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 어쩌다 보니 황혼, 마음은 놔두고 나이만 들었습니다
이나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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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늙지도, 아주 젊지도 않은 나이 육십이 되니 보이는 것들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노년'으로 저물어가는…

수많은 모순과 허무함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삶에 대하여

저자는 서울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이다. 이런저런 책도 내고 인정도 받아온 나름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다. 외적으로만 보면 굉장히 안락하게만 살아온 것 같은 저자는 자신의 직업에 매진해옴과 동시에 한 집안의 종부로 일년에 12번의 제사를 치르고 30년넘게 시부모를 모시며 두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오랜세월 삶과 고투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갑이라는 나이를 넘고 보니 이제야 삶을 달리던 속도를 늦출 수 있었고 노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랜 경력의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산전수전 겪은 인생선배같은 나이의 분이 낸 책이라 따듯한 조언이나 응원을 북돋우는 메세지를 담은 책이겠거니 하고 흔하게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은근 시니컬하게 정곡을 콕콕 찌르면서도 대인배다운 너른 생각으로 많은 것을 포용하는 글들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지극히 사회적이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제목만 보면 '인생'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 같지만 막상 읽고 나면 '죽음'과 '마무리'에 방점을 찍어둔 책이었다. 그 관점이 한마디로... 멋졌다!!!

가장 후회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나는 어쩐지 이게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강요하는 것 같다. 따져보자. 젊어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또 그렇게 살다가 망하지 말라는 법 있나? (중략) '나'와 '원하는 삶' 모두가 참 아리송한 개념이다. 젊을 때의 나와, 늙을 때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그때 원한 것을 지금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모두 어떤 시점에서는 자기에게는 최선이라 생각하고 선택하려 애쓰지 않는가. (p. 21)

그러니 제발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참으로 아리송하고 쓸모없는 주문 같은 것은 하지 말았으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그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않았다. 하물며 우리 같은 어리석은 미물이 무슨 수로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단 말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는 부추김은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라' '혁명으로 계급을 전복시켜라' 하는 말처럼 때론 아주 위험하다. (p. 30)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라고 흔하게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아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모르니까 헤매는 거고 그 헤매는 길이 인생이 되는 거다. 무엇보다 그때 원했던 것을 지금은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지금 원하는 것을 그땐 원하지 않았었을 수 있다. 그러니 다 지나고 나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쉼없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답시고 '네가 진정 원하는 게 뭐야' 라고 선문답같은 위로를 하지 말자. '내가 원하는 것' 보다 '지금 해야할 것'을 선택하는게 대부분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곤 했다. 책의 초반부터 저자의 말들이 아주 공감가고 명쾌해서 좋았다.

한동안 '내 장례식은 이랬으면...'하는 공상을 한 적이 있다. (중략) 한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나의 장례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은 내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p. 32) 늙고 병든 부모의 마지막을 지켜구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죽은 내가 뭐라고 자식들 잔치, 자식들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겠는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처지라면 거기에 어울리게 더 겸손할지어다. (p. 33)

노후준비를 한다면서 자신의 장례준비까지 꼼꼼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묘를 할지 나무에 심을지 납골당을 할지 등등을 정하고 이런저런 계약을 해놓고 영정사진도 찍어두고 누구누구에게 연락을 해야할지 미리미리 일러두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떠난 이후의 내 장례식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런저런 준비를 다 해두어도 그대로 될지어쩔지 모르는 거다. 장례식은 남은 자들의 선택이고 몫이다. 그들이 떠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추모하고 추억할지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차라리 남은 이들이 떠난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공경할만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프로이트 선생은 이런저런 약점이 많지만 또 그만큼 인간적인 매력도 많다. 특히 나는 그가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 깊은 찬탄과 존경을 보낸다. (p. 37) 그는 죽기 전까지 책을 읽다 주치의에게 안락사를 부탁하고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p. 38) 나는 프로이트학파의 분석가는 아니지만, 프로이트처럼 안락사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 절대 찬성한다. 연명의료 거부 정도로는 너무 부족하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고, '왜 저 노인은 아직 안 죽을까' 하는 생각을 모두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정말로 품위 있고 격조 높게 안락사를 선택하고 싶다. (p. 39)

