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미안의 네 딸들 컬러링북 우리가 사랑했던 순정만화 시리즈
신일숙 지음 / 용감한까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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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을 떠올렸을때 가장 좋았던 시간을 꼽아보라면 나는 주저없이 순정만화를 읽던 그 시간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이돌이나 유명스타에 빠져본 적은 없어도 순정만화 포스터로 벽을 도배하고 싶을만큼 순정만화책들에 포옥 빠져들곤 했었다.

 

 

강경옥, 김혜린, 이미라, 이은혜, 원수연, 천계영, 황미나, 신일숙... 그 어떤 베스트셀러 작가들보다도 그 어떤 고전작가들보다도 내게 의미있던 이름들... 댕기, 화이트 같은 순정만화 잡지가 발행되었을때 매달 손꼽아기다리던 시간들은 '연재'의 설레임을 만끽할 수 있던 순간들이었다.

 

 

당시 내게 순정만화의 세계를 알려준 친구가 가장 유명한 만화가라기에 보았던 황미나의 작품들, SF소설을 좋아했던 취향은 강경옥 만화를 베스트로 생각했던 그때부터 이미 시작됐던것 같고, 김혜린만화의 처절한 비련이 좋아서 남들이 다 우습게 보던 드라마나 영화화된 작품들도 혼자 설레하며 봤었고, 학원물 로맨스 특유의 설레임을 만끽할 수 있었던 이미라, 이은혜, 원수연, 천계영의 작품들도 좋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최고였던 작품은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이었다. 단행본으로 나오던 책이 뒤로 갈수록 후속편이 너무 안나와서 하교길레 만화방에 들려 24권 나왔어요? 하고 물어보며 안 나왔다는 대답에 아쉬워했던 그 시절... 마지막권이 몇년만에 나온 27권이었던가 28권이었던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마지막권을 읽었던 때는 어른이 되어서였다. 마지막권을 읽으며 몰아쳐서 1권부터 다시 정주행을 해봐도 참 좋았더랬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우연히 10권세트로 소장본으로 나왔을때 보자마자 당연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만화방은 없어지고 만화카페는 생기기 전의 공백기에 헌책으로라도 그때 그시절의 순정만화책들을 모으던 때였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지금 컬러링북으로 만난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은 역시나 또 반가웠다.

 

 

흑백으로만 보던 그림을 단 몇장만이라도 컬러로 보는 것도 좋았고, 작은 사이즈의 책으로 보던 그림을 얇은 책 한권으로라도 큰 사이즈로 보는 것도 좋았다. 컬러링북이니 색칠을 하는 재미를 느껴야하겠지만, 솔직히 아직은 그럴 수가 없다. 고스란히 모셔두고 보고또봐도 좋을 뿐이다. ㅎㅎ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했던 만화들은 지금의 독서취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SF 아니면 역사물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며칠만이라도 나만의 휴가를 갖게 된다면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순정만화들을 쌓아놓고 정주행하고 싶다. 만화책은 역시 쌓아놓고 보는 것이 묘미인지라 ㅎㅎㅎ

 

 

레 마누, 사와르다, 아스파샤 그리고 샤르휘나 네 자매가 펼여보이는 운명과 사랑의 이야기는 늘 가슴설레며 읽게 되곤 했었다. 그 설레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이 책이 너무나 반가웠다. 아무래도 조만간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 만화책 속으로 빠지게 될것 같다. 그러고 나면 소중한 이 컬러링북에 한칸한칸 색을 칠하며 지친 일상을 잊고 설레임에 몰입하는 순간들을 선물받게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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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왜? - 반일과 혐한의 평행선에서, 일본인 서울 특파원의 한일관계 리포트
사와다 가쓰미 지음, 정태섭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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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아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 사와다 기자의 치우침 없는 한일관계 진단과 한일 양 사회의 인식 차이 분석

 

 

한일관계는 참 어렵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라고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냥 멀고 먼 나라 일본이다. 정치적 이슈에 따라 반일감정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그럴때마다 혐한의 일본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갈등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쪽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분야에 있어서 일본인이 저자인 책을 신뢰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한일관계에 대한 책은 일본인의 시각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치우침 없이 쓴다는 것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건데... 이 책은 얼마나 객관적으로 썼을지 궁금했다.

일단, 저자의 이력은 한국에서의 시간이 꽤 길고 다양하게 있었으므로 기본 소양은 믿을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첫 장을 열었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은 일본인에게 한국의 현재를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점이다. 한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도는 더욱 높아 보였다. 일본인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일본인이 일아야 할 한국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자기가 아는 한국의 이미지에 근거해 혐한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70년대나 1980년대에 한국 주재원을 지냈거나 한국을 상대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한국을 안다고 믿는 사람조차 있다. 한국어를 할 줄 모르고 한국에 관한 지식을 업데이트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한국 이미지와 맞지 않는 최근의 한국에 대해 화를 낸다. 30년전, 40년전의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21세기 대한민국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정말로 일본에서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말할 때에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p. 7)

