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댄서
타네히시 코츠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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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는 순간,

이야기가 우리를다음 세상으로 이어줄 것이다.

"자유로워지는 건 시작일 뿐이야.

자유롭게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지"

 

찬사가 가득한 표지였다. 00베스트셀러에 00선정도서에 00올해의책에 00수상작가 등 책표지에 써붙일 수 있는 모든 외부적 수식어가 다 붙어있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스티커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구병모 작가와 정희진 작가의 추천사였다. 판타지가 되었든 에세이가 되었든 결핍을 강요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온 작가들의 관심이었다. 미국에서 그토록 많은 명예를 획득했다는 이 소설은 흑인노예의 서사를 다룬 책이다. 어쩌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란 것은 늘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전해준 기억의 모음이곤 했다. 그리고 연결이었다.

지금 나는 기억의 경이로운 힘을 안다. 기억이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푸른 문을 열 수 있으며 우리를 산에서 평원으로, 또 푸르른 숲에서 눈이 두껍게 쌓인 들판으로 옮겨줄 수 있다는 것을. 땅을 옷가지처럼 접을 수 있다는 것을. 또 내가 그녀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 '깊은 그곳'으로 밀어넣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잊었지만 잊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이 이야기가, 이 인도가 산 자의 땅과 사라진 자의 땅 사이에 놓인 그 환상적인 다리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음을 안다. (p. 11)

하이람 워커. 19살의 흑인 노예. 미국 남부 버지니아의 농장주 와 흑인여성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두살 많은 (핏줄로는 형이지만) 작은 주인을 모시고 마차를 몰고 가던 중 강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마법의 분위기를 풍기며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마법인지 아닌지 마법이라면 어떤 마법인지를 깨달으려면 이 두꺼운 소설을 절반 이상은 읽고서야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

"하이람, 난 네가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는지 안다. 이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지만, 너는 몇몇 어른보다도 잘 해냈다. 하지만 세상은 곧 더욱 잔인해질 거야. "테나가 말했다.

"네, 아주머니"

"조심해야 할 거다. 얘야. 조심해야 해. 내 말을 기억하렴. 저들은 네 가족이 아니다. 말을 탄 그 백인 남자가 네 아버지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여기에 서 있는 내가 네 어머니라고 하는 편이 맞을 거다" (p. 36, 37)

흑인노예들이 사는 마을에서 살던 열한살 소년은 저택에서의 생활을 동경했다. 엄마가 팔려가고 나서 일부분 기억을 잃긴 했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말을 타고 관리하며 돌아다니던 주인에게 눈치껏 자신의 탁월함을 내보인 끝에 저택으로 노역의 일자리가 변경된다. 소년은 기뻤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곳은 저택의 지하 토끼굴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따. 그렇다고 들었다. 백인들은 지루해지면 야만인이 됐다. 그들이 상급자 놀음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도 잘 꾸며진, 인내심 강한 시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품위에 싫증을 느끼는 순간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이 새로운 게임을 선택하면 우리는 게임판 위의 말이 될 뿐이었다. 끔찍했다. 이렇게까지 고삐가 풀렸을 때 그들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허용할 만한 일에도 한게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 앨리스. 우리 집에는 검둥이 노래보다 좋은 게 있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p. 44)

하이람은 속으로 계속 주인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주인은 단 한번도 아들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데 말이다. 아들은 커녕 노예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네 주인님' 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자신은 워커 가문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믿음이 소년의 능력을 막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 모든 일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나는 진짜로 라클리스에 멸망을 가져다준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메이너드를 그가 속한 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터무니없는 예시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두려웠다. (p. 54)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메이너드의 어리석음은 불경스럽긴 해도 특별하지 않았다. 주인들은 물을 가져다 끓일 줄도 몰랐고, 말에 굴레를 씌울 줄도 몰랐으며, 우리가 없으면 속바지 끈 하나 매지 못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았다. 그래야만 했다. 우리에게는 게으름이 문자 그대로 죽음을 뜻했지만, 주인들에게는 게으르게 사는 것만 한 인생의 목표도 없었으니 말이다. (p. 55)

어린 소년의 눈으로 저택의 생활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더구나 자신이 스스로 그 가문의 핏줄이라고 생각하는 흑인소년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노예는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것을.

