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없는 삶 -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 / 판미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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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어떤 존재도 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두 손이 맞닿은 심플한 디자인의 표지가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라고 묻고 있는 표지의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혐오' 때문이라고.

<180 GRAD : Geschichten gegen den Hass> 라는 독일어 원제를 번역하면 <180도 : 증오에 반대하는 이야기> 라고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표지의 두 손이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해 'Yes'라고 대답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 바로 뒤따르지만, 뒷표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김승섭 교수의 추천사가 마음을 울렸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된 김승섭 교수는 공중보건의에 대한 나의 편견을 너무도 따뜻하게 깨뜨려준 사람이기에 그의 추천사만으로도 진정성은 이미 확보한채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정치적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의문에 처했다. 자유 민주주의와 서양의 안정성에 물음표가 붙었다. 심지어 파시즘의 귀환도 가능해 보였다. 보통 그 원인에 접근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였다. 취재를 위해 위기에 접근할수록 두려움은 더 커졌다. 서양 사회들은 순서대로 하나씩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분열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았다. (p. 7)

저자는 서문에서 마크롱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프랑스의 분열과 브렉시트를 둘러싼 영국의 분열 그리고 트럼프 당선이라는 파격적 상황을 보며 전 세계적으로 몹시 걱정스러운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만 같은) 상황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등서도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강해지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공동집권에 성공했으며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득세하고 독일에서는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의회까지 진출했다. 저자는 이러한 유럽의 상황들을 보며 '다시 무력감을 느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불타고 있는데, 마치 구경군으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0)' 고 말한다. 하지만 '기자로서 내가 이런 양극화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던 사례들을 꽤 자주 다루어 왔다는 사실(p. 11)' 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만남에서 생겨났던 힘들로, 사회를 파괴하려는 원심력을 막을 정치적 도구와 전체 사회를 위한 전략을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p. 11)' 그렇게 사례들을 찾아 모으게 되었고, '이 책이 바로 그런 발굴 작업 (p. 12)' 의 결과물이었다.

인종주의와 타인을 기꺼이 돕는 마음,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p. 35)

이런 사람들(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 수도 있다. (p. 37)

'우리는 서로를 더는 잘 모르기 때문에 혐오와 경멸을 만들기가 아주 쉽다' 이 구조는 두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리두기에서 편견으로, 그리고 다시 편견에서 거리두기로 나아간다. 이런 이중 나선의 가속화가 미국을 공포와 혐오 사회로 만들어 갔다. (p. 56)

외국인을 향한 적대감은 외국인이 없는 곳에서 가장 크다. 이슬람을 향한 적대감도 이슬람교도가 없는 곳에서 가장 크다. 우파 포퓰리즘 정당 투표자에 대한 혐오 또한 그들이 거의 없는 대도시에서 가장 크다. 부재하는 자들이 공포를 유발하고 증오를 불러온다. 우리는 편견이 문제라는 것을 안다. 편견을 가진 이들이 접촉을 통해 편견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이제 안다. 편견이 줄어들면 사회가 더 평화롭게 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접촉을 예외로 둔다. 이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p. 57)

이 책의 핵심은 '접촉'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를수록 쉽게 혐오한다. 저자는 접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양한 접촉의 사례들을 모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접촉이 늘 공감을 불러온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한 사회에서 접촉이 많아졌다고 평화와 우정이 넘치는 행복한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p. 75)' 라며 접촉의 경험이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거나 혹은 예외적이다 라고 설명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접촉의 결과가 부정적인 경우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언론에 묻고 있다.

