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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귀환 -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7월
평점 :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기록
[마르크스의 귀환]은 이 악명높은 19세기 '급진주의자'의 삶에 관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학구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책 속 마르크스가 너무 평범해서 놀랄 수도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추구한 것은 정말로 품위있는 삶이었을까요? 강박성 성격장애자가 으레 그러하듯, 마르크스는 주변 모든 사람이 엉뚱하거나 미심쩍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몰두합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런 드문 -일종의 미치광이라 부를만한- 사람입니다. (p. 6 - 한국어판을 내며 中 -)
철학을 공부했고 다큐멘터리 제작도 하는 저자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책을 쓰고 <마르크스 재장전>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게재하기도 하는, 현재는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영화,철학,드라마 를 가르치고 있는 교수이다. 마르크스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기도 한 저자는 어쩌면 마르크스 덕후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마르크스는 기존의 상식적 이미지를 파괴한다.
이 책은 소설이다. 현대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름일 것 같은 마르크스에 대한 소설이지만 역사소설이나 위인전이나 전기같은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호기심을 소설로 풀어보려던 내게 이 소설은 기존에 알던 것마저 무너뜨리는 혼란을 준 작품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이 소설은 일종의 환상소설처럼 읽혀졌다.마르크스의 머릿속을 풀어내고 있는듯한 이야기 속에서 마르크스는 저자가 앞서 언급했듯이 미치광이라 부를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소설은 1849년 마르크스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영국 런던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혁명적 사상가였으나 그의 혁명적 철학이 두드러지지 않을만큼 그 시대 자체가 여기저기 혁명적인 시대였다.
마르크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했다. 옆에 앉은 남자는 횡설수설하는 광인이거나 허황된 몽상가였다. 그렇지만 술집 안을 잠시만 훑어보아도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테이블 하나하나가 세계 혁명의 소우주였고, 월척을 놓친 어부의 경험담이었다. 화약 폭파에 실패한 비밀 결사대는 순전히 그들이 만들어 낸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다시금 음모를 계획 중이었다. 온 세상이 무대였다. 다만 그 무대에는 양 끝의 가려진 공간이 없었다. 파리의 대참사가 그렇게 희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있었다. (p. 53)
유럽의 근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다보면 모두 술에 취해 있는 듯 하다. 근대 보다 중세시대가 더 그렇긴 하다. 여하튼 유럽은 술독에 빠진 것 처럼 보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퍼마신다. 그 알콜릭 상태에서 역사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난다. 맨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잔인하고 그렇게 무모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대화도 대부분 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술집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혁명가처럼 보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자코뱅파, 무정부주의자, 민주주의자... 사소한 실랑이가 일상이던 시대였고 그들 모두는 혁명을 이야기했다.
"자넨 거의 뭐랄까... 혁명적 활동을 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여. 대체 왜 그런가? 어째서 노동자 행진에 참여하기를 그토록 꺼리는 거지?"
"참여할 행진이 있다면 참여하지"
"그렇지만 내 행진은 사양하겠다?"
"행진은 없었어. 그건 주정뱅이들의 난동이었다고" 마르크스가 코웃음을 쳤다.
"혁명이란 게 처음에는 다 난동이지"
"그래 맞는 말이야. 그렇고말고. 물론 마르크스 자네가 노동자에게 어떤... 혐오감이나 무슨 악감정 같은 게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틀린 말일 테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자네에게 어떤 현실적인 대안이 있는가, 이제 이 당의 정치적 노선은 어떤 것인가, 하는 걸세. 자네의 대안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난 정말 모르겠어. 대체 자네는 정확히 무얼 바라나?"
"자네가 말한 그 '대안'을 자본을 다룬 논문의 형태로 다음 회의 때 내놓도록 하겠네" 마르크스가 선언했다. (p. 115, 116)
혁명의 시기이긴 했으나, 구심점이 없고 철학이 없는 혁명은 어이없이 자멸하곤 했다. 그 불씨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더 큰불로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은 혁명을 말하는 사람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활동가라기 보다는 사상가였고 그의 사상은 초기엔 지인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공산주의자 선언'이 불씨는 만들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다음을 구축하진 못했다. 철저하고 현실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마르크스는 그 방법이 '자본론'의 집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지독하게 가난했고 현실은 그를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밥을 굶었고 갓난아들은 죽었으며 그 자신은 항문종기로 고생했다. 세상이 미쳐돌아가기 전에 그 자신이 미쳐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르크스는 펜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몰두했다. 명확한 설명이 필요했다. 세상에도 자기자신에게도.
