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 -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인류 행동의 모든 것
브루스 후드 지음, 조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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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토록 자가 격리에 괴로워했나

그 해답은 바로 인간의 작아진 뇌에 있다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인류 행동의 모든 것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 라는 문장을 보면 뇌가 계속 작아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 읽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책뒤표지에서 쓰여있듯이 200만년 가까이 지속된 인류의 거대한 진화사에서 인류의 뇌는 점점 커져왔다. 그러다 약2만년 전 인간의 뇌가 돌연 작아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작아져 왔다는 것이 아니라 커지던 뇌가 더이상 커지지 않고 오히려 작아졌다는 의미다. 이 책의 원제는 'The Domesticated Brain' 즉 '길들여진 뇌' 이다. 따라서 원제에 보다 가까운 표현이라면 '인간의 작아진 뇌'가 더 적절한 제목일 수 있겠다.

지난 2만년 동안 인간은 테니스공 하나 정도의 뇌를 잃었다. 선사시대의 인류 화석을 들여다봤더니 현생 인류의 조상은 뇌가 훨씬 컸다. 인류가 진화하는 동안 뇌는 전반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현생 인류의 뇌가 작아졌다는 사실은 분명 의외의 발견이다. (p. 7) 인간의 뇌가 작아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지만 적어도 이 사실로 미루어 뇌와 행동, 지능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도발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p. 8)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들릴지 모르는 가설이 있다. 바로 '인간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p. 9)

'왜 인간의 뇌는 줄어들었는가' 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명확히 밝힌다. 인간의 뇌가 줄어든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였기 때문이라고. '인간은 보다 넓은 협력 관계 속에서 모여 살기 위해 자신도 길들이기 시작했다. 단 인간의 경우는 '자기 가축화'라고 볼수 있는데, (중략) 인간은 더불어 사는 문화와 관습이 발명된 이후 스스로 길들여 왔다고 볼 수 있다. (p. 10)' 라는 문장을 뇌과학적으로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몸에 비해 뇌를 천천히 발달시키는 유전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는 기간도 길어졌고, 이 기간에 아이들의 기질을 조정하고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칠 메커니즘이 필요해졌다. 정착 사회에서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평화롭게 사는 이들이 번식에 성공했으며, 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문화를 창조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인간의 지능이 단기간에 향상되었기 때문에 현대 문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자신을 길들이며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과 지식을 발전시키면서 형성되었다. 길어진 유년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도 유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족 안에서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시간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렇듯 집단 지성은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인간은 더 똑똑해지지 않고서도 지식을 공유한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배웠다. (p. 15)

문명의 역사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가르고 석기시대와 청동기/철기 시대를 가르는 중요 기준은 농경과 정착생활이었다. 하지만 괴페클리테페의 유적발굴로 기존의 문명발달사는 커다란 물음표에 직면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문명의 발달사도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 시대에 인류의 발달 또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싶다. 직립보행을 하고 뇌가 발달하면서 똑똑해져서 인류가 사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모여살기 위해 뇌를 줄이면서까지 스스로를 길들여온 것이라는 발상은 신선하고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저자는 이 발상을 뇌과학적인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왜 집단이 그렇게 중요하고,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신경 쓸까? 이 책은 '인간의 뇌가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인간의 뇌는 우리를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도록 진화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지각 능력과 이해의 기술이 필요하다. 또 사회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생각과 행동도 바꾸어야 한다. (중략) 우리의 뇌는 거대한 집단에서 협력하고 소통하며, 자녀에게 문화를 물려주기 위해 진화했다. 인간의 유년기가 그렇게 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20)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포유류 동물들은 태어나자 스스로 걷고 움직여 어미젖을 빤다.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오랜 돌봄이 필요하다. 이 오랜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류가 모여살게 되었다는 상식을 깨고 사회적 존재로 키우기 위해 오랜 돌봄이 필요하도록 태어났다는 주장이 그럴법했다. 인류의 진화, 뇌발달, 아동발달에서 유전학, 신경과학, 사회심리학까지 망라하며 '길들여진 뇌'를 설파하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인류의 진화를 새롭게 볼수 있는 프레임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모든 문화에는 출산, 사춘기, 결혼, 죽음처럼 인생의 큰 변화를 기념하는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의 삶에 구두점을 찍고, 종종 신앙과도 관련되어 있다. 예식 자체는 대개 논리나 개연성이 없어 난해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각 식에 적용할 수 있는 인과법칙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예식 위반'이다. 즉 예식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 자체가 예식에 힘을 부여한다. (p. 96) 아이들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 중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p. 97)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지키고자 하는 인간만의 '예식'들이 있다. 이것이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도 있을 듯 하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공막이 큰 인간의 눈은 늘 상대방을 살펴보도록 진화한 결과이다. 서로서로 따라하면서 집단의 결속력을 높여갔다. 집단이 커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사회적 동물이 되어온것 같기도 하다.

