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녀 새소설 4
김하서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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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두 여자의 간절함이 빛의 위로가 되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새소설 시리즈의 4권인 이 책은 앞서 읽었던 3권 <밤의 행방> 을 생각나게 했다.

<밤의 행방> 에서의 죽음을 미리 보는 나뭇가지 '반' 과 <빛의 마녀> 에서의 마녀 니콜은 판타지적 요소를 사용하는 듯 하면서도 차라리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잔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앞서 나온 1권 과 2권도 그러할지 궁금해진다.


마녀 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상되는 것들은 대부분 어둡고 음습하고 잔악하고 괴이한 여하튼 나쁜것들의 총체적 집합체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마녀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종교재판은 사실 나약한 제물을 골라 공개살인한 집단폭력일 뿐이었기에 언제부터인가 마녀는 약간은 억울하고 슬프고 한서린 성격도 부여받은 듯 하다. 하지만 그래도 마녀는 어둠의 존재였다. 그런데 이 소설은 <빛의 마녀> 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소설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밤의 행방> 도 <빛의 마녀> 도 제목을 참 잘 지었다. ㅎㅎ


나는 순진함 속에 고집스러운 악의로 가득 찬 그 애들의 검은 눈동자가 좋아요. 그 애들을 보고 있으면 벼랑으로 무섭게 질주하는 검은 야생마가 떠올라요. 내가 야생 흑마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떨리고 흥분되죠. 그 애들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p. 10)


금발에 초록눈을 가진 영국인 니콜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200년 넘게 숨어살고 있는 마녀라고 말한다. 쇄골과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에 새겨진 표식을 문신이 아니라 뜨거운 불로 지져 생긴 화인 즉 마녀라는 존재임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니콜은 자신의 딸 샬럿이 야생마 같았다고 생각하지만, 벼랑끝으로 달려가는 검은 야생마는 니콜 자신이었다.


열두 시간 만에 만난 그녀의 주치의는 이제 아이 머리가 보이니 최대로 힘을 줘보자고 했다. 그녀는 너무 고통에 지친 나머지 그 말에 아무런 감응을 받지 못했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오직,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이었다. 수간호사가 그녀의 배를 사정없이 누르고 주치의는 노련하게 아이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똑같은 과정을 세 번 거친 후에야 아이의 머리가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의 어깨, 가슴, 배, 엉덩이, 다리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고통이 썰물처럼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희미하고 생경해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p. 23)


태주는 불안한 여자였다. 임신하고 나서는 세상에 얼마나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들 깨닫고 늘 웅크리며 태동에 집착했다. 태주의 불안을 먹고 자란 아이는 태어나고 26시간만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태주는 한겨울에 맨발로 병원앞에 피켓을 들고 서기 시작했다. 그러다 니콜을 만났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에게 벌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혼자 살아남은 어미의 애끓는 가슴. 유리 조각이 깔린 길을 온종일 걸어 피투성이가 되어도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어요. 그녀의 불행이 자기에게 옮겨붙을가 봐 달아나기 바빴죠. 사람들의 염려는 틀리지 않아요. 불행은 회색 먼지 같아서 누구의 어깨에나 내려앉아요. 그게 불행의 법칙이에요. 부자든, 가난하든, 젊었든, 늙었던, 공평하게, 예고 없이, 순식간에 악의 꽃을 피우죠. (p. 27)


니콜은 한눈에 태주를 알아보았다. 자신과 같은 상처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러나 마녀도 영원히 불멸할 수는 없어요. 안 그러면 세상은 넘쳐나는 마녀들과 인간의 숨은 욕망이 결탁해 광기와 피로 어지럽혀지겠죠. 마녀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어요. 그들에게 붙잡히면 정말 먼지처럼 사라지죠. 마녀사냥꾼. 그들만이 마녀를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멸시킬 수 있죠. 누구도 모르는 마녀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도 오랜 시간 마녀사냥꾼에게 쫓기며 살아왔어요.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p. 36)


니콜이 두려워하는 니콜만을 쫓아다니는 에드워드를 니콜은 기억하지 못한다. 에드워드가 누구인지. 에드워드였던 사람은 기억하면서 지금의 에드워드를 알아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니콜의 약점이라서...


마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사람들의 숨은 열망, 검은 유혹, 악의를 현실로 만들어줄 뿐이죠. 잊지 말아요.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건 오직 검은색 뿐이라는 걸. 별이 아름다운 건 그 뒤에 존재하는 어둠 때문이에요. (p. 51)

마녀는 고독한 삶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도 누군가의 이해와 친구가 필요해요. 다만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녀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p. 67)


니콜은 끊임없이 자기자신은 마녀라고 마녀는 이렇다고 이야기한다. 태주에게 죽은 아기를 되살릴 방법이 있다고 접근하고 태주는 니콜이 마녀라는 것을 믿을만큼 간절했다.


