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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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기둥인 그리스 신화와 철학, 기독교, 법의 통치는

어떻게 구축되어 발전해갔는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를 보면 신전 그림 중앙에 UNESCO 라고 써있는데 그 신전은 누가봐도 바로 알 수 있는 고대그리스 신전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 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의 보호관리단체가 대표로 선택한 건물이니만큼 세계문화유산의 기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세계사가 서양사는 아니지만 세계사를 서양사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서양사의 기원은 아니 세계사의 기원은 고대그리스라고 은연중 말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고대그리스 이전에 훨씬 이전에 고대사가 있었다. 이 시작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양고대사'를 다시 배워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배움을 올바르게 이끌어줄 책을 만나 반가웠다. 바로 이책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이다.

30여 년간 서양고대사를 공부해왔지만, 일반독자나 학생들에게 적합한 입문서를 찾지 못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서양고대사 입문서들은 저마다 장점을 갖고 있다. 화보다 뛰어난 책도 있고, 연구자들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책도 있다. 그렇지만 서양고대사가 다루어야 할 시기 전체를 망라하면서, 서양고대사 이해에 필수적인 주제를 모두 담아낸 책은 찾기 힘들다. 우선 시대 면에서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범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원류로 규정하고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법은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 (p. 5)

주제 면에서 서양고대사는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주제들을 빠짐없이 다루어야 한다. 기존 입문서들은 대개 정치사, 제도사, 사건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화사 분야를 소홀히 했다. 따라서 여러 인물의 업적이나 정체제도의 발전은 자세하게 다루어졌지만 그리스 문학, 기독교의 발전과 로마의 기독교 박해, 로마의 실용 문화와 같은 주제는 소략하게 다루어졌다. (p. 9) 이 책은 이러한 주제를 모두 다루었다. 또한 이 책에는 많은 사람이 재미를 느낄 만한 흥미로운 소재들이 담겼다. (중략) 기존 입문서에서 보기 힘든 이런 소재들을 통해 독자들은 재미있게 서양고대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p. 10)

책의 첫장 '서문'에서부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서양사를 세계사로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서양사의 기원을 고대그리스에서 시작하는 것도 문제다. 고대그리스는 문명의 기원이나 역사의 기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게 편집한 역사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닐까.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이고 맥락인데 중간부터 본 역사가 전체흐름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어온 것은 아닐까. '서양고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대 근동(유럽인이 보기에 가까운 동쪽이라는 뜻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일대)의 역사에서 출발해야 한다'(p. 9) 는 저자의 시작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게다가 너무 전문적인 정치철학적 이야기들 중심이 아닌 생활과 문화관련 풀이들이 많아서 가독성도 좋았다. 저자는 '입문서'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내가보기에 이 책은 서양고대사의 '완결판'이라고 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서양사의 진짜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이집트를 거쳐 고대 그리스를 지나 고대로마 에서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서술되는데 온갖 책과 자료들을 섭렵한 저자 덕분에 나는 한 권으로 편하게 최신 관점들을 읽을 수 있어 감사했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과거같지만, 새로운 유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새로운 분석기술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조건들에 의해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미래적인 학문이 역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책도 최근의 정보가 들어간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은 서양고대사에 대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최신 관점으로 해석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좋았다.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황무지들을 떠돌던 유목민들이 두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퇴적평야에 관심을 갖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수메르인이었는데, 수메르인은 보리와 밀을 재배해 풍요를 일구었다. 식량이 풍부했던 수메르인은 여러 종류의 술을 마셨는데, 특히 맥주를 좋아했다. 그들은 '인생의 즐거움, 그것은 바로 맥주'라고 말했다. (p. 19)

문명의 기원, 역사의 기원을 이야기할때 대부분 정착민 입장에서 서술되곤 한다. 농업을 하고 사회가 커지고 나라가 되고 전쟁이 일어나고 제국이 되는 순서랄까... 그런데 그 시작은 유목민들에 의해서였다. 수메르 뿐만이 아니다. 고대그리스, 고대로마도 외부에서 흘러온 유목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역사는 정주민들의 시간사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늘 유목민이 먼저였다는 생각이 든다. 유목사에 대한 연구가 좀더 많은 것을 밝혀낸다면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들이 많이 바꿀수도 있지 않을까... 여하튼, 역사의 시작에도 술이 있었다. 서양사에서 술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일상과 밀접해 보인다. 그렇게 취하면서도 그렇게 자주 전쟁을 할 수 있었다니 싶다가도 그렇게 취했기에 그렇게 자주 싸웠던건가 싶기도 하다.

