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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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통찰로 아버지의 한 생을 우뚝 그려낸 신경숙의 신작 장편소설

가족의 나이 듦을 비로소 바라보게 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좋아하는 소설가들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꼽으라면 나는 공지영 과 신경숙을 꼽을 것이다. 권여선, 정유정, 김혜진, 구병모 등등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지만 신경숙과 공지영은 특별하다. 작가 자신의 삶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라서 허구와 삶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지 공지영 작가가 작년에 낸 신작 '먼 바다' 의 작가 후기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 라고 적어야 할 정도다.

두 작가 모두 나름의 논란이 좀 있었던 작가들이다. 하지만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문체가 워낙 특별하다 보니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팬심이 그닥 흔들리진 않았더랬다. 공지영의 작품에선 '투지'가 느껴진다면 신경숙의 작품에선 '물기'가 느껴지곤 했다. 불끈불끈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품도 좋고 눈물인듯 빗물인듯 마음 한켠을 촉촉하게 적시는 작품도 좋고 그랬다. 이번 작품에서도 읽는 내내 때론 눈가가 때론 마음이 젖어들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작가에겐 이런 아버지가 계셨구나... '엄마를 부탁해' 속 엄마도 '아버지에게 갔었어' 의 아버지도 참 따듯하시던데... 작가에겐 참 좋으신 부모님이 계셨구나 싶어서...

여동생이 얼른 언니가 그런 것에 신경 쓸 마음이 아니잖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 것에, 라는 여동생이 남긴 말의 여운이 책상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게 했다. 그렇게 무력감 속에 두어시간을 앉아만 있다가 나는 J시로 가는 기차표를 예약하고 노트북의 전원을 뽑아 가방에 담고 가족 대화방에 나의 J시행을 알렸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아버지에게 가 있겠다, 고 했다. (p. 11~12)

육남매의 네째이고 작가인 화자는 어린 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부모를 비롯한 가족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채 몇년을 혼자 자신의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남매들의 가족단톡방에서 부모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이 오갈때도 무심하게 흘려보내곤 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서울 병원에 입원하시고 시골에 아버지 혼자 남아 계시는 상황이 영 마음에 걸려서 오랜만에 고향집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렇게 내려간 고향집 마당에서 본 아버지는 혼자 우두커니 선채로... 울고 계셨다.

언젠가 신문에 '나의 아버지'라는 에세이를 청탁받아 쓴 적이 있었는데 큰오빠는 그것도 패널로 만들어 책장 앞에 세워 두었다. 큰오빠는 마냥 기쁜 얼굴로, 네가 쓴 글을 아버지에게 읽어드렸다,고 했다. 나는 내 가족이 나의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 마음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부끄럽다,는 것이 가장 근접한 마음일 것이다. 함께한 어떤 시간을 내 식대로 문장으로 복원해서 내놓은 일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짐작해보면 아찔하고 난감하고 부끄럽다. 그리고 두렵다. 사라져도 무방할 어떤 시간들이 내가 쓴 문장으로 인해 언어로 채집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 (p. 47)

소설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쓰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그런 작품 속에서도 작가 본인의 진심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있을때면 무척 반갑곤 하다. 그런 진심은 작가 특유의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신경숙의 솔직함은 내성적이고 부끄럽지만 잔잔한 울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진심어리게 작품에 스며들게 하는 작가들이 참 존경스럽다.

아버지가 돌아누운 벽 위쪽엔 나와 큰오빠를 시작으로 내 형제들이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아마도 큰오빠의 사진을 시작으로 해서 막내의 사진까지 일별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버지 등 뒤에서 학사모를 쓴 큰오빠의 사진을 올려다봤다. 내 사진이 걸려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는 비어 있다. (p. 61)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했다. (p. 62) 아버지는 동생들에게 사진을 받아 벽에 걸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내 자리를 비워놓았다. (p.64) 큰오빠가 일갈을 했다. 그것이 아버지 인생 아니냐, 너는 글을 쓴다는 사람이 사람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 아버지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아버지 인생? 우리들 학사모 쓰고 찍은 사진이? (p. 65)

나이든 어르신이 사시는 집에 가면 사진이 많이 걸려 있곤 하다. 내가 어릴때 갔던 시골집에도 온갖 사진들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흙벽에 누렇게 뜬 벽지가 그 집의 역사를 알려준다기보다 그 많은 사진들이 그집에서 살아온 누군가의 삶을 말해주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자꾸만 늘어간다. 어르신들이 나이드실수록 자식들이 사진은 자꾸 늘어만 간다. 그것이 당신들의 인생이신 걸까...

나는 니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거 보는 게 좋았고나. (p. 67)

아버지가 니가 학고 싶어서 하는 일은 잘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아버지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할 뻔했다. 나는 하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쓰는 것 같아요,라고. (p. 91)

1933년생이신 아버지는 열네살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었다. 아직 소년인 나이에 종가의 장손으로 집을 지키며 제 몫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열일곱살때 전쟁이 터졌다. 삶에서 가장 혹독했던 시절은 바로 그 6.25때였다. 전쟁은 많은 것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졌고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점점 늘어가는 자식들 입에 먹거리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쉬는 철 없이 온갖 일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큰소리 한번 낸적 없는 온화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어린 딸을 잃은 당신의 큰딸이 홀로 고통에 빠진채 오지말라고 외면할때 멀리서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던 그런 아버지였다. 이심전심인건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육남매는 모두 착하게 잘 자랐다. 참 착하게... 야무지게... 잘... 자랐다...

아버지는 헌이는 걱정할 것 없다, 헌이는 약속을 지킨다, 헌이가 그렇게 말했으면 맞는 말이다,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 긍정적인 말들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말대로 걱정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벅찬데도 약속한 일은 지키려고 했다. 아버지가 그리 말했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알면서는 타인에게 틀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p. 137)

당신의 삶이 고됐는데도 자식들에게 험한 소리 한번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 대해 그동안 아는 것이 너무 없었음을 고향집에 내려와 아버지와 단 둘이 지내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너무나 야위고 쪼그라들어 계셨다. 수시로 눈물을 흘리셨고 밤이면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시곤 했다. 아버지의 몸은 잠들고 싶으나 뇌가 잠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심코 열어본 창고방에 가득 쌓여있는 홈쇼핑택배 박스들, 뜯지도 않은채 그대로 있는 그 박스들을 보며 마음한켠이 아려오긴 했으나 그보다 더 진한 충격을 주었던 것은 그 박스들 옆 상자에 담겨 있던 편지들이었다.

바람불고 눈 내리는 겨울밤, 마을 사랑방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귀가가 늦는 아버지 밥상에만 구운김을 내놓았다. (중략) 뭐 하느라 한밤에 다니느냐고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어머니는 윗목에 차려놓은 밥상의 상보를 걷어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그릇을 상 위에 올리고 기름을 발라 사각으로 자른 구운 김을 접시에 담아 아버지 밥그릇 옆에 놓았다. 고소한 김 냄새가 겨울밤 방 안에 퍼지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아버지 밥상 옆으로 하나둘 다가가서 빙 둘러앉았다. (중략) 아버지는 김 한장에 밥을 얹고 여며서 쪼로록 앉은 우리들 입에 차례로 넣어주었다. (p. 193) 언젠가 어떤 인터뷰에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문득 그 겨울밤이 떠올랐고 아버지가 김에 싸준 밥을 받아먹었을 때 참 행복했다고 대답했다. (p. 194)

다복하고 따스하고 행복함이 느껴지는 이 푸근한 장면엔 사실 엄청난 반전이 숨어 있음을, 아버지의 인생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참으로 절절했던 장면임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읽고는 그때 행복했냐?고 물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는 헛헛하게 웃었다. 내가 행복했다는 그때를 두고 아버지는 무서웠다고 했다. 젊은 날에 당신의 새끼들인 우리가 음식을 먹는 걸 보면 무서웠다고. (p. 194)

하지만 무섭기만 했다면 어찌 살아냈겠는가... 무서웠지만... 무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랬을까. 아버지도 엄마처럼 우리의 먹성이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 힘이 되기도 했을까. (중략) 아버지가 고백처럼 젊은 날에 우리들의 먹성이 무서웠다고 한 말은 내겐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염병으로 이틀 사이로 부모를 잃은 마음을, 전쟁을 겪을 때의 마음을, 얼굴 한번 보고 엄마와 결혼하던 때의 마음을, 큰오빠가 태어났을 때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이 되지 않았다. (p. 195)

어디 먹는 것 뿐이었겠는가, 자신의 삶이 고되다는 것을 알면알수록 자식들에게 그런 삶이 대물림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커졌고 그렇게 또다시 뼈골빠지게 자식들 가르치는 것이 온 생애의 목표가 되었을 것을...

자식들이 하나둘 학교에 가고 다시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마침내는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지.

두렵고 무섭지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는지.

(중략) 무섭고 두려운게 많은 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과 대적해왔다는 것도. 아버지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말할 것이 없제, 였다. (p. 196)

나이든 아버지와 지내며 아버지의 인생을 처음으로 되짚어보게 되고 그렇게 '아버지의 내면에 도사린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엄마보다 아버지를 다정히 여기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한 말은 늘 한가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업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뿐이다. (p. 229)

아버지의 지난 삶을 알게 되면서 다른 가족들에게도 물어보게 된다.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해보라고 하니 각자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하나 모두다 처연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엄마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듯이...

왜 안 떠나셨어요?

못 떠났제.

왜요?

나는 집에 왔어야 했으니까. (p. 264)

옛날엔 그랬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던 그런때가 있었다고. 그 옛날이 사실 얼마 오래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말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옛날일수도 있지만 지금과는 다른 결의 시간임은 분명하다. 나보다 가족을 먼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먼저인 그런 시간...

자네 아버지가 내 안부를 묻기만 하고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 시간들을 나는 이해하네. 그렇게 흘러갔어도 내가 뭐라겠나. 그런데 어느해인가 자네 아버지가 대학생이라던 셋째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자. 그때는 이미 자네 아버지나 나나 나이를 한참 먹어버려서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되더만. 무엇 때문에 그리 오래 만나기를 꺼렸는지 허망하기조차 했네. 자네 아버지가 나타났을 때 왔구나, 했어. (p. 297) 아니 정확히는 숨겨달라고 했네. 혈기만 왕성해서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 놈이 날뛰다가 잡혀가서 고문당하고 얻어맞아 허리까지 부서지고 수배 중인데 이대로 또 잡혀 들어가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며. (p. 298) 부자가 말을 안 섞었어. 자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입을 달싹도 안 했네. 아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자네 아버지가 일어서버리더만. 한번은 내가 자네 아버지에게 왜 아들하고 말을 안 하느냐고 물으니 머리통이 다 큰놈이라 말을 섞어봐야 이길 수가 없다고 했어. (p. 299) 아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분노가 치밀어서 죽을 것 같다고. 그러니 알아듣고 싶지 않고 그래야 자기가 버틸 수 있다고 했어. 전쟁도 지나갔는디 이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냐고 그때까지는 아들을 지켜주는 것만 생각할란다고 했어. (p. 300)

한문은 유창하게 써도 한글 쓰는 것은 쭈뼛거리는, 학교한번 못가본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고' '세상에 분노'할줄 아는 멋진 아버지였다. 요즘에도 이런 아버지는 잘 없지 않을까... 함께 분노해주기 보다는 한껏 야단치고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채 반대의 말만 쏟아붓는 아버지들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런 아버지가 어느 시절부터인가 잠을 자지 못하고 몽유병 환자처럼 집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느라 피로에 절어 혼절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p. 374)

수면장애 검사가 시작되었다. 검사 전에 아버지의 상황과 병력을 세밀히 적어야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설문지의 간단한 내용을 작성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자는 사람이나 알수 있는 내용도 있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 잠 습관에 대해 묻다가 나는 아득해지곤 했다. 엄마의 기억에 의하면 아버지가 밤에 자다가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 시작한 것은 삼십년이 지났고, 격한 잠꼬대를 시작한 것은 이십년은 지난 이야기이며, 자다가 일어나서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헛간에 들어가는 일도 십오년전부터 있어온 묵은 것들이었다.