집필할 때 상정한 독자는 혐한 시위 같은 헤이트스피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의 대일 자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자신이 혐한파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 불편한 심정은 갖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재 일본 사회에서 다수일 것이다. (p. 11)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많아 보인다. 일본 내에 혐한 감정이 주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일본인들 대부분이 한국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시작부터 의아할 따름이었다. 자기들이 한짓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수 있지? 싶은 한국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태도다. 그런 일본 본토의 왜곡된 인식을 일본기자가 알려주는 내용들은 대체로 고개 끄덕이며 읽게 되면서도 가끔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또한 일본인의 눈으로 보는 한국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것이 '반일시위'라면 일본에 대한 분노의 표적이 되는 물리적인 대상이 꼭 필요할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그 무엇'앞에서 시위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것은 거기에 없었다. (p. 18)

이 책은 많은 일본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을 설명하고, 한일관계에 둘러싼 의문에 답하고자 한다. (p. 23)

소녀상 옆에서 해온 수요집회는 꽤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활동이다. 하지만 이제 그 소녀상 앞에 일본대사관은 없다. 철거되고 펜스가 쳐져 있을뿐 다른 건물에 입주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집회는 여전히 그 텅빈 공간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그 모습 자체가 일본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상징성' 에 대한 양 국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당연시 보아오던 활동들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인식의 치이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주로 다루는 내용은 일본 시각에서 보면 상궤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반일', 정곡을 찌르는 점도 있지만 자료의 일방적인 해석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눈에 띈다. (p. 37)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결국 문재인 정권에 의해 구석으로 몰린 보수 세력, 그중에서도 현실정치에서 대항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약소 그룹의 반격이다. (p. 39) 일본에서의 경이적인 매출은 '한국인에 의한 반일 비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이 많음을 방증한다. (p. 40)

한일 양국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나름 충격적이었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 대해 저자가 알려주는 내용은 중립적으로 보이면서도 아쉬운 부분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책이 양 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 자체가 서로에 대한 무지가 현실에 드러난 셈이 아닐까.

적폐 청산은 일본과 관련된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폐 청산의 움직임을 추동한 것은 한국에서 최초로 탄핵재판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시켰다는 고양감이었다. (p. 58) 전제가 되는 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권력을 사물화(私物화)한 세력이 나라를 멸망시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케 했는데 그 세력은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친일파'가 되어서 이권을 탐식했고,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후에는 '반공'이라는 가면을 쓰고 독재세력이 되었다. 그러한 세력을 제대로 청산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다. (p. 59)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는 한국의 현대화과정은 신선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서술되는 구나 싶고... 저자는 이러한 한국의 사회변화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랑케식 역사서술이랄까. 양반사회가 없었고 민주화혁명이 없었던 일본의 사회적 인식은 한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인식에 있어서 일본인의 랑케식 이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일본이 우격다짐으로 한국을 제압하려는 것이라는 것은 청와대나 정부부처들, 외교전문가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p. 81) 나도 '우격다짐' 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이 '우격다짐'론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험한 엇갈림이 있다. 나를 포함한 일본의 전문가들은 '총리 관저는 한국의 국력을 잘못 보고 있다. 한국이 약소국이었던 옛날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간단하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며 걱정했다. 즉 한국측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에 따라잡힐까봐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대응해야 한다'는 감각과는 좀 다르다. (p. 82)

책에 자주 언급되는 내용인데 일본의 기성세대들은 한국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한국은 가난하고 못살때 자신들이 도와줘야만 했던 나라일 뿐이다. 그런 한국이 자신들과 감히 대등하게 굴려고 하는 것올 보면 화가 난다는 것이다.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일본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양쪽 다 일종의 자뻑이다.

실제로는 진보적인 일본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국회의원조차 '많은 지지자가 한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라고 하는 것이 일본 사회의 현실이다. '혐한을 주도하는 아베 정권만 없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관측은 한국측의 희망에 불과하다. (p. 87) 'NO아베'를 부르짖는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의 '한국 피로'라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아베를 비판하는 일본인들이 아베 정권의 모든 정책에 반대한다고 믿는다. (p. 88) 더욱이 골치아픈 것은 한국과 일본의 법에 대한 의식 차이가 충돌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법률이나 약속을 지키는 것' 이 중시되는데 한국에서는 '법률이나 약속이 옳은지 아닌지'를 중시한다. 옳지 않다면 '바로 잡아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p. 89)

'한국 피로'란 일본 관련 이슈마다 식민지배 문제를 제기하고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에 대해 일본인인 느끼는 피로감을 이르는 용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피로감을 쌓여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데... 그들은 독일인들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그저 지켜야 하는 것일뿐인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나와 같은 궁금증 자체가 생각나지 않는 것일까.

일본인들이 정대협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왔음을 깨달았다. (p. 98)

일본내에서는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정대협의 활동들이 의외로 한국 국내에서는 이슈가 되지 않는 것을 여러번 보면서 느꼈다는 저자의 깨달음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우리가 지켜드려야 할 존재를 우리는 잘 지켜드리고 있는가...