19세기에 고고학이 탄생하면서 서양인들의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바벨탑이 발견되고, 노아의 홍수의 정체가 밝혀졌다. (중략)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서양인들은 깜짝 놀랐다. 문명의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고도의 도시 문명, 윤리적인 종교, 현세 중심적인 신화, 수준 높은 철학과 과학, 정교한 법률 체계가 그곳에 있었다. 더욱이 메소포타미아가 서양 문명에 끼친 영향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서양의 종교, 문화, 언어, 예술 모든 분야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p. 22)

서양고대사의 시작은 수메르에서 출발해야 한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서양인의 책을 읽었을 때도 놀라웠지만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한국인의 책을 읽었을 때 엄청나게 놀라웠다. 국내 저자중에 수메르어를 직접 판독할 수 있는 저자가 계시다는 것도 감탄했지만 그 책 내용들이 너무나 신선해서 이런 좋은 내용이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아했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김산해 님의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모든 것은 수메르에 이미 있었다.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도 바벨탑도 아치를 비롯한 건축기술과 신들과 신화 그리고 종교적 제의등등 많은 것들이 이미 수메르에 있었다.

기원전 2350년 경 북쪽에서 아카드인이 내려와 수메르인을 정복했다. 아카드의 지배자 사르곤 왕(기원전 2334~2279)은 자기의 출생에 대해 신화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p. 39)

나는 아카드의 위대한 왕 사르곤이다. 어머니는 여제사장이었고 내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내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시고, 몰래 낳았다. 그녀는 갈대 바구니에 나를 넣어 역청을 바른 덮개로 덮었다. 그녀는 강가에 나를 두었다. 강은 나를 '물 긷는 자'인 아키에게 데려갔다. 물 긷는 자인 아키는 물 양동이를 떨어뜨렸다가 나를 건져 올렸다. 물 긷는 자인 아키는 나에게 정원사 일을 시켰다. 내가 정원사 일을 하자, 이슈타르 여신께서 나를 줄곧 사랑하셔서, 나는 54년 동안 왕권을 행사했다. 나는 검은 머리의 사람들을 다스렸다.

부모가 버린 자식이 동물이나 신의 보호를 받고 커서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이후 역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와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대표적이다. 사르곤의 전설은 후대 전설들의 원형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처음에 정통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사르곤'이라는 이름은 '합법적인 왕'이라는 뜻이다. 이는 사르곤의 정당성이 의심되었던 정황을 반영한다. 이런 이야기는 모계사회의 유습을 보여준다. (p. 40)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설의 대부분의 원형이야기들도 메소포타미아에 이미 있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그 많은 신화와 전설의 원형이야기들의 출발점은 메소포타미아이다. 고대그리스나 성경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함무라비 법전이 인류 최고(最古)의 법전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함무라비 법전은 그보다 앞서 있었던 우루카기나 법전, 우르남무 법전 에쉬눈나 법전을 정리하고 보강한 것이다. (p. 42)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도 따지고 보면 가장 오래된 법전은 아니다. 그이전에 법이 있었고 점점더 체계적으로 발달해오던 중 우리가 가장 먼저 캐낸 것이 함무라비 법전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되었다' 는 기원은 사실 가장 오래되지 않은 것들이 참 많다. 그 이전에 이미 있었다. 서양고대사를 다시 배워야 하는 이유다.

