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향기 강석기의 과학카페 10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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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 그 열번째 책

당신을 취하게 하고 홀리게 한 과학의 총집합

십년 동안 매년 한 권씩 꾸준하게 과학카페 글을 책으로 냈다는데 나는 열번째 책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아주 예전에 이문세의 콘서트에 갔을 때 (내 생에 첫 콘서트 관람이었는데도) 이문세가 자신이 이 컨셉으로 백번째 하는 콘서트라며 처음 온 사람 손들라고 했을때 번쩍 들었다가 생각보다 그 수가 많지 않아 놀라워하며 스스륵 내렸던 기억이 난다. 십년만에 처음 알게 된 이 책에 대해서도 그런 아쉬움이 들려나 ㅎㅎ

저자가 과학전문기자 였다가 과학전문작가 인 만큼 책은 전반적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최근 이슈부터 화학, 신경과학, 의학, 환경, 천문학, 물리학, 생명과학, 인류학 등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어서 과학정보는 매년 저자의 과학카페 시리즈를 한권씩 읽으면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책의 인쇄상태가 훌륭했다. 번들거리지 않는 종이이면서도 다양한 자료의 컬러 및 작은 글씨 까지 잘 보여서 꼼꼼한 편집에 일단 박수를 쳐주고 싶은 책이었다.

아무튼 두 백신 모두 의학사의 한 획을 긋는 의약품이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발전한 뒤 채1년이 안 된 시점에서 개발에 성공한 데다 최초의 'RNA 백신'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쓰는 생백신이나 사백신 같은 기존 방식을 제치고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유형의 백신이 가장 먼저 (긴급이기는 하지만) 승인을 받아 현장에 투입됐다는 건 현대과학의 위대한 성취다. (p. 15)

첫 이슈는 코르나 백신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mRNA 백신 두 가지는 화이자 와 모더나 백신을 말한다. 이 두 백신은 아스트로제네카 백신 과 얀센 백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백신이라고 하면 저자 말마따나 생백신이나 사백신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연결매체인 mRNA 를 이용해서도 백신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웠다. 그리고 내가 백신을 선택해서 맞을 수 있다면 화이자 나 모더나 백신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책 자체가 최신 과학정보를 폭넓고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 배우게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은,

언어 정보의 핵심인 단어는 좌뇌에서, 음악 정보의 핵심인 멜로디는 우뇌에서 주로 처리한다는 것, 세포고기(=배양육)에 대한 내용, 새로운 파란색 안료를 만들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 파란빛은 우울감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낮의 파란빛은 오히려 우울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즉 타이밍의 문제라는 것), 하루에 25cm씩 자라 침수속에서도 길게 자라는 '심수벼' 에 대한 내용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책의 과학적 내용과는 별개로 인상적인 내용이 심리학·신경과학 챕터에 있었는데 심인성 발열에 대한 예시였다.

소녀는 왜 학교에만 가면 열이 났을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녀는 온순하고 차분한 모범생 스타일로 등교를 거부하는 불량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을 한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소녀는 학교생활을 좋아했지만, 신체장애가 있는 친구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오카 교수는 부모에게 아이의 전학을 권유했고 학교를 옮긴 뒤에는 등교 발열 증세가 사라졌다. (p. 92)

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선생님이나 학교측과 상의한 게 아니라 그냥 전학을 갔다고?? 그럼 그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상담자였다면 뭐라고 조언해주었을까?? 이것이 과연 심신의학과 전문교수가 권해줄만한 방법인가;;;;

'심인성 발열은 사람뿐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은 포유류와 조류에서도 관찰된다. 즉 진화적으로 보존된 현상으로, '투쟁 토피 반응'의 하나로 설명된다. (p. 92)' 라는 내용은 크게 새로울 건 없는 스트레스 반응으로 이해됐지만 예시가 참... 일본사회는 이런식으로 해결하는가... 싶어 우리사회 예시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개인적으로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고생물학/인류학'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인류학 분야에도 최근 수년 사이 뜬 핫플레이스가 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남서부 마로스-팡켑 지역이다. 450㎢에 이르는 이곳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으로 수많은 동굴이 있는데, 이 가운데 무려 300여 곳에서 과거 인류가 남긴 벽화가 발견됐다. 연대측정 결과 이 가운데는 현생인류 화가의 가장 오래된 작품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p. 286)

아프리카를 인류의 기원 지역으로 보면서도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가 유럽지역 곳곳에서 발견되었다보니 서양인들 중에는 문화적 현생인류의 기원이 유럽인것마냥 자긍심을 가졌던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더 오래된 동굴벽화가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니 배시시 웃음이 나는건 뭐지 ㅎㅎ

이 동굴벽화 이야기 외에도 황하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는 걸 중국도 인정하게 한 '훙산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관심이 많았던 분야이지만 동북공정문제도 그렇고 과학에 집중해야 하기도 하고 해서인지 이 책에선 강수량과 문명의 발달 관련한 연구내용을 소개한다.

책의 뒤에는 부록으로, 전 해에 타계한 과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뒤돌아보게 한 내용을 붙여놓았는데, 오래전 위인들로서의 과학자들만 알았다가 현재적 과학자들의 업적이나 생애를 짧게나마 알수 있어서 나름 의미있었다.

전반적으로 알찬 정보가 가득한 이 책을 보고 나니 앞선 시리즈들도 궁금해진다.

