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대답들 - 10가지 주제로 본 철학사
케빈 페리 지음, 이원석 옮김, 사이먼 크리츨리 서문 / 북캠퍼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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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죽음까지, 플라톤에서 닉 보스트롬까지 10가지 주제,

80명의 철학자들을 잇고 더한 새로운 철학사

이 책의 부제는 [ 10가지 주제로 본 철학사 ]이고 그에 맞춰 이 책의 구성은 삶, 인간(자아), 지식(앎), 언어, 예술, 시간, 자유 의지, 사랑, 신, 죽음 이라는 10가지 로 나뉘어져 있다. 각 주제별로 앞쪽에 개요안내와 관련 철학 연표가 있어 보기 좋았고 각 철학자별로 생애와 철학적 개념정리가 두세 페이지로 요약되어 있어서 정리가 무척 잘 된 책이라고 보여졌다.

하지만 철학史 라고 하기엔 연대기적 역사는 아니었다. 시대별로 쭈욱 훑어 내려오는 역사적 철학이 아니라 각 주제별 질문에 따른 철학자들을 엮었다고 볼 수 있는데 대부분 현대철학자 중심이라서 이 책은 철학사 로 읽히기 보다는 근현대철학책으로 읽혀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고대철학과 현대철학이 바로 이어져 있는듯싶고 중간은 없는 편이라 고대철학자가 던진 질문에 근현대철학자가 답한 것을 모은 책같다고나 할까.

각 주제별 개요에 이어져 나오는 철학자들의 연표는 간략하고 보기 좋았지만 본 내용에 등장하는 철학자들과는 또 달라서 좋게보면 나름 다양성을 갖췄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맥락이 연결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읽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간이 너무 없었다. 예를 들어 첫번째 주제인 삶에서 보면 플라톤으로 시작하여 디오게네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렐리우스 다음 칸트로 바로 건너뛴다. 인간자아 와 지식 의 경우엔 아예 홉스와 흄에서부터, 언어와 예술은 프레게 와 버크 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중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등장 순서가 아예 시간순서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주제가 시간인 챕터의 경우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에서 시작하여 현대철학자 존 맥태거트로 이어졌다가 다시 고대의 파르메니데스로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는 모르는 철학자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史 적인 철학책은 읽을만 하리라 예상했었는데 현대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다 보니 아는 철학자보다 모르는 철학자가 더 많았다. 내가 평소에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했기에 잘 모르는 현대철학자들의 철학적 개념이 두세페이지로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이 이해될리 만무했다.

저자는 철학교수이고 다양한 철학자들의 철학개념을 두루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러한 종합적인 철학책을 써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철학에 무지한 나같은 독자들이 읽기엔 좀 어려울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다양한 현대철학자들의 이름을 알게 되고 호기심을 갖게 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개념별 주요 현대철학자들이라고 보기엔 너무 미국철학자들이 대부분이라 그러한 호기심도 내겐 그닥 남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 철학은 현실에 사용되어져야 하기에 이러한 고차원적 양질의 책을 이해할만한 독자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철학의 역사이자 여러 분야와 영역에서 온 수많은 원천인 방대한 가능성의 기록 보관소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활발한 진단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단과 비판은 한 문화의 현재 상태에 관한 대화를 최상으로 이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다. (p. 9 -들어가는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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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모두의 적 - 해적 한 명이 바꿔놓은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
스티븐 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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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해적왕은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을까?

역사상 최초의 국제 현상수배범, 에브리 선장을 찾아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기 전에 영국의 국가적 입장을 바꾼 한명의 해적이 있었다. 그 한명의 해적이 대영제국 시대의 방아쇠를 당겼고 그 해적은 '인류 모두의 적'으로 공표되었다. 그는 바로 해적왕 헨리 에브리 선장이다. 이 책은 에브리 선장의 추적기 이다. 최초의 국제 현상수배범이 된 한 남자의 해적질이 어떻게 대영제국의 역사적 방향을 바꾸었을까? 그 짧다면 짧을 에피소드가 저자에 의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한동안 헨리 에브리는 만신전에 묻힌 여느 인물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영웅이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살인자였다. 또 폭도였고, 노동자 계급의 영웅이었으며, 국가의 적이었고, 해적왕이었다. 그러고는 유령이 되었다. (p. 34)

때는 바야흐로 대항해시대였다. 농민계층은 무너진지 오래였고 먹고살기 위해서 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지던 시대였다. 하지만 무역선이 활발해질수록 인력이 부족했고 강제징집이라는 수단이 동원될 정도로 뱃사람의 수요는 급증했으며 배를 타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해적들도 늘어갔다. 이 해적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해적의 황금시대가 출판문화 탄생기와 겹치면서 더욱 그런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그렇게 에브리 선장은 신화적 인물 비스무레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은 바버리 해적들을 인류 모두의 적으로 규탄했지만, 위선적인 비난이었다. 세계에서 극악하기로 유명한 해적들 중에는 잉글랜드인이 적지 않았고, 영국 왕의 비호를 받으며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영국 법은 해적선과 사략선 구분의 의도적인 허점을 통해 이런 모순을 지워버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행위에서 사략선은 해적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사략선도 마을을 약탈했고 보물을 탈취했으며, 선박을 나포해 선원들을 고문했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략선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 그런 짓을 한다는 게 달랐다. (p. 66)

영국 왕실의 비호를 받던 해적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사략선 이라는 단어는 처음 본 듯 하다. 사략선은 저자의 말마따나 그 행위에 있어서 해적선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다만 '주로 다른 국적의 선박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 이라는 형태'의 허가를 받은 것이 사략선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해적선은 무작위적으로 약탈을 한다는 차이점이 있어야 겠지만 해적들 또한 자국의 배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것을 보면 이 허가는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이었다.

