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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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온인간이 되어가는 인경과

직장동료 희진의 잔잔하고 단란한 연대

 

 

지금까지 읽었던 자음과모음의 새소설 시리즈(밤의 행방, 빛의 마녀, 스모킹 오레오)들은 모두 취지에 걸맞다 싶은 느낌이 오는, 젊고 새로운 감각의 새·소·설· 들이었다. 작고 예쁜 이 작은 소설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이번 작품에선 또 어떨지 궁금했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역시' 였다.

이 넓은 사무실 내에, 부채질하거나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p. 12)

최인경은 여행사의 배테랑 가이드다. 같은 층에 근무하긴 하지만 팀이 다른 송희진은 사무실에서 에어컨 앞을 고수하며 회계라는 업무 특성상 비용처리 과정에서 대부분의 직원과 마찰을 겪는 고슴도치같은 존재였다. 서로 잘 모르던 두 사람이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으로 베트남 출장에 함께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인경도 몰랐던 인경의 비밀을 희진이 눈치채게 된다.

"최대리님, 최대리님. 언제부터 이랬어요?"

"송주임님, 뭐 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최근에 송주임님 너무 불편했는데, 갑자기 사람 놀라게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냐고요"

"최대리님, 팔이. 설마 했는데, 팔이, 이 더위에"

"뭐라고요? 송주임님, 똑바로 말해보세요.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대리님, 그거 맞요? 파충류나 양서류 그런 종류요, 땀도 안 나고 온도에 따라 체온도 변하고 하는, 그거 뭐더라, 그거요, 대리님" (p. 32, 33)

변온동물

아니 변온인간

인경은 몰랐다. 자신이 언제부터 땀을 흘리지 않았던건지 언제부터 더위에서 더 에너지가 넘쳤던건지.

희진은 더위를 조금도 못참는 체질이었다. 사내규정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의 짧고 얇은 복장으로 출퇴근을 고집하면서도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에어컨도 모자라 선풍기 여러대를 돌려야 그나마 살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희진에게 베트남에서 인경의 모습은 너무도 특이했다.

송희진과 나는 그날 사우나실에서 겪었던 일을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일이니 어디에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송희진의 답이 필요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우리의 추측대로 만일 내가 영영 변온성을 가진 인간으로 변해버렸다면, 그러니까 열대 기온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확실하다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당장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p. 42)

변온인간이라니.

SF도 아닌데 소설 속 주인공이 변온인간으로 변한다는 설정이 독특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몰입되었다.

작가의 심리표현 능력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내 체질 때문에 저절로 수긍이 되었다. 농담삼아 나는 내가 변온동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추위를 비정상적으로 타서 한겨울이면 양파처럼 켜켜이 옷을 껴입고 여름에도 왠만해선 땀이 잘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설속 인경처럼 더위속에 더 팔팔해지는 건 아니지만 추위와 더위에 대한 적응체질이 워낙 비정상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아서인지 인경의 갑작스런 변온인간 변화에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된다면 얼마나 막막할까?;;;

"그 유툽 채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구아나인가 뱀인가, 아무튼 그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는데 겨울철에 온도를 높여주고 습한 곳에서 키워도, 꼭 동면은 몇 주 정도 해야 한다고. 그 이유가 탈피라는 걸 해야 한다던가" (p. 70)

봄에 시작한 이 소설은 여름과 가을 겨울로 향하면서 새로운 상황들을 연이어 만들어낸다.

실험체가 되어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연구소나 국가기관에 함부로 의논할 수도 없고 온갖 검색과 자료수집을 해봐도 변온인간에 대한 상황은 없었던 것 같고 우연히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람은 잘 모르던 회사동료 한명 뿐이다. 요즘 세상에 가족은 멀면 멀수록 좋은 관계일 경우가 많다. 인경도 그랬다. 누구하고도 비밀을 의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회사동료는 왜이렇게 인경을 도와주는 걸까?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인경 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거면 지금 이 상황을 함께 감내할 만한 이유로도 충분하고, 어쨌든 나름의 책임감도 생기고요"

"제가 희진씨에게 도움을 줬다고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을 보태지 않으셨잖아요, 그런 소문들에" (p. 77)

"누구나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인경 씨처럼" (p. 80)

저자는 2019년 겨울에 이 작품을 썼는데 그해 10월과 11월에 연이어 세상을 떠난 두 여성 연예인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보며 우울과 슬픔을 겪었다고 한다. 그 시간들의 일부분이 이 소설에 엮이에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닥친 막막한 상황을 가족도 친구도 그 어떤 의지처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다가 어느순간 비수가 되어 돌아올 그런 말들이 생기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때 뜻밖의 인물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연대감은 또다른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음을 소설로 표현하면서 그런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있는듯 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죠.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어쩌죠. 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 겨울, 서른세 번째의 겨울에 떠나도록 되어 있는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것이라면 어쩌죠" (p. 196)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좋겠어요. 겨울에만 살아 있는 동물들도 있을 텐데, 나는... 겨울에 이렇게 자도 되니까요" (p. 199)

매달매달 달라지는 몸상태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인경과 그 모든 과정에서의 고민을 함께 해주는 희진을 보며 직장동료 그 이상의 연대감을 보여주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겨울에서 끝난다. 변온인간으로서 처음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신선함이 먼저 다가왔다면 아마도 이 소설은 SF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정이나 상상력보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함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새로운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기에 이 소설은 희망을 품은 새·소·설·로 다가왔다. 그 어떤 계절보다 봄은 항상 기다림과 희망을 상징하는 계절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내게 봄같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인경과 희진이 꼭 함께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지구가 한 번 공전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은 채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 그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p. 202) 이번 봄이 아니면 내년의 봄이, 이 여름이 아니라면 언젠가 다가올 여름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p. 203) -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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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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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룰 때,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존중할 때... 비로소 삶은 견딜 만해진다.

계급을 넘어선 두 남녀의 사랑을 세밀히 묘사한 탓에 금서로 사라질 뻔했던 이 작품은 출간 6주 만에 2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며 널리 사랑받았다.