히브리인에게 다윗은 영웅 중의 영웅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인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왕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에서 다윗은 참으로 추악한 인물이다. 그는 사울의 딸인 미갈과 결혼했지만,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자들을 겁탈하곤 했으며, 왕이 되고 나서도 부하의 여자들을 차지했다. (중략) 솔로몬은 흔히 '지혜의 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언급되지만 민간전승에서 말하듯 훌륭한 군주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억압적 폭군에 가까웠다. (p. 60)

얼마전 읽은 '마태복음' 관련 책이 생각난다. 누구의아들누구의아들 하고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다윗의 불경함은 이미 드러나져 있었다. 그러고보면 성경을 역사책으로 제대로 읽기만 해도 널리 알려진 존경스런 인물이 사실은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게될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제대로 읽히지 않고 구절구절 이용되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배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신의 지지에서 찾는 것은 이미 수메르에서 관찰된다. (p. 67)

페르시아는 이란 지역에서 발흥한 유목족이었기 때문에 제국을 만들기 전에는 문화가 뒤처져 있었다. 제국을 이루고 나서는 정복한 여러 종족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p. 68)

살 곳을 찾아 유랑하던 리비아와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이 이 땅에 자리 잡아 나일강의 은총 속에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p. 78)

신에게서 왕통의 정당성을 지지받는 것도 고대 수메르에 이미 있었다. 그나저나 페르시아도 이집트도 유목족에서 발흥했다. 정말 고대의 모든 시작은 유목민에게서였다고 보여진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시작은 수렵채집이었으니 모든 나라의 시작은 당연히 유목족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정착민들이 부흥시켰을지 모르나 그 기원은 유목민들에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역사의 전환점들은 매번 유목민과 정주민들과의 전쟁에서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유목족이라는 단어가 새삼 의미있게 다가왔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이 이집트의 신화와 매장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신화와 관습이 이집트 것을 많이 모방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이 용어는 그리스 문명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 문화를 수용했음을 강하게 보여준다. (p. 86)

독자적인 발달이라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문화는 교류속에 꽃이 피기 마련이다. 먼저였다고 더 우월할 것도 없고 답습했다고 더 낮게 볼것도 없다. 발달한 국가에서 덜 발달한 국가로 많은 것들이 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렇게 흥망성쇠가 뒤바뀌기 마련이다. 그 모든 과정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문명이 독자적이 아닌 것이 자존심상해할 문제도 아니고 블랙아테나 라고 할 것도 아닐 것 같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동방이라고 천시하는 지역에서 선진문물을 배웠다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이려나...

클레오파트라는 미녀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허영심에 가득한 요부로도 평가되었다. 리비우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바람을 피우는 요부'라고 평했고, 플리니우스는 '왕관을 쓴 창녀'라고 불렀다. 프로페르티우스는 '음탕한 생활에 푹 젖은 암꿩, 어지러이 흐르는 나일강과 똑같은 여자'라고까지 악평했다. 그녀가 냉철하고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이렇듯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패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p. 115)

상식처럼 익숙한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당연하게도 승자의 기록은 패자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보려면 한쪽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종종 기존의 승자의 기록에 대한 부당한 평가들에 대해 꼬집어주고 있어서 편견을 깨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고, 물질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p. 155)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고 이야기되지만, 당시 기록에는 이런 말이 없다. (p. 157)

플라톤의 국가관은 얼핏 보면 귀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플라톤이 세 계층을 서열화해서 생산자 계층을 천한 자들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세 계층은 세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통차지 계층이 사유재산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한 혈통이나 재산이 아닌 지적 능력을 기준으로 계층을 구분했다는 점에서도 진보적이었다. 플라톤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안정적인 사회 구조를 모색했다. 플라톤의 국가관은 그 과정의 산물로 볼 수 있다. (p. 159)

이렇게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이 신 못지않게 뛰어나거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몇몇 사례가 있다. 이런 생각은 신에 대한 그리스인의 사고관 대문에 가능했다. 당시 다른 지역의 주요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에서는 신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다. (p. 165) 이에 반해 그리스인은 신이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영원히 살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느끼고, 원하는 바를 얻고자 온갖 잡스럽고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능력에도 한계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p. 166) 신인동형론은 그리스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신화에서도 일반적으로 관찰된다. (중략) 따라서 신인동형론을 그리스의 고유한 사고의 주요 요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p. 166)

흔히 서양 문명의 두 뿌리를 신 중심의 헤브라이즘과 인간 중심의 헬레니즘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을 무척 좋아하는 역사가들이 많지만, 이는 19세기 중반 서구의 몇몇 사상가들이 가능성을 주장한 것이다. 서양의 주요 개론서에는 이 말이 잘 나오지 않는데 일본의 세계사 교과서,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나 서양사 개론서에 빈번하게 나온다. (p. 169)

