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1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왕수민 옮김 / 부키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저자가 들려주는

"어른들을 위한 교양 세계사'

흥미진진한 통일과 균형의 파노라마, 세계 중세 이야기!

진정한 세계사 책이, 제대로 된 세계사 책이 드디어 나왔다! 그동안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세계사'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의 역사를 다 품지 못하는 책들이 많았다. 세계사 라 해놓고 서양사 이기 일쑤였기에 중앙아시아사, 동양사, 남아메리카사는 따로 찾아 읽고 끼워맞춰야 세계의 역사가 되곤 했다. 세계사가 세계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세계를 모두 품은, 진정 제대로 된 세계사 책이다. 원제는 'The History of the Midieval World' 이지만 '세상의 모든 역사'라 하기에 충분한 아니 '세상의 모든 역사'라 부르기에 마땅한 책이었다.

중세편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문명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까지 인데 1,2권으로 나위어져 있어서 1권에서는 312년~661년 까지 다루고 그다음은 2권에서 1129년까지 다룬다. 저자의 이 책은 전체 6권으로 예정된 시리즈 중 가운데 부분이다. 고대편 1,2 와 르네상스편 1,2 는 근간 이라고 예정되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전 시리즈를 모두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서양인이 썼음에도 이토록 균형잡힌 서사는 처음이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이 정말 모든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사책이라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로마제국 에서 시작하기에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게르만족 정도는 다른 책들에서 그러하듯이 당연하게 등장하면서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 및 인도 그리고 중국에 이어 한국과 일본까지 두루 살펴보는데 그 어떤 세계사 책이 이렇게 극동까지 다룬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서양사 초기에 큰 비중이 없는 편인 브리튼과 일찍이 고대문명이 발달했던 메소아메리카까지 다룸으로써 정말 동시대 모든 지역의 역사를 총괄하고 있는데 겉핥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깊이감이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운 책이었다. 이 방대한 지역을 다루면서 이토록 객관적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존경스러웠다. '교양세계사'로 읽을 책으로서의 가독성까지 훌륭했다. 이 시리즈가 모두 나온다면 앞으로 세계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겐 이 시리즈의 전권을 보면 된다고 말하게 될 것 같다.

저는 이 책이 서구 독자들에게 자칫 소홀하기 쉬운 동양에 대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는 동양과 서양의 공통점은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가 나머지 다른 세계와 어떤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기를 바랍니다. (p. 12) -한국어판 서문 中 -

서양인들에게 세계사를 자신들만의 역사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한국인인 나도 잘 모르던 한반도의 고대사도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기에 세계사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이런 책을 저술해 준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서야 세계사 따로 한국사 따로 였던 시간들이 서로 얽혀들어 동시대의 역사로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기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제각각의 역사로 보면 어디가 먼저 발달하고 어디가 늦게 발달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역사로 보지 못한채 줄세우기식 발달사로만 잘못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동시대를 두루 함께 살펴보면 앞뒤 맥락이 연결되므로 이런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틀린 것이 아라 다른 것이다 라는 말을 좋아한다. 역사도 비슷하다. 어느 역사가 나은지 아닌지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다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고 다 제각각의 의미가 있었다.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맥락을 짚을 수 있다는 것이고 역사 특히 세계사에서는 이런 맥락이 정말 중요하다. 이 책은 그런 포괄적이면서 균형잡힌 세계사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 정말 읽을 가치가 있는 역사책이었다.

하늘 높이 내걸린 십자가의 그늘 아래, 콘스탄티누스가 그 나름으로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모델에 따라 로마는 이렇게 재탄생하고 있었다. 이제 공공 광장 한 켠에는 사자굴에 들어간 다이넬을 본든 조형물이 분수대를 장식하고 있었고, 황궁의 지붕 정중앙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상이 황금과 각종 보석을 넣은 화려한 돋을 새김 조각으로 표현됐다. (p. 34)

세상 서쪽에서 콘스탄티누스1세가 자신의 제국을 차근차근 통일해가는 동안 진 제국은 차차 가랄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p. 37)

한구석으로 쪼그라든 영토 안에서 진이 다시 살아나려 애를 쓰는 동안, 흑해 쪽 새로운 도시에서 콘스탄티누스1세가 한참 나라를 다스려 가는 동안, 인도에서는 수많은 아왕국과 부족국가가 우후죽순 일어나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p. 55)

제국의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러고 나자 콘스탄티누스1세는 가장 위험한 적을 코앞에서 마주한 꼴이 됐다. 바로 페르시아의 왕이었다. (p. 71)

로마 제국에서 동방을 향해 저 끝까지 간 곳에 전투의 패배를 씻으려 절치부심하는 한 왕이 또 있었다. 371년,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왕관을 물려받으면서, 적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위세가 말이 아닌 나라도 함께 물려받은 터였다. (p. 125)

시대와 나라에 맞게 장이 잘 구분되어 있지만 이 장을 묶어서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통합' 이다. 콘스탄티투스가 기독교로 통합시키려 할때 중국에서도 천명을 다투고 있었고 인도에서 그리고 서방에서 멀고 먼 저 극동의 지역 고구려에서도 그러했다.

