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의 연인 1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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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룰 때,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존중할 때... 비로소 삶은 견딜 만해진다.

계급을 넘어선 두 남녀의 사랑을 세밀히 묘사한 탓에 금서로 사라질 뻔했던 이 작품은 출간 6주 만에 2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며 널리 사랑받았다.

"이제껏 로렌스만큼 성<性)과 사랑의 힘 다툼을 제대로 표현해낸 작가는 없었다" - 도리스 레싱 서문 中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이 작가의 이름이 내 머리에 각인되게 된 계기는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박물관에서 본 문장때문이었다. 재작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에트루리아전을 보던 중 전시회장 곳곳에 쓰여있던 로렌스의 여행기에서 뽑은 문장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로렌스의 에트루리아 여행기는 국내 번역된 것이 없었고 그렇게 알아보던 중 로렌스가 유명한 소설가였다는 것을 알게됐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라는 소설 제목은 들어봤지만 해외작가이름을 워낙 잘 못 외우는 편이라;;;

그렇게 에트루리아도 로렌스도 흐릿해지던 요즘 페이퍼북스타일로 가벼운 표지를 한 펭귄북의 새 책을 알게 됐다. 이참에 드디어 로렌스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무삭제판 출간시 기소되고 영미권에서 검열에 걸려 정식 출판되기까지 상당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나 노골적인 성묘사와 비속어 그리고 하층계급 남자와 귀족부인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등의 자극적인 안내문구가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 맞지 않아 거부감을 조금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도리스 레싱의 서문에서 그런 불편한 선입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서문이라기보다는 작품해설에 가까운 긴 서문을 먼저 읽고 작품을 시작하고 보니 왠지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 작품의 가치를 찾는데 좀더 집중하게 만들기도 했다.

채털리 부인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벌거벗은 고디바 부인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중략) D.H.로렌스 덕분에 희극배우라면 누구든 사냥터지기를 언급하면서 웃음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로렌스가 섹스를 일종의 신비롭고 신성한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결과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로 설파했다는 것이다. (p. 7)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출간되기 이전에 로렌스는 이미 성 개혁운동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은 출판이 금지되거나 판매 중에 압수되었고, 이미 판매된 책은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p. 9) 이 사람의 천부적인 재주는 놀랍고, 그의 최상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영문학 작품을 쓴 작가는 한 사람도 없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고, 로렌스는 이 작품을 자신의 유언으로 여겼다. (p. 44) - 도리언 레싱의 서문 中 -

1885년 에 광부아버지와 교사어머니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 걸린 폐렴으로 평생 힘들어하다가 1930년 4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로렌스에게 이 작품은 1928년에 (3판으로 최종본을 다시 써내) 출판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의 소설에서의 성적지향은 그의 아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로렌스는 27세때 스승이었던 교수의 부인이자 여섯살 연상이었던 프리다와 사랑의 도피 후 (프리다의 이혼절차가 마무리된 후) 결혼식을 올렸고 이 커플의 사랑은 여러면에서 독특함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참고로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를 찾아가보고 연구하여 에트루리아 여행기를 펴낸 것은 1927년이다. 그리고 이 당시의 이탈리아는 세계1차대전 직후의 혼란 속에 무솔리니의 극우적 파시즘이 퍼져있던 (거의 반전시 준비)상태였다. 거의 백여년 전의 작품인 이 소설을 읽다보면 놀라우리만치 지금의 현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최근 읽었던 경제서에서 2차세계대전 직전의 경제상황과 지금의 현실이 거의 흡사하다며 경고하는 내용을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로렌스가 작품속에서 산업발달로 인한 자연의 훼손과 자본주의 심화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언급할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의 사회문제와 비슷한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변동이 일어난 후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세우고, 새롭고 작은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가거나 기어 넘어간다. 우리는 살아 나가야 한다. 하늘이 아무리 여러 번 무너진다 해도 말이다. (p. 49)