과학 한잔 하실래요? 를 시작으로 사이언스 소믈리에, 과학을 취하다 과학에 취하다, 사이언스 칵테일, 티타임 사이언스, 과학의 위안, 컴페니언 사이언스, 과학의 구원, 과학을 기다리는 시간 등 매번 다른 제목으로 책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겠다 싶다. 그리고 매번 우수과학도서로 인정받는 것을 보면 앞으로의 시리즈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최신과학칼럼을 모아모아 한권으로 보고 싶다면 강석기의 과학카페 에서 과학 한잔 해보기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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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고요하지 않다 - 식물, 동물, 그리고 미생물 경이로운 생명의 노래
마들렌 치게 지음, 배명자 옮김, 최재천 감수 / 흐름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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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Animals and Plants Communicate with Each Other

고요한 숲 속에 울려 퍼지는 자연의 오케스트라

살아 있음에 대한 기쁨과 놀라움을 아로새기다

'숲' 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어떤 분위기를 예상할까? 대부분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상쾌한 그런 힐링의 장소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숲은 고요하지 않아야 한다' 고 이 책을 감수한 최재천 교수는 말한다. 해외의 숲생물을 연구하다가 국내의 숲을 찾아갔을때 '우리 숲이 너무 고요해서 싫다'며 숲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의사소통이 우리의 숲에는 부재함을 아쉬워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알려주는 '숲'은 몹시 시끄럽다. ㅎㅎ

나는 행동생물학자가 되기로 했다! 동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전부 알고 싶었다. 특히 고양이가 흥미로웠고 그래서 이 신비로운 동물의 의사소통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러나 인생이 다 그렇듯, 일은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p. 18)

첫 번째 연구대상으로 삼고 싶었던 고양이의 의사소통이었으나 저자가 처음 연구하게 된 생물은 뜻밖에도 '물고기'였다.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던 물고기의 행동연구는 의외로 하면 할수록 새롭고 매력적임음을 저자는 깨달았다. 예를들어 번식방법을 보면, 대부분의 물고기는 체외수정을 한다. '암컷이 알을 낳고 수컷이 그 위로 헤엄쳐 지나면 끝! (p. 19)' 성생활이고 뭐고 서로간의 소통이 그닥 필요해 보이지 않는 수정방법이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번식하는 물고기들이 있었다.

대서양 몰리나 감부시아 모기물고기처럼 새끼를 낳는 물고기들은 체내수정을 한다. 체내수정을 하려면 수컷의 정자가 어떻게든 암컷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난자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수정을 하려면, 당연히 암수 사이에 의사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수컷과 암컷의 '대화'가 그렇게 어려운 도전과제가 아니더라도, 떼지어 사는 물고기들은 자동으로 거대한 통신네트워크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수컷과 암컷 단둘이 아무 방해 없이 오롯이 소통하기가 힘들다. (p. 19) 나의 석사 논문은 바로 이런 '삼각관계 소통'에 관심을 두었다. 예를 들어, 나는 수컷이 다른 구경꾼 수컷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다르게 행동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행동실험을 했다. 그들은 구경꾼과 상관없이, 점찍은 암컷을 계속 공략할까 아니면 구애 전략을 바꿀까? (p. 20)

책 제목이 '숲은 고요하지 않다' 인데 왠 물고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동물행동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풀어내자니 물고기가 먼저 등장한 것 뿐이다. 뒤이어 바로 도시의 공원에 사는 토끼가 등장한다.

야생토끼는 아주 특별한 소통방식을 가졌다. 그들은 같은 화장실을 쓰며 똥과 오줌으로 소통한다. 이런 화장실을 '공중변소'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런 '공중변소'는 집단생활을 하는 여러 포유동물의 의사소통 수단이다. 야생토끼는 프랑크푸르트 한복판에서 아주 편안해 보였고, 그 모습이 나의 흥미를 더욱 끌었다. (p. 21) 도대체 왜 야생토끼가 독일의 금융대도시로 왔을까? 사계절 내내 풍성하게 차려지는 식탁, 도시의 따뜻한 기온 혹은 울창한 빌딩 숲의 넉넉한 은신처 때문일까? 연구를 통해 나는 동물의 의사소통 행동이 도시에서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p. 22)

저자는 주변의 모든 생물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땅속물속부터 숲을 지나 하늘까지 거의 모든 생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 그러다보니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Nature is never silent'. 사실 이 책은 숲속 생물이야기 보다는 자연속 모든 생물의 의사소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숲은 고요하지 않다 라기 보다는 자연은 조용한 적이 없다 라고나 할까.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어떻게 정보가 교환되는가? 에 대해 발신 과 수신 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2부에서 '누가' '누구와' '왜' 정보를 교환하는가? 에서 단세포 생물부터 다세포 생물까지 다양한 생물들의 정보교환에 대해 탐구한 다음, 3부에서 모든게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 라며 숲에 생명들이 풍성하게 존재해야 함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 3부에서의 내용이 동물이 숲을 떠났을 때의 교훈이 이 책을 강력 추천한 최재천 교수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식물, 동물, 미생물을 넘나들며 워낙 다양한 생명체들이 등장하다보니 한번에 다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는 신기한 내용들은 아~! 감탄하게 되기도 했다. 예를들어, '애기장대' 라는 풀은 애벌레가 애기장대의 잎을 갉아 먹는 소리를 녹음한 것을 들려주면 화학 방어 물질의 양을 높이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귀가 없는데도 소리를 듣고 움직이지 않는데도 방어하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식물의 의사소통 방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물은 더 다채롭고 미생물은 더욱 놀랍다. 일부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 미생물 곤충 균류 등 모든 생물은 전부다 나름의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사례에서 생명체들이 성공적으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발신자가 수신자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망은 철저히 생활환경의 영향 속에 발달 한다. (중략) 그런데 생활환경이 바뀌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활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계속 발달하는 능력이야말로 생명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런 능력은 당연히 정보 교환에서도 발휘된다. (p. 258) 세상은 데이터로 가득한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한 데이터다. (중략) 한 생명체가 어떤 수신자에게 능동적으로 데이터를 보내려면, 데이터를 운송 가능한 소포로, 그러니까 신호로 만들어야 한다. 이 신호는 '생활환경'이라는 채널을 통해 수신자에게 데이터를 전달한다. 수신자가 이 소포를 '열면', 그러니까 수용체로 신호를 감지하면 데이터는 정보가 된다. (p. 278)