왜 그런 말씀을 이제야 하세요?

너나 이제 아는 일이지…… (p. 376~377)

의사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아버지의 몸은 늙고 지치고 피곤한 상태라 해가 지면 자고 싶어하지만 뇌는 깨어 있는 거라고 했다.' '오래 방치해온 수면장애로 아버지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도 했다.'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도 동시에 겪고 있다고.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지금 알아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도 했다. 초기라면 우울증과 불안, 공황장애 때문에 수면장애가 온 것인지, 그 반대인지를 관찰해서 치료법을 찾았겠으나 지금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서로 엉겨붙어 있다고. 단기간에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p. 377)

아버지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었다. 첫째가 환갑이 넘어 은퇴를 했으니 곧 노인이 노인을 모시게 될 그런 나이였다. 그 긴 인생의 풍파가 밤이면 뇌속에서 깨어나 때론 일제치하로 때론 전쟁통으로 때론 최루탄 매캐한 서울한복판으로 아버지를 불러내고 있었다.

뭐한다요?

호박 속 파고 있는 거 안 보인가? 가기 전에 호박 버무리나 해 먹고 갈라고.

먹고 싶은 거 있으믄 해 먹고 가야제.

내가 언제 죽겄는가?

그것을 내가 어찌 안다요.

안지 살기 싫은디 안 데려가네.

뜻대로 되는 일인가.

넝뫼 양반은 좋겄소. 이도 다 해넣으니 튼튼한 이를 하고 갈 수 있응게.

염색해야 쓰것소. 언지 갈지도 모르는데 그리 허연 머리로 갈라요?

해야제.

늘 깨깟하게 하고 있어시오. 언지라도 갈 수 있게. (p. 400)

'산보를 나갔다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대화가 매번 이런식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나누는 것 같은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하게 나누었다. 아버지가 이 치료를 마쳤을 때 신작로에서 만난 왕림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향해 인자 지대로 고기도 깨물어보다가 가소,했다. 아버지는 그리야겠네,했다. 말을 건네는 사람도 대답을 하는 사람도 덤덤했다.'(p. 402)

시골일수록 평균연령이 높아진지 오래다. 한번 빈 집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 마을 주민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곳이 여러 곳이다. 언제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누군가 가면 더는 누구도 오지 않는 마을... 그런 나이의 삶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살아냇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p. 416)

출판사에서 진행했던 이벤트에 당첨되어 가제본으로 읽은 작품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은 작가의 장편소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작가 특유의 좋은 문장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뒤로 갈수록 구성력이 좀 떨어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어찌보면 한국적 신파라고 진부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좋았다. 그리고 작가가 다시 자신만의 작품으로 세상에 나와주어 참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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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1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왕수민 옮김 / 부키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저자가 들려주는

"어른들을 위한 교양 세계사'

흥미진진한 통일과 균형의 파노라마, 세계 중세 이야기!

진정한 세계사 책이, 제대로 된 세계사 책이 드디어 나왔다! 그동안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세계사'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의 역사를 다 품지 못하는 책들이 많았다. 세계사 라 해놓고 서양사 이기 일쑤였기에 중앙아시아사, 동양사, 남아메리카사는 따로 찾아 읽고 끼워맞춰야 세계의 역사가 되곤 했다. 세계사가 세계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세계를 모두 품은, 진정 제대로 된 세계사 책이다. 원제는 'The History of the Midieval World' 이지만 '세상의 모든 역사'라 하기에 충분한 아니 '세상의 모든 역사'라 부르기에 마땅한 책이었다.

중세편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문명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까지 인데 1,2권으로 나위어져 있어서 1권에서는 312년~661년 까지 다루고 그다음은 2권에서 1129년까지 다룬다. 저자의 이 책은 전체 6권으로 예정된 시리즈 중 가운데 부분이다. 고대편 1,2 와 르네상스편 1,2 는 근간 이라고 예정되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전 시리즈를 모두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서양인이 썼음에도 이토록 균형잡힌 서사는 처음이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이 정말 모든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사책이라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로마제국 에서 시작하기에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게르만족 정도는 다른 책들에서 그러하듯이 당연하게 등장하면서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 및 인도 그리고 중국에 이어 한국과 일본까지 두루 살펴보는데 그 어떤 세계사 책이 이렇게 극동까지 다룬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서양사 초기에 큰 비중이 없는 편인 브리튼과 일찍이 고대문명이 발달했던 메소아메리카까지 다룸으로써 정말 동시대 모든 지역의 역사를 총괄하고 있는데 겉핥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깊이감이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운 책이었다. 이 방대한 지역을 다루면서 이토록 객관적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존경스러웠다. '교양세계사'로 읽을 책으로서의 가독성까지 훌륭했다. 이 시리즈가 모두 나온다면 앞으로 세계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겐 이 시리즈의 전권을 보면 된다고 말하게 될 것 같다.

저는 이 책이 서구 독자들에게 자칫 소홀하기 쉬운 동양에 대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는 동양과 서양의 공통점은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가 나머지 다른 세계와 어떤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기를 바랍니다. (p. 12) -한국어판 서문 中 -

서양인들에게 세계사를 자신들만의 역사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한국인인 나도 잘 모르던 한반도의 고대사도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기에 세계사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이런 책을 저술해 준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서야 세계사 따로 한국사 따로 였던 시간들이 서로 얽혀들어 동시대의 역사로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기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제각각의 역사로 보면 어디가 먼저 발달하고 어디가 늦게 발달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역사로 보지 못한채 줄세우기식 발달사로만 잘못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동시대를 두루 함께 살펴보면 앞뒤 맥락이 연결되므로 이런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틀린 것이 아라 다른 것이다 라는 말을 좋아한다. 역사도 비슷하다. 어느 역사가 나은지 아닌지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다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고 다 제각각의 의미가 있었다.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맥락을 짚을 수 있다는 것이고 역사 특히 세계사에서는 이런 맥락이 정말 중요하다. 이 책은 그런 포괄적이면서 균형잡힌 세계사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 정말 읽을 가치가 있는 역사책이었다.

하늘 높이 내걸린 십자가의 그늘 아래, 콘스탄티누스가 그 나름으로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모델에 따라 로마는 이렇게 재탄생하고 있었다. 이제 공공 광장 한 켠에는 사자굴에 들어간 다이넬을 본든 조형물이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었고, 황궁의 지붕 정중앙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상이 황금과 각종 보석을 넣은 화려한 돋을 새김 조각으로 표현됐다. (p. 34)

세상 서쪽에서 콘스탄티누스1세가 자신의 제국을 차근차근 통일해가는 동안 진 제국은 차차 가랄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p. 37)

한구석으로 쪼그라든 영토 안에서 진이 다시 살아나려 애를 쓰는 동안, 흑해 쪽 새로운 도시에서 콘스탄티누스1세가 한참 나라를 다스려 가는 동안, 인도에서는 수많은 아왕국과 부족국가가 우후죽순 일어나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p. 55)

제국의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러고 나자 콘스탄티누스1세는 가장 위험한 적을 코앞에서 마주한 꼴이 됐다. 바로 페르시아의 왕이었다. (p. 71)

로마 제국에서 동방을 향해 저 끝까지 간 곳에 전투의 패배를 씻으려 절치부심하는 한 왕이 또 있었다. 371년,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왕관을 물려받으면서, 적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위세가 말이 아닌 나라도 함께 물려받은 터였다. (p. 125)

시대와 나라에 맞게 장이 잘 구분되어 있지만 이 장을 묶어서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통합' 이다. 콘스탄티투스가 기독교로 통합시키려 할때 중국에서도 천명을 다투고 있었고 인도에서 그리고 서방에서 멀고 먼 저 극동의 지역 고구려에서도 그러했다.

로마 제국이 이제 둘이 돼 버렸다는 사실이 사람들 눈앞에 번연히 펼쳐졌다. 비록 두 명의 황제 아래 두 개의 수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름상으로 로마 제국은 여전히 하나의 땅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마저 쩍하고 금이 가 선명하게 둘로 갈라진 판이었다. 서방에서는 황제의 후견인으로 통하는 스틸리코가 동방에서는 이제 범법자로 통하고 있었으니까. (p. 178)

굽타왕조가 '마음의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려 애쓰기는 했지만, 인도 제국의 통일은 외부의 침약이 없던 시절에나 가능했다. 쿠마라굽타1세와 스칸다굽타 치세에 일어난 에프탈족의 침략은 그 위세가 자못 심각했어도 문명을 완전히 종식할 정도는 아니었고, 서방의 훈족이 가했던 위협처럼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굽타 제국의 단결력은 외부에서 중간급의 위협만 가해져도 금방 한계에 다다를 만큼 쉽게 깨어지는 것이었다. (p. 224)

이제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는 나라는 두 곳 곧 남방의 유송과 북방의 북위였다. (p. 233)

과거 알라리크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서고트족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한 바 있었다. 아틸라도 그의 부족민들을 결집해 하나의 훈족 군대로 통합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민족이 지도자 한 사람의 야망만을 추동력으로 삼아 출협하게 되면 그 지도자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 신생국도 정체성도 바로 종말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p. 270)

군데군데가 전쟁터로 화한 갈리아 땅을 지나, 서고트족이 점차 위세를 키워 가던 히스파니아의 땅 옆 바다까지 건너서, 서로마 황제의 옥좌와 한참 떨어진 저 머나먼 땅 브리튼의 섬들, 이즈음 이곳에선 자잘하게 나뉜 땅덩이들이 이리 붙고 저리 붙기를 반복하며 각기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p. 283)

2부는 '분열'의 시기였다. 로마도 확연하게 두 쪽으로 갈라지고 서방에선 우후죽순 부족들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땅에서도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긴 했으나 통일세력은 아직 멀어보였고 어렵게 모아지려 했던 인도또한 다시 조각났다. 제국이라 이름 붙인 곳도 실상 제국이 아닌 상태의 전세계적으로 소국가들의 난립기였다. 그러는 사이 로마의 서쪽지역은 거의 완전히 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니게 됐고 이 476년을 서로마제국의 멸망 혹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 흔히 부른다. 하지만 3부 '신흥세력들'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로마제국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진제국의 명맥도 그러했고 인도에서도 저 멀리 메소아메리카에서도 그러했다.

