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 원전 번역본) - 톨스토이 단편선 현대지성 클래식 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홍대화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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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유독 가혹하다 느껴질 때 읽는 10편의 인생 단편!

대문호 톨스토이가 평생 구하다가 발견한 "내가 사는 이유"

 

톨스토이의 단편집인 이 책은 '사람은 무엇으로 하는가' 라는 제목 자체가 울림을 주는 단편을 필두로 하여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짧은 단편들을 수록하고 있는 책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그냥 동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책 속의 단편들은 기존의 어린이 동화로 나온 것들도 여럿이다. 교훈적인 내용을 당시의 무지한 농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쓴 것이기에 동화형식으로 보이는 작품들은 종교적이지만 톨스토이가 러시아정교에서 파문당할만큼 당대의 종교와는 차별성 있는 종교관을 가졌기에 주류 종교에서는 조금 비껴나있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난한 제화공 세묜은 추워지는 날씨에 변변한 겨울외투조차 없다. 받아야 할 외상값을 수금하여 외투를 사고자 나선 길에 외상값은 받지도 못하고 교회옆에 쓰러진 젊은 남자를 구조하여 집에 데려오게 된다. 아내인 마뜨료나는 새외투를 사오기는 커녕 식객과 함께 온것에 대해 남편에게 화를 퍼붓는다. 하지만, "마뜨료나, 자네 속에는 하나님이 없는가?" (p. 20) 라는 남편의 한 마디에 마음이 풀어져 집에 남은 마지막 빵으로 저녁을 차린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모를 젊은 남자 미하일라는 세묜에게 제화기술을 배워 세묜보다 더 뛰어난 제화공이 됨으로써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어가며 몇년동안 가족처럼 지낸다. 그러다 미하일라가 세번째 미소를 짓던날 드디어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한다.

"저는 징벌을 받은 중이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제게서 빛이 나는 겁니다.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세 마디를 깨달았기 때문에 세 번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 번에 걸쳐 깨달았습니다. 한 번은 주인 아주머니가 저를 불쌍히 여겼을 때 깨달았고, 그렇기 때문에 처음 미소를 지었던 겁니다. 부자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 저는 다른 말씀을 깨달아서 두 번째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 소녀들을 보았을 때,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을 깨닫고는 세 번째로 미소를 지은 겁니다." (p. 35)

미하일라는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알게 되리라. 그것을 알게 되거든, 하늘로 올라오너라' (p. 40) 라는 말씀을 듣고 맨몸으로 인간세상에 떨어진 천사였다. 그리고 세묜 가족과 여러 해 동안 함께 살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며 세가지의 깨달음을 모두 얻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한 도시에 제화공 마르띤 아브제이치가 살았다. 그는 창문이 하나만 있는 헛간 지하방에 살았는데, 창은 거리로 나 있어서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르띤은 그 장화로 사람을 알아보았다. (중략) 아브제이치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자 자기 영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p. 43)

마르띤은 넉넉하진 않아도 가족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성실한 제화공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 불행이 연속으로 닥쳤다.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세상을 일찍 떠났다. 마르띤은 신에게 불만스러웠다. 방황하던 어느날 순례자와 대화를 하게된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p. 44) 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지' 라고 순례자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건 어떤 건가?'(p. 45) 그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마르띤을 매일 성경을 읽게 되고 어느날 '마르띤, 내일 거리를 보라. 내가 오리라'(p. 47) 하는 음성을 듣는다. 다음날 창밖을 유심히 보던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노인, 굶주리고 갈곳없는 아기엄마, 사과를 훔치려던 소년과 사과파는 노파를 만난다. 그리고 그가 구원자를 대접했음을 깨닫게 된다.

『두 노인』

"친구! 살면서 죄를 짓는 것 말고는 속상할 일이 하나도 없네. 영혼보다 더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거든"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집 안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맘으 불편하네"

"우리 영혼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이 더 나쁜 거라네. 약속했으니 함께 가세나! 정말로 함께 가세나!" (p. 63)

 

두 노인은 한동네 사는 친구다. 예루살렘으로 기도하러 가는 것이 소원이던 두 사람은 드디어 길을 나서기로 한다. 한 사람은 부유한 농부이나 집안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하지 않으면 걱정되는 예핌이고 한 사람은 가난한 농부이지만 가족을 믿고 마음이 늘 편안한 옐리세이 였다. 각자의 처지껏 떠날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난 두 노인은 중간에 헤어지게 된다. 예핌은 친구를 기다며 찾으며 예루살렘 순례를 마쳤으나 옐리세이는 잠시 물마시러 들른 농가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차마 떠날 수 없어 도와주다보니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옐리세이의 뒷모습을 예핌은 예루살렘 순례지 곳곳에서 볼 수 있었으나 막상 가까이 다가가보면 친구는 없었다.

그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그러니까 그가 어디에 앉았는지 어디서 잤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앞다투어 전했다. 밤이 되자, 주인 농부가 말을 타고 와서 역시 마찬가지로 엘리세이에 대해 자기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죄 가운데 죽었을 겁니다. (중략) 이전에는 짐승처럼 살던 우리를 그분이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어요" 이들은 예핌을 잘 먹이고, 잘 마시게 한 후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자신들도 잠자리에 들었다. (p. 87)

예루살렘에서 온갖 성지를 둘러보며 그리스도가 말과 행동을, 어디에 앉았고 어디서 잤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를, 누구에게 무슨말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 듣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농가에서 예핌은 후한 대접을 받으며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돌아온 집에서 가족들은 떠나기전보다 더 자신을 원망하며 불평하고 있었고 엘리세이는 떠나기전보다 더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 엘리세이를 보며 예핌은 말한다.

"발만 갔다 온 건지, 영혼도 다녀온 건지, 아니면 다른 누가 갔다 온 건지..." (p. 90)

『초반에 불길을 잡지 못하면 끌 수가 없다』

얘야, 너는 아무것도보지 못하고 있어. 원한이 네 눈을 감겨버렸어. 다른 사람의 죄는 눈앞에 있어 잘 보이는데, 네 죄는 등 뒤에 있어 못 보는 거야. 너는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는데, 혼자만 잘못을 저질렀다면 싸움이 나진 않았겠지.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거냐? 싸움은 둘 사이에 나는 거야. 상대방 잘못은 보이는데, 자기 잘못은 보지 못하는구나. 그 사람 혼자만 나쁜 짓을 하고, 너는 착하게 굴었다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p. 101)

사이좋은 이웃사촌이었던 이반네와 가브릴로네는 사소한 일로 다툼이 생기자 큰 불화로 번져 몇년간 서로를 비난하며 앙숙이 되어버렸다. 그런 두 집안을 보며 이반의 아버지는 이반을 타이르지만 이반은 아버지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러다 큰 화재가 발생하고 아버지가 다시한번 유언으로 남긴 말을 되새기며 두 집안은 마침내 화해하게 된다.

『촛불』

반짝이는데 꼭 불빛 같은 거에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오 꼬뻬이까짜리 양초가 버팀목에 붙어서 타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자는 새 옷을 입고 걸어 다니며 땅을 일구면서 부활찬송을 부르는 겁니다. 몸을 돌리고 흔들어대는데도 양초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흔들어대고 곤봉을 바꿔 끼우고 쟁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데도 여전히 양초는 꺼지지 않는 겁니다. (p. 125)

이번에 지주가 새로 보낸 관리인은 너무나 악독한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일을 시키고 트집을 잡아 매질을 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부려먹으면서 권력을 휘둘렀다. 마을 사람들은 죽이고 싶을 만큼 관리인이 원망스러웠으나 한사람 미하일로 만이 마을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다독인다. 관리인이 마을사람들을 감시하러 보냈던 촌장은 오직 미하일로 만이 관리인을 욕하지 않았다고 전하며 그의 양초 이야기를 한다. 관리인은 '그자가 나를 이겼어! 이제 내 차례가 된거야!' '난 이제 끝났어. 그자가 나를 이긴거야'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날이 최후의 날이 되었다.

『대자』(代子)

주께서 내게 아이를 줬다오. 아이는 어릴 때는 기쁨이요, 나이 먹어서는 위로요, 죽은 후에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존재지요. 그런데 제가 가난한 탓에 우리 마을에서는 대부를 해주겠다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군요. 그래서 다른 마을로 대부를 찾으러 갑니다. (p. 131)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탄생했을때 농부는 마을에서 대자를 구하지 못해 떠난 길에서 나그네를 만났는데 사정을 들은 나그네가 대부가 되어주겠다 한다. 대자가 열살이 되었을때 대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집이 어딘지 누구인지 물었으나 아버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여 대자는 대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길에서 만난 나그네는 자신이 대부라고 하며 집을 알려준다. 대부의 집에서 지내게 된 대자는 대부가 열지 말라는 명을 어기고 어떤 방문을 열게 되고 그 방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고 그로인해 벌을 받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녜게 이제 30년의 세월을 주마. 세상에 가서 강도의 죗값을 치르렴. 만일 죗값을 치르지 못하면, 네가 그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제가 그 사람의 죗값을 어떻게 치르지요?