정보와 네트워크 그리고 의사소통은 인간사회에만 적용되는 단어로 착각해 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더 오랜 세월 더 변화무쌍하게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보를 소통해왔던 것은 인간 이전에 자연 그 자연속 생물들이었다. 그들의 신호를 무시하고 그들의 의사소통에 신경쓰지 않으며 그들의 정보를 고려하지 않은채 인간끼리만 소통해 와 놓고선 힐링이네 뭐네 하며 숲을 찾았던 건 아닐까? 그렇게 고요한 숲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숲의 고요함이 좋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선 숲의 고요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지연의 언어'를 존중하고 통찰할 수 있다면 자연과 더불어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어렴풋이 였다. 이제라도 우리는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p. 289)' 라는 것을. '인간 역시 생명체이고, 그래서 이 행성의 거대한 전체의 일부임을 (p. 289)' 일부로서 전체인양 착각해선 안된다는 것을. 그러니 다음에 숲에 간다면 한번쯤 귀기울여 들어볼 일이다. 숲이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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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없는 삶 -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 / 판미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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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어떤 존재도 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두 손이 맞닿은 심플한 디자인의 표지가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라고 묻고 있는 표지의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혐오' 때문이라고.

<180 GRAD : Geschichten gegen den Hass> 라는 독일어 원제를 번역하면 <180도 : 증오에 반대하는 이야기> 라고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표지의 두 손이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해 'Yes'라고 대답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 바로 뒤따르지만, 뒷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김승섭 교수의 추천사가 마음을 울렸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된 김승섭 교수는 공중보건의에 대한 나의 편견을 너무도 따뜻하게 깨뜨려준 사람이기에 그의 추천사만으로도 진정성은 이미 확보한채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정치적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의문에 처했다. 자유 민주주의와 서양의 안정성에 물음표가 붙었다. 심지어 파시즘의 귀환도 가능해 보였다. 보통 그 원인에 접근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였다. 취재를 위해 위기에 접근할수록 두려움은 더 커졌다. 서양 사회들은 순서대로 하나씩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분열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았다. (p. 7)

저자는 서문에서 마크롱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프랑스의 분열과 브렉시트를 둘러싼 영국의 분열 그리고 트럼프 당선이라는 파격적 상황을 보며 전 세계적으로 몹시 걱정스러운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만 같은) 상황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등서도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강해지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공동집권에 성공했으며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득세하고 독일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의회까지 진출했다. 저자는 이러한 유럽의 상황들을 보며 '다시 무력감을 느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불타고 있는데, 마치 구경군으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0)' 고 말한다. 하지만 '기자로서 내가 이런 양극화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던 사례들을 꽤 자주 다루어 왔다는 사실(p. 11)' 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만남에서 생겨났던 힘들로, 사회를 파괴하려는 원심력을 막을 정치적 도구와 전체 사회를 위한 전략을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p. 11)' 그렇게 사례들을 찾아 모으게 되었고, '이 책이 바로 그런 발굴 작업 (p. 12)' 의 결과물이었다.

인종주의와 타인을 기꺼이 돕는 마음,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p. 35)

이런 사람들(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 수도 있다. (p. 37)

'우리는 서로를 더는 잘 모르기 때문에 혐오와 경멸을 만들기가 아주 쉽다' 이 구조는 두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리두기에서 편견으로, 그리고 다시 편견에서 거리두기로 나아간다. 이런 이중 나선의 가속화가 미국을 공포와 혐오 사회로 만들어 갔다. (p. 56)

외국인을 향한 적대감은 외국인이 없는 곳에서 가장 크다. 이슬람을 향한 적대감도 이슬람교도가 없는 곳에서 가장 크다. 우파 포퓰리즘 정당 투표자에 대한 혐오 또한 그들이 거의 없는 대도시에서 가장 크다. 부재하는 자들이 공포를 유발하고 증오를 불러온다. 우리는 편견이 문제라는 것을 안다. 편견을 가진 이들이 접촉을 통해 편견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이제 안다. 편견이 줄어들면 사회가 더 평화롭게 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접촉을 예외로 둔다. 이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p. 57)

이 책의 핵심은 '접촉'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를수록 쉽게 혐오한다. 저자는 접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접촉의 사례들을 모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접촉이 늘 공감을 불러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한 사회에서 접촉이 많아졌다고 평화와 우정이 넘치는 행복한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p. 75)' 라며 접촉의 경험이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거나 혹은 예외적이다 라고 설명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접촉의 결과가 부정적인 경우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언론에 묻고 있다.