소설의 첫 문단을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으니 더 와닿는다. 이 시작은 작가가 이 작품의 결말을 미리 말해준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비극적인 시대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비애를 표현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세 페이지만에 콘스탄스는 채털리 부인이 됐고 클리퍼드 채털리는 전쟁에서 당한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의 휠체어신세가 됐다. 한달의 신혼기간후 참전하고 돌아온 클리퍼드의 모습은 이 부부에게 이미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코니 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채털리 부인은 젊다고하기보다 차라리 어린 나이였고 준남작인 클리퍼드경은 젊었으나 남성성을 잃었다. 그렇게 생경한 모습으로 외따로 떨어진 고향집 랙비 저택에 이 어리지만 슬픈 부부가 들어와 살게 됐다.

클리퍼드는 코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무력했기 때문에 매 순간 그녀를 필요로 했다. (중략) 그는 코니가 항상 곁에 있으면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단편소설을 쓰는 일에 전념했는데, 내용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에 관한 이상하면서도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쓴 단편소설들은 재치 있고 꽤 심술궂기도 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다소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관찰력이 비범하고 독특했지만 접촉해 있다는 느낌, 실제로 어딘가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마치 모든 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같았다. (p. 69~70)

그들은 매우 친밀했으나 접촉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이였다. (p. 73)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부부이지만 생과부상태로 살게 된 코니에게 클리퍼드는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를 주지시키지만 해가 지날수록 아무 '접촉' 이 없는 관계란 서로에게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코니는 자기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접촉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 광기처럼 그녀를 사로잡았다. (중략) 광적인 불안감이었다. 그때문에 심장은 아무 이유없이 격렬하게 뛰었고 그녀는 점점 야위어 갔다. 그것은 불안감일 뿐이었다. 코니는 클리퍼드를 내팽개치고 공원을 가로질러 달려나가 고사리 덤불 위에 엎드리곤 했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집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숲은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지성소였다. (p. 77)

다행히 렉비 저택은 공원과 숲이 딸린 대저택이었다. 숲은 코니에게 숨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코니는 저택에 손님으로 왔던 마이클리스라는 극작가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를 자신의 연인으로 여겨보기도 했지만 마이클리스는 코니에게 숲이 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 말에 동의하는 거지, 그렇지? 함께 살아가는 평생에 비하면 어쩌다 갖는 우연한 성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말이야.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끌리기 때문에 그저 섹스를 이용할 뿐이라고. 그런 일시적인 흥분이 중요하기는 할까? 인생의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의 완전한 인격을 서서히 쌓아 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온전한 삶을 사는 것 말이야. 온전하지 못한 삶은 아무 의미가 없어. 성관계가 없어서 당신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서 연애를 해. 아이가 없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아이를 가져. 그렇지만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면 그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여야만 해. 그래야 길고 조화로운 것이 되지. 그리고 당신과 나 둘이 힘을 합해 그렇게 할 수 있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중략) 내 말이 맞지 않아? (p. 125)

코니가 야위어가고 우울해져갈수록 클리퍼드의 집착은 더 집요해졌다. 하지만 코니에겐 점점 더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갈 뿐이었다. 처음엔 왜그런건지 스스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클리퍼드의 시중을 들며 하루하루 묵묵히 감내할 뿐이었고 가끔 숲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지만 코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당하다는 느낌, 기만당했다는 느낌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느낌은 일단 그것을 의식하고 나면 위험한 감정이었다. 배출구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느낌을 의식한 사람의 마음을 파먹어 들어간다. (p. 175) 반항심이 코니의 마음속에 사무치게 끓어올랐다. 이 모든 짓거리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신의 삶을 클리퍼드에게 헌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p. 176)

코니의 언니가 코니의 상태를 알고 렉비저택으로 와서 문제해결을 모색한다. 클리퍼드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코니의 언니는 코니를 의사에게 데려가고 간호사 출신인 볼턴부인을 고용하여 클리퍼드를 돕게 함으로써 코니에게 코니만의 시간을 갖도록 정리해준다. 코니는 점점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올리브는 미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미래에는 아기들을 병속에서 기르고 여자들은 아기를 낳는 일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p. 179)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책속의 책 발견~ ㅎㅎ

