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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럽
레오 담로슈 지음, 장진영 옮김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담료슈는 한 무리의 인물들에 대한 읽기 쉬운 입문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수세기 동안 인문학자 및 사회학자들을 매혹시켜 왔다.
<더 클럽>은 특이한 책으로서 일부는 집단 일대기,
일부는 문학 비평이자 문학사상사,
또 일부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사회사이다
- 파이낸셜 타임즈 -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18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집단지성의 시대라 할만 했다. 나라 밖은 온갖 전쟁들로 끊이지 않았지만 나라 안은 온갖 새로운 사상들의 태동이 끊이지 않았다. '명예혁명'을 통한 왕정과 공화정의 독특한 결합, '산업혁명'을 통한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대립, 셰익스피어를 통한 영국만의 문학적 갈래들은 영국 지성인들의 사유의 세계를 넓혀 주었고 다양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역사에서 특정한 시대가 주목받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정치경제학적으로(군사적인 것까지 포함해서) 큰 변화를 겪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으로 융성해지는 경우다. 18세기 영국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잉태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또는 문학을 통해서 각각 따로 배우거나 지식을 습득했다. 둘이 함께 만나는 내용을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 클럽>은 이런 모든 요소들을 담뿍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관심을 끈다. (p. 9 - 김경집 '추천의 글' 中)
그 중심에 새뮤얼 존슨이 있었다. 새뮤얼 존슨이 지성인들의 리더가 되어 '클럽'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뮤얼 존슨의 인맥 속에서 '더 클럽'이 만들어졌다. 만들고지고 난 이후에는 새뮤얼 존슨의 인맥을 넘어선 사람들이 추가되며 확장되었고 그렇게 '더 클럽'의 멤버들은 점점 늘어나고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히 이름을 새기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그 중에는 애덤 스미스와 에드워드 기번 도 있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이 두사람 때문이었다.
'더 클럽'의 시작은 1764년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조슈아 레이놀즈가 새뮤얼 존슨의 우울한 심산을 해소시켜주기 위한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새뮤얼 존슨, 에드먼드 버크, 조슈아 레이놀즈,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등 이 클럽의 멤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당대의 아이콘이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18세기 후반 문화의 '어벤저스'였다. 특정한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모여 온갖 담론과 담화가 오갔던 그 현장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바로 제임스 보즈웰 덕분이다. 보즈웰은 존슨에 대한 경의로 그의 언행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p. 9 - 김경집 '추천의 글' 中)
하지만 <더 클럽> 이라는 이 책은 '존슨전' 이라는 책을 쓴 제임스 보즈웰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등장하고 그렇게 그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확장되어 서술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인물들 한명한명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18세기 런던에서 별처럼 빛났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한 클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중요한 하나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것이 문화에 대한 기여보다 더 중요한 요건이었을 지도 모른다. 바로 '좋은 벗'이 되는 것이다. 선술집인 터크즈 헤드 태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된 좋은 벗만이 이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p. 18)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그저 '더 클럽' 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당대 사람들에게 그닥 중요하게 주목받던 클럽도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더 클럽'의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한 토대로 맺는 목적적 사회 관계가 아닌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만나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논쟁하는 친목 모임이었기에 멤버들은 생생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때 그들이 따진 조건은 상대방의 부와 지위와 업적이 아닌 그저 '좋은 벗'으로서 대화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대의 지성인들이 이 클럽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정한 향연을 즐기기 위해.
존슨과 보즈웰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는 정신질환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신질환에 걸릴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보즈웰은 변덕스러운 감정기복에 시달렸다. 만약 그가 오늘날의 정신병원을 방문했다면, 분명 조울증이란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존슨은 십대 시절부터 줄곧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오늘날이었다면, 그는 강박 장애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p. 24, 25)
영어사전의 새뮤얼 존슨과 존슨전의 제임즈 보즈웰 이라는 위인전식 사고방식으로 이들을 봤을 땐 그들의 업적이 보일 뿐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물들의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표현됨으로써 그들이 남긴 업적 보다는 사람 자체로서 집중하게 만든다. 아들뻘인 보즈웰에게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 존슨의 내면에는 오래된 심리적 질환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다. 경박스러운 보즈웰이 그토록 소망했던 '더 클럽'의 멤버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존슨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 클럽'멤버들은 보즈웰의 가입을 원하지 않았다.