감각에서 문화에 이르는 모든 사회 매커니즘은 자연선택을 통해 처음부터 신생아의 뇌에 새겨져 있지만 이는 이후에 문화적 환경 안에서 조직되고 운영되는 다층적 체계를 형성한다. 이 시스템은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도구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로 묶은 다른 매커니즘도 있다. 우리는 관심과 흥미 이상으로 감정을 공유한다. (p. 10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동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은 난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전이 먼저인가, 환경이 먼저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통제한다고 믿는다.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은 있어도 여전히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행동의 주체이자 생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 193) 우리는 이 짐승들을 멀리해야 한다. 사회에 수용되려면 자신을 통제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를 배워야 한다. 자기 통제력은 욕동과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이다. (중략) 만약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충동이 조절되는 것이라면 아이들에게는 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이 무엇인지 지침을 제공하되 강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p. 194)

하지만 저자는 '아무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교육방침은 자기통제력을 키우는 것이지만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을 어쩌면 평생 길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개인의 타고난 성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날까 악하게 태어날까

인간은 선천적으로 남을 돕는 경향이 있다. 같은 집단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거나, 돕기를 거절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위배된다. (p. 236) 생물학적으로 친사회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나, 닥치는 대로 돕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세계에는 여전히 영역, 자원, 사상을 둘러싼 집단 간의 갈들이 만연하다. 인간은 친사회적인 동물이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만 친절을 베푼다. (p. 237)

저자가 내린 결론은 성선설에 가깝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인간을 개인적 본성으로 파악했을 때 그렇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집단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을 보면 전혀 상반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언제쯤 풀려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도, 고문받는 다른 재소자들의 비명도 아닌 독방에서 홀로 보낸 4개월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절실했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교도관에게 오늘은 취조라도 받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p. 242)

이란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던 미국인 등산가의 인터뷰 내용은 코로나로 인한 격리 시대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그리고 이 울림이 큰 만큼 친사회성을 지닌 인류가 집단이 되었을 때 못할게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는 논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하다.

절박한 동료애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강조한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상호 작용을 위해 진화했고,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길들이기에 의지하게 되었다. 사회적 동물은 고립된 상태로는 잘 지내지 못한다. 인간은 집단 안에서 가장 오래 양육되고 생활하는 종이다. (p. 244) 평범한 사람에게서 잔인함을 불러일으킨 조건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와 '저들'을 구분한 상황의 치명성이었다. (p. 258)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 안할 일 아니 못할 일도 뭉치면 거침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때로는 폭력적인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길들여진 삶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반전이다. (중략) 의존성은 인간의 긴 어린 시절이 낳은 모든 신체적, 감정적 필요를 해결해 준다. (중략)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우리를 보는 타인의 시각과 연관되어 있다. 그 탐색은 사회적 동물만이 얻는 기쁨과 불행을 모두 가져온다. (p. 288) 개인주의든 집단주의든 궁극적으로 한 문화에서 무엇이 옳은지는 '타인의 마음'으로 검증된다. 내가 나의 성취를 '성공'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단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p. 290) 인간이 진화하는 내내 길들이기는 개인을 위한 다수의 힘을 제공했지만, 그렇게 인간을 번영하게 해준 길들이기가 이제 개인을 말살하겠다고 위협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너무 의존한 나머지 자급자족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더구나 이러한 상호의존은 아직 절정에 이르렀다는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다. 상호의존은 더 쉬운 삶을 제공하고 점점 더 정보 기술에 의지한다. (p. 299)

저자는 인간의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뇌를 설명함으로써 지금의 위기상황을 해결할 방법으로 '전지구적 평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우리'를 제시한다. 현대사회가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비해 개인화된 사회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타인의 시선은 더욱 의식하게 된 사회라는 점에서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더욱 커진 사회이기도 하다. 자가격리는 유유자적 할 수 없고 좋아요와 하트버튼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따로 떨어져 있으나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맹목적 추종의 모습을 보일때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뇌'는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찾고 공고히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 '전지구적 우리'가 되려면 결국 타노스가 지구방문을 해줄때가 되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씁쓸함에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화는 인간이 그러거나 말거나 늘 현재진행중이고 인간이 알거나 말거나 인간의 뇌또한 그렇다. 그 진화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우리'가 되고자 하는 노력에 그래도 좀더 희망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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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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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뇌인가, 선택인가

1974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은 몰랐지만 '스톡홀름신드롬'은 들어봤던 단어였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는 심리변화에 대해 '세뇌인지, 선택인지' 묻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실제 납치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니 그 이면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여러분은 보고서를 써야 해요. 이 모든 걸 다 읽어볼 시간은 없을 거에요. 그러나 이 엄청난 양의 기사들을 종합할 수 있어야 하죠!" 당신은 주어진 기간 안에 반드시 이 일을 마쳐야 하지만, 그 기간이 최대 2주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층계참에 서 있을때 방금 생각났다는 듯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군지는 아나요?" (p. 21)

프랑스의 작은 도시의 여학교에 영어 선생으로 온지 얼마 안된 미국인 젊은 여성 진 네베바는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의뢰를 받게 된다. 진 네베바 선생은 1975년 가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한 장을 써서 이 도시에 있는 빵집 두 곳에 붙여두었다.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쓰고 말할 수 있으며 2주일 동안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여학생을 급히 구합니다. 학생이 아닌 분은 사절합니다" 이 광고를 보고 세 명의 여학생이 면접을 보았고 비올렌이 합격연락을 받았다. 세명중 유일하게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낙담하고 있던 비올렌이었다.

