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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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온인간이 되어가는 인경과

직장동료 희진의 잔잔하고 단란한 연대

 

 

지금까지 읽었던 자음과모음의 새소설 시리즈(밤의 행방, 빛의 마녀, 스모킹 오레오)들은 모두 취지에 걸맞다 싶은 느낌이 오는, 젊고 새로운 감각의 새·소·설· 들이었다. 작고 예쁜 이 작은 소설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이번 작품에선 또 어떨지 궁금했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역시' 였다.

이 넓은 사무실 내에, 부채질하거나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p. 12)

최인경은 여행사의 배테랑 가이드다. 같은 층에 근무하긴 하지만 팀이 다른 송희진은 사무실에서 에어컨 앞을 고수하며 회계라는 업무 특성상 비용처리 과정에서 대부분의 직원과 마찰을 겪는 고슴도치같은 존재였다. 서로 잘 모르던 두 사람이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으로 베트남 출장에 함께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인경도 몰랐던 인경의 비밀을 희진이 눈치채게 된다.

"최대리님, 최대리님. 언제부터 이랬어요?"

"송주임님, 뭐 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최근에 송주임님 너무 불편했는데, 갑자기 사람 놀라게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냐고요"

"최대리님, 팔이. 설마 했는데, 팔이, 이 더위에"

"뭐라고요? 송주임님, 똑바로 말해보세요.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대리님, 그거 맞요? 파충류나 양서류 그런 종류요, 땀도 안 나고 온도에 따라 체온도 변하고 하는, 그거 뭐더라, 그거요, 대리님" (p. 32, 33)

변온동물

아니 변온인간

인경은 몰랐다. 자신이 언제부터 땀을 흘리지 않았던건지 언제부터 더위에서 더 에너지가 넘쳤던건지.

희진은 더위를 조금도 못참는 체질이었다. 사내규정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의 짧고 얇은 복장으로 출퇴근을 고집하면서도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에어컨도 모자라 선풍기 여러대를 돌려야 그나마 살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희진에게 베트남에서 인경의 모습은 너무도 특이했다.

송희진과 나는 그날 사우나실에서 겪었던 일을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일이니 어디에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송희진의 답이 필요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우리의 추측대로 만일 내가 영영 변온성을 가진 인간으로 변해버렸다면, 그러니까 열대 기온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확실하다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당장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p. 42)

변온인간이라니.

SF도 아닌데 소설 속 주인공이 변온인간으로 변한다는 설정이 독특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몰입되었다.

작가의 심리표현 능력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내 체질 때문에 저절로 수긍이 되었다. 농담삼아 나는 내가 변온동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추위를 비정상적으로 타서 한겨울이면 양파처럼 켜켜이 옷을 껴입고 여름에도 왠만해선 땀이 잘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설속 인경처럼 더위속에 더 팔팔해지는 건 아니지만 추위와 더위에 대한 적응체질이 워낙 비정상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아서인지 인경의 갑작스런 변온인간 변화에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된다면 얼마나 막막할까?;;;

"그 유툽 채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구아나인가 뱀인가, 아무튼 그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는데 겨울철에 온도를 높여주고 습한 곳에서 키워도, 꼭 동면은 몇 주 정도 해야 한다고. 그 이유가 탈피라는 걸 해야 한다던가" (p. 70)

봄에 시작한 이 소설은 여름과 가을 겨울로 향하면서 새로운 상황들을 연이어 만들어낸다.

실험체가 되어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연구소나 국가기관에 함부로 의논할 수도 없고 온갖 검색과 자료수집을 해봐도 변온인간에 대한 상황은 없었던 것 같고 우연히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람은 잘 모르던 회사동료 한명 뿐이다. 요즘 세상에 가족은 멀면 멀수록 좋은 관계일 경우가 많다. 인경도 그랬다. 누구하고도 비밀을 의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회사동료는 왜이렇게 인경을 도와주는 걸까?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인경 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거면 지금 이 상황을 함께 감내할 만한 이유로도 충분하고, 어쨌든 나름의 책임감도 생기고요"

"제가 희진씨에게 도움을 줬다고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을 보태지 않으셨잖아요, 그런 소문들에" (p. 77)

"누구나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인경 씨처럼" (p. 80)

저자는 2019년 겨울에 이 작품을 썼는데 그해 10월과 11월에 연이어 세상을 떠난 두 여성 연예인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보며 우울과 슬픔을 겪었다고 한다. 그 시간들의 일부분이 이 소설에 엮이에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닥친 막막한 상황을 가족도 친구도 그 어떤 의지처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다가 어느순간 비수가 되어 돌아올 그런 말들이 생기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때 뜻밖의 인물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연대감은 또다른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음을 소설로 표현하면서 그런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있는듯 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죠.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어쩌죠. 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 겨울, 서른세 번째의 겨울에 떠나도록 되어 있는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것이라면 어쩌죠" (p. 196)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좋겠어요. 겨울에만 살아 있는 동물들도 있을 텐데, 나는... 겨울에 이렇게 자도 되니까요" (p. 199)

매달매달 달라지는 몸상태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인경과 그 모든 과정에서의 고민을 함께 해주는 희진을 보며 직장동료 그 이상의 연대감을 보여주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겨울에서 끝난다. 변온인간으로서 처음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신선함이 먼저 다가왔다면 아마도 이 소설은 SF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정이나 상상력보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함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새로운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기에 이 소설은 희망을 품은 새·소·설·로 다가왔다. 그 어떤 계절보다 봄은 항상 기다림과 희망을 상징하는 계절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내게 봄같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인경과 희진이 꼭 함께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지구가 한 번 공전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은 채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 그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p. 202) 이번 봄이 아니면 내년의 봄이, 이 여름이 아니라면 언젠가 다가올 여름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p. 203) -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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