"이제껏 로렌스만큼 성<性)과 사랑의 힘 다툼을 제대로 표현해낸 작가는 없었다" - 도리스 레싱 서문 中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이 작가의 이름이 내 머리에 각인되게 된 계기는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박물관에서 본 문장때문이었다. 재작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에트루리아전을 보던 중 전시회장 곳곳에 쓰여있던 로렌스의 여행기에서 뽑은 문장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로렌스의 에트루리아 여행기는 국내 번역된 것이 없었고 그렇게 알아보던 중 로렌스가 유명한 소설가였다는 것을 알게됐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라는 소설 제목은 들어봤지만 해외작가이름을 워낙 잘 못 외우는 편이라;;;

그렇게 에트루리아도 로렌스도 흐릿해지던 요즘 페이퍼북스타일로 가벼운 표지를 한 펭귄북의 새 책을 알게 됐다. 이참에 드디어 로렌스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무삭제판 출간시 기소되고 영미권에서 검열에 걸려 정식 출판되기까지 상당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나 노골적인 성묘사와 비속어 그리고 하층계급 남자와 귀족부인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등의 자극적인 안내문구가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 맞지 않아 거부감을 조금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도리스 레싱의 서문에서 그런 불편한 선입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서문이라기보다는 작품해설에 가까운 긴 서문을 먼저 읽고 작품을 시작하고 보니 왠지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 작품의 가치를 찾는데 좀더 집중하게 만들기도 했다.

채털리 부인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벌거벗은 고디바 부인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중략) D.H.로렌스 덕분에 희극배우라면 누구든 사냥터지기를 언급하면서 웃음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로렌스가 섹스를 일종의 신비롭고 신성한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결과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로 설파했다는 것이다. (p. 7)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출간되기 이전에 로렌스는 이미 성 개혁운동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은 출판이 금지되거나 판매 중에 압수되었고, 이미 판매된 책은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p. 9) 이 사람의 천부적인 재주는 놀랍고, 그의 최상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영문학 작품을 쓴 작가는 한 사람도 없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고, 로렌스는 이 작품을 자신의 유언으로 여겼다. (p. 44) - 도리언 레싱의 서문 中 -

1885년 에 광부아버지와 교사어머니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 걸린 폐렴으로 평생 힘들어하다가 1930년 4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로렌스에게 이 작품은 1928년에 (3판으로 최종본을 다시 써내) 출판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의 소설에서의 성적지향은 그의 아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로렌스는 27세때 스승이었던 교수의 부인이자 여섯살 연상이었던 프리다와 사랑의 도피 후 (프리다의 이혼절차가 마무리된 후) 결혼식을 올렸고 이 커플의 사랑은 여러면에서 독특함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참고로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를 찾아가보고 연구하여 에트루리아 여행기를 펴낸 것은 1927년이다. 그리고 이 당시의 이탈리아는 세계1차대전 직후의 혼란 속에 무솔리니의 극우적 파시즘이 퍼져있던 (거의 반전시 준비)상태였다. 거의 백여년 전의 작품인 이 소설을 읽다보면 놀라우리만치 지금의 현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최근 읽었던 경제서에서 2차세계대전 직전의 경제상황과 지금의 현실이 거의 흡사하다며 경고하는 내용을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로렌스가 작품속에서 산업발달로 인한 자연의 훼손과 자본주의 심화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언급할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의 사회문제와 비슷한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변동이 일어난 후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세우고, 새롭고 작은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가거나 기어 넘어간다. 우리는 살아 나가야 한다. 하늘이 아무리 여러 번 무너진다 해도 말이다. (p. 49)

소설의 첫 문단을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으니 더 와닿는다. 이 시작은 작가가 이 작품의 결말을 미리 말해준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비극적인 시대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비애를 표현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세 페이지만에 콘스탄스는 채털리 부인이 됐고 클리퍼드 채털리는 전쟁에서 당한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의 휠체어신세가 됐다. 한달의 신혼기간후 참전하고 돌아온 클리퍼드의 모습은 이 부부에게 이미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코니 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채털리 부인은 젊다고하기보다 차라리 어린 나이였고 준남작인 클리퍼드경은 젊었으나 남성성을 잃었다. 그렇게 생경한 모습으로 외따로 떨어진 고향집 랙비 저택에 이 어리지만 슬픈 부부가 들어와 살게 됐다.

클리퍼드는 코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무력했기 때문에 매 순간 그녀를 필요로 했다. (중략) 그는 코니가 항상 곁에 있으면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단편소설을 쓰는 일에 전념했는데, 내용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에 관한 이상하면서도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쓴 단편소설들은 재치 있고 꽤 심술궂기도 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다소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관찰력이 비범하고 독특했지만 접촉해 있다는 느낌, 실제로 어딘가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마치 모든 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같았다. (p. 69~70)

그들은 매우 친밀했으나 접촉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이였다. (p. 73)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부부이지만 생과부상태로 살게 된 코니에게 클리퍼드는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를 주지시키지만 해가 지날수록 아무 '접촉' 이 없는 관계란 서로에게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코니는 자기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접촉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 광기처럼 그녀를 사로잡았다. (중략) 광적인 불안감이었다. 그때문에 심장은 아무 이유없이 격렬하게 뛰었고 그녀는 점점 야위어 갔다. 그것은 불안감일 뿐이었다. 코니는 클리퍼드를 내팽개치고 공원을 가로질러 달려나가 고사리 덤불 위에 엎드리곤 했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집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숲은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지성소였다. (p. 77)

다행히 렉비 저택은 공원과 숲이 딸린 대저택이었다. 숲은 코니에게 숨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코니는 저택에 손님으로 왔던 마이클리스라는 극작가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를 자신의 연인으로 여겨보기도 했지만 마이클리스는 코니에게 숲이 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 말에 동의하는 거지, 그렇지? 함께 살아가는 평생에 비하면 어쩌다 갖는 우연한 성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말이야.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끌리기 때문에 그저 섹스를 이용할 뿐이라고. 그런 일시적인 흥분이 중요하기는 할까? 인생의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의 완전한 인격을 서서히 쌓아 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온전한 삶을 사는 것 말이야. 온전하지 못한 삶은 아무 의미가 없어. 성관계가 없어서 당신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서 연애를 해. 아이가 없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아이를 가져. 그렇지만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면 그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여야만 해. 그래야 길고 조화로운 것이 되지. 그리고 당신과 나 둘이 힘을 합해 그렇게 할 수 있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중략) 내 말이 맞지 않아? (p. 125)

