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 이근후 정신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서툴지만 내 인생을 사는 법
이근후 지음, 조은소리.조강현 그림 / 가디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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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후 정신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서툴지만 내 인생을 사는 법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라는 책을 정말 기분좋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썼을 당시 저자의 나이가 이미 팔순을 넘긴 어르신 이었다. 그런데 에세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가 폭 빠져 읽을 정도로 멋진 어르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인상깊게 읽었었다.

예를들어, 자식과 위아래층에 살면서도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하지 않고 방문전에 꼭 연락을 하며 충분히 자식의 생활을 존중해 주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더랬다. 거기다 자식의 차로 함께 가기로 했던 곳을 자식에게 일이 생겨 혼자 택시를 타고 가야했을 때에도 불쾌하다거나 원망하는 마음없이 정말 쿨하게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에 '와 이런 분이 계시나' 싶었더랬다. 더구나 많다면 많을 수 있는 나이에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해주겠지' 하며 바라지 않고 '나' 라는 사람이 할수 있는 활동들을 찾아 여전히 활발하게 하신다는 것이 대단하시구나 하며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그러니 그런 어르신의 또다른 에세이를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번 책은 쓰시면서 '서투름' 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었다고 한다.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는 얅고 작은 에세이인 이 책은 순서관계없이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간단하지만 분명한 조언을 찾을 수 있다. 그중 몇 가지만 골라보자면,

어떻게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든 우리의 목표는 일생을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p. 57)

중요한 것은 '나' 자신 이라는 것, 변치 않는 교훈이다. 물론, 이거이 '나만' 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 아닌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 그래서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주체적 '나' 를 생각해보라는 말일 것이다.

성공은 마디가 짧은 나무이고, 자기 성장은 마디 없이 나의 노력만큼 늘어나는 나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성공에 집착해 자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성공은 한때의 즐거움이지만, 자기 성장은 끝없는 즐거움이다. (p. 63)

성공과 성장의 차이는 분명 크게 다가온다. 성공은 끝이 있다면 성장은 끝이 없어서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공 과 실패로 양분되는 과정보다는 대박을 터뜨리진 못해도 꾸준한 과정 끝에 찾아오는 의미가 분명 가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젊은 독자분들께 돌다리를 두들기지 말아보기를 권한다. 돌다리는 건너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튼튼하든 부실하든 물 위를 건너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강을 건너려면 무조건 돌다리를 밟아야 한다. 돌다리가 튼튼한지 안 튼튼한지, 이것저것 걱정하다 보면 건너지 못할 수도 있다. 건너야 할 이유가 뚜렷하다면 앞뒤 가릴 것 없이 건너야 한다. (p. 79) 정 두들기고 싶다면 일단 건너고 나서 한 번쯤 두들겨 보자. (p. 80)

이젠 팔순도 훌쩍 넘어 몇년 후엔 아흔이 되실 분이 이런 발랄함을 전해주실 수 있다니, 여전히 매력있으시다. ㅎㅎ

여유는 시야를 넓혀 주고 더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다.

이제는 느림의 미학을 느끼는 삶을 지향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p. 214)

칠십이 넘은 나이때 사이버대학 강좌를 수강하시는 등 식지 않은 학구열을 유지하시고, 매년 에세이 한권정도 쓰시며 글솜씨가 없다하시면서도 꾸준히 글을 쓰시고, 이제 한쪽 눈은 실명에 다른 한쪽 눈마저 잘 안보이신다는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당신이 할수 있는 영역을 찾아 기껍고 즐겁게 활동하고 계신 듯 하다. 앞서 읽었던 책이 전해주는 재기발랄함은 부족한 듯한 이번책은 성기고 해묵은 조언들이랄까 어른들이 할법한 그런 말씀들이랄까 하여튼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라때식 표현도 이분처럼 하시면 들을법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 연세에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살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스러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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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 지구는 어떻게 우리를 만들었는가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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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진화와 지구 변천사의 황홀한 조화!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극의 대답!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책 -선데이 타임스- > 라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거대한 지식의 통합 하지만 더 재치있고 더 빠져들게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 라고 써 있는 홍보문구를 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게 굵직한 감동을 선사했던 인생책들인 [사피엔스] 와 [코스모스] 라는 어마무지한 책을 동시에 인용할 수 있는 이 책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책이란 말인가.

나는 지구가 우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탐구하려고 한다. 우리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 지구로부터 만들어졌다. (p. 12)

이 책에서 우리가 시도할 탐구는 엄청나게 긴 시간에 걸쳐 펼펴질 것이다. 인류의 역사 전체는 사실상 정적인 지도(지구를 다룬 영화에서 단 한 프레임에 해당하는) 위에서 펼쳐졌다. (p. 16)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기원 이야기는 가장 심오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류의 진화를 이끈 지구의 과정들은 무엇이었을까? (p. 18)

내게 [사피엔스] 가 인류의 문명사를 이해하는 선구안을 가르쳐줬다면 [코스모스]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휴머니즘에 대해 각성시켜준 책이었다. [오리진]은 이 두 책의 간격을 메꿔주고 있는 듯한 책이다. 인류의 문명은 결국 지구안에서만 이루어졌고 지구 자체는 태양을 비롯한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행성이다. 저자는 우주 안에 속해있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인류문명사를 풀어낸다. 지구가 무엇에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화해서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저자는 지구 태초의 시간부터 현재까지 크게 잡은 주제들 위주로 굵직하게 설명한다. 지구가 우리를 어떻게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류가 이동을 하게 된 지구적 원인은 진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류의 문명은 향신료, 암석, 금속 이 바닷길과 실크로드를 통해 오고가며 인류가 주체적으로 이루어낸 업적 같아보이지만 석탄과 석유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까지도 지구적 영향력은 인간의 근시안을 넘어서고 있었다. 지구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인간들의 세상은 지구의 얇디얇은 껍데기에 세워진 것에 불과했다. '판'의 활동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가 진화하는 동안 다양하고 역동적인 자연 경관의 특징을 만들어내고 유지한 것은 판과 화산의 활발한 활동이었다. 지구 전체에서 서로 멀어져가는 판들의 활동이 가장 실질적으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일어나고 있는 이 거대한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우리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p. 28)

인류의 진화는 동아프리카에서부터였다. 판게아에서 대륙들이 떨어져 나오고 지금의 형태가 완성된 형태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판의 움직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 중력 같은 것을 살면서 체감하지 못하듯이 대륙의 움직임도 인간이 알아채기에는 어려운 활동영역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사이 아프리카 대륙이 두쪽날지도 모른다니, 그것도 인류의 출발지가. 지구의 움직임은 진화에 영향을 끼쳐왔다. 인류의 진화또한 지금이 완성형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기원' 문제의 중요성을 새삼 각성시켜 준다.

인류의 진화에서 두발 보행 능력의 발달은 뇌 용량이 상당히 커지기 전에 먼저 일어난 게 틀림없다. (p. 30) 호모 에렉투스는 약 200만 년 동안 살아남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부학적 현생 인류가 이 세상에 출현해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은 이것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p. 31) 체형과 생활 방식에 일어난 이 발전은 서로를 견인했다. 효율적인 달리기와 정교한 인지 능력이 발달하면서 도구 사용, 불조절 능력과 결합되자 사냥의 효율성이 높아져 음식물에서 고기의 비중이 커졌고, 이것은 뇌를 더 크게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다시 더 복잡한 사회적 상호 작용과 협력, 문화적 학습과 문제 해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언어의 발달을 낳았다. (p. 34)

인류의 진화에 대해 한 권으로 읽었을 법한 내용이 몇 페이지로 설명된다. 최근 읽은 DNA나 진화 관련 책들에서 봤던 내용들이 간단하지만 분명하게 서술되는 것을 통해 저자가 최신 정보를 충분히 탐구하고 썼구나 싶어서 초반부터 책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가 높아졌다.