1970년을 보면, 한국의 무역상대국으로서의 비중은 일본이 37%, 미국이 34.8%로 합치면 70%가 넘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1996년에는 30%가 되었고, 2004년에는 20%대, 2011년에는 마침내 10%대가 되었다. 2018년에 일본은 7.5%, 미국은 11.5%로 합쳐서 19%다. (p. 132)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경제성장을 알게 해주려고 설명한 수치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읽는 입장에서는 안심이 되는 수치였다. 다행이다....

일본 중장년 세대 중에는 3차 한류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p. 184) 그러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느끼는 것은 최근의 한국에 대한 '용서하기 어렵다' '건방지다' 라는 감정이다. 그 밑바닥에는 일본이 적어도 국교정상화 이후에는 한국에 대해 배려를 해왔고, 한국 경제 발전을 도왔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렇게 쌓아올린 한일관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건방지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p. 185)

생소하다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이 도와줬으니까 감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는 한국의 반일정서가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시각을 보면서 그들의 역사인식은 무엇인가 라는 의구심이 자꾸만 쌓여가지만 이 책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책이지 역사서가 아니기에 역사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은 언급되지 않는다.

남자는 정년퇴직 후 우연힌 혐한적인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그 후 그 블로그를 운영하는 인물을 '보수우익의 거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신자'로서 블로그의 지시대로 징계청구 보내기를 계속했다.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일본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고양감도 있었다.' 남성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많았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거래처 등이 65세를 넘어서 (일을 그만두었더니)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사회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소외감도 있었다. 그러나 (블로그에 따르는 행동을 함으로써) 아직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새로이 자기승인을 받은 듯한 느낌에 그만 선을 넘은 것 같다' 고 회고했다. (p. 190)

장년층의 사회활동이 어떻게 극우익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면서 지금의 우리사회와 너무나 똑같음에 놀랐다. 기성세대의 사회참여 방향성에 대한 문제는 인구문제와 노령화와 연결되어 있다. 양국의 과거문제를 떠나서 장년층과 노년층의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한 이런 활동은 계속되지 않을까...

성공이든 실패든 가까운 이웃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은 자기 이익이 된다.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이용할 수 있다는 한일 양국의 '공통이익'은 크다고 할 수 있다. (p. 217)

지리적 위치 때문에라도 일본은 영원히 이웃나라다. 요즘은 아파트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세상이기에 하물며 이웃나라라고 해서 뭔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꼬여있는 관계때문에 왜곡된 인식이 더욱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는 '올바름'으로 상대를 압도하기 위한 논리 구축을 의미하는 '논리 개발'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된다. 그런 사회 분위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습관이 없는 일본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숨이 막히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p. 228)

나름 한국생활을 오래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전문가라는 저자조차도 여전히 한국의 문화는 다 이해되지 않다고 한다. 하물며 일반 일본국민들은 어떻겠는가?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사고방식만 고수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시각과 사고방식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이렇게나 다르구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읽어봄직한 책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왜 그렇게까지 반일정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유지되는 한 한계는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그들은 왜 독일처럼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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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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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시작과 종말, 스러져가는 사랑에 관한 기록

오직 부부만이 살면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농염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 노르웨이판 '부부의 세계'

 

 

'부부의 세계' 라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으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륜에 관련된 드라마라고 알고 있었기에 이 소설의 홍보문구에서 대충 짐작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딱히 그런 종류의 플롯에 관심을 둔 적은 없었지만 노르웨이 작가의 소설이 어떨지 궁금했다.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몇편 읽은 적 있었는데 북유럽 소설의 분위기가 은근 우리정서와 잘 맞는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라는 이 작품은 '부부의 세계'이긴 한데 뒤바뀐 입장에서 느껴지는 독특함이 신선했다.

존과 티미는 아들 형제를 키우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부부생활을 하는 행복한 부부다.

함께 휴일을 보내고 생일을 축하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밤이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고 아침이면 서로를 깨워주면서 그저 버티는 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고 애썼다. 서로를 부드럽게 혹은 탐욕스럽게 만지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친밀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하면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끝없이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사실 그것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p. 53)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한 부부였었다. 과거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남편의 기억으로 서술되는 끝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부라는 관계가 끝나기까지 어떤 과정들이 있었는지 세밀하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마음일기처럼 읽히기도 하는 소설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저 부부 사이에 주고받는 농담의 대상,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남자를 더는 별것도 아닌 대상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지고 나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p. 59)

나는 그녀에게 장갑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내는 그때 그냥 자기가 샀다고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괜히 숨겼다고 나중에 후회하듯이 말했다. (p. 61)

"당신 오늘 장갑맨이라 데이트할 거야? 아니면 나랑 재미있게 놀까?" 내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충격과 짜릿한 흥분을 느꼈고 나 역시도 똑같은 걸 느꼈다. 워낙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고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이라서 어떤 것이든 공유할 수 잇었다. 아니, 공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p. 62)

모든 틀어진 관계를 돌이켜보면 다 그렇듯이 처음부터 문제가 됐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알게 됐고 집에서도 거리낌없이 대화속에 등장시킬 수 있었떤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워지고 그러다가 숨기고 싶어진다. 그땐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땐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런 단발적이고 공개적인 만남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사랑에 빠질 상대를 마주칠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유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나의 얼굴을 살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평소 내가 동경했던 외모나 태도, 자신감, 장난기가 느껴지는 사람 말이다. 드물지만 실제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이미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그 상대 역시 옆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다시 새로운 관계로 옮겨가게 된다. 물론 그런 단발성 만남은 대부분 아무 소득을 올리지 못한 채로 잊히게 마련이다. 사랑할 대상은 어디서든 마주치게 마련이지만 실제 인연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p. 65)

