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재생 이야기
김정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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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진화 중인 런던의 비밀은 무엇인가

도시학자가 바라본 공간과 사람에 대한 철학

 

 

밀레니엄브릿지에서 찍은 세인트폴 대성당과 하늘이 어우러진 표지가 산뜻하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이다.

몇년 전 런던에 일주일쯤 머문 적이 있었다. 숙소가 세인트폴대성당 근처라서 도보로 성당과 밀레니엄브릿지 건너편을 오가며 산책하곤 했었다. 그때는 걸으면서도 그 길들이 왜 편한지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것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어디를 가든 보행자 중심이었다. 런던시내 곳곳엔 걷기 좋은 곳들이 정말 많았다.

런던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산업시대때부터 전통깊은 도시인만큼 낙후지역도 많았고 발전격차가 벌어진 곳도 많았다. 하지만 런던은 도시재생사업을 꾸준히 벌여왔고 여전히 진행중이기도 하다. 다른 대도시들도 그런곳이 많겠지만, 도시재생사업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런던을 선택한 것은 완성된 모습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방향성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런던이 도시재생에 크게 성공한 것처럼 언급되지만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혹독한 시련과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일련의 과정이 유사한 상황에 직면한 도시들에 충분히 교훈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필자가 런던에 주목하는 분명한 이유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선정한 10개의 대상은 성공한 사례라기보다 교훈적인 사례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p. 6)

시행착오는 중요하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실패로 간주하고 뒤엎어버리기기 쉽지 시행착오에서 무언가를 배워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은 쉬워도 배울건 배우고 버릴건 버리는 반성과 통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런던의 도시재생사업의 사례들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그 어려운 시간들을 거쳤기에 지금의 런던이 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제1회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던 런던이 100주년을 기념하며 개최했던 영국 페스티벌의 중심지역으로 선정됐던 '사우스 뱅크' 는 페스티벌이 끝난 후 그 영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도시재생사업을 새롭게 추진하게 된다. 기존과 다른 방식의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한 모범적 지역으로 발전한 이곳은 지금 시민 모두를 위한 휴식처이자 아지트가 되었다.

오늘날 테이트 모던은 미술품을 전시하는 장소로서의 가치를 훌쩍 넘어선다. 문화예술공간이 쇠퇴한 장소, 나아가 지역 전체를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테이트 모던은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템스강 남북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영국의 대중지 '타임 아웃'을 포함한 각종 언론의 조사에 따르면 테이트 모던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p. 34)

런던에 관광을 가면 꼭 들러야할 곳 중에 '테이트 모던'은 늘 들어가 있다. 이 예술적 장소는 원래 운영을 중단하고 방치되있던 '화력발전소' 였다. 우리나라에 강남과 강북의 경제격차가 있듯이 런던엔 템스강 북쪽과 남쪽의 경제격차가 있었고, 남쪽은 늘 낙후지역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쇠퇴한 지역에 자리잡은 '테이트 모던' 은 예술적 공간의 가치를 넘어 지역발전 균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테이트 모던' 을 템스강 북쪽 지역과 연결해주는 다리가 '밀레니엄 브릿지' 인데, 이 다리의 의미 또한 남다르다.

오늘날 다리 디자인에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공법과 첨단 재료가 적용되는 만큼, 드러난 결과들 또한 무척 화려하다. 이에 반해 밀레니엄 브릿지는 최근에 건설된 다른 다리들과 비교해 외형적으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 대신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보행자 전용 거리로 편안하게 연결함으로써 오랫동안 단절된 템스강 남북을 어우르고 런던을 통합하는 출발점을 만들었다. (p. 82)

이 다리 디자인을 공모했을때 수많은 디자인들이 제출되었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디자인들이었지만, 최종 선택된 것은 다리 자체를 빛나게 해주는 디자인이 아니라 다리가 연결하는 두 지역을 돋보이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다리를 만드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의도를 캐치한 디자인이 지금의 밀레니엄 브릿지 였다.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길에서 길로 연결된 '길' 로서 이 다리를 건너다닌다. 다리 자체를 보며 감탄하지 않는다. 다리위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의 지붕을 보며 감탄하고 다리위에서 테이트모던의 독특한 건물외양에 설레여 하며 그저 건너다닐 뿐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길인 것처럼.

유럽 도시들은 공통적인 도시 구성방식을 갖는다. 규모와 형태는 다르지만 상징 광장을 중심으로 대성당과 시청이 자리잡고, 그 외에 중요한 정치, 행정, 문화예술 관련 건물이 광장 주변을 에워싼다. 이와 같은 구성은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 문명의 영향으로써 유럽 대부분의 도시들이 비슷한 원리를 따랐고, 전쟁이나 재난 등의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큰 변화없이 현재까지 유지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럽 주요 도시들의 시청은 보통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낡았을지라도 신축하는 것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p. 85)

이 유럽적 전통을 획기적으로 깨뜨린 곳이 런던 시청 이다. 독특한 외관도 그렇지만 그 위치도 파격적이었다. 중심지가 아닌 낙후된 남부 템스강변에 자리잡음으로써 주변 지역까지 재생시켰다.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 가 늘 새롭게 함께하고 강변 산책로까지 개선시킨 런던 시청은 저자의 표현처럼 '겉모습은 전혀 시청답지 않지만, 내면은 가장 시청답다' (p. 96) 그렇게 런던시청은 런던시민들이 런던을 색다르게 즐기는 공간이 되었다.

런던은 템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므로 강 주변에 다양한 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테이트 모던이 된 곳도 강변의 화력발전소였고, 템스 강을 오르내리는 무역에 의해 거대한 창고들도 강변에 즐비하게 건설되 있었다. 그러다 강을 오르내리는 물류산업이 쇠퇴하면서 거대한 창고들은 쇠락해갔다. 이 쇠락한 창고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임대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다양한 예술가들이 작업실로 관심을 갖고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변모해갔다.