지구대를 만들어내는 판들의 장기적 활동 추세와 지구의 기후 변동과 우리의 진화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영향을 미친 서식지의 급격한 요동 사이의 핵심 연결 고리를 제공한 요인은 바로 이 증폭기 호수들이다. (p. 39)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환경의 산물이다. 우리는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기후 변화와 판들의 활동이 낳은 유인원 종이다. (p. 44) 판들의 경계를 나타낸 지도 위에 주요 고대 문명 장소들을 겹쳐보면, 놀랍도록 밀접한 관계가 나타난다. (p. 44)

동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인류의 진화와 이동에 기후변화는 분명 중요한 변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후변화에 영향을 끼친 것 중에 판들의 활동이 있었다. 아니 판들의 활동이 먼저였다. 4대문명지가 다 강하류 농업이 유리한 곳이다 라는 식상한 문장을 뒤집어 생각해보게 하는 '판들의 경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양문명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문명, 에트루리아문명, 로마문명 도 이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오늘날의 대도시의 위치 또한 이 지질학적 유산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빙기는 평균적으로 8만년 동안 계속되고, 빙기들 사이의 간빙기는 그보다 훨씬 짧은 1만 5000년 정도만 지속딘다. 1만1700년 전부터 시작된 홀로세처럼 각각의 간빙기는 기후가 다시 빙기로 돌아가기 전의 짧은 휴식기에 지나지 않는다. (p. 53) 13만~11만5000년 전에 일어난 바로 앞의 간빙기는 현재의 간빙기보다 일반적으로 더 따뜻했다. 오늘날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유럽에서 돌아다녔다. (p. 55) 지구의 궤도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기와 그 흔들리은 모두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주기적으로 변한다. 이 주기적 변화들을 앞장에서 짧게 언급한 밀란코비치 주기 라고 부른다. (p. 59)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약 100만 년 전부터 더 느리지만 더 극단적인 주기로 건너갔는데, 바로 약 10만년 에 이르는 지구의 궤도 이심률 주기로 옮겨간 것이다. (p. 61) 현재 지구는 전체 생애 중 약간 기묘한 시기에 있다. 지구가 지금까지 존재한 전체 시간 중 80~90%는 지금보다 상당히 따뜻했다. (p. 62)

지구는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인류가 존재하건말건 무관하게 자신의 활동을 할 뿐이다. 수억년의 지구 생에 중에서 인류가 존재한 시간은 미미하다. 지구의 활동을 안다는 것은 인류에게 시급한 문제다. 환경파괴를 이야기할 때 지구를 살리자는 표현이 마치 인류가 지구를 도와주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데 인간의 오만이다. 인류가 살기 위해 지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인류가 지구에 대해 배워야 하는 것은 지구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인류 생존의 문제다. 지구는 앞으로도 그저 자신의 활동을 해나갈 뿐이다. 인류가 존재하건 말건.

전 세계 사람들의 유전자 조사에서 나온 가장 놀라운 결과는 사람이라는 종이 놀랍도록 균일하다는 사실이다. 머리카락 색과 피부색 또는 머리뼈 모양의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구에 살고 있는 75억 명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은 놀랍도록 낮다. 사실, 지구 정반대편에 살고 있는 두 인간 집단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보다 중앙아프리카의 어느 강 양쪽에 살고 있는 두 침팬지 집단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이 더 크다. 하지만 사람의 유전적 다양성은 아프리카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나타난다. (p. 71) 오늘날 아프리카인이 아닌 사람들의 유전 암호 중 약 2%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유래했다. (p. 72) 아프리카에 남은 원주민 중에서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의 DNA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 73)

세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다양한 것 같지만 거기서 거기란다. 그러니 질병 하나가 세계를 유행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프리카는 가난한 대륙이라는 이미지로만 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곳이다. 인류의 기원을 알려주는 곳이자, 앞으로도 (작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긴 하는) 인류의 '다양성' 연구에 중요할 곳이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불굴의 의지가 이글거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아프리카의 고향에 결연히 등을 돌리고 지평선을 향해 과감하게 걸어가 대륙들 가장자리에 위치한 온 구석구석을 체계적으로 채워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수렵 채집인 집단들이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온 사방을 배회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p. 79)

신대륙과 구대륙간의 이동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낙타와 말은 사실 북아메리카에서 진화한 뒤, 베링 육교를 건너 유라시아로 넘어왔는데, 고향에 남아 있던 낙타와 말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한다. 신대륙이라고 이름붙여지기 전에 이미 고대인류가 걸어서 건너간 땅이 아메리카 였다. 인류를 중심에 둔 미화는 삼가해야 한다. 문명의 발달도 자연이 만들어 놓은 천연 국경에 의해 구분된 것이다. 그곳에 살던 인류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면 자연과 환경과 지구의 영향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되돌릴 수 없게 바꾼 발명은 갑작스런 기후 변화의 역경 속에서 태어났다. (p. 93) 주요 곡물은 모두 초본 식물, 즉 풀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목초지에서 방목하는 소나 양, 염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인류도 풀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p. 100) 이 진화적 혁신 덕분에 식물은 습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p. 115)

인간이 농업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은 풀 덕택이었다. 식물이 포자번식에서 겉씨식물과 속씨식물로의 변천과정이 인류의 진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읽으며 경이로웠다. 전지구적 환경은 생태계와 밀접하게 상호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는 티베트 고원이 공급하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자원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물 이다. (p. 130)

중국관련 책을 읽었을때 티벳고원을 강제적으로라도 중국영토내에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가 정치군사적 이유라고만 생각했었데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티베트 고원은 대륙이 급수탑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고인류의 이동에서 호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지각판들의 경계가 만들어낸 환경에서 물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다. 사막에만 오아시스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꼭대기에도 벌판한가운데도 있었다. 지구는 그런 호수를 만들었다 없앴다 하곤 했다.

이렇게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둘러싸임으로써 미국은 사실상 섬나라가 되었는데, 그러면서 한쪽으로는 유럽과 반대쪽으로는 아시아와 해상 교역을 쉽게 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미국이 경제적 성공과 함께 자유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지리적 환경이 제공한 조건 덕분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혼잡한 대륙에서 계속 서로 부대끼며 옥신각신 살아갔지만, 미국은 영토 보전의 안전성 때문에 거의 200년 동안 대외 정책에서 고립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p. 169~170)

고대그리스의 역사에서나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지리적 환경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미국의 지리적 분석은 신선했다. 무엇보다 '블랙벨트' 지도를 보면서 오늘날의 정치가 먼 옛날 지질학적 구조와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니 무척 흥미로웠다.

런던 지하철이 불편할 정도로 더운 이유는 런던 점토 때문이다. 지하 동굴은 보통은 상쾌할 정도로 서늘하기 때문에 이 점은 의아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터널을 처음 팠을 때, 점토의 온도는 약14℃였고, 초기에는 런던 지하철이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라고 선전했다. (p. 215)

지하에서 런던 지하철을 기다린다는 것은 더위를 감수해야 하는 일임은 경험한 바 있다. 이또한 사소할지라도 지구의 역습이었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역사적으로 엄청난 흔적을 남긴 지구의 역습도 있었다. 미노아문명은 지중해 교역으로 일찍이 큰 부를 쌓은 성공한 문명이었으나 지각판의 결실을 누린만큼 끔찍한 대가를 치룬 곳이기도 했다.