누군가의 외도에 대해 그 아픔과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사실 이 부부의 시작은 처음부터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었던 상태에서 만났고 급작스럽게 빠져들었다. 어쩌면 시작이 이러했기에 누군가에겐 불안감이 누군가에겐 호기심어린 흥분이 시작부터 내재되어 있던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들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랜 예행연습 끝에 그녀와의 특별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p. 72)

누군가에겐 사랑이 누군가에겐 불륜이 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멀고먼 나라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깨트리는 사랑은 순수하다고 볼수는 없지 않나. 비록 그 두사람에게는 이제야 만난 진정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젊은 부부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굳이 알고 싶다면 그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이 엄마와 나는 너무 달랐고 또 너무 똑 닮아 있었다. 게다가 너무 가까운 사이인 동시에 충분히 가깝지 못했다. 나 자신과 상대, 서로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고 서로에게 지나치게 예민했다. (p. 79)

낯선 젊은 여자와 팔짱을 끼고 딸의 유모차를 밀고 있다가 아내에게 그 모습을 들킨 후 이혼하자는 남편이 하는 말치고는 뻔뻔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전부인도 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 하지만 그렇게 듣고 싶지 않다면 나도 이쯤에서 포기할게.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 얘기는 해야겠어. 언젠가 당신도 나처럼 똑같이 버림받기를 기도할게. 나를 무참히 버리고 떠난 것처럼 당신도 똑같이 버림받기를 내 온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할 거야" (p. 80)

첫번째 결혼을 본인이 망가뜨리고 나서 선택한 두번째 결혼생활이 더없이 만족스러울수록 본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쿨한척 아내의 사회생활을 응원해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 부부의 생활은 시작 뿐만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일반적이지 않다. 역지사지의 관점이 여러번 왔다갔게 하게 되는 이런 점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이다.

아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아이들과 나는 항상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돌아오는 집이라는 공간은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 삶의 연장선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이들과 내가 목을 빼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나였고 아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결벽증 때문에 온 집 안을 쓸고 닦고 말끔히 정리해 놓는 것도 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집에서 일하면서, 아내에 대한 나의 집착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혼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를 붙잡고 온종일 집에서 뭘했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떠들어댔고, 전날 아내나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곱씹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티미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내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내가 했던 일이나 생각 하나까지 모두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마도 티미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p. 87)

뭔가 입장이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은가?

존은 프리랜서 작가로 집에서 일하다 보니 아이들케어와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활발하지 않은 성격에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티미는 성취욕이 강한 만큼 직장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본인의 관리도 철저해서 다양한 운동과 취미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만큼 인간관계에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이 부부의 생활에 한 남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저 추문 속 주인공이었고, 한낱 핑크빛 연애 감정에 빠져서 서로의 가족과 아이, 그리고 연인이나 아내를 완전히 망가뜨린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서서히 괜찮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 둘의 사랑이 인생에서 딱 한 번 찾아오는 유일한 사랑으로 보일 날이 올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서로에게 완벽한 반쪽,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럴 것이다. 그 남자나 그 여자가 나의 하나뿐인 반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수십 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우리는 지금과 또 다른 삶, 또 다른 상대가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풍족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서로 함께하기 위해서 어렵게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동의했으며, 이전 상대들에게 했던 끔찍한 것을 서로에게는 절대 할 수 없었다. (p. 93)

시간은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독이 될때도 있는 법이다. 초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 마음이던가? 특히나 사랑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뜨거움이 따듯해지고 따듯함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체온처럼 그냥 늘 있는 그런 온기가 되었을때 어느날 갑자기 불꽃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마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우리 두 사람도 끝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게 된다면 당신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누구랑?"

"나 말고 다른 남자겠지. 당신이 처음 만나는 누군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야?"

"아니, 절대로. 하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거야"

"말도 안 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대체 무슨 의미겠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맞는 거잖아.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이 더 행복하다고 해도, 나는 예전과 똑같이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당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의 그 결정을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당신을 지지할거야" (p. 107)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랑이 무슨 의미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겠다고? 아내에게 불꽃튀는 남자가 생겼을때 아내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남자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자신이 했던 말도 아내가 보였던 반응도 곱씹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구석까지 밀어붙이고 아내의 마음을 최대한 상상해보면서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부부생활에 대해 이 남자가 느끼는 감정은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럽다. 읽다보면 자꾸 까먹게 되는데, 이런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이는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하찮다'라는 단어를 기왕 사용했으니 계속 사용할 작정이었다. 너무나 하찮은 인간으로 완전히 뒷전에 놓인 느낌이 들었다고도 따져 물었다. 그 단어 하나에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온갖 문제들이 모두 집약되어 있었다. (p. 189)