코니가 야위어가고 우울해져갈수록 클리퍼드의 집착은 더 집요해졌다. 하지만 코니에겐 점점 더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갈 뿐이었다. 처음엔 왜그런건지 스스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클리퍼드의 시중을 들며 하루하루 묵묵히 감내할 뿐이었고 가끔 숲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지만 코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당하다는 느낌, 기만당했다는 느낌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느낌은 일단 그것을 의식하고 나면 위험한 감정이었다. 배출구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느낌을 의식한 사람의 마음을 파먹어 들어간다. (p. 175) 반항심이 코니의 마음속에 사무치게 끓어올랐다. 이 모든 짓거리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신의 삶을 클리퍼드에게 헌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p. 176)

코니의 언니가 코니의 상태를 알고 렉비저택으로 와서 문제해결을 모색한다. 클리퍼드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코니의 언니는 코니를 의사에게 데려가고 간호사 출신인 볼턴부인을 고용하여 클리퍼드를 돕게 함으로써 코니에게 코니만의 시간을 갖도록 정리해준다. 코니는 점점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올리브는 미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미래에는 아기들을 병속에서 기르고 여자들은 아기를 낳는 일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p. 179)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책속의 책 발견~ ㅎㅎ

문명사회는 제정신이 아니다. 돈과 소위 사랑이라는 것, 이 두 가지에 문명사회는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물론 돈에 단언 광적으로 집착했다. 개인은 서로 아무 관련 없이 미친 상태에서 돈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p. 224)

진정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공감이 흘러가고 물러나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소설, 바르게 다룬 소설이 지는 엄청난 중요성이 있다. 제대로 창작한 소설은 우리의 공감 의식이 흘러갈 새로운 장소를 알려 줄 수 있고 또 실제로 우리의 공감을 죽어버린 사물을 피해 멀리 달아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제대로 창작하기만 하면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드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섬세하고 민감한 인식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며 정화하고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삶의 열정적이고 내밀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p. 232)

얼마 안 있으면 지구 껍데기에는 사람이 아무 쓸모없어지고 온통 기계만 남게 될 날이 올것 같아요. (p. 241) 세상이 해마다 바뀌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어요. (p. 242) 그녀는 이따금 일종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문명화된 종족 전체가 광증의 초기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는 공포감이었다. (p. 249)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작품속에 수시로 언급되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은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깨닫게 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당시를 비판하는 내용들은 지금의 현실에 대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는 점이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저자가 해결점으로 선택한 방법이 좀 개인적이었을 뿐.

코니는 오후에 닭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조그만, 아주 조그만 새끼 꿩 한 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닭장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깡충거리며 돌아다니고 어미 닭이 겁에 질려 꼬꼬댁거리고 있었다. (p. 255) 코니는 이 모습에 매혹되어 넋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통렬하게 여자 역할에서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에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지고 있었다. (p. 256) 사냥터지기는 그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있는 그 대담하고 작은 새를 주의깊에 지켜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손목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p. 258) 그는 걱정스럽게 코니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모로 돌린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자기 세대에서 버림받은, 쓸쓸한 처지에서 오는 온갖 고뇌에 빠진 울음이었다. (p. 259) "저기 누워유!" 사냥터지기가 부드럽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실내가 어두워졌다.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묘하게 순종적인 태도로 코니는 담요위에 누웠다. (p. 260)

사냥터지기 멜로즈. 광부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쟁에 참전했을때 장교까지 올라갔던 남자.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와 사냥터지기로 숲속 오두막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그는 여자에게 받은 상처로 더이상 여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코니는 달랐다. 멜로즈와 코니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것이 두 연인의 로맨스가 이루어져가는 설레이면서도 짠할수도 있는 그러한 전개들을 읽는 기분이 좀 독특했다. 코니의 마음을 읽을때도 멜로즈의 마음을 읽을때도 연인으로서의 두 인물의 심리가 아니라 저자의 독백을 읽는 것만 같았다. 성불구이자 상류계층으로서의 독재적 면이 있는 클리퍼드와 성능력자이자 하류계층으로서의 상실감이 있는 멜로즈라는 두 남자의 생각을 읽을때도 로렌스 자신의 서로다른 두 자아를 읽는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클리퍼드는 작가이자 주류였고 멜로즈는 성해결사이자 비주류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처럼.)

남자는 다시 내려가 외부와 격리된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는 숲이 외부와 격리되었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업 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고독을 갰고 날카로운 불빛들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숲을 조롱하고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은둔하여 물러나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은둔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여자를 취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고통과 잘못된 운명의 새로운 순환에 뛰어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여자의 잘못도 아니고 심지어 사랑의 잘못도 아니고 섹스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은 저기, 저 바깥세상에, 저 사악한 불빛과 악마처럼 덜거덕거리는 엔진 소리에 있었다. (p. 265~266)

코니와 멜로즈는 두 사람다 각자의 인생에서 커다란 변곡점을 맞았다. 어떤 의미로 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1권은 이 책을 읽기전 갖고 있던 선입견들이 무색하리만치 외설시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 의아해지게 하는 줄거리였다. 오히려 작가의 시대적 한탄과 자아 성찰의 내용들이 소설인듯 아닌듯 현실적 고뇌로 읽혀지면서 로맨스, 불륜, 연인 같은 소재들보다 더 큰 범주의 고민들을 던져놓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점들은 2권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2권은 여러 면에서 1권보다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굶주리라고 주문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굶주리는 것이 절대 고상한 목표는 아니잖아. 보편적인 가난도 역시 좋은 일이 못 되고, 가난은 추한 거야"

"불평등은요?"