존슨은 남학생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최고의 방법은 체벌이라고 했다. 새뮤얼 존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조너선 스위스트는 '회초리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을 떠올렸고, 에드워드 기번은 '학교는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한 동굴로 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을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책과 책상에 묶어둔다. 이렇게 사로잡힌 포로들은 채찍질 당하는 페르시아의 군인들처럼 힘겹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p. 53)
책을 읽으면서 18세기 후반의 영국 문화를 느끼는 것은 이 책이 주는 재미 중 하나였다. 중세와 근대 유럽문화 관련 책을 읽으면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300년 전 런던도 굉장히 퇴폐적이고 보수적이고 폭력적이고 알콜릭했다. '더 클럽' 멤버들의 회합 장소도 술집이었고, 커피하우스에서도 커피보다는 술이 더 많이 팔리던 때였다.
"찢어질 듯 가난했을 때, 나는 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난의 장점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네. 하지만 솔직히 내가 가난하다는 현실이 너무 슬펐어. 이봐, 사람들은 가난은 악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주장들이 가난은 거대 악이라는 반증이라네. 자네는 자신이 부유한 환경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p. 82)
존슨은 귀족도 아니었고 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봉건적이었고 보수적이었다. 여러가지 모순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위한 자기합리화는 당대 지식인들이 겪는 갈등이 한 사람에게 체화된 듯 보이기도 했다. 존슨 이라는 한 인간을 보다보면 당대 영국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새뮤얼 존슨은 작가로서 유명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장 유망한 듯 보였던 시와 희곡이라는 두 장르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는 소설에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시, 희곡 그리고 소설 외에 유망한 장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기간행물이었다. (p. 87)
새뮤얼 존슨은 작가다. 그러데 지금도 여전히 느끼는 거지만 서양에서의 작가라는 타이틀은 내게 익숙한 개념이 아니곤 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시, 소설, 희곡 등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작가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창작이 아닌 글만 써도 작가가 되었다. 팜플렛이나 칼럼 혹은 비평 등의 잡지용 글만 기고해도 유명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서양에서 기자나 작가가 되는 길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의 길들이 있다. 기자가 되고나서 기사를 쓰고 창작을 하고나서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먼저 쓰다가 기자가 되고 창작을 하지 않아도 작가가 된다. 새뮤얼 존슨도 문화비평으로 여겨질 간행물기고글들로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작가가 된 존슨을 기념비적 인물로 만들어준 것은 그가 편집한 '영어사전' 때문이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전은 단어 목록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의 뉘앙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존슨은 단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존슨은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상황을 사전에 담고자 했다. 작가들이 그 단어를 사용한 구체적인 문맥을 예문으로 사용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방법에 따라 단어를 정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새뮤얼 존슨을 '위대한 사전 편집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p. 94, 95)
당시 영국에서 출판된 거의 모든 책들을 조사하고 예문을 골라내며 10년동안이나 편집한 존슨의 '영어사전'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 책으로 학비가 없어 졸업하지 못했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그는 명예학위를 수여받았고 그동안의 가난을 끊어줄 국가연금도 받게 되었다. 존슨박사는 이제 생계를 위해 글을 파는 사람이 아닌 그야말로 작.가.가 되었고 다방면의 문화계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존슨을 경외한 사람들 중 보즈웰이 있었다.