이즈음 이탈리아반도는 테오데리크와 그의 동고트족이 완전히 장악한 한편, 서로마 제국의 나머지 땅들은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돼서는 로마 주교와 콘스탄티노플 주교 사이의 골만 점점 깊어가는 상황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 본래의 태를 벗고 차차 그것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로 변모해 간다. 바로 비잔티움으로 로마보다는 동방에 가깝고 언어는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를 주로 쓰며 로마 주교의 눈에는 '가톨릭'과도 점차 연이 멀어지던 그 제국으로. (p. 346)

이 무렵 중국 북쪽 땅의 북위는 강한 힘을 자랑하며 싸움을 일삼는 분위기였던 반면, 남쪽 땅의 유송은 점점 그 기가 꺾여 갔다. (p. 351) 중국의 북방, 그리고 동쪽 나라들까지 고대 중국의 전통들을 제 것으로 삼겠다고 아우성인 와중에, 정작 중국 남방의 유송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p. 365)

전성기를 구가했던 굽타 제국은 이즈음 세가 판이하게 줄어 있었다. (p. 401) 인도 북부는 다시 예전처럼 누덕누덕 기운 천 조각 마냥 잘게 쪼개졌다. (p. 406) 535년 이 크라카타우섬 화산이 기어이 터졌다. (p. 408) 작황실패는 동방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나무 나이테 데이터로 미루어 보면 535년부터 540년경 기간에는 동방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칠레, 켈리포니아, 시베리아처럼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지역에서까지 '여름철의 생장이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당시 몇 년 동안은 그만큼 여름철이 춥고 어두웠다는 뜻이다. 태양이 빛을 잃고 어둑어둑해지면서 발생한 역병, 굶주림, 기근은 당시의 중세 세계 전역을 휩쓸었다. (p. 411)

신기하게도 세계사의 흐름은 비슷했다. 인류의 문명 발달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비슷한 통합과 분열이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세계에 영향을 끼친 자연재해가 있었으니 크라카타우섬 화산 폭발이다.

크라카타우섬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재는 바람을 타고 상공 높이 떠올랐고, 이후 5년 동안 그렇게 상공에 머물며 원을 그리듯 지구 둘레를 떠돌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여름철이 춥고 어두침침해지는 일이 지구 반대편 세상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 곳곳의 숲이며 밭들이 가뭄에 시달리는 한편, 작물을 말려 죽이고야 마는 그 건조한 날씨가 물러가는가 싶으면 어느덧 엘니뇨가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빈발해 대륙에 지독한 홍수를 몰고 오는 일이 3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로마, 이집트, 동양 땅에 제각각 위대한 도시 문명이 건설돼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중앙아메리카에서도 그곳을 본거지로 삼은 사람들이 그 나름의 독자적이고 복잡한 문명을 한창 발달시켜 갔다. 그렇지만 여기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은 로마인, 이집트인, 중국인과는 달리, 자신을 다스린 통치자를 소재로 역사를 쓴 적이 없었다. (p. 415)

세계 곳곳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이렇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친 자연재해를 통해 세계사를 묶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다른 세계사책에서는 미처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던지라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즈음 아프리카, 엄밀히 말하면 나일강 바로 옆 동쪽 땅에서는 악숨 왕국의 군대가 아라비아반도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p. 429)

이제 새로 연호까지 제정해 쓰겠다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에 이웃한 백제,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거듭났다는 뜻이었다. (p. 475) 안타깝게도 이들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이 함께 커 나가기엔 한반도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반도 남쪽과 동쪽은 바다가 막고 있었고, 서쪽에는 중국이 버티고 있었으며, 북쪽은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 발 들이기 힘든 땅이었다. 그말은 엇비슷한 성격의 이 3왕국이 이 시절 내내 한반도의 패권을 수시로 주고받으며 밀고 밀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는 뜻이다. 서양에야 탁 트인 넓은 땅이 있어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이 한꺼번에 출몰해 여기저기를 마음껏 누비고 다녀도 서로 뒤엉킬일이 별로 없었지만, 한반도의 이 3국은 좁은 땅덩이 탓에 싸움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서로 간에 끊임없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느 한 왕국이 아주 사라져 버리거나, 아니면 어느 한 왕국이 아주 오랜 기간 한반도 패권을 차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 476)

세계사 중심으로 역사를 읽다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사가 별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한반도의 삼국시대도 처해진 조건하에서 치열하게 역사의 한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이렇게 세계사와 함께 한국사를 읽을 수 있다니 정말 좋다. 그리고 신라의 한반도 통일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의 통일 흐름과도 맥을 함께 하고 있었다. 세계 어디건 나라의 발달사가 그렇다는 듯이.

인도 남부에서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던 소규모 왕국들이 하나둘 이어붙어 하나의 매끈한 제국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543년부터다. (p. 511)

페르시아인이 아라비아반도로 진출하는 한편,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 모두 미덥지 못한 후계자들에게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p. 525)

네 갈래로 갈라져 있던 프랑크족의 통치가 또 한번 하나의 왕권 아래 통일된 것은 558년 무렵의 일이었다. (p. 543)

비잔티움의 황제로서 한번쯤 꿈꿔 볼 만한 일들을 헤라클리우스는 현실 속에서 정말로 다 이뤄낸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취를 이루는 동안, 그는 그만 비잔티움 제국과 남쪽의 아랍인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까지 싹 다 없애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p. 605)

어마어마한 규모로 벌어진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의 살벌한 전쟁도 저 아래쪽 사막 지대에서는 그저 다른 세상 일일 뿐이었다. (p. 609) 530년대와 540년대를 거치는 동안, 예기치 못한 기상 패턴의 변화로 말미암아 심각하고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두 차례 아라비아 반도에 들이닥쳤다. (p. 610) 남쪽 출신 부족들이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아라비아반도 북동쪽 일대의 오아시스 쪽으로 이주해 버린 것이다. (p. 612) 사람들이 북쪽으로 흩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대도시 메카에만 아랍의 제 부족이 몰려들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p. 613) 대중 앞에서 무함마드가 이 같은 내용을 공히 선언하고 나서자, 그의 말에 모여드는 추종자도 점점 불어났다. (p. 620) 이렇듯 이슬람교는 처음 시작부터 그리스도교와 달랐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자기네 도시랄 게 따로 없었고 자기네 왕국은 당연히 없었다. (p. 624) 하지만 무함마드에겐 애초 시작 때부터 도시가 있었다. (중략)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활동을 갓 시작한 초창기부터 정치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그 자신의 필요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p. 625)

갈라지고 합쳐지고 또 갈라지고 합쳐지는 이합집산 속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것은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념, 바로 종교였다. 역사가 발달할 수록 권력자들은 종교의 이점을 깨달았고 유용하게 이용하려 애썼다. 하지만 종교는 생각보다 다루기 힘든 기술이었다. 권력자의 마음대로 휘둘러지는가 싶다가도 사람들의 믿음은 전혀 예상밖의 곳을 향하기도 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던 땅에서 피로도가 쌓이는 사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이기도 했다. 정작 초창기에는 종교로 중앙집권에 실패한 황제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종교로 중앙집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성공시켰던 곳은 아라비아반도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교로 마음을 다잡으며 실질적으로 행한 방법은 정복이었다. 앞선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당 왕조는 이제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나아가는 중이었다. (p. 627) 당나라 장수들은 정복 활동을 벌이던 중 중국 남서쪽에도 또 한 명의 제국 건설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중략) 저 멀리 서쪽 땅에 사는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2세, 혹은 알타이산맥에서 돌궐족을 이끈 부민 카간과 마찬가지로, 송첸 감포 역시 어중이떠중이로 모여 있던 인근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어엿한 왕국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에 돌입한다. 송첸 감포가 택한 방법도, 이 시절 부족장에서 왕으로 변신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랬듯, 타지 정복이었다. (p. 633)

무함마드가 왕 노릇을 한 건 아니었다. 아랍인들을 상대로 그가 한 일이란 집단 정체성을 제공해 준 것으로, 알라리크1세가 고트족을 위해 했던 일이나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족을 위해 했던 일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중략) 무함마드는 예언자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을 일으켜 세운 창시자였다. (p. 657) 아부 바르크로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의 뚜껑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앉아 있는 형편이었다. 이 주체 못할 에너지를 아부 바르크는 밖을 향해 돌리기로 결심한다.(중략) 전쟁만큼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도 없었다. (p. 661) 한때 충실한 신도들이 모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세워지는가 했던 이슬람 제국은 이제 중세의 여느 제국을 점점 닮아 가고 있었다. 정복당한 민족의 수가 수다하게 많아져 개중 일부는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사회 상층부에서는 늘 권력다툼이 벌어지며, 제국 전체 땅덩이는 언제든 따로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이는 그런 제국을 말이다. (p. 699)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책이지만 약간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쓰여진 글이라서 술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기존의 세계사 책들처럼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다수의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동안 함께 볼 수 없었던 역사들이 적은 페이지나마 함께 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큰 균형감을 잡아주고 있었다. 어느 한곳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은 없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전쟁과 평화, 분열과 통합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다른듯 비슷해 보이는 그 모습들을 보며 서로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아 닮아간건지 애초에 다 비슷비슷한 인류였기에 닮은 모습의 역사를 만들어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정말 대개가 다 닮아 있었다. 이 한권이 이렇게 큰 통찰을 보여주는데 다음편은 어떨지 정말 기대된다. 어서 2권을 읽고 싶다.

ps. 개인적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차근차근 읽어오고 있던 중에 만난 책이라 더 반가웠다. 너무 서양사에만 치중해 세계사를 읽어오진 않았나 싶어 일부러 중앙아시아사, 비잔티움사, 일본사, 한국사 등을 찾아 읽곤 했는데 그 연결이 그리 쉽진 않았더랬다. 이 책 한권을 읽은 것이 그러한 몇년간 묵은 숙제를 한 기분이 들게 했다. 세계사를 세계적 프레임으로 보게 해준 이 책에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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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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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기둥인 그리스 신화와 철학, 기독교, 법의 통치는

어떻게 구축되어 발전해갔는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를 보면 신전 그림 중앙에 UNESCO 라고 써있는데 그 신전은 누가봐도 바로 알 수 있는 고대그리스 신전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 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의 보호관리단체가 대표로 선택한 건물이니만큼 세계문화유산의 기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세계사가 서양사는 아니지만 세계사를 서양사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서양사의 기원은 아니 세계사의 기원은 고대그리스라고 은연중 말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고대그리스 이전에 훨씬 이전에 고대사가 있었다. 이 시작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양고대사'를 다시 배워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배움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책을 만나 반가웠다. 바로 이책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이다.

