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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연대기
기에르 굴릭센 지음, 정윤희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평점 :
결혼의 시작과 종말, 스러져가는 사랑에 관한 기록
오직 부부만이 살면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농염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 노르웨이판 '부부의 세계'
'부부의 세계' 라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으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륜에 관련된 드라마라고 알고 있었기에 이 소설의 홍보문구에서 대충 짐작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딱히 그런 종류의 플롯에 관심을 둔 적은 없었지만 노르웨이 작가의 소설이 어떨지 궁금했다.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몇편 읽은 적 있었는데 북유럽 소설의 분위기가 은근 우리정서와 잘 맞는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라는 이 작품은 '부부의 세계'이긴 한데 뒤바뀐 입장에서 느껴지는 독특함이 신선했다.
존과 티미는 아들 형제를 키우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부부생활을 하는 행복한 부부다.
함께 휴일을 보내고 생일을 축하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밤이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고 아침이면 서로를 깨워주면서 그저 버티는 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고 애썼다. 서로를 부드럽게 혹은 탐욕스럽게 만지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친밀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하면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끝없이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사실 그것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p. 53)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한 부부였었다. 과거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남편의 기억으로 서술되는 끝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부라는 관계가 끝나기까지 어떤 과정들이 있었는지 세밀하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마음일기처럼 읽히기도 하는 소설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저 부부 사이에 주고받는 농담의 대상,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남자를 더는 별것도 아닌 대상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지고 나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p. 59)
나는 그녀에게 장갑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내는 그때 그냥 자기가 샀다고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괜히 숨겼다고 나중에 후회하듯이 말했다. (p. 61)
"당신 오늘 장갑맨이라 데이트할 거야? 아니면 나랑 재미있게 놀까?" 내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충격과 짜릿한 흥분을 느꼈고 나 역시도 똑같은 걸 느꼈다. 워낙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고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이라서 어떤 것이든 공유할 수 잇었다. 아니, 공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p. 62)
모든 틀어진 관계를 돌이켜보면 다 그렇듯이 처음부터 문제가 됐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알게 됐고 집에서도 거리낌없이 대화속에 등장시킬 수 있었떤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워지고 그러다가 숨기고 싶어진다. 그땐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땐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런 단발적이고 공개적인 만남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사랑에 빠질 상대를 마주칠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유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나의 얼굴을 살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평소 내가 동경했던 외모나 태도, 자신감, 장난기가 느껴지는 사람 말이다. 드물지만 실제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이미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그 상대 역시 옆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다시 새로운 관계로 옮겨가게 된다. 물론 그런 단발성 만남은 대부분 아무 소득을 올리지 못한 채로 잊히게 마련이다. 사랑할 대상은 어디서든 마주치게 마련이지만 실제 인연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p. 65)
누군가의 외도에 대해 그 아픔과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사실 이 부부의 시작은 처음부터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었던 상태에서 만났고 급작스럽게 빠져들었다. 어쩌면 시작이 이러했기에 누군가에겐 불안감이 누군가에겐 호기심어린 흥분이 시작부터 내재되어 있던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들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랜 예행연습 끝에 그녀와의 특별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p. 72)
누군가에겐 사랑이 누군가에겐 불륜이 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멀고먼 나라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깨트리는 사랑은 순수하다고 볼수는 없지 않나. 비록 그 두사람에게는 이제야 만난 진정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젊은 부부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굳이 알고 싶다면 그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이 엄마와 나는 너무 달랐고 또 너무 똑 닮아 있었다. 게다가 너무 가까운 사이인 동시에 충분히 가깝지 못했다. 나 자신과 상대, 서로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고 서로에게 지나치게 예민했다. (p. 79)
낯선 젊은 여자와 팔짱을 끼고 딸의 유모차를 밀고 있다가 아내에게 그 모습을 들킨 후 이혼하자는 남편이 하는 말치고는 뻔뻔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전부인도 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 하지만 그렇게 듣고 싶지 않다면 나도 이쯤에서 포기할게.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 얘기는 해야겠어. 언젠가 당신도 나처럼 똑같이 버림받기를 기도할게. 나를 무참히 버리고 떠난 것처럼 당신도 똑같이 버림받기를 내 온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할 거야" (p. 80)
첫번째 결혼을 본인이 망가뜨리고 나서 선택한 두번째 결혼생활이 더없이 만족스러울수록 본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쿨한척 아내의 사회생활을 응원해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 부부의 생활은 시작 뿐만이 아니라 생활 자체도 일반적이지 않다. 역지사지의 관점이 여러번 왔다갔게 하게 되는 이런 점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이다.