보즈웰은 똑똑했지만 지적이진 않았다. 그가 만나고 싶었던 이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유명인 장 자크 루소였다. (p. 197)
루소의 집에 초대되어 저녁식사를 함께한 것은 보즈웰에게 대단한 성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볼테르의 집에 가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p. 199)
스위스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친 루소는 잉글랜드에서 지내라는 데이비드 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르바쇠르는 루소가 잉글랜드에서 머무를 곳을 마련한 뒤에 그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칼레에서 순풍을 기다리던 중 르바쇠르는 보즈웰을 자신의 침대로 초대했다. (p. 200, 201)
보즈웰은 이탈리아에서 반가운 사람과 우연히 재회했다. 바로 존 윌크스였다. (p. 203)
장 자크 루소, 볼테드, 데이비드 흄, 존 윌크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보즈웰은 루소의 비하를 알아채지 못했고 볼테르의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했으며 흄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햇고 윌크스의 정치감각이 무엇인지 몰랐다. 게다가 루소의 동거녀와 동침을 했고 가십거리를 양산하던 윌크스와는 정치가 아닌 다른 면에서 죽이 맞았다. 보즈웰은 당대의 사상가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잘 하는 것은 매일 쓰던 일기, 그것도 대화까지 고스란히 옮겼을 정도의 세세한 기록능력이었다. 그랬기에 존슨 사후 '존슨전'을 씀으로써 일생 그렇게 바라던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존 웨인은 새뮤얼 존슨의 전기에서 런던 클럽은 20세기 파리의 카페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레 되 마고 카페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더 클럽에는 여성 회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여성을 더 클럽의 회원으로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슨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이것이 헤스터 스레일이 자신의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열던 만찬이 일종의 그림자 클럽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p. 231)
당대에도 여성작가들 여성화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비주류로서 어쩌다 이름이 회자될 뿐이었다. 이십대 초반에 20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한 후 오래 떨어져 살다 사별한 존슨의 여성관은 좀 특이했던 것 같다. 클럽의 멤버로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여성과 대화하기를 즐겼고 정신적 지주같았던 스레일 부인과의 교류는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더 클럽' 의 신규회원들이 늘어나고 존슨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스레일가에서의 모임은 그에게 또다른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더 클럽의 모든 회원들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새뮤얼 존슨에 집중했다. 보즈웰은 에드먼드 버크를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그의 주옥같은 발언을 모두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즈웰은 조슈아 레이놀즈와 친했지만,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연극 관람을 좋아했지만, 그는 선구적인 감독이자 극장 관리자였던 데이비드 개릭을 오직 배우로만 여겼다. 에드워드 기번과 애덤 스미스는 <존슨전.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보즈웰은 기번을 싫어했고 자신을 가르쳤던 애덤 스미스를 놀라울 정도로 얕잡아봤다. (p. 232)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을 통해 '더 클럽'의 탄생기를 정리한 후 저자는 보즈웰의 <존슨전>에서 중심인물은 아니지만 <더 클럽>의 중심인물이라 할 만한 인물들을 한명한명 소개하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조슈아 레이놀즈, 유능한 연설가이자 활발한 의회 활동을 했던 에드먼드 버크, 당대 최고의 연극 배우 데이비드 개릭, 극작가로 이름을 날린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리처드 셰리든 그리고 존슨에게 '더 클럽' 과는 또다른 의미로 소중했던 모임의 주최자 스레일 부부 등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뚜렷한 활동을 보인 인물들이었다.
버크는 국민에 의한 정부를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격을 가준 소수가 이끄는 국민을 위한 정부를 지지했다. 대부분의 미국 건국자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p. 277)
소수의 원칙에서 소수집단은 그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위에서 나오는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근면하고 유용한 노동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고 "우연히 노동자들 위에 서게 된 선택된 소수는 자신의 시간을 이익이나 영예를 추구하고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거나 학문을 닦거나 사회적 의무, 즐거운 행위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데 쓴다"고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아서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일하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복종은 절대 다수의 범죄, 심지어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할 범죄좌도 재산상 손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여기는 냉혹한 현실의 철학적 토대였다. 존슨은 법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번은 "사회의 내부 평화를 깨트리는 범죄의 대다수는 필요하지만 불공평한 규제 때문에 발생한다. 물권법은 다수가 탐내는 물건을 극소수만 소유하도록 제한하여 인류의 욕망을 억누른다"고 했다. 기번이 우정을 나누 애덤 스미스도 법학 강의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주장을 했다.
루소와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보다 더 훌륭하게 불평등을 풀어냈다. 차이점은 애덤 스미스는 불평등을 좋은 것으로 봤고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가 한 주장을 반박했다는 점이다.
휘그당이든 토리당이든 영국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복종의 본질적인 보증인을 종교라 여겼다. (p. 281, 282)
소수자나 절대권력에 대한 복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과 부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사람과 나아가 불평등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는 곳, 그곳이 '더 클럽' 이었다. '더 클럽' 에서의 대화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논쟁점을 바꿔가며 끊임없는 토론의 장이 되곤 했다. 그들은 때로는 듣고 때로는 큰소리치며 서로의 생각을 교류했다.
