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럽
레오 담로슈 지음, 장진영 옮김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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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료슈는 한 무리의 인물들에 대한 읽기 쉬운 입문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수세기 동안 인문학자 및 사회학자들을 매혹시켜 왔다.

<더 클럽>은 특이한 책으로서 일부는 집단 일대기,

일부는 문학 비평이자 문학사상사,

또 일부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사회사이다

- 파이낸셜 타임즈 -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18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집단지성의 시대라 할만 했다. 나라 밖은 온갖 전쟁들로 끊이지 않았지만 나라 안은 온갖 새로운 사상들의 태동이 끊이지 않았다. '명예혁명'을 통한 왕정과 공화정의 독특한 결합, '산업혁명'을 통한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대립, 셰익스피어를 통한 영국만의 문학적 갈래들은 영국 지성인들의 사유의 세계를 넓혀 주었고 다양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역사에서 특정한 시대가 주목받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정치경제학적으로(군사적인 것까지 포함해서) 큰 변화를 겪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으로 융성해지는 경우다. 18세기 영국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잉태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또는 문학을 통해서 각각 따로 배우거나 지식을 습득했다. 둘이 함께 만나는 내용을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 클럽>은 이런 모든 요소들을 담뿍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관심을 끈다. (p. 9 - 김경집 '추천의 글' 中)

그 중심에 새뮤얼 존슨이 있었다. 새뮤얼 존슨이 지성인들의 리더가 되어 '클럽'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뮤얼 존슨의 인맥 속에서 '더 클럽'이 만들어졌다. 만들고지고 난 이후에는 새뮤얼 존슨의 인맥을 넘어선 사람들이 추가되며 확장되었고 그렇게 '더 클럽'의 멤버들은 점점 늘어나고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히 이름을 새기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그 중에는 애덤 스미스와 에드워드 기번 도 있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이 두사람 때문이었다.

'더 클럽'의 시작은 1764년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조슈아 레이놀즈가 새뮤얼 존슨의 우울한 심산을 해소시켜주기 위한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새뮤얼 존슨, 에드먼드 버크, 조슈아 레이놀즈,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등 이 클럽의 멤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당대의 아이콘이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18세기 후반 문화의 '어벤저스'였다. 특정한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모여 온갖 담론과 담화가 오갔던 그 현장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바로 제임스 보즈웰 덕분이다. 보즈웰은 존슨에 대한 경의로 그의 언행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p. 9 - 김경집 '추천의 글' 中)

하지만 <더 클럽> 이라는 이 책은 '존슨전' 이라는 책을 쓴 제임스 보즈웰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등장하고 그렇게 그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확장되어 서술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인물들 한명한명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18세기 런던에서 별처럼 빛났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한 클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중요한 하나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것이 문화에 대한 기여보다 더 중요한 요건이었을 지도 모른다. 바로 '좋은 벗'이 되는 것이다. 선술집인 터크즈 헤드 태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된 좋은 벗만이 이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p. 18)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그저 '더 클럽' 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당대 사람들에게 그닥 중요하게 주목받던 클럽도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더 클럽'의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한 토대로 맺는 목적적 사회 관계가 아닌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만나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논쟁하는 친목 모임이었기에 멤버들은 생생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때 그들이 따진 조건은 상대방의 부와 지위와 업적이 아닌 그저 '좋은 벗'으로서 대화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대의 지성인들이 이 클럽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정한 향연을 즐기기 위해.

존슨과 보즈웰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는 정신질환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신질환에 걸릴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보즈웰은 변덕스러운 감정기복에 시달렸다. 만약 그가 오늘날의 정신병원을 방문했다면, 분명 조울증이란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존슨은 십대 시절부터 줄곧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오늘날이었다면, 그는 강박 장애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p. 24, 25)

영어사전의 새뮤얼 존슨과 존슨전의 제임즈 보즈웰 이라는 위인전식 사고방식으로 이들을 봤을 땐 그들의 업적이 보일 뿐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물들의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표현됨으로써 그들이 남긴 업적 보다는 사람 자체로서 집중하게 만든다. 아들뻘인 보즈웰에게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 존슨의 내면에는 오래된 심리적 질환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다. 경박스러운 보즈웰이 그토록 소망했던 '더 클럽'의 멤버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존슨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 클럽'멤버들은 보즈웰의 가입을 원하지 않았다.

존슨은 남학생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최고의 방법은 체벌이라고 했다. 새뮤얼 존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조너선 스위스트는 '회초리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을 떠올렸고, 에드워드 기번은 '학교는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한 동굴로 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을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책과 책상에 묶어둔다. 이렇게 사로잡힌 포로들은 채찍질 당하는 페르시아의 군인들처럼 힘겹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p. 53)

책을 읽으면서 18세기 후반의 영국 문화를 느끼는 것은 이 책이 주는 재미 중 하나였다. 중세와 근대 유럽문화 관련 책을 읽으면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300년 전 런던도 굉장히 퇴폐적이고 보수적이고 폭력적이고 알콜릭했다. '더 클럽' 멤버들의 회합 장소도 술집이었고, 커피하우스에서도 커피보다는 술이 더 많이 팔리던 때였다.

"찢어질 듯 가난했을 때, 나는 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난의 장점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네. 하지만 솔직히 내가 가난하다는 현실이 너무 슬펐어. 이봐, 사람들은 가난은 악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주장들이 가난은 거대 악이라는 반증이라네. 자네는 자신이 부유한 환경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p. 82)

존슨은 귀족도 아니었고 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봉건적이었고 보수적이었다. 여러가지 모순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위한 자기합리화는 당대 지식인들이 겪는 갈등이 한 사람에게 체화된 듯 보이기도 했다. 존슨 이라는 한 인간을 보다보면 당대 영국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새뮤얼 존슨은 작가로서 유명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장 유망한 듯 보였던 시와 희곡이라는 두 장르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는 소설에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시, 희곡 그리고 소설 외에 유망한 장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기간행물이었다. (p. 87)

새뮤얼 존슨은 작가다. 그러데 지금도 여전히 느끼는 거지만 서양에서의 작가라는 타이틀은 내게 익숙한 개념이 아니곤 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시, 소설, 희곡 등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작가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창작이 아닌 글만 써도 작가가 되었다. 팜플렛이나 칼럼 혹은 비평 등의 잡지용 글만 기고해도 유명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서양에서 기자나 작가가 되는 길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의 길들이 있다. 기자가 되고나서 기사를 쓰고 창작을 하고나서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먼저 쓰다가 기자가 되고 창작을 하지 않아도 작가가 된다. 새뮤얼 존슨도 문화비평으로 여겨질 간행물기고글들로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작가가 된 존슨을 기념비적 인물로 만들어준 것은 그가 편집한 '영어사전' 때문이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전은 단어 목록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의 뉘앙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존슨은 단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존슨은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상황을 사전에 담고자 했다. 작가들이 그 단어를 사용한 구체적인 문맥을 예문으로 사용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방법에 따라 단어를 정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새뮤얼 존슨을 '위대한 사전 편집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p. 94, 95)

당시 영국에서 출판된 거의 모든 책들을 조사하고 예문을 골라내며 10년동안이나 편집한 존슨의 '영어사전'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 책으로 학비가 없어 졸업하지 못했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그는 명예학위를 수여받았고 그동안의 가난을 끊어줄 국가연금도 받게 되었다. 존슨박사는 이제 생계를 위해 글을 파는 사람이 아닌 그야말로 작.가.가 되었고 다방면의 문화계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존슨을 경외한 사람들 중 보즈웰이 있었다.

보즈웰은 똑똑했지만 지적이진 않았다. 그가 만나고 싶었던 이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유명인 장 자크 루소였다. (p. 197)

루소의 집에 초대되어 저녁식사를 함께한 것은 보즈웰에게 대단한 성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볼테르의 집에 가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p. 199)

스위스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친 루소는 잉글랜드에서 지내라는 데이비드 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르바쇠르는 루소가 잉글랜드에서 머무를 곳을 마련한 뒤에 그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칼레에서 순풍을 기다리던 중 르바쇠르는 보즈웰을 자신의 침대로 초대했다. (p. 200, 201)

보즈웰은 이탈리아에서 반가운 사람과 우연히 재회했다. 바로 존 윌크스였다. (p. 203)

장 자크 루소, 볼테드, 데이비드 흄, 존 윌크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보즈웰은 루소의 비하를 알아채지 못했고 볼테르의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했으며 흄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햇고 윌크스의 정치감각이 무엇인지 몰랐다. 게다가 루소의 동거녀와 동침을 했고 가십거리를 양산하던 윌크스와는 정치가 아닌 다른 면에서 죽이 맞았다. 보즈웰은 당대의 사상가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잘 하는 것은 매일 쓰던 일기, 그것도 대화까지 고스란히 옮겼을 정도의 세세한 기록능력이었다. 그랬기에 존슨 사후 '존슨전'을 씀으로써 일생 그렇게 바라던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존 웨인은 새뮤얼 존슨의 전기에서 런던 클럽은 20세기 파리의 카페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레 되 마고 카페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더 클럽에는 여성 회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여성을 더 클럽의 회원으로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슨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이것이 헤스터 스레일이 자신의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열던 만찬이 일종의 그림자 클럽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p. 231)

당대에도 여성작가들 여성화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비주류로서 어쩌다 이름이 회자될 뿐이었다. 이십대 초반에 20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한 후 오래 떨어져 살다 사별한 존슨의 여성관은 좀 특이했던 것 같다. 클럽의 멤버로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여성과 대화하기를 즐겼고 정신적 지주같았던 스레일 부인과의 교류는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더 클럽' 의 신규회원들이 늘어나고 존슨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스레일가에서의 모임은 그에게 또다른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더 클럽의 모든 회원들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새뮤얼 존슨에 집중했다. 보즈웰은 에드먼드 버크를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그의 주옥같은 발언을 모두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즈웰은 조슈아 레이놀즈와 친했지만,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연극 관람을 좋아했지만, 그는 선구적인 감독이자 극장 관리자였던 데이비드 개릭을 오직 배우로만 여겼다. 에드워드 기번과 애덤 스미스는 <존슨전.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보즈웰은 기번을 싫어했고 자신을 가르쳤던 애덤 스미스를 놀라울 정도로 얕잡아봤다. (p. 232)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을 통해 '더 클럽'의 탄생기를 정리한 후 저자는 보즈웰의 <존슨전>에서 중심인물은 아니지만 <더 클럽>의 중심인물이라 할 만한 인물들을 한명한명 소개하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조슈아 레이놀즈, 유능한 연설가이자 활발한 의회 활동을 했던 에드먼드 버크, 당대 최고의 연극 배우 데이비드 개릭, 극작가로 이름을 날린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리처드 셰리든 그리고 존슨에게 '더 클럽' 과는 또다른 의미로 소중했던 모임의 주최자 스레일 부부 등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뚜렷한 활동을 보인 인물들이었다.