"그건 운명이야. 왜 목성이 해왕성보다 크지? 사물들의 근본적인 짜임새를 바꿀 수는 없어!" (p. 38)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른 낳느냐가 아니라 운명이 우리를 어느 자리에 갖다 놓느냐 하는 거야"

"그렇다면 하층 대중이라는 것이 본래 타고난 어떤 종족은 아니라는 거네요. 귀족이라는 것도 본래 타고난 혈통은 아니고요"

"맞아, 여보! 그건 모두 낭만적ㅇ니 환상이야. 귀족 계급은 하나의 역할, 운명의 한 부분이야. 그리고 대중에게는 운명의 다른 부분을 맡아서 하는 역할이 있지. 개인은 거의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그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맡도록 키우고 길들이느냐 하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공통된 인간성이 전혀 없네요!"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 우리는 우리 배를 채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표현하는 기능이나 실행하는 역할이라는 문제에서 지배계급과 섬기는 계급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절대적인 심연이 있다고 믿어. 두 계급의 역할이 서로 상반되지. 그리고 그 역할이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거야." (p. 42, 43)

이 소설은 코니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코니가 클리포드와 하는 대화를 통해 점점 코니의 생각이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코니가 멜로즈와 하는 행위를 통해 점점 코니의 사고방식이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니는 양 극단의 두 남자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을 확실하게 깨닫고 주체성도 키워나간다.

돈, 돈, 돈뿐이라니까유! 모든 현대인들은 인간에게서 본래의 인간적인 감정을 죽여 없애는 데서, 아담과 이브를 분쇄해 버리는 데서 진정한 흥분을 얻는다니까유. 모두 똑같아유. 세상 전부가 똑같아유. 인간의 실체를 죽여 없애는 거지유. (p. 107)

우리 뭔가 다른 것을 위해 살자. 돈만 벌기 위해 살지는 말자. 우리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든 그러지 말자.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 벌고 우두머리를 위해서는 아주 많이 벌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만두자! 조금씩조금씩 그것을 그만두자. 우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떠들어댈 필요는 없다. 조금씩조금씩 산업사회의 삶을 벗어나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자. 돈은 아주 조금, 최소한만 있으면 될 것이다. 모든 사람, 나와 당신, 우두머리와 주인, 심지어 왕을 위해서까지도 말이다. 돈은 아주 조금, 최소한이면 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심만 하면 이 엉망진창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p. 110~111)

신사교육을 받았고 표준어를 구사할 줄 알지만 장교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일을 물려받고 사투리를 고집하는 멜로즈와 귀족이라는 신분과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떠나 오직 여성성으로만 자신을 어필하는 코니는 서로 닮아있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숲속 오두막집에서 서로만을 원하며 살기를 바라는 이 커플의 모습은 서문에서 읽었던 로렌스의 실제 삶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보다 더 훌륭한 실재라고 믿어요. 육체가 정말로 깨어나 살게 될 때에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그 유명한 바람소리기계처럼, 육체적으로는 죽어 있는 시체에 불과한 몸뚱이에 정신을 매달고 살아갈 뿐이에요"

"육체적 삶이란 것은 그저 동물적인 삶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p. 141)

사람들은 모두 유령 같고 얼빠져 보였다. 아무리 활달하고 잘생긴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행복이 전혀 없었다. 모두 메말라 있었다. 코니는 행복에 대한 여자의 맹목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고 행복을 확신하고 싶었다. (p. 179)

2권에서 묘사되는 성적 장면들은 외설적이라기 보다는 로렌스의 철학적 판단처럼 읽혀졌다. 작가가 느끼는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추구한 해결 방법은 육체적 접촉이었다. 계급격차와 자본의 논리 그리고 성적 합일에 대한 인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2권은 통속적으로 읽힐수도 있는 스토리였지만 그또한 로렌스식 적나라함과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나는 돈의 뻔뻔스러움을 증오하고 계급의 뻔뻔스러움을 증오하오. 그러니 현재의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한 여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소?" (p. 221)

"그렇지만 왜 꼭 무엇을 주어야 해요? 이건 거래가 아니잖아요. 단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뿐이잖아요." (p. 222)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인간들 사이의 육체적 접촉의 깨달음을, 부드러운 애정의 접촉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내 동반자다. 이것은 돈과 기계와 이 세상의 생명 없는 관념적인 원숭이 같은 작태와의 싸움이다. 그러니 이 여자는 내 뒤, 바로 거기에서 나를 후원할 것이다. 고맙게도 내게는 한 여자가 있다! 너무나 고맙게도 나에게는 나와 함께 있엊고, 부드러운 애정이 있고, 나를 알아주는 한 여자가 있다! 고맙게도 이 여자는 난폭한 여자도 아니고 바보다 아니다. 고맙게도 이 여자는 부드러운 애정이 있고 의식이 깨어 있다' 그리고 그의 정액이 그녀의 몸속으로 용솟음쳐 들어갈 때, 그의 영혼도 그녀를 향해 솟아올라 나아갔다. 그것은 생식 행위를 넘어서는 창조 행위의 솟아오름이었다. (p. 227)

존 토머스와 제인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커플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들의 자아실현의 한 방법으로 서로가 육체적 접촉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아직 읽기 전이라서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서문에서 보니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경향을 띠었던 것 같다. 소설가라서 이런 해결방법에 도취되었던 것일까? 2권의 뒷부분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 라는 글로 작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한 해명?이 상당히 길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성(性)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따라잡아야 한다. 아니, 모든 육체 활동에서 그래야 한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성적인 사고에서 뒤처져 있으며, 흐릿함 속에 미숙하고 다소 야만적인 조상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천박하고 감추어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바로 성적이고 육체적인 이 한가지 점에서 정신은 진화하기 않은 채 머물러 있다. 이제 우리는 따라잡아야 하고 성에 대한 의식과 성행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육체적 느낌과 경험에 대한 사려 깊은 의식, 이 육체의 느낌과 경험 자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행위에 대한 의식과 행위 자체의 균형을 맞추자. 이 둘을 조화시키자' 이 말은 성에 대해 적절한 경의를 표하며 육체적 이상한 경험에 적절한 외경심을 품으라는 의미다. 이 말은 소위 외설적인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 단어들이 정신이 육체에 대해 갖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외설이라는 것은 정신이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저항할 때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p. 282)