그날은 노오란 개나리가 만발한 눈부신 봄날이었다. 모든 불운한 일들은 눈부신 빛 아래 일어난다. 불운은 더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빛을 선택한다. (p. 79)


소설속에서 노란색은 불행의 색이다. 니콜의 남편이 바람피우던 여자에게 선물한 꽃이 노란 장미였고, 태주의 귀가 안들리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 노란 병아리였다. 노란 색은 눈부신 색이다. 봄의 색이다. 한겨울 맨땅바닥에 맨발로 서있는 여자 태주와 계절과 상관없이 사는 니콜에게 봄의 색은 불행의 색이다.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 해봤니 비오는날 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렸다면 흐름에 방해가 되려나 ㅎㅎ


우리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늘 우리를 쫓는 마녀사냥꾼이에요. 그들은 우리가 잠든 순간에도 우리를 쫓고 있어요. 그들을 잊고 사는 순간에도 그들은 우리를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요. 제일 끔찍한 사실은 마녀사냥꾼은 한 마녀만 쫓는다는 거예요. 보통 사냥꾼하곤 다르게 타협이라는 게 안 통해요. 사냥을 멈추는 순간은 그들이 쫓는 마녀가 잡힐 때뿐이죠. 에드워드는 나를 쫓는 마녀사냥꾼이에요. (p. 109)


니콜은 에드워드 몰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한국까지 왔고, 에드워드도 마지막에는 니콜을 찾아낸다. 니콜이 그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불행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 자신이 초래한 불행을...

이 슬프고 가슴아픈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한놈만 패' 라는 영화대사가 떠올라 나도모르게 피식 웃었지만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은 아니었다. 정말 잠깐 이었을뿐 바로 소설속에 다시 빠져들었으므로 나는 작가에게 당당하다!


나는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를 모두 들이켰어요. 나에게 슬픔은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켜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쓰고 뜨거운 것을 가슴속에 단숨에 밀어 넣는 거죠. 그리고 숨을 참듯 그 순간을 견디는 거예요. 슬픔은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하지만 결국엔 혀끝에 진한 향기가 남게 돼요. 에드워드와 나는 슬픔을 나누듯 에스프레소를 나눠 마셨어요. (p. 140)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여자가 나눠가질 수 있는 불행은 딱 에스프레소 한잔 만큼의 양이었을까... 그 진한 향기도 곧 기억하지 못하게 된 여자는 자신이 마녀라고 믿게 되버렸다.


태주는 작은 빛이 방금 묻어준 새의 영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그 빛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묻힌 것을 알았다. 주위를 돌아보자 여자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 걸까. 스산한 풍경 어디에도 집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태주는 검푸른 하늘의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p. 248)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한채 형벌의 길을 가던 태주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멈출 수 있었다. 태주가 꾼 꿈은 니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니콜은 늘 천사의 꿈을 꾸었다.


그날 짧은 순간 봤던 황금빛 드넓은 밀밭을 찾을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떠돌 거예요. 그곳을 찾으면 나는 진짜 자유로운 바람의 딸이 될 거예요. 바람이 되면 당신에게도 찾아갈게요. (p. 264)


깜깜한 우주를 통과해 이 세상에 온 천사가 눈에 보이는 듯해 태주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태주는 어린 엄마의 등을 쓸어주며 가슴에 수천 개의 꽃잎이 날리는 듯 벅차올랐다.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태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믿는 순간, 당신이 바라는 걸 이루게 될 거예요.

마녀 니콜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바람은 태주의 머리칼을 흔들고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을 향해 떠나갔다. 햇살이 금가루처럼 그들 머리 위로 따사롭게 내려앉았다. (p. 267)


니콜이 여전히 바람처럼 떠돌고 있을지 아니면 천국을 찾았을지 알수 없다. 하지만 태주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홀가분해졌다. 이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니콜의 독백은 서서히 미쳐가는 한 여자의 내면을 읽는 듯 했고 미칠만큼 컸던 상처의 크기를 가늠해보게 했다. 태주의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이 혼자만의 고통이었기에 가슴아팠고 처절함이 쓰리게 다가왔다. 니콜도 태주도 한 아이의 엄마였고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였다. 그녀들의 상처가 상실된 모성이었을지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이었을지 어느쪽이 더 컸을지 모르겠다. 혹은 둘다였을지도... 스스로 마녀가 되고자 했으나 그녀들은 빛의 마녀였다. 한명은 빛을 쫓아가고 한명은 빛에 눈을 뜬, 어둠에 있어봤기에 마녀이고 어둠에서 나왔기에 빛의 마녀가 되었다.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 라는 자음과 모음의 젊은 작가 새소설 시리즈는 창작과 비평 출판사의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 이라는 소설Q 시리즈의 젊은 작가 작품들을 생각나게 했다.

창비의 소설Q시리즈는 1,2,3권을 읽어보니 예민하거나 참신하거나 독특하게 기존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소설의 다양한 표현법이 새로웠고, 자음과모음의 새소설시리즈는 3,4권을 읽어보니 현실문제를 직시하되 타성에 젖지 않은 작품을 써내는 젊은 작가들의 발견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두 소설시리즈에는 관심이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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