버크는 국민에 의한 정부를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격을 가준 소수가 이끄는 국민을 위한 정부를 지지했다. 대부분의 미국 건국자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p. 277)

소수의 원칙에서 소수집단은 그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위에서 나오는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근면하고 유용한 노동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고 "우연히 노동자들 위에 서게 된 선택된 소수는 자신의 시간을 이익이나 영예를 추구하고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거나 학문을 닦거나 사회적 의무, 즐거운 행위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데 쓴다"고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아서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일하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복종은 절대 다수의 범죄, 심지어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할 범죄좌도 재산상 손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여기는 냉혹한 현실의 철학적 토대였다. 존슨은 법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번은 "사회의 내부 평화를 깨트리는 범죄의 대다수는 필요하지만 불공평한 규제 때문에 발생한다. 물권법은 다수가 탐내는 물건을 극소수만 소유하도록 제한하여 인류의 욕망을 억누른다"고 했다. 기번이 우정을 나누 애덤 스미스도 법학 강의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주장을 했다.

루소와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보다 더 훌륭하게 불평등을 풀어냈다. 차이점은 애덤 스미스는 불평등을 좋은 것으로 봤고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가 한 주장을 반박했다는 점이다.

휘그당이든 토리당이든 영국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복종의 본질적인 보증인을 종교라 여겼다. (p. 281, 282)

소수자나 절대권력에 대한 복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과 부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사람과 나아가 불평등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는 곳, 그곳이 '더 클럽' 이었다. '더 클럽' 에서의 대화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논쟁점을 바꿔가며 끊임없는 토론의 장이 되곤 했다. 그들은 때로는 듣고 때로는 큰소리치며 서로의 생각을 교류했다.

스레일 부부 저택에서의 만찬을 중심으로 한 일명 '그림자 클럽' 에서는 이와는 다른 대화와 교류가 이어졌다.

존슨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여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존경받는 유명인들이지만 존슨에겐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존슨은 그들과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쳤다. (p. 347)

블루스타킹은 문학을 좋아하는 지적인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제로 파란색 스타킹을 신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실크 스타킹 대신 청색 모직 양말을 신은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일부 여성들은 사교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지적인 대화를 나눌 벗으로서 서로를 만났다. (p. 352)

제임즈 보즈웰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존슨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말도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즈웰을 존슨이 너무 좋아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꼴사나운 스패니얼 이라고 생각했다. 한 저녁 만찬에서 보즈웰은 솔직하게 존슨을 숭배한다고 선언했다. (p. 361)

스레일 부인은 명석한 여자였다. '더 클럽'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존슨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당대의 다른 여성 지식인들에게 대화의 장을 제공했다. 보즈웰은 '더 클럽' 에서도 스트레텀 대저택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존슨을 알게 된 이후 평생을 그의 뒤를 쫓으며 존경했다. 거의 집착에 가까워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존슨과 잘 맞는 부분이었다. 존슨도 평생 자신의 두려움에 집착하고 불안해했다. "보즈웰이 존슨에게서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존슨은 보즈웰에게서 그가 결코 가지지 못한 아들의 모습ㅇ르 발견했다. 존슨에 대한 보즈웰의 존경심은 점점 커져 거의 숭배에 이르렀다. 그런 그의 존경심은 존슨의 인정 욕구를 가득 채워 줬을 것이다." (p. 389) 둘의 관계는 특이했지만 서로에게 필요충분적인 관계이기도 했다.

더 클럽에 나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이따금씩 더 클럽에 나갔다.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 동안 출석률이 제일 좋은 회원은 조슈아 레이놀즈였다. 하지만 그가 10년 동안 더 클럽에 나간 횟수는 고작 연간 16회에 불과했다. 레이놀즈 다음으로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회원은 에드워드 기번이었고, 그는 10년 동안 연간 14회 정도 모임에 나갔다. 새뮤얼 존슨은 더 클럽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1778년에는 더 클럽의 모임에 9번 정도 나갔지만, 이 해를 제외하고는 그가 더 클럽에 나간 횟수가 3회를 넘기지 않았다. 존슨은 더 클럽이 개성없이 단순히 튀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했다고 보즈웰에게 말했다. (p. 439)

존슨의 우을증을 달래주기 위해 레이놀즈가 모은 친구들로 시작된 '더 클럽'이라는 대화의 장이 생기자 점차 존슨 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유익한 모임이 되어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대화상대가 필요했다. '더 클럽'은 매주 열렸지만 매번 참석자가 일정치 않았고 일단 참석하면 특정한 규범이나 주제 없이 자유롭게 논쟁하며 밤새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벗으로서 '더 클럽'은 유지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의아니게 존슨과 보즈웰의 우정이야기를 깊이 알게 되었지만, 21챕터 600여 페이지의 두꺼운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16~19 챕터 때문이었다. 16. 대영제국과 식민지 / 17. 애덤 스미스 / 18. 에드워드 기번 / 19. 불신자와 신앙인 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책에서 크지 않지만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있는 중인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패권을 잡아가는 중이었고 미국이라는 커다란 식민지와 노예산업에도 발을 들였으며 이것은 제국주의를 형성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존슨은 아일랜드와 미국의 식민지적 입장에 대해 보수적이었지만 '더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개혁성향의 멤버들도 다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애덤 스미스와 에드워드 기번 이었다.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등장하면서 경제 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경제학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정치경제학'이라 불리던 학문의 범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p. 483)

정치경제학은 누군가 가계를 관리하듯이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통치자나 행정부가 채택한 구체적인 재정 정책을 의미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와 특히 프랑스 사상가들은 경제에 대하여 이론을 세우기 시작했다. (p. 484)

이 당시만 해도 대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주로 가르쳤고 학문의 분화와 연구는 세부적이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에서 윤리학 교수로 대학에서 강의했고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써냈다. 그는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경제원리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한 도덕철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존슨에게 무시당하곤 했다.

더 클럽의 회원으로서 애덤 스미스는 이상하게 주목받지 못했다. 보즈웰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사교적인 인물이었고, 애덤 스미스는 전형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새뮤얼 존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존슨은 애덤 스미스를 "자신이 봤던 최고로 멍청하고 따분한 개새끼"라고 불렀다. 애덤 스미스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런 생각들을 문서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다. (p. 487)

애덤 스미스와 존슨은 기질과 종교적 신념 뿐만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도 달랐다. 존슨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고민하는 도덕주의자였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자였다. 존슨은 기회만 생기면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많이 발표하는 수필가였지만, 애덤 스미스는 이론가였고 수년 동안 공을 들여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p. 489)

'더 클럽' 회원으로서 보는 애덤 스미스의 인간적 면모와 <국부론>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초기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애덤 스미스는 주장한다" (p. 494) 라는 문장을 보면서 애덤 스미스의 저서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만으로 애덤 스미스를 너무 오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1769년 올리버 골드스미스가 <로마사>를 발표했다. 솔직히 새로울 것이 없는 책이었다. 골드스미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골드스미스는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책이 자신의 책보다 훨씬 더 뛰어난 대작이 될 것임도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1774년 기번에게 더 클럽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번은 만장일치로 더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p. 496)

출판되자마자 <로마제국쇠망사>는 명작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논란을 일으킬 요소를 담고 있었다. 기번은 기독교의 확산은 오직 기적적인 신의 중재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 공공연하게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기독교의 확산을 세속적인 증거들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사건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존슨과 보즈웰은 기번을 증오했다. 그들은 그를 '불신자'라 불렀다. (p. 496~497)

<로마제국쇠망사>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획기적인 책이 되었고 논쟁적인 책이 되었다. 하지만 기번은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그의 일상은 그런 뚝심과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고 여유롭고 한가하다 못해 지나치게 뚱뚱해지고 그럼에도 낙천적으로 허허 웃고 넘기는 모습에서 <로마제국쇠망사>의 저자로서 느껴지는 인물과 동일인물인가 의아할 정도였지만 가벼워서 오히려 좋았고 <로마제국쇠망사>가 탄생하기 까지의 과정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불우한 어린시절, 개종, 프랑스 문헌과의 만남, 민병대활동, 상무원직 등...

