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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평점 :
상처받은 한국 여자의 이야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네 멋대로 해라] 김현진의 도발적 문제작
아담한 크기의 작고 얇은 이 소설책에 실린 8편의 단편 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들 중 하나의 제목으로 책의 제목을 대신하는 것보다 이 책처럼 책 제목을 따로 붙인 소설집이 늘 더 인상좋게 다가온다. 그 제목은 책속의 단편들을 아우르는 일관된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마련이고, 단편집이라 해도 장편 못지 않게 일관된 주제를 전하는 소설집이 더 성의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정아' 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인 셈이다.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은 데운 우유 위에 생긴 막처럼 얄팍하고도 녹기 쉬운 가벼운 것들이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다 잊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나누며 마셨던 음료들은 그녀들이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리웠다. (p. 10)
그날 그 카페에서 오천오백 원이나 하는 그 스트로베리프라페 값은 은미가 지불해버리는 바람에.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길에서 둘이 천 원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아무 상관없었을 텐데. (p. 15)
뭘로 하실래요? 남자애는 구석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요, 조금 망설이다가 프라푸치노, 하고 강하게 말했다. (p. 27)
한끼 식사값보다 비싼 음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름이 잘 외워지지도 않는 생소한 음료들이 카페의 메뉴판마다 즐비한 것을 보며 놀랄때가 종종 있다. 그 희한한 이름의 음료가 이름이 희한할수록 왠지 더 비싼 가격인것 같은 그 음료들이 삶의 질을 나타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에 즐비한 음료들 대신 자판기 커피로 대신해야 했던 정아는 희한한 이름의 음료를 마시고나면 늘 더 내려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더 바닥으로 내려앉아야 했다. 대입에도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했으며 다단계까지 겪었던 정아에게 그 음료를 마신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들이 한때 정정은 씨가 자신의 약지에 끼워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주 큰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러 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정정은 씨의 심장에는 막이 생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막은 한 켜 한 켜 딱딱해지기만 했다. (p. 49)
사람들은 충동적인 것이 청소년기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한때 청소년이었던 모든 어른들도 가끔 자제력을 잃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은 정정은 씨의 마음속 청소년이 대폭발한 그런 날이었다. (p. 62)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친.. 뒷바라지를 하는 여친... 사법고시에 붙자마자 등돌린 남자.. 결혼시장에 던져진 상품으로서는 나이가 많아진 여자..
여자의 직업으로 최고라는 교사 라는 직업을 가진 정정은 씨지만, 드라마에서 닳도록 봤던 그 현실이 코앞에 닥쳤을때는, 드라마에서 남의일이라 봤던 결혼현실이 믿을 수 없게 자신을 깍아내리고 있었다.
말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도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칭찬이든 위로든 실컷할 수 있는 거였다. (p. 80)
"인파이터. 무조건 들이대는 애들"
"인파이터 말고는 아웃파이터가 있어요. 음... 간단히 설명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간 보는 애들" (p. 99)
꼭 맞아야 하는 주먹은 맞되, 그 이외에 쓸데없는 펀치는 전혀 맞니 않는 게 아웃파이터. 한번은 맞아야 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맞지 않고서는 권투란 스포츠는 성립하지 않으니까. (p. 101)
첫 연애에서 호되게 당한 영진에게 첫 남자는 인파이터 였다.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앞으로 만날 남자는 슬슬 간보는 아웃파이터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에게 사랑은 이제 핑크빛 설레는 로망이 아니라 치고받는 권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영진이 쓸데없는 펀치를 맞지 않는 아웃파이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처음처럼?