당신은 비올렌이 생전 처음으로 만난 미국인이었습니다. (p. 29) 당신의 지시는 비올렌의 역할에 한층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p. 32)

이런 것들이 퍼트리샤 허스트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 미국 여성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도대체 언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일까? 만일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비올렌은 아예 처음부터 지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p. 49)

퍼트리샤 허스트는 1974년 2월 납치 당시 예술사를 공부하는 대학2학년생이었다. 미국의 최대 언론재벌 허스트가의 딸이었기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SLA는 몸값대신 극빈층에게 식량을 배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퍼트리샤는 녹음테잎을 보내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SLA의 요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뉴스에서는 온통 테러로만 표현되었다. 그리고 몇달 뒤 사상전향을 했다며 총을 메고 모습을 드러낸 퍼트리샤의 모습은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기사들과 퍼트리샤의 녹음기록들을 살펴가며 이 여성의 심리를 파악해보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수시로 던져지는 네베바 교수의 질문과 토론이었다. 프랑스 변두리 작은 마을에서 순진하고 순종적으로 자라온 여학생이었던 비올렌에게 네베바 교수의 모든 것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에밀리, 낸시, 앤절라, 커밀라. 비올렌은 망연스레 1974년 2월 14일자 일간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네 개의 이름을 베껴 썼지요. FBI가 신원을 확인한 공생해방군SLA단원들은 나이가 스물세살에서 스물아홉살 사이였습니다. (p. 50) 그들은 몸값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인질을 잡은 것입니다. 새로운 인질이란 바로 허스트가 소유의 일간지 독자들이었지요. SLA는 이 일간지들이 1면에 그들의 성명서를 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자기들의 주장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습니다. (중략) 한편 허스트씨도 자기 딸이 납치되었다는 기사 하나만으로 이렇게 많은 신문을 팔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p. 53) 당신 조수는 당신집 응접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 60)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을 알아갈수록 상황파악은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단순한 재벌가의 딸 납치 사건이 아니었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압축시킨 듯한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비올렌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공산주의, 빈부격차, 황색언론, 히피족, 여성의 역할 등 무엇하나 쉬운 주제가 없었고 무엇하나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조수의 역할이라기 보다는 학생처럼 느껴지는 업무들이었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납치는 모험 같기도 하고 탈주 같기도 합니다' (p. 63)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퍼트리샤의 납치사건은 알면 알수록 점점 더 페미니즘적인 문제의식을 건드리고 있었다.

비올렌이 맡은 단순한 조수의 역할은 당신이 그녀에게 퍼붓는 격한 단어의 무더기에 깔려 흔들리고 있었지요. (p. 83)

당신의 분노는 비올렌이 알고 있는 어른들의 분노와는 달랐습니다. (p. 85)

사실 진 네베바 교수는 학생시절 시위활동으로 학위를 박탈당했던 경력이 있었다. 이 경력이 새로운 관점의 보고서를 작성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져서 퍼트리샤의 변호인단에게 채택된 것이었다. 미국은 커녕 프랑스의 정치상황에도 무지한 비올렌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퍼트리샤의 기록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은 네베바 교수에겐 어쩌면 행운이었다. 네베바 교수는 비올렌을 통해 퍼트리샤를 새롭게 해석하고 비올렌은 네베바를 통해 알게된 퍼트리샤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게 되었다. 네베바 교수는 탄탄해져 가고 비올렌은 점점 더 세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둘다 자신들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최소 30년 형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한 여자 경찰이 그녀의 수감서류에 써넣기 위해 직업이 무엇인지 묻자 퍼트리샤는 "'도시게릴라'라고 써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녀는 도시게릴라였던 것입니다. (p. 123)

네베바 교수와 비올렌과 함께 퍼트리샤의 기록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다름아닌 퍼트리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된다. 가장 변화무쌍한 존재임에도 실체로서가 아니라 기록속에서만 존재하는 퍼트리샤의 목소리는 소설을 읽는 독자도 궁금해지게 만든다. 그녀는 왜? 혹은 세뇌일까, 선택일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진다.

당신은 비올렌을 채용한 바로 그날, 정확히 알아차렸지요. 비올렌은 당신이 뭘 알아내라고 했는지는 이해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신중한 이 젊은 여성을 당신 취향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책들만 읽는다며 비웃었지요. (p. 146) 비올렌은 마치 실험용 쥐처럼 번역하고, 버리고, 요약하고, 다시하고, 귀 기울여 듣고, 추측하라는 당신의 요구에 복종합니다. (중략) 비올렌은 언젠가 당신이 자신의 삶을 스쳐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듯, 당신이 그날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당신 옆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 당신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이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조수가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그녀를 교육한 것입니다. (p. 147)

퍼트리샤 허스트 의 납치사건을 통해 삶이 변한 세 여자인 진 네베바, 비올렌 그리고 작품속 화자 이 세명의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세명은 허트리샤 허스트의 후예?!이기도 하다.

한 신문기자가 동료기자에게 자기는 당혹스럽다고 털어놓았다고 썼습니다. '도대체 허트리샤 허스트의 죄목이 뭐지? 무장강도행위인가? 아니면 퍼트리샤의 메시지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견해인가? 그녀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건 그녀의 행위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의 전향 때문인가?' (p. 257)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도 점점 더 궁금해지고 의아해질 것이다. 도대체 퍼트리샤의 죄목이 무엇인지... 퍼트리샤는 잡혔고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허스트가가 낸 보석금으로 곧 풀려났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p. 291)

나는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했다. (p. 317)

이 말은 퍼트리샤 허스트가 한 말들이지만, '너무나 많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고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한' 사람은 결국 퍼트리샤 허스트가 아니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짧은 기간 자신에게 정해져 있던 삶을 일탈했던 퍼트리샤는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고 그녀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퍼트리샤 허스트에게 빠져들었던 세 명의 여성은 자신들의 삶이 송두리째 변했다. 그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은 17일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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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5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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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플롯, 스토리텔렝, 모방, 비극, 에피소드, 카타르시스 개념의 탄생

마음에 각인되는 완벽한 이야기 구성의 기술

고전을 좋아하다보니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새번역되어 나온 책을 몇권 읽어보게 됐는데 모두 다 좋았다. 이번 책도 역시 좋았다.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영역에서 박문재 번역은 앞으로도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충실한 해설은 늘 큰도움이 되고 있다.