그가 본격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책으로 쓰기 시작한 시점에 미국 식민지들은 영국에서 독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들과 그들의 몰락은 아주 시사적인 주제였다. '위대한 제국의 쇠망'이란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되짚는다는 생각은 분명 영국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었다. 기번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널리 흩어진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가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을 다뤘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은 그가 살던 영국이 직면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p. 509)

기번은 화제가 되던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를 적어 내려갔다. 그들의 영웅인 볼테르와 함께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역사기록학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믿었다. 연대순으로 과거 사실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그들은 그 일을 일으킨 근본적인 힘을 밝혀내기 위해 과거 사실의 이면을 깊이 파고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철학적 역사'로 알려졌다. 분명 기번도 과거 사실의 이면을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이 없는 이론은 속빈 강정일 뿐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로마제국쇠망사>에 대략 8,000개의 각주를 달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가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정보를 설득력 있게 해석했는지를 나름대로 고민해볼 수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각주를 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p. 510)

다수의 역사가들은 마치 자신이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글을 썼다. 대부분의 경우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가의 역할은 독자가 그 확실하지 않은 증거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번은 우리가 확실치 않은 증거를 평가하도록 도우며 역사의 무대 뒤로 안내했다. (p. 511)

기번은 당시 누가 그 증거를 작성햇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가 그 증거를 써내려간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생각하라 말한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증오했던 적들의 기록에서 나온다. 기번의 위대한 업적은 독자가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p. 513)

역사책을 읽을때 그 역사책이 쓰여진 시기와 저자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읽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로마제국쇠망사> 를 읽을때 기번에 대한 사전지식은 내용이해에 필수적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는 정말 많은 각주들이 나온다. 때로는 불필요한 내용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설명을 읽고 나니 아하~! 싶었다. '기번의 수다'라 불리는 각주들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였다. 기번은 천재적인 역사학자라 할만 하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독교의 기원을 다뤘다. 그는 사실에 근거해서 책을 썼지만, 그의 책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신앙인들은 공황에 빠졌고 위협을 느꼈다. <로마제국쇠망사>의 출간은 문화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적 약속은 신앙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했다. (p. 518)

기번에게 기적이란 진실 아니면 거짓이었다. 그래서 모들린 칼리지를 다닐 때 기적은 모두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가톨릭교로 개종을 결심했던 것이다. (p. 520)

다수의 프랑스 철학자들과 달리, 기번은 기독교 자체를 절대 경멸하지 않았다. 이것은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가 초기 기독교의 도덕성은 순수하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예수를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기번은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아들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라 생각했다. (p. 523)

기번은 기적에 대해 훨씬 더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기번의 동시대인들에겐 모든 기적이 진짜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기적이 기독교의 신성한 권한을 입증하는 없어서는 안 될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초기 기독교신자들에 가해진 박해에 대해서 기번은 일부 금찍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박해를 받아 죽은 기독교신자들은 많지 않았다는 증거를 어렵지 않게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황제들은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용인됐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그는 후대에 전해지는 끔찍한 이야기는 종교적인 거짓말일 분이라고 주장했다. 예상대로 <로마제국쇠망사>가 출판된 이후 반발이 불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번은 흔들리지 않았다. (p. 525)

기번의 종교에 대한 생각들을 더 알고 싶었지만 이 책은 존슨과 보즈웰이 중심인 책이므로 기번에 대해 자세히 다뤄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의 분위기와 기번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었다.

일찍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존슨은 꽤 오래 살았다. 말년에 이런 저런 신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아편등의 약물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영국 시인전> 이라는 역작을 정리해낸다. 75세의 나이로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존슨의 아들뻘인 보즈웰은 존슨이 세상을 떠나고 11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정신적 지주를 잃고 힘들어 했지만 그제서야 그의 소명을 깨달았다. 바로 <존슨전>을 쓰는 것.

보즈웰은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보즈웰 이전에 그 누고도 실제 대화를 전기에 삽입할 생각을 못했다. 심지어 전기의 주인공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즈웰만큼 어조, 표정, 웃음과 몸짓을 표현해서 사실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재능을 지닌 전기작가는 거의 없었다. <존슨전>은 '새뮤얼 존슨의 재연'이란 극찬을 받았다. (p. 582)

존슨과 보즈웰의 인생을 마무리한 후 저자는 '더 클럽'의 주요 회원들의 생의 마감도 간략하게 덧붙인다. 그리고 '더 클럽'의 최후도.

더 클럽도 어쩔 수 없이 변해갔다. 오늘날 더 클럽은 런던 문예 학회란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음은 회원과 그들이 회원으로 선출된 연도다. 월터 스콧(1818), 토마스 배빙턴 매콜리(1839), 윌리엄 글래드스턴(1857), 알프레드 테니슨(1865), 매슈 아놀드(1882), 러디어드 키플링(1914), 네빌 체임벌린(1929), 케네스 클라크(1941), T.S.엘리엇(1942), 맥스 비어봄(1942), 그리고 헤럴드 맥밀런(1954). 이들 외에도 수백 명의 회원들이 더 있지만,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들은 아니다. 문학계와 예술계가 아닌 정계와 귀족 출신의 회원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새뮤얼 존슨과 에드먼드 버크가 살아 있었다면, 이토록 많이 이들이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며 어느 누가 새로운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겠는가? 아마 디킨스, 새커리, 트롤로프, 하디, 로렌스, 오웰, 오든 그리고 라킨은 회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 클럽에는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총리들도 몇몇 있었지만,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없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이나 버지니아 울프도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p. 606)

영국 지성인들의 살아숨쉬는 생생한 목소리와도 같았던 '더 클럽'이 세월이 흐를 수록 좋은벗이 아닌 인맥형성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것을 안타까워 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내 향수어린 목소리로 런던의 지식인들을 묘사하던 저자의 부드러운 문장 들을 마무리한 문장은 의외로 강렬한 문장이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 문장뒤에 그 어떤 말을 붙여도 결국 사족이 될 것이다. 여러모로 인상깊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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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귀환 -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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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사상가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기록

[마르크스의 귀환]은 이 악명높은 19세기 '급진주의자'의 삶에 관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학구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책 속 마르크스가 너무 평범해서 놀랄 수도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추구한 것은 정말로 품위있는 삶이었을까요? 강박성 성격장애자가 으레 그러하듯, 마르크스는 주변 모든 사람이 엉뚱하거나 미심쩍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몰두합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런 드문 -일종의 미치광이라 부를만한- 사람입니다. (p. 6 - 한국어판을 내며 中 -)

철학을 공부했고 다큐멘터리 제작도 하는 저자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책을 쓰고 <마르크스 재장전>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게재하기도 하는, 현재는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영화,철학,드라마 를 가르치고 있는 교수이다. 마르크스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기도 한 저자는 어쩌면 마르크스 덕후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마르크스는 기존의 상식적 이미지를 파괴한다.

이 책은 소설이다. 현대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름일 것 같은 마르크스에 대한 소설이지만 역사소설이나 위인전이나 전기같은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호기심을 소설로 풀어보려던 내게 이 소설은 기존에 알던 것마저 무너뜨리는 혼란을 준 작품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이 소설은 일종의 환상소설처럼 읽혀졌다.마르크스의 머릿속을 풀어내고 있는듯한 이야기 속에서 마르크스는 저자가 앞서 언급했듯이 미치광이라 부를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소설은 1849년 마르크스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영국 런던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혁명적 사상가였으나 그의 혁명적 철학이 두드러지지 않을만큼 그 시대 자체가 여기저기 혁명적인 시대였다.

마르크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했다. 옆에 앉은 남자는 횡설수설하는 광인이거나 허황된 몽상가였다. 그렇지만 술집 안을 잠시만 훑어보아도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테이블 하나하나가 세계 혁명의 소우주였고, 월척을 놓친 어부의 경험담이었다. 화약 폭파에 실패한 비밀 결사대는 순전히 그들이 만들어 낸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다시금 음모를 계획 중이었다. 온 세상이 무대였다. 다만 그 무대에는 양 끝의 가려진 공간이 없었다. 파리의 대참사가 그렇게 희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있었다. (p. 53)

유럽의 근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다보면 모두 술에 취해 있는 듯 하다. 근대 보다 중세시대가 더 그렇긴 하다. 여하튼 유럽은 술독에 빠진 것 처럼 보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퍼마신다. 그 알콜릭 상태에서 역사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난다. 맨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잔인하고 그렇게 무모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대화도 대부분 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술집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혁명가처럼 보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자코뱅파, 무정부주의자, 민주주의자... 사소한 실랑이가 일상이던 시대였고 그들 모두는 혁명을 이야기했다.

"자넨 거의 뭐랄까... 혁명적 활동을 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여. 대체 왜 그런가? 어째서 노동자 행진에 참여하기를 그토록 꺼리는 거지?"

"참여할 행진이 있다면 참여하지"

"그렇지만 내 행진은 사양하겠다?"

"행진은 없었어. 그건 주정뱅이들의 난동이었다고" 마르크스가 코웃음을 쳤다.

"혁명이란 게 처음에는 다 난동이지"

"그래 맞는 말이야. 그렇고말고. 물론 마르크스 자네가 노동자에게 어떤... 혐오감이나 무슨 악감정 같은 게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틀린 말일 테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자네에게 어떤 현실적인 대안이 있는가, 이제 이 당의 정치적 노선은 어떤 것인가, 하는 걸세. 자네의 대안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난 정말 모르겠어. 대체 자네는 정확히 무얼 바라나?"

"자네가 말한 그 '대안'을 자본을 다룬 논문의 형태로 다음 회의 때 내놓도록 하겠네" 마르크스가 선언했다. (p. 115, 116)

혁명의 시기이긴 했으나, 구심점이 없고 철학이 없는 혁명은 어이없이 자멸하곤 했다. 그 불씨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더 큰불로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은 혁명을 말하는 사람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활동가라기 보다는 사상가였고 그의 사상은 초기엔 지인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공산주의자 선언'이 불씨는 만들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다음을 구축하진 못했다. 철저하고 현실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마르크스는 그 방법이 '자본론'의 집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지독하게 가난했고 현실은 그를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밥을 굶었고 갓난아들은 죽었으며 그 자신은 항문종기로 고생했다. 세상이 미쳐돌아가기 전에 그 자신이 미쳐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르크스는 펜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몰두했다. 명확한 설명이 필요했다. 세상에도 자기자신에게도.