지구상의 모든 철은 별 내부의 핵융합 반응에서 만들어졌다. 철은 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소이다. 큰 별의 중심부에서 수소 핵융합 반응을 통해 헬륨 '재'가 충분히 많이 쌓이면, 이번에는 헬륨 핵융합이 일어나 탄소와 산소가 만들어지고, 계속해서 더 무거운 원소들의 핵융합이 일어나 황과 규소를 비롯해 점점 더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지다가 결국에는 니켈과 철이 만들어진다. (p. 233) 역사적으로 우리가 귀하게 여겨온 금 은 지구가 철핵과 규산염 맨틀로 분리된 뒤에 지표면에 충돌한 소행성에서 온 것이다. (p. 234) 지구에 복잡한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뜨거운 철핵 덕분이다. (p. 235) 호상철광층은 대부분 지구에서 최초의 대륙들이 막 생겨나던 무렵인 22억~26억 년 전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전 세계 각지에 퇴적되었다. (p. 236)

인류가 순식간에 써 없애고 있는 광물들은 사실 지구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지구는 녹슬어갔다(p.241)' 라고 한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구는 다시 녹슬어 갈 수 없게 되었다.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동물들만이 아니었다.

2세기 초에 로마 제국과 한 제국은 공통점이 많았다. (p. 260)

전차의 발명은 기원전 2000년경에 일어났다. 전차는 전쟁의 전술에 혁명을 가져왔다. 하지만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500여 년이 지난 기원전 800년경에 <일리아드>를 쓸 무렵에는 청동기 시대의 이 군사기술은 이미 낡은 것으로 변한지 오래되었다. 전차는 명성과 권력의 상징으로만 명맥을 유지했다. (p. 277)

기마 유목민들은 때로는 공물을 요구했고, 때로는 농촌과 마을을 공격해 약탈했으며, 가져갈 수 있는 것을 다 약탈한 뒤에는 그냥 넓은 초원 지대로 돌아가 버렸다. (p. 279)

헝가리 평원은 생태학적으로 스텝과 농경 지대 사이의 중간에 위치했고, 스텝 초원 지대에서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p. 283)

페르시아의 이 성벽은 중국의 만리장성 다음으로 세상에서 두 번째로 긴 방어용 성벽이며, 만리장성과 똑같은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즉, 정착 문명과 야만 문명 사이의 경계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p. 286)

유라시아의 이슬람 핵심 지역을 파괴한 반면 유럽을 고스란히 남겨둔 덕분에 몽골족은 이 지역에서 권력의 균형추를 유럽으로 기울게 했고,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추월해 더 빨리 발전할 기회를 얻었다. (p. 292)

역사를 좋아해서 그런지 역사만 나오면 확 빨려들어갔다. 개인적으로 헝가리스텝지역의 발견은 서유럽 역사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인류의 문명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지구의 영향력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어떤 위대한 제국도 결국 자연의 경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그리스정교회 라는 기독교의 3가지 신앙도 살펴보면 자연적 경계를 바탕으로 형성됐고, 아메리카 문명이 빈곤해진 이유도 지형적 이유가 컸으며, 스텝지역에서 활동한 유목민족도 환경에 적응한 결과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중세의 교양있는 사람들 중에서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p. 311)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사람들은 독실한 신자들이었기에 천동설을 지지했으나 속으로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니 그것이 과연 교양이랄 수 있는 것인지... 아니 그렇기 표리부동했기에 정말 교양인것이었는지도.

석탄기의 세계는 지금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판들의 활동 때문에 지표면 위를 늘 돌아다니던 대륙들의 배열은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석탄기 내내 주요 대륙들은 서로 들러붙으면서 하나의 초대륙 판게아로 합쳐지고 있었다. (p. 357)

에너지원이 되는 자원에 대해서는 실생활에서도 밀접한 연관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국의 탄전들의 분포가 영국의 정치 지도에 영향을 미친 지도를 보고 있자니 수억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자원을 파내쓴 인간이 한 일이 결국 무엇인가 싶어진다... 석유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은 병에 갇힌 진(아라비아 신화에 나오는 악마)를 꺼내는 것과 같다. 그것은 17세기에 거의 무한한 에너지를 원하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나중에 우리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심술을 부렸다. (p.381)>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우리는 한 바퀴를 빙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p. 382)

저자는 '핵융합' 에너지라는(원자력이 아니다) 친환경적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면 더이상 지구의 자원을 소모시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밀란코비치 주기에 의하면 약 5만년 뒤에는 지구의 기후가 빙기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인류가 대기로 쏟아낸 온실가스 때문에 예정된 다음번 빙기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데, 이것이 인류의 희망시대가 될지 절망시대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지구는 끊임없이 역동적인 장소이며, 그 표면의 특징들과 행성 차원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은 인류의 이야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 종은 독특한 판 구조론과 기후 조건을 지닌 동아프리카 지구대에서 출현했는데, 우리를 원인猿人에서 우주인으로 진화하게 해준 다재다능함과 지능은 우주의 주기에 따라 일어난 환경 요동의 산물이다. (p. 389) 문명의 전체 역사는 현재의 간빙기에서 잠깐 동안 반짝이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잠깐 동안 기후가 안정된 시기에 살고 있다. (p. 390) 지구는 인간의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를 마련했고, 그 자연 지형과 자원은 계속해서 인류 문명을 나아갈 방향을 이끌고 있다. (p. 391)

[사피엔스]가 인류문명의 헛점을 짚어주고 [코스모스]가 우주속 먼지크기인 인류를 깨닫게 해줬다면 [오리진]은 인류가 결국은 지구에 속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비록 앞선 두 책만큼의 인문학적 깨우침을 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인류와 우주 사이에 지구라는 연결점을 분명하게 자리매김해주는 의미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잊지 말아야 겠다.

지구가 우리를 만들었다. (p.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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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 시대를 앞서간 SF가 만든 과학 이야기
조엘 레비 지음, 엄성수 옮김 / 행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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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 자동차, 드론, 스페이스X, 원자폭탄, 탱크, 인조팔다리...

세상을 바꾼 과학과 기술이 탄생하는 순간

SF소설은 과학기술의 미래를 보여주는 장르 같다. 허구이기에 상상력은 현실을 초월하고 실제 과학기술보다 자유롭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과학기술은 SF를 때론 실현시키기도 하고 때론 실현불가능함을 증명하기도 한다. 결국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두 분야는 각각의 미래를 끊임없이 구현하고 있다. 지금은 익숙해진 과학기술들이 잉태되어 있는 듯한 SF들을 훑어보게 해주는 이 책은 그런 상호보완적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발전에 아시모프가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 이는 사실 자동차 자체와는 무관하지만, 아시모프는 완전한 자율성에 지능까지 갖춘 로봇이 인간 또는 로봇 자신과 관련해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로봇 윤리학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SF사상가였다. (p. 19)

자율주행자동차에서 아시모프의 '로봇 공학 3원칙'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곧 구현될 것만 같은 미래적 신기술 중 우리의 현실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아마 자율주행자동차 일 것이다. 책에 나오는 옛날 티비시리즈의 '키트' 가 현실화 된 셈이다. 사실 나는 '키트'를 모는 느끼한 남자 보다 손으로 모든 것을 만드는 맥가이버를 좋아하는 쪽이었는데 언젠가부터 SF에 빠졌네 ㅎ 여하튼, 로봇공학3원칙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로봇' 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내가 생각했던 로봇은 아마도 인간형 로봇이었나 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율주행자동차도 로봇이었다. 로봇의 윤리학은 시급한 문제다.