언론은 사회 안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고 있다.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잘못된 히스테리를 만들어 낸다. (p. 84)

우리는 세계를 체계적으로 잘못 인식한다. 우리는 세계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착각이다. 그 착각은 언제나 같은 방향이다. 우리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그것도 너무 많이 부정적으로 본다. (p. 104)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비슷하게 왜곡된 언론사들이 있는가보다.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기레기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생산된 기사들의 진실은 보도된 기사와 전혀 달랐다. 하지만 '당연히 극단적인 사례가 훨씬 흥미롭다. 틀림없이 언론인 대부분은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또한 보도자들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독자들도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p. 107)'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세계 어느나라던 간에 자극적인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게 편견이 더더더 쌓여가게 된다. 그 편견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저자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 사례들을 읽다보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정체(政體)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공직자를 추첨으로 임명하면 민주정으로, 선거를 통해 임명하면 과두정으로 여긴다' 수백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규정은 정치 철학의 기본이었다. 민주주의는 제비뽑기를 의미했다. 고대 시대에 그러했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베니스와 피렌체 도시 국가들도 그러했다. 18세기 중반 몽테스키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이어 갔다. '추첨을 통한 선출은 민주주의의 본성과 잘 맞으며, 투표를 통한 선출은 과두정의 본성과 잘 맞는다.' (p. 192)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제 라고 배웠다. 하지만 고대시대부터 전해내려온 민주주의의 정의에는 선거가 없었다. 선거제는 과두정의 정체를 지지하는 기반이었다. 민주주의라는 정체는 곧 제비뽑기식이었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그옛날과 지금이 같냐고, 인구가 폭증한 이 시대에 그게 가능하냐고 즉각적으로 반박하게 될 것이다. 저자또한 즉각적으로 실사례를 제시한다. 아일랜드 시민의회를 통한 법개정은 흥미로운 실험이었고, 스위스의 칼크브라이테 라는 거주지는 혁신적인 공동체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들만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집단간의 접촉에서도 이러한 긍정적 실험이 가능할까? 저자또한 이러한 의문을 예상했다.

가끔 접촉은 역효과를 낳는다. 개별 인간이 아닌 집단으로 만날 때, 개인이 아닌 부족들이 만날 때 그렇다. 부족적 사고는 공감의 타고난 적이다. (p. 240)

<정치적 부족주의> 라는 책이 생각난다. 현대사회에서 부족주의가 왠말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부족주의 만큼 작금의 분열에 대해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부족주의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뜻밖에도 아프리카의 한 나라 이다. 부족주의의 원시적 의미부터 현대적 의미까지 분열에 분열로 뜨겁게 불타고 있는 대륙인줄 알았던 그 아프리카에 부족주의 타파에 성공한 국가가 있었다. 바로 '보츠와나' 였다. 그리고 그 보츠와나의 성공비법은 '접촉' 이었다. 돌고돌아 다시 돌아온 해답 '접촉' 에 대해 저자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예를 들어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이슬람 급진주의,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도움이 되지 낳는다. 얼마나 자주 혹은 얼마나 크게 말하든 상관없다.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 주어야 한다. (p. 293)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반복해서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서로를 알아 가야 한다. (p. 305)

직접적인 경험만이 항상 옳다고 할순 없지만 때론 없던 편견을 만들거나 있던 편견을 강화시키는 경험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라서 생기는 왜곡된 편견 보다는 알고자 노력함으로써 혐오를 없애고자 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노력들의 크고작은 사례들을 통해 사소하게는 개인대개인 의 관계에서 크게는 국가의 운영까지 다양한 곳에서 희망을 찾아내 보여준다. 독일의 '차이트 온라인' 이라는 곳에서 진행중인 대화연결 방법도 굉장히 의미있어 보였다. 어렵게 생각하거나 멀게 느끼지 말고, 나와 너를 구별하는 차이점을 찾는 것보다 나와 너의 공통점을 먼저 찾아보는 것으로 삶의 기본방식을 전환시켜본다면 '혐오 없는 삶'이 누구에게나 가능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여하튼 거창한 의의들을 떠나서, 불평불만 가득한 책들 속에서 오랜만에 긍정적인 르포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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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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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부터 20세기 유럽 현대사까지

시간과 비용 걱정없이 어디로든 떠나는 궁극의 여행

<Handbuch für Zeitreisende. Von den Dinosauriern bis zum Fall der Mauer> 라는 원제를 구글번역기에 입력해보니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핸드북. 공룡에서 벽이 무너질 때까지> 라고 나온다. 이런저런 번역된 책들을 읽으며 원제보다 나은 한국어판 제목을 발견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 책은 한국어판 제목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담아낸 것 같다. 이 책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이긴 한데 주요 골자는 '역사 가이드북' 이기 때문이다.