아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아이들과 나는 항상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돌아오는 집이라는 공간은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 삶의 연장선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이들과 내가 목을 빼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나였고 아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결벽증 때문에 온 집 안을 쓸고 닦고 말끔히 정리해 놓는 것도 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집에서 일하면서, 아내에 대한 나의 집착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혼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내를 붙잡고 온종일 집에서 뭘했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떠들어댔고, 전날 아내나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을 곱씹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티미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내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내가 했던 일이나 생각 하나까지 모두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마도 티미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p. 87)
뭔가 입장이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은가?
존은 프리랜서 작가로 집에서 일하다 보니 아이들케어와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활발하지 않은 성격에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티미는 성취욕이 강한 만큼 직장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본인의 관리도 철저해서 다양한 운동과 취미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만큼 인간관계에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이 부부의 생활에 한 남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저 추문 속 주인공이었고, 한낱 핑크빛 연애 감정에 빠져서 서로의 가족과 아이, 그리고 연인이나 아내를 완전히 망가뜨린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서서히 괜찮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 둘의 사랑이 인생에서 딱 한 번 찾아오는 유일한 사랑으로 보일 날이 올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서로에게 완벽한 반쪽,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럴 것이다. 그 남자나 그 여자가 나의 하나뿐인 반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수십 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우리는 지금과 또 다른 삶, 또 다른 상대가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풍족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서로 함께하기 위해서 어렵게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동의했으며, 이전 상대들에게 했던 끔찍한 것을 서로에게는 절대 할 수 없었다. (p. 93)
시간은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독이 될때도 있는 법이다. 초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 마음이던가? 특히나 사랑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뜨거움이 따듯해지고 따듯함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체온처럼 그냥 늘 있는 그런 온기가 되었을때 어느날 갑자기 불꽃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마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우리 두 사람도 끝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게 된다면 당신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누구랑?"
"나 말고 다른 남자겠지. 당신이 처음 만나는 누군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야?"
"아니, 절대로. 하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거야"
"말도 안 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대체 무슨 의미겠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맞는 거잖아.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이 더 행복하다고 해도, 나는 예전과 똑같이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당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의 그 결정을 지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당신을 지지할거야" (p. 107)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랑이 무슨 의미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겠다고? 아내에게 불꽃튀는 남자가 생겼을때 아내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남자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자신이 했던 말도 아내가 보였던 반응도 곱씹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구석까지 밀어붙이고 아내의 마음을 최대한 상상해보면서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부부생활에 대해 이 남자가 느끼는 감정은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럽다. 읽다보면 자꾸 까먹게 되는데, 이런 내면을 보여주고 있는 이는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하찮다'라는 단어를 기왕 사용했으니 계속 사용할 작정이었다. 너무나 하찮은 인간으로 완전히 뒷전에 놓인 느낌이 들었다고도 따져 물었다. 그 단어 하나에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온갖 문제들이 모두 집약되어 있었다. (p. 189)
사랑하다의 반대말은 미워하다가 아니라 하찮아지다가 아닐까. 부부 중 한 사람의 외도에 대해 그 문제 자체를 물고뜯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다른 한 사람이 하찮은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커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섬세한 감정변화와 농염한 부부생활을 보여주는 이 소설이 '결혼의 연대기' 라는 제목을 갖게 된 것은 '사랑' 의 문제를 '결혼'의 관점에서 보게 하려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은 끝났어도 결혼은 끝나지 않을수도 있기에 일단 결혼으로 묶인 두 사람의 연대기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쓰여지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장이 '열기를 잃는 것' 으로 끝난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와 어떤 미래를 선택했을지에 대한 생각은 읽는이마다 다를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소설에 대해 이런 설정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적어도 아직은?! 괜찮은 관계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