스레일 부부 저택에서의 만찬을 중심으로 한 일명 '그림자 클럽' 에서는 이와는 다른 대화와 교류가 이어졌다.
존슨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여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존경받는 유명인들이지만 존슨에겐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존슨은 그들과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쳤다. (p. 347)
블루스타킹은 문학을 좋아하는 지적인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제로 파란색 스타킹을 신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실크 스타킹 대신 청색 모직 양말을 신은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일부 여성들은 사교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지적인 대화를 나눌 벗으로서 서로를 만났다. (p. 352)
제임즈 보즈웰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존슨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말도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즈웰을 존슨이 너무 좋아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꼴사나운 스패니얼 이라고 생각했다. 한 저녁 만찬에서 보즈웰은 솔직하게 존슨을 숭배한다고 선언했다. (p. 361)
스레일 부인은 명석한 여자였다. '더 클럽'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존슨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당대의 다른 여성 지식인들에게 대화의 장을 제공했다. 보즈웰은 '더 클럽' 에서도 스트레텀 대저택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존슨을 알게 된 이후 평생을 그의 뒤를 쫓으며 존경했다. 거의 집착에 가까워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존슨과 잘 맞는 부분이었다. 존슨도 평생 자신의 두려움에 집착하고 불안해했다. "보즈웰이 존슨에게서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존슨은 보즈웰에게서 그가 결코 가지지 못한 아들의 모습ㅇ르 발견했다. 존슨에 대한 보즈웰의 존경심은 점점 커져 거의 숭배에 이르렀다. 그런 그의 존경심은 존슨의 인정 욕구를 가득 채워 줬을 것이다." (p. 389) 둘의 관계는 특이했지만 서로에게 필요충분적인 관계이기도 했다.
더 클럽에 나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이따금씩 더 클럽에 나갔다.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 동안 출석률이 제일 좋은 회원은 조슈아 레이놀즈였다. 하지만 그가 10년 동안 더 클럽에 나간 횟수는 고작 연간 16회에 불과했다. 레이놀즈 다음으로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회원은 에드워드 기번이었고, 그는 10년 동안 연간 14회 정도 모임에 나갔다. 새뮤얼 존슨은 더 클럽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1778년에는 더 클럽의 모임에 9번 정도 나갔지만, 이 해를 제외하고는 그가 더 클럽에 나간 횟수가 3회를 넘기지 않았다. 존슨은 더 클럽이 개성없이 단순히 튀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했다고 보즈웰에게 말했다. (p. 439)
존슨의 우을증을 달래주기 위해 레이놀즈가 모은 친구들로 시작된 '더 클럽'이라는 대화의 장이 생기자 점차 존슨 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유익한 모임이 되어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대화상대가 필요했다. '더 클럽'은 매주 열렸지만 매번 참석자가 일정치 않았고 일단 참석하면 특정한 규범이나 주제 없이 자유롭게 논쟁하며 밤새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벗으로서 '더 클럽'은 유지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의아니게 존슨과 보즈웰의 우정이야기를 깊이 알게 되었지만, 21챕터 600여 페이지의 두꺼운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16~19 챕터 때문이었다. 16. 대영제국과 식민지 / 17. 애덤 스미스 / 18. 에드워드 기번 / 19. 불신자와 신앙인 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책에서 크지 않지만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있는 중인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패권을 잡아가는 중이었고 미국이라는 커다란 식민지와 노예산업에도 발을 들였으며 이것은 제국주의를 형성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존슨은 아일랜드와 미국의 식민지적 입장에 대해 보수적이었지만 '더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개혁성향의 멤버들도 다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애덤 스미스와 에드워드 기번 이었다.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등장하면서 경제 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경제학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정치경제학'이라 불리던 학문의 범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p. 483)
정치경제학은 누군가 가계를 관리하듯이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통치자나 행정부가 채택한 구체적인 재정 정책을 의미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와 특히 프랑스 사상가들은 경제에 대하여 이론을 세우기 시작했다. (p. 484)
이 당시만 해도 대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주로 가르쳤고 학문의 분화와 연구는 세부적이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에서 윤리학 교수로 대학에서 강의했고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써냈다. 그는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경제원리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한 도덕철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존슨에게 무시당하곤 했다.
