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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
고단한 시절의 복판을 통과 중인 우리들이 써 내려가는
가장 보통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
"나, 집을 나각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작고 아담한 사이즈에 산뜻하고 예쁜 표지 그리고 낯선 작가의 이름
표지에 마음이 끌리고 '필사' 라는 단어에 눈이 끌려서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고 읽고 나서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필사는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표면적으로는 못난이 글씨체 때문이었지만 손으로 직접 펜을 잡고 쓴다는 것의 노고를 늘상 버겁게 여기던 부담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팔사'라는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차례에 열거된 제목들을 보며 단편모음집이었나 했는데 읽다보니 서로 연결된 중장편 소설이었다. 단편이 아님에도 단편처럼 제목을 지어놓은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책을 직접 손에 쥐고 나서야 뒤표지에 적힌 구병모 작가의 추천사?를 발견했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 덧붙여 읽게 되는 구병모 작가의 글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반가웠으나 처음으로 평이하게 다가왔다.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했던 이의 글에 대해 낯선 작가의 소설 하나로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니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마도 현실공감 이라는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지...
문득문득 그 사람과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잊으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 떠오르는 거야 당연했고, 그때마다 그 사람이 몹시 보고 싶다는 걸 굳이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놀랍거나 새로울 것도 없었다. 서로에게는 늘 최선이었으므로 덜 사랑했다는 아쉬움도 없었다. (p. 9~10)
당연한 계절의 변화를 같이 바라보고, 느끼며, 이야기해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누구 때문이라고,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헤어진 이유를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p. 13, 14)
그럴 수 있을까? 일상에서 수시로 떠오르지만 그리워하는 건 아니고 최선을 다했기에 헤어짐도 무던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특별해진 존재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그럴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듯이 헤어진 이유도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품고 몇년을 지내다 다시 만나 이별을 나누면서도 여전히 그 마음은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시와 닮아 있어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속 화자는 늘 시집을 읽고 늘 필사를 하곤 했다.
필사 노트를 접어두고 다시 식탁 앞에 놓은 흰 종이를 내려다봤다. 잘 깎은 연필을 쥐었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 (p. 23)
나 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 바르게 산다고, 나 혼자 제대로 산다고 해서 변할리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분리수거를 철저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게 잘 참아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상황이었을 뿐이다. 내가 들인 노력에 적당한 대가를 받고 싶었다. 대가란 고생한다고, 수고한다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음이면 되었다. 말뿐이어도 좋으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p. 37~38)
늘상 하던 필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일상은 더욱 고단하게 다가온다. 매일매일이 똑같지만 매일매일 피로에 더께가 쌓여간다. 그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다. 다 비슷하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내손으로 부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마다 겹겹이 쌓인 두께만큼 화가 솟구친다. 말뿐이어도 좋겠다고? 아니다. 결국은 말만이라고 또다시 화를 내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반복의 가치를 알아챈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대로 자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흰 종이 앞에 앉아야 했다. 쓸 수 있든 아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 1초만이라도 흰 종이 앞에 앉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p. 41~42)
요즘 연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부러워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면도칼로 매일매일 연필을 깎아 필통에 가지런히 채워넣는 시간을 나는 은근 좋아했다.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고 예쁘게 깎을 수 있을까 고심하며 면도칼로 세심하게 나무를 깎고 심을 갈아내곤 했다. 그러다 샤프를 손에 쥐게 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연필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이젠 색색깔의 볼펜이 문구점에 갈때마다 한참동안 그 앞에 나를 머물게 하곤 한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연필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전자책과 소리책이 나와도 여전히 종이책이 가장 좋은 나로서는 연필로 필사를 하는 소설속 화자의 마음이 왠지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하루의 일과란 매일이 똑같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은 없었다. 다른 것들이란 주로 아이들에게 관한 것들이었고, 같은 건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몇 년 째 오로지 필사만 하는 중이었다. (p. 55)
부모의 기대를 받지 않은 나는 어떤 삶을 살든 부모에게 평가받지 않았다. 잘하라는 북돋움도, 못한다는 질책도 받지 않았다. 무엇이 되라는 강요도 없었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여도 상관이 없었다. (p. 59)
매일이 같지만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는 문장이 올해만큼 절실하게 와닿은 때가 있었던가... 일상이 일상이 아니게 된 매일을 보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하던 것을 못하고 산 시간이 한 해가 되어 간다... 베껴쓰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필사라는 행위 조차도 하지 못한 채...
필사하지 못하는 마음을 공감하면서도 아무여도 상관없이 살아온 것에 불뚝 샘이 나기도 했다. 늘 평가를 받고 응원없이 비난만 받고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보지도 못했는데 무엇이 되어야 했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에게는 무심하게 살 수 있었던 그 시간들 조차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까?