고대그리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편이라고 여길 것 같다. 일단 신화가 친숙하고 철학자들의 이름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정도는 거의다 안다. 하지만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알고 플라톤의 국가론이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인동형론 도 그리스가 아니라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이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는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서양사가 그냥 서양사가 아니라 일본의 서양사인 셈이다. 서양고대사뿐만 아니라 서양사 아니 세계사 자체를 일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해석하고 책으로 펴내고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런 마음이 든다.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한다면 18세기까지 서양의 교육, 사회 운영, 문학에서 중심은 그리스보다 로마에 있었다. (중략) 문학에서도 키케로,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로마 시대 작가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따라서 로마의 유산, 기독교, 게르만의 유산을 서양 문명의 3대 기둥으로 보는 견해도 강하다. 19세기 서양인이 현재와 유사한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고, 그리스가 독립하여 서양 세계의 일원이 되자 비로소 서양인도 그리스를 그들 문명의 뿌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p. 170)

만약 그리스가 독립하지 못하고 오스만제국아래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는 많이 다른 내용이었을 것이다. 서양고대사가 고대그리스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못 꺼낸채 고대그리스도 아닌 고대로마가 서양고대사의 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역사를 학문적으로만 바라보고 올바르게 평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적어도 그렇게 노력은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는 '헬라스(그리스)인들과 이방인들의 위대한 행위와 업적이 덧없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역사를 썼다. 그가 책 제목을 '역사(희랍어로는 historia)'라고 했던 것은 희랍어로 '히스토리아'가 '탐구한 것' 혹은 '조사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조사한 것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책에 '히스토리아'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후 '히스토리아'는 조사한 것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역사'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다. (p. 182)

하지만 히스토리아는 역사 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조사한 것'이라는 일반명사로서의 의미를 중요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남겨진 기록을 조사한다는 1차적 행위에 대해 강조한 후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여 역사로 인정받게 하는 2차적 의미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고유명사로서의 역사만 보아왔던 것이 아닐지...

후대 서양인들은 그리스인이 내린 평가를 그대로 답습했다. 많은 서양인이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고, 서양이 우월한 정치체제와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은 민주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반면 동양인들은 전제적이고 수동적이며 타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서양인들에게 페르시아 전쟁은 아시아를 물리치고 유럽을 구한 대사건으로 평가되었다. (p. 207)

그리스인이 내린 평가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 그래서 서양의 기원을 고대그리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페르시아 역사에서 그리스와의 전쟁은 큰 의미도 없었고 영향도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정복전쟁중의 하나였을 뿐이고 페르시아 입장에선 그리스가 변방이었다.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면 양쪽을 다 알아보고 비교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쪽의 기록만 보고 그대로 박수는 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인과 동방의 관습에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의 부하들이 반발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나는 이민족들을 모두 쓸어 없애거나 세상의 절반을 황무지로 만들기 위해 아시아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 민족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이 위대한 제국을 훌륭하게 통치하려면 우리가 가진 것을 토착민에게 전해주고, 또한 그들이 가진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의 태도는 시대정신으로 발전했다. (중략) 새롭게 통합된 세계에서 개별 종족이나 나라를 중요시하는 이념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했다. 철학자들은 사회와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윤리적으로 살면서 수행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가르쳤다. (p. 241)

정복한 곳에서의 포용성과 관대함도 로마제국이 먼저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왕에게서 먼저 찾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이러한 '세계시민주의'가 있었기에 로마제국도 배울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러나 디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아이네아스는 기원전 12세기 사람인 반면, 카르타고가 건설된 시기는 기원전 814년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는 35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p. 251)

로물루스 신화는 라틴족이 팔라티누스를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었던 과정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라티움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는 허구다. (p. 254) 이 허구의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왔다는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략) 아이네아스의 전설은 기원전 6세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p. 255)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왔다는 전승을 듣고 그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로물루스 전승을 그 이야기에 결합했다. 이 작업은 기원전 3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p. 256)

고대역사는 사실 신화와 실제역사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신화는 신화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그 역사성을 갖는다. 신화라고 해서 다 허구는 아니고 역사라고 해서 다 허구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로마건국 신화를 담은 '아이네이스'는 분명한 창작물이다. 신화라고 하기보다는 신화를 표방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베르길리우스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그 이전에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아우구스투스의 구미에 맞게 잘 편집했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지... 그런데 고대그리스신화와 동급으로 고대로마건국신화로서 위상을 인정받는 것을 보면 왠지 속이 좀 쓰리곤 하다.