30여 년간 서양고대사를 공부해왔지만, 일반독자나 학생들에게 적합한 입문서를 찾지 못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서양고대사 입문서들은 저마다 장점을 갖고 있다. 화보다 뛰어난 책도 있고, 연구자들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책도 있다. 그렇지만 서양고대사가 다루어야 할 시기 전체를 망라하면서, 서양고대사 이해에 필수적인 주제를 모두 담아낸 책은 찾기 힘들다. 우선 시대 면에서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p. 5)

주제 면에서 서양고대사는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주제들을 빠짐없이 다루어야 한다. 기존 입문서들은 대개 정치사, 제도사, 사건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화사 분야를 소홀히 했다. 따라서 여러 인물의 업적이나 정체제도의 발전은 자세하게 다루어졌지만 그리스 문학, 기독교의 발전과 로마의 기독교 박해, 로마의 실용 문화와 같은 주제는 소략하게 다루어졌다. (p. 9) 이 책은 이러한 주제를 모두 다루었다. 또한 이 책에는 많은 사람이 재미를 느낄 만한 흥미로운 소재들이 담겼다. (중략) 기존 입문서에서 보기 힘든 이런 소재들을 통해 독자들은 재미있게 서양고대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p. 10)

책의 첫장 '서문'에서부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서양사를 세계사로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서양사의 기원을 고대그리스에서 시작하는 것도 문제다. 고대그리스는 문명의 기원이나 역사의 기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게 편집한 역사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닐까.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이고 맥락인데 중간부터 본 역사가 전체흐름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어온 것은 아닐까. '서양고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대 근동(유럽인이 보기에 가까운 동쪽이라는 뜻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일대)의 역사에서 출발해야 한다'(p. 9) 는 저자의 시작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게다가 너무 전문적인 정치철학적 이야기들 중심이 아닌 생활과 문화관련 풀이들이 많아서 가독성도 좋았다. 저자는 '입문서'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내가보기에 이 책은 서양고대사의 '완결판'이라고 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서양사의 진짜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이집트를 거쳐 고대 그리스를 지나 고대로마 에서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서술되는데 온갖 책과 자료들을 섭렵한 저자 덕분에 나는 한 권으로 편하게 최신 관점들을 읽을 수 있어 감사했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과거같지만, 새로운 유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새로운 분석기술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조건들에 의해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미래적인 학문이 역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책도 최근의 정보가 들어간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은 서양고대사에 대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최신 관점으로 해석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좋았다.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황무지들을 떠돌던 유목민들이 두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퇴적평야에 관심을 갖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수메르인이었는데, 수메르인은 보리와 밀을 재배해 풍요를 일구었다. 식량이 풍부했던 수메르인은 여러 종류의 술을 마셨는데, 특히 맥주를 좋아했다. 그들은 '인생의 즐거움, 그것은 바로 맥주'라고 말했다. (p. 19)

문명의 기원, 역사의 기원을 이야기할때 대부분 정착민 입장에서 서술되곤 한다. 농업을 하고 사회가 커지고 나라가 되고 전쟁이 일어나고 제국이 되는 순서랄까... 그런데 그 시작은 유목민들에 의해서였다. 수메르 뿐만이 아니다. 고대그리스, 고대로마도 외부에서 흘러온 유목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역사는 정주민들의 시간사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늘 유목민이 먼저였다는 생각이 든다. 유목사에 대한 연구가 좀더 많은 것을 밝혀낸다면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들이 많이 바꿀수도 있지 않을까... 여하튼, 역사의 시작에도 술이 있었다. 서양사에서 술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일상과 밀접해 보인다. 그렇게 취하면서도 그렇게 자주 전쟁을 할 수 있었다니 싶다가도 그렇게 취했기에 그렇게 자주 싸웠던건가 싶기도 하다.

19세기에 고고학이 탄생하면서 서양인들의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바벨탑이 발견되고, 노아의 홍수의 정체가 밝혀졌다. (중략)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서양인들은 깜짝 놀랐다. 문명의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고도의 도시 문명, 윤리적인 종교, 현세 중심적인 신화, 수준 높은 철학과 과학, 정교한 법률 체계가 그곳에 있었다. 더욱이 메소포타미아가 서양 문명에 끼친 영향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서양의 종교, 문화, 언어, 예술 모든 분야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p. 22)

서양고대사의 시작은 수메르에서 출발해야 한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서양인의 책을 읽었을 때도 놀라웠지만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한국인의 책을 읽었을 때 엄청나게 놀라웠다. 국내 저자중에 수메르어를 직접 판독할 수 있는 저자가 계시다는 것도 감탄했지만 그 책 내용들이 너무나 신선해서 이런 좋은 내용이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아했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김산해 님의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모든 것은 수메르에 이미 있었다.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도 바벨탑도 아치를 비롯한 건축기술과 신들과 신화 그리고 종교적 제의등등 많은 것들이 이미 수메르에 있었다.

기원전 2350년 경 북쪽에서 아카드인이 내려와 수메르인을 정복했다. 아카드의 지배자 사르곤 왕(기원전 2334~2279)은 자기의 출생에 대해 신화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p. 39)

나는 아카드의 위대한 왕 사르곤이다. 어머니는 여제사장이었고 내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내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시고, 몰래 낳았다. 그녀는 갈대 바구니에 나를 넣어 역청을 바른 덮개로 덮었다. 그녀는 강가에 나를 두었다. 강은 나를 '물 긷는 자'인 아키에게 데려갔다. 물 긷는 자인 아키는 물 양동이를 떨어뜨렸다가 나를 건져 올렸다. 물 긷는 자인 아키는 나에게 정원사 일을 시켰다. 내가 정원사 일을 하자, 이슈타르 여신께서 나를 줄곧 사랑하셔서, 나는 54년 동안 왕권을 행사했다. 나는 검은 머리의 사람들을 다스렸다.

부모가 버린 자식이 동물이나 신의 보호를 받고 커서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이후 역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와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대표적이다. 사르곤의 전설은 후대 전설들의 원형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처음에 정통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사르곤'이라는 이름은 '합법적인 왕'이라는 뜻이다. 이는 사르곤의 정당성이 의심되었던 정황을 반영한다. 이런 이야기는 모계사회의 유습을 보여준다. (p. 40)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설의 대부분의 원형이야기들도 메소포타미아에 이미 있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그 많은 신화와 전설의 원형이야기들의 출발점은 메소포타미아이다. 고대그리스나 성경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함무라비 법전이 인류 최고(最古)의 법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함무라비 법전은 그보다 앞서 있었던 우루카기나 법전, 우르남무 법전 에쉬눈나 법전을 정리하고 보강한 것이다. (p. 42)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도 따지고 보면 가장 오래된 법전은 아니다. 그이전에 법이 있었고 점점더 체계적으로 발달해오던 중 우리가 가장 먼저 캐낸 것이 함무라비 법전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되었다' 는 기원은 사실 가장 오래되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 이전에 이미 있었다. 서양고대사를 다시 배워야 하는 이유다.

히브리인에게 다윗은 영웅 중의 영웅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인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왕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에서 다윗은 참으로 추악한 인물이다. 그는 사울의 딸인 미갈과 결혼했지만,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자들을 겁탈하곤 했으며, 왕이 되고 나서도 부하의 여자들을 차지했다. (중략) 솔로몬은 흔히 '지혜의 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언급되지만 민간전승에서 말하듯 훌륭한 군주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억압적 폭군에 가까웠다. (p. 60)

얼마전 읽은 '마태복음' 관련 책이 생각난다. 누구의아들누구의아들 하고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다윗의 불경함은 이미 드러나져 있었다. 그러고보면 성경을 역사책으로 제대로 읽기만 해도 널리 알려진 존경스런 인물이 사실은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게될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제대로 읽히지 않고 구절구절 이용되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배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신의 지지에서 찾는 것은 이미 수메르에서 관찰된다. (p. 67)

페르시아는 이란 지역에서 발흥한 유목족이었기 때문에 제국을 만들기 전에는 문화가 뒤처져 있었다. 제국을 이루고 나서는 정복한 여러 종족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p. 68)

살 곳을 찾아 유랑하던 리비아와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이 이 땅에 자리 잡아 나일강의 은총 속에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p. 78)

신에게서 왕통의 정당성을 지지받는 것도 고대 수메르에 이미 있었다. 그나저나 페르시아도 이집트도 유목족에서 발흥했다. 정말 고대의 모든 시작은 유목민에게서였다고 보여진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시작은 수렵채집이었으니 모든 나라의 시작은 당연히 유목족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정착민들이 부흥시켰을지 모르나 그 기원은 유목민들에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역사의 전환점들은 매번 유목민과 정주민들과의 전쟁에서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유목족이라는 단어가 새삼 의미있게 다가왔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이 이집트의 신화와 매장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신화와 관습이 이집트 것을 많이 모방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이 용어는 그리스 문명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 문화를 수용했음을 강하게 보여준다. (p. 86)

독자적인 발달이라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문화는 교류속에 꽃이 피기 마련이다. 먼저였다고 더 우월할 것도 없고 답습했다고 더 낮게 볼것도 없다. 발달한 국가에서 덜 발달한 국가로 많은 것들이 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렇게 흥망성쇠가 뒤바뀌기 마련이다. 그 모든 과정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문명이 독자적이 아닌 것이 자존심상해할 문제도 아니고 블랙아테나 라고 할 것도 아닐 것 같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동방이라고 천시하는 지역에서 선진문물을 배웠다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이려나...

클레오파트라는 미녀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허영심에 가득한 요부로도 평가되었다. 리비우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바람을 피우는 요부'라고 평했고, 플리니우스는 '왕관을 쓴 창녀'라고 불렀다. 프로페르티우스는 '음탕한 생활에 푹 젖은 암꿩, 어지러이 흐르는 나일강과 똑같은 여자'라고까지 악평했다. 그녀가 냉철하고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이렇듯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패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p. 115)

상식처럼 익숙한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당연하게도 승자의 기록은 패자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보려면 한쪽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종종 기존의 승자의 기록에 대한 부당한 평가들에 대해 꼬집어주고 있어서 편견을 깨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고, 물질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p. 155)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고 이야기되지만, 당시 기록에는 이런 말이 없다. (p. 157)

플라톤의 국가관은 얼핏 보면 귀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플라톤이 세 계층을 서열화해서 생산자 계층을 천한 자들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세 계층은 세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통차지 계층이 사유재산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한 혈통이나 재산이 아닌 지적 능력을 기준으로 계층을 구분했다는 점에서도 진보적이었다. 플라톤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안정적인 사회 구조를 모색했다. 플라톤의 국가관은 그 과정의 산물로 볼 수 있다. (p. 159)

이렇게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이 신 못지않게 뛰어나거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몇몇 사례가 있다. 이런 생각은 신에 대한 그리스인의 사고관 대문에 가능했다. 당시 다른 지역의 주요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에서는 신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p. 165) 이에 반해 그리스인은 신이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영원히 살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느끼고, 원하는 바를 얻고자 온갖 잡스럽고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능력에도 한계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p. 166) 신인동형론은 그리스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신화에서도 일반적으로 관찰된다. (중략) 따라서 신인동형론을 그리스의 고유한 사고의 주요 요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p. 166)