사랑하다의 반대말은 미워하다가 아니라 하찮아지다가 아닐까. 부부 중 한 사람의 외도에 대해 그 문제 자체를 물고뜯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다른 한 사람이 하찮은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커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섬세한 감정변화와 농염한 부부생활을 보여주는 이 소설이 '결혼의 연대기' 라는 제목을 갖게 된 것은 '사랑' 의 문제를 '결혼'의 관점에서 보게 하려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은 끝났어도 결혼은 끝나지 않을수도 있기에 일단 결혼으로 묶인 두 사람의 연대기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쓰여지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장이 '열기를 잃는 것' 으로 끝난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와 어떤 미래를 선택했을지에 대한 생각은 읽는이마다 다를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소설에 대해 이런 설정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적어도 아직은?! 괜찮은 관계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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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한 클래식 이야기
김수연 지음 / 가디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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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알고 싶다면 바로 이 책!

세계 클래식 거장들의 열전으로 시작하는 FUN한 클래식 입문서!

 

 

드라마나 영화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시간에 쫓겨 살다보니 챙겨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다 최근에 우연히 몇장면 보고나서 마음이 끌려 오랜만에 정주행한 드라마가 있었으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였다. 언제부턴가 드라마도 영화도 빠르고 화려하게 전개되는 것이 트렌드인가 싶었는데 이 드라마는 굉장히 느린 템포로 굉장히 순수하게 전개되는 것이 색달랐다. 어찌보면 답답하달 수도 있을 드라마였지만 묘한 떨림이 전해주는 남다른 몰입감이 참 좋았더랬다. 드라마의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주인공들은 음대생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음악과 청춘과 사랑 이야기인데 클래식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돋보였다. 이 드라마를 보고나니 클래식을 FUN하게 이야기해준다는 이 책에 안 끌릴 수가 없었다. ㅎ

드라마 여주인공이 연주하던 악기가 바이올린 이었는데 저자가 현직 바이올리니스트라서 책내용에 더 관심이 갔다. 클래식 연주자들하면 피아니스트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평소에도 연주곡 하면 피아노곡을 틀어놓곤 했었는데 드라마덕분에 바이올린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이 책은 클래식 전반에 대한 책이지만 저자의 직업상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일화들이 종종 등장해서 반가웠다.

역사를 쉽게 접근하는 방법은 옛이야기읽듯이 그래서 소설처럼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클래식이란 음악에서 고전에 속하므로 음악의 옛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읽게 되는 이 책은 유명한 음악가들의 에피소드들로 내용이 전개된다. 이야기란 역시 주인공이 있어야 더 흥미진진한 법이니 음악가들의 삶의 몇 장면을 살펴보는 이야기들은 음악이야기가 아닌듯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그 음악가의 음악을 궁금해지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음악이야기이기도 했다.

역시 시작은 바이올린연주곡의 작곡가였다. 바로 '사계' 의 비발디. 베네치아의 빨간머리 신부님이었던 비발디부터 이탈리아의 독립을 열망하던 시대분위기를 대변해준듯한 합창곡으로 유명한 베르디, 바이올린 전공자라면 반드시 연주해야 하는 작품을 남긴 파가니니, 영화로 인해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실제로는 명성과 인품 모두 훌륭했던 살리에리, 클래식같은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성공한 음악가였으나 취미였던 요리를 위해 작곡가의 삶을 그만 둔 로시니등의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 들과

독일국가의 멜로디를 작곡했으나 사후 두개골이 유럽을 떠돌게 됐던 하이든, 현대까지 가문대대로 음악가의 명문가로 이어지고 있지만 사후 80여년이 지난 후 멘델스존에 의해서야 재조명을 받았던 바흐, 여성으로 음악의 길을 걷기 힘들때 태어났지만 뚜렷한 음악적 족적을 남긴 힐데가르트, 남동생 못지않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 음악못지 않게 사랑으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슈만, 커피의 완벽함을 추구했던 베토벤등의 독일 출신 작곡가 들을 보면서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나라들에서 음악또한 큰 발전이 있었구나 싶어서 묘한 공통점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최초의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는 모차르트와 평생 베토벤을 롤모델로 삼았고 사망후 베토벤의 묘지옆에 나란히 묻힌 슈베르트가 오스트리아를 대표한다면 그밖의 유럽 여러 나라출신의 작곡가들도 두루 알수 있었는데,

당시 '천재 음악가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는데, 우리 폴란드에도 천재가 태어났다' 라며 전국민적 자랑이 된 폴란드의 쇼팽,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의 작곡가가 된 헨델,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신앙을 음악에 담아낸 체코의 비버, 이름은 생소하지만 작품은 유명한 프랑스의 비제, 죽을때까지 결국 결혼허락을 받지 못한 헝가리의 리스트, 노르웨이의 민족음악가 그리그, 스페인의 파야, 영국의 본 윌리엄스, 기차에 열광했다는 체코의 드보르작 등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음악과 관계없이 재미있게 읽혔다.