더 클럽의 회원으로서 애덤 스미스는 이상하게 주목받지 못했다. 보즈웰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사교적인 인물이었고, 애덤 스미스는 전형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새뮤얼 존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존슨은 애덤 스미스를 "자신이 봤던 최고로 멍청하고 따분한 개새끼"라고 불렀다. 애덤 스미스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런 생각들을 문서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다. (p. 487)
애덤 스미스와 존슨은 기질과 종교적 신념 뿐만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도 달랐다. 존슨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고민하는 도덕주의자였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자였다. 존슨은 기회만 생기면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많이 발표하는 수필가였지만, 애덤 스미스는 이론가였고 수년 동안 공을 들여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p. 489)
'더 클럽' 회원으로서 보는 애덤 스미스의 인간적 면모와 <국부론>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초기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애덤 스미스는 주장한다" (p. 494) 라는 문장을 보면서 애덤 스미스의 저서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만으로 애덤 스미스를 너무 오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1769년 올리버 골드스미스가 <로마사>를 발표했다. 솔직히 새로울 것이 없는 책이었다. 골드스미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골드스미스는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책이 자신의 책보다 훨씬 더 뛰어난 대작이 될 것임도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1774년 기번에게 더 클럽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번은 만장일치로 더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p. 496)
출판되자마자 <로마제국쇠망사>는 명작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논란을 일으킬 요소를 담고 있었다. 기번은 기독교의 확산은 오직 기적적인 신의 중재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 공공연하게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기독교의 확산을 세속적인 증거들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사건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존슨과 보즈웰은 기번을 증오했다. 그들은 그를 '불신자'라 불렀다. (p. 496~497)
<로마제국쇠망사>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획기적인 책이 되었고 논쟁적인 책이 되었다. 하지만 기번은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그의 일상은 그런 뚝심과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고 여유롭고 한가하다 못해 지나치게 뚱뚱해지고 그럼에도 낙천적으로 허허 웃고 넘기는 모습에서 <로마제국쇠망사>의 저자로서 느껴지는 인물과 동일인물인가 의아할 정도였지만 가벼워서 오히려 좋았고 <로마제국쇠망사>가 탄생하기 까지의 과정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불우한 어린시절, 개종, 프랑스 문헌과의 만남, 민병대활동, 상무원직 등...
그가 본격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책으로 쓰기 시작한 시점에 미국 식민지들은 영국에서 독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들과 그들의 몰락은 아주 시사적인 주제였다. '위대한 제국의 쇠망'이란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되짚는다는 생각은 분명 영국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었다. 기번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널리 흩어진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가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을 다뤘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은 그가 살던 영국이 직면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p. 509)
기번은 화제가 되던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를 적어 내려갔다. 그들의 영웅인 볼테르와 함께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역사기록학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믿었다. 연대순으로 과거 사실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그들은 그 일을 일으킨 근본적인 힘을 밝혀내기 위해 과거 사실의 이면을 깊이 파고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철학적 역사'로 알려졌다. 분명 기번도 과거 사실의 이면을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이 없는 이론은 속빈 강정일 뿐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로마제국쇠망사>에 대략 8,000개의 각주를 달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가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정보를 설득력 있게 해석했는지를 나름대로 고민해볼 수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각주를 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p. 510)
다수의 역사가들은 마치 자신이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글을 썼다. 대부분의 경우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가의 역할은 독자가 그 확실하지 않은 증거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번은 우리가 확실치 않은 증거를 평가하도록 도우며 역사의 무대 뒤로 안내했다. (p. 511)
기번은 당시 누가 그 증거를 작성햇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가 그 증거를 써내려간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생각하라 말한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증오했던 적들의 기록에서 나온다. 기번의 위대한 업적은 독자가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p. 513)