세상에 네가 가져다준 만큼 악을 없앤다면 너와 강도의 죗값을 모두 치른 셈이다.

어떻게 세상에서 악을 없애지요? (p. 140)

 

대자는 마을을 지나며 마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해결해 주며 은수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으나 세 개의 숯에서 싹이 날때까지 입으로 물을 퍼날르라는 말만 남기고 은수자는 세상을 떠난다. 대자는 은수자의 집에서 고행인듯 수행인듯 살면서 강도를 만나고 그와의 인연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의 마음에 불이 일자,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불이 일었던 것이다. 대자는 이제 죄를 갚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뻤다.'(p. 153)

『바보 이반』

아주 옛날 옛적, 한 왕국에 어떤 부자 농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자 농부에게는 아들 셋, 그러니까 군인 세묜과 배불뚝이 따라스, 바보 이반이 있었고, 농아인 딸 말리니야를 슬하에 두었다. 군인인 세묜은 황제를 섬기기 위해 전쟁에 나가고, 베불뚝이 따라스는 장사를 하러 도시에 있는 상인에게 갔으며, 바보 이반은 누이와 집에 남아 등이 굽도록 땅을 일구고 있었다. (p. 157)

톨스토이가 동화처럼 쓴 단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아마도 <바보 이반> 아 아닐까. 간추려진 동화로 읽었던 <바보 이반>과 원전 그대로 읽는 <바보 이반> 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바보이긴 하지만 멍청이는 아니었다고나 할까. 우직하고 뚝심있고 삶의 태도에 대해 올곧은 믿음이 있는 이반은 한 나라의 황제가 되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 변하지 않음이 이반의 나라에 퍼져서 모두가 이반처럼 살게 되었다. 모든 것을 망치려던 마귀조차 어쩌지 못할만큼 이반의 나라는 바보이반 다운 나라가 되었고 '돌아온 탕아'같은 그의 형들까지 모두 품어주었다.

"그렇게 하세요, 여기 사세요, 우리나라에는 모든 게 풍족해요" 다만 그의 왕국에서는 지켜야 할 풍습이 하나 있었다. 손에 굳은 살이 있는 사람은 식탁에 앉고, 없는 사람은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p. 191)

『사람에게는 얼마만한 땅이 필요한가』

도시에 사는 언니와 시골에 사는 동생이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자기 자랑 남편 자랑을 한다. 자매의 대화를 들은 동생 남편 빠홈은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한다.

"저 말이 정말 맞는 말이네. 우리 형제는 어릴 때부터 이 땅을 파먹고 살아가느라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이 아예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지. 한 가지 서러운 게 있다면, 땅이 적다는 거야! 땅만 충분하다면 나는 그 누구도, 악마도 두렵지 않아!" (p. 196)

땅만 있다면 악마도 남편을 유혹하지 못할 거라고 자랑했던 농부 아내의 말을 들은 악마는 '좋았어, 한번 겨뤄보자. 네게 땅을 많이 주마. 내가 땅으로 너를 취하겠어' 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한 땅이 필요한 것인가?

악마의 계획인 줄은 꿈에도 모른채 농부는 조금씩 조끔씩 땅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땅이면 될 줄알았는데 살다보니 저땅도 필요해지고 저땅을 얻고자 노력하는 중에 유목민의 땅을 엄청 싼값에 얻었다는 상인의 말을 듣고 그 마을을 찾아간다.

이게 무슨 측량이지요? 하루에? 그럼 몇 데샤티나가 되는 건가요?

그런 건 우리가 헤아릴 줄 모르네. 하루동안 다닌 땅이 손님 것이니, 그 가격이 천 루블 이라네

하루 동안 다닌 땅이라면 꽤 넓을 텐데요

모두 손님 거라네! 다만 한가지 약속을 하세. 만일 자네가 출발한 그 장소로 하루 안에 되돌아오지 못한다면, 손님 돈은 사라지는 거네 (p. 206)

 

유목민의 마을 촌장이 말한 땅값은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그리고 측량법도 이상했다. 하지만 농부의 마음에 쏙 들었다. 땅도, 땅을 살 수 있는 조건도. 농부는 아침일찍 일어나 촌장과 마을사람들을 깨워 땅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아침일찍부터 쉬지도 않고 걸었다. 걷고 뒤돌아보면서 그땅이 다 자신의 땅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걷다보면 여기도 저기도 좋은 땅이 널려 있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하루가 저물고 있었고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돌아온 그가 결국 차지하게 된 땅은 2미터 가량의 무덤자리 뿐이었다.

『노동과 죽음과 질병』 은 단 3페이지짜리 작품으로 인간의 삶의 태도에 대한 전설을 통해 인간에게 노동과 죽음과 질병이 필요해진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에게 내려진 벌이었으니 그 벌이 왜 내려지게 되었고 그 벌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세 가지 질문』 도 5페이지의 짧은 단편이지만 이야기로 풀어지다 보니 교훈조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느날 황제는 만일 그가 모든 일을 언제 시작할지, 또 어떤 사람과 일하고, 어떤 사람과 일하면 안 될지, 더 중요하게는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한지를 항상 알 수 있다면 어떤 일에도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 223)

현명하다고 할만한 모든 사람에게 물었으나 모두가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황제는 지혜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은수자에게 묻기로 결심했다. 평민만 만난다는 은수자를 만나기 위해 변복을 하고 은수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은수자는 바로 답변을 하지 않는다. 그의 곁에서 답을 기다리며 그를 돕다 보니 하루를 훌쩍 넘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들은 대답은,

기억하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시간에만 우리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네. 우리는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라네. (p. 227)

'지금, 여기' 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은 동양적 가르침과 비슷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지금, 여기' 라는 깨달음을 넘어 '선'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더욱 강조한다. 이 책속에 실린 작품들이 주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네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

톨스토이는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복음서>를 꾸미는데, 종교를 윤리학 체계로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와 의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삼위일체론, 계시, 성모수태 및 그리스도의 부활, 기적 등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신약에서 우주론과 존재론을 삭제하고, 기적이 묘사된 모든 부분을 삭제한다. 또한 은총과 성령의 가르침은 인간 본성의 선한 것을 뿌리째 뒤흔드는 비도덕적 교리라고 비난하고 그 자체를 거부한다. 결국 그는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만다. (중략) 그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추출한 이 기독교적 윤리관을 평범한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구현하기 위해 작품의 색깔을 바꾼다. 더 쉽고 더 단순하고 더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체로 민중인 독자도 이해할 수 있는 동화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된 1881년 부터 1886년 사이에 쓰인 동화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윤리관과 무저항주의를 그대로 담은 작품들이다. 이 동화들에는 복음서 구절이 제사(題詞)로 제시되고 있다. (p. 233)

톨스토이는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윤리관은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적 윤리관과 조금은 달랐다. 러시아정교에서 파문당했다고는 하지만 원론적으로 보자면, 최근 읽었던 '마태복음' 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초기 예수의 혁명적 삶의 철학과 톨스토이의 종교관은 연결되어 보였다. 특정종교를 떠나 삶의 철학으로 보이는 톨스토이의 윤리관은 어찌어찌하면 니체의 철학과도 연결이 될 것 같아 보였다. 톨스토이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게 된 계기를 이 책에서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동화를 읽으면서 철학을 생각하게 되다니 내가 이상한건가 톨스토이가 잘 쓴건가 ㅎㅎㅎ

현대지성의 클래식 시리즈가 가진 장점을 이 책에서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는데 바로 충실한 <해제> 다. 작품과 저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긴 하나 톨스토이가 워낙 대문호이다보니 좀더 이해하고 싶어져서 이런저런 검색을 해보았다. 모순적이지만 그 모순을 알기에 괴로워했던 지식인으로서의 톨스토이가 그의 고뇌가 보였다. 가볍게 읽고자 했던 이 얇은 책 한권이 톨스토이가 가졌던 인생의 고민을 느끼게 해주다니... 동화로 읽자면 쉬운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고 동화가 아닌 것으로 읽자면 삶의 진리를 담은 묵직함으로 기억될 책이었다.