사략행위는 1500년대에 극성이었다. (중략)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으로 해적질이라는 오명을 지워낸 때문에 사략은 명망 있는 계급에게도 유망한 직업이 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프랜시스 드레이크 였다. (중략) 여러 모험을 통해 많은 재물과 명성을 얻었다. 특히 엘리자베스1세로부터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데번셔의 버클랜드수도원을 구입해 살기도 했다. (p. 68) 이 모든 역사에 비춰 보면, 헨리 에브리는 영국 해군의 일원으로 플리머스를 떠날 때 해적을 뚜렷이 다른 두 유형으로 구분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인간의 품위를 무시한 까닭에 인류 모두의 적으로 여겨지던 잔인한 바버리 해적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드레이크를 비롯해 성공한 사략선 선장들처럼 근사한 인물들이다. (p. 69)

당시 영국인들의 인식도 헨리 에브리의 생각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헨리 에브리의 해적 신화는 사람들에게 홈팀을 응원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헨리 에브리의 가장 큰 업적?!은 인도의 배를 약탈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문화권과 인도를 비교했을때 인도가 더 부유했다고 한다.)

계급 이동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던 그 시대에는, 보물을 찾아 바다로 나가는 것이 신분 상승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길이었다. 고향 땅에서의 제한된 선택지를 고려하면, 질병과 조난과 굶주림이라는 위험은 그런 잠재적 보상을 얻기 위해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원정해운이 아코루냐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금전적 보상이라는 장점도 퇴색하기 시작했다. (p. 110) 그때 찰스2세호의 일등항해사는 마음속에 새로운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p. 111)

처음부터 해적인 사람보다는 해군이든 무역선이든 뱃사람으로 출발해서 해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헨리 에브리도 어느 무역선의 일등항해사 였다. 하지만 그가 탄 배가 서류상의 문제로 몇달동안 스페인에 억류되면서 그를 비롯한 선원들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서인도제도의 보물을 찾아 오게 되리라는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찰스2세호는 팬시호가 되었다.

해적은 거의 언제나 국민국가의 법에 구애받지 않으며 살았고, 폭력이 더해진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에 걸맞는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바다를 주 무대로 살아가는 해적 공동체 내에서는 금전 거래를 비롯해 그들의 행동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관례를 만들어 충실히 지켰다. 대부분의 해적 행위는 '합의 조항'을 확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쉽게 말하면, 합의 조항은 선장과 사관과 일반 선원 간의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규정하는 규칙이었다. (p. 128) 해적들은 바다에서 모험적인 삶을 추구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이었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는 비견할 만한 것이 없는 가치를 실천하는 포퓰리스트이기도 했다. (p. 136)

간단하게 말하자면 해적문화는 굉장히 평등주의적이었다. 획득한 재물은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잘만하면 한번의 약탈로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일종의 도박이자 대항해시대의 로또복권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겠다 싶다. 당시에 해적은 굉장히 유혹적인 위험한 선택이었다. 이 위험한 선택을 하느냐마느냐는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고 헨리 에브리는 해적선의 선장이 되기에 충분한 야심만만한 뱃사람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인도보물선 이었다.

무굴제국이 진짜 분노한 이유는 건스웨이호의 여성 승객에게 가해진 만행에 있었다. (p. 223) "무함마드의 눈에 왕실 순례선 포획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신성모독이었다" (p. 231)

인도보물선은 메카순례를 다녀오던 배였고 인도왕실의 여성들도 탑승해 있었다. 당시 인도 무굴제국은 이슬람 종교를 믿는 왕의 지배아래 있었다. 왕은 분노했고 인도내에 있던 동인도회사에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동인도회사는 존재론적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이번 위기에서 영국 측 핵심 관계자들 (에브리, 애니슬리와 게어, 런던의 동인도회사 경영진, 심지어 윌리엄3세조차)은 각자의 역할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몰랐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각자의 역할이 그때까지도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각자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제도적 기관들을 규정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을 수 있다. 해적과 기업과 국가라는 뚜렷이 구분되는 세 범주가 있었지만, 각 범주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헨리 에브리의 행동이 야기한 세계적인 위기는 결국 이런 근원적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 239)