지금까지 어떤 시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보다 감상적이고, 진정한 느낌이 결여되고, 거짓된 느낌을 과장한 적은 없었다. (p. 288) 가짜로 만들어낸 정서의 문제점은 어느 누구도 정말로 행복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p. 289)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탈고한 지 거의 이 년이 지난 후에 쓴 이 글에는 무엇을 설명하거나 해설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어쩌면 이 책의 배경으로 필요할지도 모를 정서적인 믿음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이 책은 관습에 도전하여 쓰인 책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도전에 대한 어떤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 같았다. (p. 328)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 中 -

자비로 소량 출판한 자신의 책이 해적판으로 너무나 인기를 얻으면서 본내용이 왜곡되기까지 함으로써 저자는 온갖 비난을 받지만 그에 맞서는 소책자를 내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정도로 저자는 용감하다. 소설에서는 그나마 은유적으로 당대의 문화를 비판했다면 이 소책자에서는 논리적으로 성인식과 결혼 그리고 종교까지도 문제가 있음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갑론을박이 난무했을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시니컬하거나 독단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소설에서는 (비록 방법적으로 무난하지 않다해도) 로맨티스트 로 사상적으로는 성평등주의자 로 보이는 로렌스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어쩌면 혁명가처럼 느껴지는 이 소설가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진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고전임은 분명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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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니스 - 거대 기업에 지배당하는 세계
팀 우 지음, 조은경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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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구글이 우리의 개인 정보를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고,

아마존에 들어가야만 싼값에 상품을 구매할 수 있고,

페이스북을 통해서만 세계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THE CURSE OF BIGNESS 거대함의 저주

우리는 거대기업의 저주 아래 살고 있는 것일까? 왜 자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거대함이 곧 저주라는 것은 역사가 여러차례 보여줘왔음을 저자는 간단하고도 쉽게 일깨워주고 있다. 거대함이 어떻게 이루어져왔고 거대해질수록 왜 저주가 될 수밖에 없는지 알고나면 새삼 몸서리쳐질 것이다. 저주를 깨뜨리려면? 일단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기업집중으로 인한 '거대함의 저주Curse of Bigness'에 맞닥뜨려 있다. 이 저주는 일반 대중이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 심각함 위혀이 될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에도 심대한 위험이 된다. 우리가 경제 독재는 정치 독재를 낳는 경향이 있음을 망각하고 부주의하게 경제민주주의의 이상을 단념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려면 먼저 한 나라의 국민이 어떤 일이나 의제에 주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그러나 수많은 국가의 국민들은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20세기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는 것과 비슷한 패턴을 목격하고 있다. 20세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제정책이 실패했을 경우 전체주의와 독재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총체적 불평등과 물질적 빈곤은 민족주의적이고 극단적인 지도자를 키우는 위험한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이런 교훈을 전혀 모르는 양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p. 9)

우리는 은연중에 늘 발전하고 있다고 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자유와 평등이 보급되고 그저 먹고사는것보다 잘먹고잘사는 것을 추구하게 된 요즘의 상황이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그때의 모습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또한 저자 덕분에 깨우쳤을뿐 그전엔 그 유사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저 여전한 빈부격차와 여전히 팍팍한 삶에 대해 의문점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여전한걸까...했을 뿐이었다...

세계경제가 20세기 초반의 경제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계정치의 상황도 그때와 유사해졌다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 같다. 20세기 초는 지속적인 경제적 곤궁, 노동자에 대한 잔혹한 처우, 중소기업의 파멸, 그리고 폭넓은 경제 불황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반 대중의 분노가 널리 퍼져나갔고, 새롭고 다르면서 더욱 공정한 대우를 바라는 요구가 증가했다. 대규모의 일반 대중이 경제적 궁핍을 겪은 뒤 러시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뒤이어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일본에서 파시스트 혹은 극우민족주의자들이 득세해 정권을 잡았다. (p. 21)

흰쌀밥에 고깃국이 흔해진 시절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여전히 경제적으로 곤궁함을 느낀다. 기본급이 상향되고 노동조합이 합법화됐지만 우리는 대부분 여전히 노동자에 대한 잔혹한 처우가 배경이 되어 발생한 사건들을 보며 아직도?라며 좌절하곤 한다. 폭넓은 경제 불황은 코로나의 장기화로 더욱 심화되었고 대중의 분노는 수시로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같은 상황을 이미 역사에서 목도한바 있다. 백여년전 경제불황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힘입어 정권을 잡은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세계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진 것은 몇몇 미치광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원인이었다.

우리는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한 상황에 대한 모멸감, 그리고 소외될 진짜 가능성으로 인해 촉발된 분노와 폭력의 정치로 회귀하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심각한 경제위기기 한 번만 더 일어나면 우리가 알던 민주주의는 끝장날 수도 있다. 20세기로부터 배웠지만 잊힌 교훈은 좀 더 신중하고 덜 감정적인 대안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실업자와 노인들을 돕고,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보호하며, 제어되지 않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가혹함과 불공평함을 둔화시키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명백하고 이미 잘 알려진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전체 퍼즐에서 사라진 조각은 경제구조를 제어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다. 과도한 사적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거나 깨뜨리는 법률이 필요하다. (p. 22)

저자는 법학교수이자 정책입안가이다. 누구보다 법의 필요성과 효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법으로 해결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반독점프로그램의 하나로서 반독점법의 부활을 촉구하는 저자의 주장에 지나온 역사가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 거대화의 흐름을 끊고 경제를 살린 것은 반독점프로그램들이었다.

사실 1930년대 초에 전 세계는 기업집중의 저주로 고통받고 있었다. 세계의 주요 국가들은 자국의 독점기업과 국가 대표급 기업을 선택해 육성했는데, 이는 결국 경제 붕괴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p. 39) 거대 독일 기업들이 히틀러의 통치에 협조한 능동적 공범이었는지 희생자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독일의 경제구조가 나치 국가 설립과 실행에 위험한 촉매제 역할을 했느냐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전쟁 전 독일의 산업세계에서 기업집중 현상이 심했던 것이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세계 정복을 꿈꾼 독일의 노력에 일조했다는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실어준다. 이는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가 절대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교훈이다. (p. 52)