노틸러스 호가 미래지향적인 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쥘 베른이 잠수함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16세기 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일종의 '배를 가라앉히는 장치'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메모와 그림을 남겼는데, 그 배를 잠수정 또는 잠수함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p. 33)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 는 내가 정말 좋아하던 동화책이었다. 수영도 못하고 물놀이도 별로라 했던 내가 왜 가장 좋아하는 책이 이 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가장 처음 한글로 읽었던 책은 바다 책이었다. 갑자기 생각난 뜻밖의 우연이 <해저 2만 리> 더 각별하게 느끼게 한다. ㅎ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천재는 천재였다 보다. 잠수함에 대한 상상도 했었구나... 그런데 다빈치의 상상력은 이후로도 여러번 이 책에서 등장한다.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1608년에 슨 소설 <꿈>은 종종 최초의 SF로 불린다. 달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지구상에서 달까지의 여행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지만, 케플러는 이 책에서 태양계와 궤도 역학 같은 첨단 과학 이야기들도 다룬다. 그야말로 '과학 소설'을 다룬 것이다. (p. 42)

그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가 SF소설을 썼었다니, 놀랐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 방아찧는 토끼는 등장하지 않겠구나 싶었다. 케플러는 천문학자니까ㅎㅎ

우리에게 달만큼이나 친숙한 화성은 오랫동안 많은 작가와 몽상가의 상사력을 자극해왔으며, SF의 세계에 적어도 판타지 장르의 SF와 과학에 근거한 SF라는 두 가지의 구체적인 하위 장르를 만들어냈다. (p. 58)

화성에 대한 허구들을 되짚어보니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했음을 새삼 또 느낀다. 어렷을 땐 화성에 화성인이 사는줄 알았는데... 화성에 생명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린 것을 보면...

전쟁(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 유명한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은 미국으로 넘어갔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많은 연구 결과 및 관련 자료 역시 대부분 미국 수중으로 들어갔다.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완전한' 미국인이 된 폰 브라운은 미국의 군사-산업 프로젝트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 됐으며, 먼저 달에 도달하려는 소련과의 로켓 개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범국가적인 로켓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국민을 상대로 한 홍보에도 열을 올렸다. 그는 월트 디즈니 사와 손잡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통해 과학과 공학기술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미국 어린이들에게 친근한 인물이 되는 등 나치주의자에서 미국에 없어서는 안 될 보물로 재포장되었다. (p. 63~65)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전한 독일의 과학자 총 642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당시 독일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연구케 한 비밀 작전이 '페이퍼클립 작전' 이라고 한다. 그 주축이었던 인물인 베르너 폰 브라운의 일화를 읽으며 미국의 우주산업 뒤에 숨겨진 그림자의 하나를 본것 같아서 좀 씁쓸했다.

크로미의 소설 <최후의 심판의 날>은 방사능이 발견되기 전에 쓰인 것으로, 방사능은 그로부터 1년 후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염에서 일종의 방사능이 나와 사진 건판을 뽀얗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발견된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가 이 방사능의 출처는 화학물질이 아니라 원자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그로부터 다시 2년이 더 지나서의 일이다. (p. 73)

원자폭탄도 발견되기 전에 이미 SF에서 예견되었었다니. 과학의 발견과 SF의 예측은 밀접한 연관이 있어보이는 경우가 많다.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과학의 경향과 소설속 과학을 캐치하는 눈 밝은 이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다빈치의 장갑전차는 그의 설계도면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않았는데, 애초부터 이 전차는 그야말로 그의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빈치가 예견한 무기가 탱크라는 이름으로 현실화된 것은 400년도 더 지나서의 일인데, 그걸 SF소설에서 예견한 사람은 H.G.웰스 였다. (p. 91)

다빈치가 살았던 시대는 나름 전쟁시대였다. 작은 공국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다빈치는 그만의 상상력을 다양한 무기연구에 펼치기도 했다. 잠수함도 탱크도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위해 했을 법한 상상의 무기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군주를 위한 것이었는지 평화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웰스의 설명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말하는 열 광선이 아르키메데스의 '화염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염 거울이 실제 존재했을 가느엉은 거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그 장치는 잘 알려진 최초의 SF 소설 속 이야기 정도로 봐도 좋을 것이다. (p. 105)

다빈치도 아니고 기원전 3세기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라니~! 하긴 아르키메데스도 그의 도시국가를 위해 이런저런 무기들을 개발했었다는 일화가 있었다. 그런데 '화염 거울' 은 처음 읽는 에피소드였다. 시대를 앞서가는 발견은 확인할 때마다 참 경이롭다.

테슬라는 물을 채운 수송관으로 메시지를 전 세계에 빠르게 보내는 시스템, 적도를 중심으로 지구를 도는 거대한 우주 고리, 입자 가속기 살인광선 같은 초현대적인 발명품을 구상했던 방탕한 천재였다. (p. 132)

근대의 인물인 니콜라 테슬라에 대해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그의 생각으로 구현된 것들은 굉장했다. 테슬라 라는 이름이 전기자동차 이름인줄만 알았는데 실존 인물이었구나 ㅋ 이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다.

SF 소설에서 화폐의 미래에 대한 예견은 그 역사가 아주 깊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에드워드 밸러미는 자신의 1888년 소설 <뒤를 돌아보며> 에서 신용카드에 대해 예견했는데, 심지어 그 이름까지 오늘날과 똑같았다. (p. 147)

사실 상상력이라는 것도 현실 기반 없이 갑자기 무턱대고 생각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SF가 예견한 많은 것들이 신기하긴 했지만, 시대를 읽고 시대의 과학의 흐름을 주시한 소설가들의 상상력에도 다양한 연구와 준비가 있었음을 새삼 느끼곤 했다.

오웰이 <1984>를 쓸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은 아직 진기한 물건이었고, 가지고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불과 10년도 채 안돼 텔레비전은 거의 모든 가정과 문화를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오웰은 그보다 훨씬 더 먼 데까지 내다봤다. 그러니까 대중오락의 수단인 텔레비전이 대중 억압의 수단으로 기능이 왜곡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내다봤던 것이다. (p. 157)

동물농장과 1984라는 작품은 여기저기서 하도 언급이 자주 되고 요즘 학생들에겐 필독서이기까지 한 작품인데 읽었었는지 어쨋는지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조만간 찾아 읽어봐야 겠다. 텔레비전이 상용화되기 전에 텔레비전을 감시도구로 생각한 작가의 의도는 아무래도 작품을 읽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복제기의 기본 원리는 이 트랜스포터와 같다. 트랜스포터의 경우 어떤 물체의 원자 구조를 스캔한 뒤, 그 정보를 이용해 에너지-물질 전환 마지막 과정에서 그 물체를 그대로 복원해낸다. 사실 모든 트랜스포터는 일종의 복제기로, '물질 전송'이라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다. 물질 자체가 전송되는 것이 아니고 정보만 전송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78)

순간이동 이라는 것이 복제의 개념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은 듯 하다. 고체형의 물질을 원자형으로 분해해서 이동시키는 것이 순간이동이라고 하니 복제가 맞긴 한것 같다. 그렇게 설명을 읽으니 왠지 신비감은 살짝 떨어지는 기분이다. ㅎ

호프의 이야기와 신속한 X선 활용 간에 어떤 관계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둘다 나타날 만한 때가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리라.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명의 역사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현상 한 가지는 그런 일들과 돌파구가 마치 그럴 만한 때가 됐다는 듯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국 철학자이자 특별한 사건들의 연대기를 주로 다루는 작가 찰스 포트는 증기기관 기술이 고대 부터 잘 알려진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가 될 때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하지 못한 이유를 파고든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인류 사회는 증기기관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증기기관 사용법을 알아내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미적분학과 진화론의 자연도태설에서 전구와 무선전신의 발명에 이르는 많은, 아니 어쩌면 거의 모든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들에 적용된다. (p. 198)

모든 것엔 '때' 가 있었다. 절실히 공감한다. SF와 과학의 접점은 이런 '때' 가 서로 맞아들어가는 그런 때였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락이 아닌가 싶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은 생물학과 의학이 놀라우리만큼 너무 빨리 발전하고 있다는 일반 대중의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켄슈타인>은 해부학적 절개 및 수혈의 발전, 소생 의학의 출현 그리고 생물학 분야에서의 전자기학과 전기요법의 발전 등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쓰였다. 그리고 웰스의 소설은 다윈의 진화론과 생체 실험에 대한 논란 외에 세포설과 세균설, 생화학의 급속한 발전, 세포분열 및 증식과정에 대한 이해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과정에서 쓰였다. (p. 206)

뭔가 우주적이고 거시적인 세상에는 상상력이 폭발되지만 오히려 미시적이고 인간적인 분야에는 그 상상력이 잘 발현되지 않아온 것 같다. 조심스럽기 때문일까 디스토피아에 대한 불안때문일까...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미군을 밴제드린 황산염 정제를 약 50만 팩 주문했는데, 태평양 일대에서의 전투가 전혹성을 띠게 된 데는 이 같은 약 남용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p. 224)

정신의학의 발달은 약으로 구현되었다. 이 약이 아직 인간의 정신을 조종할 정도는 아니지만 진작에 전쟁에 이용됐었다는 것을 읽으니 심히 우려가 되긴 한다.