흔히 서양 문명의 두 뿌리를 신 중심의 헤브라이즘과 인간 중심의 헬레니즘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을 무척 좋아하는 역사가들이 많지만, 이는 19세기 중반 서구의 몇몇 사상가들이 가능성을 주장한 것이다. 서양의 주요 개론서에는 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데 일본의 세계사 교과서,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나 서양사 개론서에 빈번하게 나온다. (p. 169)

고대그리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편이라고 여길 것 같다. 일단 신화가 친숙하고 철학자들의 이름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정도는 거의다 안다. 하지만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알고 플라톤의 국가론이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인동형론 도 그리스가 아니라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이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는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서양사가 그냥 서양사가 아니라 일본의 서양사인 셈이다. 서양고대사뿐만 아니라 서양사 아니 세계사 자체를 일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해석하고 책으로 펴내고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런 마음이 든다.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한다면 18세기까지 서양의 교육, 사회 운영, 문학에서 중심은 그리스보다 로마에 있었다. (중략) 문학에서도 키케로,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로마 시대 작가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따라서 로마의 유산, 기독교, 게르만의 유산을 서양 문명의 3대 기둥으로 보는 견해도 강하다. 19세기 서양인이 현재와 유사한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고, 그리스가 독립하여 서양 세계의 일원이 되자 비로소 서양인도 그리스를 그들 문명의 뿌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p. 170)

만약 그리스가 독립하지 못하고 오스만제국아래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는 많이 다른 내용이었을 것이다. 서양고대사가 고대그리스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못 꺼낸채 고대그리스도 아닌 고대로마가 서양고대사의 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역사를 학문적으로만 바라보고 올바르게 평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적어도 그렇게 노력은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는 '헬라스(그리스)인들과 이방인들의 위대한 행위와 업적이 덧없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역사를 썼다. 그가 책 제목을 '역사(희랍어로는 historia)'라고 했던 것은 희랍어로 '히스토리아'가 '탐구한 것' 혹은 '조사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조사한 것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책에 '히스토리아'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후 '히스토리아'는 조사한 것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역사'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다. (p. 182)

하지만 히스토리아는 역사 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조사한 것'이라는 일반명사로서의 의미를 중요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남겨진 기록을 조사한다는 1차적 행위에 대해 강조한 후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여 역사로 인정받게 하는 2차적 의미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고유명사로서의 역사만 보아왔던 것이 아닐지...

후대 서양인들은 그리스인이 내린 평가를 그대로 답습했다. 많은 서양인이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고, 서양이 우월한 정치체제와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은 민주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반면 동양인들은 전제적이고 수동적이며 타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서양인들에게 페르시아 전쟁은 아시아를 물리치고 유럽을 구한 대사건으로 평가되었다. (p. 207)

그리스인이 내린 평가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 그래서 서양의 기원을 고대그리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페르시아 역사에서 그리스와의 전쟁은 큰 의미도 없었고 영향도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정복전쟁중의 하나였을 뿐이고 페르시아 입장에선 그리스가 변방이었다.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면 양쪽을 다 알아보고 비교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쪽의 기록만 보고 그대로 박수는 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인과 동방의 관습에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의 부하들이 반발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나는 이민족들을 모두 쓸어 없애거나 세상의 절반을 황무지로 만들기 위해 아시아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 민족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 위대한 제국을 훌륭하게 통치하려면 우리가 가진 것을 토착민에게 전해주고, 또한 그들이 가진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태도는 시대정신으로 발전했다. (중략) 새롭게 통합된 세계에서 개별 종족이나 나라를 중요시하는 이념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했다. 철학자들은 사회와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윤리적으로 살면서 수행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쳤다. (p. 241)

정복한 곳에서의 포용성과 관대함도 로마제국이 먼저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왕에게서 먼저 찾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이러한 '세계시민주의'가 있었기에 로마제국도 배울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러나 디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아이네아스는 기원전 12세기 사람인 반면, 카르타고가 건설된 시기는 기원전 814년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는 35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p. 251)

로물루스 신화는 라틴족이 팔라티누스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었던 과정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라티움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는 허구다. (p. 254) 이 허구의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왔다는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략) 아이네아스의 전설은 기원전 6세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p. 255)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왔다는 전승을 듣고 그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로물루스 전승을 그 이야기에 결합했다. 이 작업은 기원전 3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p. 256)

고대역사는 사실 신화와 실제역사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신화는 신화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그 역사성을 갖는다. 신화라고 해서 다 허구는 아니고 역사라고 해서 다 허구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로마건국 신화를 담은 '아이네이스'는 분명한 창작물이다. 신화라고 하기보다는 신화를 표방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베르길리우스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그 이전에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아우구스투스의 구미에 맞게 잘 편집했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지... 그런데 고대그리스신화와 동급으로 고대로마건국신화로서 위상을 인정받는 것을 보면 왠지 속이 좀 쓰리곤 하다.

로마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와 달랐다. 아테네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민회에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 신분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평등한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이에 반해 로마는 귀족과 평민을 각각 대변하는 원로원과 민회를 양대 권력 기구로 만들고, 귀족과 평민이 서로 견제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 기구는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신분 간의 합의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로마는 민회에서 표결을 개별 시민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군사 단위나 지역구 단위로 묶은 다음 단위 투표로 진행했다. 시민들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 투표했고, 각 집단이 민회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 따라서 시민 개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시민이 속한 집단의 의견이 중요했다. 로마의 정치 구조가 이런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로마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p. 268)

서양의 법과 정치체제는 대부분 로마제국을 본떠 만들어졌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애초에 제도 자체가 신분을 나누고 불평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민주공화국 이라는 말이 민주주의이면서 공화주의 라는 말이 애초에 묶을 수 없는 단어가 아니었을까... 평등과 불평등을 하나로 묶어 놓은 모순을 품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로마인이 공화정 체제를 다듬어나가는 과정은 로마인이 주변 종족들과 투쟁 속에서 생존을 지켜나가는 과정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법률 개정을 통해 법적인 평등이 확보되면서 사회는 점차 안정되어갔다. 귀족들이 양보함으로써 평민들은 공동체 성원으로서 정체감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국가 발전을 위해 협력했다. 신분 간의 타협을 통한 사회 안정은 로마가 외부로 팽창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p. 277)

로마제국에겐 외부의 적이 있었기에 평등과 불평등을 하나로 묶어 놓은 모순적인 제도가 조금씩조금씩 바꿔가면서 효과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눈에 보이는 무력전쟁이 거의 없어진 시대다. 외부의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 불평등은 내부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벌어진 격차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진행중이다. 사실 이런 모습은 로마제국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의 부와 자원이 로마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로마는 심각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급작스럽게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p. 303) 로마의 상류층이 사치에 빠져들고 있을 때, 로마의 민중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수십 년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돌아왔어도 로마 병사들이 차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분배된 전리품은 많지 않았고, 제대 보상금도 없었다. (p. 304) 고향으로 돌아간 병사를 기다리는 것은 관리하지 않아 황폐해진 토지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처자식뿐이었다. 노예가 대규모 유입되면서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p. 305) 결국 정복 전쟁의 결과 귀족들은 더 부유해진 반면, 자영농들은 대거 몰락하여 빈민이 되었다. 자영농의 몰랅은 도시 문제와 곡물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 자영농이 몰락하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할 군인들이 부족해졌다. (p. 306)

로마가 제국이 됨과 거의 동시에 로마는 부패의 늪에 빠졌다. 다양한 목소리가 올바른 결론으로 취합되던 시대는 끝났다. 수많은 불평불만들만이 고함을 치는 시대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결국 강력한 누군가의 권력이었다. 광활해진 제국은 강력한 독재를 필요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칭호를(존엄자) 자랑스러워했지만, 겉으로는 자신이 시민의 대표일 뿐이라며 자신을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최고 통치자가 제1시민으로서 통치하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시대가 열렸다. (p. 344) 황제가 공식적으로 입법권을 차지한 것은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새로운 통치 시스템인 도미나투스 체제를 수립한 후이다. (p. 346) 원수정은 제1시민인 프린켑스가 원수처럼 통치하는 체제를 말한다. 분명 프린켑스는 최고 권력을 차지했지만 결코 왕이 아니었고, 원로원과 협의하여 제국을 통치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수립할 때까지 수많은 프린켑스가 존재했다. 네로,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등. 흔히 이 사람들을 로마의 황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황제의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 제1시민이었을 뿐이다. (p. 348) 이제까지 황제는 프린켑스였다. 그러나 앞으로 황제는 도미누스(주인 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며, 이제 시민들은 황제를 자신들의 대표가 아니라 주인으로 모셔야 했다. 제국의 주인으로서 황제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이제 원로원은 제국의 반을 통치할 수 없고, 입법권을 갖지 못하며, 후임 황제의 선출에도 관여할 수 없었다. (p. 403)

원수정과 황제정은 거의 같아 보이지만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라는 로마제국의 명칭도 뭔가 다른 호청이 더 적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하튼 1인 독재라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지. 그러나 황제 라는 호칭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라고 하면 사실 1인독재가 아닌 시기부터 황제 라고 불린 셈이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때 제국을 4분할 하여 통치했고 이후 점차 동서로 갈라진 로마제국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다. 그러니 로마제국 이라는 하나의 제국을 황제로서 통치한 지배자는 결국 없는 셈이려나...

로마에는 유독 신전이 많은데 로마인이 고대에 신앙심이 특히 깊은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다른 모든 점에서 로마인은 다른 종족보다 같거나 못하지만, 종교에서는, 즉 신들을 숭배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뛰어나다'라고 말했다. (p. 359) 판테온을 이해하려면 먼저 '신 초대하기'관습을 알아야 한다. 로마는 다른 종족을 정복할 때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다른 종족의 수호신을 '초대'했다. (중략) 비록 다른 종족의 신이라고 해도 그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종족을 정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로마의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로마인이 모셔야 하는 신들이 계속 늘어났다. 로마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신을 한 신전에 모시기 시작했다. 이런 신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판테온이다. (p. 361)

로마의 만신전이 그 수많은 다신교가 얼핏 이해가 안가기도 했는데 '초대' 였구나... 수많은 정복전을 치뤘으니 그렇게 신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타 민족에 비해 종교적이다 보니 그렇게 열성적으로 하던 종교활동능력이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렇게 열성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게 했나 보구나... 문득, 어쩌면 너무 많아진 신들을 모시는 것에 피로감이 느껴져서 유일신을 모시는 것으로 편하게 옮겨간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런저런 교리문제나 사회적 상황이나 그런 것들이 중요이유였긴 하겠지만.