하지만 일본은 독일과 달랐다. 독일은 거대독점기업이 곧 정권주체는 아니었을 뿐더러 전쟁 후 철저히 해체됐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경제정책을 일본제국의 위대함과 연결시켰고(p. 56)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에 의해 반독점법의 집행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p. 95)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적 경제발전방식을 유지했고 이런 방식이 1990년대 경기침체를 불러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한국을 대하고 있다. 어쩌면 휴전은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주장들을 이해하면 질서자유주의를 명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를 믿는 사람은 국가가 물러서기를 바라고 사회주의자와 파시스트는 국가가 지휘하는 경제를 추구한다면,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제3의 방식'을 요구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사적 권력을 파괴하기에는 충분하면서 사회를 탈취할 정도는 아닌 만큼의 힘을 보유하길 바랐다. 또한 국가가 일정 수준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면서 대부분의 상품 공급은 시장의 과정에 맡기기를 원했다. 질서자유주의자는 종종 이상적인 국가를 솜씨 좋은 정원사에 비유했다. 솜씨 좋은 정원사처럼 과도한 성장을 차단함으로써 인간이 번영할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p. 85~86)

백년도 안된 역사이건만 독점과 반독점의 사건들을 훑어보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역사는 문제점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해결의 힌트도 알려주고 있었다. 저자는 그 힌트들을 간명하게 정리해줌으써 최근 거대해지는 기업들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역사는 늘 반복된다고도 볼 수 있지만 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 초점을 흐리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 반복성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곧 진보의 또다른 모습이 아닐런지.

신자유주의는 질서자유주의의 경쟁자였다. (p. 126) 시카고학파에 의하면 이 시대의 독점주의자는 심각할 정도로 잘못 이해되어왔다. 독점주의는 앞선 세대가 두려워하던 위협적인 야수가 아니라 사람 좋고 소심한 존재라는 것이다. (p. 133) 시카고학파가 퍼뜨린 바이러스는 곧 유럽까지 전염시켰다. (p. 135) 소비자의 복지라는 기준을 널리 채택하면서 생겨난 수많은 문제 중에 두드러지는 것이 하나 있다. 연속적인 합병으로 업계를 강화하게 내버려두는 것인데, 질서자유주의자들과 브랜다이스 사상을 따라는 사람들이 도저히 믿지 못했을 이러한 합병은 다른 세대에도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단지 한 세대가 지난 후 우리는 상업과 금융의 세계화에 힘입어 경쟁과 경제적 자유의 이상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중소 생산자와 노동자들을 강하게 압박하는 집중 현상을 국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 기업집중의 저주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p. 137)

JBS와 브라질의 사례를 비롯해 IBM 과 AT&T 의 사례들은 독점과 반독점의 장단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소비자의 복지를 생각하는 기업은 없었다. 원가는 내려가는데도 가격은 계속 올랐다. 시장이 최대한의 자유를 가졌을때 그 자유는 점점 한곳으로 몰려 권력이 되는 과정은 너무 분명하게 이루어져 왔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태클을 거는 곳이 전무하다시피 해졌을때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주가 펼쳐졌고 그 뒤를 구글과 아마존 그리고 페이스북이 청출어람의 모습으로 따르게 되버렸다. 그렇게 거대의 저주가 실현되었다. 이제 그 저주를 거두어들여할 때가 아닐까.

역사는 하나에 너무 많은 것을 걸면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혼란스러운 면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경제 형태를 유지하게 만든 경쟁이 존재하는 생태계에 반해 소수의 기업에 크게 의존한 경제가 야기했던 위험 말이다. (p. 166) 역사와 기초 경제학은 사실상 치열한 경쟁이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의 측면에서,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기업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고 믿는 게 낫다고 말한다. (p. 168) 이 책이 경고하는 바는 선명해졌다. 현재 진행중인 전 지구적 기업집중 현상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는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위험한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p. 171)

비교적 짧고 얇은 편인 책이었지만 그 분량에 비해 깊이와 문제의식이 남다른 책이었다. 정치의 노예화는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가 되는 사이 경제의 노예화는 더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엄청난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사라지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노동자와 시민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거대함의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하다면 이 책을 통해 문제점을 분명히 깨닫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시도를 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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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과 삶 - 융의 성격 유형론으로 깊이를 더하는
김창윤 지음 / 북캠퍼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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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프로이트 의 책을 읽은 것이 있어 융의 책도 궁금해져 읽은 책인데, 결론적으로 이 책은 융의 이론을 알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융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치료를 하고 있는 정신의학 교수인 저자의 성격풀이 에세이랄까.

1부>성격-성격을 알면 사람이 보인다] 에서 융의 성격 유형론에 대해 개괄적으로 풀어내고

2부>삶-어떻게 살 것인가] 에서 저자가 만나본 환자들의 사례와 문학작품의 예를 통해 다양한 캐릭터의 성격을 분석해 본 후

3부>마음의 병] 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기초 이해를 돕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성격과 삶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책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격대로 살아간다고나 할까.

영어에서 성격을 뜻하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는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한다. 같은 듯인 '캐릭터character'는 조각상의 얼굴에 새겨진 특성과 같이 '새겨진 것, 조각, 각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카락테르charakter'를 어원으로 한다. 따라서 성격은 '페르소나', 즉 개인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캐릭터', 즉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격은 또한 고대 그리스어로 '에에토스'라고 하는데, 이는 '에토스ethos(풍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제논의 제자들은 에토스를 '개별적 행동을 낳는 삶의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즉, 한 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고 행동할 때 그 사고, 감정, 행동의 바탕에 깔린 개인의 내재한, 고유한 특성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은 정서적, 인지적, 사회적, 종교적 특성 모두를 포함한다. 현실 적응 능력, 대인 관계 특성, 의사소통 방식, 자기 이미지, 평소 기분 및 감정 조절, 욕구(충동) 조절 및 좌절에 대한 반응, 지각 및 사고방식, 일에 대한 태도, 취미 및 여가활용, 가치관 및 종교적 태도 모두 성격에 포함된다. (p. 14)

성격의 의미를 읽고 나니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성격' 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포괄적인 단어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넓은 범주의 단어이다보니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들을 합쳐서 그냥 '성격 차이'가 헤어짐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따라서 성격을 제대로 알면 당연히 그 성격을 지닌 사람이 제대로 보이게 될 것이다.

