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게 길을 묻다 -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존재의 발견 (10주년 컬러 개정판)
김용규 지음 / 비아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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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존재의 발견

숲의 가르침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사랑하는 힘을 회복하다

 

 

'숲 철학자' 라 불리는 저자의 이 책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후로도 꾸준히 읽혀져 십년만에 개정판으로 새로 나오게 됐다고 한다.

30대에 벤처기업 CEO가 되기까지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가 40을 앞두고 홀연 숲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숲에서 글을 쓰고 숲의 가르침을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 그 어떤 때보다 정말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은 자기계발서로서가 아니라 숲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었다. 언제는 유행처럼 반려동물 붐이 일면서 동물관련 책들이 쏟아지더니 최근에는 식물로 그 방향이 바뀐 듯한 느낌에 이런 저런 식물 생태계 관련 책들로 관심이 가던 차였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자기계발서 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성찰을위한 자기계발이라 힐링서처럼 읽히기도 하는 책이었다. 그리고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간 사람을 보면 후렴구처럼 떠올려지는 '월든 의 소로' 라는 표현처럼 저자는 '여우숲 의 소로' 였다.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규명하여 전하려 할 때 인과의 요소만을 주로 따지는 것은 서양의 전통적 방식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순하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속하고 명쾌하며 효율적입니다. 이 방식은 살펴보려는 사물이나 생명, 사태 등이 전부 대상화되는 특성을 갖습니다. 한편 동양의 전통적 방식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연 緣 이라는 요소를 함께 넣어 사태를 살핍닏. '인-과'라는 직선성보다 '인-연-과'라는 곡선상은 더디고 덜 선명하며 자못 복잡하여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보다 풍성합니다. 헤아려보려는 그 무엇을 단순히 대상화하는 것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 존재 그 자체로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p. 5)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이 책의 첫문장첫단락인 위 구절이었다.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하면서 저자의 관점을 잘 드러낸 부분이기도 했지만, 내게도 가장 와 닿은 부분이었다. 서양 동양 굳이 나눌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건 다른것이므로 어쩔 수없이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할때가 있는데, 요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동양적 마인드 일것 같다. 자연친화적이면서, 집단적이 아닌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공동체 문화가 필요한 때인듯 싶어서...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루쉰은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곳이 길이 된다 했지만, 그 길이 반드시 내게도 희망일 수는 없습니다. 그 길이 내게 더 이상 희망일 수 없을때, 그 길은 죽은 길이 되고 절망이 됩니다. 한때 희망이라고 믿었던 길 위에서 우리는 지금 절망의 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 걷던 길 위에서 그런 곤란함과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 (p. 13, 14)

 

여러 사람들이 앞서 다지고 간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이 반드시 내게도 옳은 길일 수는 없다. 누구나 성공가도를 추구하지만 모두 같은 모습의 성공을 원한다면 결국 탈락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탈락은 실패인가? 길은 한 갈래만 있지 않다. 고속도로가 막히면 국도로도 하고 논밭사잇길로도 간다. 산을 오르는 길이 어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겠는가? 남들이 다져놓은 편한길만 찾다가는 작은 돌에 걸려 넘어져도 다리가 부러질 수 있다. 내 발로 흙길을 조금씩 다져가는 길을 가야한다는 것은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이렇게 글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은 왜일까...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고유하고 유일합니다. 누구도 다른 누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근원성입니다. 나는 생명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특성을 바로 대체 불가능성에서 찾습니다. 그대라는 존재를 대체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정치·경제·사회질서가 요구하는 표준과 규격을 따르도록 훈련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유일함을 존중받지 못하는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결국 '나'라는 씨앗 안에 무엇이 접혀 있었는지를 잊게 되었습니다. (p. 32)

태어나는 모양과 자리와 시간이 다를 뿐, 생명 모두의 씨앗 속에는 자기 완결의 힘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p. 36)

우리 눈에 누추해 보이는 곳이나 그저 길섶에서 자라는 어느 풀 한포기, 어느 나무 한 그루라도 이유없이 자라는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뿌리를 뻗고, 키를 키우고, 꽃을 피워대느라 고단하지 않은 초목이 없는 것입니다. (p. 64)

 

저자의 어투는 굉장히 평온하다. 종교인인가 싶을 정도로 명상적인 문체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떤 특정 종교를 생각나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저 숲 속에 자리 하나 펼치고 앉아, 이나무 저나무 이풀한포기 저풀한포기 둘러보며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 그 자체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듯 조곤조곤 듣고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숲에 가면 왠지 크게 소리치기보다는 조용조용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한 말투가 몸에 배인듯한 저자의 문장들은 굉장히 조용하게 읽게 된다.