피터 듀랜드가 통조림 깡통을 발명한 것은 1810년이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뒤에야 누군가가 깡통따개를 발명해야 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자본주의를 시스템이라 말하기는 곤란했다. 거기에는 통합된 사고가 없었다. 그건 결코 리바이어던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이요, 생과 사에 동시에 속한 혼종, 광적이고 극단적인 컬트, 비시스템이었다. (p. 134)

런던의 정치조직들이 조직에 가입할 수 있는 지지자 수보다 많다는 사실은 그런 환상을 방증한다. 우선 지도자가 되고, 다음으로 당을 조직한다. 그 멍청이들은 그렇게 말 앞에 수레를 두고 있었다. 공산주의 정당의 과제는 혁명 운동에 대응하고 그 역동성에 적응하는 것이지, 진흙과 지푸라기로 그걸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혁명은 하인첸 같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마르크스 같은 과학자를 필요로 했다. 혁명의 물결이 빠져나간 지금, 그는 혁명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도록 차라리 연구 활동으로 물러나는 편이 나았다. (p. 205)

보나파르트는 봉기를 진압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봉기를 해협 너머로 수출해버리는 것이다. 상인의 나라에서는 뭐든 비축하려 들 테니, '믿을 수 없는 앨비언(유럽 대륙에서 영국을 경멸조로 가리키던 명칭)'은 혁명의 마지막 기항지이자 떨이 장터였다. 기차를 가득 채운 망명자가 여전히 런던, 버밍엄, 맨테스터라는 사회적 공장으로 배달되고 있었다. 런던이 터널 끝의 빛처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들은 여전히 터널 안에 있었고, 빠져나갈 가망성은 나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p. 206)

자본주의는 철저한 시스템이 아니었고 혁명가들은 말로만 혁명을 논하고 있었으며 유럽대륙에서의 봉기들은 하나같이 짓밟혔다. 그 끝에 있는 도시 런던에 마르크스가 떠밀려와 있었다. 그는 혁명의 기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런던에 도착한 이래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혁명 최고의 이론가가 원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따. 마르크스는 그 모두를 위태로운 허세꾼의 기행 정도로 해석했다. 그렇지만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했던 그런 행동-파란만장한 연애와 런던과 맨체스터를 끊임없이 오가는 부산함-은 사실 마르크스가 친구에게 지운 부담 때문이었다. 책의 완성에만 맹목적으로 몰두하던 마르크스는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감했다. (p. 231)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마르크스를 돕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엥겔스는 아주 잠깐 나올 뿐이다.

엥겔스의 지원은 불규칙적이었고 마르크스 스스로의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생활고에 시달릴수록 오히려 더 망상적으로 집필에 집착하는 마르크스는 더이상 전당포에 맡길 물건이 없자 아이의 장난감까지 들고 나선다. 미분과 극한 개념에 몰두하고 기차의 궤적운동에 빠져든다.

"만약 자본주의를 기관차로 묘사하고, 기관차로서 운동의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떨까? 자본주의의 움직임, 말하자면 그것의 '진정한 운동'을 더할 나위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서, 전체 회로를 하나의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p. 328)

"자본주의는 한가하게 원운동을 하지도 않고, 직선으로 움직이지도 않아. 엄정함과 정확함의 이름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고점과 저점을 그래프에 나타내야 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지니는 깊이 파묻혀있지. 우리는 더 깊이, 핵심까지 내려가야 해. 그런데 무한의 차원에서 '아래'는 어디를 말하는 거지? 거기서 지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우린 자본주의의 이탈과 우회에도 그 본질을 간파해야 해. 더 나아가, 불규칙한 등락과 선회 속에서도 그것이 미래로 전진하는 경로를 그려내야 해. 동지들, 그걸 달성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더 긴 철로야" (p. 330)

장난감 기차를 빼앗긴 아들은 병이났고 전당포에 장난감 기차를 맡긴 아비는 눈에 뵈는게 없는 사람처럼 오직 이론에 몰두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땐 아들의 차가운 시신을 안고 있었다.

과거 없는 삶은 악몽이었다. 유령들은 더는 현재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거처를 옮겨 산 자들 가운데 머물렀다. 과거가 이주한 것처럼 미래는 정지했다. 미래는 더는 저 앞에, 저 지평선 너머에 있지 않았다. 그건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모든 진취적인 사고를 억압했다. 역을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한 기차,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되 절대 도착하지 않는 기차 같았다. (p. 346)

지난 1850년대 초, 그와 엥겔스는 혁명이 얼어붙어 동면기에 들어갔다고 선언했다. 순진하고 혈기 왕성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서에 의망을 걸었다. 그들은 그 책이 모두를 구원하고 혁명을 제 궤도에 올려놓을 거라고, 혹은 적어도 길잡이가 되어줄 나침반을 제공하리라고 믿었다. (p. 347)

소설은 마르크스의 생애라기 보다는 '자본론' 집필기 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자본론'을 집필하기까지의 마르크스의 내적 고뇌를 다루고 있다.

연이은 아이들의 죽음, 더이상 내다 팔 것이 없자 스스로를 버린 듯한 아내, 메모 쪼가리들 말고는 아무것도 이룬게 없는 것 같은 자신... 고통이 점증하고 분노가 폭발하려 할때 마르크스는 울부짖는다. "그 책에서 날 좀 놔줘! 날 좀 놔줘!" (p. 367)

관념 철학이 그가 다루어야 할 적이었다. 그렇지만 단번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목표에 동조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물론 혁명적 목적,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위해서였다. 노동자의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한 미래사회, 자유의 의미가 개인의 진정한 자기통치에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마르크스가 견지한 사회 비평이 조금이라도 존재 가치를 가지려면, 현실적이어야 했다. 추상적인 저술가가 될 수는 없었다. 계급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저술은 직업이어야 했다. (p. 390)

소설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애를 읽는 동안 울화가 치밀곤 했다. 궁핍에 찌들어가는 삶 속에서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혁명가로서 어떤 조직을 구성한다거나 학습을 시킨다거나 하는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오로지 이론 오로지 집필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위 구절을 읽고서야 조금은 알것도 같았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론이 맞다는 증명을 하기위해서라도 그자신 스스로의 작업은 가치가 있어야 했고 직업이 될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해도 모순적으로 다가오는 면들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뭐 마르크스가 무슨 종교적 성인이나 국가적 지도자도 아니고 그저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과한 기대를 했던 것인지도...

미친 과학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질량이 에너지와 같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환될 수 있는 한, 무한을 가로지를 수 있다. 속도가 두 배 였다면 그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혁명 열차도 마찬가지다. 시속 수천 킬로미터로 달리는 그것은 플랫폼에 가만히 서있는 기차와 완전히 달랐다. 아예 같은 '물체'가 아니었다. 전혀. 화폐 유통의 영역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다. 변화하는 크기는 변화하는 자본의 양으로 전환되었다. 모든 단단한 것이 공기 중으로 녹아들지만,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은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 상품은 소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돈은 결코 소비할 수 없다. 물질이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은 노동력, 프로이센 군대, 천연자원, 기차 모형, 자본 그 자체를 망라한 모든 것의 판매, 구매, 대여로부터 늘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결국에 자본에는 한계가 없다. 자본이 상품 세계의 지배자고 신이다. (p. 402)

마르크스의 책은 과학적인 기획이었고, 본질에서는 여전히 진행중인 작업이었다. [자본]은 성경이 아니었다. 실험의 원재료였다. 그의 이론을 증명하는 작업은 정확한 해석적 도구로 무장하고 테이블에 앉는 것에 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바로 그런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단순한 이해가 전부가 아니었다. 노동자는 누구나 그의 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한 줄 한 줄에 그들의 투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끝이 어디일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명심할 점은, 혁명이 멀지 않았다는 것, 사회 각 영역에서 감지되는 지각의 변동으로 보아, 노동자들은 그들의 혁명적 실천을 통해 이미 그의 이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p. 410)

이 책의 앞부분에 추천사 비슷한 '책머리에'를 쓴 저자의 한국동료교수는 "이 소설의 미덕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적 집적물이 눈앞에서 사사로 전개된다는 점이다"(p. 10) 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고뇌들을 그의 생애와 겹쳐 쓰면서 서사로 그의 이론적 고민들이 풀이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소설의 미덕인지는 모르겠다. 이러다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의 소설 속 마르크스의 상태는 소설이라는 허구이기에 읽을만 했다. 만약 허구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쓴 책 [자본]이 어느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치부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윈이 자연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해온 작업을, 비로소 내가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시작하고 있는 거야"

"흠, 난 자네가 다윈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데" 엥겔스가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윈의 작업은 과거에 대한 거야. 그는 오늘날까지의 진화를 연구하지. 자네의 작업은 그 모든 걸 포괄하면서 거기서 다 나아가, 미래를 전망하니까! 자네는 모든 면에서 진보적인 역사이론을 만들어냈어. 자넨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과학을 발명해 낸 거야"

"진정해. 내가 전반적으로 자연철학과 양립 가능한 접근법을 역사 분야에서 발견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아직 2부와 3부가 남아있어. 끝날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p. 435, 436)

그의 생전에 [자본론]은 1권까지만 나왔다. 2권과 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에 의해 편찬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던 시대은 다양한 사상들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던 시대였다. 다윈과 마르크스는 동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었고 당대의 혁명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체계화했다. 시대가 그들의 사유에 자유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어째서 아버지의 자존심에 속고 있는지, 제 삶에 대한 아버지의 해석이 왜 잘못됐는지, 진짜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언급하지 않은, 우리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중대한 행위자가 있어요. 엄연히 이 드라마의 당사자아지만 아버지의 주의를 비켜났죠. 하지만 아버지보다도 훨씬 큰 존재감을 발하고 있어요. 실은 여기 없기에 더욱더 그러하죠. 바로 공산주의에요!" (p. 453)

"더는 공산주의가 그저 제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아실 거예요. 공산주의는 이미 여기 와있어요! 정말로 이 책을 아버지 때문에 썼다고 믿으세요? 하! 글쎄요, 사실 모를 일이요. 아버지, 어쩌면 그랬는지도요, 정말 어쩌면요. 그렇지만 현대 파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제 600페이지짜리 편지가 이 방의 네 벽을 넘어서는 더 넓은 의미가 있다는 걸 시사하지 않겠어요? 모르시겠어요?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노동자들을 위해 썼어요. 혁명을 위해서요!" (p. 454)

도피생활 중 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낀 마르크스는 책의 말미에 가서야 그 감시자가 아버지 유령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 유령과의 대화 속에서 노년의 마르크스는 그제야 아들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독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의 마무리는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굉장히 개인적인 산물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르크스가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평범한 아무개보다도 더 하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르크스의 귀환> 이라는 제목을 봤을 땐, 근대의 혁명적 사상이 현대에서 다시 영향을 끼칠만한 이론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마르크스를 근대에서 현대로 귀환시킨 것이 아니라, 시대를 흔든 거대한 사상에서 혼란스러운 개인적 이론으로 귀환시키고 있는 듯 하다. 책 뒤표지에 써있듯이 그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기록' 이라 하겠다. 저자는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사뭇 궁금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사유의 흐름을 담은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앞 부분에 있었다.