예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사이인의 형식주의를 공격하며,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략)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p. 372) 영적인 메시아임을 선언한 예수는 철저한 종말론자였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고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언하고, (중략)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가르쳤다. (p. 373)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의 양대 기둥이라고 불리는 바오로는 '율법 없는 선교'를 기독교의 확고한 교리로 발전시켰다. (p. 377) 바오로는 유대인의 이런 신앙을 거부하고, 율법은 수명을 다했으며 야훼는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중략) 이후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종교로 성장하게 된다. (p. 379) 기독교는 고대 종교를 무너뜨리고 인류 종교사에 새 장을 열었다. 기독교가 부족신의 개념을 극복하고 보편신을 섬기게 되면서 고대 사회의 지형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p. 380)

고대로마 하면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자주 언급되지만 사실 네로 때도 도미티아누스 때도 지도자에 의한 종교적 박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로마 시대의 기독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오히려 예수의 혁명적 가치관이었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이다. 흔히 로마제국의 멸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동서로 갈린 후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흔히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었다. 그곳에서 로마의 정치제도와 법률, 종교와 관습, 문화와 예술이 계승 발전되었다. 따라서 476년에 로마제국은 결코 멸망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멸망한 적도 없는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야단법석을 떨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둔갑했을까? (p. 406)

이 책의 제목처럼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부터 시작이라는 점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통해 서양고대사를 다시 배워야 한다. 하지만 고대사의 시작을 고대그리스로 알지라도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로마제국의 멸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이 멸망했어도 동쪽 지역에서 여전히 로마제국을 계승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부정하고 476년에 로마제국이 멸망했다라고하는 이유를 깨닫고 그러한 시각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400여 페이지의 책 한권 읽는 것으로 메소포타미아부터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고대사를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긴 시간을 함축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역사책을 좀 읽은 사람들은 이 책이 너무 개략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입문서라고 저자가 표현했듯이 이 책을 시작으로 다른 역사책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데 있어 이 책은 바람직한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기에 서양고대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역사를 일목요연하면서도 흥미롭게 풀어준 저자에게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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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탄생 - 오늘을 만든 사소한 것들의 위대한 역사
주성원 지음 / 행복한작업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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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고 쓰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이용하는 것들과

해마다 기념하는 날들은 어떻게 우리의 삶이 되었을까?

오늘을 만든 사소한 것들의 위대한 역사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 역사관련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역사라고 하면 대부분 뭔가 위대한 어떤 시간들만을 역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므로 모두의 삶은 다 역사다. 그런점에서 '일상'이라는 평범한 느낌의 역사가 어떤 '탄생'을 거쳤을지 궁금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일상'이라는 시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인걸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런 역사서는 아니었다.

개인적인 흥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어정쩡한 글이 된 것은 부끄럽다. 상식으로 보기엔 편협하고 미시사로 엮기엔 경박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일상생활에서 가벼운 화제를 환기하는, 대화의 양념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p. 346)

'책을 마치며'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가 쓴 표현 그대로 이 책은 일상을 흥미롭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양념같은 소재들에 대한 책이다. 평소 호기심 많은 성격의 저자가 뭐든지 궁금하면 찾아보던 습관이 잡학, 잡사에 관한 책이나 글에 늘 손이 가게 만들었고 신문기자에서 방송기자로 일하는 동안 그런 개인적 탐구는 늘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상'이라는 시간적 개념에 대한 고찰을 담은 깊이있는 역사서는 아니었으나 일상을 좀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잡학, 잡사들은 다채로우면서도 가볍게 읽혀서 몰랐던 일상을 알게되는 일상으로 재탄생시켜주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챕터는 크게 8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집과 컴퓨터 관련한 '삶터와 일터', '쇼핑과 패션'. 스포츠와 레저같은 '활동적인 여가생활', 음식들에 대한 '식탁위의 즐거움', 음료와 간식들에 대한 '차 한잔의 여유', 가전과 교통관련한 '편리한 생활', 다양한 술에 대한 '하루의 마무리', 기념일들에 대한 '일 년을 돌아보며' 로 지금은 익숙하지만 그 시작은 어떠했는지 간단하지만 깊이있게 살펴보고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공중화장실-칸막이도 없고 남녀 구분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이 사적인 공간이었던 신석기 시대에 비해 사생활 개념이 후퇴한 셈이다. (p. 13)

언뜻 생각하면 조선 시대에 형성된 마을일 법하지만 실제로 지금 있는 것(북촌 한옥마을)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건축된 한옥들이다. (중략) 이른바 '도시한옥'이다. (p. 16)

목욕탕 사교의 전통은 기독교 전파 초기에 단절된다. 기독교에서 '불필요한' 목욕을 죄악시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p. 24)

보일러는 사실 우리의 온돌 문화가 해외로 건너갔다가 역수입된 것이다. (p. 28)

기원전 약 3000~2500년 경 세워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공공 해시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가 시계를 사용한 역사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p. 34)

최근에는 채륜이 최초로 기록용 종이를 만들었다는 오랜 학설이 도전받고 있는데, 간쑤성 팡마탄에서 기원전 1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지도가 발굴되면서부터다. (p. 37)

볼타는 1800년 개구리 다리 대신 소금물에 적신 천을 두 금속 사이에 끼워 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볼타 전지의 탄생이다. 볼타 이후 초기의 전지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져 수명이 짧은 데다 휴대도 까다로웠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건전지다. (p. 42)

1901년 그리스 안티키테라섬 앞바다에서 발굴된 난파선 안에 있었던 기계, 이른바 안티키테라 기계는 기원전 1~2세기 고대 그리스인이 해와 달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예측하기 위해 만들었던 도구로 추정된다. 최초의, 또는 초기의 아날로그식컴퓨터로 부를 만하다. (p. 46)

영문 키보드의 글자 배열 방식은 불편한 관습과 편리한 기술의 대결에서 관습이 승리한 사례다. 반면 한글의 경우는 반대다. 키보드의 글자 배열 방식은 불편한 관습을 기술이 보완해 준 사례로 볼 수 있다. (p. 51)

로마의 목욕탕이나 아파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이전 신석기 시대때의 화장실이 수세식에 개인적 공간구분이 있었다는 점은 신기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트가 종교적 권력적 상징물인줄로만 알았는데 해시계 역할도 했었구나 도 신기하고 고대 그리스인에게서 컴퓨터로 부를 만한 기계가 있다는 것도 중국에서 새로 발견된 유물로 인해 종이의 역사가 한층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점도 역사를 새롭게 다시 보게 했다. 한옥이 조선시대의 것도 아니고 보일러 힌트가 온돌에서 시작된 것은 맞지만 외국인에 의해서였다는 점도 그동안 몰랐던 역사의 한 단면 이었다. 건전지에서의 건 자가 '마를 건' 자 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키보드의 역사를 보며 선진기술을 먼저 사용한다는 것이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점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렇듯 일상을 역사와 흥미롭게 결합시키고 있었다.

주말을 이용해 '원 스톱 쇼핑'을 하는 미국의 소비문화와 달리, 매일매일 주부들이 찬거리를 사는 한국형 소비분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실패 이유로 꼽힌다. 반대로 주부들의 눈높이를 겨냥한 매대 전시에 집중한 것이 한국 대형 마트의 성공요인이다. (p. 67)

코로나19사태 초기에 대형 마트에서 생필품 사재기가 벌어졌던 일부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 할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의 온라인 쇼핑 문화와 배송 시스템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p. 74)

편의점과 면세점이 한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 배경과 한국형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통한 한국형 소비문화를 새삼 느낄 수 있기도 했고 한국의 택배문화가 사재기를 방지할수도 있었구나 싶어 다시 보기도 했다. 속옷이나 향수, 레깅스, 타투 등의 기원을 읽으며 우리가 서양문화에 정말 많이 영향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기도 했다.

월드컵은 사실 국가 대항전이 아니라 축구 협회 간의 대결이라는 점이다. FIFA가 대부분 국가에서 1개의 축구 협회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국가 대항전이라는 인식이 굳어졌을 뿐이다. 한 국가에 여러 개의 축구 협회가 있는 사례가 몇몇 있다. (중략) 이런 이유로 FIFA 회원은 국제 연합 가입국보다 많다. (p. 109)

스포츠 관련해서는 평소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크지 않은 편이라 그저 그렇구나 하며 읽었는데 월드컵 관련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영국이 단일국가가 아니라 연합국가라는 점이 축구만 봐도 부각되고 있어서 영국의 역사적 분열이 스포츠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요즘 우리가 김치를 담가 먹는 배추, 이른바 결구배추는 '한국 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가 1950년대에 만든 걔량종이다. 중국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양쪽의 장점을 모두 갖춘 배추를 만들었다. 배추김치를 본격적으로 김장으로 담그기 시작한 것도 결구배추가 세상에 나온 뒤의 일이다. 한국에서 김치를 먹어 온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우장춘 박사의 노력이 없었다면 김치가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p. 142)

육개장의 어원이 '개고기로 만든 장국' 이었으나 소고기로 바뀌면서 '대구탕반'로 불린 음식이 서울로 올라와 붙은 이름이라는 것도, 냉면, 라면, 짜장면, 짬뽕, 스파게티, 피자, 돈가스, 시리얼 등의 유래도 흥미로웠지만 '우장춘 박사'의 배추 이야기가 가장 놀라웠다. 어렸을 적 읽은 우장춘 박사 이야기에서는 씨없는 수박 밖에 남겨진 기억이 없었던지라 여전히 씨있는 수박을 사먹으면서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너무 경시해왔구나 싶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침과 저녁 두 끼만을 먹었던 당시 영국인들의 식습관에서 오후의 허기를 달래는 에프터눈 티 문화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귀족에서 시작되어 중산층까지 이어지는 사회 현상으로 발전했다. (p. 190)

코카콜라의 펩시콜라 1900년대 두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미국 문화와 자본주의가 확산하는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p. 195)

설탕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지금의 인도 지방이다. (p. 198)

카페, 커피(아메리카도), 에스프레소와 드립 커피, 핫초코, 홍차, 콜라, 설탕, 빙수, 아이스크림, 티라미수 이야기들에서는 '애프터눈 티 문화'와 콜라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삼시세끼 를 너무나 당연시 여기면서 간식을 잘 안 먹는 나로서는 영미권 소설을 읽으며 자주 나오는 티문화에 대해 뭘 그렇게 간식을 꼬박꼬박 챙겨먹나 싶었었는데... 18세기 식사가 하루 두끼였다니!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경쟁은 주류와 비주류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건지 너무도 단순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고 인도에서 시작된 설탕이 어떻게 아프리카와 남미의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연결되었나를 보니 다시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세탁기에 삶는 기능을 넣거나 세탁조를 아래위 2개로 만드는 등 독특한 세탁기가 우리 나라에서 개발되었다. (p. 221)

버스는 옴니버스에서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말이다. 옴니버스는 '모두'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단어가 대중교통에 쓰이게 된 것은 1823년이다. 프랑스 중서부 도시 낭트 변두리에서 스파를 운영하던 스타니슬라스 보드리라는 사업가가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 낭트 시내와 스파를 왕복하는 다인승 승합 마차를 운행했다. 이 마차가 섰던 첫 정류장이 한 모자 가게 앞이었는데, 가게 간판에 쓰인 글귀가 'Omnes Omnibus'였다. '옴네스'는 이 모자 가게 주인의 이름이었지만 라틴어로 '모든 것(Omnis의 복수형)'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약간의 말장난을 한 것이다. 굳이 풀자면 '모두를 위한 옴네스' 또는 '모두를 위한 모든 것' 정도가 된다. 어쨌든 낭트 시민들이 이 모자 가게 간판과 마차를 연관시켜 마차에 옴니버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풀어보면 '모두를 위한' 마차 라는 뜻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옴니버스는 곧 부르기 쉽게 버스가 되었다. (p. 240) 당시 승합마차의 노선을 짠 인물은 철학자이자 수학자,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 이다. (p. 242)

21세기 들어 다시 컨테이너선과 여객선에 돛이 등장했다. '로터십'이라는 배인데, 전통적인 형태의 펼치는 돛이 아니라 굴뚝처럼 생긴 원기둥 모양의 돛, 이른바 '로터 세일(rotor sail)'을 달아 보조 동력으로 쓰는 배다. (p. 251)

냉장고, 세탁기, 전화기, 전자레인지, 교통수단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는 세탁기의 최신 기술이 우리나라에서 발달했다는 것과 제아무리 세탁기가 발달해도 인도에서는 여전히 극빈층에 의한 세탁산업이 활황이라는 것이 대비되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버스의 어원이 재밌기도 하고, 굴뚝 모양의 돛 이 신기하기도 했다.

