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데이 블랙
나나 크와메 아제-브레냐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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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파고든 차별과 혐오와 폭력

새로운 미국의 목소리

심장이 서늘해지는 이야기

 

12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프라이데이 블랙] 출간에 앞서 진행된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4편의 작품이 실린 가제본을 받았다.

가제본임에도 소설집의 색깔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화이트 그리고 블랙.

작품 사이사이 간지로 들어가 있는 진한 블랙의 페이지, 정말 새까만... 새카만 블랙. 하지만 시커멓다고 말하기 싫은 다크한 정말 다크한 그런 블랙.

그의 지인들은 대부분 아직도 핀켈스틴 재판의 평결을 애통해하고 있었다. 동료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28분간의 숙의를 거친 후 조지 윌슨 던이 그 어떤 범법행위도 하지 않았다는 평결을 내렸다. 앞서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밸리리지에 있는 핀켈스틴 도서관 밖에서 체인톱으로 흑인 아이 다섯의 머리를 잘랐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원은 그 아이들이 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에게 기대되는 대로 도서관 안에서 책을 읽지 않고 사실상 밖에서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던이 이들 흑인 청소년 다섯 명에게서 느낀 위협은 합리적인 반응이었고, 그래서 그가 자신의 포드 F-150 승용차 뒤편에서 호테크 프로 18인치 48시시 체인톱을 꺼내 본인과 도서관에서 빌린 DVD와 자녀를 보호한 행위는 그의 권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핀켈스타인의 5인 - p. 10)

이매뉴얼과 가족은 평결이 있던 날 방송을 통해 판결내용을 알았다. 어머니는 컵을 벽에 던졌고 아버지는 눈가를 닦았다. 이매뉴얼은 한 회사의 면접을 앞두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흑색도를 조절중이며 갈등중이었다.

살해당한 흑인 아이 다섯 명중 한 명은 일곱살 어린 소녀였고 잔혹한 현장에서 도망가던 중임이 분명한 위치에서 머리를 잘렸다.

이매뉴얼은 바깥세상으로 나섰고, 그때 그의 흑색도는 빈틈없는 7.6이었다. 흑색도를 최소한 4.2까지는 낮춰줄 옷으로, 그는 모자챙을 앞으로 당겨 눈에 그늘이 지도록 눌러썼다. 아주 오랫동안 흑색도를 7.0 가까이라도 올려본 적이 없었다. "난 네가 안전하기를 바란다. 처신을 잘하는 법을 배워야 해"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그렇게 말했다. 이매뉴얼은 긴 나눗셈을 배우기도 전에 자신의 흑색도를 조절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웃었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 소곤거렸다. (핀켈스틴의 5인 - p. 12, 13)

하지만 소풍간 날 기념품 상점에서 인형을 훔쳤다는 누명을 썼고, 면접 때 입을 셔츠를 사러 쇼핑몰에 갔을때 뒤에 경비원이 미행했으며, 상점에서 셔츠를 구입하고 나올때 자신을 막아선 직원에게 물건을 산것인지 훔친것인지 증명해야 하는 영수증을 내보여야 했다. 그리고 영수증을 본 직원은 사과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침에 전화한 사람이에요. 면접에서 청년을 만나볼 생각으로"

"네,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내일 열한시 맞죠?"

"아, 이매뉴얼, 그게 말이죠, 젠장, 내가 사정을 꼼꼼히 따져보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데, 그 자리는 이미 채워진 것 같아요"

"네?"

"아, 그게, 우리 매장엔 이미 자말이라는 친구가 있고, 반은 이집트인인 타이라는 친구도 있어요. 그래서 이게 좀, 과잉이라는 거지. 우리가 도시적인 브랜드도 아니고, 내말 알아들어요? 그래서 내 생각엔......" (핀켈스틴의 5인 - p. 26)

이매뉴얼은 새로 산 셔츠를 입고 정장 구두를 신고 나갔다. 망설이던 '호명단'에 참여하기 위해.

도서관 근처에서 또래들과 그저 어울리고 있었을 뿐인 흑인아이 5명은 백인남성에게 머리를 잘렸으나, 배심원단은 이 아이들이 위험한 존재였다고 인정했다. 이매뉴얼은 취직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정장을 갖춰입은 모습으로 5명의 아이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야구방망이를 들고 한밤에 공원에 가서 백인커플 앞에 섰을때 그에겐 총알이 날아왔다.

