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인생에 한번은 만나야 할 불멸의 고전!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진짜 삶'을 찾다

철학에서 던져온 질문은 오랜 세월동안 사실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삶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따라서 니체의 철학은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제대로 된 철학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니체의 철학을 먼저 읽고 나면 앞선 철학적 고찰들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해서 가끔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니체관련 책은 늘 나중에 로 미뤄두곤 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이 유명한 책이 실은 철학책은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가깝다고 하는 설명을 읽고 나니 이 책 정도는 먼저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유명하고 자주 회자되는 책이니만큼 제대로 번역한 책을 읽고 싶었기에 출판사와 옮긴이가 중요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뢰가 갔다. 니체에 대한 첫 책이니만큼 무턱대고 본문을 바로 읽으면 어려울 것 같아서 책 뒤편의 <해설> 먼저 읽고 시작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수수께끼 같은 이 책의 부제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떤 독자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 책은 그 자체로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략) 니체는 개인적인 것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p. 579)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은 책 속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니체가 왜 페르시아 종교 예언자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사용했느냐고 종종 묻는다. (p. 581) '그 페르시아인이 역사상 이룬 엄청난 독특성과 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성격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굳이 차라투스트라일 필요는 없지만, 선과 악의 도덕적 이원론을 정립한 차라투스트라만큼 선악의 저편에서 도덕을 새롭게 평가하고자 하는 니체의 의도에 부합하는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p. 582)

책의 제목도 부제도 수수께끼 같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내용도 온통 수수께끼 같은 책이었다. 다만 니체의 문장이 말하는 것은 늘 반대편을 의미한다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다. 예를 들어 대중을 말할때는 개인을 강조하는 것이고 믿음을 말할때는 신을 부정하는 식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반박을 위해서 종교가 대표적으로 내세우곤 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을 부정하기위해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정립된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뒤흔든다. 차라투스트라보다 나은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면 책의 제목은 아마 바뀌었을 것이다.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니체가 읽은 수많은 철학 저서와 문학작품이 녹아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독특한 장르를 구성한다. 때로는 잠언으로 들리고, 때로는 문학작품으로 읽히고, 때로는 그 텍스트의 독특한 음악적 운율 때문에 악극으로 들리기도 한다. (중략) 서양의 형이상학과 기독교적 전통을 뒤집어엎기 위해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를 호출한 이 책은 성서에 대한 니체의 대답이자 패러디다. 성서는 이 책의 내용 및 형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p. 583) 논리적 추론이 생각해낸 것이라면, 영감은 불현듯 찾아온 것이다. (중략)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이미지와 비유에 내맡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마치 번개처럼 필연적으로 번쩍 떠오른 <차라투스트라>의 강렬한 영감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p. 586)

논리적으로 서술된 책이 아닌만큼 옮긴이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본문을 읽으며 주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철학과 호메로스와 괴테를 비롯한 문학고전과 바그너를 비롯한 음악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서의 패러디' 였다. 내가 성서를 읽었다면 더 제대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격렬한 분노 내지 공감을 하며 문장들의 의미를 생각해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감'어린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한번의 독서로는 가능하지 않음은 여전했을 것 같다.

니체의 '초인'은 전치사 '위버'와 '인간'이라는 뜻의 '멘쉬'의 합성어다. 인간인데 인간을 넘어서려는 인간 유형이 초인이다. 그는 인간인 한 결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일 수 없다다. 초인이 슈퍼맨이 아닌 이유다. '넘어선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지 결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p. 589) 초인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다. 초인은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대지에 묶여 있는 존재다. 초월한다는 것이 결코 전통 형이상학에서처럼 감각적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극복과 초월은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 '대지에 충실한 것'이다. (p. 590) 그러기에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에게 '대지와 짐승과 초목'을 마련해주는 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최상의 인간을 자연의 이미지로 구상한다. (p. 591)

니체는 단지 신을 배제하고 우리의 삶과 세계를 하나의 동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려 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이러한 신이 없는 시대에 세계를 이해하는 허무주의적 접근 방식의 상징이다. (p. 593)