로마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와 달랐다. 아테네는 민주화 과정을 통해 민회에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 신분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평등한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이에 반해 로마는 귀족과 평민을 각각 대변하는 원로원과 민회를 양대 권력 기구로 만들고, 귀족과 평민이 서로 견제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 기구는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신분 간의 합의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로마는 민회에서 표결을 개별 시민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군사 단위나 지역구 단위로 묶은 다음 단위 투표로 진행했다. 시민들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 투표했고, 각 집단이 민회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 따라서 시민 개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시민이 속한 집단의 의견이 중요했다. 로마의 정치 구조가 이런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로마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p. 268)

서양의 법과 정치체제는 대부분 로마제국을 본떠 만들어졌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애초에 제도 자체가 신분을 나누고 불평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민주공화국 이라는 말이 민주주의이면서 공화주의 라는 말이 애초에 묶을 수 없는 단어가 아니었을까... 평등과 불평등을 하나로 묶어 놓은 모순을 품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로마인이 공화정 체제를 다듬어나가는 과정은 로마인이 주변 종족들과 투쟁 속에서 생존을 지켜나가는 과정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법률 개정을 통해 법적인 평등이 확보되면서 사회는 점차 안정되어갔다. 귀족들이 양보함으로써 평민들은 공동체 성원으로서 정체감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국가 발전을 위해 협력했다. 신분 간의 타협을 통한 사회 안정은 로마가 외부로 팽창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p. 277)

로마제국에겐 외부의 적이 있었기에 평등과 불평등을 하나로 묶어 놓은 모순적인 제도가 조금씩조금씩 바꿔가면서 효과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눈에 보이는 무력전쟁이 거의 없어진 시대다. 외부의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 불평등은 내부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벌어진 격차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진행중이다. 사실 이런 모습은 로마제국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의 부와 자원이 로마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로마는 심각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급작스럽게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p. 303) 로마의 상류층이 사치에 빠져들고 있을 때, 로마의 민중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수십 년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돌아왔어도 로마 병사들이 차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분배된 전리품은 많지 않았고, 제대 보상금도 없었다. (p. 304) 고향으로 돌아간 병사를 기다리는 것은 관리하지 않아 황폐해진 토지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처자식뿐이었다. 노예가 대규모 유입되면서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p. 305) 결국 정복 전쟁의 결과 귀족들은 더 부유해진 반면, 자영농들은 대거 몰락하여 빈민이 되었다. 자영농의 몰랅은 도시 문제와 곡물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 자영농이 몰락하자 병역의 의무를 수행할 군인들이 부족해졌다. (p. 306)

로마가 제국이 됨과 거의 동시에 로마는 부패의 늪에 빠졌다. 다양한 목소리가 올바른 결론으로 취합되던 시대는 끝났다. 수많은 불평불만들만이 고함을 치는 시대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결국 강력한 누군가의 권력이었다. 광활해진 제국은 강력한 독재를 필요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칭호를(존엄자) 자랑스러워했지만, 겉으로는 자신이 시민의 대표일 뿐이라며 자신을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최고 통치자가 제1시민으로서 통치하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시대가 열렸다. (p. 344) 황제가 공식적으로 입법권을 차지한 것은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새로운 통치 시스템인 도미나투스 체제를 수립한 후이다. (p. 346) 원수정은 제1시민인 프린켑스가 원수처럼 통치하는 체제를 말한다. 분명 프린켑스는 최고 권력을 차지했지만 결코 왕이 아니었고, 원로원과 협의하여 제국을 통치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수립할 때까지 수많은 프린켑스가 존재했다. 네로,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등. 흔히 이 사람들을 로마의 황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황제의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 제1시민이었을 뿐이다. (p. 348) 이제까지 황제는 프린켑스였다. 그러나 앞으로 황제는 도미누스(주인 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며, 이제 시민들은 황제를 자신들의 대표가 아니라 주인으로 모셔야 했다. 제국의 주인으로서 황제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이제 원로원은 제국의 반을 통치할 수 없고, 입법권을 갖지 못하며, 후임 황제의 선출에도 관여할 수 없었다. (p. 403)