책의 뒤편에서는 '클래식 바로 알기' 라는 장을 통해 클래식의 다양한 상식들을 배울 수 있었는데,

중세시대의 수도자인 귀도 다레초가 만들어낸 계이름, 마틴 루터가 만들어낸 찬송가, 메디치 가문이 탄생시킨 오페라, 최초로 지휘봉을 사용했던 멘델스존의 이야기들로 알게 되는 클래식의 역사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도 유익했던 것은 '악보에 표기된 용어'를 설명해준 부분이었다. 빠르기, 셈여림, 나타냄말의 의미들과 악곡이름이 왜 그렇게 긴 지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나타냄말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옮겨놓아본다.

아마빌레- 사랑스럽게, 돌체- 부드럽게, 칸타빌레- 노래하듯이, 브릴란테- 화려하게, 에스프레시보- 표정있게, 에너지코- 힘차게, 트란퀼로- 차분하게, 고요하게, 콘푸오코- 열정적으로

각 에피소드의 첫 페이지에 쓰여진 요약과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클래식곡명 및 QR코드로 연결되는 저자의 유투브 채널영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 했다.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었는데,

"Well, if must be so." 직역하면 "뭐, 이래야 한다면"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뜻하고 원하는 것을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하기 싫고 어려운 일들도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잘 대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그가 남긴 유언을 빌려서 "뭐 한번 해보자고요!" 쿨하게 (p. 158)

클래식이 고급지다거나 어려울것 같아서 꺼려졌다면 그리그의 유언을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다. 클래식은 ~해야 한다 혹은 ~일것 같다 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가볍고 재미있게 그야말로 Fun하게 다가가 보자. 뭐 어때 내가 듣기 좋으면 그만이지 하면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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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 진실보다 강한 탈진실의 힘
제임스 볼 지음, 김선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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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말이 아닌 개소리를 믿고 싶은 당신의 마음이다!"

팩트체크조차 할 수 없는 가짜뉴스가

어떻게 사람을 유혹하는지 밝혀낸 문제작

 

세계를 뒤덮은 정치와 언론의 개소리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

"당신이 오늘 보고 들은 것은 진실입니까?"

 

 

TRUTH 진실과 LIE 거짓으로 구분되던 시대는 지났다. 명확하게 구분할수 없게된 지금은 POST-TRUTH 탈진실의 시대다.

진실이라고도 할수없고 거짓이라고도 할수없는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속에 살면서 우리가 하루종일 보고 들은 정보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그 정보들중에서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개소리를 얼마나 구분할 수 있는가?

친구가 전송한 글을 보고 곧바로 관련 기사나 논문을 검색하거나 현장에 직접 찾아가기에는 우리가 너무 바쁩니다. (p. 5) 개소리는 적절한 순간에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분노할 만한 타이밍에,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이벤트가 다가올 때입니다. 선거철이 대표적입니다. 타격 지점을 정확하게 공략한 정교한 허위 정보의 사례입니다. (p. 9) 저자는 기성 언론의 관행과 한계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p. 18)

추천사를 쓴 <팩트체크>의 이가혁기자는 이 책을 '칼을 들고 총에 맞선 이들을 위한 책' 이라고 표현한다. 칼vs총 이라니 맞붙는다면 한쪽이 즉시 사망이리라는 것이 99%로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의 가능성을 버릴 순 없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이 '희망'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엘리트를 향한 분노와 무너진 미디어 신뢰도, 결과가 뻔한 투표라는 전문가들 사이에 만연한 (그리고 잘못된) 믿음, 그리고 앞으로 이 책에서 개소리bullshit라고 부를,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가짜뉴스로 대표되는 2016년의 두 가지 투표는 세계를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재편했다. (p. 25) 전에는 보수와 진보의 열성적 지지자들이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이야기를 놓고 해석에의 의견차를 보였다면, 지금은 상대 진영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보고, 그들의 이야기가 편향됐으며 사실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여긴다. 또 서로가 유난히 가짜뉴스에 휩쓸린다고 본다. (p. 32)

나는 개소리가 포퓰리즘적 분위기와 동시에 발흥한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를 부채질한다. 진실에 무심한 태도는 서로 상충하는 담론을 검증할 합의된 방법을 없앤다. 결국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악의적이고 부패했으며 거짓말재잉라고 부를 뿐이다. (p. 37)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주장의 출처와 증거를 찾으려고 애썼다. 이와 관련해 할 말이 있는 독자는 트위터로 연락하길 바란다. 나의 트위터 계정은 @jamesbuk 이다. (p. 39)

2016년의 두 가지 투표,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당선을 말한다. 저자는 영국의 언론인으로 이 두 선거를 예로 들어 거침없이 개소리들을 공격한다. 그 거침없음에 읽으면서 어안이 벙벙해지곤 했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이사람 괜찮은걸까;;;

먼나라 이야기로만 넘길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와도 너무나 닮아있던 사례들이었기에 저절로 비교되면서 저자의 패기넘치는 표현들 덕분에 읽는 사람으로서는 후련해지는 부분들도 많았다. 저자는 개소리를 이용해 누가 어떻게 우리를 조종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개소리가 어떻게 진실을 압도하고 있는지 보여주며 우리가 왜 개소리의 유혹에 넘어가는지 파악해봄으로써 진실을 수호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을 모색해보고 있다.