피터 듀랜드가 통조림 깡통을 발명한 것은 1810년이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뒤에야 누군가가 깡통따개를 발명해야 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자본주의를 시스템이라 말하기는 곤란했다. 거기에는 통합된 사고가 없었다. 그건 결코 리바이어던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이요, 생과 사에 동시에 속한 혼종, 광적이고 극단적인 컬트, 비시스템이었다. (p. 134)
런던의 정치조직들이 조직에 가입할 수 있는 지지자 수보다 많다는 사실은 그런 환상을 방증한다. 우선 지도자가 되고, 다음으로 당을 조직한다. 그 멍청이들은 그렇게 말 앞에 수레를 두고 있었다. 공산주의 정당의 과제는 혁명 운동에 대응하고 그 역동성에 적응하는 것이지, 진흙과 지푸라기로 그걸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혁명은 하인첸 같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마르크스 같은 과학자를 필요로 했다. 혁명의 물결이 빠져나간 지금, 그는 혁명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도록 차라리 연구 활동으로 물러나는 편이 나았다. (p. 205)
보나파르트는 봉기를 진압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봉기를 해협 너머로 수출해버리는 것이다. 상인의 나라에서는 뭐든 비축하려 들 테니, '믿을 수 없는 앨비언(유럽 대륙에서 영국을 경멸조로 가리키던 명칭)'은 혁명의 마지막 기항지이자 떨이 장터였다. 기차를 가득 채운 망명자가 여전히 런던, 버밍엄, 맨테스터라는 사회적 공장으로 배달되고 있었다. 런던이 터널 끝의 빛처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들은 여전히 터널 안에 있었고, 빠져나갈 가망성은 나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p. 206)
자본주의는 철저한 시스템이 아니었고 혁명가들은 말로만 혁명을 논하고 있었으며 유럽대륙에서의 봉기들은 하나같이 짓밟혔다. 그 끝에 있는 도시 런던에 마르크스가 떠밀려와 있었다. 그는 혁명의 기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런던에 도착한 이래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혁명 최고의 이론가가 원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따. 마르크스는 그 모두를 위태로운 허세꾼의 기행 정도로 해석했다. 그렇지만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했던 그런 행동-파란만장한 연애와 런던과 맨체스터를 끊임없이 오가는 부산함-은 사실 마르크스가 친구에게 지운 부담 때문이었다. 책의 완성에만 맹목적으로 몰두하던 마르크스는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감했다. (p. 231)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마르크스를 돕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엥겔스는 아주 잠깐 나올 뿐이다.
엥겔스의 지원은 불규칙적이었고 마르크스 스스로의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생활고에 시달릴수록 오히려 더 망상적으로 집필에 집착하는 마르크스는 더이상 전당포에 맡길 물건이 없자 아이의 장난감까지 들고 나선다. 미분과 극한 개념에 몰두하고 기차의 궤적운동에 빠져든다.
"만약 자본주의를 기관차로 묘사하고, 기관차로서 운동의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떨까? 자본주의의 움직임, 말하자면 그것의 '진정한 운동'을 더할 나위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서, 전체 회로를 하나의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p. 328)
"자본주의는 한가하게 원운동을 하지도 않고, 직선으로 움직이지도 않아. 엄정함과 정확함의 이름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고점과 저점을 그래프에 나타내야 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지니는 깊이 파묻혀있지. 우리는 더 깊이, 핵심까지 내려가야 해. 그런데 무한의 차원에서 '아래'는 어디를 말하는 거지? 거기서 지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우린 자본주의의 이탈과 우회에도 그 본질을 간파해야 해. 더 나아가, 불규칙한 등락과 선회 속에서도 그것이 미래로 전진하는 경로를 그려내야 해. 동지들, 그걸 달성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더 긴 철로야" (p. 330)
장난감 기차를 빼앗긴 아들은 병이났고 전당포에 장난감 기차를 맡긴 아비는 눈에 뵈는게 없는 사람처럼 오직 이론에 몰두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땐 아들의 차가운 시신을 안고 있었다.