원수정과 황제정은 거의 같아 보이지만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라는 로마제국의 명칭도 뭔가 다른 호청이 더 적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하튼 1인 독재라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지. 그러나 황제 라는 호칭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라고 하면 사실 1인독재가 아닌 시기부터 황제 라고 불린 셈이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때 제국을 4분할 하여 통치했고 이후 점차 동서로 갈라진 로마제국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다. 그러니 로마제국 이라는 하나의 제국을 황제로서 통치한 지배자는 결국 없는 셈이려나...

로마에는 유독 신전이 많은데 로마인이 고대에 신앙심이 특히 깊은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다른 모든 점에서 로마인은 다른 종족보다 같거나 못하지만, 종교에서는, 즉 신들을 숭배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뛰어나다'라고 말했다. (p. 359) 판테온을 이해하려면 먼저 '신 초대하기'관습을 알아야 한다. 로마는 다른 종족을 정복할 때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다른 종족의 수호신을 '초대'했다. (중략) 비록 다른 종족의 신이라고 해도 그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종족을 정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로마의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로마인이 모셔야 하는 신들이 계속 늘어났다. 로마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신을 한 신전에 모시기 시작했다. 이런 신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판테온이다. (p. 361)

로마의 만신전이 그 수많은 다신교가 얼핏 이해가 안가기도 했는데 '초대' 였구나... 수많은 정복전을 치뤘으니 그렇게 신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타 민족에 비해 종교적이다 보니 그렇게 열성적으로 하던 종교활동능력이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렇게 열성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게 했나 보구나... 문득, 어쩌면 너무 많아진 신들을 모시는 것에 피로감이 느껴져서 유일신을 모시는 것으로 편하게 옮겨간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런저런 교리문제나 사회적 상황이나 그런 것들이 중요이유였긴 하겠지만.

예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사이인의 형식주의를 공격하며,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략)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p. 372) 영적인 메시아임을 선언한 예수는 철저한 종말론자였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고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언하고, (중략)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가르쳤다. (p. 373)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의 양대 기둥이라고 불리는 바오로는 '율법 없는 선교'를 기독교의 확고한 교리로 발전시켰다. (p. 377) 바오로는 유대인의 이런 신앙을 거부하고, 율법은 수명을 다했으며 야훼는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중략) 이후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종교로 성장하게 된다. (p. 379) 기독교는 고대 종교를 무너뜨리고 인류 종교사에 새 장을 열었다. 기독교가 부족신의 개념을 극복하고 보편신을 섬기게 되면서 고대 사회의 지형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p. 380)

고대로마 하면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자주 언급되지만 사실 네로 때도 도미티아누스 때도 지도자에 의한 종교적 박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로마 시대의 기독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오히려 예수의 혁명적 가치관이었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이다. 흔히 로마제국의 멸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동서로 갈린 후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흔히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었다. 그곳에서 로마의 정치제도와 법률, 종교와 관습, 문화와 예술이 계승 발전되었다. 따라서 476년에 로마제국은 결코 멸망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멸망한 적도 없는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야단법석을 떨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둔갑했을까? (p. 406)

이 책의 제목처럼 서양고대사는 메소포타미아 부터 시작이라는 점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통해 서양고대사를 다시 배워야 한다. 하지만 고대사의 시작을 고대그리스로 알지라도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로마제국의 멸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이 멸망했어도 동쪽 지역에서 여전히 로마제국을 계승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부정하고 476년에 로마제국이 멸망했다라고하는 이유를 깨닫고 그러한 시각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400여 페이지의 책 한권 읽는 것으로 메소포타미아부터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고대사를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긴 시간을 함축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역사책을 좀 읽은 사람들은 이 책이 너무 개략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입문서라고 저자가 표현했듯이 이 책을 시작으로 다른 역사책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데 있어 이 책은 바람직한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기에 서양고대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역사를 일목요연하면서도 흥미롭게 풀어준 저자에게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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