문명사회는 제정신이 아니다. 돈과 소위 사랑이라는 것, 이 두 가지에 문명사회는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물론 돈에 단언 광적으로 집착했다. 개인은 서로 아무 관련 없이 미친 상태에서 돈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p. 224)

진정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공감이 흘러가고 물러나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소설, 바르게 다룬 소설이 지는 엄청난 중요성이 있다. 제대로 창작한 소설은 우리의 공감 의식이 흘러갈 새로운 장소를 알려 줄 수 있고 또 실제로 우리의 공감을 죽어버린 사물을 피해 멀리 달아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제대로 창작하기만 하면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드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섬세하고 민감한 인식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며 정화하고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삶의 열정적이고 내밀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p. 232)

얼마 안 있으면 지구 껍데기에는 사람이 아무 쓸모없어지고 온통 기계만 남게 될 날이 올것 같아요. (p. 241) 세상이 해마다 바뀌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어요. (p. 242) 그녀는 이따금 일종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문명화된 종족 전체가 광증의 초기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는 공포감이었다. (p. 249)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작품속에 수시로 언급되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은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깨닫게 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당시를 비판하는 내용들은 지금의 현실에 대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는 점이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저자가 해결점으로 선택한 방법이 좀 개인적이었을 뿐.

코니는 오후에 닭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조그만, 아주 조그만 새끼 꿩 한 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닭장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깡충거리며 돌아다니고 어미 닭이 겁에 질려 꼬꼬댁거리고 있었다. (p. 255) 코니는 이 모습에 매혹되어 넋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통렬하게 여자 역할에서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에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지고 있었다. (p. 256) 사냥터지기는 그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있는 그 대담하고 작은 새를 주의깊에 지켜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손목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p. 258) 그는 걱정스럽게 코니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모로 돌린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자기 세대에서 버림받은, 쓸쓸한 처지에서 오는 온갖 고뇌에 빠진 울음이었다. (p. 259) "저기 누워유!" 사냥터지기가 부드럽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실내가 어두워졌다.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묘하게 순종적인 태도로 코니는 담요위에 누웠다. (p. 260)

사냥터지기 멜로즈. 광부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쟁에 참전했을때 장교까지 올라갔던 남자.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와 사냥터지기로 숲속 오두막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그는 여자에게 받은 상처로 더이상 여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코니는 달랐다. 멜로즈와 코니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것이 두 연인의 로맨스가 이루어져가는 설레이면서도 짠할수도 있는 그러한 전개들을 읽는 기분이 좀 독특했다. 코니의 마음을 읽을때도 멜로즈의 마음을 읽을때도 연인으로서의 두 인물의 심리가 아니라 저자의 독백을 읽는 것만 같았다. 성불구이자 상류계층으로서의 독재적 면이 있는 클리퍼드와 성능력자이자 하류계층으로서의 상실감이 있는 멜로즈라는 두 남자의 생각을 읽을때도 로렌스 자신의 서로다른 두 자아를 읽는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클리퍼드는 작가이자 주류였고 멜로즈는 성해결사이자 비주류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처럼.)

남자는 다시 내려가 외부와 격리된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는 숲이 외부와 격리되었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업 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고독을 갰고 날카로운 불빛들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숲을 조롱하고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은둔하여 물러나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은둔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여자를 취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고통과 잘못된 운명의 새로운 순환에 뛰어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여자의 잘못도 아니고 심지어 사랑의 잘못도 아니고 섹스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은 저기, 저 바깥세상에, 저 사악한 불빛과 악마처럼 덜거덕거리는 엔진 소리에 있었다. (p. 265~266)

코니와 멜로즈는 두 사람다 각자의 인생에서 커다란 변곡점을 맞았다. 어떤 의미로 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1권은 이 책을 읽기전 갖고 있던 선입견들이 무색하리만치 외설시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 의아해지게 하는 줄거리였다. 오히려 작가의 시대적 한탄과 자아 성찰의 내용들이 소설인듯 아닌듯 현실적 고뇌로 읽혀지면서 로맨스, 불륜, 연인 같은 소재들보다 더 큰 범주의 고민들을 던져놓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점들은 2권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2권은 여러 면에서 1권보다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굶주리라고 주문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굶주리는 것이 절대 고상한 목표는 아니잖아. 보편적인 가난도 역시 좋은 일이 못 되고, 가난은 추한 거야"

"불평등은요?"

