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 수업 365 1일 1페이지 시리즈
정여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대한 심리학자들의 조언부터 책, 영화, 그림, 일상의 이야기들까지

심리학의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내 안의 빛과 그림자, 상처와 욕망의 세계

365일 동안 떠나는 폭넓은 지식과 따뜻한 위로의 심리 여행

'상처 치유자'정여울이 들려주는 하루 한장 특별한 심리 이야기

 

역사와 고전을 좋아하고 왠만하면 원전번역을 읽는편이기 하지만 가끔은 잡학다식용 책을 읽으면 재밌으면서도 유익해서 좋았다. 벽돌책을 읽는 중간 일종의 쉬어가는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간략히 요약되어 있는 내용들이 깔끔하게 읽히니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도 했다.

'1일1페이지...'로 구성된 책이 여러권 연이어 나오고 있는데 '교양수업'과 '미술'편을 읽으면서 정말 하루 딱 한 페이지만 읽으면 되게끔 하는 깔끔한 편집도 좋았고 방대한 지식을 필요한 만큼 쏙쏙 골라뽑아 놓은 것도 좋았었다. 시험전날 벼락치기 할때 혹은 시험당일 쉬는시간에 초치기를 해야할때 필수로 봐야 하는 요약노트 를 보는 기분이었달까. 평소 심리학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서 심리학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책을 읽다보면 빠르게 휙휙 넘어가는 책이 있기도 하고 몇줄 읽다말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거나 생각을 하게 되거나 해서 한장한장 넘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책이 있기도 하고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 책이 있기도 하고 어렵진 않은데 묘하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책이 있기도 하다. 이 책은 기대했던 잡학다식용 책은 아니었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였음에도 책장이 쉬이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다.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문장 자체가 긴 호흡의 문장이라고나 할까... 정여울 작가의 이름은 여러번 들었었지만 책으로 접하는 것은 처음인데 이 작가는 문장에 여운이 긴 타입이었다.

별다른 특색이 없는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들이 있기도 하지만 많은 작가들의 경우 저마다의 개성적 문체가 있기 마련이다. 소설가가 아니라 에세이 작가라서 그런지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라서 그런지 그저 개성인건지 잘 모르겠으나 정여울 작가의 문장에선 긴 호흡이 느껴졌다. 상대방이 울면 따라울고 상대방의 호흡이 가빠지면 따라서 숨이 차오르듯이 책에서 느껴지는 문체에도 읽는이가 저절로 따라가지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정여울 작가의 문장은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천천히 읽게 되고 차분해져서 한페이지한페이지 꼼꼼이 보면서도 넘치는 감성에 가끔 깊은 숨을 내쉬며 읽어야 했다.

월요일은 '심리학의 조언'

화요일은 '독서의 깨달음'

수요일은 '일상의 토닥임'

목요일은 '사람의 반짝임'

금요일은 '영화의 속삭임'

토요일은 '그림의 손길'

일요일은 '대화의 향기'

라고 구분되어 있고 요일별로 딱 한 페이지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요일별로 분야가 정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심리학의 조언에서 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독서의 깨달음에서 일상이 나오기도 하고 사람의 반짝임에서 책이 나오기도 하니 페이지 구분이 크게 의미가 있진 않았다. 내용도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 글들이었다. 때로는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중첩되기도 해서 원래 하나였던 긴 글을 쪼개서 요일로 나눈건가 싶은 글도 있었고 다른 곳에 실었던 글을 편집해서 넣은 건가 싶은 글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감성은 한결같은 글들이었다. 책과 마음의 다독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놓고 있는 글들이었다. 어쩌면 이 편안함이 정여울 작가만의 특별함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동안 나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아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읽었던 책, 내가 봤던 그림이 나오는 것도 반가웠지만 작가의 글 속에 담긴 진심이 공감될때가 많았다. 그런 부분들만 옮겨 놓아도 내가 그대로 까발려지는 것만 같아서 책에 수없이 포스트잍을 붙여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저 작가의 매력이 돋보이는 문장들을 옮겨와 본다.

노을 지는 풍경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열정, 다 버린 줄로만 알았던 슬픔,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 믿었던 희망까지도.

이제야 알겠다. 그토록 오랫동안 노을을 바라보는 삶을 예찬한 이유를. 아름다운 풍경은 마음을 비춰주는 위대한 거울이라는 것을. 노을 지는 풍경에 내 마음을 비춰보는 그 몇 분의 시간만으로, 삶은 더욱 찬란해진다는 것을. (p. 20)

해돋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해넘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꼭두새벽 일어나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 추위에 떨며 기다려야 하는 해돋이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하곤 했다. 그보다는 일상에서 수시로 바라보는 어쩌다 보게되는 노을이 좋았다. 어디에 있더라도 노을은 항상 어느 계절에 보더라도 노을은 항상 내마음의 무언가도 건드리곤 했다.