도시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쇠퇴와 마주한다. 쇠퇴한 지역에 남은 과거 유산을 활용할 것인가, 아닌가는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모두 헐고 전면 재개발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샤드 템스는 기존의 산업유산과 주변 공간을 보호하고 재활용하는 것으로,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는 것 이상의 장소를 만들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다시 말해, 도시재생의 구체적인 대안과 가시적 성과를 남겼다. (p. 126)

버려진 창고지대를 훌륭히 복구해낸 샤드 탬스가 있는가 하면 철저히 실패했던 지역도 있었다. 바로 세인트 폴 대성당 앞쪽 지역인 '파터노스터 광장' 이다. 세계2차대전 이후 완전히 파괴된 이 지역을 개발하던 당시 실용성에 중심을 둔 고층건물 중심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0년에 걸친 건설이 마무리되고 몇년후 쇠퇴하는 초유의 현상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완공된지 20년만에 다시 재개발하기로 전격 결정된다.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의 도시계획 역사상 전무후무한 충격적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역사지구, 그것도 오랜 논쟁 끝에 채택된 마스터 플랜에 따라 완공된 장소를 고작 20여 년이 지나 재개발한다니! (p. 137)

큰 실패를 바탕으로 큰 교훈을 얻은 런던은 이 지역 20년밖에 안된 건물들을 부수고 다시 새롭게 구획을 정비하고 층수를 낮춰 재개발했다. 어디서든 세인트 폴 대성당의 커다란 돔 지붕을 볼 수 있게된 지금은 이곳이 런던 시민들을 위한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와 달리 쇠퇴는 커녕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아마 '시장' 이 아닐까.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 은 도시형 재래시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전통의 맥은 있으나 점점 낙후되고 시장으로서의 기능도 쇠락해가던 때 재생사업이 추진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새롭고 최신식 현대적 시장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 아니라, '조명, 전기 배선, 배수, 바닥 포장, 페인트 등 기본적인 기반시설' 에 집중함으로써 본래 가졌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뒀다는 점이다. 이렇게 새로워진 시장은 여느 백화점 못지않게 성황리에 관리되고 운영되고 있다.

브런즈윅 센터는 영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일체형 주상복합 공동주택이다. 영국에서 주거와 상가가 단일 권역, 특히 하나의 공동주택에 자리하는 방식은 보편적이지 않다. 영국의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주거 영역과 상가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방식은 단독주택이나 공동주택이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공동주택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처럼 단지 내에 편의시설을 갖춘 별도의 상가를 만들지 않고, 광장이나 정원 등 거주자들이 공유하는 공공공간만 존재한다. 따라서 철저하게 주거 영역은 주거 기능에만 충실하고, 상권은 주거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조성된다. (p. 174)

역시 문화가 다르면 환경도 다르게 구성된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내에 상가가 없으면 이상하고 아파트 촌 바로 옆에 상가 촌이 없으면 불편하다 여기며 주상복합이 제일 비싼데 영국사람들은 이런 구조를 선호하지 않는다니. 주상복합 형 브런즈윅 센터는 결국 건설되고 얼마후 바로 낙후되기 시작했으나 중심에 광장을 만들고 시민들이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재탄생하게 되었다. 도시재생은 그 도시의 문화적 수용성을 감안해야 성공하기 마련이다.

런던에서 가장 높고 유일한 최고층 빌딩은 '더 샤드' 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런던의 랜드마크로서만 상징적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런던 브리지역' 의 도시재생사업의 결과로서 더 의미있는 곳이었다.

런던 브리지역은 과거나 현재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각종 오명을 얻었다. 런던에서 가장 복잡한 역, 런던에서 길 찾기 가장 힘든 역, 런던에서 가장 지저분한 역, 런던에서 가장 추한 역 등 사실상 역과 관련된 부정적 이야기는 모두 들을 정도였다. (p. 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어설프게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이었다. (p. 195)

더 샤드의 성공여부는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공간적으로 런던 브리지역과 어떻게 연결되고,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인가가 더욱 중요했다.

건물의 형태는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볼륨이 감소해서 300미터가 넘는 높이에도 시각적으로 주변을 압도하지 않는다. 무어보다 중요한 것은 저층부를 최대한 비워서 런던 브리지역의 공용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킴으로써 최대한 공공성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더 샤드에서는 도시에서 흔힌 마주하는 권위적ㅇ니 초고층 건물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절제된 디자인으로 실제 방문객이나 주변 보행자는 더 샤드의 존재를 크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p. 198)

초고층 건물이 주는 위압감... 저자의 글을 읽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말 그랬다. 더 샤드 주변부를 걸으며 이 건물이 크다거나 위압적이라거나 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미리 예약하면 위층에 있는 전망대를 올라갈 수 있어서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다 시간맞춰 전망대에 올라갔을때 내려다본 런던 시내 풍경에 속이 뻥 뚫리며 새삼스럽게 이 건물이 이렇게 높았나 싶은 기분이 들었었다. 잘 지어진 건물이란 외형적으로 위용을 뽐내는 것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 건축가가 일관되게 공유한 생각은 사용자와 지역 주민을 동시에 고려한 공공성이다. 결국 전혀 다른 두 개의 혁신적 개념이 런던 브리지역에서 통합되어 지역 활성화를 위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p. 204)

런던 브리지역은 내·외부 공간 모두 철저하게 보행자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앞서 설명했뜻이 기존역사가 오명을 넘어 악명을 얻을 정도였기에 새로운 역사가 이용자들과 주민들에게 주는 감흥은 크다. (p. 211)

저자가 알려주는 도시재생사업의 예들을 보면서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사업의 핵심가치는 '공공성' 과 '보행자중심' 이었다. 런던 브리지역에 이어 이 책의 마지막 예로 등장하는 킹스 크로스 역 재생사업은 앞선 사례 지역들을 통과하는 가치들의 총집합 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21세기에 추진된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사례를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도 '킹스 크로스'일 것이다. 왜 그럴까?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시민참여, 민관협력, 공공공간 조성, 보행환경개선, 역세권 활성화, 산업유산 재활용, 복합개발, 주거지 활성화 등 오늘날 도시재생이 추구하는 화두의 대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 217)

초기 논의 과정에서 전문가들과 주민들이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높은 비율의 공공공간과 보행친화형 디자인 때문이다. 그 출발은 킹스 크로스역 앞의 광장과 주변 공간이다. (p. 248)

전체 8만여 평의 사업 부지에서 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거의 모든 공간이 보행 중심이다. 앞서 설명한 일련의 프로젝트 중에서 서비스 차량을 제외하고 일반인의 차량 출입이 가능한 장소는 단 한 곳도 없다. (p. 250)

도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전과 낙후과 왔다갔다 한다. 따라서 사람이 잘 갈 수 없는 곳은 사람이 걷기에 불편한 곳은 사람이 모일 수가 없고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지역활성화는 언감생심이다. 런던의 도시재생사업을 보면서 가장 좋아보였던 점은, 낙후된 지역과의 균형 발전을 고려하되 일시적이 아닌 장기적 활성화를 염두에 두고 광장이 되었든 공원이 되었든 일단 사람들이 모일수 있는 공공공간을 중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행자중심의 길과 건물이 들어서게 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게 되면 지역활성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걸어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곳, 걷다보면 자연스레 사람이 모이는 곳, 그런 공간들이 우리 도시들에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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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멀 - 인간과 동물이 더불어 산다는 것
김현기 지음 / 포르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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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MBC 창사특집 화제의 다큐멘터리

인류의 공존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밀도 있는 현장 르포를 담다

 

 

휴먼 그리고 애니멀

익숙한 이 두 단어를 합친 휴머니멀 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만큼 우리는 어쩌면 인간과 동물을 너무 떼어놓고 생각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공존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속에 생명체는 오직 인간뿐이라고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느끼며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려왔다.