인문학을 접하고 고전을 읽고 새로운 학문의 분야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런저럭 책을 잡다하게 읽었었다. 그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 도 있었다. 수사학 부분에서 꼬인 머리속이 풀리지 않은채 덧붙여 있는듯 짧게 이어진 시학은 읽으면서도 대충 넘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제대로 읽고 싶었다. 이번엔 머리 꼬이지 않게 시학부터 ㅎㅎ

일러두기 1. <시학>은 원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권에서는 비극과 서사시를, 2권에서는 희극을 다루었지만, 지금은 1권만 전해진다. 현재 <시학>은 26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 구분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어 판본을 편집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기> 첫번째부터 감회가 남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읽기전 <장미의 이름> 이라는 소설을 먼저 읽었었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스릴러 처럼 읽히는 그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숨겨졌던 비밀이 바로 '시학의 2권'에서 다룬 '희극' 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었다. 전해오지 않기에 여전히 알수는 없지만 시학1권을 읽으며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비극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았다.

흔히들 운율의 명칭에 '시인'이라는 말을 덧붙여, 비가시인, 서사시인 등으로 부르지만, 그러한 명칭은 그들이 모방을 행한 대상이나 방식이 아니라 사용한 운율에 따라 일률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의술이나 자연철학에 관해 글을 썼다고 해도 운문으로 썼다면,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행이다. (p. 11)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시인'이라는 개념은 지금의 개념과 무척 달랐다. 당대에 글을 쓰는 지식인이라면 거의 모두 시인이라 불릴만 했다. 플라톤의 철학서도 운문처럼 읽히기 때문에 비극의 위험성을 비판한 본인으로서는 싫겠지만 플라톤도 (당대의)시인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석13. '모방하는 사람'은 모방이 본질인 모든 예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인, 무용가, 화가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 예술은 사람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행위는 성격과 사상을 드러내는, 목적지향적이고 가치지향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그 가치는 사물의 본질에 부합하는 미덕과 부합하지 않는 악덕으로 구분된다.

이 책은 본문과 주석의 양은 거의 비등하다. 어쩌면 주석의 양이 더 많을지도?! 이러한 상세한 주석은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원전 번역에 상세한 주석 그리고 뒤에 붙은 해박한 설명은 현대지성클래식 시리즈의 큰 장점이다.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p. 14)

모방은 이렇게 수단과 대상과 방식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소포클레스의 모방은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의 모방과 동일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방하는 사람을 연기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와 동일하다. (p. 15)

이렇게 모방은 물론이고 선율과 리듬도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본능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즉흥적으로 모방했다가,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시가 출현한 것이다. (중략) 호메로스 이전에 쓰인 풍자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예로 들 작품이 없지만, 그때도 풍자시를 쓴 시인은 많았던 듯하다. (p. 19)

희극과 비극의 차이점에 대해 진지한 공감이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시학을 정리하면서 호메로스를 무척 많이 칭찬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과거의 작품들이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그런데 그때의 호메로스의 작품을 지금 우리도 여전히 가치있게 읽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리고 시학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당대의 온갖 학문분야에 대해 정리해놓았기에 지금의 학문들이 그 기초로 일어섰구나 하는 것이 '시학'을 통해 좀더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극은 양념을 친 온갖 언어를 곳곳에 배치해, 낭송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양념을 친 언어'는 리듬과 선율을 지닌 언어나 노래를 의미하고, '곳곳에 배치한다'는 어느 부분에서는 운문만 사용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다시 노래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p. 26~27)

여섯 구성요소(시각적 요소, 성격, 플롯, 대사, 노래,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나 사건을 구성하는 플롯이다. 비극은 사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극은 성격을 모방하려고 행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성격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비극의 목적은 행위와 플롯이고, 목적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더욱이 행위 없는 비극은 있을 수 없지만, 성격없는 비극은 있을 수 있다. (p. 28)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시학관련 지식을 총망라하여 정리하고 있긴 하지만 상세한 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책들도 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단어의미와 지금 의미의 격차가 커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과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시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역사가와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역사가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는 데 있다. (p. 35)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고결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주로 말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은 희극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희극에서는 개연성에 따라 플롯을 구성하고 나서 등장인물에게 그 플롯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중략) 반면에, 비극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고집스레 사용한다. 가능성이 있어야 설득력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능하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분명 가능하다. 가능성이 없다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p. 36)

역사가 보다 시인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그중에서도 플롯의 통일성과 개연성을 강조한다. 스토리는 플롯에 포함되는데, 이 두단어를 볼때마다 “스티븐 킹이 소설계의 롤링 스톤스라면, 딘 쿤츠는 비틀스다' 라는 홍보문구가 생각난다. 스키븐 킹은 자연스러운 스토리의 흐름을 강조하고 딘 쿤츠는 논리적인 개연성이 뚜렷한 플롯을 강조한다는 해설도 떠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플롯을 좀더 중요시여기는 편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논리가 더 흥미롭게 읽혀졌다.