언젠가 온갖 고민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때 무작정 도서관에 찾아간 적이 있다. 지치고 힘든 마음으로 무얼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한 기분이었는데, 도서관의 문학 코너에 가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이 모든 책을 언젠가는 다 읽어주어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나름 열심히 책 읽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 영원히 읽지 못할 것만 같은 책이 이렇게 많다니. 경이로운 느낌에 잠시 어지러워졌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복잡했던 마음의 파고가 신기하게도 가라앉았다. 나의 단순한 진심과 만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머나먼 곳을 향해 힘들게 떠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p. 55)

어렸을때부터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런 경험을 하진 못하고 나이를 먹었지만 도서관이 많아진 요즘이 참 좋다. 걸어서 갈수있는 서점과 도서관에 책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볼때마다 세상에 이렇게 책이 많구나 새삼 감탄하곤 한다. 나름 책을 많이 읽는 편임에도 도서관에 가면 왜소해지곤 한다. 그렇게 겸손해지고 겸허해지는 마음이 단순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주곤 한다. 여건이 된다면 정말 도서관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다. ㅎ

문학, 여행, 심리학이 주는 깨달음의 기쁨을 지속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은 바로 독서다. 매일 멈출 수 없는 나만의 '취재'는 천천히 깊이 읽기를 통해 시작한다. 더 깊이 내 상처를 건드리는 책, 그래서 더 가슴 아픈 책, 더 내 마음에 커다란 깨달음의 발자국을 남기는 책이 글쓰기에 영감을 주는 책들이다. 글이 아니었더러면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p. 69)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들이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살고 싶어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역사가가 아닌 우리도, 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잊고 싶어하는 아픈 상처들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뜨거운 열정과 살아있는 권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p. 70)

영감을 얻기 위해서도 살아있는 권리를 찾기위해서는 우리는 늘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 가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많고 많은 책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건조한 상태에서는 보잘것없지만 따스한 찻물 속으로 들어가면 오색찬란한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꽃차처럼, 여행은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내 감성의 날개를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내는 천연의 항우울제다. (p. 96)

여행에세이도 여러권 냈던 작가인만큼 여행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여행하고 글쓰며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라고 내가 부러워 한다면 작가는 작가 나름의 고충을 한보따리 풀어놓겠지만... 그래도 부러운건 부러운 거다. ㅎㅎ 여하튼,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저렇게 감성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작가이기에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어오지 않았나 싶다.

에곤 실레의 그림 속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고통받는 모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더 이상 구원도 치유도 기대하기 어려운 모성의 리얼리티, 삶의 아픔을 홀로 감내해야 할 어머니의 외로운 자화상 같은 그림들이 관객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판다. 실레의 그림들은 '모성의 치유'보다 '치유가 필요한 모성, 구원이 필요한 모성'을 일깨운다. 아이에겐 그래도 엄마가 있다. 지금 간신히 생명의 마지막 한 순간을 붙잡고 늘어질 정도의 작은 에너지밖에는 남지 않은 엄마가, 그래도 곁에 있다. 하지만 이 가여운 엄마에게는 아무도 없다. 엄마에게는 이 힘겨운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p. 198)

에곤 실레의 <눈먼 어머니> 라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감상이 인상적이었다. 책속에 실린 그림은 흑백인데다 너무 작아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어서 따로 찾아서 봐야 했다. 모니터 화면 한가득 그림을 클릭해 놓고도 한참을 봐야 했다. 출산의 과정을 담은 그림 같기도 한 이 그림은 에곤 실레 특유의 외로움이나 시니컬함을 넘어선 비참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모성에 대한 지나친 판타지를 몹시 싫어하기에 이 그림에 더 마음이 쏠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오랜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주면서도 주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너를 신경 쓰고 있잖아' '내가 너를 챙겨주고 있잖아' 하고 생색을 내는 사람들과는 결국 멀어지게 되어 있다. 생색을 넘어 그루밍으로까지 가는 사람들, 기브 앤 테이크를 넘어 아예 상대방을 착취함으로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이런 보석 같은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의 눈부신선물이 아닐까. '잘해준다' 는 생각조차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퍼주는 사람들, '베푼다'는 생각조차 없이 누군가에게 우정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p. 210) 끝없이 베푸는 자들이 결국 이 세상을 바꾸어간다. (p. 211)