학교에서 보통 때처럼 아침 '유쾌'를 맞는다. 그리고 <그때는 어땠나> 수업에서 또다시 이전 시대에 대해 토론한다. (그 시대 - p. 66)

타인을 위해 하는 거짓말 때문에 '단기 대전'과 '장기 대전'이 일어났어요. (그 시대 - p. 74)

'전환'된 시대, 진실되고 당당한 것만이 자랑스러운 태도인 이 시대는 과거를 거짓말로 점철된 사회였다고 평한다. 보이는 외모데로 비하하고 다른 성격적 차이를 존중하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솔직하다고 자신보다 모자라보이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을 당당하다고 여기는 사회다. '최적화 시술'로 인성패키지를 적용시켜 태아의 성격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완벽한 조합으로 시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아기는 성격장애든 신체장애든 장애율이 높았다. 유전자교정을 받지 않고 태어난 '자연출생자'인 벤은 최적선택술을 받은 아이들에게 신체적 능력이 뒤쳐지는 것을 알고 있고, '유쾌'주사를 맞지 않으면 짜증이 난다.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일정량의 '유쾌' 주사가 필요하지만 벤에게는 몇 배 더 필요하다. 도무지 '유쾌'해 지지가 않는다.

"나는 그런 식으로 뭘 축하하거나 너랑 어울려 다니는 짓은 안 해. 게다가 다들 네 부모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알아, 하지만 그런 걸 하면 모두가 정말로 행복해져"

레슬리 맥스토는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레슬리를 바라보며 당당함이나 총명함이나 진실과는 다른 어떤 느낌에 빠진다. ( 그 시대 - p. 68)

"우리는 여기서 '유쾌'가 없이도 감정을 느끼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단다. 우리는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어. 너도 네게 맞는 패키지를 선택하고 거기 맞춰서 일주일에 몇 번씩 우리와 함께 지내면 돼."

나는 일어선다. "짜증이 나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나는 소리를 지른다. '유쾌'주입을 받지 못했다. 안내서가 주먹 안에서 우그러지는 느낌이 든다. 앞장에 구불구불한 서체로 '그시대의 삶'이라고 쓰여 있다. ( 그 시대 - p. 78 , 79)

레슬리는 달랐다. 학교에서 무시하는 신체장애아들인 '땅바라기'들을 보살폈고, 벤에게 이유없이 친절했다. 최전선택술로 태어난 아이들과는 달랐다. 부모조차 모자라고 부족한 아이로 취급하는 벤에게 레슬리는 다른 느낌을 깨닫게 해주었다.

배려가 거짓이 되고 감정의 공유는 쓸모없어진 시대, 그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유쾌'주사는 마약과 같았고, 벤은 그 주사를 더이상 요구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진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올까?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작가가 보여주는 '그 시대' 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고객들은 체험장 밖을 나서며 설문지를 작성하는데, 1은 '전혀 아니다' 를 뜻하고 5는 '전적으로 그렇다'를 뜻한다. 그들은 내가 근무 중일 때면 설문지 문항 모두에 5라고 답한다. 즐거웠는가? 5. 정의가 실현된다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격렬히 느꼈는가? 5. 재방문 의사가 있는가? 5. 추가 의견을 적는 칸에 그들은 이런 식으로 적는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아이도 데려오고 싶어요" ( 지머랜드 - p. 93)

'지머랜드' 라는 놀이공원이 있다. 성인용 체험 놀이시설인 이곳에서 제이는 플레이어로 일한다. 고객이 원하는 설정에 맞춰 등장하고 고객의 폭력에 쓰러지는 역할 이랄까. 하지만 제이가 플레이어일때 고객들은 대부분 제이에게 쏭을 쏘았고 제이가 (가짜 피를 흘리며)죽으면 만족해했다. 제이는 플레이어 중 유일한 흑인이었다.

지머랜드의 CEO인 힐런드 지머다. 실제로 만나면 그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나무 몇 그루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린 다음 날달걀을 대여섯 개쯤 먹을 사람처럼 보인다. 홀로컴을 통해서는 턱수염이 난 거대한 머리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백인이며, 그것은 시위대가 내게 매우, 매우 자주 상기시키는 사실이다. 힐런드는 멍청이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 나는 생각한다. 멜러니라는 흑인 여자친구가 있는 멍청이. 어딘가에 있는 어떤 포커스 그룹은 흑인 여자친구로 인해 그의 인종주의자 이미지가 소비자의 눈에 적어도 20퍼센트 정도 감소한다고 분석할지도 로른다. ( 지머랜드 - p. 98)

왜 그런 곳에서 일하냐고 묻던 제이의 전애인 멜라니는 지금 힐런드의 애인이 되어 있고 지머랜드의 인사부장이 되면서 오랜 백수생활을 청산했다.

