속에는 자기 완결의 힘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p. 36)

우리 눈에 누추해 보이는 곳이나 그저 길섶에서 자라는 어느 풀 한포기, 어느 나무 한 그루라도 이유없이 자라는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뿌리를 뻗고, 키를 키우고, 꽃을 피워대느라 고단하지 않은 초목이 없는 것입니다. (p. 64)

 

저자의 어투는 굉장히 평온하다. 종교인인가 싶을 정도로 명상적인 문체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떤 특정 종교를 생각나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저 숲 속에 자리 하나 펼치고 앉아, 이나무 저나무 이풀한포기 저풀한포기 둘러보며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 그 자체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듯 조곤조곤 듣고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숲에 가면 왠지 크게 소리치기보다는 조용조용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한 말투가 몸에 배인듯한 저자의 문장들은 굉장히 조용하게 읽게 된다.

나는 가시를 떨어뜨린 나무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 그들이 가시를 버린 이유를 알았습니다. 즉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만이 가시를 버렸던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쉬이 꺾이지 않을 만큼 자신의 줄기를 살찌웠을 때 비로소 스들은 그동안 키워온 가시를 떨어뜨렸습니다. 자라면서 그들은 가시에 쏟아부었던 에너니와 양분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면 가시는 자연스레 삭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가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껍질로 덮였습니다. (p. 98)

두릅나무, 아까시나무, 주엽나무 등 성장의 초반에 가시를 달고 자라는 나무들을 보면서 저자가 깨달은 바를 통해 저자는 사람도 이와 같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세웠던 사람들도 나중에 튼튼해지면 가시를 버릴 수 있으리라고, 그러니 가시를 버릴 만큼 튼튼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가시를 여전히 달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가시를 뽑지 말고 이해해주기를 권하고자 한다. 숲에서 살며 숲을 통해 배우는 것들로 은유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은 그래서 명상적이고 철학적이 된다.

대부분의 식물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영역을 넘어 타자의 영역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키는 무리한 경쟁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자신을 꽃피우기 위한 공간을 열기 위해 오로지 자신과 다툽니다. (p. 109)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 동물보다 굉장히 제한적으로 생태계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큰나무가 있으면 어떻게든 옆으로 가지를 뻗고, 꽃이 볼품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수분할 방법을 찾는다. 타자를 의식하나 자시을 바꿔나간다. 내것을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인간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지구가 있어 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이 있어 지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가 있어 서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살뜰히 잡아주는 것으로 세상이, 별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잊어가고 있는 이 위대한 법칙을 반드시 되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홀로 온전할 수 없었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p. 121)

도시와 떨어진 숲에서는 별이 잘 보인다. 빛 공해가 없는 곳에 가서 밤하늘 보는 것을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도시에서도 밤에 불을 좀 끈다면 별을 볼 수 있을 텐데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별을 보려 도시가 아닌 곳으로 간다. 저자는 숲에 산다. 외딴 숲에서 일출과 일몰에 의해 생활리듬을 잡고 있기에 밤에는 별을 잘 볼 수 있다. 숲에는 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낮에 보이는 숲이 가르쳐주는 것과 밤에 보이는 별이 가르쳐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할 수 있어 해주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작게는 모든 생명이 생명으로서 지니고 있는, 스스로 개척하고 이루며 사는 자립의 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자, 그 재미를 빼앗는 것입니다. 또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려움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회적 적응력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화된 적응력이 대를 이어 재생산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식들에게 지나친 재산과 기회를 구축하여 상속해주고, 이것이 반복된다면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은 구조적인 불평등 속에서 삶을 시작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낳을 것입니다. 성년이 된 자식이 그 삶을 더 안락하게 시작하도록 배려하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만, 도가 지나칠 경우 부모의 삶이나 자식의 삶이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숲에 사는 생명들은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p. 171)

자연은 자신의 새끼나 씨앗을 발아래 두려하지 않습니다.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새끼는 무서운 맹수나 맹금류를 피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위태로울 것이고, 부모의 발아래에서 발아한 씨앗은 결국 부모의 그늘에 살면서 부모와 햇빛을 나누고 양분을 다퉈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스스로 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어찌 참다운 사랑이겠습니까?숲은 비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숲은 날로 깊어가는 법을 압니다. 굳이 날갯짓을 배우지 ㅇ낳아도 새가 스스로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를 수 있듯이 자연의 모든 생명은 이미 그 안에 스스로 자라고 익어가는 법을 품고 있습니다. (p. 179)

 

뒤이어 들려주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라는 책 이야기는 유익한 사례였다. 섬진강 변에서 큰오색딱따구리를 50일간 관찰한 사진과 기록을 담아 펴낸 책으로 부부새의 육아를 온전히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자연의 삶이 대개 그러하듯 자식을 독립시키는 철저함도 교훈적이었다. 숲에 사는 저자가 감동적으로 읽을만한 책이었다.