미래의 삶을 창조하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개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창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원회귀 사상은 가능한 한 다양한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허무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와 중심을 잡아줄 실존적 삶의 형식이다. (p. 596) 영원회귀 사상은 우리가 이제까지의 헛된 삶과 미래의 의미 있는 삶, 심각한 무지의 시기와 밝은 통찰의 시기를 구별하는 시점에 우리를 일종의 사유 실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p. 597)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매력적인 철학사상가 이론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이 철학 저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논리적 추론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글의 도구는 개념이다. 철학적 글은 어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대신 추상적 개념을 논리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p. 598) 그러므로 논리적 추론을 완전히 포기하는 이론은 있을 수 없다. 이 책에는 이러한 시도들이 보이지 않는다. (p. 599)

이 책이 철학저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본문에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 같은 니체의 핵심적 철학 개념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개념들에 대해 <해설>을 통한 기초지식이라도 없었다면 읽는데 곤란함을 겪었을 것 같다. 니체 철학에 대한 초행자인 나로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서로 읽히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를 이론과 사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운 미궁에 빠진다. 그는 어디에서도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삶을 통찰하고,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삶의 지혜를 얻어가는 성찰의 이야기로 읽으면 흐릿하고 애매모호하던 상징과 비유들은 선명한 빛을 띠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구체적 삶을 사유함으로써 삶과 사상을 일치시키려 했다. (p. 599) 고대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철학을 단숨에 정당화한 것처럼, 니체는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를 썼다는 사실로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려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은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니체의 처절한 노력이 독특하고 독창적인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모토는 간단하다. '삶을 철학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을 산다' (p. 600)

철학적 개념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논리적으로 그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니기에 니체에 대한 첫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과욕이었던것도 하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고대그리스관련 책들이 니체의 이 책을 이해하는데 그나마 큰 도움을 주었기에 읽고나니 그나마 해볼법한 선택이기도 했다. '삶을 철학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을 산다' 는 이 책을 설명하는데 있어 최고로 명쾌한 표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삶에 관한 영감을 말과 음악과 춤을 통해 표현한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드라마'는 그리스어로 본래 우리에게 불현듯 일어나고 나타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사건은 동시에 '행위'를 뜻한다. 드라마가 '나는 행위한다' 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전달하려는 사상은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삶과 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를 한 편의 드라마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차라투스트라의 드라마는 내려감으로 시작한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342에서 말하는 것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몰락과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삶에 관한 비극적 인식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다. (p. 601)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고, 돌아오는 것은 다시 떠나기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우리의 삶에 동반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중략) 이러한 풍경이 눈에 들어와야 비로소 그의 핵심 사싱이라고 불리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영원회귀' 사상의 윤곽이 드러난다. (중략)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말해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면 최고의 독자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고 강하게 명하지만, 그를 부정하려면 우선 함께 길을 가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를 읽는다. (p. 604)

차라투스트라는 4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드라마다. 장마다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바뀌고 그 변화를 통해 차라투스트라의 성찰도 성숙한다. 이 한권의 책을 한 번의 독서로 '최고의 독자'가 될 순 없었지만, 아는 것도 없이 니체를 부정하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와 함께 그의 길을 걸어본 것으로 만족하련다. 차라투스트라의 비극을 이제야 시작해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십 년 동안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1). 그러나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주석1) 이 책은 기독교 성서에 대한 패러디로 읽힐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을 받고 활동을 시작한 것도 서른 살 쯤이었다. <누가복음> 3장23절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 붓다가 영적인 삶을 살려고 출가한 시기도 그가 스물아홉살 때였다. (p. 13)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이제는 그 지혜를 얻으려고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p. 14)

<논어>에서 공자는 30세를 '이립'이라고 하여 학문의 기초가 확립된 나이라 했고 40세를 불혹이라 하여 유혹되지 않는 나이라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도 예수도 붓다도 '이립'을 하고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불혹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려는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자신을 봐줄 사람들이 필요했기에 산을 내려갔다. 이 '내려감'으로 인해 차라투스트라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제 아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아. 인간은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죽이고 말 거야 (p. 16)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가면서 만난 첫번째 사람은 '성인'이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게 됐기에 신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자와 헤어지며 생각한다.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p. 18) 하지만 이 짧은 만남은 역설적이면서 웃프다. 차라투스트라 본인도 십년간 숲속에 살다가 이제 내려가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p. 19)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내려가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들은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 23)

나는 이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인간이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이제는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싹을 심을 때다. (p. 26)

차라투스트라는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시장에 군중이 많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가서 말했다. '가르치겠다' 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깨달은 지혜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었고 조롱했다.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혜가 지혜인줄 모르는 비극의 시작이다.