더이상 전당포에 맡길 물건도 없고 더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이 전재산이라고는 주머니에 든 1페니 뿐이었던 마르크스는 집에 가는 길에서 죽어가던 아이에게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살갗이 트고 동상에 걸린 맨발을 드러낸 채 여기저기 곪고 헐벗은 다리와 누더기를 걸친 채 비쩍 마른 몸에 이가 들끓고 숨만 겨우 쉬는 상태였던 어린 아이에게 그 1페니를 준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기저에 이런 인간애가 있었음을 여전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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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 블랙
나나 크와메 아제-브레냐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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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파고든 차별과 혐오와 폭력

새로운 미국의 목소리

심장이 서늘해지는 이야기

 

12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프라이데이 블랙] 출간에 앞서 진행된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4편의 작품이 실린 가제본을 받았다.

가제본임에도 소설집의 색깔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화이트 그리고 블랙.

작품 사이사이 간지로 들어가 있는 진한 블랙의 페이지, 정말 새까만... 새카만 블랙. 하지만 시커멓다고 말하기 싫은 다크한 정말 다크한 그런 블랙.

그의 지인들은 대부분 아직도 핀켈스틴 재판의 평결을 애통해하고 있었다. 동료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28분간의 숙의를 거친 후 조지 윌슨 던이 그 어떤 범법행위도 하지 않았다는 평결을 내렸다. 앞서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밸리리지에 있는 핀켈스틴 도서관 밖에서 체인톱으로 흑인 아이 다섯의 머리를 잘랐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원은 그 아이들이 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에게 기대되는 대로 도서관 안에서 책을 읽지 않고 사실상 밖에서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던이 이들 흑인 청소년 다섯 명에게서 느낀 위협은 합리적인 반응이었고, 그래서 그가 자신의 포드 F-150 승용차 뒤편에서 호테크 프로 18인치 48시시 체인톱을 꺼내 본인과 도서관에서 빌린 DVD와 자녀를 보호한 행위는 그의 권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핀켈스타인의 5인 - p. 10)

이매뉴얼과 가족은 평결이 있던 날 방송을 통해 판결내용을 알았다. 어머니는 컵을 벽에 던졌고 아버지는 눈가를 닦았다. 이매뉴얼은 한 회사의 면접을 앞두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흑색도를 조절중이며 갈등중이었다.

살해당한 흑인 아이 다섯 명중 한 명은 일곱살 어린 소녀였고 잔혹한 현장에서 도망가던 중임이 분명한 위치에서 머리를 잘렸다.

이매뉴얼은 바깥세상으로 나섰고, 그때 그의 흑색도는 빈틈없는 7.6이었다. 흑색도를 최소한 4.2까지는 낮춰줄 옷으로, 그는 모자챙을 앞으로 당겨 눈에 그늘이 지도록 눌러썼다. 아주 오랫동안 흑색도를 7.0 가까이라도 올려본 적이 없었다. "난 네가 안전하기를 바란다. 처신을 잘하는 법을 배워야 해"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그렇게 말했다. 이매뉴얼은 긴 나눗셈을 배우기도 전에 자신의 흑색도를 조절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웃었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 소곤거렸다. (핀켈스틴의 5인 - p. 12, 13)

하지만 소풍간 날 기념품 상점에서 인형을 훔쳤다는 누명을 썼고, 면접 때 입을 셔츠를 사러 쇼핑몰에 갔을때 뒤에 경비원이 미행했으며, 상점에서 셔츠를 구입하고 나올때 자신을 막아선 직원에게 물건을 산것인지 훔친것인지 증명해야 하는 영수증을 내보여야 했다. 그리고 영수증을 본 직원은 사과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침에 전화한 사람이에요. 면접에서 청년을 만나볼 생각으로"

"네,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내일 열한시 맞죠?"

"아, 이매뉴얼, 그게 말이죠, 젠장, 내가 사정을 꼼꼼히 따져보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데, 그 자리는 이미 채워진 것 같아요"

"네?"

"아, 그게, 우리 매장엔 이미 자말이라는 친구가 있고, 반은 이집트인인 타이라는 친구도 있어요. 그래서 이게 좀, 과잉이라는 거지. 우리가 도시적인 브랜드도 아니고, 내말 알아들어요? 그래서 내 생각엔......" (핀켈스틴의 5인 - p. 26)

이매뉴얼은 새로 산 셔츠를 입고 정장 구두를 신고 나갔다. 망설이던 '호명단'에 참여하기 위해.

도서관 근처에서 또래들과 그저 어울리고 있었을 뿐인 흑인아이 5명은 백인남성에게 머리를 잘렸으나, 배심원단은 이 아이들이 위험한 존재였다고 인정했다. 이매뉴얼은 취직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정장을 갖춰입은 모습으로 5명의 아이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야구방망이를 들고 한밤에 공원에 가서 백인커플 앞에 섰을때 그에겐 총알이 날아왔다.

학교에서 보통 때처럼 아침 '유쾌'를 맞는다. 그리고 <그때는 어땠나> 수업에서 또다시 이전 시대에 대해 토론한다. (그 시대 - p. 66)

타인을 위해 하는 거짓말 때문에 '단기 대전'과 '장기 대전'이 일어났어요. (그 시대 - p. 74)

'전환'된 시대, 진실되고 당당한 것만이 자랑스러운 태도인 이 시대는 과거를 거짓말로 점철된 사회였다고 평한다. 보이는 외모데로 비하하고 다른 성격적 차이를 존중하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솔직하다고 자신보다 모자라보이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을 당당하다고 여기는 사회다. '최적화 시술'로 인성패키지를 적용시켜 태아의 성격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완벽한 조합으로 시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아기는 성격장애든 신체장애든 장애율이 높았다. 유전자교정을 받지 않고 태어난 '자연출생자'인 벤은 최적선택술을 받은 아이들에게 신체적 능력이 뒤쳐지는 것을 알고 있고, '유쾌'주사를 맞지 않으면 짜증이 난다.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일정량의 '유쾌' 주사가 필요하지만 벤에게는 몇 배 더 필요하다. 도무지 '유쾌'해 지지가 않는다.

"나는 그런 식으로 뭘 축하하거나 너랑 어울려 다니는 짓은 안 해. 게다가 다들 네 부모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알아, 하지만 그런 걸 하면 모두가 정말로 행복해져"

레슬리 맥스토는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레슬리를 바라보며 당당함이나 총명함이나 진실과는 다른 어떤 느낌에 빠진다. ( 그 시대 - p. 68)

"우리는 여기서 '유쾌'가 없이도 감정을 느끼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단다. 우리는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어. 너도 네게 맞는 패키지를 선택하고 거기 맞춰서 일주일에 몇 번씩 우리와 함께 지내면 돼."

나는 일어선다. "짜증이 나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나는 소리를 지른다. '유쾌'주입을 받지 못했다. 안내서가 주먹 안에서 우그러지는 느낌이 든다. 앞장에 구불구불한 서체로 '그시대의 삶'이라고 쓰여 있다. ( 그 시대 - p. 78 , 79)

레슬리는 달랐다. 학교에서 무시하는 신체장애아들인 '땅바라기'들을 보살폈고, 벤에게 이유없이 친절했다. 최전선택술로 태어난 아이들과는 달랐다. 부모조차 모자라고 부족한 아이로 취급하는 벤에게 레슬리는 다른 느낌을 깨닫게 해주었다.

배려가 거짓이 되고 감정의 공유는 쓸모없어진 시대, 그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유쾌'주사는 마약과 같았고, 벤은 그 주사를 더이상 요구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진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올까?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작가가 보여주는 '그 시대' 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고객들은 체험장 밖을 나서며 설문지를 작성하는데, 1은 '전혀 아니다' 를 뜻하고 5는 '전적으로 그렇다'를 뜻한다. 그들은 내가 근무 중일 때면 설문지 문항 모두에 5라고 답한다. 즐거웠는가? 5. 정의가 실현된다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격렬히 느꼈는가? 5. 재방문 의사가 있는가? 5. 추가 의견을 적는 칸에 그들은 이런 식으로 적는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아이도 데려오고 싶어요" ( 지머랜드 - p. 93)

'지머랜드' 라는 놀이공원이 있다. 성인용 체험 놀이시설인 이곳에서 제이는 플레이어로 일한다. 고객이 원하는 설정에 맞춰 등장하고 고객의 폭력에 쓰러지는 역할 이랄까. 하지만 제이가 플레이어일때 고객들은 대부분 제이에게 쏭을 쏘았고 제이가 (가짜 피를 흘리며)죽으면 만족해했다. 제이는 플레이어 중 유일한 흑인이었다.