성격을 좀더 학문적으로 명확히 구분해 내기 위해 5요인모델이니 생물학적모델이니 등등의 학자별 다양한 모델이 있나본데, 아무래도 프로이트 와 융의 관점에 좀더 관심이 갔다.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서로 갈등하고 타협하는 역동적 관계가 성격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p. 28) 프로이트는 성격 발달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인정 여부는 정통 프로이트학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p. 32) 프로이트의 단계적 발달 이론은 에릭슨의 생애 전반에 걸친 정신 사회 발달 이론으로 발전한다. 에릭슨은 성격 발달 단계별로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며 성격이 발달한다고 보았다. (중략) 프로이트는 성격 형성 과정에서 5세 이전의 초기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p. 36) 성격 형성 과정에서 성적 본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회 문화적 요인과 대인 관계를 중시하는 신프로이트학파(카렌 호나이, 해리 스텍 설리반, 에리히 프롬)와 자아의 자율적이고 독립적 기능을 중시하는 자아 심리학(안나 프로이트, 하인즈 하트만, 에릭 에릭슨),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내재하여 훗날 대인 관계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대상관계 이론(멜라니 클라인, 로널드 페어베언), 부모와 치료자의 공감적 이해를 강조하는 하인즈 코헛의 자기 심리학으로 발전한다. (p. 38)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자 무의식의 중요성을 널리 퍼트린 학자이다. 그의 이론이 지금 들어맞건 안 맞건을 떠나 그의 이론은 이후 학문들에서 다양한 갈래로 발전하며 그 중요성을 잃지 않고 있다. 초창기 프로이트와 함께 였으나 이후 다른 분야로 갈라선 아들러와 융과의 비교가 종종 언급되는 점이 이 책에서 가장 유익하게 다가온 부분들이이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내재한 과거 체험이 현재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면서 인과론적이고 결정론적 입장을 취한 반면, 아들러는 개인의 삶에 대한 태도와 목적이 행동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서 삶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목적론적 입장을 취했다. (p. 40) 아들러 이론은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에 비해 상식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며 실생활에 적용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그러나 성격을 열등감과 우월성 추구의 관점에서 너무 단순하게 설명하고, 사회 적응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개인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 심리학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p. 42)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통해 아들러의 긍정심리학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아들러의 성격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학자들의 성격도 그 학자의 이론을 생각해내는데 밑바탕이 되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데도 새롭게 다가왔다. 유명학자의 이론은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었는데 학자본인들의 약점이 이론을 통해 보완되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원인을 유년기 성적 욕구와 관련한 심리적 외상으로 본 것과 달리, 융은 의식 또는 무의식에 치우친 삶의 결과 또는 종교적 심성의 문제로 보았다. 무의식이 개인적 체험의 기억만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의식의 기능을 보상하는 작용을 한다고 보았으며, 집단 무의식과 원형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독창적인 분석 심리학을 개척해 나아갔다. 종교와 신화, 원시 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며 무의식이 종교와 신화적 체험을 매개한다고 보았다. 융은 자신의 삶을 무의식의 실현 과정이었다고 말하며 자기 원형을 찾아가는 개성화를 치료 목표로 삼았다. (p. 43)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개인적 체험을 담고 있는 개인 무의식 외에 인류의 기억을 보관한 집단의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집단 무의식은 특정 유형의 인식과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원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과 집단 무의식은 융이 독창적으로 도입한 개념이며 융의 분석 심리학의 핵심을 이룬다. (p. 44)

융의 이론에 관심을 유도하는 대중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도 이 책에서도 책을 쓴 저자들은 융의 이론이 대중에게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점을 일단 인정하고 시작한다. 두 책다 비록 개괄서이다 보니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여하튼 느낌적으로 융의 이론은 개인개인에 하나하나 맞춘 분석이다보니 이론으로 정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포괄성이 특징인 것 같다. 너무 폭이 넓은데 개별적으로 다 다르다보니 일반 대중이 수용하기에는 난해할 수밖에 없다. 한가지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그나마 접근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아들러의 관점이 내향적이라면 프로이트의 관점은 외향적이라고 한다. 융은 둘다??;;;

성격이 곧 운명이란 말이 있다. 융은 "어떤 내적 상황을 의식하지 못하면 그 상황은 반드시 밖에서 운명으로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즉, 자신이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성격이 곧 운명이 된다는 뜻이다.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다이몬(운명, 소명, 내면의 소리)도 평소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성격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성격은 그 사람 전체를 말하며, 성격을 알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 (p. 57)

저자는 성격과 이런저런 성격유형론에 대해 안내한 후 융의 성격유형론에 대해 설명하는데, 태도유형으로 외햑적과 내향적, 기능유형으로 감각, 직관, 사고, 감정 그리고 보조기능으로 기능유형을 교차 적용시켜서 총 16가지의 성격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외향적-감각-사고 또는 내향적-직관-감정 뭐 이런 식이랄까... 이 16가지 성격유형이 헤깔리면서 복잡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융의 성격 유형 검사도구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이 MBTI 라는 것을 알고나니 아~! 싶었다.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운명적인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존재에 내재한 신적인 원리(다이몬, 로고스)에 따라 자연 또는 자신의 본성과 일치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신적인 것을 자기 원형으로 대체하면 융의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p. 253)

며칠전 에픽테토스 관련 책을 읽었는데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 ㅎㅎ

에픽테토스의 철학이 융의 정신분석과도 닿아 있었구나~

융의 분석 심리학적 치료는 딱히 정해진 이론이나 방식이 없다. 정해진 한 가지 이론에 꿰맞추기보다는 개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개별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p. 309) 융은 개인 무의식에 원형으로 구성된 집단 무의식의 개념을 더하고, 인격을 구성하는 콤플렉스, 페르소나, 그리마, 아니마·아니무스의 개념과 역할을 소개했다. 또한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입장과 달리 무의식의 자율적이고 목적에 부합하는 보상 기능을 강조했다. (p. 371) 융의 분석 심리학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인격의 중심을 '자기'라 일컫고, 무의식에 내재한 부분은 인격을 의식하고 통합해서 자기 원형에 다가가는 개성화 과정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치료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분연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융의 치료는 미리 치료 계획을 세우거나 정해진 방식을 따르는 체계적 치료가 아니다. 융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환자보다 치료 방향을 더 잘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략) 융은 한 가지 이론에 얾매인 치료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치료 기법 보다는 치료자의 세계관과 진정성 있는 태도를 중시한다. (p. 372)

융의 이론으로 정신분석과 치료가 가능한 치료자는 정말 드물게 배출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이론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고도 가능해야 하고 종교적 포용력에 가까운 수용능력과 내밀한 개인적 진정성까지 갖추어야 하니... 여하튼 최근의 심리치료의 경향은 분명히 융의 방식으로 느껴지긴 한다. 환자 개개인의 성장발달과 환경과 성격을 두루 분석하면서 환자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스스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 융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을까 싶기도 하고... 문득 생각해보니 융의 치료방법은 심리치료적이고 뇌과학적 치료는 다른 계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분석학은 오래되지 않은 학문분야이니만큼 앞으로도 변화무쌍할 것 같다.