톨스토이는 복음서 속 예수의 말씀을 실생활에서 적용 가능한 행동강령으로 정리하여 이야기 안에 구현했다. 당대 혁명운동과 폭력성과 편협성을 보면서 진정한 변화는 개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됨을 역설했고, 영혼의 거듭남과 부활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인생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내가 사는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묵직한 울림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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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분 마음챙김 - 세계적 명상스승 아잔 브람의 365일 행복 명상록
아잔 브람 지음, 여현 옮김, 각산 감수 / 느낌(느낌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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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통은 선택사항

내려놓으며 얻는 비움의 행복

"하루 1분 당신의 하루를 채워주는 책"

 

 

아담한 사이즈에 명언 같은 짧은 글, 그리고 볼수록 매력있는 만화풍의 그림. 이 책은 '명상'에 대한 길고 자세한 설명이 아니라, 한마디로 명쾌하게 동시에 말보다 진한 깨달음으로 풍부하게 '명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무엇보다도 '명상'을 이렇게 유쾌하게 할 수 있다니 ㅎㅎ 첫 장부터 절로 웃음이 났다.

이 책은 단순하게 읽히는 책이지만 영문과 한글을 동시 수록함으로써 지혜와 지식을 동시에 얻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글과 그림 으로도 충분한데 영어까지~! 랄까. ㅎㅎ

하루 한 페이지씩 꼬박꼬박 수련하듯 읽어도 좋겠지만 내용에 연결성이 있는 책은 아니므로 아무때나 수시로 들춰봐도 좋을 책이다. 한장 한장 나름의 의미가 담긴 글과 그림이 그 한장을 보는 하루를 새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명언인듯 명언아닌 명언같은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옮겨놓아 본다.

바쁜 사람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동시에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p. 3)

바쁜 세상 바쁜 사람들 로 이루어진 일상이 당연한 듯 했는데 그 바쁨이 '해야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구나... 선택과 집중은 늘 고민해야 할 문제다.

당신이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 예측하든간에, 항상 그와 다른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p. 19)

그림과 함께 본다는 것이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는데, 때론 촌철살인과 같은 강렬함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무 생각이 없고 원하는 것이 없으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만족하게 됩니다. (p. 83)

천재와 바보가 한끗차이 라는 말이 있지 않았나... 아무 생각이 없어보이는 사람도 알고보면 무지하게 생각이 복잡한 상태이곤 하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참 힘든 일이다.

사실에 맞게 믿음을 적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에 맞게 사실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p. 111)

정말 유념해야 할 말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싶은 것만 듣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 믿는데로 보고 생각하는데로 듣는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은 사실이 아닌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보고들을 줄 안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p. 136)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팽팽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우리는 비난하곤 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채감이 사람들을 바쁘게 움직이게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어떤 갈등이 생겼을때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진정으로 강하고 선한 사람들은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p. 167)

나는 화를 거의 내지 않는 사람이다.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으로 강한 선한 사람이었나? wow! ㅋㅋ

인생은 완벽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내려놓는 것은 불완전함 속에서 조용히 앉아 마음을 쉬게 하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p. 228)

조용히 앉아 마음을 쉬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나의 일상이다. 그 시간을 독서로 채우곤 한다. 그러면 내겐 독서가 곧 용기가 되는 것일까...

자기 망상의 두 가지 유형 : 스스로를 '행동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p. 260)

헉!!! 대부분 스스로를 행동하는 사람이나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지 않나? 그런데 그것이 자기망상이었다니!!!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입을 통해 나오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p. 311)

맞는 말이다. 먹고 마시고 숨쉬는 것은 나에게만 중요한 일이지만, 내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일이므로 내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내입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내입밖으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좋은 관계는 평화로운 관계입니다. (p. 343)

동의하고 공감한다. 나는 늘 평화로운 관계를 추구한다. 그것이 어렵거나 안되면 내가 상처받더라도 내가 떠나고 내가 정리할 지언정 여하튼 나는 늘 평화주의자로 살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내가 알 바 아냐' 입니다. (p. 349)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지 마세요. 사람들은 어차피 당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답니다! (p. 364)

웃으면서 비수를 꽂는 문장 같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꼭 알아두어야 할 마음가짐이랄까. 심리책에서 읽은 적 있는 테스트가 생각난다. 실험자가 불특정 다수에게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이야기를 걸었는데 의외로 사람들은 실험자가 옷을 바꿔입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는가는 나만 신경쓸 뿐 상대방은 내옷에 그닥 관심이 없다. 옷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나도 그들 생각보다 그들에게 관심을 꺼두어야 할 때가 있다. 매몰차고 이기적이 되라는 소리가 아니다. 각자에 대한 각자의 존중 그렇게 지켜지는 나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명상이란 이렇게 나를 위한 삶의 태도인 것 같다.

당신 이 다시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다른 누구도 비난하지 마십시오. (p. 359)

이런 문장 처음이다! 처음엔 웃고 다음엔 울컥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는 아기가 인상쓰고 있는 그림과 함께 이 문장을 읽으면 문장의 강도대비 마음이 아프진 않다. 그저 웃을 뿐이다. 너털너털 허허허~

그래서인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문장은 "마지막 드리는 말씀 : 항상 웃는 것을 잊지 마세요!" (p. 365) 이다.

명상이라고 하면 왠지 수행 고행 뭔가 수련하고 단련하는 그런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명상이 굉장히 가볍고 활기차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즐거워지는 점이 좋았다. 읽다보면 '명상' 이라는 고상한? 단어는 사실 '멍 때리기' 와 비슷한 것 같다. 내 장기 중 하나가 '멍 때리기' 인데... 아무래도 난 명상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ㅎㅎ

스님이 쓰신 책이고 읽으면 자연스럽게 명상적 기분이 들지만 문장과 그림에서 따듯함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오래전 읽은 원성 스님의 '풍경'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동자승 이 그림과 시를 엮어낸 책이었는데 한권이 온통 순박함 그 자체 였다고나 할까.... 그 동자승이 자라고 자라 책을 쓰고 그려냈다면 이 책같지 않았을까... 이 책은 문장과 그림이 온통 밝은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 좋은 말씀 가득한 스님들 명상가들의 책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지만 나는 이렇게 짧고 굵게 다가오는 책이 참 마음에 든다. 간만에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느!낌!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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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 수업 365 1일 1페이지 시리즈
정여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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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심리학자들의 조언부터 책, 영화, 그림, 일상의 이야기들까지

심리학의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내 안의 빛과 그림자, 상처와 욕망의 세계

365일 동안 떠나는 폭넓은 지식과 따뜻한 위로의 심리 여행

'상처 치유자'정여울이 들려주는 하루 한장 특별한 심리 이야기

 

역사와 고전을 좋아하고 왠만하면 원전번역을 읽는편이기 하지만 가끔은 잡학다식용 책을 읽으면 재밌으면서도 유익해서 좋았다. 벽돌책을 읽는 중간 일종의 쉬어가는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간략히 요약되어 있는 내용들이 깔끔하게 읽히니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도 했다.

'1일1페이지...'로 구성된 책이 여러권 연이어 나오고 있는데 '교양수업'과 '미술'편을 읽으면서 정말 하루 딱 한 페이지만 읽으면 되게끔 하는 깔끔한 편집도 좋았고 방대한 지식을 필요한 만큼 쏙쏙 골라뽑아 놓은 것도 좋았었다. 시험전날 벼락치기 할때 혹은 시험당일 쉬는시간에 초치기를 해야할때 필수로 봐야 하는 요약노트 를 보는 기분이었달까. 평소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서 심리학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책을 읽다보면 빠르게 휙휙 넘어가는 책이 있기도 하고 몇줄 읽다말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거나 생각을 하게 되거나 해서 한장한장 넘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책이 있기도 하고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 책이 있기도 하고 어렵진 않은데 묘하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책이 있기도 하다. 이 책은 기대했던 잡학다식용 책은 아니었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였음에도 책장이 쉬이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다.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문장 자체가 긴 호흡의 문장이라고나 할까... 정여울 작가의 이름은 여러번 들었었지만 책으로 접하는 것은 처음인데 이 작가는 문장에 여운이 긴 타입이었다.

별다른 특색이 없는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들이 있기도 하지만 많은 작가들의 경우 저마다의 개성적 문체가 있기 마련이다. 소설가가 아니라 에세이 작가라서 그런지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라서 그런지 그저 개성인건지 잘 모르겠으나 정여울 작가의 문장에선 긴 호흡이 느껴졌다. 상대방이 울면 따라울고 상대방의 호흡이 가빠지면 따라서 숨이 차오르듯이 책에서 느껴지는 문체에도 읽는이가 저절로 따라가지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정여울 작가의 문장은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천천히 읽게 되고 차분해져서 한페이지한페이지 꼼꼼이 보면서도 넘치는 감성에 가끔 깊은 숨을 내쉬며 읽어야 했다.