저자의 의견에 백퍼 동의한다. 예전에 읽은 SF소설 중에 안락사 관련 직업이 나왔던 적이 있다. 미래 시점의 어느 사회에서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본인이 원할때 언제든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고 그 마지막을 함께 해주는 직업이 등장했었다. SF는 미래소설이긴 하지만 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지금 필요한 것이 미래에 구현됐으리라는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니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락사는 충동적인 자살과는 다르다. 백세시대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사실 죽음 그 자체 보다도 어떻게 죽느냐 라는 죽음의 과정이 아닐까. 죽어가는 과정이 길고긴 고통 뿐이라면 인간다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사실 더 행복한 삶과 죽음을 영위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성스러움'을 뜻하는 라틴어 'sacer'는 때로는 '저주받은 maudi' 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고 한다. 멜라네시아의 'mana', 북미 인디언 '수'족의 wakan', 또 북미 인디언의 'orenda' 역시 성스러움을 뜻하는 동시에 저주받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죽음 역시 그렇다. 죽음처럼 성스러움에 가까이 가는 순간은 없다. 태어나는 순간 역시 조금은 성스럽지만, 사자 死者 의 침대만큼 종교적일 수는 없다. 비루한 인생을 마감하고, 이제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이 넓은 우주의 일원이 되는 순간인데도, 이승의 삶에 집착하는 우리는 죽음이 저주라고 자주 착각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p. 87)

'죽음'은 성스럽기도 하고 저주스럽기도 할 수 있다. 고대부터 인간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많은 철학적 고민을 거듭해 왔다. 고대그리스신들은 무한한 삶을 살기에 늘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쾌락적으로 살면서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고 그런 신들을 상상하며 고대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삶은 유한하기에 그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깨우치고자 하곤 했다. 신과 인간의 유일한?! 차별점이라고 할 '죽음'은 그래서 성스러울 수 있고 그래서 저주스러울 수 있다. 그런 죽음에 대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내내 노년이 받아들어야 할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년이 삶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년은 죽음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다행히 행복한 노년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는 예수님, 부처님, 알라, 비쉬누, 천지신명 등 여러 종교의 신들이 참으로 친절하게도 가르쳐주셨고 그 가르침이 어려울까봐 각종 해석과 주석서가 수천 년동안 누적되어 왔다. (중략) 오늘 하루 죽음과 죽음 너머를 묵상하면서 내 그릇으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실천해야 한다. (p. 106)

인생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조정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을 닦을 일이다. 기대하지 말고, 혹시 내 후의에 대한 받응이 시원치 않다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로 해준 바는 잊어버리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훨씬 좋다. (p. 130)

내가 얼떨결에 부모가 되었듯, 성인 자녀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얼떨결에 늙은 부모의 자녀가 된 것뿐이다. 그저 험한 세상에 나와 외롭고 힘든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재롱도 떨어주고, 말도 안되는 말을 해도 복종해주었고, 참 나쁘고 미숙한 부모였던 나를 사랑해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내가 가는 길에 적어도 상주는 되어 주지 않겠는가. 자녀들이 어쩌면 앞으로 늙은 나 때문에 꽤 많은 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도 높으니, 지금까지 들인 돈은 앞으로 질 빚을 미리 갚은 것이라 생각하고 다 잊을 일이다. (p. 137)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가장 직접적으로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허심털털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조언한다. '부모자식들이여, 서로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고 제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자.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고 있다면, 마음에 없더라도 감사의 말을 해주면 된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감사의 말을 자신은 듣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을 수 있다' (p. 130) 맞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니 사실은 자식이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자식 관계는 서로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내것인양 간섭하고 내소유물인양 지시하고 당연히 주었어야 할것을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부모 자식 은 엄연히 다른 인격체다. 자식은 태어나 자라는 동안 부모에게 선사해준 행복의 시간들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했기에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날 나이가 되면 쿨하게 '그동안 고마웠어' 하고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정신건강에도 훨씬 좋다. 저자의 말처럼.