지머랜드의 CEO인 힐런드 지머다. 실제로 만나면 그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나무 몇 그루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린 다음 날달걀을 대여섯 개쯤 먹을 사람처럼 보인다. 홀로컴을 통해서는 턱수염이 난 거대한 머리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백인이며, 그것은 시위대가 내게 매우, 매우 자주 상기시키는 사실이다. 힐런드는 멍청이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 나는 생각한다. 멜러니라는 흑인 여자친구가 있는 멍청이. 어딘가에 있는 어떤 포커스 그룹은 흑인 여자친구로 인해 그의 인종주의자 이미지가 소비자의 눈에 적어도 20퍼센트 정도 감소한다고 분석할지도 로른다. ( 지머랜드 - p. 98)

왜 그런 곳에서 일하냐고 묻던 제이의 전애인 멜라니는 지금 힐런드의 애인이 되어 있고 지머랜드의 인사부장이 되면서 오랜 백수생활을 청산했다.

'불의의 공원 - 유료 게임이 된 죽음과 미국 도덕성의 종말' 이라고 불리는 지머랜드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날마다 놀이공원 주변을 에워쌌지만, 제이는 이 놀이공원을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게 바꿀 여지가 있다며 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하지만 제이가 창의기획팀원이 되어 드디어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된 날, 평소 10시 였던 회의는 9시에 시작되었고 변경된 시간을 통보받지 못한 제이가 도착했을 때 회의는 끝나가고 있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고객이 살인과 정의를 동일시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음, 그 두가지가 같을 때도 있죠" 힐런드가 말한다. "같지 않을 때도 있고. 그게 바로 이 체험장의 매력이에요"

"메카슈트는 이제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이 체험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말 죽겠네. 어느 체험장에서나 메카슈트를 작동시키는 순간이 가장 중요해요. 고객이 그 경험에 가장 본능적으로 몰입하는 순간이니까. 우리가 자극해야 하는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고, 메카슈트는 꼭 필요합니다. 게다가 플레이어를 보호하잖아요" ( 지머랜드 - p. 105, 106)

메카슈트를 작동시키면 신체사이즈가 부풀어 커지고 몸 전체를 단단한 물질로 에워싸게 된다. 옷안에 입은 메카슈트는 고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비이지만, 심리를 건드린다. 고객이 위협을 당한다는, 거대하고 튼튼한 몸집의 적을 만난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저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플레이어를 보고 고객은 자신의 집앞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위협이 된다며 시비를 걸고 총을 쏘기에 충분한 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새로 건설중인 <PS911> 이라는 체험관은 청소년용으로 오픈 예정이며 동시에 다른 체험관들에도 아이들의 입장이 허용되기로 결정됐다.

327호 욕실에서 나는 일할 준비를 한다. 개정된 프로토콜을 훑어보니 아이들과는 접촉하지 말라고 확실히 쓰여 있다. 모든 청소년은 녹색 팔찌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앞에 있어도 성인 고객과는 예전처럼 폭력의 수위를 조절하며 싸울 수 있다. 나는 골목을 따라 걷고 있다. 내 할 일을 하든 나쁜 짓을 꾸미든,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이. 336호의 문이 열린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가 보인다. 그가 앞마당 잔디밭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나를 돌아본다. 남자의 이름은 모르지만 나르 쏘러 너무나 자주 왔기 때문에 마치 가족 같은 느낌이다. 그때 집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의 아들이 보인다. 이미 예고했듯이 어린아이다. 열한 살 정도일 것 같다. 아이의 아버지가 내 쪽으로 쿵쿵거리며 다가온다. "이봐요, 여기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죠? 음, 내 생각에 당신은 말썽을 일으키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 지머랜드 - p. 112)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인지 작가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싶은 소설의 내용이 뉴스에서 봤던 기사들을 생각나게 하면서 입맛을 쓰게 한다. 비극적인 뉴스를 봐도 처절한 소설을 읽어도 왠지 현실같지 않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체감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어디를 봐도 다른 피부색을 볼 수 없는 현실에서 살고 있는 내게, 작가가 보여주는 인종차별의 현장은 흡사 다크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요즘의 미국은 그 어느때보다 어둡게 차별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쇼핑객 한 무리가 매장 앞에서 멈춰 선다. 우리에게 남은 폴페이스를 본다. 나는 좌대 위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어떤 몸은 쓰러졌다 일어난다. 어떤 몸은 쓰러진 채 그대로 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씩씩거리고 쥐어뜯고 신음한다. 나는 장대를 쥐고서, 지갑에는 돈이 있고 머리에는 프라이데이의 암흑이 자욱한 사람들이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채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 프라이데이 블랙 - p. 132)

'블랙 프라이데이' 는 세계적인 미국의 쇼핑데이다. 국내에서도 그 시즌이 되면 저가로 나온 상품들을 구매하려고 컴퓨터 앞에 대기중인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제목 만으로도 '블랙 프라이데이' 를 풍자한 것임을 알 수 있는 '프라이데이 블랙' 은 죽음이 난무하는 쇼핑의 현장을 묘사한다. 오직 쇼핑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짓밟고 죽어넘어지는 사람들을 제치며 사고자 하는 물품만을 외쳐대는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고 그들 손에 한가득 들린 쇼핑백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저 아연실색해질 따름이었다.

백화점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뛰어드는 쇼핑객들의 사진을 기사에서 본적이 있다. 실제로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로 봐야 할까... 블랙의 풍자로 봐야 할까...왜 '블랙 프라이데이' 가 됐을까... 이때의 블랙은 어떤 블랙인 것일까... 왜 블랙은 뭔가 안좋은 느낌의 의미로만 쓰여야 할까...

4편의 짧은 작품들을 읽었을 뿐임에도 엄청난 두께의 4권을 읽은 것 마냥 마음이 묵직하다. 석탄을 들이마신 것처럼 폐 한 쪽이 시커매진 기분이다.

그 어떤 스릴러보다도 잔혹한 소설들이었다. 스릴러소설은 허구이지만 이 책의 소설들은 현실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잔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이 뜨거운 비탄어린 목소리가 미국에서는 제대로 퍼지고 있는 것일까... 내 안에는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일상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절절이 깨달을 수 있는 소설들... 이 책의 진정성이 널리 읽히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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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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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미니애폴리스의 교외에 위치한 열두 살 루크의 집에 괴한들이 침입해 부모님을 살해하고 루크를 납치한다. 루크는 원래 자신의 것과 거의 똑같은 모양으로 꾸며져 있는 방에서 깨어난다. 그곳은 TP(텔레파시)와 TK(염력)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혹한 훈련과 실험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키워 테러에 사용하는 '시설'이었다.

 

작년 여름 '아웃사이더' 라는 작품으로 시원쫀쫀한 스릴러의 세계를 맛보게 해준 스티븐 킹의 작품이 올여름에도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악에 맞서는 초능력 아이들의 이야기다. '인스티튜트' 즉, 연구소.

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은 팀 제이미슨. 얼마전까지만 해도 경찰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떠도는 중이다.

팀은 올라탔다. 그녀의 이름은 마저리 켈러먼이었고 브런즈윅 도서관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동부 도서관 협회인가 뭔가 하는 단체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 협회는 돈이 없는데 "왜냐하면 트럼프 하고 그 일당이 다 빼앗아갔거든요. 그들이 문화를 이해하는 수준은 당나귀가 수학을 이해하는 수준하고 비슷해요" 라고 했다. (p. 24)

근래 영미권 번역서를 읽으면 자주 등장하는 트럼프 ㅋㅋ 이젠 뭐 익숙할 정도다 ㅋㅋ 이런 면에서도... 역시 스티븐 킹!!

그는 평범한 사람들, 특히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친절과 호의를 베풀면 가슴이 뭉클해졌고 놀랐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그도 어떨 때는 그랬다) 미국은 아직 살 만한 곳이었다. (p. 25)

엄청난 사건들도 경첩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방향이 바뀔 때가 있다. (p. 26)

예측할 수 없는 소설이 때로는 아주 초반에 속내를 드러내보일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엔 위 구절이 그랬다. 올 여름 스티븐 킹의 스릴러는

살곳이 못되어버린 현실에서 살만한 세상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며 사소한 우연이 거대한 인연을 만들어내는 온기, 그것을 전해줄 것 같은 예감...

서늘한 스릴러를 읽는데 따스한 온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일면 모순되 보이지만... 스티븐 킹이라면 가능할 듯!

그는 경찰이었기에 서핑과 태양으로 상징되는 새러소타라는 휴양지의 낮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만큼이나 다른 밤의 얼굴을 알았다 밤의 얼굴은 역겨웠고 가끔은 위험했고, 그는 죽은 약물 중독자와 폭행당한 매춘부를 지칭하는 NHI, 즉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라는 뜻의 혐오스러운 경찰용 은어를 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10년을 경찰로 지내는 동안 냉소주의자가 됐다. 가끔 이런 감정을 집까지 안고 간 것이 그의 결혼생활을 무너뜨린 원흉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아이를 철저하게 거부한 이유 중에 이런 감정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는 나쁜 것이 너무 많았다. 잘못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p. 55)

미국 경찰은 아무래도 온전히 가정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직업인가 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국경찰 혹은 요원들은 대부분 이혼남이었던듯;;;

세상엔 나쁜 것이 너무 많았고 잘못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천직이 경찰일 것 같은 팀을 어이없는 사건으로 사직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휴일날 쇼핑중에 두 소년의 싸움을 목격하게 됐는데 한 소년이 총을 들고 있었고 그 총이 사실은 장난감 총이었다든가 그런데 그 장난감 총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천장을 향해 공포탄을 쐈는데 쇼핑천장의 샹들리에가 흥미거리용으로 현장을 핸드폰촬영중이던 시민 한명을 다치게 했다던가 그런데 그때 팀이 술 몇잔을 마신 상태였고(휴일이었다!) 그 시민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소송거는 사람이었다든가 그래서 모범경찰표창을 받은 팀이 권고사직과 방랑이라는 갑작스런 사태를 겪게 되었다든가 하는... 지금 미국의 웃픈 현실이랄까.