'불의의 공원 - 유료 게임이 된 죽음과 미국 도덕성의 종말' 이라고 불리는 지머랜드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날마다 놀이공원 주변을 에워쌌지만, 제이는 이 놀이공원을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게 바꿀 여지가 있다며 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하지만 제이가 창의기획팀원이 되어 드디어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된 날, 평소 10시 였던 회의는 9시에 시작되었고 변경된 시간을 통보받지 못한 제이가 도착했을 때 회의는 끝나가고 있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고객이 살인과 정의를 동일시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음, 그 두가지가 같을 때도 있죠" 힐런드가 말한다. "같지 않을 때도 있고. 그게 바로 이 체험장의 매력이에요"

"메카슈트는 이제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이 체험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말 죽겠네. 어느 체험장에서나 메카슈트를 작동시키는 순간이 가장 중요해요. 고객이 그 경험에 가장 본능적으로 몰입하는 순간이니까. 우리가 자극해야 하는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고, 메카슈트는 꼭 필요합니다. 게다가 플레이어를 보호하잖아요" ( 지머랜드 - p. 105, 106)

메카슈트를 작동시키면 신체사이즈가 부풀어 커지고 몸 전체를 단단한 물질로 에워싸게 된다. 옷안에 입은 메카슈트는 고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비이지만, 심리를 건드린다. 고객이 위협을 당한다는, 거대하고 튼튼한 몸집의 적을 만난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저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플레이어를 보고 고객은 자신의 집앞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위협이 된다며 시비를 걸고 총을 쏘기에 충분한 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새로 건설중인 <PS911> 이라는 체험관은 청소년용으로 오픈 예정이며 동시에 다른 체험관들에도 아이들의 입장이 허용되기로 결정됐다.

327호 욕실에서 나는 일할 준비를 한다. 개정된 프로토콜을 훑어보니 아이들과는 접촉하지 말라고 확실히 쓰여 있다. 모든 청소년은 녹색 팔찌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앞에 있어도 성인 고객과는 예전처럼 폭력의 수위를 조절하며 싸울 수 있다. 나는 골목을 따라 걷고 있다. 내 할 일을 하든 나쁜 짓을 꾸미든,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이. 336호의 문이 열린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가 보인다. 그가 앞마당 잔디밭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나를 돌아본다. 남자의 이름은 모르지만 나르 쏘러 너무나 자주 왔기 때문에 마치 가족 같은 느낌이다. 그때 집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의 아들이 보인다. 이미 예고했듯이 어린아이다. 열한 살 정도일 것 같다. 아이의 아버지가 내 쪽으로 쿵쿵거리며 다가온다. "이봐요, 여기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죠? 음, 내 생각에 당신은 말썽을 일으키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 지머랜드 - p. 112)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인지 작가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싶은 소설의 내용이 뉴스에서 봤던 기사들을 생각나게 하면서 입맛을 쓰게 한다. 비극적인 뉴스를 봐도 처절한 소설을 읽어도 왠지 현실같지 않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체감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어디를 봐도 다른 피부색을 볼 수 없는 현실에서 살고 있는 내게, 작가가 보여주는 인종차별의 현장은 흡사 다크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요즘의 미국은 그 어느때보다 어둡게 차별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쇼핑객 한 무리가 매장 앞에서 멈춰 선다. 우리에게 남은 폴페이스를 본다. 나는 좌대 위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어떤 몸은 쓰러졌다 일어난다. 어떤 몸은 쓰러진 채 그대로 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씩씩거리고 쥐어뜯고 신음한다. 나는 장대를 쥐고서, 지갑에는 돈이 있고 머리에는 프라이데이의 암흑이 자욱한 사람들이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채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 프라이데이 블랙 - p. 132)

'블랙 프라이데이' 는 세계적인 미국의 쇼핑데이다. 국내에서도 그 시즌이 되면 저가로 나온 상품들을 구매하려고 컴퓨터 앞에 대기중인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제목 만으로도 '블랙 프라이데이' 를 풍자한 것임을 알 수 있는 '프라이데이 블랙' 은 죽음이 난무하는 쇼핑의 현장을 묘사한다. 오직 쇼핑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짓밟고 죽어넘어지는 사람들을 제치며 사고자 하는 물품만을 외쳐대는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고 그들 손에 한가득 들린 쇼핑백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저 아연실색해질 따름이었다.

백화점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뛰어드는 쇼핑객들의 사진을 기사에서 본적이 있다. 실제로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로 봐야 할까... 블랙의 풍자로 봐야 할까...왜 '블랙 프라이데이' 가 됐을까... 이때의 블랙은 어떤 블랙인 것일까... 왜 블랙은 뭔가 안좋은 느낌의 의미로만 쓰여야 할까...

4편의 짧은 작품들을 읽었을 뿐임에도 엄청난 두께의 4권을 읽은 것 마냥 마음이 묵직하다. 석탄을 들이마신 것처럼 폐 한 쪽이 시커매진 기분이다.

그 어떤 스릴러보다도 잔혹한 소설들이었다. 스릴러소설은 허구이지만 이 책의 소설들은 현실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잔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이 뜨거운 비탄어린 목소리가 미국에서는 제대로 퍼지고 있는 것일까... 내 안에는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일상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절절이 깨달을 수 있는 소설들... 이 책의 진정성이 널리 읽히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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