보철 기술은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집트에서 발견된 미라 중에는 몸에 커다란 인공 발가락이 붙어 있는 미라도 있었다. 또 기원전 3세기경의 로마 장군 마르쿠스 세르기우스는 쇠로 된 의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수가 워낙 쓸 만해 여러 해 동안 장군직을 수행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청동 거인 탈로스는 몸 전체를 보철 혹은 인공 신체로 교체헤 만들었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괴물의 직접적인 조상 중 하나느 히브리 신화에 나오는 오토마톤 '골렘'이다. 흙으로 빚은 후 생명을 불어넣은 이 괴물은 자신을 만든 이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미쳐 날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가 무차별적인 사이버네틱스 발전인 불러올 잠재적 위험을 경고하면서 이 골렘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일단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면 제어할 방법이 없는 정교한 자율형 기계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골렘을 예로 들었던 것이다. (p. 230)

신체에 대한 부분적 인공신체에 대한 생각은 (역시나 또) 고대부터 있었다. 역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 인가;;; 그래서 '정신' 의 발현과정을 모르기에 '아바타'영화에서처럼 신체는 둘이될지라도 정신은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 같은데... 미래적 SF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나갈지 궁금해진다. 지금은 기억의 가치나 신체존재의 무의미 등을 소설에서 읽을 수 있곤 해도 뭔가 아직 미진한 느낌이다. 다른 과학 분야에 비해서는... 어찌보면 진흙으로 빚어진 골렘이 미쳐 날뛰는 괴물이라면 마찬가지로 진흙으로 빚어졌다는 인간은 왜 '정신' 이 있는 것인가 싶고 ㅎ

휴고 건스백은 과학과 기술의 열렬한 신봉자로 늘 각종 트랜드를 좇았으며 SF 소설이 갖고 있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작가로서는 그리 잘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SF소설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SF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p. 241)

작가로서 유명세가 별로 없었다면서 '휴고상' 에 왜 이름을 올리게 됐는지 궁금하다. 물론 '텔레포트' 라는 그가 상상한 화상통화 시스템이 획기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필립 K 딕 만큼은 아닌것 같은데 말이다.

태블릿의 독창성과 디자인 문제를 놓고 막대한 소송비용을 지불해가며 오랜 특허 분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은 1960년대 나온 영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언급하며 맞섰다. 애플의 디자인 콘셉트를 표절했다는 혐의에 대한 반박자료로 고전적인 SF영화를 인용한 것이다. (p. 257)

사실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스스로가 인정하는 트레키(스타트렉의 팬)다. 그는 <스타트렉>에 나온 패드 같은 장치들이 자기 회사의 일부 제품을 디자인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 (p. 260)

할많하않;;;

인터넷의 출현과 그것이 전 세계의 문화, 경제, 사회에 미칠 폭넓고 심대한 영향에 대해 예견하지 못한 것은 SF계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SF계는 원거리 통신 또는 소형화 추세처럼 일부는 세세한 부분까지 잘 예견했고, 로봇 또는 개인 교통 같은 분야는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게 예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통신 분야, 특히 인터넷 분야는 관련 기술들이 이미 출현하거나 출현하기 직전까지도 해당 분야를 예견하거나 눈에 띄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p. 264)

저자는 1946년 머레이 라인스터 의 <조라는 이름의 로직> 이라는 소설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예외적인 SF 소설이었다고 하면서 유일하게 네트워크 세상을 예견했다고 하는데, 여하튼 다른 분야들에 비해 인터넷 세상에 대한 예측은 SF에 없었구나라고 생각하기 신기하다. '인터넷'의 발전은 그렇게 급작스러웠던 사건이었나 보다.

인공지능 자동차, 잠수함, 달 탐사, 화성 프로젝트, 원자폭탄, 탱크, 에너지 무기, 드론, 신용카드, 감시사회, 복제 기술, X선 등의 레이저선, 생체공학, 신경정신약물, 인조인간, 화상통화, 휴대용 단말기, 사이버 공간 등 총 18가지의 주제에 따른 SF 소설과 과학과의 접점을 살펴 볼 수 있었던 이 책은 쉽고 가볍게 읽히면서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어서 과학에 호기심을 갖는 학생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마무리글 없이 본문으로 뚝 끝나는 편집이 아쉽긴 했지만 SF가 현실이 된 순간들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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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댄서
타네히시 코츠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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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는 순간,

이야기가 우리를다음 세상으로 이어줄 것이다.

"자유로워지는 건 시작일 뿐이야.

자유롭게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지"

 

찬사가 가득한 표지였다. 00베스트셀러에 00선정도서에 00올해의책에 00수상작가 등 책표지에 써붙일 수 있는 모든 외부적 수식어가 다 붙어있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스티커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구병모 작가와 정희진 작가의 추천사였다. 판타지가 되었든 에세이가 되었든 결핍을 강요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온 작가들의 관심이었다. 미국에서 그토록 많은 명예를 획득했다는 이 소설은 흑인노예의 서사를 다룬 책이다. 어쩌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란 것은 늘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전해준 기억의 모음이곤 했다. 그리고 연결이었다.

지금 나는 기억의 경이로운 힘을 안다. 기억이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푸른 문을 열 수 있으며 우리를 산에서 평원으로, 또 푸르른 숲에서 눈이 두껍게 쌓인 들판으로 옮겨줄 수 있다는 것을. 땅을 옷가지처럼 접을 수 있다는 것을. 또 내가 그녀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 '깊은 그곳'으로 밀어넣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잊었지만 잊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이 이야기가, 이 인도가 산 자의 땅과 사라진 자의 땅 사이에 놓인 그 환상적인 다리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음을 안다. (p. 11)

하이람 워커. 19살의 흑인 노예. 미국 남부 버지니아의 농장주 와 흑인여성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두살 많은 (핏줄로는 형이지만) 작은 주인을 모시고 마차를 몰고 가던 중 강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마법의 분위기를 풍기며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마법인지 아닌지 마법이라면 어떤 마법인지를 깨달으려면 이 두꺼운 소설을 절반 이상은 읽고서야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

"하이람, 난 네가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는지 안다. 이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지만, 너는 몇몇 어른보다도 잘 해냈다. 하지만 세상은 곧 더욱 잔인해질 거야. "테나가 말했다.