"그건 운명이야. 왜 목성이 해왕성보다 크지? 사물들의 근본적인 짜임새를 바꿀 수는 없어!" (p. 38)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른 낳느냐가 아니라 운명이 우리를 어느 자리에 갖다 놓느냐 하는 거야"

"그렇다면 하층 대중이라는 것이 본래 타고난 어떤 종족은 아니라는 거네요. 귀족이라는 것도 본래 타고난 혈통은 아니고요"

"맞아, 여보! 그건 모두 낭만적ㅇ니 환상이야. 귀족 계급은 하나의 역할, 운명의 한 부분이야. 그리고 대중에게는 운명의 다른 부분을 맡아서 하는 역할이 있지. 개인은 거의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그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맡도록 키우고 길들이느냐 하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공통된 인간성이 전혀 없네요!"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 우리는 우리 배를 채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표현하는 기능이나 실행하는 역할이라는 문제에서 지배계급과 섬기는 계급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절대적인 심연이 있다고 믿어. 두 계급의 역할이 서로 상반되지. 그리고 그 역할이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거야." (p. 42, 43)

이 소설은 코니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코니가 클리포드와 하는 대화를 통해 점점 코니의 생각이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코니가 멜로즈와 하는 행위를 통해 점점 코니의 사고방식이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니는 양 극단의 두 남자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을 확실하게 깨닫고 주체성도 키워나간다.

돈, 돈, 돈뿐이라니까유! 모든 현대인들은 인간에게서 본래의 인간적인 감정을 죽여 없애는 데서, 아담과 이브를 분쇄해 버리는 데서 진정한 흥분을 얻는다니까유. 모두 똑같아유. 세상 전부가 똑같아유. 인간의 실체를 죽여 없애는 거지유. (p. 107)

우리 뭔가 다른 것을 위해 살자. 돈만 벌기 위해 살지는 말자. 우리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든 그러지 말자.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 벌고 우두머리를 위해서는 아주 많이 벌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만두자! 조금씩조금씩 그것을 그만두자. 우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떠들어댈 필요는 없다. 조금씩조금씩 산업사회의 삶을 벗어나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자. 돈은 아주 조금, 최소한만 있으면 될 것이다. 모든 사람, 나와 당신, 우두머리와 주인, 심지어 왕을 위해서까지도 말이다. 돈은 아주 조금, 최소한이면 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심만 하면 이 엉망진창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p. 110~111)

신사교육을 받았고 표준어를 구사할 줄 알지만 장교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일을 물려받고 사투리를 고집하는 멜로즈와 귀족이라는 신분과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떠나 오직 여성성으로만 자신을 어필하는 코니는 서로 닮아있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숲속 오두막집에서 서로만을 원하며 살기를 바라는 이 커플의 모습은 서문에서 읽었던 로렌스의 실제 삶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보다 더 훌륭한 실재라고 믿어요. 육체가 정말로 깨어나 살게 될 때에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그 유명한 바람소리기계처럼, 육체적으로는 죽어 있는 시체에 불과한 몸뚱이에 정신을 매달고 살아갈 뿐이에요"

"육체적 삶이란 것은 그저 동물적인 삶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p. 141)

사람들은 모두 유령 같고 얼빠져 보였다. 아무리 활달하고 잘생긴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행복이 전혀 없었다. 모두 메말라 있었다. 코니는 행복에 대한 여자의 맹목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고 행복을 확신하고 싶었다. (p. 179)