나는 목자나 무덤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군중과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고, 초인에 이르는 계단을 보여주리라. (중략) 나의 목표를 향해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른 자들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p. 38)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길을 간다. 나의 짐승들아, 나를 이끌어다오! (p. 39)

다 읽고 정리하면서 다시 보니 이 책은 수미일관의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교적 짧은 에피소드인 '머리말'에서의 마무리는 이 책의 마지막장의 장면을 미리 드러낸 것이었다. 축제, 몰락의 길, 짐승들.

주석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문장은 불교 경전에서 붓다의 설법이 끝날 때 반복되는 문장을 모방한 것이다. '얼룩소'는 붓다가 출가하여 방문했던 도시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p. 47)

그대들은 이웃 사람 주위로 몰려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건대, 그대들의 이웃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 나쁜 사랑이다. 56)

주석56) <마태복음> 22장 3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p. 113)

4장 주석22) <마태복음> 26장 20절,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차라투스트라의 짐승인 독수리, 뱀 그리고 나귀를 포함하면, 차라투스트라의 만찬에 참석한 자도 모두 열 둘이다. (p. 498)

본문의 곳곳에서 성서를 비튼 곳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표현방식은 동양경전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머리말 이후 시작되는 본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로 에피소드들이 마무리되곤 하는 것이 '아멘' 을 비튼 것 같기도 하고 '공자왈' 같은 동양적 분위기를 흉내낸 것 같기도 한 일종의 후렴구였기 때문이다. '머리말 '이후 본문의 많은 서술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말하는 형식인데 <논어>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비슷해서 더 그러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서의 대중들을 떠나고 난 이후의 여정은 좀 애매하다. 어디서 갑자기 '제자들'이 등장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여하튼 차라투스트라는 본격적으로 '가르침'들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꾸며대고 신을 갈망하는 자 중에는 언제나 병든 자가 많았다. 그들은 인식하는 자와 덕 중에 가장 새로운 덕인 정직을 격렬하게 미워한다. (p. 57)

나는 그대들의 길을 가지 않는다. 그대들 몸을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결코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아니다! (p. 63)

나는 급류가 흐르는 강가의 난간이다. 붙잡을 수 있는 자는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p. 71)

한때 정신은 신이었다가, 다음에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는 심지어 천민이 되었다.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p. 73)

국가는 낡은 신을 정복한 그대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본다. 그대들은 전투에 지쳤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긴다!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는 자신의 주위에 영웅과 명예로운 자들을 세우고자 한다! 이 냉혹한 괴물인 국가는 기꺼이 양심이라는 햇볕을 쬐고자 한다! 그대들이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숭배하면, 국가는 그대들에게 무엇이든 주려 한다. 그렇게 국가는 그대들의 빛나는 덕과 그대들의 자랑스러운 눈길을 매수한다. 국가는 그대들을 미끼로 삼아 많고 많은 군중을 유혹하려 한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 지옥이라는 예술품, 신성한 영광으로 장식되어 썰렁거리는 죽음의 말(馬)이 고안되었다! 그렇다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이 고안되었다. 스스로를 삶이라고 찬미하며 선전하는 그런 죽음이. (p. 91)

여인에게는 아직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인들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다. 또는 기껏해야 암소다. (p. 106)

나는 그대들에게 이웃이 아니라 벗을 가르친다. 벗은 그대들에게 이 대지의 축제요, 초인을 예감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p. 115)

여자에게 있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다.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중략) 남자는 전쟁을 위해 교육받아야 하고,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략) 여자는 보석같이 순수하고 섬세한 장난감이어야 한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세계의 덕들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이어야 한다. 별빛이 그대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그대들의 희망이 '나는 초인을 낳고 싶다!' 이기를. (p. 123)

결혼. 창조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 하나를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를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실현하는 상대방에 대한 외경심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p. 131)