'내 나이가 어때서'하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르듯, 자신의 나이를 애써 부정하고 젊은 사람들 흉내를 내려는 노인들이 있다. 심지어는 죽을 운명까지 부정하고 싶어 한다. 아아, 자신의 죽음을 절대 생각하지 않는 삶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상상하지 않는 짐승의 삶과 뭐가 다르겠는가. (p. 139)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열심히 주변 사람에게 봉사하고 좀더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매일 새롭게 나아가려 한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일탈을 밥 먹듯 한다면 어쩌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일생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일탈과 방종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 일찌감치 깨닫는 사람의 인생과 달리, 끝내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사는지 알지 못한 채 철없는 노년을 쉼 없이 달리는 경우를 가끔 본다. 그들의 삶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 몹쓸 늙은이'라고 내뱉게 된다.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 과연 당신이 정한 노년의 목표인가. (p. 140)

젊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버릇없다고 벌컥 화를 내며 저자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년배인 저자가 노인이 됐으면 노인이 됐음을 받아들이고 노인답게 살라는 충고는 아직 노인이 아닌 내가 읽기에도 속시원한 맛이 있었으니 정작 노인들이 읽으면 분명 좋아하지 않을 충고다. 세대차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코로나 사태라 광장에서 거부당하자 강남 한복판에서 일탈과 방종의 끝을 달리는 분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볼때마다 마음이 참... 무겁다.

최근 모이기만 하면 나라 걱정하는 노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 되면서 어쩌면 과거에는 그냥 묻혔던 많은 부정, 부패, 비리 들이 더 많이 늘어나는 탓도 있고, 독재 시대가 끝나면서 권위가 무너져 여기 저기 갈등이 깊어지는 면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소외감과 좌절을 느끼는 저소득층 젊은이들 못지않게 오히려 많이 누리고 가진 것도 많은 노인들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느낀다는 점이다. (중략) 노인들이 느끼는 '말세'의 분위기는 어쩌면 본인들 자신이 사라져 가기 때문에 느끼는 개인적인 종말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어쨌거나 자기 중심적으로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 195)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무의식이 알기 때문에, 남의 영혼도 죽이기 위해 댓글이든 집회든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혐오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가족이든 남이든, 아무에게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까. (p. 200) 세상을 제대로 보는 노인이 해야 할 일은 '혐오 공세'와 '폭력적인 언행으로 자신의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함께 차근차근 세상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어른답게. (p. 201)

저자는,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은 그만큼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한 것도 많고 받은 것도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로 보인다며 애국에 충만한 그들이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노인을 군대에서 받아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농담이 아니라 군복을 입고 지치지도 않는 스테미너로 데모를 하고 있는 노인들은 어쩌면 게임과 스마트폰으로 목 허리 안 아픈곳 없는 젊은이들 보다 훨씬 더 전쟁터에서 용감할 것 같다'(p. 196)며. 씁쓸한 공감이 가면서도 웃음이 나는 것이 그야말로 웃픈 기분이 되었다.

노인은 많아졌으나 어른은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노인은 노인이라는 자체로 공경해야 할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노인과 어른이 같은 의미인것 같지 않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르신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일텐데 말이다...

아이의 아름다움이 '순수미'라면, 노년의 아름다움은 죽음과 가깝고 운명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식시켜 주고 자연의 장엄한 힘을 절감케 하는 '숭고미'에 가까울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젊은이들의 삶은 꽃과 열매가 가득한 풍성한 녹색에 가깝다면 노년의 삶은 메마른 협곡이나 사막 같을 수 있다. 전자의 풍경에서 생기 가득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후자의 풍경은 때로 우리를 압도시켜 작은 자아 따위는 버리게 하는 자연의 광대한 힘을 만나게 한다. 늙고 죽음은 우리를 사라지게 한다는 점에서 운명의 숭고함을 절감하게 만드는 메마르지만 광활한 사막같은 것은 아닐까. (p. 206)

'순수미' 와 '숭고미' ! 정말 적절한 표현 같다. 작년에 유홍준의 답사기 중국편을 읽으며 저자가 가장 인상적인 장소로 사막을 언급했을때 솔직히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멋있기는 할 것 같은데 하고많은 좋은 풍경들 다 두고 왜 사막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에세이를 읽으며 왜 사막을 꼽았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자연경관을 봄에도 나이에 따라 느끼는 감상이 달라지는가 보다. 풍요롭게 채워진 아름다운 경치에서 풀한포기 나무한그루 자라지 않는 사막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사이 그렇게 우리의 나이도 늙어가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서글프지만은 않은 걸 보면 나도 어느새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라도 그런것인지도...