부처의 자비를 기리기 위해 축제를 열지만, 거기에 동원된 코끼리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실. 인간은 초월적 존재를 숭앙하지만, 그 방식은 철저히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문다. 생명 존중에 방점을 찍고 문제를 제기해도, 받아들이는 쪽은 그 진의를 외면하기 일쑤다. (p. 31)

처음 등장하는 동물은 아시아코끼리 이다.

동남아시아 여행패키지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곤 하던 코끼리 서커스나 코끼리 타보기 혹은 현지 축제에서 화려한 천을 걸치고 행진하는 코끼리들을 보며 그 코끼리들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외면해온 것은 아닐까... 야생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얼마나 혹독하고 잔인한지 직접 보지 않았으니 몰랐다고 하기엔 이미 세상에 넘쳐나는 증거자료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시아 코끼리와 인간의 관계를 '학대'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면, 아프리카 코끼리의 경우는 '밀렵'이다. 아시아 코끼리와 달리 아프리카의 코끼리는 대부분 커다란 상어를 지니고 있다. 이 길고 아름다운 어금니를 노린 밀렵은 소일거리나 우발적 행동을 넘어서 음성적인 산업의 수준에 이른 지 오래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코끼리의 개체수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다 못해 멸종 위기를 맞았을 정도로 말이다. (p. 45)

상아를 얻기위해 밀렵꾼들의 방법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었다. 예전보다 규제가 생기고 보니 총을 쏘아대기 보다 한방이든 마취든 일단 쓰러뜨리고 나면 살아있는 상태에서 전기톱으로 상아가 박힌 얼굴을 도려내 가고 있다. 밀렵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사체에 독약을 뿌려놓고 사체를 먹는 동물들까지 몰살시킨다고 한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불법 상아 밀렵이지만, 인간과 동물 간 갈등에 의한 코끼리 살해 건수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코끼리의 생존에 위험 요소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식량, 물, 영토 등 필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경쟁자인 인간들은 양적 팽창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50년까지 아프리카 인구는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날 전망이고, 코끼리의 영역을 잠식하는 속도도 드라마틱하게 빨라지는 추세다. (p. 81)

타노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자연은 존재하던 곳에 그저 존재하고 동물도 그 자연속에 그저 살고 있었을 뿐인데, 침범해들어간 것은 인간인데 인간은 동물이 자연이 훼방꾼인양 거침없이 그들을 치워내고 있는 중이다.

식용이나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레저와 전시를 목적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를 '트로피 헌팅'이라고 한다. '트로피'는 벽에 걸어놓기 위해 그 동물의 머리를 박제하여 만든 장식품을 가리킨다. 서구사회에서 트로피 헌팅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레포츠 산업으로 번성하고 있다. (p. 89)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사냥과 유흥거리로 하는 사냥은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트로피 헌터 들은 스스로를 야생환경보호활동가 라고 여긴다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지역주민들이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비싼 돈을 내고 일부분만 사냥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헌터들이 지불하는 비용의 대부분은 그들을 사파리에 데려다준 헌팅업체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또 상당한 액수가 부패한 정부 관료에게 흘러들어가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약간이라도 혜택을 보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을 수 있지만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단 한번도, 멸종위기 종을 보호하려는 모범적인 트로피 헌팅을 본 적이 없습니다. (p. 133)

미국인 유명 트로피 헌터가 사냥을 한 후 그 자리에서 고기를 잘라 주민들에게 선심쓰듯 나눠주고 저녁 만찬에서 현지 업체직원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은 제국주의 시대 주인과 노예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2013년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의 보고서에 따르면, 헌팅 관광으로 발생한 전체 수입 중 지역사회로 유입된 비율은 고작 3%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정부기관이나 중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을 뿐이다. 오히려 트로피 헌팅보다 에코 투어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13배 이상 크다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이 존재하는데도 시스템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총기를 이용한 사냥은 그나마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어 나름 조심하는 분위기라도 있는듯 한데 더 큰 문제는 전통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자행되는 마구잡이 살육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타이지 마을의 돌고래 사냥이다. 이들의 방식은 그야말로 '피바다' 그 자체였다.

야생동물과 가축 외에 동물의 세번째 유형이 등장한다. 원래 야생동물이었고, 야생동물이어야만 하나, 인간의 손을 타 그 정체성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동물. 야생동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축은 더더욱 아닌, 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태도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될 동물들. 불안정한 지배가 낳은 '경계동물'들은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위태로운 선택의 순간을 맞고 있다. (p. 198)

어미를 잃거나 다친 아기곰들을 살펴주고 야생으로 보내는 일을 하느라 사비를 털어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패한 정권으로 생존의 위기에 몰린 나머지 사자의 영역에서 소를 키우느라 사자를 죽여야 하는 원주민이 있다. 지속적인 내전속에 마구잡이로 잡아먹혀져 세계에 단 두마리 남은 북부흰코뿔소 는 곧 멸종 선언을 받게 될 예정인가 하면 사자나 기린 코뿔소 처럼 책속에 흔히 등장하는 동물들이 멸종위기종이라는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기도 하다.

인간이 압도적 지배자가 된 20세기 100년 동안 척추동물이 멸종한 속도는 인간 출현 이전의 100년보다 최고 114배나 빨랐다.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의 포유류 멸종 속도는 과거 같은 시기보다 55배, 조류는 34배, 파충류는 24배, 양서류는 100배, 어류는 56배나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속도가 빨라진 양서류의 경우,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100동안 1만 개의 종 가운데 2개만 멸종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는 1만 개 가운데 200여 개의 종이 멸종하고 말았다. 이는 6,600만 년전 공룡이 멸종한 '다섯 번째 대멸종'이후 가장 빠른 속도다.

문제는 이 지나치게 빠른 멸종의 원인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이다. (p. 266,267)

숫자로 다가오는 멸종의 속도는 압도적이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0년 안에 생물종의 50%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한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길어야 1만년안에 지금의 반 이상이 멸종할 것이라고... 동물들의 멸종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이 말은 어떤가?