헨리 에브리는 전혀 몰랐겠지만 그가 한 약탈로 인해 국제정세가 바뀌었다. 무굴제국의 선택과 동인도회사의 선택 그리고 영국정부의 선택은 서로간의 팽팽한 줄다리기 였다. 우여곡절끝에 재판이 시작되었으나 체포된 선원들 몇몇 과 헨리 에브리에게 배심원들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역전의 기회는 누구에게 주어졌을까? ^^

이 책은 역사책이기도 하고 꼭 그렇지만은 않기도 하다.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역사적 전환점과 연결시키는 대목들은 흥미로우면서도 정말 그럴까 싶기도 했다. 여하튼, 사소하다면 사소할수도 있었을 에피소드로 풍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며, 이렇듯 역사를 미스터리하게 읽는 재미를 선사해준 것에 감사의 마음또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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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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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쓰는 것, 그것이 가장 영리하고 품위있게, 그리고 확실하게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다.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체험형 글쓰기'의 대가 라는 바버라 에런라이크 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제야 알게 되었나 반성했다. 세상을 바꾸는 쓴소리란 어떠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작가였다. 저자는 현장 경험을 토대로 체험기 쓰듯 생생하게 썼고 사회 곳곳의 문제점들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했다. 그것도 유쾌하게 동시에 치밀하게.

시작은 빈곤 문제였다.

이제는 비교적 잘살게 된 나 같은 사람은 최저 임금이라든가, 도시 거리에 다니는 다람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사람들 문제, 혹은 공원 노숙인에게 벌금을 물리는 일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는데 반해서 실제 그런 생활을 하고 있거나 그런 생활을 금방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지난 몇 년 사이에 사회 비평, 특히 빈곤 문제에 대한 글을 쓸 역량이 적어도 나만큼은 되는데도 정작 자신의 가난에 발목이 잡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수 알게 됐다. (p. 18)

저자는 먼저 자신과 같은 저널리스트들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널리스트들의 빈곤은 빈곤한 저널리즘으로 이어진다. (p. 20)' 라며 장기적 취재와 현장 경험이 필요한 기사들이 적어지는 현실은 저널리즘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저널리스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불평등에 관해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을 소득 분배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서만 고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빈곤층과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대중 매체라는 집단적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p. 21)'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느낀 서양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작가에 대한 개념이었다. 영미권의 경우 어딘가에 소속된 기자나 등단한 작가가 아니어도 취재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며 자신이 쓴 글을 팔아서 기사에도 실리고 책도 내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에세이나 전공분야 책을 제외하고 저널 기사 라고 부를 만한 글을 쓰는 작가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취재와 기사는 대부분 기자만이 쓴다. 이러한 언론의 좁은 바탕은 이른바 카더라통신이나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빈약한 저널리즘 풍토를 만들었다. 이름없는 사람이 쓴 글이 읽혀지고 퍼지면서 세를 불리고 그렇게 새로운 저널리스트를 발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는 사람이 쓴 글만 읽히는 사회의 언론이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쓴소리를 써낼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우리네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자각은 이 책의 프롤로그였을 뿐이다. 더욱더 머리를 때리는 각성은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증폭된다.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면서 계속 지적질을 한 것처럼 저임금 노동을 통한 생존 가능성은 내 서재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고 실험할 수 있고, 그렇게 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p. 28)

빈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지도자층은 잘 없지만 관심을 갖는 이들조차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 각종 보고자료와 연구자료들 만으로 충분히 문제점을 파악했다고 자신하곤 했다. 하지만 저자는 직접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웨이트리스로 호텔청소로부로 일하면서 몸소 깨달았다. '확실한 것은 나는 투잡을 뛰는 데 실패했고, 일자리 하나로는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장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유리한 조건ㅇ르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p. 77)' 저자는 자신의 주거공간을 마련할 비자금을 갖고 출발했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이 홀홀단신인 상태로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랬음에도 필요한 생활비를 다 벌 수 없었다. 그러니 월세 보증금이 없고 부양가족까지 있는 사람들의 현실은 어땠을까? 저자는 이러한 워킹푸어 생존기를 <노동의 배신> 이라는 책으로 출간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사회공론화 되었고 정부가 최저 임금을 인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빈곤한 삶은 저자의 화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복지정책이 얼마나 현실과 떨어졌는지를 지적하며 '복지 혜택과 매질을 결합한 프로그램의 진짜 장점은 이 접근법이 빈털터리가 된 채 사회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향한 징벌적 분노의 분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p. 83)' 라며 신랄하게 풍자하고, 회사에 사장이 존재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품위있게 인정해야 한다며 당연하지만 망각된 점을 꼬집어내기도 하며, 이민자들과 경쟁하느라 처우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힘을 합쳐 더 나은 조건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것이 거의 불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p. 99)' 라며 개탄을 금치못한다.