가장 훌륭한 비극은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고,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한 사람이 행복했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일은 공포나 연민이 아니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악인이 불행을 겪다가 행보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비극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비극의 효과를 조금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긍할 수도 없고, 연민이나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 (p. 45) 결말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말은 앞에서 설명한 사람들이나 그들보다 나은 사람들의 악행이 아니라 큰 실수나 결함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p. 47) 따라서 시학 이론에 의하면, 그런식으로 플롯을 구성한 비극이 가장 훌륭하다. (p. 48)

그리스비극은 항상 깨달음을 남긴다. 공포와 연민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나면 현실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지침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성격은 지금의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결말에 대해서는 그리스비극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다양해졌지만 기본적 원리는 같다. 사람의 감정이 변하지 않아서랄까 다시말해 사람이 변하지 않아서랄까... 수천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사람은 변한게 없는 것같다. 역사를 읽어도 비극을 읽어도... 그랬다.

서사시는 연기가 필요 없는 교양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비극은 저속한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따라서 사람들은 비극이 이렇게 저속하다면 분명 서사시보다 열등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가를 접하면서, 먼저 그런 비난은 비극 자체가 아니라 배우의 연기에 대한 비난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p. 114) 아울러 비극도 서사시처럼 연기 없이 비극의 목적으 달성할 수 있다. 비극을 읽어보기만 해도 비극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략) 게다가 비극에는 서사시에 있는 요소가 모두 있고, 서로 결합하여 생생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음악과 시각적 요소라는 중요한 요소까지 갖추고 있다. (p. 115) 이렇게 비극은 이 모든 점에서뿐 아니라, 각각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과 관련해서도 서사시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비극은 자기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한다는 점에서 서사시보다 분명히 더 우월하다. (p. 116)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라는 학문을 정리한 것은 이 마지막 문장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였나 보다. '비극은 서사시보다 우월하다!'

이렇듯 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이었다. (p. 126) - 해제 中 -

역자는 '비극에서 사람의 행위나 사건을 모방하는 까닭은, 비극의 목적이 감정의 정화, 즉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서 감정을 정화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서 플롯이 가장 중요하며, 플롯은 철저하게 필연성과 개연성을 토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비극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시학이라는 학문을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했다면 심리학이 좀더 일찍 발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을 읽으면 이런 나의 궁금함이 해결될지도 모르지만 윤리학과 수사학과는 다른 심리학적 어떤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가졌었다면 하는... 여하튼, 얇아서 좋고 원전 번역이라 좋고 본문이해에 도움되는 자료가 많아 좋은, 여러모로 참 읽기 좋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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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 나의 알 수 없는 기분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처방전
야오나이린 지음, 정세경 옮김, 전홍진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뇌의 독감

인생의 문제 중 대부분은 뇌에서 시작한다

인생의 문제 중 절반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며, 다른 절반은 뇌가 우리에게 던져준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뇌과학의 어려운 내용도 쉽고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p. 7) -추천의 글 中-

'현대인에게는 뇌과학이 필요하다'는 추천사에 공감이 갔다. 심리학도 정신의학도 다른 학문에 비해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인데 그 학문들이 제대로 정립되기도 전에 '뇌과학'에 의해 다시 재정립해야할 시대가 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이제 마음의 문제라 여기던 심리학과 정신의 문제라 여기던 정신의학은 '뇌과학'에서 만나고 있는듯 하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뇌과학적 측면에서 심리문제와 정신질병을 다루고 있다.

우울증은 일반적인 기분저하나 슬픔 또는 즐겁지 않은 기분과는 다르다. 보통 우울은 불안을 동반한다. 우울증 환자 중에는 불안 문제를 겪는 사람이 많은데, 3분의 2에 이르는 우울증 환자가 불안장애의 임상 기준에도 부합한다. 불안 문제는 대부분 우울증이 발병하기 1~2년 전에 나타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증세가 뚜렷해진다. (p. 20) 우리가 우울중에 걸릴지 아닐지는 유전요인이 40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60퍼센트는 다양한 환경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p. 34) 여성의 정서적 건강에는 거주 조건이, 남성에게는 사회적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p. 37)

첫장에서는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다룬다. 우울증과 불안증과의 관계나 유전요인에 대한 내용은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의해 정서가 더 크게 좌우되는 성별이 남성이라는 점도 새로웠다. 여성보다는 오히려 남성이 혼자 살기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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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해야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p. 116)

다시말해 부모의 보살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이의 신경생물학적 특징과 행동의 특징에 영향을 준다. 또한 이런 특징은 유전자 발현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대를 거쳐 유전된다. (p. 123) 유아기의 경험은 대뇌 발달과 신경회로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며, 성인이 된 뒤에 스트레스와 역경에 대처하는 능력과 자기효능감을 결정한다. (p. 126)

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유전요인과 관련이 있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모두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지 않는것은 유전요인과 성장환경에 의해 누적된 개인의 성향이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은 대를 물려 이어지기에 긍정적으로 변화된 유전요인을 다음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양육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유전은 그대로 똑같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형되고 적응된 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내손자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아이의 기질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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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는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 (중략) 스웨덴에서 81만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연구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 가정에서 ADHD 발병률이 높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ADHD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ADHD의 여러 핵심 증상이 교육을 받는 햇수나 업무능력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ADHD환자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낮아지고, 그 결과가 다음 세대에게도 심리적으로 경제,사회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p. 187~188)