책을 앞뒤로 한 '추천의 말'이 대단하다. 곽재식 SF작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가 볼 만한 곳을 소개함으로써 세계 문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소개하는 역사책이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과학책' 이라고 했고 김범준 물리학과 교수는 '역사책이자 과학책' 이라고 했으며 이다혜 기자는 '과거로 떠나는 여행의 사고 실험' 이라고 했고 (내가 정말 즐겁게 감탄하며 읽은 책인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책의 저자인) 정기문 교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이 책을 강력추천하고 있다. 한명한명 그동안 넘사벽 필력을 보여준 이들이 하나같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을 보며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시간 여행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 시간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며 그 비용도 아주 저렴하다. 흥미진진한 체험 여행이든 심신을 달래는 휴양 여행이든,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매번 우리가 살고 있는 해와 같은 연도를 여행하던 시대는 끝났다. (p. 13)

'머리말'의 첫 문장부터 독자를 어리둥절 하게 만드는 이 책은 SF소설책이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역사책이다. 그것도 탄탄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ㅎㅎ

이 책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을 위한 신개념 안내서다. 시간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인류의 과거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면서, 사실상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14) 이 책에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수많은 새로운 여행 아이디어와 함께, 각각의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지식과 정보, 그리고 유용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p. 15)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글의 문체 때문이다. '비록 모든 여행지가 과거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현재형으로 쓰였다. 어쨌든 시간 여행자들은 현재를 살고 있으며 현재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거가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며 일종의 보호 구역이라서, 그 안의 모두가 항상 동일하게 머물며 본인의 결정으로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차피 모든 일은 역사책에 기록된 대로 벌어질 거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를 흘러간 과거로 단정하는 사람은 역사란 어딘가 지루하고 정적이며 죽어 있다는 생각을 고수할 것이다. (p. 22)' 하지만 과거도 고정형이 아닌 진행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준다. 현재형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읽다보면 과거의 고정된 역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과거를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상상하는 즉시,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p. 22)' 라는 문장을 강렬하게 체감하게 된다. 역사엔 가정이 필요치 않은 것이라고 따라서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식의 역사책들을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달랐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로 인식하면서 이렇듯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은 '만약에' 라는 무책임한 가설과는 달랐으며 '~이랬다면' 이라는 후회와도 달랐다. 과거의 역사를 존중하고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 이 책은 묘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역사를 실감나게 재현시키고 있었다.

본격적인 시간여행에 앞서 '시간 여행에 관한 짧은 역사'를 소개하는데 웜홀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을 오가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이 책이 과학책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 책은 분명 역사책에 속한다. 다만 시간여행에 대한 탄탄한 과학적 논쟁들이 이 책을 SF소설 영역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동시에 SF적 세계로 이끄는 묘한 책이기도 하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저자가 알려주는 코스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테마여행은 어디일까나~ 하며 찾아보는 사이사이 정말 알아두어야 할 역사들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 다수의 전문가들은 스톤헨지가 하지점보다는 동지점과 관련이 높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여름에 방문하면 텅 비어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12월 말에 찾아간다면 스톤헨지가 원래 무슨 용도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커진다. 겨울 날씨에 텐트는 적절하지 않으니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대신 튼튼한 고무장화와 방수 재질의 옷가지 그리고 따뜻한 모자를 챙기자. (p. 75)

정말 겨울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톤헨지가 기타 다른 유적들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동지의 일몰 방향과 관련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책속에 읽게되는 역사는 이런 식이다. ㅎㅎ

하지만 부디 신중을 가하자. 수많은 시간 여행자들이 스파이로 의심을 받곤 한다. 그러니 제발 카메라로 몰래 찍거나, 뒤를 쫓으며 스토킹을 하거나, 갈릴레이 집 대문 앞에서 오랫동안 어슬렁거리지는 말자. 그러는 대신 과학사에 기록된 역사적인 현장에 같이 머물고 있는 순간을 즐기도록 하자. (p. 99)

여행사에 여행을 예약하고 안내서를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과 여행지들에 대한 내용들에 집중하지만 그 안내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사실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주의사항 들이다. 저자도 (역사속) 어느 여행지를 가든 주의해야 할 사항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주의사항 속에 정말 깨달아야 할 시간여행의 가치들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역사속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중세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행객들은 자신의 여행사에게 속았다며 번번이 불만스러운 평을 내놓는다. (p. 107)' 며 중세 시대의 모습을 재현시키는가 하면, '당신이 시간을 잘 맞춰 현장에 도착한다면 이 코덱스들을 슬쩍 가로채서 어딘가에 숨기자. 마른 동굴이다 구덩이에 감춘다면 아마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당신의 과감한 행동을 훌륭한 업적으로 갚아 줄 것이다. (p. 144)' 라며 마야의 사라진 기록에 대한 미션을 제안하기도 하고, '공룡들이 그들의 과거에 편안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들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p. 162)' 라며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존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재미나게만 여겨지던 시간여행에 대해 '엄밀히 말하자면 약간이 아니라 상당히 큰 행운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출간되는 시점까지도 여행 일정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86)' 라며 경고하기도 하고, '과거를 향한 동경이 제일 적은 지역은 동아시아와 유럽이다. 본인이 속한 나라의 경제 상황이 좋을수록 과거보다 현재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진다. (p. 197)' 라며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정말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꿈꿀법한 '나 돌아갈래~ 그 시절에 살고 싶다~' 하는 여행이 아닌 아예 이주의 상황에 대해서도 '부유해지기 위한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 전에 부디 한 번만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고민하기를 바란다. 오직 시간 여행의 모든 이론적인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부를 쌓으려면 일단 당신은 신원과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로 옮겨간 초반 당신에게는 이들 둘이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은 신분 증명 같은 서류가 없는 이주민이다. 이로 인한 모든 불이익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과거에는 당신 자신이 이미 태어나 있으므로, 그곳에서 당신은 영원히 이중으로 존재하게 된다. (p. 210)' 라며 현실적 조언을 해주고 '지구로 떠나는 시간 여행에는 당연히 한계까 있다. 3억년 이상의 과러로는 떠나기가 어렵다. 그 이전에는 숨을 쉴 충분한 산소가 없기 때문이다. (p. 212)' 라며 과학적으로 시간여행지에 대한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이런저런 과거의 시간대로 여행을 (방구석에서 책을 읽으며^^)하더라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아쉬운 장면들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테마여행을 소개하는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간 여행에 관해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아홉 가지 신화를 모아 보았다. (p. 224)' 라며 시간여행에 대한 오해와 사실들을 정리해주는데 또다시 과학과 역사를 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세상 개선하기는 기운을 회복하고 충전하는 휴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선에서 분명해 보이는 혁신적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과거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일말의 관심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변화는 여전히 먼 일이다. (p. 250)' 라는 저자의 말을 수긍하게 된다. 시간여행은 '여행'일뿐이다. '여행'일 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워 하는 시간여행자들을 위해 저자는 '당신이 발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돌' 과 '강행해도 되는 것들' 을 알려준다. 과거의 역사에 개입해서는 안되지만 아주 살짝은 괜찮다며 '역사에서 아쉬운 부분을 살짝 고치는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으며, 특히 짧은 휴가 안에서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다. (p. 272)' 는 저자의 말에 점점 더 시간여행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홍보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ㅎ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하다면 장단점이 무엇무엇일까? 3부에서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필수 여행 정보'를 통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종의 여행제안서 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런 주의 사항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고 이런 준비가 필요한데 이 여행을 하겠느냐고 묻는 것도 같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 하며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라는 후기를 통해 시간여행의 불가능성을 토로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신이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당연히 여행 가이드도 필요한 세계를 한번 그려보았다. 이 책은 우리가 설정해 놓은 일련의 가정 위에서만 말이 된다. 그러면서도 최신의 과학 지식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중략) 진짜 세계는 이 책에서 그려진 모습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세상이 우리가 상상한 대로 흘러간다면, 이 책은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는 미래에 상당한 도우미가 될 것이다. (p. 412)