"네, 아주머니"

"조심해야 할 거다. 얘야. 조심해야 해. 내 말을 기억하렴. 저들은 네 가족이 아니다. 말을 탄 그 백인 남자가 네 아버지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여기에 서 있는 내가 네 어머니라고 하는 편이 맞을 거다" (p. 36, 37)

흑인노예들이 사는 마을에서 살던 열한살 소년은 저택에서의 생활을 동경했다. 엄마가 팔려가고 나서 일부분 기억을 잃긴 했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말을 타고 관리하며 돌아다니던 주인에게 눈치껏 자신의 탁월함을 내보인 끝에 저택으로 노역의 일자리가 변경된다. 소년은 기뻤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곳은 저택의 지하 토끼굴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따. 그렇다고 들었다. 백인들은 지루해지면 야만인이 됐다. 그들이 상급자 놀음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도 잘 꾸며진, 인내심 강한 시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품위에 싫증을 느끼는 순간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이 새로운 게임을 선택하면 우리는 게임판 위의 말이 될 뿐이었다. 끔찍했다. 이렇게까지 고삐가 풀렸을 때 그들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허용할 만한 일에도 한게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 앨리스. 우리 집에는 검둥이 노래보다 좋은 게 있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p. 44)

하이람은 속으로 계속 주인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주인은 단 한번도 아들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데 말이다. 아들은 커녕 노예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네 주인님' 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자신은 워커 가문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믿음이 소년의 능력을 막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 모든 일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나는 진짜로 라클리스에 멸망을 가져다준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메이너드를 그가 속한 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터무니없는 예시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두려웠다. (p. 54)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메이너드의 어리석음은 불경스럽긴 해도 특별하지 않았다. 주인들은 물을 가져다 끓일 줄도 몰랐고, 말에 굴레를 씌울 줄도 몰랐으며, 우리가 없으면 속바지 끈 하나 매지 못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았다. 그래야만 했다. 우리에게는 게으름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뜻했지만, 주인들에게는 게으르게 사는 것만 한 인생의 목표도 없었으니 말이다. (p. 55)

어린 소년의 눈으로 저택의 생활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더구나 자신이 스스로 그 가문의 핏줄이라고 생각하는 흑인소년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노예는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것을.

비록 토끼굴에 살긴 했지만 저택의 일을 하며 소년은 소년다운 꿈을 꾸었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재주를 선보인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을때 기대에 차 올랐다. 하지만 교육기간은 금세 끝났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통보받았다. 소년이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채워졌다고 판단되어졌다.

"이젠 네가 메이너드를 돌봐줄 때다. 내 시대는 영원하지 않을 테고, 메이너드에게는 훌륭한 하인이 필요하다. 너 같은 하인, 밭일이나 저택 일도 잘 알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하인 말이다. 나는 너를 지켜봤단다. 얘야. 그리고 네가 무엇도 잊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 하이람 네게는 한번만 말해주면 돼. 너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 (p. 57)

"우리 모두에게 닥칠 골칫거리가 너무 많다. 그리고 메이너드,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 아이는 준비되어 있지 않아. 그 애를 돌봐주거라. 얘야. 내 아들을 돌봐다오. 네 형을 돌봐주거라. 알았느냐?" (p. 66)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 하이람은 특별한 하인이 되었다. 주인보다 나은 능력을 가졌기에 모자란 주인을 보필해야 하는 그런 하인. 그 역할을 영광으로 알라고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런 능력을 가졌기에 경매에 넘겨져 팔리지 않고 저택에 남게해준 거라고 소명을 다하라고 주인은 말했다. 소년은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라고 대답했다. 소년의 형은 소년을 동생이라 생각지 않았다. 물론 소년의 아버지도 소년을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소년의 모든 감각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표현들을 했을 뿐이었다. 소년에겐 형이라 해놓고 그 형이란 아이에겐 하이람을 동생이라 하지 않았다.

내 노역의 논리가 아귀에 맞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라클리스를 한 뼘도 물려받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만 문제인 건 아니었다. 절대 내가 내 노동의 결실을 거둘 수 없다는 것만도 아니었다. 노역이란 자연스러운 욕구를 병 속에 영원히 밀봉해야 한다는 것, 그 욕구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상급자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이상으로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p. 72)

하이람은 천천히 깨닫기 시작한다. 어린나이에 화려한 생활들을 비록 누리진 못해도 가까이에서 동경하며 자라다보니 다른 노예들에 비해 더뎠던 것도 같다. 본인이 노예라는 것조차 잘 몰랐던 것도 같다. 소설에서는 농장주인이나 지주라는 표현이 아니라 상급자로, 노예가 아니라 노역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이 시대의 표현인지 작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달라진 표현이 좀 더 거리감과 객관적 느낌을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이므로 좀더 감정적인 표현이 적절할 것도 같은데 논픽션 작가로 오래 활동해서인지 작가의 표현법은 남다른 감이 있었다.

버지니아는 한 인종 전체가 사슬에 굴복하리라는 믿음이 건재한 곳이며, 바로 그 인종이 정확한 비율로 철을 주조하고, 계산하여 대리석을 조각해낼 능력이 있다 해도 그들을 계속 짐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순간 그녀를 팔아버리는 곳이었다. (p. 102)

상급자는 자기 '사람들'의 내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우리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았지만 우리를 알지는 못했다. 모른다는 것이 그들 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코앞에서 아이를 팔아버리려면 그 어머니를 가능한 한 얄팍하게 알아야 했다. 한 남자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거나 산 채로 그의 피부를 벗긴 뒤 소금물을 뿌리라는 지시를 내리려면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같이 그 사람을 느껴서는 안 됐다. 그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됐다.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없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이 나가지 않으니까. 그리고 손이 나가지 않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그 순간 노역자들은 상급자가 자신을 본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상급자 본인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토록 심오한 이해의 순간이 오면 상급자는 끝난 것이다. 더는 필요한 만큼 통치할 수 없을 테니까. (p. 119)

하이람은 성장했다. 피끓는 청춘이 되고 있었다. 사랑하고 싶은 여자도 생겼다. 탈출의 욕망이 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규칙 그것이 노예제를 유지하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노예는 인간이어서는 안되었다. 노예선의 구조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게 만든다. 버지니아 농장들은 노예선의 실상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 소년이었다. 곧 스무살 이었지만 무모한 나이였다.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런 무모한 나이였다. 무모함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 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하이람의 무모함도 그랬다.

서로 전혀 달랐던 모든 동기가 사라져 생존의 동기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한 마리 동물로 전락했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p. 198)

바닥의 바닥을 경험했다. 어둠의 어둠을 경험했다. 비천함이 비천함인지도 모를 만큼 인간성을 터럭하나 남기지 않고 버려야 했다. 죽음의 직전까지 몰려야 했다. 왜냐면...

"우리는 확인해야 했어"

"뭘 확인해야 했는데요?"

"너한테 정말 산티 베스의 힘, 인도의 힘이 있는지. 그런데 있더라. 우리는 그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했어. 그 힘이 너를 어디로 보내줄 지 계산했고,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어"

"어디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라플리스" (p. 218)

라플리스. 하이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일했던 곳. 노예로서의 삶이긴 하지만 영원히 기억될 이름 농장라플리스. 그곳은 노역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집이기도 했다.

하이람 할머니가 일으켰다는 기적, 탈출의 마법, 인도하는 힘. 하이람의 능력은 잠재되어 있었고 아직 능력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있긴 있었다. 뭔가가.

남부 농장들의 몰락기였다. 북부 공업이 성장하던 때였다. 언더그라운드 라는 지하조직이 생겨났다. 언더그라운드는 하이람의 능력을 주시했다. 하이람은 언더그라운드 라는 조직의 요원 훈련을 받게 된다. 그의 기억능력이 일단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그의 숨겨진 능력에 거는 기대도 있었다. 하이람은 새로운 환경을 배워야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떠야 했다.

버지니아에서 우리는 무법자들이었다. 무법자로 산다는 건 우리의 명예였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것이 악마적인 법의 기반이라 생각했고, 그 도덕을 넘어서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언더그라운드가 너무 강력했다. 북부에서는 '지하'를 의미하는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이 그 조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요원들인 기독교인이었다. 북부에서는 언더그라운드의 요원들이 무법자가 아니었다. (p. 265)

미국의 남북전쟁이 내세운 큰 명분이 노예해방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소설에서 남북전쟁 이전의 남북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신선했다. 종교적이지 않게 마음에 닿는 부분들이 좋았다. 사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에 반드시 종교적 명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므로 누구나 평등하다는 기초적인 생각이 그 생각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하이람이 겪는 혼란은 노예로 살았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자유롭게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나는 그 천막 사이를 걸어 다니다가 물오른 토론을 벌이는 대회 참가자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더 큰 천막들 안에서 임시 단상 위에 올라 제 신념을 설파하는 개혁의 연설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화려함을 좋아했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을 모아들이려고 우열을 다투는 듯했다. (p. 334)

나는 더 걸아갔다. 그러다 군중 앞에 멈춰 서서, 작업복을 입고 머리를 민 여자 두 명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영역에서 남자처럼 완전히 자유롭게 활약할 권리가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여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커졌다. 마침내 군중마저 그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나는 또다른 천막으로 이동하면서 그 약탈이라는 것이 다른 방면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천막에서는 백인 남자가 전통 의상을 입은 조용한 인디언 곁에 서서 자신이 보아온 엄청난 파괴 행위와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의 인간들이 토지를 명분으로 얼마나 사악한 일을 기꺼이 저지르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계속 나아간 끝에, 나는 이 나라의 공장에 대해 격분하는 남자 뒤에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들의 부모는 더 이상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 팔아버렸고, 아이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남자가 대표하는 자선단체가 구해주기 전까지 계속 노동을 해왔다.