얼마전 티비에서 치타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치타는 집단을 이루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다. 번식기에 잠깐 상대방 치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어미는 새끼를 홀로 낳아 키운다. 집단이 아닌 만큼 주변 맹수들로부터 새끼를 지켜내는 것은 제아무리 치타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 새끼를 낳았던 어느 치타는 결국 하이에나에게 새끼를 모두 잃었다. 그 경험으로 이제 치타는 다음번 태어나는 새끼들은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자연에서는 새끼를 잃는 경험으로 새끼를 지키는 법을 배울 정도로 어찌보면 냉혹하고 어찌보면 철저하다. 하지만 그래야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나무가 노동과 휴식을 철저히 자연의 흐름에 맞춤으로써, 지구상에서 가장 유구하고 장대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눈에 이것은 철저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지혜를 익힌 자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미래를 걱정하여 밤을 지새우지도 않고,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불면하지도 않으며, 부질없는 욕망에 위둘려 밤을 배회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간에 순간을 더하여 지금에 충실합니다. (p. 201)

사람이 나무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나무로부터 배울 수는 있다. 나무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무의 삶은 충분히 사람에게 시사하는 내용이 있다. 식물은 고민하지 않는다. 식물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저 생명력을 발휘하고 생태계를 순환시키는데 일조한다.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사람이 식물처럼 살 수는 없지만 식물처럼 살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식물의 자세를 조금 응용한다면 사람의 삶이 좀더 평화로워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저자는 숲에게서 나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깨달음을 전하고자 하지만 직유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은유는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범위로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 종의 새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30여 종의 곤충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소멸은 소멸을 낳고 그 소멸은 다시 더 빠른 소멸을 낳습니다. 우리 인간이 오로지 인간의 편리와 안전과 행복만을 욕망하는, 이대로의 탐욕을 유지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멸의 법칙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간마저도 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아직도 늦추려 하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하는 이 소멸의 연쇄를 상생의 연쇄로 바꿔내지 않으면 분명히 그런 날이 오겠지요. (p. 208)

한 종의 새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30여 종의 곤충이 사라졌다는 의미라니... 최근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며 생명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읽을 때마다 깨닫고 있는 중이라서인지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파괴력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우수한 품종만 간단하게 남기는 것은 그 우수종을 죽일 수 있는 균이 나타났을 때 멸종 이외의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없게 만든다. 다양성이 곧 생명력이다. 인간에게 필요하건 필요치 않건 모든 생명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존재의 이유를 무시해나가는 발전은 발전이 아니다. 눈앞의 편리보다 먼미래의 공존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삶인가 보다.

저자는 인생에서 깨달아야 할 가르침들을 숲에서 얻었고, 그렇게 자신처럼 숲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숲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숲에 가서 느낄 수 있는 가르침들을 책 한권으로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숲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도록. 그렇게 숲이 주는 가르침을 직접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숲에 가보도록.

제목이 생각나진 않지만 유명한 그림책이 떠오른다. 도시의 사람들이 휴가로 시골에 왔다. 오기 편하려고 길을 닦고 집을 짓고 마트를 들여오고 사람이 모여들자 도시와 똑같이 되버려서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한곳한곳 망쳐놓고 떠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림책 속에서 너무나 어리석게 표현되어 있었다. 지구는 무한하지 않다. 그렇게 한곳한곳 망치다가는 온 지구를 다 망치게 될 것이다.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고 마음이 지치고 삶이 힘들때 이런 책과 이런 가르침들을 찾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숲 가까이에 살면서 종종 숲에 가서 숨쉬고 올 수 있는 환경속에서 산다면 일찍 부터 숲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숲이 멀어져 가는 요즘이 더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은 존재 자체로 늘 깨달음을 준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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