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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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부터 20세기 유럽 현대사까지

시간과 비용 걱정없이 어디로든 떠나는 궁극의 여행

<Handbuch für Zeitreisende. Von den Dinosauriern bis zum Fall der Mauer> 라는 원제를 구글번역기에 입력해보니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핸드북. 공룡에서 벽이 무너질 때까지> 라고 나온다. 이런저런 번역된 책들을 읽으며 원제보다 나은 한국어판 제목을 발견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 책은 한국어판 제목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담아낸 것 같다. 이 책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이긴 한데 주요 골자는 '역사 가이드북' 이기 때문이다.

책을 앞뒤로 한 '추천의 말'이 대단하다. 곽재식 SF작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가 볼 만한 곳을 소개함으로써 세계 문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소개하는 역사책이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과학책' 이라고 했고 김범준 물리학과 교수는 '역사책이자 과학책' 이라고 했으며 이다혜 기자는 '과거로 떠나는 여행의 사고 실험' 이라고 했고 (내가 정말 즐겁게 감탄하며 읽은 책인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책의 저자인) 정기문 교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이 책을 강력추천하고 있다. 한명한명 그동안 넘사벽 필력을 보여준 이들이 하나같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을 보며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시간 여행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 시간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며 그 비용도 아주 저렴하다. 흥미진진한 체험 여행이든 심신을 달래는 휴양 여행이든,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매번 우리가 살고 있는 해와 같은 연도를 여행하던 시대는 끝났다. (p. 13)

'머리말'의 첫 문장부터 독자를 어리둥절 하게 만드는 이 책은 SF소설책이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역사책이다. 그것도 탄탄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ㅎㅎ

이 책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을 위한 신개념 안내서다. 시간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인류의 과거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면서, 사실상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14) 이 책에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수많은 새로운 여행 아이디어와 함께, 각각의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지식과 정보, 그리고 유용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당신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p. 15)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글의 문체 때문이다. '비록 모든 여행지가 과거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현재형으로 쓰였다. 어쨌든 시간 여행자들은 현재를 살고 있으며 현재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거가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며 일종의 보호 구역이라서, 그 안의 모두가 항상 동일하게 머물며 본인의 결정으로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차피 모든 일은 역사책에 기록된 대로 벌어질 거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를 흘러간 과거로 단정하는 사람은 역사란 어딘가 지루하고 정적이며 죽어 있다는 생각을 고수할 것이다. (p. 22)' 하지만 과거도 고정형이 아닌 진행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준다. 현재형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읽다보면 과거의 고정된 역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과거를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상상하는 즉시,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p. 22)' 라는 문장을 강렬하게 체감하게 된다. 역사엔 가정이 필요치 않은 것이라고 따라서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식의 역사책들을 안 좋아하는데 이 책은 달랐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로 인식하면서 이렇듯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은 '만약에' 라는 무책임한 가설과는 달랐으며 '~이랬다면' 이라는 후회와도 달랐다. 과거의 역사를 존중하고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 이 책은 묘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역사를 실감나게 재현시키고 있었다.

본격적인 시간여행에 앞서 '시간 여행에 관한 짧은 역사'를 소개하는데 웜홀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을 오가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이 책이 과학책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 책은 분명 역사책에 속한다. 다만 시간여행에 대한 탄탄한 과학적 논쟁들이 이 책을 SF소설 영역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동시에 SF적 세계로 이끄는 묘한 책이기도 하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저자가 알려주는 코스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테마여행은 어디일까나~ 하며 찾아보는 사이사이 정말 알아두어야 할 역사들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 다수의 전문가들은 스톤헨지가 하지점보다는 동지점과 관련이 높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여름에 방문하면 텅 비어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12월 말에 찾아간다면 스톤헨지가 원래 무슨 용도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커진다. 겨울 날씨에 텐트는 적절하지 않으니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대신 튼튼한 고무장화와 방수 재질의 옷가지 그리고 따뜻한 모자를 챙기자. (p. 75)

정말 겨울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톤헨지가 기타 다른 유적들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동지의 일몰 방향과 관련이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책속에 읽게되는 역사는 이런 식이다. ㅎㅎ

하지만 부디 신중을 가하자. 수많은 시간 여행자들이 스파이로 의심을 받곤 한다. 그러니 제발 카메라로 몰래 찍거나, 뒤를 쫓으며 스토킹을 하거나, 갈릴레이 집 대문 앞에서 오랫동안 어슬렁거리지는 말자. 그러는 대신 과학사에 기록된 역사적인 현장에 같이 머물고 있는 순간을 즐기도록 하자. (p. 99)