"우리가 애를 낳아? 딸이면 어떡해? 나 닮은 딸이면 어쩌냐고. 어릴때부터 코끼리 소리 들으면서 사는 뚱땡이는 나로 족해. 나 그 꼴 볼 수 없어. 내가 한 일 중에 그나마 잘한 일이 바로 수술해버린 거야! 가난뱅이는 우리로 족하지 않아?" (p. 134)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아직도 가로등 밑에서 불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하얀 화장지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망설였지만 다시 돌아보지는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세상에 울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 하나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사각사각, 김은정의 마음속 빈자리에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p. 136)
김병권은 좋은 만자였다. 윤정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푸근한 살집을 가진 그녀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윤정화를 위해 방한칸짜리 옥탑방에서 방두개짜리 지하월세방을 얻었고 윤정화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욕심없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윤정화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게 김병권의 사랑마저 가벼이 여기고 말았다. 그녀는 다이어트에 실패했고 동네주민 김은정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그놈 찾아가자, 당장 멱살 잡자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사회생활 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다 같이 더럽게 사는 거야! 누가 덜 깨끗하고 더 깨끗하고, 이거 어차피 흙탕물에서 다 같이 뒹구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 (p. 151)
아이씨 미국에선 마트에서 총이랑 총알도 세트로 판다는데 성가시게시리... 면밀하고도 냉정히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나는 흠칫, 놀란다. 아니, 당신, 아가씨, 댁은 도대체 누구세요? 내 안에 지금 계신 분,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요. 나는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던진다. 저 팬티는, 내 팬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팬티야?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p. 169)
내편이라고 생각했다. 경제관념이 철저한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미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남자는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가 희망퇴직을 강요받은 여자친구에게 제정신이냐며 화를 냈다. 그렇게 제정신이던 남친은 아무 증거도 남겨놓지 않고 완벽하게 그녀의 돈도 깨끗이 가져갔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도둑을 만난다. 남친만 도둑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훔친 것보다 그녀가 도둑맞은 것이 더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남들은 여학교 때 한 번은 다 보고 지나간다는 속칭 바바리맨이었다. 화정은 6년 내내 여중고를 다녔는데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p. 184)
바바리맨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화정은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자 바바리맨은 소스라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간신히 바지를 꿰입은 바바리맨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뛰어가다가 바바리맨은 또 엎어졌다 간신히 일어났다 또 엎어졌다 하며 바바리맨은 사투를 벌였다. (p. 189)
불금의 어느 저녁이었다. 화정은 그 금요일따라 유독 하루가 꼬였다. 불금이라며 칼퇴근하던 부장님은 그런 화정에게 불금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뭐가 되는게 없던 그날 밤 골목길에서 난생 처음 바바리맨을 만나기까지 했다. 그 바바리맨에게 분노가 올라와 몇마디 했을 뿐인데 바바리맨은 줄행랑치며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다른 어딘가의 부장님이었다.
잠깐 눈을 감은 수연은 이렇게만 지내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거나 화려하게 살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딱 이 정도만. 지금 이 정도면 수연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p. 200)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 중 가장 행복한 여성이 수연이었다. 소박하지만 자신이 이룬 것에 감사하고 여전히 어렵겠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에게 감사해하며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고 생각한 생일밤이었다. 그밤 남녀공용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가지고 들어온 신문뭉치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숙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의 표시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침묵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앞에서 숙이가 나는 당신들이 뽑아 놓은 킹카 신랑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내가 원하는 건 아버지가 사오년 전 저잣거리에서 주워 온 거지새끼이자 우리 집 머슴인 바우와 초가삼간이라도 좋으니 오순도순 사는 거요, 하고 말해봤자 아이고 우리 딸아이는 사상이 아주 프리하구나, 하고 찬성할 부모가 아니라는 것은 숙이도 너무 잘 알았다. (p. 229)
그러나 그녀는 결코 바우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간혹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과 그 딸의 딸과 그 딸의 딸과 딸들도, 바우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은 원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 대다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적절한 '합의'에 불과하지만, 딸과 딸과 딸과 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합의에만 도달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 그랬다. (p. 237)
조선말 다 가진 양가집 규수 숙이가 마음에 둔 남자는 머슴 바우 였다. 바우도 숙이를 사랑했다. 둘은 다시 만나기 위해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작가는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8편의 단편들은 짠했다가 웃겼다가 심지어 시대도 달리하면서 능수능란하게 여성이 처한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면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알려준 이유를 '에필로그' 에서 설명한다.
태아들이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성인 태아들에게 미래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그런 현실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면, 그 태아들은 과연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