나는 가시를 떨어뜨린 나무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 그들이 가시를 버린 이유를 알았습니다. 즉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만이 가시를 버렸던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쉬이 꺾이지 않을 만큼 자신의 줄기를 살찌웠을 때 비로소 스들은 그동안 키워온 가시를 떨어뜨렸습니다. 자라면서 그들은 가시에 쏟아부었던 에너니와 양분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면 가시는 자연스레 삭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가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껍질로 덮였습니다. (p. 98)

두릅나무, 아까시나무, 주엽나무 등 성장의 초반에 가시를 달고 자라는 나무들을 보면서 저자가 깨달은 바를 통해 저자는 사람도 이와 같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세웠던 사람들도 나중에 튼튼해지면 가시를 버릴 수 있으리라고, 그러니 가시를 버릴 만큼 튼튼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가시를 여전히 달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가시를 뽑지 말고 이해해주기를 권하고자 한다. 숲에서 살며 숲을 통해 배우는 것들로 은유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은 그래서 명상적이고 철학적이 된다.

대부분의 식물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영역을 넘어 타자의 영역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키는 무리한 경쟁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자신을 꽃피우기 위한 공간을 열기 위해 오로지 자신과 다툽니다. (p. 109)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 동물보다 굉장히 제한적으로 생태계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큰나무가 있으면 어떻게든 옆으로 가지를 뻗고, 꽃이 볼품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수분할 방법을 찾는다. 타자를 의식하나 자시을 바꿔나간다. 내것을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인간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지구가 있어 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이 있어 지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가 있어 서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살뜰히 잡아주는 것으로 세상이, 별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잊어가고 있는 이 위대한 법칙을 반드시 되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홀로 온전할 수 없었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p. 121)

도시와 떨어진 숲에서는 별이 잘 보인다. 빛 공해가 없는 곳에 가서 밤하늘 보는 것을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도시에서도 밤에 불을 좀 끈다면 별을 볼 수 있을 텐데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별을 보려 도시가 아닌 곳으로 간다. 저자는 숲에 산다. 외딴 숲에서 일출과 일몰에 의해 생활리듬을 잡고 있기에 밤에는 별을 잘 볼 수 있다. 숲에는 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낮에 보이는 숲이 가르쳐주는 것과 밤에 보이는 별이 가르쳐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할 수 있어 해주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작게는 모든 생명이 생명으로서 지니고 있는, 스스로 개척하고 이루며 사는 자립의 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자, 그 재미를 빼앗는 것입니다. 또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려움과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회적 적응력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화된 적응력이 대를 이어 재생산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식들에게 지나친 재산과 기회를 구축하여 상속해주고, 이것이 반복된다면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은 구조적인 불평등 속에서 삶을 시작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낳을 것입니다. 성년이 된 자식이 그 삶을 더 안락하게 시작하도록 배려하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만, 도가 지나칠 경우 부모의 삶이나 자식의 삶이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숲에 사는 생명들은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p. 171)

자연은 자신의 새끼나 씨앗을 발아래 두려하지 않습니다.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새끼는 무서운 맹수나 맹금류를 피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위태로울 것이고, 부모의 발아래에서 발아한 씨앗은 결국 부모의 그늘에 살면서 부모와 햇빛을 나누고 양분을 다퉈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스스로 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어찌 참다운 사랑이겠습니까?숲은 비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숲은 날로 깊어가는 법을 압니다. 굳이 날갯짓을 배우지 ㅇ낳아도 새가 스스로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를 수 있듯이 자연의 모든 생명은 이미 그 안에 스스로 자라고 익어가는 법을 품고 있습니다. (p. 179)

 

뒤이어 들려주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라는 책 이야기는 유익한 사례였다. 섬진강 변에서 큰오색딱따구리를 50일간 관찰한 사진과 기록을 담아 펴낸 책으로 부부새의 육아를 온전히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자연의 삶이 대개 그러하듯 자식을 독립시키는 철저함도 교훈적이었다. 숲에 사는 저자가 감동적으로 읽을만한 책이었다.