가장 의아한 점은 대선 막바지에 넘쳐난, 트럼프에게 호의적인 가짜뉴스 상당수가 발칸반도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벨레스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p. 45) 벨레스 주민의 태도는, 범죄자와 자금 세탁자를 비롯해 전세계 초갑부와 회사들이 조세회피지로 이용하는 나라의 현지인이 보이는 태도와 놀랍도록 닮았다. (p. 47)

정치인과 국가가 가짜뉴스를 퍼뜨린다는 사실을 논할 때,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국가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따로 있다. 다들 알면서도 함구하는 문제의 주인공은 바로 러시아다. (p. 54)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주체들을 분석해보면 크게 두 가지의 동기가 있다. 돈 이거나 권력이다. 클릭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무시할 수 없고, 일단 퍼뜨리고 보는 소문들은 권력에 치명타를 가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 모두다 복합적으로 작용된다는 점이다. 정보의 생태계는 서로 물고물리는 관계로 파고들면들수록 복잡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퍼지는 허위정보들보다 주류매체의 부정확한 보도에 더 불만을 표시하곤 한다. 페이스북과 유투브의 생활화는 이런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어 보인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악의를 제거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냥 농담이었다는 변명은 정치판에서처럼 미디에서도 어느 정도는 통한다. (p. 106)

한마디로 개소리는 주요 미디어 없이는 뜨기 어렵다. 매체는 개소리를 막으려고 애쓰면서도 이를 전파한다. (p. 108)

우리 모두는 상대방을 설명하는 최악의 사실만 믿으려 한다. 바로 이런 토양에서 대충 쓴 기사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p. 118)

기자에 대한 신뢰도가 부동산 중개인이나 은행업자에 대한 신뢰도보다 낮고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보다도 훨씬 낮다. 그렇지만 뉴스 아나운서에 대한 신뢰도는 높다. (p. 123)

좋건나쁘건 화제성을 일으킨 사람은 일단 무엇으로든 일단 대중에게 통하게 된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언론은 그 객관성을 유지하느라 개소리들을 그대로 싣게 되고 그렇게 전파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자극적인 기사일수록 조회수는 올라가고 모든 정보가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상황에서 언론사의 수익구조는 진실을 파헤칠 여건을 주지 못하게 된다. '기레기'들이 넘쳐나는 상황은 영미나 한국이나 비슷한가 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보다 낮다'는 표현에서 그야말로 웃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이미지에 대한 신뢰도는 아직 남아있어서 미디어에 대한 신뢰도는 좀 괜찮다는데 과연 믿을만할까?

냉소주의가 오래 이어지면 결국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키워 투표율이 낮아지고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율이 떨어진다. 악순환이 시작된다. 정치인은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과 부동층에게 호소하기보다,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는 쪽으로 선거 유세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경험자보다는 아웃사이더가,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공약이 더 유리하다. 그 결과 예상 밖의 후보가 갑자기 부상한다. (p. 134)

그렇게 브렉시트가 결정되고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이런식의 결과를 얻은 투표가 과거 우리사회에 얼마나 만연했던가... 한두번의 짧은 개혁으로 그 깊은 폐해를 고치기는 얼마나 힘든지 지금 우리사회의 혼란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

트럼프가 리조트 회원권과 트럼프타워 아파트를 파는 방식은 일반적인 판매 전술과 많이 다르다. 이는 그냥 사기다. (p. 136) 트럼프의 호전성과 개소리, 미디어 폭격은 흔히 미디어가 곧장 대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현상으로, 대처법을 알아두어야 할 매우 새로운 현상으로 언급된다. 24시간 뉴스채널과 소셜 미디어, 극당파적 사이트의 확산 등 일부 현상은 분명 새로운 난제다. 그렇지만 트럼프가 이용하는 방식 중 상당수는 그가 1990년대 뉴욕에서 썼던 전술이며 1950년대에 매카시가 펼친 전술과도 겹친다. 정치적 극단론자의 흔한 전술을 단지 중앙 무대로 끌고 온 측면도 있다. (p. 143)

찰스왕세자가 트럼프타워 아파트를 구매할 예정이라고 트럼프가 말했을때 기자는 버킹엄궁에 전화해서 확인을 요청하고 버킹엄궁은 드릴말씀이없다고 했다는 답변이 기사화되면 소문이 진실로 둔갑하면서 아파트값은 치솟는다. 하지만 찰스왕세자는 트럼프타워아파트가 뭔지도 몰랐고 트럼프는 갑부가 되었다. 예정은 바뀔 수 있는 계획이므로 트럼프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은 아니다. 트럼프의 방식은 굉장히 교묘하고 이런 방법은 과거에도 있었다. 트럼프는 역사에서 배운 것인가;;;

지금부터 더 길고 인상적인 이력을 살펴보면 존슨이 신념없고 무당파적인 개소리꾼의 전형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발언의 무게에 신경쓰지 않고, 개인의 출세에 집착하며, 사실보다 듣기 좋은 이야기를 더 중시하는 사람임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p. 144)

보리스 존슨을 비롯한 영국의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저자는 거침이 없다.