총기사고와 마약사고에 대한 스티븐 킹의 경고는 작품마다 등장하는것 같은데 한결같은 그의 쓴소리에 늘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내곤 한다.

여하튼 팀은 듀프레이 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야경꾼으로 임시 머물게 되는데 팀의 진가를 알아본 경찰서장은 그에게 경찰복직을 제안한다.

그리고 장면은 전환되어 몇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 소년이 등장한다.

루크 엘리스.

열두살인 이 소년은 아이큐 측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굉장한 학습능력을 가진 아이다. 고등교육과정의 영재학교에서도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 대학진학을 권유했고 최고수준의 대학 두곳에서 비공식적 입학허가를 받은 상태다. 그리고 이 천재소년에겐 또다른 능력이 있다.

피자 팬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버트와 아일린은 그런 줄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크가 흥분하면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p. 93)

새로운 배움에 대한 열망에 한껏 들떠있었을 때 어느 밤 집에 괴한이 침입한다. 부모님과 루크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부모님과 루크는 천재적 학습능력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능력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던 루크가 일으키는 특이한 어떤 현상때문에 그들이 왔다. 그리고 루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방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파닥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그걸 가라앉혔다. 잠겨 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지만 문지방 너머의 복도는 그가 12년과 몇 개월을 살았던 그 집의 2층 복도와 전혀 달랐다. (p. 108)

하룻밤 사이 이 무슨 날벼락같은 일이란 말인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돈속에서 루크는 자신처럼 영문도 모른채 납치당해와 있는 다른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 아이들은 루크처럼 뛰어난 학습능력은 없었지만 루크가 능력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특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텔레파시 혹은 염력.

그녀는 말문을 맺을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는 점점 더 귀해지는 상품이 있었다. 상아. 호피. 코뿔소 뿔. 희금속. 심지어 석유까지. 여기에 IQ와 별개로 비범한 재능을 소유한 특별한 아이들이 추가됐다. 이번주에 딕슨이라는 아이를 비롯해 다섯 명이 더 들어올 예정이었다. 훌륭한 업적이었지만 2년 전에는 그런 아이를 30명쯤 데려올 수 있었다. (p. 113)

그들은 루크의 천재성 따위는 관심없었다. 루크가 사물을 움직이는 능력, 그것에만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실험들... 그들에게 아이들은 소모품이었다.

루크는 다른 아이들을 통해 빠르게 현실을 이해해 나간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누가? 왜? 어떻게?

여기가 어떤 시설인지 몰라도 고목들로 뒤덮인 숲속, 그러니까 외딴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놀이터만 해도 그가 맨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6세기부터 16세기까지를 수용하는 교도소의 운동장이라는 게 있다면 딱 이렇게 생겼겠다는 것이었다. (p. 135)

MIT와 에머슨에 입학할 예정이었던 루카드 데이비드 엘리스가 컴퓨터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한 점으로 전락했다. 루크는 그의 방으로 돌아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경악스러운 사실을 발견했다. 책이 없었다. 한 권도 없었다. 컴퓨터가 없는 것만큼이나 몹쓸 일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몹쓸 일이었다. (p. 183)

루크를 다른 아이들처럼 어린 소년으로만 본 것이 그들의 착오의 시작이었다. 루크에게 책을 주지 않음으로써 다른 형태의 사고를 하게 한 것이 그들의 무지의 시작이었다. 루크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들에게 루크는 평균에도 못미치는 TK 소유자일 뿐이었지만, 루크는 왠만한 어른 몇명이 머리를 모아도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소년이었다. 아이들이 견딜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은 아이들을 좌절시켰지만 루크는 좌절 이상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물이 마르자 서글픔과 상실감이 아니라 그보다 단단한 다른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일종의 기반암이었다. 그런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위안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고 이제는 여기서 탈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 단단한 것은 그 이상을 원했다. 악에 바친 열두살 짜리의 무능력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어 했고, 그럴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p. 236, 237)

그들이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루크는 새롭게 자신을 각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들이 원했던 방향으로도 루크의 능력은 각성했다. 루크는 진짜 자신을 감추었고 서서히 계획을 짜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크 엘리스는 머리가 비상한 동시에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고 오버해 가며 붙임성 있게 굴던 아이였다. 그는 적절한 상호작용을 모두 수행한 뒤에 책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 세상에는 심연이 있고, 책 속에는 거기 숨겨진 것을 소환하는 비밀의 주문이 들어 있었다. 모든 걸작 미스터리물이 그랬다. 루크에게는 그런 미스터리물이 최고였다. 미래의 언젠가는 그가 직접 책을 쓸 수도 있을지 몰랐다. (p. 323)

공과대학과 영문학전공 대학교육과정을 동시에 배우고자 했던 천재소년 루크, 루크의 지식에 대한 열망과 책에 빠져드는 몰입감을 보면서, 특히나 책에 대한 경외감과 미스터리물에 대한 열정을 보면서 루크가 스티븐 킹의 어릴적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아무래도 천재 같다! ㅎㅎ

여하튼, 루크는 시설과 관리자들의 헛점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누구도 모르게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자신만 시설을 빠져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돌아와서 다른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엄청난 사건들도 경첩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방향이 바뀔 때가 있다. (p. 442)

전직 경찰 팀도 천재소년 루크도 '엄청난 사건들도 경첩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방향이 바뀐' 운명을 맞닥뜨린채 1권이 끝났다.

빨리 다음줄을 읽고 싶은데 마음의 다급함과 궁금증을 따라가지 못하는 눈의 속도가 아쉬울 정도로 빠져드는 소설이었다. 아~~~~ㄱ 2권이 읽고 싶다.;;;

1947년 생의 스티븐 킹과 1945년 생의 딘 쿤츠는 미국 스릴러 소설계와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로 비유되곤 한다고 한다. 두 거장은 여전히 그 어떤 현역보다 왕성하게 집필 활동중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경이롭지만 스타일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스티븐 킹은 스토리를 중요시 하고 딘 쿤츠는 플롯을 중요시 한다는 인터뷰모음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두 거장의 몇몇 작품을 읽으면서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전체구조가 사전에 이미 탄탄하게 짜여진 플롯과 한치앞도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는 둘 다 매력적이다. 서로다른 반전의 묘미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이 두 가지 매력을 한 시대에 스릴러라는 같은 장르로 만나게 해준 두 거장에게 마음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루크의 탈출은 성공할까? 루크와 팀이 만날 것 같긴 한데... 둘은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다른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그 시설의 운영자들은 어떤 세력일까? 악을 증폭시키는 어른들에 맞서는 아이들이 그 거대한 악을 분쇄시킬 수 있을까? 궁금하다궁금하다궁금하다~~~;;;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천재적인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여름엔 역시 스릴러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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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살인 1
베르나르 미니에 지음, 성귀수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욕조에서 발견된 여교사의 사신, 풀장 주변 위에 떠있는 19개의 인형, 엽기적 살해 현장 주변을 맴도는 연쇄살인의 그림자! (표지 中)

 

베르나르 미니에

처음 듣는 작가 이름이었다.

<눈의 살인> 이라는 장편소설로 발표와 동시에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된 그의 작품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아 다수 영상화 되었다고 한다. <물의 살인1>을 읽는 동안 그러한 평가에 대해 아~! 할 수 있었다. 글을 읽음과 동시에 장면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다.

프랑스 스릴러 작가 하면 '기욤 뮈소'만 알았는데, '베르나르 미니에'의 작품에서도 그에 뒤지지 않는 스릴러적 묘미를 느낄 수 있어 앞으로도 그의 작품에 관심이 갈 듯 하다.

프롤로그 에서 한 여자의 독백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납치된 후 몇 주, 몇 달이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전의 삶이 있었던가. 매주 한 번쯤, 어쩜 그보다 자주 또는 드물게, 쪽문으로 팔을 내밀라는 지시와 함께 정맥주사를 놓았다. 아팠다. 주사 솜씨가 어설픈 데다 약물이 진해서였다. 그리고 나면 거의 곧장 의식을 잃었고, 깨어났을 땐 위층 식당에 앉아 있었다. (p. 9)

한 여자가 감금된채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시작부터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뒤이어 금요일-토요일-일요일-월요일-화요일 로 시간순서적인 사건 진행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프롤로그의 시간과 이 금토일월화 의 시간이 동시간대인지 과거와 현재의 교차시점인지 분명치 않다. 동일 사건인지 두 개의 별개 사건인지도 분명히 알수 없는채 잔인한 살인사건 현장에 빠져든다.

마르삭 이라는 평온한 대학도시에서 한 여교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온 나라가 월드컵 개막전에 흥분하고 폭풍우가 모든 배경을 압도하던 날, 혼자 사는 젊고 매력적인 여교사의 정원을 흘끔 내려다보곤 하던 이웃집 노교수의 신고에 의해 출동한 경찰은 사건현장에서 약에 취해있는 한 남학생을 체포한다.

이 현장에 마르탱 세르바즈도 가게 된다. 얼마전 충격적 살인사건의 주범인 연쇄살인마를 검거하여 유명세를 탄 마르생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기 때문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20여년 전의 첫 사랑 마리안 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살인누명을 쓰게 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20년 만의 통화임에도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마르삭은 세르바즈가 공부했던 도시이기도 하고 그의 딸인 마르고가 공부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리안과 그의 절친 프랑시스의 학창시절 우정과 배신의 추억을 안겨준 곳이기도 하다. 마흔 한살의 인생동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린시절의 살인사건이었으나, 사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뛰어난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자살 이후 형사가 되었다.