과학으로 시작해서 역사를 두루 경험하고 과학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이 책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남는다' 라는 문장에 고개끄덕이게 만든다. 역사를 이렇게 SF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는 이 책은 진정 '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가 맞았다. 역사를 생생하면서도 유쾌하게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신선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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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 - 장군, 상인, 지식인
미할 비란.요나탄 브락.프란체스카 피아셰티 엮음, 이재황 옮김, 이주엽 감수 / 책과함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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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치하에서 가장 번성한 실크로드

그 길을 일군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역사에서 '제국'이라는 명칭이 붙은 때가 몇번이나 있었을까? 저마다 자신들의 역사에 '제국'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싶겠지만 세계사적으로 '제국'으로 불리던 나라는 크게 로마제국, 대영제국 그리고 몽골제국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생각해보건데 이중에서도 몽골제국은 왠지 좀 낯설다. 분명 로마제국 못지않은 거대한 영토를 호령하던 제국이었으나 몽골이 '제국'으로 불리게 된 것은 얼마 안 된 것 같은...

실크로드는 13~14세기 몽골 제국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몽골 제국의 성립은 유라시아 대륙에 광대한 안전지대를 창출했고, 이는 물품·사람·사상의 교류를 크게 확대시켰다. 그 결과 세계는 (특히 유럽은)중대한 지적·상업적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는 (유럽 중심의)근대 세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몽골 제국 시기에 실크로드와 그 교류의 발전에 기여한 장군, 상인, 지식인 15인의 흥미진진한 일대기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은 몽골 치하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문화 간 접촉과 물리적·사회적 유동성의 양상을 밝혀준다. 그간 책들의 실크로드가 원경의 스케치였다면 이 책의 실크로드는 근경의 세밀화라 할 수 있다. -뒤표지 내용 中-

고전을 읽다보니 서양사를 읽게 되고 서양사를 읽다보니 로마사를 읽게 됐는데 로마사를 읽을 수록 아쉬운 부분이 점점 커져갔다. 유라시아라는 하나의 땅덩어리로 붙어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다가 떨어뜨려 놓고 있는 듯 동과 서의 역사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세계사적으로 엮여 있지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특히나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느낌으로 왔다간 유목민족의 흔적은 항상 신비의 영역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왔다간 유목민족의 흔적이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적이 있으니 바로 '몽골제국'이다. 이 몽골제국을 포함한 유목민족의 역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 책이 <중앙아시아사>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의 역자가 이 책을 추천했다. <중앙아시아사>를 읽고 자연스레 이 책으로 넘어오면서 '그간 책들이 실크로드가 원경의 스케치였다면 이 책의 실크로드는 근경의 세밀화라 할 수 있다' 는 소개글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중국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라틴어 등의 다양한 언어로 쓰인 사료들을 바탕으로 집필한 총 15명의 전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적인 연구 결과물이지만 흥미진진한 인물들의 극적인 삶을 다루고 있는 만큼 독자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순서대로 읽지 않고 각 장을 따로 떼어 읽어도 된다. <몽골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몽골 제국의 다양한 시공간으로 유쾌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p. 5) - 추천의 말 中-