뉴욕의 억만장자이면서도 기성 체제에 반기를 든 인물인 양 행세한 트럼프처럼 영국의 핵심 특권층 출신인 존슨도 상식 이하의 발언을 해놓고는 농담이었다며 넘어갔다. (p. 149) 두 사람 모두 헤드라인을 장악하고, 얄팍한 자료에 기대 담론을 부추기며, 논란이 생기면 '웃자고 한 이야기'라며 빠져나간다. 두 사람 모두 오랜 시간 주변부를 맴돌다가 마침내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 모두 미디어든 정계든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못함을, 정치인과 성향이 다른 매체라도 그들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p. 153)

세계에 영향력이 큰 두 나라, 영국과 미국의 근래 몇년은 세계정치의 위기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 여파는 여전하다. 세계의 흐름이 우리와 무관할 리 없다. 저자의 쓴소리는 개소리를 내뱉는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개소리 퍼즐의 마지막 중요한 역할을 맡은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바로 당신이다. (p. 154)

우리는 우리 수준에 맞는 미디어를 얻는다. 뉴스 미디어와 허위 사이트 둘 다 소비하는 대중이 있으니 그런 정보를 만든다. 정치인은 유권자가 반응한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우리가 서로 교류하게 해줄 뿐이다. 개소리가 기승을 부리고 믿을 만한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도 소비자이자 유료 독자이자 유권자로서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도 전통적인 매체와 거의 대등하게 정보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진다. (p. 156)

잘못된 인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되고 정치와 미디어 담론의 영향으로 굳어지며 다시 그런 담론을 부채질한다. (p. 159)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고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서, 개소리를 막기 위한 노력 중 하나는 우리의 현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p. 172)

민주주의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엄청난 피로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약간의 독재를 편해하기도 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리서치 결과에서도 '미디어를 지탱하는 쪽보다는 나라를 구해줄 강력한 지도자를 지지하는 쪽에 더 관심이 많다' 고 나왔다. 하지만 그런 피곤에 지친 선택이 브렉시트와 트럼프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전에 넘쳐나던 정보들은 검증할 새도 없이 뜬소문처럼 되어 버리고 결과는 유권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왜 그런 정보를 믿었던 것일까?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인다. 확증편향 (p. 241)

생각을 바꾸는 것에 대한 반발심. 역화 효과 (p. 244)

집단에 동조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p. 250)

아무리 우리가 교육을 받았고, 양질의 정보와 저질 정보를 분간할 수 있다고 자부해도 여러 심리적 이유로 개소리에 넘어간다. 또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과 일치하고 나의 사회적 규범에 맞으며 신호 보내기나 집단 정체성 강화에 쓰고 싶은 정보들을 많이 접한다. 우리가 꼭 개소리를 믿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쉽다. 개소리의 영향력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우리가 개소리에 사로잡히는 기제를 아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이를 통해 개소리가 왜 효과적인 전략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264)

남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만의 생각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그와중에 주변사람들과 의견이 다르기라도하면 나혼자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소리에 넘어가서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결국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알아야 한다. 무엇이 개소리인지.

사실 검증은 허위 정보 생태계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 해결책 중 극히 일부라는 점이다. (p. 313) 트럼프의 주장이나 그에 관한 주장을 읽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 사실 검증 블로그를 읽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엄연한 사실이 있어도 공유되지 않는 것이다. (p. 316) 정보 하나하나에 담긴 개소리에 대처하는 것은 정보 전쟁에서 참호전을 벌이는 것과 같다. 참호전이라는 수렁에 빠지면 이 싸움은 승산이 없다. 또 사실 검증을 했더라도 훨씬 적은 대중에게 퍼지기 때문에 거짓 주장의 확산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애초에 주류 언론이 노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p. 320) 인터넷의 허위 정보와 싸우는 일은, 하나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여러개의 과녁에 총을 겨누는 것과 같다. (p. 329)

팩트체크는 중요하다. 하지만 일반인이 기사마다마다 이것이 개소리인지 아닌지 출처확인과 허위여부를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신력 있는 단체나 언론에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더라도 꾸준히 검증을 해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누군가 해주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기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다.

사실 검증 하나로는 가짜뉴스와 개소리로부터 우리를 지키지 못하며, 개소리 생태계를 교정할 뾰족한 대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효과적인 대처 방안없이 문제만 제시하는 것은 그냥 포기하라는 말과 다를 게 없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허무하게 만든다. 이제부터는 그런 암담함을 좀 덜어주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마지막 장에는 정치인과 정책 담당자, 언론 매체와 기자, 시민이자 뉴스 소비자인 우리를 위한 조언을 담아봤다. 독창적인 생각도 아니고, 일관성도 없다. 앞서 논의한 모든 내용에서 도출한 생각과 결론을 모아놓은 것으로 다양한 압력에 다양한 방법으로 맞서자는 조언이다. (p. 337)

저자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다양한 대처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저자가 말했다시피 뾰족한 대책도 아니고 독창적이거나 일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앉은채 당하지만은 말자는 얘기다.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봐야 좀더 효과적인 방법도 찾게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내가 할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 그런 문제의식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는 개소리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실 감각을 유지하고 음모론에 맞서면서 서로 기본적 합의를 도출하는 일은 건전한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진실이 무의미해진 세상은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p.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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