월요일은 '심리학의 조언'

화요일은 '독서의 깨달음'

수요일은 '일상의 토닥임'

목요일은 '사람의 반짝임'

금요일은 '영화의 속삭임'

토요일은 '그림의 손길'

일요일은 '대화의 향기'

라고 구분되어 있고 요일별로 딱 한 페이지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요일별로 분야가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심리학의 조언에서 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독서의 깨달음에서 일상이 나오기도 하고 사람의 반짝임에서 책이 나오기도 하니 페이지 구분이 크게 의미가 있진 않았다. 내용도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 글들이었다. 때로는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중첩되기도 해서 원래 하나였던 긴 글을 쪼개서 요일로 나눈건가 싶은 글도 있었고 다른 곳에 실었던 글을 편집해서 넣은 건가 싶은 글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감성은 한결같은 글들이었다. 책과 마음의 다독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놓고 있는 글들이었다. 어쩌면 이 편안함이 정여울 작가만의 특별함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동안 나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아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읽었던 책, 내가 봤던 그림이 나오는 것도 반가웠지만 작가의 글 속에 담긴 진심이 공감될때가 많았다. 그런 부분들만 옮겨 놓아도 내가 그대로 까발려지는 것만 같아서 책에 수없이 포스트잍을 붙여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저 작가의 매력이 돋보이는 문장들을 옮겨와 본다.

노을 지는 풍경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열정, 다 버린 줄로만 알았던 슬픔,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 믿었던 희망까지도.

이제야 알겠다. 그토록 오랫동안 노을을 바라보는 삶을 예찬한 이유를. 아름다운 풍경은 마음을 비춰주는 위대한 거울이라는 것을. 노을 지는 풍경에 내 마음을 비춰보는 그 몇 분의 시간만으로, 삶은 더욱 찬란해진다는 것을. (p. 20)

해돋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해넘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꼭두새벽 일어나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 추위에 떨며 기다려야 하는 해돋이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하곤 했다. 그보다는 일상에서 수시로 바라보는 어쩌다 보게되는 노을이 좋았다. 어디에 있더라도 노을은 항상 어느 계절에 보더라도 노을은 항상 내마음의 무언가도 건드리곤 했다.

언젠가 온갖 고민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때 무작정 도서관에 찾아간 적이 있다. 지치고 힘든 마음으로 무얼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한 기분이었는데, 도서관의 문학 코너에 가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이 모든 책을 언젠가는 다 읽어주어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나름 열심히 책 읽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 영원히 읽지 못할 것만 같은 책이 이렇게 많다니. 경이로운 느낌에 잠시 어지러워졌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복잡했던 마음의 파고가 신기하게도 가라앉았다. 나의 단순한 진심과 만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머나먼 곳을 향해 힘들게 떠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p. 55)

어렸을때부터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런 경험을 하진 못하고 나이를 먹었지만 도서관이 많아진 요즘이 참 좋다. 걸어서 갈수있는 서점과 도서관에 책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볼때마다 세상에 이렇게 책이 많구나 새삼 감탄하곤 한다. 나름 책을 많이 읽는 편임에도 도서관에 가면 왜소해지곤 한다. 그렇게 겸손해지고 겸허해지는 마음이 단순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주곤 한다. 여건이 된다면 정말 도서관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다. ㅎ

문학, 여행, 심리학이 주는 깨달음의 기쁨을 지속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은 바로 독서다. 매일 멈출 수 없는 나만의 '취재'는 천천히 깊이 읽기를 통해 시작한다. 더 깊이 내 상처를 건드리는 책, 그래서 더 가슴 아픈 책, 더 내 마음에 커다란 깨달음의 발자국을 남기는 책이 글쓰기에 영감을 주는 책들이다. 글이 아니었더러면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p. 69)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들이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살고 싶어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역사가가 아닌 우리도, 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잊고 싶어하는 아픈 상처들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뜨거운 열정과 살아있는 권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p. 70)

영감을 얻기 위해서도 살아있는 권리를 찾기위해서는 우리는 늘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 가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많고 많은 책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건조한 상태에서는 보잘것없지만 따스한 찻물 속으로 들어가면 오색찬란한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꽃차처럼, 여행은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내 감성의 날개를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내는 천연의 항우울제다. (p. 96)

여행에세이도 여러권 냈던 작가인만큼 여행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여행하고 글쓰며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라고 내가 부러워 한다면 작가는 작가 나름의 고충을 한보따리 풀어놓겠지만... 그래도 부러운건 부러운 거다. ㅎㅎ 여하튼,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저렇게 감성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작가이기에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어오지 않았나 싶다.

에곤 실레의 그림 속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고통받는 모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더 이상 구원도 치유도 기대하기 어려운 모성의 리얼리티, 삶의 아픔을 홀로 감내해야 할 어머니의 외로운 자화상 같은 그림들이 관객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판다. 실레의 그림들은 '모성의 치유'보다 '치유가 필요한 모성, 구원이 필요한 모성'을 일깨운다. 아이에겐 그래도 엄마가 있다. 지금 간신히 생명의 마지막 한 순간을 붙잡고 늘어질 정도의 작은 에너지밖에는 남지 않은 엄마가, 그래도 곁에 있다. 하지만 이 가여운 엄마에게는 아무도 없다. 엄마에게는 이 힘겨운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p. 198)

에곤 실레의 <눈먼 어머니> 라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감상이 인상적이었다. 책속에 실린 그림은 흑백인데다 너무 작아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어서 따로 찾아서 봐야 했다. 모니터 화면 한가득 그림을 클릭해 놓고도 한참을 봐야 했다. 출산의 과정을 담은 그림 같기도 한 이 그림은 에곤 실레 특유의 외로움이나 시니컬함을 넘어선 비참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모성에 대한 지나친 판타지를 몹시 싫어하기에 이 그림에 더 마음이 쏠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오랜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주면서도 주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너를 신경 쓰고 있잖아' '내가 너를 챙겨주고 있잖아' 하고 생색을 내는 사람들과는 결국 멀어지게 되어 있다. 생색을 넘어 그루밍으로까지 가는 사람들, 기브 앤 테이크를 넘어 아예 상대방을 착취함으로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이런 보석 같은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눈부신선물이 아닐까. '잘해준다' 는 생각조차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퍼주는 사람들, '베푼다'는 생각조차 없이 누군가에게 우정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p. 210) 끝없이 베푸는 자들이 결국 이 세상을 바꾸어간다. (p. 211)

베푼다 는 생각조차 없이 누군가에게 사랑과 지혜를 퍼주다가 언제부턴가 내가 아니 나만 '베풀고' 있다는 자각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면 결국 그 관계는 오래가지 않고 끝나고 만다. 그러고보면 '베푼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그 베품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러한 베품도 가능해지는 셈이다. 기브앤 테이크는 그렇게 베품에도 연결되어 있다. 다만 그 자각성과 마음가짐이 다를뿐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이러한 베품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은 이러한 베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때일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현대 심리학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기준이 돼 가고 있다. (중략) 그런데 자존감은 꼭 높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라는 개념 자체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기보다는, 때로는 내가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다양하게 바꾸어보는 것이 좋다. 자존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주 섬세하게 '내가 기쁜 순간들'을 늘려가는 것이 좋다. (p. 256)

자존감은 확실히 과대평가된 가치다. 게다가 자존감이라는 감정의 뉘앙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를 실제보다 더 크고, 멋지게 생각하는 감정'에 가깝지 않은가. 자신을 크고, 대단하고, 빛나는 존재로 바라봐야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건강한 감정일까. (p. 361)

'자존감' 에 대한 책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왔었다. 모든 심리문제의 해결책이 자존감의 회복인것처럼 유행하는 듯 했다. 너무 많이 언급되는 것을 보며 처음엔 혹했던 마음이 의아해지기도 했다. 그 자존감 마저 회복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지 않겠는가... 자존감이 높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말도 다르고 생겨나는 말도 다르기 마련이다. 시대를 장식하는 말을 보면서 그 거꾸로 그 시대를 분석해볼 수 도 있지 않을까...