로마 제국이 이제 둘이 돼 버렸다는 사실이 사람들 눈앞에 번연히 펼쳐졌다. 비록 두 명의 황제 아래 두 개의 수도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름상으로 로마 제국은 여전히 하나의 땅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마저 쩍하고 금이 가 선명하게 둘로 갈라진 판이었다. 서방에서는 황제의 후견인으로 통하는 스틸리코가 동방에서는 이제 범법자로 통하고 있었으니까. (p. 178)

굽타왕조가 '마음의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려 애쓰기는 했지만, 인도 제국의 통일은 외부의 침약이 없던 시절에나 가능했다. 쿠마라굽타1세와 스칸다굽타 치세에 일어난 에프탈족의 침략은 그 위세가 자못 심각했어도 문명을 완전히 종식할 정도는 아니었고, 서방의 훈족이 가했던 위협처럼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굽타 제국의 단결력은 외부에서 중간급의 위협만 가해져도 금방 한계에 다다를 만큼 쉽게 깨어지는 것이었다. (p. 224)

이제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는 나라는 두 곳 곧 남방의 유송과 북방의 북위였다. (p. 233)

과거 알라리크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서고트족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한 바 있었다. 아틸라도 그의 부족민들을 결집해 하나의 훈족 군대로 통합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민족이 지도자 한 사람의 야망만을 추동력으로 삼아 출협하게 되면 그 지도자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 신생국도 정체성도 바로 종말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p. 270)

군데군데가 전쟁터로 화한 갈리아 땅을 지나, 서고트족이 점차 위세를 키워 가던 히스파니아의 땅 옆 바다까지 건너서, 서로마 황제의 옥좌와 한참 떨어진 저 머나먼 땅 브리튼의 섬들, 이즈음 이곳에선 자잘하게 나뉜 땅덩이들이 이리 붙고 저리 붙기를 반복하며 각기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p. 283)

2부는 '분열'의 시기였다. 로마도 확연하게 두 쪽으로 갈라지고 서방에선 우후죽순 부족들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땅에서도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긴 했으나 통일세력은 아직 멀어보였고 어렵게 모아지려 했던 인도또한 다시 조각났다. 제국이라 이름 붙인 곳도 실상 제국이 아닌 상태의 전세계적으로 소국가들의 난립기였다. 그러는 사이 로마의 서쪽지역은 거의 완전히 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니게 됐고 이 476년을 서로마제국의 멸망 혹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 흔히 부른다. 하지만 3부 '신흥세력들'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로마제국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진제국의 명맥도 그러했고 인도에서도 저 멀리 메소아메리카에서도 그러했다.

이즈음 이탈리아반도는 테오데리크와 그의 동고트족이 완전히 장악한 한편, 서로마 제국의 나머지 땅들은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돼서는 로마 주교와 콘스탄티노플 주교 사이의 골만 점점 깊어가는 상황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 본래의 태를 벗고 차차 그것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로 변모해 간다. 바로 비잔티움으로 로마보다는 동방에 가깝고 언어는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를 주로 쓰며 로마 주교의 눈에는 '가톨릭'과도 점차 연이 멀어지던 그 제국으로. (p. 346)

이 무렵 중국 북쪽 땅의 북위는 강한 힘을 자랑하며 싸움을 일삼는 분위기였던 반면, 남쪽 땅의 유송은 점점 그 기가 꺾여 갔다. (p. 351) 중국의 북방, 그리고 동쪽 나라들까지 고대 중국의 전통들을 제 것으로 삼겠다고 아우성인 와중에, 정작 중국 남방의 유송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p. 365)