'얼룩소'라는 도시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설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가르침들은 굉장히 고대그리적인 내용들이었다. 니체에게도 철학의 시작은 고대그리스였던 것일까, 니체 본인이 고대그리스철학에 경도되었기 때문인 것일까. 여하튼 마무리는 기독교에 대해 신에 대해서였다. 어쩌면 이러한 1부의 마무리가 차라투스트라 철학의 시작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 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 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 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 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혔다. (p. 136) 그는 황야에 머무르며 선하고 의로운 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는 사는 법을 배우고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게다가 웃음까지 배웠을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나의 형제들이여!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그 젊은이의 사랑은 미숙했고 인간과 대지에 대한 그의 증오도 미숙했다. 그의 심성과 정신의 날개는 여전히 묶여 있어 무거웠다. 그러나 젊은이보다는 성년의 남자가 더 아이답고 그만큼 덜 우울하다. 성년의 남자는 죽음과 삶을 더 잘 이해한다. (p. 137)

그대들은 아직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대들은 나를 만났다. 신도들은 언제나 이렇다. 신앙은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참으로, 나의 형제들이여! 그때는 아를 잃어버린 자들을 다른 눈으로 찾을 것이고, 그대들을 다른 사랑으로 사랑할 것이다. (p. 146)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147)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아마도 니체가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그 대담성에 자주 놀라게 되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으로 자신의 동굴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깨달음을 얻었다.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예수처럼 (형제들에게) 말했다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공자처럼 혹은 붓다처럼 (벗에게 때론 제자들에게) 말한다.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사랑을 표현했다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성찰을 표현한다.

가장 좁은 틈새에는 다리를 가장 늦게 놓는 법이다. (p. 194)

길고긴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저 문장이 가장 좋았다. 어쩌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 별 상관이 없거나 혹은 반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문장이겠으나 앞뒤사정 다 빼고 그저 저 문장 하나만 딱 떼놓고 읽었을 때 저 문장이 나는 참 좋았다.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소리없이 말했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말을 하고 부서져라!"

이에 나는 대답했다. "아, 그것이 나의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좀 더 고귀한 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부서질 만한 가치도 없다" (p. 268)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소리없이 말했다. "그들의 조롱이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복종을 잊어버린 자다! 이제 그대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 (중략)

그때 무언가가 다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폭풍우를 몰고 오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올 수밖에 없는 자의 그림자로서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명령할 것이고, 명령하면서 앞장서 걸어갈 것이다" (p. 269)

마지막으로 무언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과일은 익었으나, 그대는 그대의 과일에 어울릴 만큼 익지 못했구나! 그러므로 그대는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대는 더 무르익어야 한다" (p. 270)

2부에서 끝에 다다라서 다양한 가르침들을 설파하던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고요한 시간'이 말을 걸었다. '나의 무서운 여주인의 이름'(p. 266)이라고 표현한 '가장 고요한 시간'은 결국 차라투스트라의 내면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3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배를 타게 된다. 배들의 출발지가 '행복의 섬' 인 것으로 보아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머물렀던 곳은 아마도 '행복의 섬'이었나 보다. 배에서 내려 뭍에 오른 차라투스트라는 곧바로 그의 산과 동굴로 가지 않았다.

나는 이들 군중 사이를 지나가며 많은 말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일 줄도, 간직할 줄도 모른다. (p. 308)

여러 길들을 지나 '얼룩소'라는 대도시를 스쳐 다시 그의 동굴과 그의 짐승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3부에서 말하는 가르침들은 이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적인 내용들이었다.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이것이 이제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 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p. 352)

동굴에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성찰을 거듭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느날 아침 쓰러진다. 그런 그를 그의 짐승들이 보살핀다.

마침내 이레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장미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냄새를 맡으며 즐겼다. 그때 그의 짐승들은 그와 이야기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p. 388)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그대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의 교사다. 이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그대가 최초로 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이 커다란 운명이야말로 바로 그대의 최대의 위험이자 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하고, 우리 자신도 함께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실을, 또 우리가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존재했으며, 만물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p. 394)

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이제 나는 죽어서 사라진다. 나눈 무가된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하지만 내가 얽혀 있는 원인의 매듭은 회귀하고, 이 매듭은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는 다시 온다. (중략) 위대한 대지의 정오와 인간의 정오에 대해 다시 말하기 위해서이며, 다시 사람들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서다.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말 때문에 부서진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예고자로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그 자신을 축복할 때가 왔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끝난다" (p. 395)