나는 문학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를 향해 눈뜨기도 하지만, 문학을 통해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계'에 대한 나의 철저한 무지를 깨닫기도 한다. 내가 그동안 시퍼렇게 눈뜬 장님이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문학으로 인해,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게 만드는 데 장애물이 되는 내 스스로의 쓰라린 결핍을 성찰하게 된다. (p. 299)

삶의 일부이면서도 일상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공간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미셀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는 용어에 응축한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의 밝은 면을, 디스토피아가 어두운 면을 강조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며 삶의 모든 복잡미묘한 측면들을 끌어안는 혼종성의 공간이다. 유토피아가 어원 그대로 '지상에 없는 곳'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지상에 분명히 존재하면서 인간의 꿈을 담는 실제적 공간이다. (p. 300)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도 있고 여행가서 특별한 장소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여하튼 실재하는 공간이고 내가 직접 살아숨쉬는 곳이다. 그곳은 특정한 장소가 될수도 있지만 문학이나 책과 같은 무형의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책속에서 유토피아를 찾기 보다는 디스토피아를 확인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헤테로토피아를 공감하기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단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존재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우리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우리가 언젠가는 함께할지도 모를 기적 같은 시간을. (p. 324)

창문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일깨우는 미디어다. 언제나 창문 바깥에서 창문 안쪽을 엿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창문은 '가질 수 없는 세계'를 상영하는 영혼의 스크린이 된다. 유리창은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거, 어쩌면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어떤 세계를 광고하는 영혼의 스크린인 것이다. (p. 333)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물건을 볼때 우리는 그 물건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이 통째로 내게 오는 것이라고 했던가... 유리창은 스크린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유리창이 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유리창문을 열 수 있다.

"가시는 빼고 날은 세워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날카로움과 까칠까칠함의 감미로운 은신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가시'는 공격을 위한 흉기가 되지만 '날'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p. 354)

나는 누군가에게 가시를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날을 세우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가시를 품고 있는 것과 날을 벼린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가시는 빼야하고 날은 세우는 것이 내게도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읽고 씀으로써 우리는 매일 깊고 풍요로운 자신의 내적 자원을 만들어간다. 매일 읽고 쓸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크고 너른 치유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게 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진 사람이다. 당신이 매일 읽고, 쓰고, 그 배움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스한 공감의 공동체에 항상 속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내적 자원이자 회복탄력성이다. (p. 373)

그런가 내가 그렇게 다 가진 사람이었나;;; 나는 매일 책을 읽고 거의 매일 읽은 책에 대해 쓰고 그렇게 읽고 쓴 책을 이야기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가졌음을 일깨워준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천천히 읽혀지는 이 책을 몰아서 읽으면서 좀더 여유있게 읽을 껄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내가 가진 내적 자원을 일깨워준 것으로 그 아쉬움을 만족감으로 바꿔 마음먹어 봐야 겠다.

정여울 작가의 글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내공이 있는 것 같다. 제목에서 예상했던 잡학다식용 책은 아니었으나 작가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따듯하고 깊이있는, 무엇보다도 감성이 넘치는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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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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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의 원작소설이라는 이 책은 3부작의 1편이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었다는 영화를 보기 전이지만 책이 나오기 전의 가제본으로 읽은 책이지만 가제본 표지를 크게 덮고 있는 남자 배우의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뛰어넘는 또 한 번의 위험한 로맨스' 라는 홍보문구에서 대충 짐작을 하긴 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정도일 줄이야' 를 연이어 내뱉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벌써 5년째다. 죽었다가 살아난 거나 다름없다며 의사가 기적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현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의 꿈을 5년째 꾸고 있다. (p. 6)

마시모는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한 이탈리아 마피아의 가주이자 차세대 두목이다. 그리스조각 같은 완벽한 신체와 외모 그리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진 이 남자에겐 당연히 여자도 많다. 하지만 총격사건 이후 한 여자의 꿈을 반복해서 꾸는 동안 그 여자를 그린 초상화를 집안 곳곳에 걸어둘 만큼 그녀에게 집착하게 된다.

원하는 건 뭐든 할 시간이 있는데,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이제껏 호텔 업계라는 시궁창엥서 너무 오랫동안 굴러서 그런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세일즈 매니저 자리에 오르자마자 나는 돌연 일을 그만두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싹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겨우 스물아홉살에 번아웃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어쩌겠나. 이미 와버린걸. (p. 20)

라우라는 폴란드 작은 마을 출신이지만 타고난 감각으로 빠르게 성공한 호텔리어였다. 하지만 번아웃으로 일을 쉬는 동안 애인과 그리고 친구 커플과 함께 이탈리아로 휴가여행을 떠나게 된다. 공항에서 마주친 검은 양복의 남자들 그리고 짙게 썬탠한 차 안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 라우라의 인생은 하룻밤 사이 격변을 맞게 된다.

밤공기는 더웠고, 난 취했다. 생일이 끝나가고 있는 지금, 어쩐지 모든 게 잘못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인도가 끝나는 곳에 이르자,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걸 깨닫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망할, 난 형편없는 길치다. (p. 48)

스물아홉번째 생일날이었는데, 애인은 신경쓰지도 않은채 자기일만 했고 친구커플도 무심했다. 라우라는 화가 난 나머지 일행과 함께 있던 호텔을 무작정 뛰어나와 거리를 헤매다 길을 잃고 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처음 보는 바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거야. 나도 공항에서 널 보기 전까지는 실제로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자, 벽난로 위에 있는 그림을 봐" 난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 어떤 여자의 초상화였다. 저건, 내 얼굴이잖아. (p. 57)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마시모가 찾아 헤매던 여자는 바로 라우라 였다. 현재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 라우라. 마시모는 라우라에게 제안을 한다.

"라우라, 넌 틀림없이 내 거라는 뜻이야"

"난 누구의 것도 아니야!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당신은 날 가질 수 없어! 사람을 납치해놓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지 말란 말이야!"

"알아. 그래서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나와 사랑에 빠질 기회를. 네 의지대로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할 기회를 주지. 강요하지 않을 거야" (p. 58)

라우라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라우라의 성격은 만만치 않았기에 마시모에게 맞부딛혀 보지만 마시모가 내민 사진들을 보고 힘이 풀려 버린다.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발 날 집에 보내줘요"

"안타깝게도 앞으로 365일 동안은 그럴 수 없어. 1년간 날 위해 희생해줘야겠어. 네가 나를 사랑하도록 온 힘을 다해 뭐든 할 거야. 만약 네 다음 생일까지도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보내줄게. 오해하지 마. 이건 제안이 아니야. 넌 거부할 수 없어. 이건 통보야.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알려주는 것뿐이야. 물론 난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네가 원치 않는 일은 안 해. 네 의사에 반하는 일을 시키지도 않을 거고. 혹시 무서워할까 봐 말하자면, 널 강간하지 않을 거라고. 넌 내 천사니까. 너를 이 세상 누구보다 존중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너는 내 목숨만큼 소중하니까." (p. 63, 64)

궁전같은 저택에서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게다가 외모 또한 멋지기까지 한 남자가 자신을 납치해놓고는 1년간 옆에 있어야 한다고 통보한다. 다만, 그 시간 동안은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자신한다는 것이 납치를 납치가 아닌 것처럼 여기게 하는 스릴러적 로맨스 상황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저택 마당에서 배신한 조직원을 총 한방으로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마피아 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남자였다.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다. 검은 눈동자와 짙은 색 머리카락, 커다랗고 도톰한 입술, 내 뺨을 섬세하게 간지럽히는 밝은 색 수염까지. 몸매는 또 어떤가. 지금 내 엉덩이를 감싼 그의 길고 늘씬한 다리, 강한 근육질 팔, 몸에 딱 달라붙은 민소매 셔츠 너머로 보이는 넓은 가슴. (p. 73)

이 남자는 정말이지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온화한 야만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표현이 딱 맞는다. 위험하고, 거침없고, 반항을 용납하지 않지만 동시에 너무나 자상하고 섬세한 남자. 이 모든 점이 혼합된 이 남자는 무섭지만 매혹적이고, 그래서 자꾸만 알고 싶어졌다. (p. 85)

라우라가 처한 상황은 분명 무섭고 공포스럽지만 라우라의 내면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섭고 공포스럽기엔 이 남자가 너무 매력적이다. 마시모 곁에 있게 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라우라는 이미 마시모라는 남자에게 흔들린다. 하이틴로맨스의 19금 버전 같은 이 소설의 가벼움은 라우라의 변신에도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그때 커다란 깨달음이 다가왔다. 이 상황과 싸울 게 뭐 있어? 뭐하러 도망쳐? 바르샤바에 가봤자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 잃을 것 역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이제껏 가졌던 건 죄다 사라졌잖아. 지금 남은 선택지는 이 모험이 펼쳐지게 놔두는 것뿐이야.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어, 라우라. 난 이렇게 생각하고서 일어섰다. (p. 97)

번아웃 상태였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열정적인 라우라에게 번아웃으로 인한 퇴직이라는 설정은 365일간의 납치에 좀더 편한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운명적 커플이었고 무엇보다 '성적' 결합에 있어서 그러했다. 이 소설의 포인트이자 주요 내용들은 두 사람의 속궁합 확인기라고나 할까.