융의 치료방법이 딱히 정해진 이론이나 방식이 없고 개인화 되어 접근하는 것이다보니 그런 융의 이론을 토대로 하는 저자의 사례들 또한 한가지로 수렴되지 않은 다양성의 총체였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성격분석사례들을 읽으면서도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배워 내게 적용시킬 수 있는건지 정리되지 않았다. 그냥 읽으며 아그렇구나 음그럴수있지 하며 남의 이야기로만 읽고 넘길뿐;;;

일반인을 대상으로 알기 쉽게 쓴 융에 대한 책을 찾기 힘들어 이 책을 썼다는 저자의 책이 이렇게 애매하게 뚝뚝 끊어지는 책이 아니라 1부와 3부 처럼 이론적인 내용들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한 융의 정신분석학적 책이거나 2부의 사례들을 좀더 명확히 분류하며 풀어낸 힐링지침서적 책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겨본다.

여하튼 결론이라면... 다 생긴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 생김이 성격이라면 성격일 것이고 자아라면 자아일 것이고 기타등등 다른 단어들로 표현되기도 하겠지지만, 자신의 생김생김을 잘 몰라서 혹은 착각해서 인생살이에 자꾸 오류가 발생하곤 하는 것이니 자신의 생김을 잘 파악하며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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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
홍성남 지음 / 아니무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웃음으로 마음과 몸의 건강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

 

 

대학졸업과 군제대 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늦깎이 신부가 된 저자는 불혹에 접어들었을 때 대학원에서 영성상담심리를 더 배워 각종 상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다보니 그동안 스님 책은 여러권 읽었어도 신부님 책은 처음이다. 기독교문화에 워낙 낯설음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보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고른 것인데... 읽다보니 음;;; 신부님께서 이러셔도 되나? ^^;;;;;

난 우리 본당 신자들이 밉다.

신부는 돈이 아니라 기도로 산다 했더니

축일 날 한 푼도 안 내놓는다. (p. 12)

진상 신부 넋두리1 中

본문의 첫 장 첫 단락이다. 홍성남 신부님식 유머인가보다;;; 아무리 유머라지만 정말 거침이 없는 신부님이라는 것은 읽어나갈 수록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주님, 주님!

전 누구보다 똑똑한 신부입니다.

근데 왜 제가 기도하면 외면하시고

매번 시벌 놈이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주님 출신 성분에 의구심이 생깁니다. (p. 17)

진상 신부의 기도 中

분명 진상신부를 꼬집는 유머이긴 한데... 웃어야 하나?;;; 웃어도 되나?;;; 나는 신자가 아닌데도 이런 당황스러움이;;;

난 순명하는 신부이다.

성경 교리서와 교회 공문 외에는 일체 보지 않는다.

강론도 교회 공문을 정확하게 읽는다.

보좌 놈은 품위 없이 지저분하고 잡다하게 독서한다.

근데 신자란 것들은 왜 나는 무식하고,

교양없는 보좌 놈은 박식하다 칭찬할까?

사람을 몰라보는 천박한 것들이다.

근데 왜 주님께서는 꿈마다 나타나서

공부 좀 해라 '시벌 놈아!'라며 욕질을 하시는 걸까?

신분이 천박해서 사람을 몰라보시는 듯하다.

하긴 목수의 아들이 나 같이 수준 높은 사람을 어찌 알까? (p. 25)

자부심 강한 신부 中

아무리 유머라지만 신자들은 계속 천박한 것들이라 윽박지르고 예수의 신성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수시로 하며 욕설까지 섞어 쓰는 이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난 대체 어떤 웃음처방전을 골라야 할런지;;;

혼밥이 싫어서 아는 자매들 불러서 밥 먹는데

돈 많고 예쁜 년들하고만 밥 처먹으로 다닌다고 수군거린다.

그래서 혼자 먹었더니

성질머리 더러워서 같이 밥 먹자는 사람도 없다고 수군댄다.

에라이.

난 스스로 괜찮은 신부라 여기는데

이상하게 신자들은 내가 이상하다고 다른 신부들에게 간다. (p. 48)

이상한 신부 中

뒤로 갈수록 나아(?!)지기는 한다;;; <1. 나는 진상 신부가 아닙니다> 에서 온갖 유형의 진상 신부 모습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그 거침없는 과격함에 이걸 정말 유머로 읽고 넘겨야 할지... 나는 솔직히 살짝 멘붕에 빠졌다. <2. 꼰대 유머> 에서는 진상 신부 보다는 차라리 나아보이는 꼰대 신부의 에피소드들을 빗대어 꼰대를 비꼰 것 같긴 한데 이또한 유머로 웃고 넘기기엔 너무 현실적이라... 어디서 웃어야 하나;;; <3. 나의 작은 전쟁> 이 그나마 저자의 정상적인(?!) 에세이 모음이라 그나마 좀 편안해진 마음으로 책을 마무리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사람들의 마음이 우울과 불안의 파도에 이리저리 치이며 지쳐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작은 웃음이라도 선물하고 싶어 졸저를 내놓습니다" 라는 서문을 가진 이 책에서 나는 한번도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신부님식 유머를 몰라서 그런건지 이 신부님이 좀 이상한 신부님이라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경건한 척 무게잡고 통하지도 않을 설교 늘어놓는 것보다 좋긴 했는데... 여전히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는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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