"다섯 번의 대멸종마다 볼 때 당시의 최상위 포식자는 반드시 멸종했는데, 지금의 최상위 포식자는 인류다. 이것이 규칙이라면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앞당긴 멸종 위기에서 공룡과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까?" (p. 269)

인간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인간만 남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질 지모 모른다. 자연에서 멀리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인간사회에서만 살고 있지 자연이 동물이 무슨 관계가 있나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왔고 지금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지 못한것이 훨씬 많다. 지금 질병의 시대또한 자연을 함부로 다룬 댓가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계속 현실을 직면하지 않을 것인가?

피와 눈물, 삶과 죽음, 분노와 안도감이 뒤엉킨 먼 길을 돌아와 마침내 찾아낸 해답은 '그럼에도 인간' 이었다.

처음에는 '휴머니멀'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위한 특별한 묘책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묘책 같은 건 없었다. 이제껏 제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인간의 탐욕을 지금부터라도 정면으로 응시하고, 멈춰내겠다는 결심. 그것이 이 기울어진 공존의 균형추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유일한 희망이다. (p. 283)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물보호 활동가가 될 수는 없고, 될 필요도 없다. 환경운동에 투신하거나 채식주의자로 사는 것이 유일한 해법도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일상 속에서 생태계를 위한 작은 실천을 행하는 것. 이 각성이 주는 자괴감과 위기감에 비추어, 해야 할 일에 나서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멀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존을 향한 작지만 담대한 첫걸음이 아닐까. (p. 284)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이었다. 인간이 벌여놓은 일 인간이 수습하는 수밖에 없는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진정한 공존을 고민해야 할 주체는 결국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지금 멸종의 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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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랜드 -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
올리버 벌로 지음, 박중서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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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전초기지는 어디인가

스위스 은행, 파나마의 유령회사, 저지섬의 신탁, 리히텐슈타인의 재단....

21세기 금융공학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나라

21세기 해적질에 관한 통렬한 고발장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이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독재자의 약탈을 묵인하는 핵심 기지는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전초기지는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금융공학이라는 고급진 허울뒤에 숨은 진짜 목적은 21세기형 해적질이었다. 그 해적들의 보물섬은? 머니랜드다.

'머니랜드' 는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비밀국가 이름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머니랜드의 실체를 진짜 이름을 지도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무너졌을때, 어떤 역사가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겼다고 서방세계는 들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후의 동유럽의 정치상황은 전혀 예상밖으로 흘러갔다. 새롭게 출발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생생한 기사를 쓰고자 모스크바로 이주했던 저자는 '이후 10여 년 동안 나는 자유와 우정에 관하여 글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전쟁과 학대에 관해서 보도하고, 편집증과 괴롭힘을 경험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없었다. 오히려 역사는 가속화되었다.' (p. 20)

부패정권이 속출했고 국민들의 세금은 엉뚱한 곳에 쓰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저자가 우크라이나 의 현실을 알려주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에서 어떻게 삶이 지속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무법지대였다.

국가는 이들 주위에서 증발한 상태였다. 부패가 어찌나 속을 갉아먹었던지, 불법적인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말고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기를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국민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국가를 과연 누가 지키고 싶어 하겠는가? 부패가 온 나라에서 그 합법성을 앗아 가 버린 셈이었다. 이런 종류의 분노가 우크라이나를 잠식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들을 잠식해 버렸다.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중동의 국민들이 테러리스트 집단에 가입하게 된 동기도 역시나 이런 분노였다. (p. 29)

길가다 교통신호를 어기면 경찰에게 돈을 주면 되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진료비 외에 의사에게 돈을 따로 주어야 했다. 사업을 하려면 공무원에게 일단 뇌물을 주어야 했다. 공무원은 세금을 착복하느라 혈안이 되었고 병원에는 약이 떨어졌으며 사방이 무법천지가 되는 동안 뭐라도 하려면 일단 돈부터 상납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라의 대통령은 황금궁전을 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궁전이 지어진 곳은 다른나라의 소유였다. 혁명세력에게 쫒겨난 대통령은 국외에 쌓아두었던 돈으로 호의호식하느라 제 나라로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역외 책략을 이용하는 부유한 사람들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이용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그토록 훨씬 덜 평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일부라는 사실쯤이야 굳이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p. 32)

부패는 반서구 적국들에게 전력 증강 요소이지만, 정작 서구는 계속해서 적들의 더러운 돈을 수십억 달러씩 자기네 경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돈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빨아들이면, 결국 땅이 무너진다. (p. 34)

돈의 흐름은 국경을 넘나들지만, 법은 그러지 못한다. 부자는 전 세계를 누비며 살아가는 반면, 나머지 우리는 국경을 갖고 있다. (p. 36)

돈 버는 수단이 다양해지는 만큼 돈을 숨기는 방법도 다양해진 것 같다. 국내에서 재산을 지킬 수 없다면 국외로 내보내 쌓아둔다. 나라마다 다른 법은 그러한 재산들을 보호될 수 있는 틈이 있었고 부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지고 부자나라는 더 부자가 되고 있었다. 내돈은 내돈 니돈도 내돈 뭐 그런식으로.

그 당시 영국의 라디오 청취자들은 들을 만한 새로운 방송국 몇 개가 더 생겼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법적으로 오로지 BBC만 라디오로 방송이 가능했기에, 새로운 팝 아티스트들을 청취자와 공유할 시기에는 후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십 대 청취자는 신나고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어 했으며, BBC가 이들의 곡을 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진취적인 선주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보았다. 이들은 자기네 선박에 라디오 장비를 실어서 영국의 영해 바깥에 정박시킨 다음, 영국을 향해 팝 음악을 방송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라디오 운영자를 해적이라고 불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송국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바로 '역외' 라는 이름이었는데, 비록 재미는 덜하지만 언어상으로는 더 정확했다. (p. 61)

1950년대 아직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문화또한 그랬다. 섬나라 영국에서는 바다라는 무한한 공간을 이용하기가 용이했고 '해적방송'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 해적방송의 아이디어는 돈의 세계에도 엄청난 힌트가 되었다. 시작은 '무기명 채권' 즉 역외채권이었다. 이 기발한 채권은 조세회피와 수익창출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최초의 고객들은 나치를 피해 스위스에 돈을 은닉했던, 그리고 마침내 그 돈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발견했던 유럽 유대인이었다. 문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텔아비르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던 그 사생활 보장과 운반 가능성과 편의상에 급기야 안트베르펜의 치과의사, 런던의 내부 거래 은행가, 심지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치까지도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다. 스위스에서는 합법적으로 대피한 돈이 야비한 조세 회피 자금과 뒤섞였고, 이는 또다시 사악하게 약탈한 돈과 뒤섞였다. 유로본드는 그 출처를 불문하고 숨겨야 하는 현금을 지닌 모두에게 편리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머니랜드의 마법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부자들이 열어 놓은 최초의 순간이라고 할 법하다. (p. 70)