더 멀리 가던 나는 이 주장이 노동조합 활동가의 다른 주장과 친척 관계임을 알게 됐는데, 그 활동가는 공장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공장주들에게서 박탈해 힘들게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자 관련된 주자잉 하나 더 들려왔다. 모든 공장을 아예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 사회 전체가 사문화되어야 하며, 남녀 모두 함께 일하고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새로운 존재 방식, 해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나를 침범했다. 겨우 1년 전만 해도 나는 그 모든 것을 거부했을 터다. 그러나 당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아버지의 책에서 본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본 터였다. 끝이 어디일까? 알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p. 335,336,337)

북부는 들끓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상들이 섞여 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흐름이 북부에서 남부로 흐르기 시작했다. 하이람의 관점도 자신만의 탈출에서 점점 더 확장되어지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 노동, 토지, 가족, 부에 관한 여러 주장과 이념들. 노역을 돌이켜보면 버지니아라는 나의 옛 세계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악이 드러날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노예제도는 모든 투쟁의 근원이었다. 사람들은 공장이 아이들을 노예화한다고 했고, 임신이 여성의 신체를 노예화한다고 했으며, 럼주가 사람의 영혼을 노예화한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소용돌이치는 이념들 속에서, 이 비밀스러운 전쟁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버지니아의 노예 주인들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p. 345)

미국남북전쟁 후로 150여년이 흘렀다. 노예제도는 과연 없어졌는가?

세상이 새로 만들어졌을까? 아니 개선이라도 된 것일까? 법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고 개선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노예화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현재진행중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흑인노예서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애써 감추느라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요" 해리엇이 말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진정으로 노예가 된다는 뜻이죠. 잊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에요"

"기억을 위하여" 그녀가 말했다.

"친구여, 기억력은 마차이며 길이고 노예제도라는 저주에서 자유라는 은혜로 건너게 하는 교량입니다." (p. 370)

모세라 불리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탈출시키는 방법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이람의 특별함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람은 아직 '인도'할 능력이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은 기억하면서 정작 자신의 기억엔 구멍이 나 있었다. 하이람은 여전히 도망치는 중이었다.

노예제도는 그들을 수치스럽게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선량함에 대해 기본 감각을 노예제도가 침해했기 때문이다. 그 비열한 관행을 자행하는 그들의 친척들은 그들 자신도 얼마나 쉽게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상기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야만적인 동족을 경멸했지만, 어쨌든 동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증오심은 일종의 허영이며, 노예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증오였다. (p. 501)

소설이지만 다큐처럼 읽혀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이쪽저쪽의 입장을 골고루 헤아리고자 할때 특히 그랬다. 하이람은 기억력은 좋으나 그것이 지혜는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서 내내 하이람은 거의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없다. 이쪽의 입장도 이해하고 저쪽의 입장도 이해한다. 아니 이해햐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하이람의 생각들을 읽는 과정은 저자가 소설을 통해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객관성을 전달해주려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이람이 본인의 능력을 자각할 수록 하이람에게도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가는 하이람을 보면서 '자유'에 대해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해 복잡한 메세지를 전달받게 된다.

이 작품은 특히 공들여 번역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그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원작은 남부의 사투리와 노역자들의 말, 북부인의 말을 모두 살려 쓰고 있으나 그런 차이를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살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차이 때문에 작가가 쓴 몇 단어를 완전히 살려 옮기지 못한 점도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p. 550)

'옮긴이의 말' 에서 다시한번 번역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렇게 원작과 번역에서의 차이점을 알려주니 독자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번역자의 설명을 읽고서야 미국에서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찬사를 받았는지 수긍이 갔다. 그들의 언어로 읽는 그들의 이야기는 훨씬 깊이 눈이 아닌 마음에 새겨졌을 테니까.

<워터댄서>는 작가 타네히시 폴 코츠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을 읽으면서야 알았는데 마블 코믹스의 블랙 팬서 시리즈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작가라고 한다. 노예제도가 살아 있던 시절의 미국사와 흑인들의 생활에 관한 논픽션을 써서 독자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고, 특히 논픽션 작가로 활동했던 경험이 이 작품에 잘 녹아있다고 한다. 노예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노역자 the Tasked 라는 단어를 사용한 작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만화에서나마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선진세상을 만들어냈던 것은 작가가 썼다는 논픽션들에 대한 위로이자 꿈이 아니었을지...

<워터댄서> 는 묘한 소설이었다. 판타지라는 요소가 없진 않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마법이라는 요소는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처럼 느껴지게 함으로써 현실에 접목시키고 그간의 역사에서 사용되던 익숙한 단어들이 아니라 낯선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흑인노예에 대한 관점을 지금의 현실과 연결시켜주고 있는 듯 했다. 지주나 주인이 아니라 '상급자' 라는 표현은 구속력을 덜 가지는 존재로 느껴졌고 흑인이 아니라 '유색인' 이라는 표현은 흑백이라는 피부색의 차이를 덜 드러내게 했고 노예가 아니라 '노역자'라는 표현은 인격의 종속이 아닌 노동력의 구속이라는 의미를 전달해줌으로써 '인간성'의 가치를 유지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 세심함으로 인해 작가의 메세지가 독자들에게 더욱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대를 잇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이야기의 연결이기에 이야기로 전달되고 이야기로 시작되는 마법의 힘에 걸고있는 저자의 희망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힘' 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해준 특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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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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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

고단한 시절의 복판을 통과 중인 우리들이 써 내려가는

가장 보통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

"나, 집을 나각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작고 아담한 사이즈에 산뜻하고 예쁜 표지 그리고 낯선 작가의 이름

표지에 마음이 끌리고 '필사' 라는 단어에 눈이 끌려서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고 읽고 나서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필사는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표면적으로는 못난이 글씨체 때문이었지만 손으로 직접 펜을 잡고 쓴다는 것의 노고를 늘상 버겁게 여기던 부담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팔사'라는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차례에 열거된 제목들을 보며 단편모음집이었나 했는데 읽다보니 서로 연결된 중장편 소설이었다. 단편이 아님에도 단편처럼 제목을 지어놓은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책을 직접 손에 쥐고 나서야 뒤표지에 적힌 구병모 작가의 추천사?를 발견했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 덧붙여 읽게 되는 구병모 작가의 글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반가웠으나 처음으로 평이하게 다가왔다.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했던 이의 글에 대해 낯선 작가의 소설 하나로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니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마도 현실공감 이라는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지...

문득문득 그 사람과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잊으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 떠오르는 거야 당연했고, 그때마다 그 사람이 몹시 보고 싶다는 걸 굳이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놀랍거나 새로울 것도 없었다. 서로에게는 늘 최선이었으므로 덜 사랑했다는 아쉬움도 없었다. (p. 9~10)

당연한 계절의 변화를 같이 바라보고, 느끼며, 이야기해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누구 때문이라고,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헤어진 이유를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p. 13, 14)

<우리의 정류장 中>

그럴 수 있을까? 일상에서 수시로 떠오르지만 그리워하는 건 아니고 최선을 다했기에 헤어짐도 무던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특별해진 존재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그럴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듯이 헤어진 이유도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품고 몇년을 지내다 다시 만나 이별을 나누면서도 여전히 그 마음은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시와 닮아 있어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속 화자는 늘 시집을 읽고 늘 필사를 하곤 했다.