베푼다 는 생각조차 없이 누군가에게 사랑과 지혜를 퍼주다가 언제부턴가 내가 아니 나만 '베풀고' 있다는 자각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면 결국 그 관계는 오래가지 않고 끝나고 만다. 그러고보면 '베푼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그 베품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러한 베품도 가능해지는 셈이다. 기브앤 테이크는 그렇게 베품에도 연결되어 있다. 다만 그 자각성과 마음가짐이 다를뿐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이러한 베품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은 이러한 베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때일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현대 심리학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기준이 돼 가고 있다. (중략) 그런데 자존감은 꼭 높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라는 개념 자체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기보다는, 때로는 내가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다양하게 바꾸어보는 것이 좋다. 자존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주 섬세하게 '내가 기쁜 순간들'을 늘려가는 것이 좋다. (p. 256)

자존감은 확실히 과대평가된 가치다. 게다가 자존감이라는 감정의 뉘앙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를 실제보다 더 크고, 멋지게 생각하는 감정'에 가깝지 않은가. 자신을 크고, 대단하고, 빛나는 존재로 바라봐야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건강한 감정일까. (p. 361)

'자존감' 에 대한 책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왔었다. 모든 심리문제의 해결책이 자존감의 회복인것처럼 유행하는 듯 했다. 너무 많이 언급되는 것을 보며 처음엔 혹했던 마음이 의아해지기도 했다. 그 자존감 마저 회복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지 않겠는가... 자존감이 높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말도 다르고 생겨나는 말도 다르기 마련이다. 시대를 장식하는 말을 보면서 그 거꾸로 그 시대를 분석해볼 수 도 있지 않을까...

나는 문학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를 향해 눈뜨기도 하지만, 문학을 통해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계'에 대한 나의 철저한 무지를 깨닫기도 한다. 내가 그동안 시퍼렇게 눈뜬 장님이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문학으로 인해,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게 만드는 데 장애물이 되는 내 스스로의 쓰라린 결핍을 성찰하게 된다. (p. 299)

삶의 일부이면서도 일상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공간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미셀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는 용어에 응축한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의 밝은 면을, 디스토피아가 어두운 면을 강조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며 삶의 모든 복잡미묘한 측면들을 끌어안는 혼종성의 공간이다. 유토피아가 어원 그대로 '지상에 없는 곳'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지상에 분명히 존재하면서 인간의 꿈을 담는 실제적 공간이다. (p. 300)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도 있고 여행가서 특별한 장소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여하튼 실재하는 공간이고 내가 직접 살아숨쉬는 곳이다. 그곳은 특정한 장소가 될수도 있지만 문학이나 책과 같은 무형의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책속에서 유토피아를 찾기 보다는 디스토피아를 확인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헤테로토피아를 공감하기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단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존재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우리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우리가 언젠가는 함께할지도 모를 기적 같은 시간을. (p. 324)

창문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일깨우는 미디어다. 언제나 창문 바깥에서 창문 안쪽을 엿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창문은 '가질 수 없는 세계'를 상영하는 영혼의 스크린이 된다. 유리창은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거, 어쩌면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어떤 세계를 광고하는 영혼의 스크린인 것이다. (p. 333)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물건을 볼때 우리는 그 물건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이 통째로 내게 오는 것이라고 했던가... 유리창은 스크린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유리창이 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유리창문을 열 수 있다.

"가시는 빼고 날은 세워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날카로움과 까칠까칠함의 감미로운 은신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가시'는 공격을 위한 흉기가 되지만 '날'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p. 354)

나는 누군가에게 가시를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날을 세우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가시를 품고 있는 것과 날을 벼린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가시는 빼야하고 날은 세우는 것이 내게도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읽고 씀으로써 우리는 매일 깊고 풍요로운 자신의 내적 자원을 만들어간다. 매일 읽고 쓸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크고 너른 치유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게 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진 사람이다. 당신이 매일 읽고, 쓰고, 그 배움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스한 공감의 공동체에 항상 속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내적 자원이자 회복탄력성이다. (p. 373)

그런가 내가 그렇게 다 가진 사람이었나;;; 나는 매일 책을 읽고 거의 매일 읽은 책에 대해 쓰고 그렇게 읽고 쓴 책을 이야기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가졌음을 일깨워준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천천히 읽혀지는 이 책을 몰아서 읽으면서 좀더 여유있게 읽을 껄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내가 가진 내적 자원을 일깨워준 것으로 그 아쉬움을 만족감으로 바꿔 마음먹어 봐야 겠다.

정여울 작가의 글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내공이 있는 것 같다. 제목에서 예상했던 잡학다식용 책은 아니었으나 작가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따듯하고 깊이있는, 무엇보다도 감성이 넘치는 에세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