과거 없는 삶은 악몽이었다. 유령들은 더는 현재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거처를 옮겨 산 자들 가운데 머물렀다. 과거가 이주한 것처럼 미래는 정지했다. 미래는 더는 저 앞에, 저 지평선 너머에 있지 않았다. 그건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모든 진취적인 사고를 억압했다. 역을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한 기차,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되 절대 도착하지 않는 기차 같았다. (p. 346)
지난 1850년대 초, 그와 엥겔스는 혁명이 얼어붙어 동면기에 들어갔다고 선언했다. 순진하고 혈기 왕성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서에 의망을 걸었다. 그들은 그 책이 모두를 구원하고 혁명을 제 궤도에 올려놓을 거라고, 혹은 적어도 길잡이가 되어줄 나침반을 제공하리라고 믿었다. (p. 347)
소설은 마르크스의 생애라기 보다는 '자본론' 집필기 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자본론'을 집필하기까지의 마르크스의 내적 고뇌를 다루고 있다.
연이은 아이들의 죽음, 더이상 내다 팔 것이 없자 스스로를 버린 듯한 아내, 메모 쪼가리들 말고는 아무것도 이룬게 없는 것 같은 자신... 고통이 점증하고 분노가 폭발하려 할때 마르크스는 울부짖는다. "그 책에서 날 좀 놔줘! 날 좀 놔줘!" (p. 367)
관념 철학이 그가 다루어야 할 적이었다. 그렇지만 단번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목표에 동조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물론 혁명적 목적,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위해서였다. 노동자의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한 미래사회, 자유의 의미가 개인의 진정한 자기통치에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마르크스가 견지한 사회 비평이 조금이라도 존재 가치를 가지려면, 현실적이어야 했다. 추상적인 저술가가 될 수는 없었다. 계급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저술은 직업이어야 했다. (p. 390)
소설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애를 읽는 동안 울화가 치밀곤 했다. 궁핍에 찌들어가는 삶 속에서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혁명가로서 어떤 조직을 구성한다거나 학습을 시킨다거나 하는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오로지 이론 오로지 집필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위 구절을 읽고서야 조금은 알것도 같았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론이 맞다는 증명을 하기위해서라도 그자신 스스로의 작업은 가치가 있어야 했고 직업이 될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해도 모순적으로 다가오는 면들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뭐 마르크스가 무슨 종교적 성인이나 국가적 지도자도 아니고 그저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과한 기대를 했던 것인지도...
미친 과학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질량이 에너지와 같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환될 수 있는 한, 무한을 가로지를 수 있다. 속도가 두 배 였다면 그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혁명 열차도 마찬가지다. 시속 수천 킬로미터로 달리는 그것은 플랫폼에 가만히 서있는 기차와 완전히 달랐다. 아예 같은 '물체'가 아니었다. 전혀. 화폐 유통의 영역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다. 변화하는 크기는 변화하는 자본의 양으로 전환되었다. 모든 단단한 것이 공기 중으로 녹아들지만,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은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 상품은 소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돈은 결코 소비할 수 없다. 물질이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은 노동력, 프로이센 군대, 천연자원, 기차 모형, 자본 그 자체를 망라한 모든 것의 판매, 구매, 대여로부터 늘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결국에 자본에는 한계가 없다. 자본이 상품 세계의 지배자고 신이다. (p. 402)
마르크스의 책은 과학적인 기획이었고, 본질에서는 여전히 진행중인 작업이었다. [자본]은 성경이 아니었다. 실험의 원재료였다. 그의 이론을 증명하는 작업은 정확한 해석적 도구로 무장하고 테이블에 앉는 것에 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바로 그런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단순한 이해가 전부가 아니었다. 노동자는 누구나 그의 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한 줄 한 줄에 그들의 투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끝이 어디일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명심할 점은, 혁명이 멀지 않았다는 것, 사회 각 영역에서 감지되는 지각의 변동으로 보아, 노동자들은 그들의 혁명적 실천을 통해 이미 그의 이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p. 410)