빈곤문제 말고도 사회적으로 왜곡된 관점은 수두룩하다. 건강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저자는 우리가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유방암에 대한 지나치게 긍정적인 대처 문화에 대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유아적 문화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사회 일각에 팽배한 특정 젠더 이데올로기의 버전에 따라 여성성이 본질적으로 다 자란 성인의 개념과 배치된다는 개념, 성장이 멈춘 상태라는 개념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남성이 미니카를 선물로 받는 일은 없지 않은가. (p. 139) "유방암은 페미니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여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p. 144) '문화'라는 단어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묘사하기에 불충분한 느낌이 든다. 불과 지난 15년 사이에 유방암을 둘러싸고 형성된 분위기는 컬트, 혹은 광신적 숭배 집단을 닮았다. (p. 154) 정말 강하게 비판하자면, 유방암 컬트는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독살 음모의 공범이다. 암을 정상적인 것, 예쁜 것으로 만들고 심지어 긍정적이고 부러워할 만한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p. 161)

이러한 강한 어조를 띨 수 있었던 것은 저자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고 그 이후 직접 그러한 문화와 인식에 대해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암에 대한 긍정 산업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계기로 <시크릿> <긍정의 힘> 등 자기계발서의 메시지, 초대형 교회의 모순적인 설교, 동기 유발 강사들과 기업들의 커넥션, 그리고 세계를 재난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까지 차근차근 더듬어 가며 '긍정주의'의 실체를 추적한다. (p. 165)' 그런 뒤 긍정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책 <긍정의 배신> 을 출간했다고 한다. 나도 전에 <시크릿>을 읽어봤지만 당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밑도끝도없는 자기확신을 강요하는 자기계발서들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게 들곤 한다. 그런데 그에 맞서 한방 제대로 먹이는 저널리스트가 있었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저자가 경험한 유방암 관련 문화 뿐만이 아니다. 건강을 도덕성과 연결시키면서 우리도 모르게 세뇌되어온 상식같은 인식을 저자는 깨닫게 해준다.

도덕성은 이제 더 이상 문명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도덕성은 정치인들에게 버림받고, 월스트리트에서 짓밟혔으며, 텔레비전 전도사들에 의해 더럽혀졌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단것에 눈이 멀어 식이섬유를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냥 비유를 하자면 말이다. 선한 덕목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공적인 영역에서 자취를 감춘 다음 우리가 먹는 시리얼과 운동 습관, 그리고 흡연, 독주, 기름진 음식 등에 대한 공격적인 대응 태도에서 부활했다. 우리는 건강이란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적 덕목이라는 개념으로 재정립했다. (p. 167) 우리는 모두 16세기 기독교인들처럼 모든 병이 과거에 저지른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p. 171) 건강한 생활습관이 뛰어난 도덕성의 표현이라면, 노동자 계층은 촌스럽고, 예의가 없다는 등 지금까지 우리가 믿도록 만들어져 온 모든 편견이 맞을 뿐 아니라 도덕성까지 결여돼 있다는 뜻이 된다. (p. 173)

사회시스템적인 문제를 개인적 책임으로 교묘하게 돌릴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 해결방안을 찾게 된다. 건강한 부자들은 건강하지 못한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의 식습관과 운동습관과 생활방식이 문제라고 떠넘긴다. 하지만 유기농 샐러드를 먹고 일정시간 조깅을 하며 퇴근후 플라잉 요가를 할 수 있는 그들과 달리 아침밥도 못먹고 출근해서 허리한번 펼새 없이 노동을 하고 라면으로 저녁을 대충 때운다음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의 건강이 나쁜 것은 개인들의 탓만 할수는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저자의 전방위적 쓴소리는 페미니즘 영역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초래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리더십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대통력직보다 더 낮은 관직에도 우리는 전사 문화의 기준을 적용한다. 여성 후보들에게 우리는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강한' 이미지를 주는 언사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p. 203)

'섹스와 강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들은 여성들과 함께하는 세상에 살 자격이 없다. (p. 200)' 라는 문장이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많은 남성들에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예전 스타일의 전형적인 남성성의 틀을 깨는 데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p. 220" 고 말하면서도 '남성에게 여성과 더 비슷해지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제 남성들에게 여성과 남성이 '모두 될 수 있는 것'처럼 되라고 요구해야 한다. (p. 231)' 라고 말한다. 미국대통령들을 예로 들면서 과거 대통령들이 전쟁이슈로 어떻게 자신들의 리더십을 강조했는지 보여주면서 그런 자리에 오르고 싶은 여성도 전사의 이미지를 요구받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퍼지면서 부드럽고 여성적?!인 신남성들이 늘어나게 되긴 했지만 이러한 모습에 만족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여성이 남성화되고 남성이 여성화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적이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같아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목표여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표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인식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는 여성에게 해가 되는 자료를 찾는 작업에 착수한 우리 시민 모임이 성경부터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읽은 책이니 이 세상의 사악함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원리를 적용했을 뿐이다. "이리 모여 보세요" 나는 동료 시민들에게 말했다. "미즈 위원회의 그 용감한 사람들이 구강성교 놀이나 채찍과 사슬의 쾌락을 보고도 견뎌 냈으니 우리도 용기를 내서 창세기를 견뎌 봅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근친상간(롯과 그의 딸들), 단체 할례, 간음, 그리고 씨를 여기저기 뿌리는 이야기들등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이 아무리 뜨거워도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을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계속 견뎠고, 결국 성차별주의의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중략) 이브와 그의 딸들이 슬픔 속에서 자손을 낳을 것이라는 저주가 나오기도 하고, 자손을 낳는 것만이 유일하게 여성이 해야 할 일인 듯한 암시가 수없이 언급되었다. 군중 앞에서 여성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차별 철폐 같은 문제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삭의 후손이 세세손손 널리 퍼져나가며 가부장적 왕조를 확소히 하는 것을 용인하는 듯한 묘사도 많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매우 변태적인 문구들도 있었다. 이것이 가정 폭력을 권장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 249)