스위스의 중립성은 여러면에서 안전함을 보장했다. 스위스은행은 그 안전함을 이유로 돈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쌓여가는 돈을 묵혀놓는다는 것을 아까워한 사람들이 유로본드 라는 역외채권을 만들어냈다. 안전했던 돈은 이제 돈이돈을 벌어들이게까지 되었다. 철저한 보안성은 돈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고에 넣어주었었는데, 이제 그 돈들은 더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바르부르크의 투자은행에서 시작된 발전은 단순한 유로본드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기본 패턴은 복제 가능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고객들에게 돈을 벌어 줄 수 있는 사업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둘러보아 그 사업에 적절한 법령을 보유한 사법관할구역(예를 들어 리히텐슈타인, 쿡섬, 저지섬 등)을 찾아냈고, 그런 곳들을 명목상의 기지로 사용했다. 딱 어울리는 법규를 가진 사법관할구역을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들에게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법규를 바꿀 때까지 위협하거나 아첨했다. (p. 74)

돈이 돈을 버는 동안 나라의 법규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국내법에 제한이 걸릴 것 같으면 다른나라의 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치권을 가졌으나 작은 나라들이 그 전초기지가 되었다. 왠만큼 큰 세계지도가 아니면 어디있는지도 몰랐던 그런 나라들은 법적으로 존재하나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런 가상의 주소지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 댓가로 그 작은 영토를 유지관리할 수 있는 나라의 수입이 창출되었다.

진정한 혁명은 법치가 없는 국가, 또는 서양 같은 튼튼한 정치 제도가 없는 국가에서 이런 책략들이 차용되면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러니까 브레턴우즈 체재에서 자본이 갇혀 있었던 시절, 머니랜드의 탄생은 이미 과거 여러 세기 동안 대결을 벌여 왔던 과세 당국 대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결과였다.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통제하기 위한 이 장기간의 전쟁은 포식자와 멋잇감 사이에서 진화론적 군비 경쟁을 만들어 냈고, 양측은 속도와 교활하과 기민함에서 더 눈부신 개가를 올리기 위해 번갈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유령회사, 신탁, 비밀 은행 계좌, 무기명 도구 기타 등등.. 미국 재부부조차도 이런 종류의 저항에 맞서기 위해 분투하는실정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곳에서는 자기네가 지금 뭐에 맞서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구소련의 생태계에 이 포식자들의 도구를 풀어 놓게 되자, 그것이야말로 완벽히 잘못된 만남이 되고 말았다. (p. 109)

나쁜일은 빨리 배운다고, 차근차근 발전을 거듭하며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갑작스런 체제변화로 한꺼번에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간 국가들에서의 혼란은 표면적인 것보다 그 아래 숨겨진 부분들이 더 급성장을 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 미끼를 꿀꺽 독식했다.

비닐봉지를 더 많이 겹쳐서 개똥을 담을수록, 외부자들은 그 내부에 뭐가 있는지를 깨닫기가 더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봉지를 유명 귀금속 업체 티파니엔드컴퍼니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에 넣어 두면,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p. 134)

유령회사는 검은 돈을 싸고싸고 또 싸는 검은 봉지가 되어 점점 더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발전했다. 이제 페이퍼컴퍼니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회사를만드는 회사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곳을 살펴보든지 간에 연구자들은 부패와 빈곤의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부패의 수준이 더 클수록 엘리트는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이는 불평등을 초래하는 동시에 사회를 한데 엮어 주는 유대를 약화시킨다. 경제학자의 건조한 언어로 말하자면, 학교와 보건과 도로와 안전에 투자되는 돈은, 역외로 가져가서 타조 가죽 신발을 사는 데 사용하는 돈보다 더 높은 승수효과를 지닌다.(즉 그렇게 돈을 쓸 때마다 경제에 되돌아오는 것이 더 많다) 더 잘 통치되는 국가는 더 높은 생활 수준, 더 나은 건강, 더 긴 기대 수명, 향상된 교육 결과, 더 잘 작동하는 경제를 보유한다. (p. 184)

부패의 역학에 우리가 적절하게 관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누군가가 정직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지금 얼마나 드문 일인지, 즉 역사적 관점에서 얼마나 독특한지를 서구 사람들이 종종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치사상 상당수는 '선진'국가의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말로 내다보았기에 다른 사회들도 '개발도상'에 있다고 지칭했다. 마치 그 사회들이 종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종착역으로 인도될 선로 위의 열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p. 187)

동유럽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 그리고 작은 섬나라 여러 곳들의 실제 사례를 읽을 때마다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떻게 이럴수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만 볼 수 있을 뿐 바깥 나라들을 너무 몰랐다. 우리나라 정도면 정말 깨끗한 거였다. 아주 살만한 국가였다. 무법 천지 국가들의 현실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검은 돈들은 끊임없아 거대해져갔고 역외채권이나 유령회사를 넘어선 또다른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작은 나라의 여권을 돈으로 사고 심지어 외교관으로 임명받아 외교관면책특권을 누리려는 시도까지 가능해졌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머니랜드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결국 나라 안의 법들이었다. 일례로 영국의 엄격한 명예훼손법은 저술가와 출판인에게 검은돈을 추적과정을 글로 쓰고 편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자국내 돈이 바깥에 쌓아져 가는 것을 더이상 두고 볼수 없게된 것을 깨달은 후 역외로 빠져나간 돈을 회수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산 회수는 어려운 일이다. 머니랜드는 그 부를 손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돈은 차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쌓이며 계속해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국경을 넘나든다. 그걸 감시해야 할 사람들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백만 걸은 더 앞서 나간다. 정의는 계속해서 국경을 넘지 못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단지 도둑만이 아니다. (p. 280)

돈을 갖고 달아난 사람이 도둑이라면 도둑만 머니랜드에 가던 시절도 옛말이 되었다. 이제 그 도둑을 비호해주는 세력이 그 도둑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권력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적떼가 출몰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도둑을 쫒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암살자들도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첩보영화를 따로 안 봐도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거대하게 쌓은 돈을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일까? 온갖 호화로운 사치품 소비는 개인적인 것들로 그렇다치자. 문제는 고급 부동산 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되고 멋진 풍광과 편리하고 안전한 고급 주택들.. 그 주택들의 실소유주가 과연 자국민이 많을까? 그렇게 집도 땅도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까? 그런 집을 사고 그런 사치품들을 걸친 그들만의 파티를 우리는 이대로 둘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일단 스위스은행으로의 검은돈 유입을 차단하기로 나라들이 움직였다. 자산의 정보를 공유하기로 규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 규제에도 헛점이 있었다.