얼마전 티비에서 치타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치타는 집단을 이루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다. 번식기에 잠깐 상대방 치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어미는 새끼를 홀로 낳아 키운다. 집단이 아닌 만큼 주변 맹수들로부터 새끼를 지켜내는 것은 제아무리 치타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 새끼를 낳았던 어느 치타는 결국 하이에나에게 새끼를 모두 잃었다. 그 경험으로 이제 치타는 다음번 태어나는 새끼들은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자연에서는 새끼를 잃는 경험으로 새끼를 지키는 법을 배울 정도로 어찌보면 냉혹하고 어찌보면 철저하다. 하지만 그래야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나무가 노동과 휴식을 철저히 자연의 흐름에 맞춤으로써, 지구상에서 가장 유구하고 장대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눈에 이것은 철저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지혜를 익힌 자들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미래를 걱정하여 밤을 지새우지도 않고,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불면하지도 않으며, 부질없는 욕망에 위둘려 밤을 배회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순간에 순간을 더하여 지금에 충실합니다. (p. 201)

사람이 나무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나무로부터 배울 수는 있다. 나무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무의 삶은 충분히 사람에게 시사하는 내용이 있다. 식물은 고민하지 않는다. 식물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저 생명력을 발휘하고 생태계를 순환시키는데 일조한다.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사람이 식물처럼 살 수는 없지만 식물처럼 살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식물의 자세를 조금 응용한다면 사람의 삶이 좀더 평화로워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저자는 숲에게서 나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깨달음을 전하고자 하지만 직유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은유는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범위로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 종의 새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30여 종의 곤충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소멸은 소멸을 낳고 그 소멸은 다시 더 빠른 소멸을 낳습니다. 우리 인간이 오로지 인간의 편리와 안전과 행복만을 욕망하는, 이대로의 탐욕을 유지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멸의 법칙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간마저도 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아직도 늦추려 하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하는 이 소멸의 연쇄를 상생의 연쇄로 바꿔내지 않으면 분명히 그런 날이 오겠지요. (p. 208)

한 종의 새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미 30여 종의 곤충이 사라졌다는 의미라니... 최근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며 생명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읽을 때마다 깨닫고 있는 중이라서인지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파괴력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우수한 품종만 간단하게 남기는 것은 그 우수종을 죽일 수 있는 균이 나타났을 때 멸종 이외의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없게 만든다. 다양성이 곧 생명력이다. 인간에게 필요하건 필요치 않건 모든 생명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존재의 이유를 무시해나가는 발전은 발전이 아니다. 눈앞의 편리보다 먼미래의 공존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삶인가 보다.

저자는 인생에서 깨달아야 할 가르침들을 숲에서 얻었고, 그렇게 자신처럼 숲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숲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숲에 가서 느낄 수 있는 가르침들을 책 한권으로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숲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도록. 그렇게 숲이 주는 가르침을 직접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숲에 가보도록.

제목이 생각나진 않지만 유명한 그림책이 떠오른다. 도시의 사람들이 휴가로 시골에 왔다. 오기 편하려고 길을 닦고 집을 짓고 마트를 들여오고 사람이 모여들자 도시와 똑같이 되버려서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한곳한곳 망쳐놓고 떠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림책 속에서 너무나 어리석게 표현되어 있었다. 지구는 무한하지 않다. 그렇게 한곳한곳 망치다가는 온 지구를 다 망치게 될 것이다.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고 마음이 지치고 삶이 힘들때 이런 책과 이런 가르침들을 찾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숲 가까이에 살면서 종종 숲에 가서 숨쉬고 올 수 있는 환경속에서 산다면 일찍 부터 숲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숲이 멀어져 가는 요즘이 더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은 존재 자체로 늘 깨달음을 준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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