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그림 -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김한들 지음 / 원더박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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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저자의 직업은 큐레이터다. 화가보다도 어쩌면 가장 많은 작품을 보는 사람이 아마도 큐레이터일 것이다. 드라마에서 고급지게 표현되는 전문직 큐레이터가 보는 그림은 어떨지 궁금했다. 저자는 현대미술사와 비평 강의를 하는 교수이기도 하고,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쓰기도 한다.


책을 읽어보니 이제 갓 서른즈음 되었을 법한 나이로 짐작된다. 십대 후반부터 유학생활을 했고, 방학이면 유럽을 여행했고, 졸업 후 바로 취직이 되었으며,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자연이 생각났을때 제주도에 전시관 겸 사무실을 살뻔할 만큼의 경제적 기반이 있고, 한강에 걸어서 혹은 뛰어서 운동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인 압구정에서 싱글라이프를 살고 있는 여성이다. 내가 왜 이렇게 책의 본질적 내용과 상관없는, 책에서 부수적으로 조금씩 어쩌다 등장한 이런 조건들을 늘어놓고 있느냐하면, 처음엔 자꾸 저자의 본심을 외면하고 저자가 가진 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봤던 나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어차피 여유가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 아닌가?! 하루하루 먹고살기 팍팍하고 오늘내일 어찌살지 답답한 일상에 미술이 예술이 끼어들 틈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보고 예술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막상 보고나니 경험하고 나니 그림이 삶에 주는 영향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문자는 말보다 좁고 말은 그림보다 좁았다. 문자로 씌여진 것들에서 행간을 읽는 것보다 말로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나았고, 말로 규정되지 전의 그림들이 주는 생각들이 더 낫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삶의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문제였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그림이 주는 위안이 필요했을 수도 있는데... 잘 몰라도 그림을 보며 느끼는 개개인의 생각들은 다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므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다 혼자보는 것이다.


그림 보는 게 좋아지면서 이런저런 그림관련 책들을 읽었었다. 고전적 그림에 대한 해설서부터 역사적 그림에 대한 풀이가 좋은 책도 있었고, 미술사적 인문학책도 좋았는데, 그림에 대한 해석을 너무 개인기분파로 하거나 상관없는 글과 그림을 엮어내는 책들은 읽기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달랐다.


이 책은 예사롭지 않다. 큐레이터 체험 에세이도, 작품 감상 에세이도 아닌 이 책은, 미술과 시가 일상인 사람, 그가 인용한 화가 모란디의 말처럼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과 주변과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한 기록이다. (p. 4)


문소영 미술전문기자가 쓴 추천사 의 이 부분이,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의 시간이 저녁이면 좋겠습니다' 라는 머릿말의 저자의 말이,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음을 책을 다 읽고 확실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의 스펙들에서 느끼던 내 개인적 삐딱함을 순화시켜줄 만큼 그림을 사랑하는 진심이 있었고, 공감력 떨어지는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그림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적 감성이 있었다. 확 타올랐다가 곧 꺼지는 열정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엮어대는 가벼움이 아니라, 부엌에서 대를 이어 지켜내는 불씨 같은 열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에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는지 차분하게 다가오는 의미감이 있었다.


그리움은 그림, 글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는다' 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긁는다' 는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 따위로 바닥을 문지르는 행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종이 위에 형태로 긁어내면 그림, 문자로 긁어내면 글, 그리고 마음 속에 긁어 새기면 그리움이다. (p. 86)


'긁는다' 에서 그림과 글과 그리움이 생겨났다라... 점토판에 기호를 새기고 절벽 바위에 그림을 새기던 것에서 그리움이 나왔던가... 무언가를 남긴다는 행위는 곧 그리움 이던가... 그리움은 추억과는 또다른 느낌의 말이다. 그리움은 애정과는 또다른 느낌의 말이다. '곁에 있어도 나는 네가 그립다' 라는 말처럼 그리움은 저자가 그림을 보며 느끼는 마음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을까.


슬픔이 가진 힘을 믿는다. 앞으로 나아감도 슬픔을 버릴 때가 아니라 슬픔을 안고 극복해 낼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계단이 된다. 그것을 밟고 서서 조금 더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시면 그만이다. (p. 102)


이 책은 우울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큼하지도 않다. 그저 아침의 찬란한 빛보다는 한낮의 환한 빛보다는 저녁의 어스름한 빛을 보며 읽는 것이 어울리는 책이다. 아주 깜깜한 밤이 되기 전의 그 시간의 분위기를 가진 책이다. 별빛이 오기전 노을이 어울리는 그런...


팀 아이텔은 평소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스냅숏을 찍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화면 속 배경과 인물을 점차 간소화하여 절제된 구성의 화면을 만든다. 결국 어디인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보편적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딘가 익숙하고 나와 닮은 듯한 장소와 인물에 자신을 반영하게 된다. 해석의 문은 활짝 열린다. 사실 예술은 우리 삶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 단어로 정의 내리기에는 범위가 넓고 경계가 모호하며 그림으로 묘사하기에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어쩌면 이렇게 축약과 함축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다 말해 주지 않기에 여운을 남긴다. 남아 있는 운치는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내 안에 머문다. 그리고 반복적인 회상은 결국 내가 나아간다는 방증이 되어 준다. 나는 거기서 더 큰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 오늘도 문득문득 떠올려 보는 것이다. (p. 109~110)


책속에 많은 그림이 등장하진 않는다. 4명의 화가의 작품이 조금 실려 있다. 그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작가들의 특성과 그들이 그린 그림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굳이 그림을 보지 않아도 저자가 인용한 몇점의 그림만으로도 왠지 그 느낌이 전달되고 있어서 좋았다. 그중 팀 아이텔 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것이 가장 좋았다.


누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물으면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플라뇌르!

플라뇌르는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 단어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도시의 곳곳을 특별한 목적없이 순간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걷다가 예쁜 빵집이 보이면 가게 앞에 서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피고, 좁은 골목이 보이면 그 끝은 어디일지 몸을 옆으로 뉘어 넣고 걸어가 본다. 빠르게 또는 느리게 걸으며 인상적인 장소는 기록으로 남긴다. 평범해 보이는 순간을 관찰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술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그들을 도시를 몸소 경험하며 그 속에서 미적, 시적 영감을 얻는 자들로 묘사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린 태도가 참으로 부럽고 가지고 싶다. 확고한 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 의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신선하고 새롭게 만드는 힘이 생겨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p. 177~178)


비교적 작고 짧은 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뇌르'적 태도를 이미 갖추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그림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호기심은 그림을 걷는 플라뇌르인 저자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그림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그림에 대한 기대가 늘 샘솟고 그림과 관련된 글을 쓰며 정리하는 생활을 살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본 젊은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가 보는 그림들이 궁금해지면서 언젠가 어느 전시회에서 팜플렛에 저자의 이름이 있다면 그림들을 보기도 전에 그 그림들이 좋아질 것 같다.

 

저자가 좋아하는 화가들인 전병구, 박광수, 카츠의 그림들도 좋았지만,

팀 아이텔의 그림들이 가장 좋았다.

나중에 팀 아이텔 전시회를 한다면 보러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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