이 책의 앞부분에 추천사 비슷한 '책머리에'를 쓴 저자의 한국동료교수는 "이 소설의 미덕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적 집적물이 눈앞에서 사사로 전개된다는 점이다"(p. 10) 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고뇌들을 그의 생애와 겹쳐 쓰면서 서사로 그의 이론적 고민들이 풀이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소설의 미덕인지는 모르겠다. 이러다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의 소설 속 마르크스의 상태는 소설이라는 허구이기에 읽을만 했다. 만약 허구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쓴 책 [자본]이 어느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치부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윈이 자연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해온 작업을, 비로소 내가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시작하고 있는 거야"
"흠, 난 자네가 다윈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데" 엥겔스가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윈의 작업은 과거에 대한 거야. 그는 오늘날까지의 진화를 연구하지. 자네의 작업은 그 모든 걸 포괄하면서 거기서 다 나아가, 미래를 전망하니까! 자네는 모든 면에서 진보적인 역사이론을 만들어냈어. 자넨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과학을 발명해 낸 거야"
"진정해. 내가 전반적으로 자연철학과 양립 가능한 접근법을 역사 분야에서 발견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아직 2부와 3부가 남아있어. 끝날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p. 435, 436)
그의 생전에 [자본론]은 1권까지만 나왔다. 2권과 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에 의해 편찬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던 시대은 다양한 사상들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던 시대였다. 다윈과 마르크스는 동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었고 당대의 혁명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체계화했다. 시대가 그들의 사유에 자유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어째서 아버지의 자존심에 속고 있는지, 제 삶에 대한 아버지의 해석이 왜 잘못됐는지, 진짜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언급하지 않은, 우리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중대한 행위자가 있어요. 엄연히 이 드라마의 당사자아지만 아버지의 주의를 비켜났죠. 하지만 아버지보다도 훨씬 큰 존재감을 발하고 있어요. 실은 여기 없기에 더욱더 그러하죠. 바로 공산주의에요!" (p. 453)
"더는 공산주의가 그저 제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아실 거예요. 공산주의는 이미 여기 와있어요! 정말로 이 책을 아버지 때문에 썼다고 믿으세요? 하! 글쎄요, 사실 모를 일이요. 아버지, 어쩌면 그랬는지도요, 정말 어쩌면요. 그렇지만 현대 파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제 600페이지짜리 편지가 이 방의 네 벽을 넘어서는 더 넓은 의미가 있다는 걸 시사하지 않겠어요? 모르시겠어요?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노동자들을 위해 썼어요. 혁명을 위해서요!" (p. 454)
도피생활 중 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낀 마르크스는 책의 말미에 가서야 그 감시자가 아버지 유령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 유령과의 대화 속에서 노년의 마르크스는 그제야 아들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독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의 마무리는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굉장히 개인적인 산물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르크스가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평범한 아무개보다도 더 하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르크스의 귀환> 이라는 제목을 봤을 땐, 근대의 혁명적 사상이 현대에서 다시 영향을 끼칠만한 이론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마르크스를 근대에서 현대로 귀환시킨 것이 아니라, 시대를 흔든 거대한 사상에서 혼란스러운 개인적 이론으로 귀환시키고 있는 듯 하다. 책 뒤표지에 써있듯이 그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기록' 이라 하겠다. 저자는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사뭇 궁금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사유의 흐름을 담은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앞 부분에 있었다.
더이상 전당포에 맡길 물건도 없고 더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이 전재산이라고는 주머니에 든 1페니 뿐이었던 마르크스는 집에 가는 길에서 죽어가던 아이에게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살갗이 트고 동상에 걸린 맨발을 드러낸 채 여기저기 곪고 헐벗은 다리와 누더기를 걸친 채 비쩍 마른 몸에 이가 들끓고 숨만 겨우 쉬는 상태였던 어린 아이에게 그 1페니를 준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기저에 이런 인간애가 있었음을 여전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