ADHD가 유전된다는 것도 새로웠지만, 환경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 마음한켠이 쓰려왔다. 질병은 유전된다. 그런데 그러한 유전은 사회적, 경제적 계층격차로 인해 어쩔수 없이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같은 질병도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이 다르다. 유전적 요인이 큰 질병의 경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유전될 확률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그 사람들의 유전자가 문제가 아니라 계층격차 때문임에도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안되는 것인데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종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기 덕분에 진화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적인 특징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기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다. 전사유전자를 가진 사람들 중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악마가 될 수 있지만 전쟁 시기에 살았다면 영웅이 됐을지도 모른다. (p. 232)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관련 책을 자주 읽는 편이다. 그런 책을 읽을때마다 과거에 자행됐던 잔혹함에 대해 진저리를 치곤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그런 사건들을 그런 전쟁들을 사이코패스와 연결지어 생각한건 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읽고보니 정말 그렇다. 잔혹한 시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그런 유전적 요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유전적 요인이 정도의 차이일뿐 아마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사이코패스중에서도 양육환경이 좋았다면 정상인으로 자라나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역시 중요한건 성장기의 환경과 경험과 교육이다.

우리의 뇌는 30세가 돼야 안정을 찾으며, 이때 우리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p. 240)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수록 생길 수 있는 변이의 양은 어머니의 네 배에 이른다. (p. 242) 내 주변에서 아이의 조기교육 문제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심리학과 뇌과학을 배운 사람들뿐이다. 아동기는 사람의 일생에서 뇌의 가소성이 가장 강한 시기다. 이 단계에서는 뇌 신경세포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이 빠르게 일어나고 쓸모없는 신경 연결은 빠르게 끊어진다. 이렇게 민감한 단계에는 아이의 감정이 뇌 발달에 영향을 주기 쉽다. (p. 244)

아이가 어릴때부터 경쟁관계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인성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조기교육 보다 자유놀이를 추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참 요즘 사회에선 부모가 선택하기가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여하튼, 뇌가 30세가 돼야 성숙된다는데 과거 20세도 되기 전에 결혼하고 어른노릇해야 했던 조상님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아이낳는 시기에 대해 대부분 엄마의 나이를 문제삼곤 하는데 유전자 변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엄마보다 아빠의 나이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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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뇌와 몸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부위라 굳게 믿었다. 정신질환과 신체질환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울증은 기분이 나쁜 것일뿐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몸과 뇌에 관한 지나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p. 324)

이 책의 마지막장은 '정신과 신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뇌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예를들어, 위장이 손상되면 뇌세포도 사라지고,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뇌가 조종당한다고 한다. 심리, 정신, 신체 의 문제들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부분부분들의 연결은 뇌과학의 연구로 인해 더 빨리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보인다. 심리적 감정적 정신적 문제를 느꼈을때 위로와 힐링을 얻을 수 있는 책들도 좋겠지만 최신 연구결과를 담은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소소한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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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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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과 민속학을 가로질러 한국적 서사로 승화한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가

남긴 한글로 쓰여진 단 한 권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모노그래프'

생활에선 죽은 언어이지만 학문에선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언어인 라틴어를 우리는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우리나라 속담만큼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카르페디엠' 과 '메멘토 모리' 가 아닐까. '현재에 충실하라' 와 '죽음을 기억하라' 는 이 문구는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양극한을 알려주고 있는 문구이기에 언어를 떠나서 의미적으로 모두에게 각인되는 것 같다. 삶과 죽음으로.

'한국학의 거장' 이라는데 '김열규 라는 이름 석자는 내게 낯설었다. 그 이름 석자보다도 더 낯설었던 것이 '한국학'이라는 단어였다. 그런... 학문이... 있었나?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기에 궁금해진 책이기도 했지만,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똒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 뿐이다. 잘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맞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8)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구 하기 때문이다. (p. 10)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p. 12)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p. 14) 이 효성에는 짙은 자책감이 그늘을 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 21) '열녀'라는 관념에는 '늘'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죽음이 따라붙고 있다. (p. 23) 효와 열은 때로 효열이라고 한 묶음으로 일컬어졌다. (중략) 삶에서 퇴거할 수 없는 죽음, 그런 묘한 죽음이 있게 된 것이다. (p. 24)

<프롤로그 -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저자는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한 학자였다고 한다. 활발한 연구 활동과 저서를 남기고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 인생 60년에 대해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의 거장'이라고 수식어구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한국인들의 '죽음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공과 연륜이 빚어낼 통찰이 궁금해지게 하는 서설이었다.

'죽음' 이라는 것은 생명을 지난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간'만의 개념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같은 땅에서 오랜 세월 역사를 쌓아온 한국인만의 독특한 '죽음론' 을 고찰한다는 점도 의미있어 보였다. 한국땅에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것일까?