저자의 시니컬한 문장은 때론 속시원하다가도 때론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통쾌함이 더 컸다. '페미니즘은 과거에 지녔던 비평의 칼날이 무뎌지면서 역설적이게도 동화주의자 개척자들, 즉 새로운 여성 기업가들이 하는 경험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다. 현재 주류를 이루는 페미니즘으로 성차별이라는 장애물로 생긴 문제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성공' 자체가 갖는 슬픈 공허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p. 261)' 라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들과 다르게 포기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았음을 설명하고, 여성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추정하는 순진한 페미니즘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우리는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남성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기관에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침투해서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p. 269)' 고 말한다. 또한, 배우와 모델등 주목받는 사람들이 폭로하는 미투운동도 알아야 겠지만 미투조차 할수 없는 노동하는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앞서 건강문제가 잠시 등장했긴 하지만 질병문제가 아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건강에 관한 지적도 흥미로웠다. 대표적으로 마음챙김 문화 같은 것 말이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바이오 해킹과 마음챙김으로 영생을 이루겠다는 그들의 꿈이 실현가능한지 따져보고, 병원과 의료계 현장으로 뛰어들어 현대 의학이 증거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 예방의학이 무병장수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정말인지 샅산이 돌아본다. 그리고 피트니스 센터와 웰니스 업체를 찾아 안티에이징의 비법을 제공한다는 그들의 프로그램과 제품이 실제로 효력이 있는지 살핀다. 그리하여 이 모든 산업과 열풍의 근간이 되는, 우리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과연 '과학적'으로 사실인지 검증한다. 이를 갈무리한 책 <건강의 배신>을 2018년 출간 (p. 293)' 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 읽은 글들이 꽤 오래된 글도 함께 묶인 책이라는 점에서 주제별로 좀더 심층적으로 파고든 저자의 책들이 모두 궁금해진다. 저자는 과학적으로 검증됐다고 하는 것들도 제대로 검증하고 검증돼지 않은 것들은 더 검증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세는 종교문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출현하고 인간의 모습을 한 기독교의 '아버지'같은 신이나 너무 추상적이어서 어떤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을 섬기게 되면서 동물들은 소위 '인간의 상상력 신전'에서 추방당하게 됐다. 이 변화는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서기 700년 사이에 일어났고 지금까지 이 현상은 항상 인류가 진보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축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이변화가 야만스러운 짐승을 숭배하는 꼴사나운 모습에서 완벽하고, 지극히 선한 신을 숭배하는 품위 있는 모습으로 진보했다는 것이다. 축의 전환 이후의 시대에 생겨난 종교들에서는 이전의 의식 중 일부에 대해 '불결'하다고 선언했고 그런 종교에서 숭배하던 대상들은 모두 인간보다 열등한 것으로 재분류했다. (p. 298)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소규모 공동체 혹은 '원시'사회에서는 신이 복수로 존재했고 남성적, 여성적 신이 모두 있었으며, 눈에 띄는 도덕적 가치관은 부재했다. 제우스에서부터 야훼, 바알에 이르기까지 거의 사이코에 가까운 이 신들은 피의 희생을 제물롱 요구하고 인종 학살을 교사하는가 하면 심지어 제우스의 경우 연쇄 강간범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논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욥이 자기가 겪은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신이 준 대답은 사실상 "그냥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였다. (p 314) '축의 시대'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철기로 된 무기가 나오면서 엄청난 전쟁이 계속됐던 시기다.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권력( 왕, 그리고 후에 황제)이 필요하다. 이 권력자들은 추종자들을 완전히 힘으로만 다스리는 것이 위험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 317)

책을 읽다보면 역사와 철학과 종교와 과학 그리고 이들 모두와 관계깊은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한다. 저자의 종교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따로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동시에 그래서 어떤 일관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참 늘 내내 용감했다. 저자는 말한다. '신처럼 보이는 것, 가령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별빛을 흩뿌리며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존재를 목격하더라도 그가 우리의 친구나 구세주일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침입자를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봐야 한다. 경외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p. 321)'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중산층 몰락 사회'의 단면들을 풀어낸다. '전통적 가치'의 유지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바쁨이 곧 능력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지적하며 화이트칼라의 몰락에 대해 '상황이 그렇게 안 좋다는데 왜 저항의 기미가 전혀 안보이는 걸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또다시 잠입취재를 결심한다. 개명하여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이력서를 꾸미고, 인맥을 만들고, 화장을 바꾸고, 인성까지 개조하는 대대적인 구직 프로젝트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2003년 11월부터 약 10개월간 이루어진 저자의 구직 체험을 바탕으로 2005년 <희망의 배신>을 출간한다. (p. 368)' 기업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워킹 푸어로 전락하거나 시름시름 죽어가는 '중산층 대참사'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이 책또한 지금의 국내상황에 접합되는 내용이 많지 않을까 싶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블루칼라가 트럼프를 뽑은 미국사회에서의 인종문제 또한 저자는 관심을 기울인다.