자신의 영혼과의 대화 혹은 악극에 나오는 노래로 마무리 되는 3부에 이어 4부는 세월이 좀 흐른 시점이다.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일상을 보내던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느날 예언자가 찾아온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가?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우르릉 거리며 포효하는 소리가 올라오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자, 그때 길고 긴 외침이 들려왔다. 심연들이 서로에게 던지고 떠넘기는 외침이었다. (p. 427) 어느 심연도 그 외침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그 외침은 불길하게 들렸다. 차라투스트라가 마침내 말했다. "그대, 나쁜 예언자여, 저것은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며, 인간의 외침이다. 검은 바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곤경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죄, 그대는 이 죄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동정이다!"예언자는 넘쳐흐르는 마음으로 대답하면서 두 손을 쳐들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나는 그대를 그대의 마지막 죄로 유혹하려고 온 것이다" (중략) "저기서 나를 부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자 예언자가 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무엇을 숨기는가? 그대를 향해 외치는 자는 우월한 인간이다." (p. 428) 그대가 말하는 우월한 인간에 대해서는, 좋다! 나는 즉각 저기 숲속에서 그를 찾겠다. 그곳에서 그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곳에서 사악한 짐승에게 쫓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의 영역 안에 있다. 내 영역에서 그가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p. 430)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를 동굴에 남겨두고 숲으로 발길을 뗀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향해, '우월한 인간'을 찾기 위해. 그러나 숲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다양한 존재를 만나고 만날때마다 대화를 나누고는 자신의 동굴로 보내놓고나서 또 돌아다녀봐도 차라투스트라는 헛수고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동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 다시 크게 들려왔다. 이것저것 뒤섞인 길고도 묘한 외침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외침에 여러 목소리가 합쳐져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멀리서 들었더라면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외침처럼 들렸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동굴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보라! 이 같은 아우성 뒤에 어떤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거기에는 그가 낮에 만났던 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슬픔에 잠긴 예언자, 오른편 왕과 왼편 왕,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 늙은 마술사, 교황,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그리고 나귀가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더없이 추악한 자는 하나의 왕관을 쓰고 두 개의 자줏빛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p. 489)

"그대들 절망한 자들이여! 그대들 유별난 자들이여! 내가 들었던 것이 그대들의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알겠다. 내가 오늘 헛되이 찾아다녔던 자, 곧 우월한 인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는지를. 우월한 인간, 그가 바로 나의 동굴에 앉아 있다니! 그러나 놀랄 일이 무언가! 제물로 바친 꿀과 나의 행복에 대한 교활한 감언으로 그를 나에게로 유혹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p. 490)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보낸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숲에서 만나 자신의 동굴로 보내놓은 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우월한 인간'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 이 산속에서 기다려온 것은 그대들이 아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저 산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대들과는 아니다. 그대들은 우월한 인간들이 오고 있다는 조짐으로만 나에게 왔을 뿐이다. 그대들은 커다란 동경, 커다란 구역질, 커다란 권태를 가진 인간들이 아니며 그대들이 신의 잔재라고 부른 자들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세 번을 말하자면 아니다! 나는 여기 산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오지 않는 한 나는 여기서 단 한 발짝도 떼지 않을 것이다. 우월한 인간, 더 강한 인간, 더 승리하는 인간, 더 쾌활한 인간, 몸과 영혼이 반듯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웃는 사자들은 오고야 말 것이다. (p. 496)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굴에 있는 존재들이 결코 우월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만찬을 벌이려 한다. 동굴에 있는 존재는 예수와 열두제자 처럼 차라투스트라와 열두 존재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역사책에서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저 기나긴 식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잔치에서는 오직 우월한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p. 501) 차라투스트라는 동굴에 있는 열둘에게 가르침을 전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동굴밖으로 잠시 나갔을때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외에는 모두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언행을 한다. 동굴로 돌아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마지막 축제를 벌인다. 나귀축제.

좋다! 내가 깨어났는데도, 그들은, 이 우월한 인간들은 아직 잠들어 있다. 그들은 나의 참된 길동무가 아니다! 내가 여기 나의 산에서 기다리는 것도 그들은 아니다. (p. 571) 그들은 아직도 나의 동굴에서 잠들어 있고, 그들의 꿈은 아직도 나의 수많은 한밤중을 씹고 있다. 나의 말을 경청하는 귀, 순종하는 귀가 그들의 사지에는 없다" (p. 572) 보라, 더 기이한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는 자기도 몰는 새에 어떤 무성하고 따듯한 털 뭉치 소으로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와 동싱 그의 앞에서 포효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드럽고 긴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징조가 나타났다" (중략) "나의 아이들이 가까이 왔구나. 나의 아이들이" (p. 573)