무려 100개국 이상의 금융기관들이 미국 시민이나 거주민 소유의 자산에 대한 정보를 미국과 반드시 공유해야 하지만,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다른 나라에 아무것도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세계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해서 완전한 정보를 얻을 것이지만, 다른 국가들의 금융기관들은 미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완전히 깜깜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런던의 시티에서 유로본드를 탄생시켰던 작은 구멍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고 나서, 세계의 새로운 금융 구조물의 심장부에서 이와 같은 틈새를 통해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p. 355)

대표적인 곳이 '세계 최대의 소도시'로 일컬어지는 네바다주 북부 와쇼티가운티의 리노 라고 한다. 미국의 이 '최!대!의 소!도시'는 스위스은행보다 더 안전한 조세피난처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 합법적인 방법이 바로 '신탁' 이었다.

이 신탁은 외국 법률상으로는 미국 국적이었고, 미국 법률상으로는 외국 국적이었다. 즉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p. 368)

오로지 한 가지 확실성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머니랜드가 계속해서 진화하리라는, 그 보호는 계속해서 강화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곳의 상상력 뛰어나고 충분한 동기를 갖춘 방어자들은 자기네를 가장 환영하는 그 어떤 사법관할구역에서도 (그곳이 네비스이건, 영국이건, 믹ㄱ이건, 아니면 완전히 다른 어딘가이건 간에) 그 시민들이 돈을 숨기고 배가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발상과 법치를 고수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걱정스렁누 생각이 아닐 수 없다. (p. 376)

뛰는놈 위에 나는놈 있다고, 머니랜드는 이제 지도상의 작고 힘없는 나라들에 세워두었던 기지들을 금융선진국인 영국과 미국내에 합법적으로 세우는 것을 넘어 무형의 공간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해적질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우리는 점점 눈치조차 챌 수 없게 소외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민자에 대항하여 국경을 강화하기만 하면 우리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또는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운동 주도자인 나이젤 파라지 같은 사람들의 말을 믿는 시민이 너무 많다. 자유 질서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가난한 이민자들이 아니라 무채임한 돈이다. 역외 강도들은 세계를 약탈하고 있으며, 이런 약탈은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불평등을 촉진하고, 우리가 차마 따라갈 수도 없는 머니랜드로 점점 더 커다란 양의 부를 빨아들인다. 이데 대한 해결책은 도개교를 들어올리지 않는 것, 즉 자국의 돈이 안착한 땅에서 자기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무너지는 자국을 떠나 도망쳐온 외국인을 악마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애초에 피난민 위기를 촉진하는 불안정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다. (p. 395)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시간도 걸리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늘 최약체에게로 시선을 돌리게끔 하는 희생양의식에 저절로 빠져들게 된다. 정작 원인제공자는 그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인데 우리는 쉽게 그 손가락질이 향한 그 방향으로 눈길을 따라가곤 한다. 그동안 그 손가락질의 주체는 머니랜드의 돈방석위에 돈방석을 또 쌓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그 돈방석은 눈치도 못채고 희생양의 구멍난 돗자리를 뺏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둑을 감옥에 넣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계의 훔친 부를 우리의 도시들이 세탁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인내를 요구하고, 힘겹고, 전문적이고, 빛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제휴를 구축할 준비가 딘 정치인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우리의 경제와 우리의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세계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p. 396)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독재가 횡행하고 무법천지가 당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 희망이 될 수도 있을까? 그나마 우리가 알려고만 들면 이런 책도 아무 제한 없이 읽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을까? 편한 길은 없다. 쉬운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일단 알기는 해야 한다. 모든 행동은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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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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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한국 여자의 이야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네 멋대로 해라] 김현진의 도발적 문제작

 

아담한 크기의 작고 얇은 이 소설책에 실린 8편의 단편 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들 중 하나의 제목으로 책의 제목을 대신하는 것보다 이 책처럼 책 제목을 따로 붙인 소설집이 늘 더 인상좋게 다가온다. 그 제목은 책속의 단편들을 아우르는 일관된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마련이고, 단편집이라 해도 장편 못지 않게 일관된 주제를 전하는 소설집이 더 성의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정아' 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인 셈이다.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은 데운 우유 위에 생긴 막처럼 얄팍하고도 녹기 쉬운 가벼운 것들이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다 잊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나누며 마셨던 음료들은 그녀들이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리웠다. (p. 10)

그날 그 카페에서 오천오백 원이나 하는 그 스트로베리프라페 값은 은미가 지불해버리는 바람에.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길에서 둘이 천 원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아무 상관없었을 텐데. (p. 15)

뭘로 하실래요? 남자애는 구석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요, 조금 망설이다가 프라푸치노, 하고 강하게 말했다. (p. 27)

< 정아 > 中

한끼 식사값보다 비싼 음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름이 잘 외워지지도 않는 생소한 음료들이 카페의 메뉴판마다 즐비한 것을 보며 놀랄때가 종종 있다. 그 희한한 이름의 음료가 이름이 희한할수록 왠지 더 비싼 가격인것 같은 그 음료들이 삶의 질을 나타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에 즐비한 음료들 대신 자판기 커피로 대신해야 했던 정아는 희한한 이름의 음료를 마시고나면 늘 더 내려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더 바닥으로 내려앉아야 했다. 대입에도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했으며 다단계까지 겪었던 정아에게 그 음료를 마신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들이 한때 정정은 씨가 자신의 약지에 끼워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주 큰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러 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정정은 씨의 심장에는 막이 생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막은 한 켜 한 켜 딱딱해지기만 했다. (p. 49)

사람들은 충동적인 것이 청소년기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한때 청소년이었던 모든 어른들도 가끔 자제력을 잃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은 정정은 씨의 마음속 청소년이 대폭발한 그런 날이었다. (p. 62)

< 정정은 씨의 경우 > 中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친.. 뒷바라지를 하는 여친... 사법고시에 붙자마자 등돌린 남자.. 결혼시장에 던져진 상품으로서는 나이가 많아진 여자..

여자의 직업으로 최고라는 교사 라는 직업을 가진 정정은 씨지만, 드라마에서 닳도록 봤던 그 현실이 코앞에 닥쳤을때는, 드라마에서 남의일이라 봤던 결혼현실이 믿을 수 없게 자신을 깍아내리고 있었다.