불행하게도 다른 인종들로부터 극도로 고립된 우리에게는 백인들의 행동에 내재된 자기 파괴적 성향, '서구 문명' 이라고 널리 알려진 이 행동의 폐해를 지적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 현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자. 우리는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대신 안쪽으로만 굽고, 배타적이 되었으며, 바보 같아졌다. (p. 373) 덜 불안하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사실 현재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계층 의식을 갖춘 좌경 정치 세력이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력이 부상하지 않는 것이다. 강력한 정치적 대안이 없으면 배고픈 자와 과식하는 자, 희망이 없는 자와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들의 분열로 갈라진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보다 더 근심스러운 것은 기울어 가는 중산층의 좌절감이나 최하층의 절박함을 평화적으로 배출할 정상적인 정치 통로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p. 390)

작금의 미국사회 분열에 대해서 저자는 '연대의 문화'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노숙인 문제만 하더라도 노숙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계속 그렇게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기다가는 '우리 모두가 노숙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p. 423)' 라며 사회의 다양한 몰락위기들을 깨달을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Don't forget to have a good time while you're doing things. Political work should not be work.

(일을 하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치적인 일은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즐거움은 저자가 알려주는 사회적 문제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일상은 늘 정치적일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자는 '지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이렇게 치밀한 분석을 날선 어조로 강하게 쓸 수 있는 저자가 패기 넘치는 나이일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1941년 생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쾌하게 분노하며 불평등의 연대기를 써내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HAD I KNOWN (나는 알고 있었다) 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혹은 이제(책을 읽고 난 후)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우리나라에 저자와 같은 저널리스트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찾아보기 힘들다면 최소한 이 책이라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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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안아준다는 것 - 말 못 하고 혼자 감당해야 할 때 힘이 되는 그림책 심리상담
김영아 지음, 달콩(서은숙) 그림 / 마음책방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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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하고 혼자 감당해야 할 때 힘이 되는 그림책 심리상담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고 감정 조절이 힘들어서

그림책 심리상담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독서치유상담사이자 치유심리학자이다. 그림책 심리성장 연구소를 운영하고 한겨레교육에서 독서 및 그림책 심리 지도사를 양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그러한 저자의 심리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다.

여기까지 보면 그닥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 책일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심리상담 책들이 많아졌고 하나의 방법적으로 책이 소개되는 경우도 많았고 어른을 위한 그림책 소개를 하는 책들도 종종 있었고 무엇보다 심리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들은 끊임없이 나왔고 나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특별함' 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개인적인 감상이기에 누군가의 글이 내게 '특별해지는 순간'은 그 책이 전해주는 '진정성'에 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의 진심이 담백하게 전달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나'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상담 여행의 기록이다. (p. 7) 사실 그들의 마음을 아무 조건 없이 실질적으로 안아준 것은 심리 상담도 상담이지만 그림책 역할이 더 컸다. 나는 독서치유상담사다. 그러다 보니 상담하면서 내담자의 상황에 맞는 책을 소개해 주는데, 특히 그림책을 적극적으로 권해준다. 내담자의 마음을 그림책을 통해 스스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p. 8) 이 책은 그들의 그림책 상담 이야기를 들려준다. (p. 9)

심리상담의 치유방법 중 하나로 책을 권해주는 것을 나는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소설 한권 오롯이 읽어내는 것도 버거워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일까 뒤늦게 깨닫는 그림책의 따듯함이 더 위로가 되기 때문일까, 마음에 위로가 되는 책들의 글밥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추세인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림책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림보다 글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조언은 말하자면 '긍정적인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아픔을 말하는 내담자에게 상담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아픔에 동행해 주면서, 내담자가 자기 아픔에 치어 미처 보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최종 선택은 어차피 자신의 몫이고, 자신이 하게 되어 있다. (p. 27)

미국의 그림작가 로런 밀즈의 <누더기 외투를 입은 아이>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은 젊은 엄마는 자신의 초라한 과거를 더이상 초라하지 않은 추억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윤지회 작가의 <방긋 아기씨> 라는 그림책은 '주고받은 것의 크기는 준 사람이 아니라 받은 사람에게서 결정된다. (p. 40)' 라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내담자의 억울함을 안아주었다. 영국의 작가 올리버 제퍼스의 <마음이 아플까 봐> 라는 그림책은 '감정은 자신의 의식과 별개로 또 하나의 인격을 갖추고 있다. (p. 61)'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 살면서 놓아버린 감정들을 늦게나마 차근차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삶, 무엇인가를 위해 꼬박 밤을 새우는 시간이 한 번도 없는 삶, 성취하고 싶은 자기만의 목표가 없는 생활은 죽은 삶이다. 허무는 별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허무다. (중략) 단 한 번도 무엇을 적극적으로 욕망하거나 신념을 세워 본 일이 없다. 자아실현의 욕망이 없는 삶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 산다는 일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가 비슷한 날들의 반복일 뿐이다. 그런 사람이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은 듯이 사는 거나 그냥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p. 76)