전성기를 구가했던 굽타 제국은 이즈음 세가 판이하게 줄어 있었다. (p. 401) 인도 북부는 다시 예전처럼 누덕누덕 기운 천 조각 마냥 잘게 쪼개졌다. (p. 406) 535년 이 크라카타우섬 화산이 기어이 터졌다. (p. 408) 작황실패는 동방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나무 나이테 데이터로 미루어 보면 535년부터 540년경 기간에는 동방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칠레, 켈리포니아, 시베리아처럼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지역에서까지 '여름철의 생장이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당시 몇 년 동안은 그만큼 여름철이 춥고 어두웠다는 뜻이다. 태양이 빛을 잃고 어둑어둑해지면서 발생한 역병, 굶주림, 기근은 당시의 중세 세계 전역을 휩쓸었다. (p. 411)

신기하게도 세계사의 흐름은 비슷했다. 인류의 문명 발달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비슷한 통합과 분열이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세계에 영향을 끼친 자연재해가 있었으니 크라카타우섬 화산 폭발이다.

크라카타우섬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재는 바람을 타고 상공 높이 떠올랐고, 이후 5년 동안 그렇게 상공에 머물며 원을 그리듯 지구 둘레를 떠돌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여름철이 춥고 어두침침해지는 일이 지구 반대편 세상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 곳곳의 숲이며 밭들이 가뭄에 시달리는 한편, 작물을 말려 죽이고야 마는 그 건조한 날씨가 물러가는가 싶으면 어느덧 엘니뇨가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빈발해 대륙에 지독한 홍수를 몰고 오는 일이 3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로마, 이집트, 동양 땅에 제각각 위대한 도시 문명이 건설돼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중앙아메리카에서도 그곳을 본거지로 삼은 사람들이 그 나름의 독자적이고 복잡한 문명을 한창 발달시켜 갔다. 그렇지만 여기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은 로마인, 이집트인, 중국인과는 달리, 자신을 다스린 통치자를 소재로 역사를 쓴 적이 없었다. (p. 415)

세계 곳곳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이렇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친 자연재해를 통해 세계사를 묶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다른 세계사책에서는 미처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던지라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즈음 아프리카, 엄밀히 말하면 나일강 바로 옆 동쪽 땅에서는 악숨 왕국의 군대가 아라비아반도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p. 429)

이제 새로 연호까지 제정해 쓰겠다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에 이웃한 백제,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거듭났다는 뜻이었다. (p. 475) 안타깝게도 이들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이 함께 커 나가기엔 한반도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반도 남쪽과 동쪽은 바다가 막고 있었고, 서쪽에는 중국이 버티고 있었으며, 북쪽은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 발 들이기 힘든 땅이었다. 그말은 엇비슷한 성격의 이 3왕국이 이 시절 내내 한반도의 패권을 수시로 주고받으며 밀고 밀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는 뜻이다. 서양에야 탁 트인 넓은 땅이 있어 서고트족, 동고트족, 프랑크족이 한꺼번에 출몰해 여기저기를 마음껏 누비고 다녀도 서로 뒤엉킬일이 별로 없었지만, 한반도의 이 3국은 좁은 땅덩이 탓에 싸움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서로 간에 끊임없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느 한 왕국이 아주 사라져 버리거나, 아니면 어느 한 왕국이 아주 오랜 기간 한반도 패권을 차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 476)

세계사 중심으로 역사를 읽다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사가 별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한반도의 삼국시대도 처해진 조건하에서 치열하게 역사의 한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이렇게 세계사와 함께 한국사를 읽을 수 있다니 정말 좋다. 그리고 신라의 한반도 통일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의 통일 흐름과도 맥을 함께 하고 있었다. 세계 어디건 나라의 발달사가 그렇다는 듯이.

인도 남부에서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던 소규모 왕국들이 하나둘 이어붙어 하나의 매끈한 제국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543년부터다. (p. 511)

페르시아인이 아라비아반도로 진출하는 한편,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 모두 미덥지 못한 후계자들에게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p. 525)

네 갈래로 갈라져 있던 프랑크족의 통치가 또 한번 하나의 왕권 아래 통일된 것은 558년 무렵의 일이었다. (p. 543)

비잔티움의 황제로서 한번쯤 꿈꿔 볼 만한 일들을 헤라클리우스는 현실 속에서 정말로 다 이뤄낸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취를 이루는 동안, 그는 그만 비잔티움 제국과 남쪽의 아랍인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까지 싹 다 없애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p. 605)

