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 -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인류 행동의 모든 것
브루스 후드 지음, 조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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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토록 자가 격리에 괴로워했나

그 해답은 바로 인간의 작아진 뇌에 있다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인류 행동의 모든 것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 라는 문장을 보면 뇌가 계속 작아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 읽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책뒤표지에서 쓰여있듯이 200만년 가까이 지속된 인류의 거대한 진화사에서 인류의 뇌는 점점 커져왔다. 그러다 약2만년 전 인간의 뇌가 돌연 작아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작아져 왔다는 것이 아니라 커지던 뇌가 더이상 커지지 않고 오히려 작아졌다는 의미다. 이 책의 원제는 'The Domesticated Brain' 즉 '길들여진 뇌' 이다. 따라서 원제에 보다 가까운 표현이라면 '인간의 작아진 뇌'가 더 적절한 제목일 수 있겠다.

지난 2만년 동안 인간은 테니스공 하나 정도의 뇌를 잃었다. 선사시대의 인류 화석을 들여다봤더니 현생 인류의 조상은 뇌가 훨씬 컸다. 인류가 진화하는 동안 뇌는 전반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현생 인류의 뇌가 작아졌다는 사실은 분명 의외의 발견이다. (p. 7) 인간의 뇌가 작아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지만 적어도 이 사실로 미루어 뇌와 행동, 지능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도발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p. 8)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들릴지 모르는 가설이 있다. 바로 '인간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p. 9)

'왜 인간의 뇌는 줄어들었는가' 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명확히 밝힌다. 인간의 뇌가 줄어든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였기 때문이라고. '인간은 보다 넓은 협력 관계 속에서 모여 살기 위해 자신도 길들이기 시작했다. 단 인간의 경우는 '자기 가축화'라고 볼수 있는데, (중략) 인간은 더불어 사는 문화와 관습이 발명된 이후 스스로 길들여 왔다고 볼 수 있다. (p. 10)' 라는 문장을 뇌과학적으로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몸에 비해 뇌를 천천히 발달시키는 유전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는 기간도 길어졌고, 이 기간에 아이들의 기질을 조정하고 사회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칠 메커니즘이 필요해졌다. 정착 사회에서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평화롭게 사는 이들이 번식에 성공했으며, 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문화를 창조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인간의 지능이 단기간에 향상되었기 때문에 현대 문명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자신을 길들이며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과 지식을 발전시키면서 형성되었다. 길어진 유년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도 유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족 안에서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시간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렇듯 집단 지성은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인간은 더 똑똑해지지 않고서도 지식을 공유한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배웠다. (p. 15)

문명의 역사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가르고 석기시대와 청동기/철기 시대를 가르는 중요 기준은 농경과 정착생활이었다. 하지만 괴페클리테페의 유적발굴로 기존의 문명발달사는 커다란 물음표에 직면했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문명의 발달사도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 시대에 인류의 발달 또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싶다. 직립보행을 하고 뇌가 발달하면서 똑똑해져서 인류가 사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모여살기 위해 뇌를 줄이면서까지 스스로를 길들여온 것이라는 발상은 신선하고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저자는 이 발상을 뇌과학적인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왜 집단이 그렇게 중요하고,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신경 쓸까? 이 책은 '인간의 뇌가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인간의 뇌는 우리를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도록 진화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지각 능력과 이해의 기술이 필요하다. 또 사회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생각과 행동도 바꾸어야 한다. (중략) 우리의 뇌는 거대한 집단에서 협력하고 소통하며, 자녀에게 문화를 물려주기 위해 진화했다. 인간의 유년기가 그렇게 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20)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포유류 동물들은 태어나자 스스로 걷고 움직여 어미젖을 빤다. 하지만 인간의 아기는 오랜 돌봄이 필요하다. 이 오랜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류가 모여살게 되었다는 상식을 깨고 사회적 존재로 키우기 위해 오랜 돌봄이 필요하도록 태어났다는 주장이 그럴법했다. 인류의 진화, 뇌발달, 아동발달에서 유전학, 신경과학, 사회심리학까지 망라하며 '길들여진 뇌'를 설파하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인류의 진화를 새롭게 볼수 있는 프레임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모든 문화에는 출산, 사춘기, 결혼, 죽음처럼 인생의 큰 변화를 기념하는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의 삶에 구두점을 찍고, 종종 신앙과도 관련되어 있다. 예식 자체는 대개 논리나 개연성이 없어 난해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각 식에 적용할 수 있는 인과법칙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예식 위반'이다. 즉 예식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 자체가 예식에 힘을 부여한다. (p. 96) 아이들은 사람들이 하는 행위 중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p. 97)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지키고자 하는 인간만의 '예식'들이 있다. 이것이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도 있을 듯 하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공막이 큰 인간의 눈은 늘 상대방을 살펴보도록 진화한 결과이다. 서로서로 따라하면서 집단의 결속력을 높여갔다. 집단이 커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사회적 동물이 되어온것 같기도 하다.