어릴적부터 자신의 성향을 멸시당하며 좌절감 속에 성장해 온 내담자에게 저자는 캐나다 작가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 아이들> 소설과 서아프리카 가나 작가 제임스 에그레이의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 그림책을 권해 주었다. 또 차재혁 작가의 <이 선이 필요할까?> 도 추천했다. 그리고 내담자는 가슴으로 그 책들을 읽었다. 의존증이 심한 젊은이에게는 불가리아의 그림작가 마리아 굴레메토바가 쓴 <울타리 너머> 를 권해 주었다. '실패의 경험이 살마을 좌절시키는게 아니다. (p. 100)' 라며 자발적인 의지로 도전해 보는 것의 가치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병원에 입원하면 육체의 고통보다 먼저 심리적으로 당황한다. 작은 병에도 마음이 먼저 크게 놀란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아파본 적이 없어 타인의 아픔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p. 108)'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이 단 한번의 실패에 너무나 크게 흔들렸을 때 저자는 유설화 작가의 <슈퍼거북> 그림책을 권했다. 미국의 그림작가 코리나 루이켄이 쓴 <아름다운 실수> 그림책도 함께 권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며.

감정 상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상처! 그 앞에서 도망쳐 버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p. 129)

노르웨이의 그림작가 그로 딜레가 쓴 <앵그리 맨> 그림책은 내담자의 어린 시절 상처와 대면하게 해줌으로써 읽어내기 어려운 그림책 일수도 있었다. 제시 밀러가 쓰고 바버라 바커스가 그린 <청바지를 입은 수탉>으로 자존감을 깨닫고 미국의 그림작가 피터 레이놀즈가 쓴 <점> 그림책에서 만날 수 있는 따듯한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응원해 주기도 했다. 그 따듯한 사람이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얼굴만 알던 지인이 될 수도 있고 심리상담가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연대감의 힘이다. '우리네 삶의 저 무성한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켜내는 연민과 공감의 힘을 믿을 수 있었다. (p. 159)'

대부분의 불안과 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한 공포는 과장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우리의 뇌가 부정적 경험을 데이터화하기 때문이다. 뇌의 부정적 경향성 때문에 과잉불안을 야기하고, 또 이것은 예측에 있어 과잉평가를 하게 해서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p. 168)

정상적 불안과 병적인 불안을 구분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불안증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 되어버린 듯 하다. 이탈리아의 그림작가 프란체스카 산나가 쓴 <쿵쿵이와 나> 그림책은 불안을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동화작가 조수경이 그리고 쓴 <마음샘>은 불안을 '창조력과 상상력을 높여주고, 끊임없이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p. 177)' 하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전해주려 한다. 호주의 그림작가 헨리 블랙 쇼가 쓰고 그린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 라는 그림책 처럼 '내면 아이'의 존재는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김희연 작가가 쓰고 그린 <내 친구 무무> 그림책에서 볼 수 있듯 소통이 중요하다. 다만 그 시작이 누구인가에 너무 치중하지 말것을 저자는 권한다. '상대가 바뀌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상대가 바뀌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상대에게 의존하는 일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를 상대에게 맡긴 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다. 내가 바뀐다는 건, 상대는 놀고 있는데 나만 일하는 그런 게 아니다. 해결의 열쇠를 내가 쥐고, 내가 주도한다는 의미다. (p. 208)' 새삼스럽지만 당연하게도 '지금 여기' 가 중요하다. 조미자 작가의 <불안> 그림책이 보여주듯이 과거의 나를 중심에 두지 말고 지금여기의 나를 중심에 두고 맞대면 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무기력이든 무엇이든 현재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잠시만이라도 그것을 생판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을, 그때 찾아진다. 그러면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p. 246)

저자는 전소영 작가의 <적당한 거리> 그림책 문구들이 가슴에 임팩트 있게 꽂힌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이기도 한 올가 토카르축의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에서도 이 '적당한 거리'의 중요성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가족과의 거리감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 상처가 된 내담자에게는 영국 작가 믹 잰슨이 쓰고 존 브레들 리가 그린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림책이 더 임팩트 있을 수 있다. 미국의 동화 작가 모 월렘스의 <때문에> 그림책도 '연결' 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거리감와 연결의 적절한 조화가 사실 쉽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단번에 끊을 수는 없다. 조금씩 성장해 가며 상처를 고치고 싸매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그러한 시간의 대가를 지급할 때 치유의 기적은 온다. (p. 274)' 라는 메시지를 나는 믿고 싶다. 나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에...