2권에서 묘사되는 성적 장면들은 외설적이라기 보다는 로렌스의 철학적 판단처럼 읽혀졌다. 작가가 느끼는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추구한 해결 방법은 육체적 접촉이었다. 계급격차와 자본의 논리 그리고 성적 합일에 대한 인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2권은 통속적으로 읽힐수도 있는 스토리였지만 그또한 로렌스식 적나라함과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나는 돈의 뻔뻔스러움을 증오하고 계급의 뻔뻔스러움을 증오하오. 그러니 현재의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한 여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소?" (p. 221)

"그렇지만 왜 꼭 무엇을 주어야 해요? 이건 거래가 아니잖아요. 단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뿐이잖아요." (p. 222)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인간들 사이의 육체적 접촉의 깨달음을, 부드러운 애정의 접촉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내 동반자다. 이것은 돈과 기계와 이 세상의 생명 없는 관념적인 원숭이 같은 작태와의 싸움이다. 그러니 이 여자는 내 뒤, 바로 거기에서 나를 후원할 것이다. 고맙게도 내게는 한 여자가 있다! 너무나 고맙게도 나에게는 나와 함께 있엊고, 부드러운 애정이 있고, 나를 알아주는 한 여자가 있다! 고맙게도 이 여자는 난폭한 여자도 아니고 바보다 아니다. 고맙게도 이 여자는 부드러운 애정이 있고 의식이 깨어 있다' 그리고 그의 정액이 그녀의 몸속으로 용솟음쳐 들어갈 때, 그의 영혼도 그녀를 향해 솟아올라 나아갔다. 그것은 생식 행위를 넘어서는 창조 행위의 솟아오름이었다. (p. 227)

존 토머스와 제인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커플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들의 자아실현의 한 방법으로 서로가 육체적 접촉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아직 읽기 전이라서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서문에서 보니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경향을 띠었던 것 같다. 소설가라서 이런 해결방법에 도취되었던 것일까? 2권의 뒷부분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 라는 글로 작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한 해명?이 상당히 길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성(性)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따라잡아야 한다. 아니, 모든 육체 활동에서 그래야 한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성적인 사고에서 뒤처져 있으며, 흐릿함 속에 미숙하고 다소 야만적인 조상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천박하고 감추어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바로 성적이고 육체적인 이 한가지 점에서 정신은 진화하기 않은 채 머물러 있다. 이제 우리는 따라잡아야 하고 성에 대한 의식과 성행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육체적 느낌과 경험에 대한 사려 깊은 의식, 이 육체의 느낌과 경험 자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행위에 대한 의식과 행위 자체의 균형을 맞추자. 이 둘을 조화시키자' 이 말은 성에 대해 적절한 경의를 표하며 육체적 이상한 경험에 적절한 외경심을 품으라는 의미다. 이 말은 소위 외설적인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 단어들이 정신이 육체에 대해 갖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외설이라는 것은 정신이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저항할 때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p. 282)

지금까지 어떤 시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보다 감상적이고, 진정한 느낌이 결여되고, 거짓된 느낌을 과장한 적은 없었다. (p. 288) 가짜로 만들어낸 정서의 문제점은 어느 누구도 정말로 행복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p. 289)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탈고한 지 거의 이 년이 지난 후에 쓴 이 글에는 무엇을 설명하거나 해설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어쩌면 이 책의 배경으로 필요할지도 모를 정서적인 믿음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이 책은 관습에 도전하여 쓰인 책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도전에 대한 어떤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 같았다. (p. 328)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 中 -

자비로 소량 출판한 자신의 책이 해적판으로 너무나 인기를 얻으면서 본내용이 왜곡되기까지 함으로써 저자는 온갖 비난을 받지만 그에 맞서는 소책자를 내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정도로 저자는 용감하다. 소설에서는 그나마 은유적으로 당대의 문화를 비판했다면 이 소책자에서는 논리적으로 성인식과 결혼 그리고 종교까지도 문제가 있음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갑론을박이 난무했을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시니컬하거나 독단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소설에서는 (비록 방법적으로 무난하지 않다해도) 로맨티스트 로 사상적으로는 성평등주의자 로 보이는 로렌스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어쩌면 혁명가처럼 느껴지는 이 소설가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진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고전임은 분명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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