위에서 소개하듯이 이 책은 15명의 저자가 각각 한 인물씩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저자들은 이스라엘, 오스트리아, 중국, 독일, 일본, 미국, 헝가리, 한국 등 다양한 국적이지만 모두 아시아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다양한 국적의 학자들이 본인들이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의 문헌에서 조사한 인물들은 모두 낯설지만 '실크로드'라는 하나의 주제로 익숙하게 엮인다. 몽골제국의 역사가 200여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였던만큼 15명의 인물들은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제국의 역사를 풀어낸다기보다는 실크로드를 오고간 삶에 대해 좀더 생생한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낯설면서 무시되어 왔던 제국을 새로우면서 찬란한 시간으로 되살려낸 것에 의미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서양사 특히 로마사를 읽다보면 가보고 싶은 도시가 참 많아진다. 로마의 유적 영국의 유적 프랑스의 유적 등 유럽 곳곳에 여전히 로마제국의 유적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만큼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유적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늘 생소하고 낯설고 미덥지 못한 역사로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반대적 생각도 해보게 됐다. 지금의 삶과 너무나 달랐던 로마제국의 유적은 유적으로 남아 차별화되었지만 지금의 삶과 별반 다를 것 없어서 자연스레 스며들고 이어지는 동안 몽골제국의 유적은 그저 삶의 터전으로 일상으로 연결되어 왔기에 구별되지 않아 유적으로 남은게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세계사에서 '몽골 시기'(1206~1368)는 대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통일 몽골 제국(1206~1260) 시기다. 이때는 확장을 계속했던 정치체가 몽골의 중심부에서 새로 정복한 땅들을 지배했다. 두 번째는 '몽골 연방' 시기다. 이 시기에는 제국이 네 개의 지역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칸국(한국) 또는 울루스로 알려진 이 네 개의 몽골 정치체는 각기 중국, 이란, 중앙아시아,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그 수장은 서로 경쟁하고 있던 칭기스 칸의 지파 자손들이었다. (p. 13)

몽골제국이 나중에 4개의 제국으로 나뉘게 되는 과정은 로마제국과 그리 다를게 없어 보인다. 제국이 커질수록 한사람이 경영하긴 힘들다. 여하튼,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발음' 문제다. 몽골연방 시기를 4한국 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가 '한국'이다 보니 오해하기 쉽다. 4한국이라기 보다는 4칸국 또는 4울루스 아니면 그냥 몽골연방 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몽골어든 투르크어든 여하튼 외래어를 중국인들이 들리는 데로 한자를 차용해 기록하고 그 한자를 다시 한글로 불러 읽는 과정에서 칸국과 한국 사이에 다른 한자가 사용됐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외국인들이야 칸이든 한이든 발음하는 것에 어차피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상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한국'은 분명 '칸국'과 다르게 들린다. 한자로 쓰지 않을바에야 외국어는 외국어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없을 듯 싶다. 예전에 이탈리아를 이태리 라고 프랑스를 불란서라고 한자표기된 것에서 음역해 부르던 것을 이제 이탈리아는 그냥 이탈리아로 프랑스는 그냥 프랑스로 부르는 것처럼 '칸국'은 그냥 칸국으로 부르는 게 옳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광대한 땅을 정복하고 지배했으며, 게다가 이를 그처럼 짧은 기간에 이룰 수 있었을까? (p. 16)

이 책의 본문이 인물들의 짧은 전기 같은 형식이다 보니 본문의 어느 챕터 못지 않게 긴 분량의 '서론'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서론을 읽고 나서야 인물 개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워 진다. <몽골 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은 세 엘리트 집단 출신의 개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크로드 일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 지휘관과 상인과 지식인이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은 13~14세기 몽골 치하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문화 간 접촉과 물리적·사회적 유동성의 양상을 밝혀준다. (p. 31)' 실크로드 하면 상인이 연상되어서인지 이 15인의 비중에서 상인은 가장 적다. 아무래도 실크로드 상인들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15명은 장군 6명, 상인 4명, 지식인 5명 인데 이러한 구분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기록에 남을 정도로 모두 당시의 엘리트 지배계층이었고 모두 정치·경제·문화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글의 짜임은 비슷한 편이다. 해당 인물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의 인물의 가치적 질문을 띄우고 인생을 개괄한 후 결론에서 정리한다. 낯선 이들의 낯선 삶은 몽골제국이라는 낯선 제국을 좀더 생생하게 느껴지게 했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수시로 사용하서도 '실크로드'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무지를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실크로드'라는 말은 1860~1870년대에 중국 지도를 만든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이 1877년 처음 만들었다. 그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길에 적용했다. 그 이름을, 계획하고 있는 철도에도 적용하려는 생각이었다. 폰 리히트포헨 자신은 '실크로드'라는 포괄적 용어 속에 여러 개의 가능한 길을 포함시켰고, 이에 따라 '실크로드'는 대륙과 해양의 길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기 전에도 결코 단일한 길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실크로드들'이라는 복수형이 보다 적절한 말이다. (p. 41)' 라는 주석을 보며 후대에 이름붙인 비잔티움에 살던 사람들은 사실 자신들은 로마제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당시 실크로드를 오갔던 사람들은 그 길을 뭐라고 불렀을까... 아니다. 하나의 길이 아니고 여러 갈래의 길이었던 만큼 통칭은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여러 갈래의 실크로드들을 넓히고 새로운 길을 열었던 이들중 선구자는 아마도 정복길에 나선 장군들이었을 것이다.

곽간 장군은 중국인(한족)이었지만 서아시아까지 진출했던 몽골의 장군이었다.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바그다드까지 갔으며 서방 영토의 몽골군 첫 사령관이었던 초르마칸이었는데 이 사령관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함께 였던 바이주 라는 인물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여성들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장군이기도 상인이기도 황제이기도 했다. 쿠툴룬은 실존인물이었고 이 몽골 공주의 삶은 유럽이나 중국의 왕실 여성의 삶과 달랐다.