비록 토끼굴에 살긴 했지만 저택의 일을 하며 소년은 소년다운 꿈을 꾸었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재주를 선보인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을때 기대에 차 올랐다. 하지만 교육기간은 금세 끝났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통보받았다. 소년이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채워졌다고 판단되어졌다.

"이젠 네가 메이너드를 돌봐줄 때다. 내 시대는 영원하지 않을 테고, 메이너드에게는 훌륭한 하인이 필요하다. 너 같은 하인, 밭일이나 저택 일도 잘 알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하인 말이다. 나는 너를 지켜봤단다. 얘야. 그리고 네가 무엇도 잊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 하이람 네게는 한번만 말해주면 돼. 너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 (p. 57)

"우리 모두에게 닥칠 골칫거리가 너무 많다. 그리고 메이너드,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 아이는 준비되어 있지 않아. 그 애를 돌봐주거라. 얘야. 내 아들을 돌봐다오. 네 형을 돌봐주거라. 알았느냐?" (p. 66)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 하이람은 특별한 하인이 되었다. 주인보다 나은 능력을 가졌기에 모자란 주인을 보필해야 하는 그런 하인. 그 역할을 영광으로 알라고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런 능력을 가졌기에 경매에 넘겨져 팔리지 않고 저택에 남게해준 거라고 소명을 다하라고 주인은 말했다. 소년은 '감사합니다. 주인님' 이라고 대답했다. 소년의 형은 소년을 동생이라 생각지 않았다. 물론 소년의 아버지도 소년을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소년의 모든 감각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표현들을 했을 뿐이었다. 소년에겐 형이라 해놓고 그 형이란 아이에겐 하이람을 동생이라 하지 않았다.

내 노역의 논리가 아귀에 맞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라클리스를 한 뼘도 물려받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만 문제인 건 아니었다. 절대 내가 내 노동의 결실을 거둘 수 없다는 것만도 아니었다. 노역이란 자연스러운 욕구를 병 속에 영원히 밀봉해야 한다는 것, 그 욕구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상급자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이상으로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p. 72)

하이람은 천천히 깨닫기 시작한다. 어린나이에 화려한 생활들을 비록 누리진 못해도 가까이에서 동경하며 자라다보니 다른 노예들에 비해 더뎠던 것도 같다. 본인이 노예라는 것조차 잘 몰랐던 것도 같다. 소설에서는 농장주인이나 지주라는 표현이 아니라 상급자로, 노예가 아니라 노역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이 시대의 표현인지 작가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달라진 표현이 좀 더 거리감과 객관적 느낌을 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이므로 좀더 감정적인 표현이 적절할 것도 같은데 논픽션 작가로 오래 활동해서인지 작가의 표현법은 남다른 감이 있었다.

버지니아는 한 인종 전체가 사슬에 굴복하리라는 믿음이 건재한 곳이며, 바로 그 인종이 정확한 비율로 철을 주조하고, 계산하여 대리석을 조각해낼 능력이 있다 해도 그들을 계속 짐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순간 그녀를 팔아버리는 곳이었다. (p. 102)

상급자는 자기 '사람들'의 내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우리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았지만 우리를 알지는 못했다. 모른다는 것이 그들 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코앞에서 아이를 팔아버리려면 그 어머니를 가능한 한 얄팍하게 알아야 했다. 한 남자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거나 산 채로 그의 피부를 벗긴 뒤 소금물을 뿌리라는 지시를 내리려면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같이 그 사람을 느껴서는 안 됐다. 그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됐다.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없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이 나가지 않으니까. 그리고 손이 나가지 않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그 순간 노역자들은 상급자가 자신을 본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상급자 본인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토록 심오한 이해의 순간이 오면 상급자는 끝난 것이다. 더는 필요한 만큼 통치할 수 없을 테니까. (p. 119)

하이람은 성장했다. 피끓는 청춘이 되고 있었다. 사랑하고 싶은 여자도 생겼다. 탈출의 욕망이 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규칙 그것이 노예제를 유지하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노예는 인간이어서는 안되었다. 노예선의 구조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게 만든다. 버지니아 농장들은 노예선의 실상이 땅 위에서 실현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 소년이었다. 곧 스무살 이었지만 무모한 나이였다.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런 무모한 나이였다. 무모함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 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하이람의 무모함도 그랬다.

서로 전혀 달랐던 모든 동기가 사라져 생존의 동기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한 마리 동물로 전락했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됐다. (p. 198)

바닥의 바닥을 경험했다. 어둠의 어둠을 경험했다. 비천함이 비천함인지도 모를 만큼 인간성을 터럭하나 남기지 않고 버려야 했다. 죽음의 직전까지 몰려야 했다. 왜냐면...