앞으로 내 삶은 절대 평범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겠지. 말하자면 중간중간 포르노 장면이 곁들여진 마피아 영화 같은 삶이 될 것이다. (p. 341)

라우라의 표현처럼 이 소설은 중간중간 포르노가 곁들여진 마피아 영화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에선 어디에 더 방점을 두었을지 모르겠지만 원작 소설로 보자면 앞쪽에 더 치중한 작품인듯.

"와우, 썅, 네가 해준 이야기 무슨 스릴러 소설 같아. 그것도 19금 딱지 붙은 스릴러" (p. 353)

스릴러적으로 표현하려 애쓴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그렇기엔 19금 딱지가 너무 크게 붙은 이 소설은 욕설과 포르노와 자극적 로맨스가 결합된 킬링타임용 으로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3부작 인줄 모르고 읽었던지라 한권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꽤 두툼한 소설을 읽고 났음에도 결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커플의 로맨스가 얼마나 더 자극적으로 펼쳐질지는 다음 권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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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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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 한번은 만나야 할 불멸의 고전!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진짜 삶'을 찾다

철학에서 던져온 질문은 오랜 세월동안 사실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삶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따라서 니체의 철학은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제대로 된 철학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니체의 철학을 먼저 읽고 나면 앞선 철학적 고찰들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해서 가끔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니체관련 책은 늘 나중에 로 미뤄두곤 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이 유명한 책이 실은 철학책은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가깝다고 하는 설명을 읽고 나니 이 책 정도는 먼저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유명하고 자주 회자되는 책이니만큼 제대로 번역한 책을 읽고 싶었기에 출판사와 옮긴이가 중요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뢰가 갔다. 니체에 대한 첫 책이니만큼 무턱대고 본문을 바로 읽으면 어려울 것 같아서 책 뒤편의 <해설> 먼저 읽고 시작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수수께끼 같은 이 책의 부제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떤 독자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 책은 그 자체로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략) 니체는 개인적인 것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p. 579)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은 책 속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니체가 왜 페르시아 종교 예언자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사용했느냐고 종종 묻는다. (p. 581) '그 페르시아인이 역사상 이룬 엄청난 독특성과 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성격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굳이 차라투스트라일 필요는 없지만, 선과 악의 도덕적 이원론을 정립한 차라투스트라만큼 선악의 저편에서 도덕을 새롭게 평가하고자 하는 니체의 의도에 부합하는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p. 582)

책의 제목도 부제도 수수께끼 같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내용도 온통 수수께끼 같은 책이었다. 다만 니체의 문장이 말하는 것은 늘 반대편을 의미한다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다. 예를 들어 대중을 말할때는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고 믿음을 말할때는 신을 부정하는 식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반박을 위해서 종교가 대표적으로 내세우곤 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을 부정하기위해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정립된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뒤흔든다. 차라투스트라보다 나은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면 책의 제목은 아마 바뀌었을 것이다.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니체가 읽은 수많은 철학 저서와 문학작품이 녹아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독특한 장르를 구성한다. 때로는 잠언으로 들리고, 때로는 문학작품으로 읽히고, 때로는 그 텍스트의 독특한 음악적 운율 때문에 악극으로 들리기도 한다. (중략) 서양의 형이상학과 기독교적 전통을 뒤집어엎기 위해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를 호출한 이 책은 성서에 대한 니체의 대답이자 패러디다. 성서는 이 책의 내용 및 형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p. 583) 논리적 추론이 생각해낸 것이라면, 영감은 불현듯 찾아온 것이다. (중략)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이미지와 비유에 내맡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마치 번개처럼 필연적으로 번쩍 떠오른 <차라투스트라>의 강렬한 영감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p. 586)

논리적으로 서술된 책이 아닌만큼 옮긴이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본문을 읽으며 주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철학과 호메로스와 괴테를 비롯한 문학고전과 바그너를 비롯한 음악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서의 패러디' 였다. 내가 성서를 읽었다면 더 제대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격렬한 분노 내지 공감을 하며 문장들의 의미를 생각해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감'어린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한번의 독서로는 가능하지 않음은 여전했을 것 같다.

니체의 '초인'은 전치사 '위버'와 '인간'이라는 뜻의 '멘쉬'의 합성어다. 인간인데 인간을 넘어서려는 인간 유형이 초인이다. 그는 인간인 한 결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일 수 없다다. 초인이 슈퍼맨이 아닌 이유다. '넘어선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지 결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p. 589) 초인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다. 초인은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대지에 묶여 있는 존재다. 초월한다는 것이 결코 전통 형이상학에서처럼 감각적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극복과 초월은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 '대지에 충실한 것'이다. (p. 590) 그러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에게 '대지와 짐승과 초목'을 마련해주는 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최상의 인간을 자연의 이미지로 구상한다. (p. 591)

니체는 단지 신을 배제하고 우리의 삶과 세계를 하나의 동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려 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이러한 신이 없는 시대에 세계를 이해하는 허무주의적 접근 방식의 상징이다. (p. 593)

미래의 삶을 창조하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창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원회귀 사상은 가능한 한 다양한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허무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와 중심을 잡아줄 실존적 삶의 형식이다. (p. 596) 영원회귀 사상은 우리가 이제까지의 헛된 삶과 미래의 의미 있는 삶, 심각한 무지의 시기와 밝은 통찰의 시기를 구별하는 시점에 우리를 일종의 사유 실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p. 597)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매력적인 철학사상가 이론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이 철학 저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논리적 추론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글의 도구는 개념이다. 철학적 글은 어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대신 추상적 개념을 논리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p. 598) 그러므로 논리적 추론을 완전히 포기하는 이론은 있을 수 없다. 이 책에는 이러한 시도들이 보이지 않는다. (p. 599)

이 책이 철학저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본문에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 같은 니체의 핵심적 철학 개념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개념들에 대해 <해설>을 통한 기초지식이라도 없었다면 읽는데 곤란함을 겪었을 것 같다. 니체 철학에 대한 초행자인 나로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서로 읽히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를 이론과 사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운 미궁에 빠진다. 그는 어디에서도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삶을 통찰하고,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삶의 지혜를 얻어가는 성찰의 이야기로 읽으면 흐릿하고 애매모호하던 상징과 비유들은 선명한 빛을 띠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구체적 삶을 사유함으로써 삶과 사상을 일치시키려 했다. (p. 599) 고대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철학을 단숨에 정당화한 것처럼, 니체는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썼다는 사실로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려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은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니체의 처절한 노력이 독특하고 독창적인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모토는 간단하다. '삶을 철학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을 산다' (p. 600)

철학적 개념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논리적으로 그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니기에 니체에 대한 첫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과욕이었던것도 하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고대그리스관련 책들이 니체의 이 책을 이해하는데 그나마 큰 도움을 주었기에 읽고나니 그나마 해볼법한 선택이기도 했다. '삶을 철학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을 산다' 는 이 책을 설명하는데 있어 최고로 명쾌한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삶에 관한 영감을 말과 음악과 춤을 통해 표현한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드라마'는 그리스어로 본래 우리에게 불현듯 일어나고 나타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사건은 동시에 '행위'를 뜻한다. 드라마가 '나는 행위한다' 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전달하려는 사상은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삶과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한 편의 드라마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차라투스트라의 드라마는 내려감으로 시작한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342에서 말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몰락과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삶에 관한 비극적 인식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다. (p. 601)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고, 돌아오는 것은 다시 떠나기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우리의 삶에 동반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중략) 이러한 풍경이 눈에 들어와야 비로소 그의 핵심 사싱이라고 불리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영원회귀' 사상의 윤곽이 드러난다. (중략)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말해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면 최고의 독자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고 강하게 명하지만, 그를 부정하려면 우선 함께 길을 가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를 읽는다. (p. 604)

차라투스트라는 4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드라마다. 장마다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바뀌고 그 변화를 통해 차라투스트라의 성찰도 성숙한다. 이 한권의 책을 한 번의 독서로 '최고의 독자'가 될 순 없었지만, 아는 것도 없이 니체를 부정하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와 함께 그의 길을 걸어본 것으로 만족하련다. 차라투스트라의 비극을 이제야 시작해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십 년 동안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1). 그러나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주석1) 이 책은 기독교 성서에 대한 패러디로 읽힐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을 받고 활동을 시작한 것도 서른 살 쯤이었다. <누가복음> 3장23절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 붓다가 영적인 삶을 살려고 출가한 시기도 그가 스물아홉살 때였다. (p. 13)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이제는 그 지혜를 얻으려고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p. 14)

<논어>에서 공자는 30세를 '이립'이라고 하여 학문의 기초가 확립된 나이라 했고 40세를 불혹이라 하여 유혹되지 않는 나이라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도 예수도 붓다도 '이립'을 하고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불혹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려는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을 봐줄 사람들이 필요했기에 산을 내려갔다. 이 '내려감'으로 인해 차라투스트라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제 아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아. 인간은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죽이고 말 거야 (p. 16)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가면서 만난 첫번째 사람은 '성인'이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게 됐기에 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와 헤어지며 생각한다.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p. 18) 하지만 이 짧은 만남은 역설적이면서 웃프다. 차라투스트라 본인도 십년간 숲속에 살다가 이제 내려가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p. 19)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내려가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들은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 23)

나는 이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인간이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이제는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싹을 심을 때다. (p. 26)

차라투스트라는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시장에 군중이 많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가서 말했다. '가르치겠다' 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깨달은 지혜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었고 조롱했다.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혜가 지혜인줄 모르는 비극의 시작이다.