죽음이란 그 자체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타자라는 것이 절망스러운 것이다. 내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 최후의 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 그건 우리가 경험할 최대의 아이러니다. 그렇다. 죽음은 우리들 몫인 가장 무망한 아이러니다. (p. 42) 죽음으로 해서 생은 에누리 없이 일회로 제약되고 만다. 한데 이 죽음으로 한계지워지는 생의 일회성이야말로 생의 진지함이며 집요함의 혹은 열정의 근거라고 릴케는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p. 47)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올 것임을 알고 있는 존재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죽음을 사고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존재다. (p. 49) 영원한 미래의 시제, 영원한 미래의 공간 속으로 옮겨앉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피안이란 것을 생각해냈다. (p. 54) 그래서 삶이 적극적인 뜻을 지닌다고 하면, 영원한 미래시제의 그 영토까지 다다를 차표를 얻어내거나, 채비를 하는 절차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p. 55) 이때 큰 함정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 사뭇 쓰잘것없는 것이거나 하잘것없는 계기에 불과하게 내버려져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p. 60) 죽음 때문에 우리가 삶을 등져서는 안 된다. 아니 단연코 그 거꾸로라야 한다. (중략) 죽음 때문에 우리들은 삶에 달라붙어야 한다. 그 죽음으로 해서 잃어질 삶이라면, 아니 결정적으로 잃어지게 되어 있는 게 삶이라면 우리들은 한사코 그 삶에 마음을 붙여야 하고 사랑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p. 63)

저자가 '죽음' 에 대해 일반적인 고찰을 위해 선택한 수단은 문학이었다. 특히 시를 통해 (그중에서도 릴케의 시와 윤동주의 시를 통해) 죽음의 상징성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되고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음을 더 제대로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시작으로 하여 그 연장선에서 이제 '한국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인의 죽음을 일반론적인 죽음과 꼬집에 비교해가면서 얘기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필자로서는 너무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다. 또한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개별론을 하자는 그 말이 다른 민족들은 절대로 못 가진, 그래서 딱 한국인만이 갖는 죽음만을 족집게로 집어내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 또한 필자에게는 과분하게 힘들고 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굳이 한국인의 죽음을 얘기하자고 나선 것은, 한국 민속 현장과 민간신앙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한국적 현장 속의 죽음을 얘기하고자 하는 기도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인만의 죽음이란 뜻으로 사뭇 좁혀서 한국인의 죽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민속과 민간신앙 현장에 있는 죽음이 지닌 그 한국적 현상성 때문에 한국인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자는 것뿐이다. (p. 75~76)

저자가 미리 당부하듯이 '한국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학문적 갈래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설명은 한국의 민속학적 증거들을 기반으로 한국인이 과거에 어떻게 죽음을 생각했었는지 그 기원을 탐구해보는 과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말미에 저자가 덧붙였듯 그 탐구과정 또한 계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한국인이 의식했던 '죽음'의 단편들만을 모아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신화적으로도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수 있을 터였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여성, 그리고 '타(다른곳, 다른 물건, 다른 사람 등)' 또는 낯선 것과 함께 '3대 부정'이라고도 부를 만한 것이다. (p. 106) 앞은 항시 남이고 뒤가 북이고 보면, 사방행위, 인체방위, 지세방위 등이 세 겹으로 엉기게도 되는 것이다. 알기 쉽게 요약하면, 앞=들=남, 뒤=골짝=북과 같이 묶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산을 앞산이라고 하고, 북곡을 뒷실이라고 불고 있음을 듣게 된다. (p. 117) 산 사람의 머리는 동네 아래로 향하고, 죽은 이는 그 머리를 위를 향해서 두고 있다. 그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다. (p. 119) 진북이나 자북이 기준이 된 동향이 아닌 것이 원삼국시대, 신라의 죽은 이들의 머리 방향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그때그때 계절에 따라 옮아가는 태양 중심의 방위에 의거한 것이다. (p. 129)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목숨 어린 방위로 향하여 살았던 그 동남의 방위에다 옛신라인들은 죽은 이를 자리잡게 한 것이다. 밝고 따뜻한 방위에서 잠들게 한 것이다. (p. 133) 산봉우리의 방위로 누운 시신의 머리 방향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지어야 할 몸시늉이다. (p. 138) 상고대의 한반도 북쪽사회에서는 중장제가 시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p. 139) 뼈가 영혼의 참다운 집이라면, 어차피 쉽게 삭을 살은 빨리 없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p. 140) 서해안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는 초분이 있었다. (p. 145) 영혼의 구원이 없는 저승관은 종교론적으로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불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이란 현실에서 볼 때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 한국인의 이른바 현실주의, 종교적 믿음에 있어서의 기복의 현실주의는 실상 이 저승관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 161)

한반도에서의 고대묘지문화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관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연지형인 산봉우리가 꼭 한방향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죽은자의 머리 방향은 동서남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신라인의 방위는 독특했다. 해바라기라... 신라금관에서 상징된 푸나무와 사슴뿔 이야기는 더욱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와 구분짓게 하는 것이라서 고고학관련 책에서 읽은 유목민족설이 생각나기도 했다. '중장제'와 '초분'을 통해 '뼈'를 중시하는 것은 비좁은 땅에 묘를 세울 수 없는 경제성을 따지기 전에 있었던 저승관이라는 점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했다. '뼈를 묻겠다' 라는 결심이 우리나라 언어습관에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저승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먼 과거의 저승관이 현재 한국에 유래된 외국종교에서조차 한국인들은 기복신앙으로 믿음을 형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기도 했다. 단옹관과 처용무, 심청전, 학연화대, 무령왕릉 그리고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연말 나례행사까지도 그러한 고대의 '죽음관'이 배어져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한데 이들 세 가지 죽음은(안락사, 뇌사, 자연사) 한결같이 의사에게 맡겨진 죽음이다. 선택도 판단도 모두 의학에 의탁되어 있다. 그만큼 전적으로 생리현상화된 죽음이 이제 사뭇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물리와 생리에 속할 뿐이다. (p. 182) 규모가 클수록 겉이 화려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소실의 효과, 지워없애기의 효능은 커지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 장례라는 절차가 진행된다. 기왕의 죽음을 한 번 더 완벽하게 죽이기 위한 짓이다. 이제 죽음이 죽었다. (p. 192) 오늘의 죽음에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그에 수반되어서 오늘의 죽음에는 통과의례가 없거나 불완전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게 된다. (중략)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통로가 폐절되고 만다. (p. 231) 거기에는 우리의 바리데기 신화도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도 보다 더 거슬러올라가서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도 있을 수 없다. (p. 232)