언론은 사회 안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고 있다.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잘못된 히스테리를 만들어 낸다. (p. 84)

우리는 세계를 체계적으로 잘못 인식한다. 우리는 세계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착각이다. 그 착각은 언제나 같은 방향이다. 우리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그것도 너무 많이 부정적으로 본다. (p. 104)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비슷하게 왜곡된 언론사들이 있는가보다. 독일도 우리나라처럼 기레기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생산된 기사들의 진실은 보도된 기사와 전혀 달랐다. 하지만 '당연히 극단적인 사례가 훨씬 흥미롭다. 틀림없이 언론인 대부분은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또한 보도자들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독자들도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p. 107)' 라는 문장에서 알수 있듯이 세계 어느나라던 간에 자극적인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게 편견이 더더더 쌓여가게 된다. 그 편견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저자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 사례들을 읽다보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정체(政體)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공직자를 추첨으로 임명하면 민주정으로, 선거를 통해 임명하면 과두정으로 여긴다' 수백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규정은 정치 철학의 기본이었다. 민주주의는 제비뽑기를 의미했다. 고대 시대에 그러했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베니스와 피렌체 도시 국가들도 그러했다. 18세기 중반 몽테스키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이어 갔다. '추첨을 통한 선출은 민주주의의 본성과 잘 맞으며, 투표를 통한 선출은 과두정의 본성과 잘 맞는다.' (p. 192)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제 라고 배웠다. 하지만 고대시대부터 전해내려온 민주주의의 정의에는 선거가 없었다. 선거제는 과두정의 정체를 지지하는 기반이었다. 민주주의라는 정체는 곧 제비뽑기식이었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그옛날과 지금이 같냐고, 인구가 폭증한 이 시대에 그게 가능하냐고 즉각적으로 반박하게 될 것이다. 저자또한 즉각적으로 실사례를 제시한다. 아일랜드 시민의회를 통한 법개정은 흥미로운 실험이었고, 스위스의 칼크브라이테 라는 거주지는 혁신적인 공동체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들만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집단간의 접촉에서도 이러한 긍정적 실험이 가능할까? 저자또한 이러한 의문을 예상했다.

가끔 접촉은 역효과를 낳는다. 개별 인간이 아닌 집단으로 만날 때, 개인이 아닌 부족들이 만날 때 그렇다. 부족적 사고는 공감의 타고난 적이다. (p. 240)

<정치적 부족주의> 라는 책이 생각난다. 현대사회에서 부족주의가 왠말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부족주의 만큼 작금의 분열에 대해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부족주의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뜻밖에도 아프리카의 한 나라 이다. 부족주의의 원시적 의미부터 현대적 의미까지 분열에 분열로 뜨겁게 불타고 있는 대륙인줄 알았던 그 아프리카에 부족주의 타파에 성공한 국가가 있었다. 바로 '보츠와나' 였다. 그리고 그 보츠와나의 성공비법은 '접촉' 이었다. 돌고돌아 다시 돌아온 해답 '접촉' 에 대해 저자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예를 들어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이슬람 급진주의,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도움이 되지 낳는다. 얼마나 자주 혹은 얼마나 크게 말하든 상관없다.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 주어야 한다. (p. 293)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반복해서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서로를 알아 가야 한다. (p. 305)

직접적인 경험만이 항상 옳다고 할순 없지만 때론 없던 편견을 만들거나 있던 편견을 강화시키는 경험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라서 생기는 왜곡된 편견 보다는 알고자 노력함으로써 혐오를 없애고자 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노력들의 크고작은 사례들을 통해 사소하게는 개인대개인 의 관계에서 크게는 국가의 운영까지 다양한 곳에서 희망을 찾아내 보여준다. 독일의 '차이트 온라인' 이라는 곳에서 진행중인 대화연결 방법도 굉장히 의미있어 보였다. 어렵게 생각하거나 멀게 느끼지 말고, 나와 너를 구별하는 차이점을 찾는 것보다 나와 너의 공통점을 먼저 찾아보는 것으로 삶의 기본방식을 전환시켜본다면 '혐오 없는 삶'이 누구에게나 가능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여하튼 거창한 의의들을 떠나서, 불평불만 가득한 책들 속에서 오랜만에 긍정적인 르포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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