말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도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칭찬이든 위로든 실컷할 수 있는 거였다. (p. 80)

"인파이터. 무조건 들이대는 애들"

"인파이터 말고는 아웃파이터가 있어요. 음... 간단히 설명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간 보는 애들" (p. 99)

꼭 맞아야 하는 주먹은 맞되, 그 이외에 쓸데없는 펀치는 전혀 맞니 않는 게 아웃파이터. 한번은 맞아야 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맞지 않고서는 권투란 스포츠는 성립하지 않으니까. (p. 101)

< 아웃파이터 > 中

첫 연애에서 호되게 당한 영진에게 첫 남자는 인파이터 였다.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앞으로 만날 남자는 슬슬 간보는 아웃파이터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에게 사랑은 이제 핑크빛 설레는 로망이 아니라 치고받는 권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영진이 쓸데없는 펀치를 맞지 않는 아웃파이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처음처럼?

"우리가 애를 낳아? 딸이면 어떡해? 나 닮은 딸이면 어쩌냐고. 어릴때부터 코끼리 소리 들으면서 사는 뚱땡이는 나로 족해. 나 그 꼴 볼 수 없어. 내가 한 일 중에 그나마 잘한 일이 바로 수술해버린 거야! 가난뱅이는 우리로 족하지 않아?" (p. 134)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아직도 가로등 밑에서 불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하얀 화장지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망설였지만 다시 돌아보지는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세상에 울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 하나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사각사각, 김은정의 마음속 빈자리에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p. 136)

< 공동생활 > 中

김병권은 좋은 만자였다. 윤정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푸근한 살집을 가진 그녀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윤정화를 위해 방한칸짜리 옥탑방에서 방두개짜리 지하월세방을 얻었고 윤정화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욕심없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윤정화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게 김병권의 사랑마저 가벼이 여기고 말았다. 그녀는 다이어트에 실패했고 동네주민 김은정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그놈 찾아가자, 당장 멱살 잡자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사회생활 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다 같이 더럽게 사는 거야! 누가 덜 깨끗하고 더 깨끗하고, 이거 어차피 흙탕물에서 다 같이 뒹구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 (p. 151)

아이씨 미국에선 마트에서 총이랑 총알도 세트로 판다는데 성가시게시리... 면밀하고도 냉정히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나는 흠칫, 놀란다. 아니, 당신, 아가씨, 댁은 도대체 누구세요? 내 안에 지금 계신 분,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요. 나는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던진다. 저 팬티는, 내 팬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팬티야?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p. 169)

< 누구세요? > 中

내편이라고 생각했다. 경제관념이 철저한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미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남자는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가 희망퇴직을 강요받은 여자친구에게 제정신이냐며 화를 냈다. 그렇게 제정신이던 남친은 아무 증거도 남겨놓지 않고 완벽하게 그녀의 돈도 깨끗이 가져갔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도둑을 만난다. 남친만 도둑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훔친 것보다 그녀가 도둑맞은 것이 더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남들은 여학교 때 한 번은 다 보고 지나간다는 속칭 바바리맨이었다. 화정은 6년 내내 여중고를 다녔는데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p. 184)

바바리맨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화정은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자 바바리맨은 소스라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간신히 바지를 꿰입은 바바리맨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뛰어가다가 바바리맨은 또 엎어졌다 간신히 일어났다 또 엎어졌다 하며 바바리맨은 사투를 벌였다. (p. 189)

< 부장님 죄송해요 > 中

불금의 어느 저녁이었다. 화정은 그 금요일따라 유독 하루가 꼬였다. 불금이라며 칼퇴근하던 부장님은 그런 화정에게 불금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뭐가 되는게 없던 그날 밤 골목길에서 난생 처음 바바리맨을 만나기까지 했다. 그 바바리맨에게 분노가 올라와 몇마디 했을 뿐인데 바바리맨은 줄행랑치며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다른 어딘가의 부장님이었다.

잠깐 눈을 감은 수연은 이렇게만 지내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거나 화려하게 살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딱 이 정도만. 지금 이 정도면 수연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p. 200)

<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요 > 中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 중 가장 행복한 여성이 수연이었다. 소박하지만 자신이 이룬 것에 감사하고 여전히 어렵겠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에게 감사해하며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고 생각한 생일밤이었다. 그밤 남녀공용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가지고 들어온 신문뭉치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숙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의 표시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침묵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앞에서 숙이가 나는 당신들이 뽑아 놓은 킹카 신랑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내가 원하는 건 아버지가 사오년 전 저잣거리에서 주워 온 거지새끼이자 우리 집 머슴인 바우와 초가삼간이라도 좋으니 오순도순 사는 거요, 하고 말해봤자 아이고 우리 딸아이는 사상이 아주 프리하구나, 하고 찬성할 부모가 아니라는 것은 숙이도 너무 잘 알았다. (p. 229)

그러나 그녀는 결코 바우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간혹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과 그 딸의 딸과 그 딸의 딸과 딸들도, 바우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은 원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 대다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적절한 '합의'에 불과하지만, 딸과 딸과 딸과 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합의에만 도달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 그랬다. (p. 237)

< 이숙이의 연애 > 中

조선말 다 가진 양가집 규수 숙이가 마음에 둔 남자는 머슴 바우 였다. 바우도 숙이를 사랑했다. 둘은 다시 만나기 위해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작가는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8편의 단편들은 짠했다가 웃겼다가 심지어 시대도 달리하면서 능수능란하게 여성이 처한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면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알려준 이유를 '에필로그' 에서 설명한다.

태아들이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성인 태아들에게 미래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그런 현실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면, 그 태아들은 과연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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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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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사람들' 이라는 부제가 붙은 <THE OTHER PEOPLE> 가제본을 받아 읽을 기회를 얻었다.

작가는 C.J.튜더

그녀의 첫 작품 '초크맨'을 읽었던지라 세번째 작품이라는 이 소설에 호기심이 일었다.(두번째 작품은 '애니가 돌아왔다' 도 곧 읽어볼까 싶긴 하다) 첫 소설 '초크맨'은 나오자마자 영화판권이 팔렸을 만큼 대중성을 인정받은 작품이었다. 나또한 재미있게 읽었었다. 첫작품 같지 않게 서사의 촘촘함에 신경쓴 티가 났다고나 할까 ㅎㅎ

'디 아더 피플' 은 '초크맨'보다 더 밀도높게 진행되면서 마지막에 초자연적 현상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 이 떠오르기도 했다.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보다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마련이니까.