과거의 현재의 죽음관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해 저자가 풀어낸 장레문화의 변화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승화의 단계'를 거쳐 조상신化 했다. 그러고보니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어 신이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아주 드문일이었던데 반해 우리네 문화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신이 될 수 있었다. 그 신이 귀신이건 조상신이건 여하튼 '신'이 될수 있었구나 하는 것이 이 책이 느끼게 한 또다른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여하튼, 과거엔 죽음이 죽음이 아니었으나 현재는 죽음도 죽어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한편, 고조선 신화에서의 '웅녀' 의 상징성과 '바리데기'의 신화적 의미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고조선의 웅녀는 단순히 곰에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바리데기공주는 단순히 동화속 공주가 아니었다. 우리네 신화도 그리스신화나 수메르신화 가 품은 문제의식과 이상향을 충분히 품어안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조차 없다고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신화 곧 풀이는 신의 근본과 내력에 관한 얘기다. 신화는 '풀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p. 284) 동화속의 수탐이 궁극적으로는 주인공 자신의 개인적·세속적 영달에 이르러 마무리지워지고 있음에 비해 바리데기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구제, 나아가서는 남들의 구제, 인간 일반의 구제에까지 그 수탐의 여행은 작용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탐의 경로가 천문학적이고 우주론적이다. 우주적인 규모에서 인류적 범주에 걸친 수탐을 행함에 있어 바리데기는 자신이 신화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리데기는 신화적 인간 구원자다. (p. 290) 한국 민속에서도 볼 수 있는 약물사상은 이 민담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범세계적인 이 얘기는 그 원천도 어지간히 먼 과거로 소급한다. 바빌로니아 신화에는 죽음 탐무즈를 위해 이슈타르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략) 물론 우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낳은 이슈타르 얘기와 바리데기 신화를 직접 맞대놓고 그 양자간의 관계를 운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얘기가 이른바 '오르페우스'얘기로 유형화된다. 그 분포가 구라파 전역은 물론 아시아를 포괄하고 북미대륙의 원주민 세계에까지 퍼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리데기 신화의 특색이 단순히 한국문화라는 범역 안에서만 해명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p. 291)

수메르나 바빌로니아까지 소급하는 'E 80' 이라는 '오르페우스' 모티브는 해당지역의 샤머니즘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신화 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신화가 아니라 동화로 왠지 그 격을 낮추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형적 모티브 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같은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다. 어디가 먼저이고 무엇이 더 다채로운지 를 비교하기보다 '모티브'적으로 '원형적'으로 그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면 한국신화는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이다. 이 책의 '4부' 내용은 <새롭게 만나는 한국 신화> 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죽음이 떠나감이나 나그네길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바리데기'는 말해주고 있다. 생명의 꽃이 피고 목숨의 물이 샘솟는 곳이 저승이다. 그곳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원천이고 본향이다. (중략) 그것은 불행히도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들이 놓쳐버린 죽음이다. '돌아가는 죽음', '복귀하는 죽음'은 '떠나가는 죽음'에 떠밀려서 죽고 만 셈이다. (p. 310)

우리네 민속과 신화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고유의 '관념'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어떤 관념이 더 나은지 판단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변화와 상실의 추이를 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현재의 죽음관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니까.

사람끼리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들기 마련이다. 다른 객체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낯이 익는다는 것, 눈에 자주 든다는 것, 그것은 정붙이기의 전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정을 붙이자면 그리하여 죽음과의 친화를 일구어 내자면 죽음과 자주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삶이 죽음과 정을 붙여야 한다. (p. 347)

고루 살피지는 못했다. 몇 갈래의 항목으로 우리들의 죽음을 살폈으나 항목마다 구석구석 아쉬움이 남아 있고, 다루지 못한 큰 항목도 남겨져 있다. (중략) 이런 결격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옛 죽음의 국면에 관해 말하면서, 죽음을 거울 삼아 드러날 뻔한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추어내는 것에 유념하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옛 죽음이 오늘에 끼친 그림자 같은 것도 조금씩 들여다보고자 했다. (p. 366)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p. 369)

글을 읽으며 시대를 알 수 없었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가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가늠이 되야 좀더 잘 공감될 것 같았다. 검색해보니 2001년에 나왔던 책이 20년만에 다시 새옷을 입고 나온 것 같다. 한국인의 저승관이 죽음론이 그 20년간 그닥 변한것 같지는 않다. 저자의 글은 고(古)어체의 느낌을 주지만 현대어로 읽는데 무리는 없었다.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저자의 통찰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메멘토 모리'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 아니겠는가. 잘 살고 싶은 만큼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시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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