필사 노트를 접어두고 다시 식탁 앞에 놓은 흰 종이를 내려다봤다. 잘 깎은 연필을 쥐었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 (p. 23)

나 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 바르게 산다고, 나 혼자 제대로 산다고 해서 변할리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분리수거를 철저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게 잘 참아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상황이었을 뿐이다. 내가 들인 노력에 적당한 대가를 받고 싶었다. 대가란 고생한다고, 수고한다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음이면 되었다. 말뿐이어도 좋으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p. 37~38)

<목련빌라 中>

늘상 하던 필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일상은 더욱 고단하게 다가온다. 매일매일이 똑같지만 매일매일 피로에 더께가 쌓여간다. 그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다. 다 비슷하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내손으로 부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마다 겹겹이 쌓인 두께만큼 화가 솟구친다. 말뿐이어도 좋겠다고? 아니다. 결국은 말만이라고 또다시 화를 내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반복의 가치를 알아챈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대로 자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흰 종이 앞에 앉아야 했다. 쓸 수 있든 아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 1초만이라도 흰 종이 앞에 앉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p. 41~42)

<목련빌라 中>

요즘 연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부러워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면도칼로 매일매일 연필을 깎아 필통에 가지런히 채워넣는 시간을 나는 은근 좋아했다.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고 예쁘게 깎을 수 있을까 고심하며 면도칼로 세심하게 나무를 깎고 심을 갈아내곤 했다. 그러다 샤프를 손에 쥐게 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연필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이젠 색색깔의 볼펜이 문구점에 갈때마다 한참동안 그 앞에 나를 머물게 하곤 한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연필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전자책과 소리책이 나와도 여전히 종이책이 가장 좋은 나로서는 연필로 필사를 하는 소설속 화자의 마음이 왠지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게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 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 (p. 55)

부모의 기대를 받지 않은 나는 어떤 삶을 살든 부모에게 평가받지 않았다. 잘하라는 북돋움도, 못한다는 질책도 받지 않았다. 무엇이 되라는 강요도 없었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여도 상관이 없었다. (p. 59)

<필사의 밤 中>

매일이 같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는 문장이 올해만큼 절실하게 와닿은 때가 있었던가... 일상이 일상이 아니게 된 매일을 보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하던 것을 못하고 산 시간이 한 해가 되어 간다... 베껴쓰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필사라는 행위 조차도 하지 못한 채...

필사하지 못하는 마음을 공감하면서도 아무여도 상관없이 살아온 것에 불뚝 샘이 나기도 했다. 늘 평가를 받고 응원없이 비난만 받고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보지도 못했는데 무엇이 되어야 했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에게는 무심하게 살 수 있었던 그 시간들 조차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까?

어쩐지 나는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제야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못 찾은 것도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 외면해왔던 것이다. (p. 61, 62)

<필사의 밤 中>

보통의 삶... 적절한 학교와 적당한 수입, 때에 맞는 결혼 일상이라 불리는 생애 그런 것들을 보통의 삶이라 부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보통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적어도 그정도는 갖추기위해.

보통의 삶을 추구하지 않을 용기를 지녔으나 자신의 꿈을 알아채지 못하던 시간을 지탱해주었던 것은 어쩌면 필사의 밤... 그리고 가난한 사랑...

아무도 나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집안 일이란 집에 있는 사람이면 하는 일, 바깥 일이 없는 이가 하는 일이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가치로 환산할 의무조차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p. 104)

그 사람이 이해를 못하는 것도 이부분이었다. 동생의 짐을 왜 내가 짊어져야 하는지, 그 고집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다시 엄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안 되는 일이었다.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다.

"당신 꿈은? 당신 인생은? 그렇게 희생하면 나중에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요?"

"안 알아줘도 상관없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야"

"그 책임을 왜 당신이 져야 하는데요"

"나는 이미, 진작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p. 112, 113)

-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안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p. 117)

<치우친 슬픔이 고개를 들면 中>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무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암묵적으로 합의된 '가족을 위한 공동희생구조'가 설정되어 있었다.

피지 못한 꽃일까? 나는 꽃보다는 나무가 되길 소망했다. 때론 풀이 되길 소망했다. 하지만 그 나무와 풀에 꽃이 피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차피 피우지 못할 꽃이라면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소설 속 화자에게는 '피우지 못한 꽃'이라 말해주는 아버지가 있었다. 내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말이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전화로 속에 담았던 말을 무심해 뱉어주었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것을 알 수 없던 것처럼.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지 못한 꽃, 아직 발화하지 못한 꽃, 아직 제대로 맺히지 못한 꽃, 내가 꽃이라면 한 번은 피워내고 싶었다. (p. 151)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 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p. 152)

<여름 그림자 中>

부모자식도 형제자매도 가까이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독립되지 않은 '우리' 는 서로에게 족쇄가 되기 쉽다. 각각의 나 이자 때론 우리 가 되려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가족도 가끔 보아야 반가운 법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듯이 매일보는 가족도 지치기 마련이다. 냉정하다고? 이상하다고? 반박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방' 은 누구나 꿈꾸는 그런 공간 아닐까? 나만 그런가? 그렇다해도 별수 없다. 나는 그렇다.

"나, 집을 나가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p. 157)

"철딱서니 없기는, 네 나이가 몇인데 이제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맞는 거냐? 하필 이런 때에?" (p. 158)

"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이대로 맨날 밥이나 빨래나 하고 살라는 소리야!" (p. 159)

"생색 좀 그만 내! 이 집에서 이 악물지 않은 사람이 있기나 하니?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누가 널 억지로 붙들어 앉히기라도 했니? 네가 바보 같으니까 주저앉았지. 네가 아이들 맡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던 거지, 누가 먼저 너에게 해달라고 안 했어! 네가 한 선택이면 끝까지 책임을 지든가, 남 탓을 하지 말든가, 아님 혼자 고생한 척을 하지 말든가, 하나만 해, 하나만!" (p. 160)

<시인의 밤 中>

가족이라 더 잔인한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것일까? 가족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거니 했다면 큰 오산이다. 가족이라서 더 몰라주는 법이다. 예의고뭐고 차릴 필요없이 막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인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것은 없다. 내맘같은 맘도 없다. 바보가 되거나 바보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사실은 긴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건 벌이였다고, 방이었으며, 다시 시를 쓰는 일이었다. (p. 163)

백년도 훨씬 더 전에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은 현대의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꿈이고 로망이다.

그때보다 지금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나마 최저시급의 아르바이트라도 평등하게 할 수 있고 비좁고 빛도 안드는 고시원일지라도 임시적 방을 얻을 수 있으며 읽고 쓰고 배우는 것에 대해 문제삼는 외부적 규제는 없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나를 향해 건재하다고 알리는 몸짓들이 어쩐지 가슴을 저미게 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p. 170)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p. 171)

어딘가에서의 커다란 사건사고 소식에 세상이 곧 무너질것처럼 위태로워 보여도 막상 세상은 변한것 없이 잘도 굴러가듯이 내가 없으면 큰일날것 같은 가족내에서의 나의 빈자리를 아쉬워할 거라는 생각도 착각일 경우가 많다. 어느 한곳이 무너져 내려도 세상은 건재하고 내가 빈몸으로 쫓겨나듯 집을 나와도 가족은 멀쩡히 잘먹고 잘산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대로 살고 싶었다' 라는 생각을 한 이들에게 공감의 마음을 보태주고 싶다. 쌓여가는 필사노트들에서 찾아낸 단어들을 벼르고 별러 자신만의 시를 쓸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ps. 오늘은 시 읽기에 딱 좋은 가을 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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