귀도 눈도 머리도 맑지 않은 노년이 되면 눈치나 희망은 다 사라지고,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고 벌레처럼 굴 수 있다. 슬프게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먼저 내가 남들을 벌레 취급하면, 결국 자신도 벌레처럼 군다는 뜻이다. 도대체 누굴 원망하랴! 그러니 벌레처럼만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노년의 꿈은 귀여운 할머니, 품격있는 할머니, 어쩌구 하는 말보다 어쩌면 매우 절실하고도 가장 현실적인 꿈이다. 슬프게도 언제든 혐오 바이러스는 우리 정신과 몸을 때론 오싹하게 때론 약삭빠르게 갉아 먹는다. (p. 214)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보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삶의 과정 중에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와 실수들이다. 누가 도대체 실패를 하지 않고 기술을 연마할 수 있고, 좌절을 겪지 않고 지혜로울 수 있는가? 자신보다 젊은이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삶의 원칙은 거부하고, 상대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집사, 노예 혹은 로봇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 깊이에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 쓸모없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어있다. 불안은 때로 파괴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강요하면서도, 그것을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라고 포장하려한들 결국 지는 것은 나이 든 사람이다. (p. 232)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이라는 제목이 그저 멋있고 운치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보니, 인생은 멋질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음을 (저자가)노년이 되고 보니 깨달았으므로 (동년배들에게) 인생을 거짓말로 남기지 말고 멋지게 살자고 제안하고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참 멋지게 나이든 분이구나 싶었다. 별 기대없이 읽었던 이 작은 에세이를 내가 이렇게나 밑줄치며 읽고 될 줄이야!

나의 사랑하는 벗, 같이 늙어가는 참 고마운 벗이여. 이 책을 들고 읽거든, 조악한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 없는 어떤 평범한 사람이 세상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황한 변명 비슷한 것 적어두었다 생각해주면 좋겠어. 물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그럴듯한 내용을 기대하지는 말기를. (p. 241) 다만 무례하고 경박한 방식으로 세상에 질문은 해야 할 것 같아. 당신들의 생각은 어떠냐고 말이야.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참을성 있게 읽어 준 내 벗들에게 깊이 용서를 구하고 싶어.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한 모든 것들 역시 모두 다 헛되고 헛된 소똥같은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는 궤변론자나 상대주의자가 되기는 싫어. 세상의 귀한 분들처럼 일생을 다 바쳐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는 못했지만, 다만 매일 밥을 했고 매일 책을 읽었고 몸이 허락하는 한 일했으면 된 거 아닐까. (p. 242)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쓴 글을 내 멋대로 해석해서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칠게.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놓지 못한다면 악마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지만,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인다면 천사가 찾아와 당신을 자유롭게 놓아줄 것이다" (p. 243)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일개미처럼 보낸 인생도 그렇게 의미없어 보이는 평범한 인생도 나름 만족할법 하지 않냐고, 이 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자신처럼 노년에 접어든 이들에게 '모두 참 잘 살았다고' 그러니 남은 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자고, 노인으로 천대받기 싫다면 어른으로 존중받을 만한 삶의 마무리를 해보자고 제안하는 듯 했다.

나는 아직 노년은 아니지만 나이들어가는 것이 노인이 되어가는 것이 좋다. 흰머리가 나는 것도 좋고 삶에 대한 열정이 줄어드는 것도 좋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왠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마음이 좀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참 좋다. 그래서 저자처럼 삶과 죽음을 관조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남은 내 소망이다. 이러한 나의 소망에 응원의 기운을 실어준 이 책이 참으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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