"우리는 확인해야 했어"

"뭘 확인해야 했는데요?"

"너한테 정말 산티 베스의 힘, 인도의 힘이 있는지. 그런데 있더라. 우리는 그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했어. 그 힘이 너를 어디로 보내줄 지 계산했고,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어"

"어디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라플리스" (p. 218)

라플리스. 하이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일했던 곳. 노예로서의 삶이긴 하지만 영원히 기억될 이름 농장라플리스. 그곳은 노역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집이기도 했다.

하이람 할머니가 일으켰다는 기적, 탈출의 마법, 인도하는 힘. 하이람의 능력은 잠재되어 있었고 아직 능력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있긴 있었다. 뭔가가.

남부 농장들의 몰락기였다. 북부 공업이 성장하던 때였다. 언더그라운드 라는 지하조직이 생겨났다. 언더그라운드는 하이람의 능력을 주시했다. 하이람은 언더그라운드 라는 조직의 요원 훈련을 받게 된다. 그의 기억능력이 일단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그의 숨겨진 능력에 거는 기대도 있었다. 하이람은 새로운 환경을 배워야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떠야 했다.

버지니아에서 우리는 무법자들이었다. 무법자로 산다는 건 우리의 명예였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것이 악마적인 법의 기반이라 생각했고, 그 도덕을 넘어서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언더그라운드가 너무 강력했다. 북부에서는 '지하'를 의미하는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이 그 조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요원들인 기독교인이었다. 북부에서는 언더그라운드의 요원들이 무법자가 아니었다. (p. 265)

미국의 남북전쟁이 내세운 큰 명분이 노예해방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소설에서 남북전쟁 이전의 남북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신선했다. 종교적이지 않게 마음에 닿는 부분들이 좋았다. 사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에 반드시 종교적 명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므로 누구나 평등하다는 기초적인 생각이 그 생각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하이람이 겪는 혼란은 노예로 살았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자유롭게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나는 그 천막 사이를 걸어 다니다가 물오른 토론을 벌이는 대회 참가자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더 큰 천막들 안에서 임시 단상 위에 올라 제 신념을 설파하는 개혁의 연설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화려함을 좋아했고,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을 모아들이려고 우열을 다투는 듯했다. (p. 334)

나는 더 걸아갔다. 그러다 군중 앞에 멈춰 서서, 작업복을 입고 머리를 민 여자 두 명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영역에서 남자처럼 완전히 자유롭게 활약할 권리가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여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커졌다. 마침내 군중마저 그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나는 또다른 천막으로 이동하면서 그 약탈이라는 것이 다른 방면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천막에서는 백인 남자가 전통 의상을 입은 조용한 인디언 곁에 서서 자신이 보아온 엄청난 파괴 행위와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의 인간들이 토지를 명분으로 얼마나 사악한 일을 기꺼이 저지르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계속 나아간 끝에, 나는 이 나라의 공장에 대해 격분하는 남자 뒤에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들의 부모는 더 이상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 팔아버렸고, 아이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남자가 대표하는 자선단체가 구해주기 전까지 계속 노동을 해왔다.

더 멀리 가던 나는 이 주장이 노동조합 활동가의 다른 주장과 친척 관계임을 알게 됐는데, 그 활동가는 공장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공장주들에게서 박탈해 힘들게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자 관련된 주자잉 하나 더 들려왔다. 모든 공장을 아예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 사회 전체가 사문화되어야 하며, 남녀 모두 함께 일하고 모든 것을 공동 소유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새로운 존재 방식, 해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나를 침범했다. 겨우 1년 전만 해도 나는 그 모든 것을 거부했을 터다. 그러나 당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아버지의 책에서 본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본 터였다. 끝이 어디일까? 알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p. 335,336,337)

북부는 들끓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상들이 섞여 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흐름이 북부에서 남부로 흐르기 시작했다. 하이람의 관점도 자신만의 탈출에서 점점 더 확장되어지고 있었다.