나는 목자나 무덤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군중과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고, 초인에 이르는 계단을 보여주리라. (중략) 나의 목표를 향해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른 자들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p. 38)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길을 간다. 나의 짐승들아, 나를 이끌어다오! (p. 39)

다 읽고 정리하면서 다시 보니 이 책은 수미일관의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교적 짧은 에피소드인 '머리말'에서의 마무리는 이 책의 마지막장의 장면을 미리 드러낸 것이었다. 축제, 몰락의 길, 짐승들.

주석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문장은 불교 경전에서 붓다의 설법이 끝날 때 반복되는 문장을 모방한 것이다. '얼룩소'는 붓다가 출가하여 방문했던 도시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p. 47)

그대들은 이웃 사람 주위로 몰려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건대, 그대들의 이웃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 나쁜 사랑이다. 56)

주석56)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p. 113)

4장 주석22) <마태복음> 26장 20절,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차라투스트라의 짐승인 독수리, 뱀 그리고 나귀를 포함하면, 차라투스트라의 만찬에 참석한 자도 모두 열 둘이다. (p. 498)

본문의 곳곳에서 성서를 비튼 곳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표현방식은 동양경전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머리말 이후 시작되는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로 에피소드들이 마무리되곤 하는 것이 '아멘' 을 비튼 것 같기도 하고 '공자왈' 같은 동양적 분위기를 흉내낸 것 같기도 한 일종의 후렴구였기 때문이다. '머리말 '이후 본문의 많은 서술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말하는 형식인데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해서 더 그러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서의 대중들을 떠나고 난 이후의 여정은 좀 애매하다. 어디서 갑자기 '제자들'이 등장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차라투스트라는 본격적으로 '가르침'들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꾸며대고 신을 갈망하는 자 중에는 언제나 병든 자가 많았다. 그들은 인식하는 자와 덕 중에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을 격렬하게 미워한다. (p. 57)

나는 그대들의 길을 가지 않는다. 그대들 몸을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결코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아니다! (p. 63)

나는 급류가 흐르는 강가의 난간이다. 붙잡을 수 있는 자는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p. 71)

한때 정신은 신이었다가, 다음에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는 심지어 천민이 되었다.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p. 73)

국가는 낡은 신을 정복한 그대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본다. 그대들은 전투에 지쳤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긴다!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는 자신의 주위에 영웅과 명예로운 자들을 세우고자 한다! 이 냉혹한 괴물인 국가는 기꺼이 양심이라는 햇볕을 쬐고자 한다! 그대들이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숭배하면, 국가는 그대들에게 무엇이든 주려 한다. 그렇게 국가는 그대들의 빛나는 덕과 그대들의 자랑스러운 눈길을 매수한다. 국가는 그대들을 미끼로 삼아 많고 많은 군중을 유혹하려 한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 지옥이라는 예술품, 신성한 영광으로 장식되어 썰렁거리는 죽음의 말(馬)이 고안되었다! 그렇다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이 고안되었다. 스스로를 삶이라고 찬미하며 선전하는 그런 죽음이. (p. 91)

여인에게는 아직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인들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다. 또는 기껏해야 암소다. (p. 106)

나는 그대들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르친다. 벗은 그대들에게 이 대지의 축제요, 초인을 예감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p. 115)

여자에게 있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중략) 남자는 전쟁을 위해 교육받아야 하고,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략) 여자는 보석같이 순수하고 섬세한 장난감이어야 한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세계의 덕들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이어야 한다. 별빛이 그대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그대들의 희망이 '나는 초인을 낳고 싶다!' 이기를. (p. 123)

결혼. 창조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 하나를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를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실현하는 상대방에 대한 외경심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p. 131)

'얼룩소'라는 도시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설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가르침들은 굉장히 고대그리적인 내용들이었다. 니체에게도 철학의 시작은 고대그리스였던 것일까, 니체 본인이 고대그리스철학에 경도되었기 때문인 것일까. 여하튼 마무리는 기독교에 대해 신에 대해서였다. 어쩌면 이러한 1부의 마무리가 차라투스트라 철학의 시작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 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 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 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 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혔다. (p. 136) 그는 황야에 머무르며 선하고 의로운 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사는 법을 배우고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게다가 웃음까지 배웠을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나의 형제들이여!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그 젊은이의 사랑은 미숙했고 인간과 대지에 대한 그의 증오도 미숙했다. 그의 심성과 정신의 날개는 여전히 묶여 있어 무거웠다. 그러나 젊은이보다는 성년의 남자가 더 아이답고 그만큼 덜 우울하다. 성년의 남자는 죽음과 삶을 더 잘 이해한다. (p. 137)

그대들은 아직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대들은 나를 만났다. 신도들은 언제나 이렇다. 신앙은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참으로, 나의 형제들이여! 그때는 아를 잃어버린 자들을 다른 눈으로 찾을 것이고, 그대들을 다른 사랑으로 사랑할 것이다. (p. 146)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47)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아마도 니체가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그 대담성에 자주 놀라게 되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으로 자신의 동굴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깨달음을 얻었다.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예수처럼 (형제들에게) 말했다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공자처럼 혹은 붓다처럼 (벗에게 때론 제자들에게) 말한다.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사랑을 표현했다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성찰을 표현한다.

가장 좁은 틈새에는 다리를 가장 늦게 놓는 법이다. (p. 194)

길고긴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저 문장이 가장 좋았다. 어쩌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 별 상관이 없거나 혹은 반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문장이겠으나 앞뒤사정 다 빼고 그저 저 문장 하나만 딱 떼놓고 읽었을 때 저 문장이 나는 참 좋았다.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소리없이 말했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말을 하고 부서져라!"

이에 나는 대답했다. "아, 그것이 나의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좀 더 고귀한 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부서질 만한 가치도 없다" (p. 268)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소리없이 말했다. "그들의 조롱이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복종을 잊어버린 자다! 이제 그대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 (중략)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폭풍우를 몰고 오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올 수밖에 없는 자의 그림자로서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명령할 것이고, 명령하면서 앞장서 걸어갈 것이다" (p. 269)

마지막으로 무언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과일은 익었으나, 그대는 그대의 과일에 어울릴 만큼 익지 못했구나! 그러므로 그대는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대는 더 무르익어야 한다" (p. 270)

2부에서 끝에 다다라서 다양한 가르침들을 설파하던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고요한 시간'이 말을 걸었다. '나의 무서운 여주인의 이름'(p. 266)이라고 표현한 '가장 고요한 시간'은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3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배를 타게 된다. 배들의 출발지가 '행복의 섬' 인 것으로 보아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머물렀던 곳은 아마도 '행복의 섬'이었나 보다. 배에서 내려 뭍에 오른 차라투스트라는 곧바로 그의 산과 동굴로 가지 않았다.

나는 이들 군중 사이를 지나가며 많은 말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일 줄도, 간직할 줄도 모른다. (p. 308)

여러 길들을 지나 '얼룩소'라는 대도시를 스쳐 다시 그의 동굴과 그의 짐승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3부에서 말하는 가르침들은 이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적인 내용들이었다.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것이 이제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p. 352)

동굴에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성찰을 거듭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느날 아침 쓰러진다. 그런 그를 그의 짐승들이 보살핀다.