한편, 실크로드는 육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해상의 실크로드는 비몽골인들이 차지해왔던 만큼 몽골제국은 제국의 확장에 이 해상실크로드 장악이 꼭 필요했다. 이 네트워크를 확장시킨 것이 중국 한족 출신의 장군 양정벽 이었다. 비몽골인 출신의 엘리트들 뿐만 아니라 노예 군인 출신도 있었다. 이들의 군사적 망명은 몽고 치하 유라시아에서 자주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사이프 앗딘 킵착 알만수리 였다. 그의 삶은 술탄국과 몽골을 오가며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킵착인 장군 툭투카의 삶은 또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실크로드 하면 '상인' 이다. 상인들의 삶은 실크로드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에 가장 구체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상인들은 생애는 교역보다는 몽골제국의 관료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출신 역시 다양했는데, 자파르 화자 처럼 중앙아시아에서 교역 활동에 관계있던 사람들이 몽골과의 접촉에 자연스러웠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상인들은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유럽에서 동방을 접촉한 사례를 생각했을 때 대부분 마르코 폴로를 떠올리지만 몽골제국에 갔던 최초의 유럽 일반인은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가 집을 나서기 25년 전이자 니콜로 폴로 및 마페오 폴로가 부를 찾아 동방으로 여행하기 10년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십자군 황제의 사절 보두앵 드 에노 가 뭉케 카안의 궁정으로 사명을 띠고 출발했다. (p. 249)' 1226년 보두앵 드 에노가 어떤 목적으로 사절로 간건지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당시 십자군과 몽골 그리고 러시아 및 베네치아 가 흑해 무역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다양한 배경이 있을 수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 무역에 대한 욕망, '흑해를 통제하려는 이 욕망은 로마니아 제국의 파멸을 초래했다. (p. 264)'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이 뚫린 배경엔 무역이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룬 상인들 중 가장 상인다운 모습을 보여준 인물은 아시아를 가로지른 이라크 상인 자말 앗딘 앗티비 였다. 몽골제국의 상인 활동에서도 여성은 빠지지 않았다. 금장 칸국의 황후 타이둘라는 기독교 상인을 후원하기도 했다.

학문적 생산성이 엄청나다고 알려진 라시드 앗딘의 세계사 책인 <역사 모음> 이라는 책은 '세계사의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으며(p. 338), (중략) 인도를 다룬 장에는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내용이 더 들어 있다. (p. 339)' 라시드 앗딘의 저서들을 통해 이란의 불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라시드 앗딘은 몽골인 후원자들의 문화적 규범과 전통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몽골과 이슬람 세계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몽골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는 천문과학 분야에는 부맹질 이라는 인물이 소개된다.

몽골제국은 광활하고 다양한 실크로드들이 있었던 만큼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지식인으로 성장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이사 켈레메치 는 통역에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사절로 활약했다. 지식인을 다루는 중에도 여성들의 활약은 빠지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파드샤흐 카툰의 생애는 칸국에서 왕실 여성들이 건축·문화·종교에 행했던 후원활동을 알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의 마지막 인물은 실크로드의 이슬람 학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잘랄 앗딘 알아하위 라는 사람이다. 이 중앙아시아 학자의 25년에 걸친 여행은 동시대인들에게는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전기는 현대 역사가들에게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이 책은 유럽 연합의 제7차 프레임워크 프로그램 항서 유럽연구협의회가 지원한 예루살렘의 '유동성 제국과 몽골 치하 유라시아에서의 문화 간 접촉'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여기에는 이 책의 필자 대부분이 과거 그 성원 또는 협력자로서 연관을 맺었다. (p. 484) -감사의 말 中-

그동안에 번역한 실크로드 관련서 몇 권은 개설류가 많았다. 물론 새로운 시각과 최신 자료들로 엮은 책들이어서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무언가 복습한다는 느낌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책은 분명한 '심화 학습'이다. 일반 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개설류를 읽은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책이 필요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 제국, 실크로드의 개척자들 : 장군, 상인, 지식인>은 누구보다도 옮긴이에게 신선한 책이었다.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망라하고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몽골 지배기로 좁혀진다는 점이 그 '심화'의 한 단면이다. (p. 485) -옮긴이의 말 中-

책 전체를 흐르는 맥락은 없었지만 하나의 프로젝트성 연구 결과로서 보면 의미있는 책이었다. 다만 한두권의 개설서들을 읽고 실크로드 원경의 스케치를 조금은 봤다고 여겨서 근경의 세밀화를 보려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섣부른 시도였나 생각해본다. 다양한 실크로드 관련서들을 번역한 옮긴이에게 적합한 '심화'서가 나같은 역사 초보자에겐 신선하다기보다는 낯설었다. 너무나 폭넓은 다양성이 담긴 징검돌이 너무나 멀찍멀찍 떨어져 있어서 그 돌들만 밟으며 건너려다가 가랑이 찢어질 뻔한 기분이랄까;;; 그러니 그 띄엄띄엄 떨어진 돌들을 건너기 위해선 내 다리를 늘이던 돌사이에 다리를 놓던 해야할듯 싶다. 아무래도 여기 나오는 인물들의 면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실크로드 역사를 다룬 개설서들을 좀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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