물이 오염되기 쉬웠던 시대, 식수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료가 와인과 에일이다. (p. 259)

오랜 항해에서 배에 빠지지 않고 실렸던 화물이 맥주나 와인, 브랜디, 위스키 같은 술 종류 였다. 오랜 항해를 하는 배들은 민물을 싣고 다녔는데, 오래 묵은 물에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술을 섞어 선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p. 285)

오랜 항해에 상하기 쉬웠던 와인과 달리 한 번 증류한 브랜디는 가격에 비해 양도 적고 잘 변질되지도 않았다. (p. 294)

맥주, 와인, 고량주, 진, 소주, 보드카, 위스키, 럼, 테킬라, 브랜디 등의 술 이야기를 보면서 잘 모르는 양주의 구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술이 얼마나 일상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소주의 한자가 燒酒 가 아니라 燒酎 로 쓰이는 것이 일제의 영향임을 알고는 새로운 잔재를 알게 된 것이 씁쓸해지기도 했다. 여하튼, 서양역사물을 읽다보면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데 늘 술에 취해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늘 그렇게 마시는 것이 '물 대신' 어쩔 수 없었구나 싶어서 '숭늉'을 먹었던 우리네 문화가 평화로웠던 이유중 하나가 되려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잔인하지 않은 역사는 잘 없지만 중세전후 유럽역사는 잔인한 장면이 정말 너무 많다;;;

초콜릿을 주고 받는 날이 아닌, 서양 명절인 '진짜' 밸런타인데이의 유래는 기원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에서 결혼을 하려면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황제의 허락 없이 남녀는 이어 주다 순교한 성직자 성 발렌티누스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중략)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순교한 성직지가 과연 누구냐는 것. 밸런타인 또는 발렌티누스라는 이름의 순교자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p. 306)

엄밀하게 따지면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뒤 첫 번째 보름달이 뜬 다음의 일요일로 정해져 있다. 이런 것만 봐도 부활절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크리스마스가 실제 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닌 것처럼. 부활절이 이렇게 복잡한 날짜로 정해진 것은 종교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p. 310) 어째서 춘분이 기준이 되었을까? 부활절의 배경도 크리스마스와 비슷하다. 이교도의 명절을 기독교의 교리와 융화시키면서 날짜가 정해진 것이다. 부활절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이스터'는 고대 앵글로 색슨족의 여신인 '이스터'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여신은 봄과 다산을 상징했다. 그래서 이스터 여신에게 드리는 축제는 봄, 특히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에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이방의 축제가 교묘하게 결합된 기념일인 것이다. (p. 311)

흔히 연등을 '연꽃 모양의 등'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불을 밝힌다는 뜻의 연(燃)이 연꽃을 나타내는 한자 蓮과 음이 같이 생긴 오해다. (p. 313) 연등회는 통일 신라 시대부터 국가적인 행사였다. (p. 314) 그런데 1월과 2월에 열리는 연등회 행사를 굳이 4월에 다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중략) 4월 초파일 연등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3세기 무신 정권 시기 권력을 잡은 최우가 자신의 집에서 개최하면서부터다. 스스로 '국왕 위의 실력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기존의 연등회와 별개의 행사를 벌인 것이다. (p. 315)

핼러윈은 원래 기독교의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전야를 의미했다. 만성절은 축일이 없는 모든 성인을 위해 기도하는 날로, 중세 기독교에서는 9세기경부터 만성절을 11월1일로 정해 기려왔다. (p. 321) 그런데 왜 이날 유독 유령 복장을 하고 축제를 벌이는 걸까?(중략) 켈트 족은 일년이 열 달인 달력을 사용했는데,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새해를 준비하는 날인 10월31일을 기념해 축제를 벌였다. 고대 켈트족은 이날 지하 세계의 문이 열리며 악령과 마녀들이 현세로 올라온다고 믿었는데, 그들을 속이기 위해 사람들도 악령과 비슷한 모습으로 분장했다. 이런 전통이 기독교에 흡수되면서 만성절 전야에 벌이는 축제로 발전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이교가 융합하여 만들어낸 축제다. (p. 322)

고대 로마에서는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했는데, 미트라의 생일이 12월25일이다. 게다가 당시 12월 25일은 밤이 짧아지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 즉 동지이기도 해서 이즈음 로마에서는 농경신 사투르누스에 대한 제사가 열렸다. 여러 의미로 축하하는 날이었던 셈이다. 이때를 즈음하여 축제가 계속되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빠른 시일 안에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토착 종교의 축제일을 받아들여 통합하는 것이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비밀이다. 결국 크리스마스는 초기 로마 교회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발명품'인 셈이다. (p. 333) 1949년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탄신일'이라는 이름으로 12월 25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이다. (p. 335)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빼빼로데이, 추수감사절, 어린이날 같은 만들어진 기념일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 관심분야가 역사쪽이다 보니 역사와 연관된 기념일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서양문화가 친숙해져서인건지 기독교전파가 확산되어서인지 기독교 관련 기념일들이 한국의 일상에서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런 기념일들의 기원을 읽으면서 만들어진 종교적 기념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은 앞서간 분들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일상은 모두 다 위대하다! 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이라 그 의미조차 잘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이 책이 알려주는 이야기들로부터 때때로 일상에서 역사를 발견하며 지낸다면 쳇바퀴 도는 듯한 지루한 일상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 시간으로 조금은 더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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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 어쩌다 보니 황혼, 마음은 놔두고 나이만 들었습니다
이나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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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늙지도, 아주 젊지도 않은 나이 육십이 되니 보이는 것들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노년'으로 저물어가는…

수많은 모순과 허무함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삶에 대하여

저자는 서울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이다. 이런저런 책도 내고 인정도 받아온 나름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외적으로만 보면 굉장히 안락하게만 살아온 것 같은 저자는 자신의 직업에 매진해옴과 동시에 한 집안의 종부로 일년에 12번의 제사를 치르고 30년넘게 시부모를 모시며 두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오랜세월 삶과 고투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갑이라는 나이를 넘고 보니 이제야 삶을 달리던 속도를 늦출 수 있었고 노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랜 경력의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산전수전 겪은 인생선배같은 나이의 분이 낸 책이라 따듯한 조언이나 응원을 북돋우는 메세지를 담은 책이겠거니 하고 흔하게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은근 시니컬하게 정곡을 콕콕 찌르면서도 대인배다운 너른 생각으로 많은 것을 포용하는 글들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지극히 사회적이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제목만 보면 '인생'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 같지만 막상 읽고 나면 '죽음'과 '마무리'에 방점을 찍어둔 책이었다. 그 관점이 한마디로... 멋졌다!!!

가장 후회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나는 어쩐지 이게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강요하는 것 같다. 따져보자. 젊어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또 그렇게 살다가 망하지 말라는 법 있나? (중략) '나'와 '원하는 삶' 모두가 참 아리송한 개념이다. 젊을 때의 나와, 늙을 때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그때 원한 것을 지금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모두 어떤 시점에서는 자기에게는 최선이라 생각하고 선택하려 애쓰지 않는가. (p. 21)

그러니 제발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참으로 아리송하고 쓸모없는 주문 같은 것은 하지 말았으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그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않았다. 하물며 우리 같은 어리석은 미물이 무슨 수로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단 말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는 부추김은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라' '혁명으로 계급을 전복시켜라' 하는 말처럼 때론 아주 위험하다. (p. 30)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라고 흔하게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아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모르니까 헤매는 거고 그 헤매는 길이 인생이 되는 거다. 무엇보다 그때 원했던 것을 지금은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지금 원하는 것을 그땐 원하지 않았었을 수 있다. 그러니 다 지나고 나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쉼없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답시고 '네가 진정 원하는 게 뭐야' 라고 선문답같은 위로를 하지 말자. '내가 원하는 것' 보다 '지금 해야할 것'을 선택하는게 대부분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곤 했다. 책의 초반부터 저자의 말들이 아주 공감가고 명쾌해서 좋았다.

한동안 '내 장례식은 이랬으면...'하는 공상을 한 적이 있다. (중략) 한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나의 장례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은 내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p. 32) 늙고 병든 부모의 마지막을 지켜구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죽은 내가 뭐라고 자식들 잔치, 자식들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겠는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처지라면 거기에 어울리게 더 겸손할지어다. (p. 33)

노후준비를 한다면서 자신의 장례준비까지 꼼꼼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묘를 할지 나무에 심을지 납골당을 할지 등등을 정하고 이런저런 계약을 해놓고 영정사진도 찍어두고 누구누구에게 연락을 해야할지 미리미리 일러두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떠난 이후의 내 장례식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런저런 준비를 다 해두어도 그대로 될지어쩔지 모르는 거다. 장례식은 남은 자들의 선택이고 몫이다. 그들이 떠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추모하고 추억할지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차라리 남은 이들이 떠난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공경할만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프로이트 선생은 이런저런 약점이 많지만 또 그만큼 인간적인 매력도 많다. 특히 나는 그가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 깊은 찬탄과 존경을 보낸다. (p. 37) 그는 죽기 전까지 책을 읽다 주치의에게 안락사를 부탁하고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p. 38) 나는 프로이트학파의 분석가는 아니지만, 프로이트처럼 안락사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 절대 찬성한다. 연명의료 거부 정도로는 너무 부족하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고, '왜 저 노인은 아직 안 죽을까' 하는 생각을 모두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정말로 품위 있고 격조 높게 안락사를 선택하고 싶다. (p. 39)

저자의 의견에 백퍼 동의한다. 예전에 읽은 SF소설 중에 안락사 관련 직업이 나왔던 적이 있다. 미래 시점의 어느 사회에서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본인이 원할때 언제든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고 그 마지막을 함께 해주는 직업이 등장했었다. SF는 미래소설이긴 하지만 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지금 필요한 것이 미래에 구현됐으리라는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락사는 충동적인 자살과는 다르다. 백세시대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사실 죽음 그 자체 보다도 어떻게 죽느냐 라는 죽음의 과정이 아닐까. 죽어가는 과정이 길고긴 고통 뿐이라면 인간다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더 행복한 삶과 죽음을 영위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성스러움'을 뜻하는 라틴어 'sacer'는 때로는 '저주받은 maudi' 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고 한다. 멜라네시아의 'mana', 북미 인디언 '수'족의 wakan', 또 북미 인디언의 'orenda' 역시 성스러움을 뜻하는 동시에 저주받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죽음 역시 그렇다. 죽음처럼 성스러움에 가까이 가는 순간은 없다. 태어나는 순간 역시 조금은 성스럽지만, 사자 死者 의 침대만큼 종교적일 수는 없다. 비루한 인생을 마감하고, 이제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이 넓은 우주의 일원이 되는 순간인데도, 이승의 삶에 집착하는 우리는 죽음이 저주라고 자주 착각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p. 87)