여행사에 여행을 예약하고 안내서를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과 여행지들에 대한 내용들에 집중하지만 그 안내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사실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주의사항 들이다. 저자도 (역사속) 어느 여행지를 가든 주의해야 할 사항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주의사항 속에 정말 깨달아야 할 시간여행의 가치들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역사속 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중세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행객들은 자신의 여행사에게 속았다며 번번이 불만스러운 평을 내놓는다. (p. 107)' 며 중세 시대의 모습을 재현시키는가 하면, '당신이 시간을 잘 맞춰 현장에 도착한다면 이 코덱스들을 슬쩍 가로채서 어딘가에 숨기자. 마른 동굴이다 구덩이에 감춘다면 아마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당신의 과감한 행동을 훌륭한 업적으로 갚아 줄 것이다. (p. 144)' 라며 마야의 사라진 기록에 대한 미션을 제안하기도 하고, '공룡들이 그들의 과거에 편안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들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p. 162)' 라며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존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재미나게만 여겨지던 시간여행에 대해 '엄밀히 말하자면 약간이 아니라 상당히 큰 행운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출간되는 시점까지도 여행 일정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86)' 라며 경고하기도 하고, '과거를 향한 동경이 제일 적은 지역은 동아시아와 유럽이다. 본인이 속한 나라의 경제 상황이 좋을수록 과거보다 현재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진다. (p. 197)' 라며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정말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꿈꿀법한 '나 돌아갈래~ 그 시절에 살고 싶다~' 하는 여행이 아닌 아예 이주의 상황에 대해서도 '부유해지기 위한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 전에 부디 한 번만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고민하기를 바란다. 오직 시간 여행의 모든 이론적인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부를 쌓으려면 일단 당신은 신원과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로 옮겨간 초반 당신에게는 이들 둘이 없다. 다시 말해 당신은 신분 증명 같은 서류가 없는 이주민이다. 이로 인한 모든 불이익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과거에는 당신 자신이 이미 태어나 있으므로, 그곳에서 당신은 영원히 이중으로 존재하게 된다. (p. 210)' 라며 현실적 조언을 해주고 '지구로 떠나는 시간 여행에는 당연히 한계까 있다. 3억년 이상의 과러로는 떠나기가 어렵다. 그 이전에는 숨을 쉴 충분한 산소가 없기 때문이다. (p. 212)' 라며 과학적으로 시간여행지에 대한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이런저런 과거의 시간대로 여행을 (방구석에서 책을 읽으며^^)하더라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아쉬운 장면들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테마여행을 소개하는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간 여행에 관해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아홉 가지 신화를 모아 보았다. (p. 224)' 라며 시간여행에 대한 오해와 사실들을 정리해주는데 또다시 과학과 역사를 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세상 개선하기는 기운을 회복하고 충전하는 휴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선에서 분명해 보이는 혁신적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과거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일말의 관심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변화는 여전히 먼 일이다. (p. 250)' 라는 저자의 말을 수긍하게 된다. 시간여행은 '여행'일뿐이다. '여행'일 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워 하는 시간여행자들을 위해 저자는 '당신이 발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돌' 과 '강행해도 되는 것들' 을 알려준다. 과거의 역사에 개입해서는 안되지만 아주 살짝은 괜찮다며 '역사에서 아쉬운 부분을 살짝 고치는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으며, 특히 짧은 휴가 안에서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다. (p. 272)' 는 저자의 말에 점점 더 시간여행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홍보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ㅎ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하다면 장단점이 무엇무엇일까? 3부에서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필수 여행 정보'를 통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종의 여행제안서 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런 주의 사항이 있고 이런 위험이 있고 이런 준비가 필요한데 이 여행을 하겠느냐고 묻는 것도 같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 하며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라는 후기를 통해 시간여행의 불가능성을 토로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신이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당연히 여행 가이드도 필요한 세계를 한번 그려보았다. 이 책은 우리가 설정해 놓은 일련의 가정 위에서만 말이 된다. 그러면서도 최신의 과학 지식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중략) 진짜 세계는 이 책에서 그려진 모습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세상이 우리가 상상한 대로 흘러간다면, 이 책은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는 미래에 상당한 도우미가 될 것이다. (p. 412)

과학으로 시작해서 역사를 두루 경험하고 과학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이 책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남는다' 라는 문장에 고개끄덕이게 만든다. 역사를 이렇게 SF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하며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는 이 책은 진정 '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가 맞았다. 역사를 생생하면서도 유쾌하게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신선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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