여자와 아이, 노동, 토지, 가족, 부에 관한 여러 주장과 이념들. 노역을 돌이켜보면 버지니아라는 나의 옛 세계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악이 드러날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노예제도는 모든 투쟁의 근원이었다. 사람들은 공장이 아이들을 노예화한다고 했고, 임신이 여성의 신체를 노예화한다고 했으며, 럼주가 사람의 영혼을 노예화한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소용돌이치는 이념들 속에서, 이 비밀스러운 전쟁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버지니아의 노예 주인들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p. 345)

미국남북전쟁 후로 150여년이 흘렀다. 노예제도는 과연 없어졌는가?

세상이 새로 만들어졌을까? 아니 개선이라도 된 것일까? 법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고 개선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노예화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현재진행중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흑인노예서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애써 감추느라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요" 해리엇이 말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진정으로 노예가 된다는 뜻이죠. 잊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에요"

"기억을 위하여" 그녀가 말했다.

"친구여, 기억력은 마차이며 길이고 노예제도라는 저주에서 자유라는 은혜로 건너게 하는 교량입니다." (p. 370)

모세라 불리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탈출시키는 방법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이람의 특별함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람은 아직 '인도'할 능력이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은 기억하면서 정작 자신의 기억엔 구멍이 나 있었다. 하이람은 여전히 도망치는 중이었다.

노예제도는 그들을 수치스럽게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선량함에 대해 기본 감각을 노예제도가 침해했기 때문이다. 그 비열한 관행을 자행하는 그들의 친척들은 그들 자신도 얼마나 쉽게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상기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야만적인 동족을 경멸했지만, 어쨌든 동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증오심은 일종의 허영이며, 노예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증오였다. (p. 501)

소설이지만 다큐처럼 읽혀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이쪽저쪽의 입장을 골고루 헤아리고자 할때 특히 그랬다. 하이람은 기억력은 좋으나 그것이 지혜는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서 내내 하이람은 거의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없다. 이쪽의 입장도 이해하고 저쪽의 입장도 이해한다. 아니 이해햐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하이람의 생각들을 읽는 과정은 저자가 소설을 통해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객관성을 전달해주려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이람이 본인의 능력을 자각할 수록 하이람에게도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가는 하이람을 보면서 '자유'에 대해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해 복잡한 메세지를 전달받게 된다.

이 작품은 특히 공들여 번역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그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원작은 남부의 사투리와 노역자들의 말, 북부인의 말을 모두 살려 쓰고 있으나 그런 차이를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살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차이 때문에 작가가 쓴 몇 단어를 완전히 살려 옮기지 못한 점도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p. 550)

'옮긴이의 말' 에서 다시한번 번역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렇게 원작과 번역에서의 차이점을 알려주니 독자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번역자의 설명을 읽고서야 미국에서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찬사를 받았는지 수긍이 갔다. 그들의 언어로 읽는 그들의 이야기는 훨씬 깊이 눈이 아닌 마음에 새겨졌을 테니까.

<워터댄서>는 작가 타네히시 폴 코츠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을 읽으면서야 알았는데 마블 코믹스의 블랙 팬서 시리즈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작가라고 한다. 노예제도가 살아 있던 시절의 미국사와 흑인들의 생활에 관한 논픽션을 써서 독자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고, 특히 논픽션 작가로 활동했던 경험이 이 작품에 잘 녹아있다고 한다. 노예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노역자 the Tasked 라는 단어를 사용한 작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만화에서나마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선진세상을 만들어냈던 것은 작가가 썼다는 논픽션들에 대한 위로이자 꿈이 아니었을지...

<워터댄서> 는 묘한 소설이었다. 판타지라는 요소가 없진 않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마법이라는 요소는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처럼 느껴지게 함으로써 현실에 접목시키고 그간의 역사에서 사용되던 익숙한 단어들이 아니라 낯선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흑인노예에 대한 관점을 지금의 현실과 연결시켜주고 있는 듯 했다. 지주나 주인이 아니라 '상급자' 라는 표현은 구속력을 덜 가지는 존재로 느껴졌고 흑인이 아니라 '유색인' 이라는 표현은 흑백이라는 피부색의 차이를 덜 드러내게 했고 노예가 아니라 '노역자'라는 표현은 인격의 종속이 아닌 노동력의 구속이라는 의미를 전달해줌으로써 '인간성'의 가치를 유지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런 세심함으로 인해 작가의 메세지가 독자들에게 더욱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대를 잇는 역사라는 것이 결국 이야기의 연결이기에 이야기로 전달되고 이야기로 시작되는 마법의 힘에 걸고있는 저자의 희망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힘' 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해준 특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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