감각에서 문화에 이르는 모든 사회 매커니즘은 자연선택을 통해 처음부터 신생아의 뇌에 새겨져 있지만 이는 이후에 문화적 환경 안에서 조직되고 운영되는 다층적 체계를 형성한다. 이 시스템은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도구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로 묶은 다른 매커니즘도 있다. 우리는 관심과 흥미 이상으로 감정을 공유한다. (p. 10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동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은 난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전이 먼저인가, 환경이 먼저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통제한다고 믿는다.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은 있어도 여전히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행동의 주체이자 생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 193) 우리는 이 짐승들을 멀리해야 한다. 사회에 수용되려면 자신을 통제하고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를 배워야 한다. 자기 통제력은 욕동과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이다. (중략) 만약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충동이 조절되는 것이라면 아이들에게는 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이 무엇인지 지침을 제공하되 강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p. 194)

하지만 저자는 '아무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교육방침은 자기통제력을 키우는 것이지만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을 어쩌면 평생 길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개인의 타고난 성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날까 악하게 태어날까

인간은 선천적으로 남을 돕는 경향이 있다. 같은 집단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거나, 돕기를 거절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위배된다. (p. 236) 생물학적으로 친사회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나, 닥치는 대로 돕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세계에는 여전히 영역, 자원, 사상을 둘러싼 집단 간의 갈들이 만연하다. 인간은 친사회적인 동물이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만 친절을 베푼다. (p. 237)

저자가 내린 결론은 성선설에 가깝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인간을 개인적 본성으로 파악했을 때 그렇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집단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을 보면 전혀 상반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언제쯤 풀려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도, 고문받는 다른 재소자들의 비명도 아닌 독방에서 홀로 보낸 4개월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절실했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교도관에게 오늘은 취조라도 받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요" (p. 242)

이란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던 미국인 등산가의 인터뷰 내용은 코로나로 인한 격리 시대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그리고 이 울림이 큰 만큼 친사회성을 지닌 인류가 집단이 되었을 때 못할게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는 논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하다.

절박한 동료애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강조한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상호 작용을 위해 진화했고,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길들이기에 의지하게 되었다. 사회적 동물은 고립된 상태로는 잘 지내지 못한다. 인간은 집단 안에서 가장 오래 양육되고 생활하는 종이다. (p. 244) 평범한 사람에게서 잔인함을 불러일으킨 조건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와 '저들'을 구분한 상황의 치명성이었다. (p. 258)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 안할 일 아니 못할 일도 뭉치면 거침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때로는 폭력적인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길들여진 삶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반전이다. (중략) 의존성은 인간의 긴 어린 시절이 낳은 모든 신체적, 감정적 필요를 해결해 준다. (중략)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우리를 보는 타인의 시각과 연관되어 있다. 그 탐색은 사회적 동물만이 얻는 기쁨과 불행을 모두 가져온다. (p. 288) 개인주의든 집단주의든 궁극적으로 한 문화에서 무엇이 옳은지는 '타인의 마음'으로 검증된다. 내가 나의 성취를 '성공'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단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p. 290) 인간이 진화하는 내내 길들이기는 개인을 위한 다수의 힘을 제공했지만, 그렇게 인간을 번영하게 해준 길들이기가 이제 개인을 말살하겠다고 위협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너무 의존한 나머지 자급자족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더구나 이러한 상호의존은 아직 절정에 이르렀다는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다. 상호의존은 더 쉬운 삶을 제공하고 점점 더 정보 기술에 의지한다. (p. 299)

저자는 인간의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뇌를 설명함으로써 지금의 위기상황을 해결할 방법으로 '전지구적 평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우리'를 제시한다. 현대사회가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비해 개인화된 사회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타인의 시선은 더욱 의식하게 된 사회라는 점에서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더욱 커진 사회이기도 하다. 자가격리는 유유자적 할 수 없고 좋아요와 하트버튼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따로 떨어져 있으나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맹목적 추종의 모습을 보일때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뇌'는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찾고 공고히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 '전지구적 우리'가 되려면 결국 타노스가 지구방문을 해줄때가 되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씁쓸함에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화는 인간이 그러거나 말거나 늘 현재진행중이고 인간이 알거나 말거나 인간의 뇌또한 그렇다. 그 진화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우리'가 되고자 하는 노력에 그래도 좀더 희망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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