역사책을 읽을때 그 역사책이 쓰여진 시기와 저자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읽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로마제국쇠망사> 를 읽을때 기번에 대한 사전지식은 내용이해에 필수적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는 정말 많은 각주들이 나온다. 때로는 불필요한 내용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설명을 읽고 나니 아하~! 싶었다. '기번의 수다'라 불리는 각주들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였다. 기번은 천재적인 역사학자라 할만 하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독교의 기원을 다뤘다. 그는 사실에 근거해서 책을 썼지만, 그의 책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신앙인들은 공황에 빠졌고 위협을 느꼈다. <로마제국쇠망사>의 출간은 문화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적 약속은 신앙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했다. (p. 518)
기번에게 기적이란 진실 아니면 거짓이었다. 그래서 모들린 칼리지를 다닐 때 기적은 모두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가톨릭교로 개종을 결심했던 것이다. (p. 520)
다수의 프랑스 철학자들과 달리, 기번은 기독교 자체를 절대 경멸하지 않았다. 이것은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가 초기 기독교의 도덕성은 순수하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예수를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기번은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아들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라 생각했다. (p. 523)
기번은 기적에 대해 훨씬 더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기번의 동시대인들에겐 모든 기적이 진짜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기적이 기독교의 신성한 권한을 입증하는 없어서는 안 될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초기 기독교신자들에 가해진 박해에 대해서 기번은 일부 금찍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박해를 받아 죽은 기독교신자들은 많지 않았다는 증거를 어렵지 않게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황제들은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용인됐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그는 후대에 전해지는 끔찍한 이야기는 종교적인 거짓말일 분이라고 주장했다. 예상대로 <로마제국쇠망사>가 출판된 이후 반발이 불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번은 흔들리지 않았다. (p. 525)
기번의 종교에 대한 생각들을 더 알고 싶었지만 이 책은 존슨과 보즈웰이 중심인 책이므로 기번에 대해 자세히 다뤄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의 분위기와 기번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었다.
일찍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존슨은 꽤 오래 살았다. 말년에 이런 저런 신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아편등의 약물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영국 시인전> 이라는 역작을 정리해낸다. 75세의 나이로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존슨의 아들뻘인 보즈웰은 존슨이 세상을 떠나고 11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정신적 지주를 잃고 힘들어 했지만 그제서야 그의 소명을 깨달았다. 바로 <존슨전>을 쓰는 것.
보즈웰은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보즈웰 이전에 그 누고도 실제 대화를 전기에 삽입할 생각을 못했다. 심지어 전기의 주인공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즈웰만큼 어조, 표정, 웃음과 몸짓을 표현해서 사실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재능을 지닌 전기작가는 거의 없었다. <존슨전>은 '새뮤얼 존슨의 재연'이란 극찬을 받았다. (p. 582)
존슨과 보즈웰의 인생을 마무리한 후 저자는 '더 클럽'의 주요 회원들의 생의 마감도 간략하게 덧붙인다. 그리고 '더 클럽'의 최후도.
더 클럽도 어쩔 수 없이 변해갔다. 오늘날 더 클럽은 런던 문예 학회란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음은 회원과 그들이 회원으로 선출된 연도다. 월터 스콧(1818), 토마스 배빙턴 매콜리(1839), 윌리엄 글래드스턴(1857), 알프레드 테니슨(1865), 매슈 아놀드(1882), 러디어드 키플링(1914), 네빌 체임벌린(1929), 케네스 클라크(1941), T.S.엘리엇(1942), 맥스 비어봄(1942), 그리고 헤럴드 맥밀런(1954). 이들 외에도 수백 명의 회원들이 더 있지만,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들은 아니다. 문학계와 예술계가 아닌 정계와 귀족 출신의 회원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새뮤얼 존슨과 에드먼드 버크가 살아 있었다면, 이토록 많이 이들이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며 어느 누가 새로운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겠는가? 아마 디킨스, 새커리, 트롤로프, 하디, 로렌스, 오웰, 오든 그리고 라킨은 회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 클럽에는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총리들도 몇몇 있었지만,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없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이나 버지니아 울프도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p. 606)
영국 지성인들의 살아숨쉬는 생생한 목소리와도 같았던 '더 클럽'이 세월이 흐를 수록 좋은벗이 아닌 인맥형성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것을 안타까워 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내 향수어린 목소리로 런던의 지식인들을 묘사하던 저자의 부드러운 문장 들을 마무리한 문장은 의외로 강렬한 문장이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 문장뒤에 그 어떤 말을 붙여도 결국 사족이 될 것이다. 여러모로 인상깊은 멋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