어마어마한 규모로 벌어진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의 살벌한 전쟁도 저 아래쪽 사막 지대에서는 그저 다른 세상 일일 뿐이었다. (p. 609) 530년대와 540년대를 거치는 동안, 예기치 못한 기상 패턴의 변화로 말미암아 심각하고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두 차례 아라비아 반도에 들이닥쳤다. (p. 610) 남쪽 출신 부족들이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아라비아반도 북동쪽 일대의 오아시스 쪽으로 이주해 버린 것이다. (p. 612) 사람들이 북쪽으로 흩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대도시 메카에만 아랍의 제 부족이 몰려들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p. 613) 대중 앞에서 무함마드가 이 같은 내용을 공히 선언하고 나서자, 그의 말에 모여드는 추종자도 점점 불어났다. (p. 620) 이렇듯 이슬람교는 처음 시작부터 그리스도교와 달랐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자기네 도시랄 게 따로 없었고 자기네 왕국은 당연히 없었다. (p. 624) 하지만 무함마드에겐 애초 시작 때부터 도시가 있었다. (중략)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활동을 갓 시작한 초창기부터 정치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그 자신의 필요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p. 625)

갈라지고 합쳐지고 또 갈라지고 합쳐지는 이합집산 속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것은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념, 바로 종교였다. 역사가 발달할 수록 권력자들은 종교의 이점을 깨달았고 유용하게 이용하려 애썼다. 하지만 종교는 생각보다 다루기 힘든 기술이었다. 권력자의 마음대로 휘둘러지는가 싶다가도 사람들의 믿음은 전혀 예상밖의 곳을 향하기도 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던 땅에서 피로도가 쌓이는 사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이기도 했다. 정작 초창기에는 종교로 중앙집권에 실패한 황제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종교로 중앙집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성공시켰던 곳은 아라비아반도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교로 마음을 다잡으며 실질적으로 행한 방법은 정복이었다. 앞선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당 왕조는 이제 나라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나아가는 중이었다. (p. 627) 당나라 장수들은 정복 활동을 벌이던 중 중국 남서쪽에도 또 한 명의 제국 건설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중략) 저 멀리 서쪽 땅에 사는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2세, 혹은 알타이산맥에서 돌궐족을 이끈 부민 카간과 마찬가지로, 송첸 감포 역시 어중이떠중이로 모여 있던 인근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어엿한 왕국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에 돌입한다. 송첸 감포가 택한 방법도, 이 시절 부족장에서 왕으로 변신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랬듯, 타지 정복이었다. (p. 633)

무함마드가 왕 노릇을 한 건 아니었다. 아랍인들을 상대로 그가 한 일이란 집단 정체성을 제공해 준 것으로, 알라리크1세가 고트족을 위해 했던 일이나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족을 위해 했던 일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중략) 무함마드는 예언자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을 일으켜 세운 창시자였다. (p. 657) 아부 바르크로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의 뚜껑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앉아 있는 형편이었다. 이 주체 못할 에너지를 아부 바르크는 밖을 향해 돌리기로 결심한다.(중략) 전쟁만큼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도 없었다. (p. 661) 한때 충실한 신도들이 모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세워지는가 했던 이슬람 제국은 이제 중세의 여느 제국을 점점 닮아 가고 있었다. 정복당한 민족의 수가 수다하게 많아져 개중 일부는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사회 상층부에서는 늘 권력다툼이 벌어지며, 제국 전체 땅덩이는 언제든 따로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이는 그런 제국을 말이다. (p. 699)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벽돌책이지만 약간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쓰여진 글이라서 술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기존의 세계사 책들처럼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다수의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동안 함께 볼 수 없었던 역사들이 적은 페이지나마 함께 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큰 균형감을 잡아주고 있었다. 어느 한곳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은 없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전쟁과 평화, 분열과 통합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다른듯 비슷해 보이는 그 모습들을 보며 서로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아 닮아간건지 애초에 다 비슷비슷한 인류였기에 닮은 모습의 역사를 만들어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정말 대개가 다 닮아 있었다. 이 한권이 이렇게 큰 통찰을 보여주는데 다음편은 어떨지 정말 기대된다. 어서 2권을 읽고 싶다.

ps. 개인적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차근차근 읽어오고 있던 중에 만난 책이라 더 반가웠다. 너무 서양사에만 치중해 세계사를 읽어오진 않았나 싶어 일부러 중앙아시아사, 비잔티움사, 일본사, 한국사 등을 찾아 읽곤 했는데 그 연결이 그리 쉽진 않았더랬다. 이 책 한권을 읽은 것이 그러한 몇년간 묵은 숙제를 한 기분이 들게 했다. 세계사를 세계적 프레임으로 보게 해준 이 책에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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