마침내 이레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장미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냄새를 맡으며 즐겼다. 그때 그의 짐승들은 그와 이야기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p. 388)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그대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의 교사다. 이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그대가 최초로 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이 커다란 운명이야말로 바로 그대의 최대의 위험이자 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하고, 우리 자신도 함께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실을, 또 우리가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존재했으며, 만물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p. 394)

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이제 나는 죽어서 사라진다. 나눈 무가된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하지만 내가 얽혀 있는 원인의 매듭은 회귀하고, 이 매듭은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는 다시 온다. (중략) 위대한 대지의 정오와 인간의 정오에 대해 다시 말하기 위해서이며, 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말 때문에 부서진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예고자로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그 자신을 축복할 때가 왔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끝난다" (p. 395)

자신의 영혼과의 대화 혹은 악극에 나오는 노래로 마무리 되는 3부에 이어 4부는 세월이 좀 흐른 시점이다.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일상을 보내던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느날 예언자가 찾아온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가?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우르릉 거리며 포효하는 소리가 올라오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자, 그때 길고 긴 외침이 들려왔다. 심연들이 서로에게 던지고 떠넘기는 외침이었다. (p. 427) 어느 심연도 그 외침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그 외침은 불길하게 들렸다. 차라투스트라가 마침내 말했다. "그대, 나쁜 예언자여, 저것은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며, 인간의 외침이다. 검은 바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곤경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죄, 그대는 이 죄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동정이다!"예언자는 넘쳐흐르는 마음으로 대답하면서 두 손을 쳐들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그대를 그대의 마지막 죄로 유혹하려고 온 것이다" (중략) "저기서 나를 부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자 예언자가 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무엇을 숨기는가? 그대를 향해 외치는 자는 우월한 인간이다." (p. 428) 그대가 말하는 우월한 인간에 대해서는, 좋다! 나는 즉각 저기 숲속에서 그를 찾겠다. 그곳에서 그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곳에서 사악한 짐승에게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의 영역 안에 있다. 내 영역에서 그가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p. 430)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를 동굴에 남겨두고 숲으로 발길을 뗀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향해, '우월한 인간'을 찾기 위해. 그러나 숲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다양한 존재를 만나고 만날때마다 대화를 나누고는 자신의 동굴로 보내놓고나서 또 돌아다녀봐도 차라투스트라는 헛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동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 다시 크게 들려왔다. 이것저것 뒤섞인 길고도 묘한 외침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외침에 여러 목소리가 합쳐져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멀리서 들었더라면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외침처럼 들렸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동굴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보라! 이 같은 아우성 뒤에 어떤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거기에는 그가 낮에 만났던 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슬픔에 잠긴 예언자, 오른편 왕과 왼편 왕,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 늙은 마술사, 교황,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그리고 나귀가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더없이 추악한 자는 하나의 왕관을 쓰고 두 개의 자줏빛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p. 489)

"그대들 절망한 자들이여! 그대들 유별난 자들이여! 내가 들었던 것이 그대들의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알겠다. 내가 오늘 헛되이 찾아다녔던 자, 곧 우월한 인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는지를. 우월한 인간, 그가 바로 나의 동굴에 앉아 있다니! 그러나 놀랄 일이 무언가! 제물로 바친 꿀과 나의 행복에 대한 교활한 감언으로 그를 나에게로 유혹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p. 490)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보낸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숲에서 만나 자신의 동굴로 보내놓은 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우월한 인간'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 이 산속에서 기다려온 것은 그대들이 아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저 산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대들과는 아니다. 그대들은 우월한 인간들이 오고 있다는 조짐으로만 나에게 왔을 뿐이다. 그대들은 커다란 동경, 커다란 구역질, 커다란 권태를 가진 인간들이 아니며 그대들이 신의 잔재라고 부른 자들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세 번을 말하자면 아니다! 나는 여기 산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오지 않는 한 나는 여기서 단 한 발짝도 떼지 않을 것이다. 우월한 인간, 더 강한 인간, 더 승리하는 인간, 더 쾌활한 인간, 몸과 영혼이 반듯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웃는 사자들은 오고야 말 것이다. (p. 496)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굴에 있는 존재들이 결코 우월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만찬을 벌이려 한다. 동굴에 있는 존재는 예수와 열두제자 처럼 차라투스트라와 열두 존재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역사책에서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저 기나긴 식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잔치에서는 오직 우월한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p. 501)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에 있는 열둘에게 가르침을 전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동굴밖으로 잠시 나갔을때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외에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언행을 한다. 동굴로 돌아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마지막 축제를 벌인다. 나귀축제.

좋다! 내가 깨어났는데도, 그들은, 이 우월한 인간들은 아직 잠들어 있다. 그들은 나의 참된 길동무가 아니다! 내가 여기 나의 산에서 기다리는 것도 그들은 아니다. (p. 571) 그들은 아직도 나의 동굴에서 잠들어 있고, 그들의 꿈은 아직도 나의 수많은 한밤중을 씹고 있다. 나의 말을 경청하는 귀, 순종하는 귀가 그들의 사지에는 없다" (p. 572) 보라, 더 기이한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자기도 몰는 새에 어떤 무성하고 따듯한 털 뭉치 소으로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와 동싱 그의 앞에서 포효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드럽고 긴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징조가 나타났다" (중략) "나의 아이들이 가까이 왔구나. 나의 아이들이" (p. 573)

4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사자' 가 등장한다. 이 사자의 등장을 보며 1부의 첫머리에 나왔던 '낙타'를 기억해야 한다. 머리말이 끝나고 본문인 1부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의 그 '낙타'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주석16- 고대 이란어 차라투스트라는 인도-이란어의 어원에 딸면 '낙타'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낙타를 소유하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를.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많이 있다. 이 강력한 정신, 인내력 많은 정신의 내면에는 외경심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무엇이 무거운가? 인내력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잔뜩 싣고자 한다.(p. 43)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은 '낙타를 소유하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 이라는 것만으로도 니체에게 상징적인 이름이 될 수 있었다. 낙타는 사람이 타기에는 불편하지만 사막에서 짐을 나르는데 더할나위없이 유용한 동물이다. 낙타는 오로지 '짐'을 나르는 데에만 사람에게 쓰인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동안 가르침과 성찰과 깨달음의 말을 풀어냈던 것은 결국 그가 지녔던 정신적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번째 변신이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여기에서 그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의 적이 되려 하고, 최후의 신의 적이 되려 한다. 승리를 위해 정신은 이 거대한 용과 맞붙어 싸우려 한다. 정신이 더는 주인과 신으로 부르고 싶지 않은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가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원한다' 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 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비늘 짐승으로서,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p. 45)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하다. (p. 46)

그 사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동굴에서 나온 다른 열둘에게 포효하자 모두 달아나버렸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외친다.

아,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잉, 어제 아침 저 늙은 예언자가 내게 예언했던 것은 바로 그대들의 곤경에 대해서였다. 그는 그대들의 곤경으로 나를 유혹하여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p. 574) 나의 마지막 죄로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한번 자신 속으로 침잠했고, 다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동정이다!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청동빛으로 변했다. "좋다! 그것도 이제는 긑이다!" 나의 고뇌와 나의 동정,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내가 행복을얻으려 애쓴단 말인가? 나는 나의 일을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은가!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아이들도 가까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왔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이제 솟아오르라, 옷아오르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p. 575)

낙타 그리고 사자 그 다음 변신의 내용을 이 마지막 페이지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며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아이가 되는지를. (p. 46~47)

차라투스트라는 낙타로서 정신적 짐을 내려놓는 기나긴 과정을 거쳤고 사자가 찾아와 마지막 유혹을 몰아냈으며 자신의 짐승들이 곁에서 아이들로 함께 하고 있게 됨으로써 혼자가 아닌 혼자로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얻었다. 어쩌면 아익 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동굴을 떠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난다. '태양' 과 '번개' (책에서 니체가 강조하는 용어들) 라는 고대그리스철학적 의미에서 '위대한 정오'는 중요한 시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이가 되어 그만의 '위대한 정오'를 이제는 맞이할수있게 됐기에 오랜 거처인 동굴을 떠난 것인 걸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힘차게 그의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허게 말했다>의 끝. (p. 575)

책뒤에 '니체 연보'가 나오는데 '1873년 눈이 극도로 나빠지다' 와 '1881년 타자기를 주문하다' (p. 606) 문장이 나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연보에 '타자기'를 주문한 것이 나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다. 다행히도 최근에 읽은 책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니체의 문장은 원래는 난해한 만연체였다고 한다. 그러나 눈이 나빠지고 타자기로 글을 쓰게 되면서 만연체로서의 문장구사가 힘들어졌기에 문체가 변했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은 타자기 구입 후 1883년~1885년에 출판되었다. 직접 만연체를 구사하며 썼던 책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내가 읽을 만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기묘한 책이었다. 철학책이 아니면서 철학이 읽히기도 했고 소설책이 아니면서 문학적으로 읽히기도 했으며 종교서는 더더욱 아님에도 종교적 깨달음이 넘치는 책이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항상 떠나지만 동굴로 매번 돌아오다가 마지막엔 정말로 동굴을 떠난다. 아마도 이번엔 다시 동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자신의 삶을 동굴에서 꺼내어 힘차게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그 철학이 그 삶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는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아직 짐을 가득 실은 낙타이기에 생각해야할 짐이 너무도 많아서 니체의 동굴속에 한참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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