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세뇌인가, 선택인가

1974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은 몰랐지만 '스톡홀름신드롬'은 들어봤던 단어였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는 심리변화에 대해 '세뇌인지, 선택인지' 묻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실제 납치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니 그 이면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여러분은 보고서를 써야 해요. 이 모든 걸 다 읽어볼 시간은 없을 거에요. 그러나 이 엄청난 양의 기사들을 종합할 수 있어야 하죠!" 당신은 주어진 기간 안에 반드시 이 일을 마쳐야 하지만, 그 기간이 최대 2주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층계참에 서 있을때 방금 생각났다는 듯 물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군지는 아나요?" (p. 21)

프랑스의 작은 도시의 여학교에 영어 선생으로 온지 얼마 안된 미국인 젊은 여성 진 네베바는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의뢰를 받게 된다. 진 네베바 선생은 1975년 가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한 장을 써서 이 도시에 있는 빵집 두 곳에 붙여두었다. '매우 유창하게 영어를 쓰고 말할 수 있으며 2주일 동안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여학생을 급히 구합니다. 학생이 아닌 분은 사절합니다" 이 광고를 보고 세 명의 여학생이 면접을 보았고 비올렌이 합격연락을 받았다. 세명중 유일하게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낙담하고 있던 비올렌이었다.

당신은 비올렌이 생전 처음으로 만난 미국인이었습니다. (p. 29) 당신의 지시는 비올렌의 역할에 한층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p. 32)

이런 것들이 퍼트리샤 허스트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 미국 여성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도대체 언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일까? 만일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비올렌은 아예 처음부터 지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p. 49)

퍼트리샤 허스트는 1974년 2월 납치 당시 예술사를 공부하는 대학2학년생이었다. 미국의 최대 언론재벌 허스트가의 딸이었기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SLA는 몸값대신 극빈층에게 식량을 배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퍼트리샤는 녹음테잎을 보내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SLA의 요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뉴스에서는 온통 테러로만 표현되었다. 그리고 몇달 뒤 사상전향을 했다며 총을 메고 모습을 드러낸 퍼트리샤의 모습은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기사들과 퍼트리샤의 녹음기록들을 살펴가며 이 여성의 심리를 파악해보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수시로 던져지는 네베바 교수의 질문과 토론이었다. 프랑스 변두리 작은 마을에서 순진하고 순종적으로 자라온 여학생이었던 비올렌에게 네베바 교수의 모든 것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에밀리, 낸시, 앤절라, 커밀라. 비올렌은 망연스레 1974년 2월 14일자 일간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네 개의 이름을 베껴 썼지요. FBI가 신원을 확인한 공생해방군SLA단원들은 나이가 스물세살에서 스물아홉살 사이였습니다. (p. 50) 그들은 몸값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인질을 잡은 것입니다. 새로운 인질이란 바로 허스트가 소유의 일간지 독자들이었지요. SLA는 이 일간지들이 1면에 그들의 성명서를 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자기들의 주장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습니다. (중략) 한편 허스트씨도 자기 딸이 납치되었다는 기사 하나만으로 이렇게 많은 신문을 팔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p. 53) 당신 조수는 당신집 응접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 60)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을 알아갈수록 상황파악은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단순한 재벌가의 딸 납치 사건이 아니었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압축시킨 듯한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비올렌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공산주의, 빈부격차, 황색언론, 히피족, 여성의 역할 등 무엇하나 쉬운 주제가 없었고 무엇하나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조수의 역할이라기 보다는 학생처럼 느껴지는 업무들이었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납치는 모험 같기도 하고 탈주 같기도 합니다' (p. 63)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퍼트리샤의 납치사건은 알면 알수록 점점 더 페미니즘적인 문제의식을 건드리고 있었다.

비올렌이 맡은 단순한 조수의 역할은 당신이 그녀에게 퍼붓는 격한 단어의 무더기에 깔려 흔들리고 있었지요. (p. 83)

당신의 분노는 비올렌이 알고 있는 어른들의 분노와는 달랐습니다. (p. 85)

사실 진 네베바 교수는 학생시절 시위활동으로 학위를 박탈당했던 경력이 있었다. 이 경력이 새로운 관점의 보고서를 작성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져서 퍼트리샤의 변호인단에게 채택된 것이었다. 미국은 커녕 프랑스의 정치상황에도 무지한 비올렌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퍼트리샤의 기록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은 네베바 교수에겐 어쩌면 행운이었다. 네베바 교수는 비올렌을 통해 퍼트리샤를 새롭게 해석하고 비올렌은 네베바를 통해 알게된 퍼트리샤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게 되었다. 네베바 교수는 탄탄해져 가고 비올렌은 점점 더 세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둘다 자신들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최소 30년 형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한 여자 경찰이 그녀의 수감서류에 써넣기 위해 직업이 무엇인지 묻자 퍼트리샤는 "'도시게릴라'라고 써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녀는 도시게릴라였던 것입니다. (p. 123)

네베바 교수와 비올렌과 함께 퍼트리샤의 기록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다름아닌 퍼트리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된다. 가장 변화무쌍한 존재임에도 실체로서가 아니라 기록속에서만 존재하는 퍼트리샤의 목소리는 소설을 읽는 독자도 궁금해지게 만든다. 그녀는 왜? 혹은 세뇌일까, 선택일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진다.

당신은 비올렌을 채용한 바로 그날, 정확히 알아차렸지요. 비올렌은 당신이 뭘 알아내라고 했는지는 이해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신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신중한 이 젊은 여성을 당신 취향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책들만 읽는다며 비웃었지요. (p. 146) 비올렌은 마치 실험용 쥐처럼 번역하고, 버리고, 요약하고, 다시하고, 귀 기울여 듣고, 추측하라는 당신의 요구에 복종합니다. (중략) 비올렌은 언젠가 당신이 자신의 삶을 스쳐지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듯, 당신이 그날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록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당신 옆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 당신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이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조수가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그녀를 교육한 것입니다. (p. 147)

퍼트리샤 허스트 의 납치사건을 통해 삶이 변한 세 여자인 진 네베바, 비올렌 그리고 작품속 화자 이 세명의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세명은 허트리샤 허스트의 후예?!이기도 하다.

한 신문기자가 동료기자에게 자기는 당혹스럽다고 털어놓았다고 썼습니다. '도대체 허트리샤 허스트의 죄목이 뭐지? 무장강도행위인가? 아니면 퍼트리샤의 메시지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견해인가? 그녀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건 그녀의 행위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의 전향 때문인가?' (p. 257)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도 점점 더 궁금해지고 의아해질 것이다. 도대체 퍼트리샤의 죄목이 무엇인지... 퍼트리샤는 잡혔고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허스트가가 낸 보석금으로 곧 풀려났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p. 291)

나는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했다. (p. 317)

이 말은 퍼트리샤 허스트가 한 말들이지만, '너무나 많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고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한' 사람은 결국 퍼트리샤 허스트가 아니었다.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짧은 기간 자신에게 정해져 있던 삶을 일탈했던 퍼트리샤는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고 그녀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퍼트리샤 허스트에게 빠져들었던 세 명의 여성은 자신들의 삶이 송두리째 변했다. 그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은 17일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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