어쩐지 나는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제야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못 찾은 것도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 외면해왔던 것이다. (p. 61, 62)
보통의 삶... 적절한 학교와 적당한 수입, 때에 맞는 결혼 일상이라 불리는 생애 그런 것들을 보통의 삶이라 부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보통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적어도 그정도는 갖추기위해.
보통의 삶을 추구하지 않을 용기를 지녔으나 자신의 꿈을 알아채지 못하던 시간을 지탱해주었던 것은 어쩌면 필사의 밤... 그리고 가난한 사랑...
아무도 나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집안 일이란 집에 있는 사람이면 하는 일, 바깥 일이 없는 이가 하는 일이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가치로 환산할 의무조차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p. 104)
그 사람이 이해를 못하는 것도 이부분이었다. 동생의 짐을 왜 내가 짊어져야 하는지, 그 고집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다시 엄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안 되는 일이었다.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다.
"당신 꿈은? 당신 인생은? 그렇게 희생하면 나중에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요?"
"안 알아줘도 상관없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일이야"
"그 책임을 왜 당신이 져야 하는데요"
"나는 이미, 진작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p. 112, 113)
-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안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p. 117)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무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암묵적으로 합의된 '가족을 위한 공동희생구조'가 설정되어 있었다.
피지 못한 꽃일까? 나는 꽃보다는 나무가 되길 소망했다. 때론 풀이 되길 소망했다. 하지만 그 나무와 풀에 꽃이 피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차피 피우지 못할 꽃이라면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소설 속 화자에게는 '피우지 못한 꽃'이라 말해주는 아버지가 있었다. 내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말이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전화로 속에 담았던 말을 무심해 뱉어주었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것을 알 수 없던 것처럼.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지 못한 꽃, 아직 발화하지 못한 꽃, 아직 제대로 맺히지 못한 꽃, 내가 꽃이라면 한 번은 피워내고 싶었다. (p. 151)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 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p. 152)
부모자식도 형제자매도 가까이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독립되지 않은 '우리' 는 서로에게 족쇄가 되기 쉽다. 각각의 나 이자 때론 우리 가 되려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가족도 가끔 보아야 반가운 법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듯이 매일보는 가족도 지치기 마련이다. 냉정하다고? 이상하다고? 반박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방' 은 누구나 꿈꾸는 그런 공간 아닐까? 나만 그런가? 그렇다해도 별수 없다. 나는 그렇다.
"나, 집을 나가고 싶어.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어" (p. 157)
"철딱서니 없기는, 네 나이가 몇인데 이제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맞는 거냐? 하필 이런 때에?" (p. 158)
"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이대로 맨날 밥이나 빨래나 하고 살라는 소리야!" (p. 159)
"생색 좀 그만 내! 이 집에서 이 악물지 않은 사람이 있기나 하니? 야, 말은 똑바로 하자. 누가 널 억지로 붙들어 앉히기라도 했니? 네가 바보 같으니까 주저앉았지. 네가 아이들 맡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던 거지, 누가 먼저 너에게 해달라고 안 했어! 네가 한 선택이면 끝까지 책임을 지든가, 남 탓을 하지 말든가, 아님 혼자 고생한 척을 하지 말든가, 하나만 해, 하나만!" (p. 160)
가족이라 더 잔인한 말도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것일까? 가족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거니 했다면 큰 오산이다. 가족이라서 더 몰라주는 법이다. 예의고뭐고 차릴 필요없이 막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인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것은 없다. 내맘같은 맘도 없다. 바보가 되거나 바보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사실은 긴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건 벌이였다고, 방이었으며, 다시 시를 쓰는 일이었다. (p. 163)
백년도 훨씬 더 전에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은 현대의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꿈이고 로망이다.
그때보다 지금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나마 최저시급의 아르바이트라도 평등하게 할 수 있고 비좁고 빛도 안드는 고시원일지라도 임시적 방을 얻을 수 있으며 읽고 쓰고 배우는 것에 대해 문제삼는 외부적 규제는 없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나를 향해 건재하다고 알리는 몸짓들이 어쩐지 가슴을 저미게 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p. 170)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p. 171)
어딘가에서의 커다란 사건사고 소식에 세상이 곧 무너질것처럼 위태로워 보여도 막상 세상은 변한것 없이 잘도 굴러가듯이 내가 없으면 큰일날것 같은 가족내에서의 나의 빈자리를 아쉬워할 거라는 생각도 착각일 경우가 많다. 어느 한곳이 무너져 내려도 세상은 건재하고 내가 빈몸으로 쫓겨나듯 집을 나와도 가족은 멀쩡히 잘먹고 잘산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대로 살고 싶었다' 라는 생각을 한 이들에게 공감의 마음을 보태주고 싶다. 쌓여가는 필사노트들에서 찾아낸 단어들을 벼르고 별러 자신만의 시를 쓸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ps. 오늘은 시 읽기에 딱 좋은 가을 날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