4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이 책을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사자' 가 등장한다. 이 사자의 등장을 보며 1부의 첫머리에 나왔던 '낙타'를 기억해야 한다. 머리말이 끝나고 본문인 1부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의 그 '낙타'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주석16- 고대 이란어 차라투스트라는 인도-이란어의 어원에 딸면 '낙타'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낙타를 소유하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를.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많이 있다. 이 강력한 정신, 인내력 많은 정신의 내면에는 외경심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무엇이 무거운가? 인내력 많은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잔뜩 싣고자 한다.(p. 43)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은 '낙타를 소유하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 이라는 것만으로도 니체에게 상징적인 이름이 될 수 있었다. 낙타는 사람이 타기에는 불편하지만 사막에서 짐을 나르는데 더할나위없이 유용한 동물이다. 낙타는 오로지 '짐'을 나르는 데에만 사람에게 쓰인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동안 가르침과 성찰과 깨달음의 말을 풀어냈던 것은 결국 그가 지녔던 정신적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번째 변신이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여기에서 그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의 적이 되려 하고, 최후의 신의 적이 되려 한다. 승리를 위해 정신은 이 거대한 용과 맞붙어 싸우려 한다. 정신이 더는 주인과 신으로 부르고 싶지 않은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가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원한다' 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 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비늘 짐승으로서,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p. 45)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하다. (p. 46)

그 사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동굴에서 나온 다른 열둘에게 포효하자 모두 달아나버렸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외친다.

아,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잉, 어제 아침 저 늙은 예언자가 내게 예언했던 것은 바로 그대들의 곤경에 대해서였다. 그는 그대들의 곤경으로 나를 유혹하여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p. 574) 나의 마지막 죄로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차라투스트라는 다시 한번 자신 속으로 침잠했고, 다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동정이다!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청동빛으로 변했다. "좋다! 그것도 이제는 긑이다!" 나의 고뇌와 나의 동정,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내가 행복을얻으려 애쓴단 말인가? 나는 나의 일을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은가!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아이들도 가까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왔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이제 솟아오르라, 옷아오르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p. 575)

낙타 그리고 사자 그 다음 변신의 내용을 이 마지막 페이지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며 책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아이가 되는지를. (p. 46~47)

차라투스트라는 낙타로서 정신적 짐을 내려놓는 기나긴 과정을 거쳤고 사자가 찾아와 마지막 유혹을 몰아냈으며 자신의 짐승들이 곁에서 아이들로 함께 하고 있게 됨으로써 혼자가 아닌 혼자로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를 얻었다. 어쩌면 아익 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동굴을 떠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난다. '태양' 과 '번개' (책에서 니체가 강조하는 용어들) 라는 고대그리스철학적 의미에서 '위대한 정오'는 중요한 시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이가 되어 그만의 '위대한 정오'를 이제는 맞이할수있게 됐기에 오랜 거처인 동굴을 떠난 것인 걸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힘차게 그의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허게 말했다>의 끝. (p. 575)

책뒤에 '니체 연보'가 나오는데 '1873년 눈이 극도로 나빠지다' 와 '1881년 타자기를 주문하다' (p. 606) 문장이 나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연보에 '타자기'를 주문한 것이 나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다. 다행히도 최근에 읽은 책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니체의 문장은 원래는 난해한 만연체였다고 한다. 그러나 눈이 나빠지고 타자기로 글을 쓰게 되면서 만연체로서의 문장구사가 힘들어졌기에 문체가 변했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은 타자기 구입 후 1883년~1885년에 출판되었다. 직접 만연체를 구사하며 썼던 책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내가 읽을 만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기묘한 책이었다. 철학책이 아니면서 철학이 읽히기도 했고 소설책이 아니면서 문학적으로 읽히기도 했으며 종교서는 더더욱 아님에도 종교적 깨달음이 넘치는 책이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항상 떠나지만 동굴로 매번 돌아오다가 마지막엔 정말로 동굴을 떠난다. 아마도 이번엔 다시 동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자신의 삶을 동굴에서 꺼내어 힘차게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그 철학이 그 삶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는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아직 짐을 가득 실은 낙타이기에 생각해야할 짐이 너무도 많아서 니체의 동굴속에 한참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