처절한 고통을 가까운 사람보다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오히려 속깊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심리 자체가 사실 설명하기 쉬운 심리는 아닐수도... 이 작품은 그러한 복잡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순히 복수 라고 말하기엔 뭔가 모자란 표현 같은 그런...

실종은 죽음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더 나쁘다. 죽음에는 끝이 있다. 죽음에는 슬퍼하는 시간이 허락된다. 추모하고 촛불을 켜고 꽃을 놓는 시간이. 떠나보내는 시간이.

실종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림보다. 당신은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이 잡힌다. 지평선 위에서 희망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절망이 콘도르처럼 맴을 도는 낯설고 암울한 세상 안에서. (p. 25)

게이브는 퇴근 중이었다. 아내와 딸과 저녁을 함께 먹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런 평범한 저녁을 꿈꾸며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꽉 막힌 도로에서 앞차 뒷좌석에 있는 딸아이의 얼굴이 보았다. 그차를 맹렬이 쫓아봤지만 놓쳤다. 집에 갔을 땐 아내와 딸이 모두 살해되었다며 경찰이 막아섰다. 그는 시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었다. 살해되었다는 딸이, 분명히 앞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아빠 라고 말하는 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는 이후 미친듯이 고속도로를 헤매며 딸을 찾는 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화장실, 탈의실, 거울이 있는 모든 곳. 프랜은 예전에는 앨리스의 거울 공포증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공포는 없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논리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는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거울이 앨리스의 기면증을 유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p. 41)

계속 도망쳐 다니며 계속 겁에 질렸다. 어떤 아이도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된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떤 아이도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면 안 되는 거였다. (p. 70)

프랜은 어린 소녀인 앨리스를 데리고 도망다니는 중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 계속 도망쳤다. 하지만 곧 발각되곤 했다. 게다가 앨리스에게는 그녀가 모르는 공포가 심어져 있었다.

그녀는 잠을 잔다. 하얀 방에 누워 있는 창백한 소녀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미리엄은 가장 오래된 직원으로 이 집에 처음부터 있었다. 처음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 현상은 2~3년 전에 시작됐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1층에서 차를 끓이는데 음 하나가 들렸다. 피아노 건반 소리였다. 딱 한번. 아이가 눈을 뜬 것일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는가. (p. 45, 46)

미리엄은 오랫동안 한 여자를 돌보고 있다. 어릴때부터 보아와서 식물인간이 된 소녀때 모습 그대로로만 보이는 여자를 미리엄은 살뜰히 간호하고 있었다.

게이브는 다시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단어와 글자의 파편들이 서로 겹쳐져 있었다. 하지만 다섯 글자가 도드라져 보였다. 죽은 남자가 남긴 희미한 각인이었다.

다른 사람들. (p. 81)

비쩍 마른 그 남자에게 커피를 가져다주지 않았더라면,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다시금 고개를 내민 악몽처럼 너덜너덜한 수첩 위로 떠오른 그 단어를 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 (p. 86)

케이티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다. 두아이의 싱글맘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중이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정기적으로 들러 식사를 하고 가는 게이브를 몇 년째 보고 있다. 그가 딸의 실종전단지를 돌릴 때부터 3년째 고속도로위를 헤매며 카페에 들를때마다. 그러다 어느날 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수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는 단어를 보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한참 뒤에 사마리아인은 자기 잔을 집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숨을 쉬었다. "다크 웹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게이브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들어본 적 있었다. 실종된 아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다크 웹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기존의 검색 엔진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하 인터넷. 화려한 공식 웹 아래에 숨겨진 공간. 일반적인 웹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그곳을 이용했다. 하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깊고 어두컴컴한 곳이 원래 그렇듯 거기에 오물과 침전물이 쌓였다. (p. 161)

게이브가 자살을 생각했던 다리에서 한 남자를 만만다. 이름이 아닌 다양한 별칭으로 불린다는 그는 그저 '사마리아인'으로 부르라 했다. 그는 여러모로 게이브가 딸의 실종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게이브는 물어볼 수 없었다. 이 검은 남자는 위험했다. 하지만 게이브는 그저 딸의 실종을 추적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뿐 그의 사연을 알아낼 필요도 여력도 없었다. 그로부터 다크 웹 세상의 '다른 사람들' 을 알게 됐다.

Q: 명칭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뭔가요?

A: 인간은 누구나 비극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벌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벌어지기 전까지는요,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하거나 잊어버리는 데서 위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의를 구현하도록 서로 돕는 데서 느끼죠.

Q: 대가를 지불해야 하나요?

A: 돈이 오가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우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우리는 기브 앤드 테이크 시스템으로 운영합니다. 요청하고 신세를 갚는 시스템으로요. (p. 180, 181)

게이브의 아내는 살해당했다. 딸도 함께 살해당했다고 경찰도 처가도 얘기하지만 게이브는 딸이 실종됐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집에 있던 여자아이의 시신은 누구인가? 왜 장인어른은 게이브에게 시신검안을 못하도록 했나? 프랜을 쫓는 자들은 누구인가? 앨리스가 보는 환영은 누구인가?

게이브가 수십년간 숨겨온 비밀이 끔찍한 살해사건과 함께 세상에 알려진 날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양심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수십년째 약속을 이행중이었다. 고문에 가까운 약속을.

그 약속과 그에게 벌어진 참혹한 사건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식물인간 소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정말 식물인간인가? 사마리아인은 왜 게이브를 돕는가?

프랜이 사라졌을때 앨리스는 케이티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 케이티는 앨리스가 앨리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케이티가 자신의 아이들과 앨리스를 데리고 게이브에게 도망쳐 왔을 때 그들은 서로의 퍼즐을 맞춰볼 수 있었다. THE OTHER PEOPLE 이 누구인가를.

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생각한 사건이 갑자기 터져버렸을 때, 뉴스에 나오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내게 벌어졌을 때, 그 억울함과 분노를 법이 만족스럽게 처벌해주지 않을 때, 낯선이가 다가와서 다른 방법이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내가 누군가의 복수를 해주고 누군가가 나의 복수를 해준다면, 내가 했던 복수가 내게 복수로 돌아오고 누군가가 했던 복수가 누군가에게 또다른 복수로 돌아오고, 그렇게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세상은 어찌 되는 것일까...

세상에 The Other People 이 더 많을 것 같지만 The Same People 이 더 많다.

나와 다른 사람들 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하나를 풀고 다음을 풀어가며 차근차근 전체를 완성해가는 이 작품은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이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지도 함께 보여준

단숨에 읽히지만 긴 생각이 남겨지는 괜찮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여름엔 역시 스릴러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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