저자는 고정순 작가가 쓴 <가드를 올리고> 그림책을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강한 역동이 올라와서였다고... 이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저자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다만 그 상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삶은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어내곤 한다. '여전히 상처로 가슴 먹먹한 채 울고는 있지만 여전히 남들처럼 성큼성큼 가지 못하고 기어서 가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나'로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여전히 넘어져서도 그대로 널브러져 있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나를 보았다. 끝없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내 안의 부정적인 자기 평가를 기어이 잠재우고 지금-여기에서 내 나름 설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감히 '기적' 이라고 말한다. 그 기적은 어떻게 왔을까? (p. 278)'

기적이 왔다면 그건 누구의 선물도 아니다.

바로 내가 만든 것이다.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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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인문학 - 동물은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이강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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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인류의 역사를 바꾼 동물 이야기

인간의 역사와 인문학에 대한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최근엔 동물에 대한 이야기들에도 관심이 가고 있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인류 문명 발달사에서 동물이 빠져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지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동물에서 인간만 따로 떨어져 나와 보려 했으나 인간은 결국 동물에 범주에 들어가는 것을 감춰왔다고 해야 하려나.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인간이 더 커다란 범주 이고 그 안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다고 해야 하려나. 여하튼, 그렇게 인간의 역사 속 조연이든 배경이든 등장했던 동물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 책이었다.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동물의 왕국> 에서는 소, 사자, 호랑이, 표범의 생존에 대해 <2부 동물과 인간이 만든 역사> 에서는 개, 고양이, 소 등이 역사에 등장했던 장면들을 소개한다. <3부 중국사를 만든 동물 이야기> 와 <4부 세계사를 만든 동물 이야기> 에서는 인간의 역사에 동물을 연결하여 의미적으로 풀어낸다. 예를 들어 중국사에서는 돼지고기가 중요하다던가 세계사에서는 인간의 사냥욕망으로 변화된 생태계 라던가 등등

농업경제학자들은 우경의 시작과 보급을 농업 혁신의 변곡점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 고대사에서 이런 일을 한 왕은 신라의 지증왕(재위 500~514)이다. (p. 16)

수사자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무리를 떠나야 하는 운명이고, 암사자는 평생 자신이 태어난 무리를 떠나지 않는다. (p. 38)

호랑이의 아종 중 체구가 가장 큰 것은 시베리아호랑이다. '시베리아 호랑이'라는 명칭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무르호랑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팩트 체크를 해보면 시베리아호랑이의 서식지는 시베리아가 아닌 아무르다. 아무르는 아무르강 인근을 뜻하는데,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을 포괄한다. (p. 43)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동예의 특산품을 몇 가지 소개한다. 탄력이 좋아 사정거리가 긴 단궁, 작은 체구의 말인 과하마, 표범 가죽인 문표가 그것이다. (p. 57) 100년 까지만 해도 산에서 표범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많은 야생동물을 해로운 동물, 즉 해수로 규정하고 학살했다. (p. 61)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 속에서 동물들과 관련된 내용을 읽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추운 지역의 항온동물은 그렇지 않은 곳의 동종보다 체구가 크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p. 45)' 는 '베르그만의 법칙'으로 시베리아호랑이의 커다란 체구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으며 그래서 네안데르탈인이나 북유럽 게르만족들의 체구가 컸던 것일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지증왕이 우경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을까 동예에 그렇게나 표범이 많았다니 게다가 일제강점기때만해도 표범이 그렇게 많았다니 놀라워 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였다. 1부에서 다룬 서너종의 친근한 동물들 이야기는 더 다양한 종으로 확대되지 않고 곧 마무리 되었으며 2부부터 등장하는 역사속 동물 이야기는 그닥 새로울 것이 없었다.

대항해시대를 가능케 한 이유 중 하나가 배에 고양이를 태웠기 때문이라던가 개가 목축업에 이용되면서 인간이 고기를 자급자족 풍요롭게 먹게 되었다던가 하는 개와 고양이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지고 익숙해진 이야기들이었다. 사향소와 라쿤의 냄새는 강렬하지 않았고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은 서식지가 달라서 맞붙을 가능성이 없다로 어이없이 정리될 뿐이며 다른 동물들 몇몇은 핵심적이지 못했다. 중국사에서의 판다와 돼지 이야기는 동물 이야기 보다도 무역과 음식이라는 중국사 자체의 이야깃거리였고 '세계사를 만든 동물 이야기' 라기엔 세계사 속 동물들이 너무 엑스트라였다. 뒷부분에 가서는 멸종과 생태계 변화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모피와 먹기위한 소 그리고 사냥하기 위한 맷돼지 는 생태계 문제를 심각하게 와닿게 하진 못했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은 [신동아]에 연재한 글을 정리하고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연재됐던 글을 모은 책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 책의 글들도 중복이 잦은 편이었다. 글 마다 하나하나로서의 완전함은 있었으나 그런 글들이 모아진 것을 책으로 읽다보면 읽은 것을 또 읽는 기분이 들게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한 잦은 중복은 등장하는 동물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었다. 동물과 역사를 연결한 인문학적 동물이야기를 기대하고 읽었지만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기엔 다소 제목에 대한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싶다. 과한 포장을 걷어내고 그냥 읽으면 가볍고 재밌게 읽혀지는 동물관련 에피소드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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