그는 토라와 쿠란, 성서가 모두 펼쳐진 채 놓여있는 작은 가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종교에 관심 있으십니까?"

그가 묻자 윈쇼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켜는데, 기운 잔 너무 어딘지 짓궂은 눈빛이 이글거렸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종교라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들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저 가구를 무어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세르바즈가 눈썹을 실쭉 치켜 올렸다.

"<머저리들 코너>" (p. 75)

사건을 신고했던 이웃집 노교수 올리버 윈쇼는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형형한 눈빛을 지닌 마르삭대학 영문학 교수이다. 탐문수사 중에 세르바즈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이 노교수는 범인인것 같진 않은데 왜 이렇게 상세한 묘사를 하는 걸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이런식의 현실을 비꼬는 시니컬한 관점이 등장할 때마다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 깊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세르바즈가 문학을 전공해서인지 저자의 개인적 취향 때문인지 작품 내내 다양한 문학작품이 인용된다. 소제목 중의 하나가 '나는 플라톤의 친구이지만 그보다 더 진리의 친구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한 구절을 사용할 정도로 고전에 대한 인용도 자주 등장한다.

세르바즈는 또다시 스스로 시대에 뒤쳐진 느낌을 받았다. 그가 데리고 있는 젊은 부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으며, 그가 어느 정도까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일깨워주곤 했다. 조만간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수사로봇을 발명해 형사들을 폐기처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 77)

프랑스 감옥은 늘 결백한 사람들로 북적댔고, 거리에는 죄지은 자들로 넘쳐났다 판사와 변호사는 그 잘난 법복을 걸치고 도덕과 법에 대해 보란 듯이 일장연설을 토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법체계의 맹점이 무수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p. 84)

뜻밖의 한국 등장 ㅋㅎㅎ 중국과 일본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이 언급된 것을 반가워해야 하려나;;;

외국 스릴러 소설을 읽다보면 정의의 주인공이 형사나 요원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법복 입은 자들에 대한 비판을 종종 본다. 우리나라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정의의 주인공은 검사나 변호사 일 경우가 많지 형사인 경우는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문화의 차이일까 부패의 차이일까 ^^;;;

마르고는 자기가 무얼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선 어떤 의혹도 없었다. 문득 딸의 유부남 애인의 말이 생각났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카피톨 광장에서 딱 한 번 만났었다. "겉모습은 제멋대로지만, 마르고는 아주 속 깊은 아이랍니다. 똑똑하고 자주적이죠. 모름지기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할 거예요" 그 자체만으로 고통스럽거니와 가시 돋친 설전에 가까웠던 대화. 다만 아버지가 딸을 그간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준 대화이기도 했다. (p. 100)

wow 과거 딸의 애인이 유부남인데 형사인 아버지가 그 애인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니;;; 더구나 딸은 이제 열일곱살인데;;;

하긴 고등학생때부터 술과 담배, 마약이 가능한 문화이니 애인의 범주도 우리네와는 많이 다르려나;;;

"잘 생각해봐. 네 목숨이 걸린 일이야!"

"음악이......"

"뭐, 음악?"

"바보 같은 얘긴 줄 알지만 자꾸 말해보라고 다그치니까"

"내가 무얼 다그치는지는 내가 잘 알아, 자 계속해봐. 음악이?"

"정신이 들었을 때 오디오세트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p. 110)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잡힌 소년이자 마리안의 아들인 위고는 사건 현장에서 생소한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여교사 집의 오디오세트에서 CD가 나왔다. 구스타프 말러의 '킨도토튼리더(죽은 아이들을 위한노래)' 였다.

구스타프 말러.

이 음악가는 세르바즈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몇 년 전 검거한 연쇄살인마가 가장 좋아하여 사건현장에 틀어놓곤 하던 음악의 음악가이기도 했다. 말러의 음악에 대해서라면 둘 다 달인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연쇄살인마는 얼마전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다. 사건의 범인을 추적할 수록 연쇄살인마인 쥘리앙 알로이스 이르트만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온천하가 언제 산산조각 날지 모르거니와 정치, 경제, 종교, 자원고갈이란 이름을 단 묵시록의 네 기사가 죽어라고 채찍을 휘두르는 상황임에도 일촉즉발 지구촌 족속은 축구 같은 참으로 하찮은 짓거리에 미쳐 계속 광란의 춤만 추어댈 것인가 보다. 세르바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후재앙과 주가폭락, 대규모 소요사태와 대량학살이 걷잡을 수 없이 세상을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점수를 따는 데만 혈안이 된 바보들과, 그런 바보들을 응원하고자 경기장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더한 바보들은 늘 있을 거라는 생각. (p. 125)

연쇄살인마가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는데 여기저기서 온통 월드컵 축구에 광분중인 것을 볼때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세르바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형사는 알면 알수록 참 사색적이고 문학적이다. 하지만 이 예민함에는 슬픈 기억이 깃들어져 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집안에 강도가 들어 어머니는 의자에 묶인 아버지 앞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그 소리들을 벽장안에서 들었던 어린 소년은 10년 후 자살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공부를 때려치우고 경찰시험을 봤다.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나니'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에서 인용 (p. 157)

해석학은 '말하다' '표현하다' 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헤르메네이아'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어근이기도 하다. (p. 163)

최근 읽었던 책 중에 프랑스 작가의 호메로스에 대한 에세이가 있었는데, 프랑스는 라디오에서도 한 계절 내내 고전이야기를 하고 중학교에서도 호메로스를 읽는다더니 스릴러 소설에서도 고전을 등장시키는 구나 싶어 신기했다.

엘시노어의 궁정과도 같은 대학도시 마르삭이 험담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말조심에 대한 감각 또한 남다른 곳이거니와 지극히 우아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애먼 사람을 저격하는 곳이며, 따라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비방은 용납할 수 없이 저급한 취향으로 간주되는 곳임을 세르바즈는 모르지 않았다. 요컨대 지금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고도의 지식인들로 수수께끼와 암시, 숨은 의미를 즐기며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섬세한 지성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하즐이었다. (p. 204)

살해된 여교사 클레르의 주변을 탐문할 수록 부유한 지성인들과 학생들이 주민의 대부분인 마르삭 만의 고유한 어떤 특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특성은 연쇄살인마 쥘리앙과도 닮아 있었다.

분명 복에 겨워서였을 거다. 적어도 마리안의 생각은 그랬다. 세르바즈 역시 말은 안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이 대죄로 여기던 휘브리스(도를 넘는 오만)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따. 이를 범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몫 이상의 것을 바람으로써 죄를 저지르는 것이요, 신들의 분노를 산다는 얘기였다. (p. 230)

20년 만에 만난 세르바즈와 마리안은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멈춰졌던 시간을 현재까지 연결시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몰랐던 서로의 속내를 알게 된다.

세르바즈-마리안-프랑시스 의 삼각관계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여전히 마르삭 교정에서 진행중이었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이 학교에서 사랑과 경쟁은 여전히 솔직해서는 안되는 분야인가 보다.

"현재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래. 지금 위고는 살인혐의를 받고 있어. 범죄현장에서 발각되었지. 다비드는 불과 몇 초 간격으로 그를 뒤따라 술집을 나갔고, 그걸 목격한 사라는 입을 다물고 있지. 아울러 1학년 최우수 학생 네 명이 거기 있었다는 거야. 다시 말해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의 젊은이 네 명으로 이루어진 4인조. 말해봐, 그런 각도로 보면 문제가 훨씬 더 흥미롭지 않아? 요컨대 구린 놈이 그들 중에 있는 거라고." (p. 251)

세르바즈의 딸 마르고는 용의자인 위고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살해된 여선생에게 배운 적도 있다. 소문을 타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 사건을 맡았다는 것은 학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위고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그런데 교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마르고는 아빠와 다른 형태의 수사에 착수하기로 한다.

"당신들끼리 마음대로 놀아보라고. 그래서 당신들 중 누가 더 강한지 실컷 확인하라고. 결국 나는 당신들이 하는 노름의 판돈에 불과했던 거야. 싸움판 그 자체. 당신들의 그 고약한 경쟁의식. 그 오랜 대결 한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있었지. 마치 전리품처럼 말이야. 알겠어?" (p. 427)

과거의 배신은 세르베즈가 알던 이유가 아니었고, 클레르에게 내연남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런데 내연남이 또 있다. 이른바 삼각관계.

삼각관계는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두 남자 사이의 한 여자, 두 여자 사이의 한 남자, 두 범죄자와 한 형사, 두 상관과 한 부하직원, 세명의 친구 등등등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용의자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만 쌓이고 예상되는 범인은 한명에서 두명 두명에서 세명으로 자꾸 늘어만 간다.

모든 가능성이 열린채 1권이 끝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정말 연쇄살인마가 재등장한 것일까? 예상밖의 새로운 인물일까?

참, 소설에서 '헌병'이 자주 나오는데 내가 생각하는 '헌병'의 개념은 군인이라 이해가 잘 안갔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소설에서 말하는 '헌병' 이라는 건 우리식으로 보면 파출소 또는 지구대 로 불리는 동네의 작은 경찰기관을 말하는 것 같다. 헌병으로 새로 부임하게 된 인물의 설명을 읽고 보니...

>> "도로교통 단속하고, 이따금 술꾼들이 드잡이하는 걸 정리해주고, 좀도둑질이나 기물파손행위, 학교 앞에서 약 파는 놈들을 잡아다가 콩밥을 먹이고, 뭐 그런 일들을 하며 지내요." (p. 491) <<

사실 이 소설이 2권세트인지 모르고 읽었던 터라 2권의 존재를 알았을때 아차 싶었다. 어쩌나... 한번에 몰아서 읽었어야 했는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된 채 덮게 된 마지막장... 이거 원 궁금해서;;;; 어서 2권을 찾아 읽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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