'죽음'은 성스럽기도 하고 저주스럽기도 할 수 있다. 고대부터 인간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많은 철학적 고민을 거듭해 왔다. 고대그리스신들은 무한한 삶을 살기에 늘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쾌락적으로 살면서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고 그런 신들을 상상하며 고대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삶은 유한하기에 그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깨우치고자 하곤 했다. 신과 인간의 유일한?! 차별점이라고 할 '죽음'은 그래서 성스러울 수 있고 그래서 저주스러울 수 있다. 그런 죽음에 대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내내 노년이 받아들어야 할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년이 삶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년은 죽음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다행히 행복한 노년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는 예수님, 부처님, 알라, 비쉬누, 천지신명 등 여러 종교의 신들이 참으로 친절하게도 가르쳐주셨고 그 가르침이 어려울까봐 각종 해석과 주석서가 수천 년동안 누적되어 왔다. (중략) 오늘 하루 죽음과 죽음 너머를 묵상하면서 내 그릇으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실천해야 한다. (p. 106)

인생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조정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을 닦을 일이다. 기대하지 말고, 혹시 내 후의에 대한 받응이 시원치 않다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로 해준 바는 잊어버리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훨씬 좋다. (p. 130)

내가 얼떨결에 부모가 되었듯, 성인 자녀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얼떨결에 늙은 부모의 자녀가 된 것뿐이다. 그저 험한 세상에 나와 외롭고 힘든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재롱도 떨어주고, 말도 안되는 말을 해도 복종해주었고, 참 나쁘고 미숙한 부모였던 나를 사랑해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내가 가는 길에 적어도 상주는 되어 주지 않겠는가. 자녀들이 어쩌면 앞으로 늙은 나 때문에 꽤 많은 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도 높으니, 지금까지 들인 돈은 앞으로 질 빚을 미리 갚은 것이라 생각하고 다 잊을 일이다. (p. 137)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허심털털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조언한다. '부모자식들이여, 서로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고 제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자.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고 있다면, 마음에 없더라도 감사의 말을 해주면 된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감사의 말을 자신은 듣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을 수 있다' (p. 130) 맞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니 사실은 자식이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자식 관계는 서로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내것인양 간섭하고 내소유물인양 지시하고 당연히 주었어야 할것을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부모 자식 은 엄연히 다른 인격체다. 자식은 태어나 자라는 동안 부모에게 선사해준 행복의 시간들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했기에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날 나이가 되면 쿨하게 '그동안 고마웠어' 하고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정신건강에도 훨씬 좋다. 저자의 말처럼.

'내 나이가 어때서'하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르듯, 자신의 나이를 애써 부정하고 젊은 사람들 흉내를 내려는 노인들이 있다. 심지어는 죽을 운명까지 부정하고 싶어 한다. 아아, 자신의 죽음을 절대 생각하지 않는 삶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상상하지 않는 짐승의 삶과 뭐가 다르겠는가. (p. 139)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열심히 주변 사람에게 봉사하고 좀더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매일 새롭게 나아가려 한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일탈을 밥 먹듯 한다면 어쩌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일생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일탈과 방종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 일찌감치 깨닫는 사람의 인생과 달리, 끝내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사는지 알지 못한 채 철없는 노년을 쉼 없이 달리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들의 삶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 몹쓸 늙은이'라고 내뱉게 된다.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 과연 당신이 정한 노년의 목표인가. (p. 140)

젊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버릇없다고 벌컥 화를 내며 저자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년배인 저자가 노인이 됐으면 노인이 됐음을 받아들이고 노인답게 살라는 충고는 아직 노인이 아닌 내가 읽기에도 속시원한 맛이 있었으니 정작 노인들이 읽으면 분명 좋아하지 않을 충고다. 세대차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코로나 사태라 광장에서 거부당하자 강남 한복판에서 일탈과 방종의 끝을 달리는 분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볼때마다 마음이 참... 무겁다.

최근 모이기만 하면 나라 걱정하는 노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 되면서 어쩌면 과거에는 그냥 묻혔던 많은 부정, 부패, 비리 들이 더 많이 늘어나는 탓도 있고, 독재 시대가 끝나면서 권위가 무너져 여기 저기 갈등이 깊어지는 면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소외감과 좌절을 느끼는 저소득층 젊은이들 못지않게 오히려 많이 누리고 가진 것도 많은 노인들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느낀다는 점이다. (중략) 노인들이 느끼는 '말세'의 분위기는 어쩌면 본인들 자신이 사라져 가기 때문에 느끼는 개인적인 종말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어쨌거나 자기 중심적으로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 195)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무의식이 알기 때문에, 남의 영혼도 죽이기 위해 댓글이든 집회든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혐오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가족이든 남이든, 아무에게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까. (p. 200) 세상을 제대로 보는 노인이 해야 할 일은 '혐오 공세'와 '폭력적인 언행으로 자신의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함께 차근차근 세상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어른답게. (p. 201)

저자는,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은 그만큼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한 것도 많고 받은 것도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로 보인다며 애국에 충만한 그들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노인을 군대에서 받아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농담이 아니라 군복을 입고 지치지도 않는 스테미너로 데모를 하고 있는 노인들은 어쩌면 게임과 스마트폰으로 목 허리 안 아픈곳 없는 젊은이들 보다 훨씬 더 전쟁터에서 용감할 것 같다'(p. 196)며. 씁쓸한 공감이 가면서도 웃음이 나는 것이 그야말로 웃픈 기분이 되었다.

노인은 많아졌으나 어른은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노인은 노인이라는 자체로 공경해야 할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노인과 어른이 같은 의미인것 같지 않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르신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일텐데 말이다...

아이의 아름다움이 '순수미'라면, 노년의 아름다움은 죽음과 가깝고 운명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식시켜 주고 자연의 장엄한 힘을 절감케 하는 '숭고미'에 가까울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젊은이들의 삶은 꽃과 열매가 가득한 풍성한 녹색에 가깝다면 노년의 삶은 메마른 협곡이나 사막 같을 수 있다. 전자의 풍경에서 생기 가득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후자의 풍경은 때로 우리를 압도시켜 작은 자아 따위는 버리게 하는 자연의 광대한 힘을 만나게 한다. 늙고 죽음은 우리를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서 운명의 숭고함을 절감하게 만드는 메마르지만 광활한 사막같은 것은 아닐까. (p. 206)

'순수미' 와 '숭고미' ! 정말 적절한 표현 같다. 작년에 유홍준의 답사기 중국편을 읽으며 저자가 가장 인상적인 장소로 사막을 언급했을때 솔직히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멋있기는 할 것 같은데 하고많은 좋은 풍경들 다 두고 왜 사막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에세이를 읽으며 왜 사막을 꼽았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자연경관을 봄에도 나이에 따라 느끼는 감상이 달라지는가 보다. 풍요롭게 채워진 아름다운 경치에서 풀한포기 나무한그루 자라지 않는 사막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사이 그렇게 우리의 나이도 늙어가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서글프지만은 않은 걸 보면 나도 어느새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라도 그런것인지도...

귀도 눈도 머리도 맑지 않은 노년이 되면 눈치나 희망은 다 사라지고,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벌레처럼 굴 수 있다. 슬프게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먼저 내가 남들을 벌레 취급하면, 결국 자신도 벌레처럼 군다는 뜻이다. 도대체 누굴 원망하랴! 그러니 벌레처럼만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노년의 꿈은 귀여운 할머니, 품격있는 할머니, 어쩌구 하는 말보다 어쩌면 매우 절실하고도 가장 현실적인 꿈이다. 슬프게도 언제든 혐오 바이러스는 우리 정신과 몸을 때론 오싹하게 때론 약삭빠르게 갉아 먹는다. (p. 214)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보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삶의 과정 중에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와 실수들이다. 누가 도대체 실패를 하지 않고 기술을 연마할 수 있고, 좌절을 겪지 않고 지혜로울 수 있는가? 자신보다 젊은이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삶의 원칙은 거부하고, 상대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집사, 노예 혹은 로봇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 깊이에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 쓸모없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어있다. 불안은 때로 파괴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강요하면서도, 그것을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라고 포장하려한들 결국 지는 것은 나이 든 사람이다. (p. 232)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이라는 제목이 그저 멋있고 운치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보니, 인생은 멋질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음을 (저자가)노년이 되고 보니 깨달았으므로 (동년배들에게) 인생을 거짓말로 남기지 말고 멋지게 살자고 제안하고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참 멋지게 나이든 분이구나 싶었다. 별 기대없이 읽었던 이 작은 에세이를 내가 이렇게나 밑줄치며 읽고 될 줄이야!

나의 사랑하는 벗, 같이 늙어가는 참 고마운 벗이여. 이 책을 들고 읽거든, 조악한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 없는 어떤 평범한 사람이 세상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황한 변명 비슷한 것 적어두었다 생각해주면 좋겠어. 물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그럴듯한 내용을 기대하지는 말기를. (p. 241) 다만 무례하고 경박한 방식으로 세상에 질문은 해야 할 것 같아. 당신들의 생각은 어떠냐고 말이야.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참을성 있게 읽어 준 내 벗들에게 깊이 용서를 구하고 싶어.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한 모든 것들 역시 모두 다 헛되고 헛된 소똥같은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는 궤변론자나 상대주의자가 되기는 싫어. 세상의 귀한 분들처럼 일생을 다 바쳐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는 못했지만, 다만 매일 밥을 했고 매일 책을 읽었고 몸이 허락하는 한 일했으면 된 거 아닐까. (p. 242)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쓴 글을 내 멋대로 해석해서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칠게.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놓지 못한다면 악마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지만,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인다면 천사가 찾아와 당신을 자유롭게 놓아줄 것이다" (p. 243)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일개미처럼 보낸 인생도 그렇게 의미없어 보이는 평범한 인생도 나름 만족할법 하지 않냐고, 이 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자신처럼 노년에 접어든 이들에게 '모두 참 잘 살았다고' 그러니 남은 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자고, 노인으로 천대받기 싫다면 어른으로 존중받을 만한 삶의 마무리를 해보자고 제안하는 듯 했다.

나는 아직 노년은 아니지만 나이들어가는 것이 노인이 되어가는 것이 좋다. 흰머리가 나는 것도 좋고 삶에 대한 열정이 줄어드는 것도 좋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왠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마음이 좀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참 좋다. 그래서 저자처럼 삶과 죽음을 관조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남은 내 소망이다. 이러한 나의 소망에 응원의 기운을 실어준 이 책이 참으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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