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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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쓰는 것, 그것이 가장 영리하고 품위있게, 그리고 확실하게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다.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체험형 글쓰기'의 대가 라는 바버라 에런라이크 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제야 알게 되었나 반성했다. 세상을 바꾸는 쓴소리란 어떠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작가였다. 저자는 현장 경험을 토대로 체험기 쓰듯 생생하게 썼고 사회 곳곳의 문제점들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했다. 그것도 유쾌하게 동시에 치밀하게.

시작은 빈곤 문제였다.

이제는 비교적 잘살게 된 나 같은 사람은 최저 임금이라든가, 도시 거리에 다니는 다람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사람들 문제, 혹은 공원 노숙인에게 벌금을 물리는 일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는데 반해서 실제 그런 생활을 하고 있거나 그런 생활을 금방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지난 몇 년 사이에 사회 비평, 특히 빈곤 문제에 대한 글을 쓸 역량이 적어도 나만큼은 되는데도 정작 자신의 가난에 발목이 잡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수 알게 됐다. (p. 18)

저자는 먼저 자신과 같은 저널리스트들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널리스트들의 빈곤은 빈곤한 저널리즘으로 이어진다. (p. 20)' 라며 장기적 취재와 현장 경험이 필요한 기사들이 적어지는 현실은 저널리즘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저널리스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불평등에 관해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을 소득 분배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서만 고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빈곤층과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대중 매체라는 집단적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p. 21)'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느낀 서양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작가에 대한 개념이었다. 영미권의 경우 어딘가에 소속된 기자나 등단한 작가가 아니어도 취재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며 자신이 쓴 글을 팔아서 기사에도 실리고 책도 내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에세이나 전공분야 책을 제외하고 저널 기사 라고 부를 만한 글을 쓰는 작가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취재와 기사는 대부분 기자만이 쓴다. 이러한 언론의 좁은 바탕은 이른바 카더라통신이나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빈약한 저널리즘 풍토를 만들었다. 이름없는 사람이 쓴 글이 읽혀지고 퍼지면서 세를 불리고 그렇게 새로운 저널리스트를 발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는 사람이 쓴 글만 읽히는 사회의 언론이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쓴소리를 써낼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우리네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자각은 이 책의 프롤로그였을 뿐이다. 더욱더 머리를 때리는 각성은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증폭된다.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면서 계속 지적질을 한 것처럼 저임금 노동을 통한 생존 가능성은 내 서재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고 실험할 수 있고, 그렇게 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p. 28)

빈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지도자층은 잘 없지만 관심을 갖는 이들조차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 각종 보고자료와 연구자료들 만으로 충분히 문제점을 파악했다고 자신하곤 했다. 하지만 저자는 직접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웨이트리스로 호텔청소로부로 일하면서 몸소 깨달았다. '확실한 것은 나는 투잡을 뛰는 데 실패했고, 일자리 하나로는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장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유리한 조건ㅇ르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p. 77)' 저자는 자신의 주거공간을 마련할 비자금을 갖고 출발했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이 홀홀단신인 상태로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랬음에도 필요한 생활비를 다 벌 수 없었다. 그러니 월세 보증금이 없고 부양가족까지 있는 사람들의 현실은 어땠을까? 저자는 이러한 워킹푸어 생존기를 <노동의 배신> 이라는 책으로 출간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사회공론화 되었고 정부가 최저 임금을 인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빈곤한 삶은 저자의 화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복지정책이 얼마나 현실과 떨어졌는지를 지적하며 '복지 혜택과 매질을 결합한 프로그램의 진짜 장점은 이 접근법이 빈털터리가 된 채 사회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향한 징벌적 분노의 분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p. 83)' 라며 신랄하게 풍자하고, 회사에 사장이 존재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품위있게 인정해야 한다며 당연하지만 망각된 점을 꼬집어내기도 하며, 이민자들과 경쟁하느라 처우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힘을 합쳐 더 나은 조건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것이 거의 불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p. 99)' 라며 개탄을 금치못한다.

빈곤문제 말고도 사회적으로 왜곡된 관점은 수두룩하다. 건강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저자는 우리가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유방암에 대한 지나치게 긍정적인 대처 문화에 대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유아적 문화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사회 일각에 팽배한 특정 젠더 이데올로기의 버전에 따라 여성성이 본질적으로 다 자란 성인의 개념과 배치된다는 개념, 성장이 멈춘 상태라는 개념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남성이 미니카를 선물로 받는 일은 없지 않은가. (p. 139) "유방암은 페미니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여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p. 144) '문화'라는 단어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묘사하기에 불충분한 느낌이 든다. 불과 지난 15년 사이에 유방암을 둘러싸고 형성된 분위기는 컬트, 혹은 광신적 숭배 집단을 닮았다. (p. 154) 정말 강하게 비판하자면, 유방암 컬트는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독살 음모의 공범이다. 암을 정상적인 것, 예쁜 것으로 만들고 심지어 긍정적이고 부러워할 만한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p. 161)

이러한 강한 어조를 띨 수 있었던 것은 저자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고 그 이후 직접 그러한 문화와 인식에 대해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암에 대한 긍정 산업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계기로 <시크릿> <긍정의 힘> 등 자기계발서의 메시지, 초대형 교회의 모순적인 설교, 동기 유발 강사들과 기업들의 커넥션, 그리고 세계를 재난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까지 차근차근 더듬어 가며 '긍정주의'의 실체를 추적한다. (p. 165)' 그런 뒤 긍정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책 <긍정의 배신> 을 출간했다고 한다. 나도 전에 <시크릿>을 읽어봤지만 당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밑도끝도없는 자기확신을 강요하는 자기계발서들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게 들곤 한다. 그런데 그에 맞서 한방 제대로 먹이는 저널리스트가 있었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저자가 경험한 유방암 관련 문화 뿐만이 아니다. 건강을 도덕성과 연결시키면서 우리도 모르게 세뇌되어온 상식같은 인식을 저자는 깨닫게 해준다.

도덕성은 이제 더 이상 문명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도덕성은 정치인들에게 버림받고, 월스트리트에서 짓밟혔으며, 텔레비전 전도사들에 의해 더럽혀졌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단것에 눈이 멀어 식이섬유를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냥 비유를 하자면 말이다. 선한 덕목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공적인 영역에서 자취를 감춘 다음 우리가 먹는 시리얼과 운동 습관, 그리고 흡연, 독주, 기름진 음식 등에 대한 공격적인 대응 태도에서 부활했다. 우리는 건강이란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적 덕목이라는 개념으로 재정립했다. (p. 167) 우리는 모두 16세기 기독교인들처럼 모든 병이 과거에 저지른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p. 171) 건강한 생활습관이 뛰어난 도덕성의 표현이라면, 노동자 계층은 촌스럽고, 예의가 없다는 등 지금까지 우리가 믿도록 만들어져 온 모든 편견이 맞을 뿐 아니라 도덕성까지 결여돼 있다는 뜻이 된다. (p. 173)

사회시스템적인 문제를 개인적 책임으로 교묘하게 돌릴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 해결방안을 찾게 된다. 건강한 부자들은 건강하지 못한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의 식습관과 운동습관과 생활방식이 문제라고 떠넘긴다. 하지만 유기농 샐러드를 먹고 일정시간 조깅을 하며 퇴근후 플라잉 요가를 할 수 있는 그들과 달리 아침밥도 못먹고 출근해서 허리한번 펼새 없이 노동을 하고 라면으로 저녁을 대충 때운다음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의 건강이 나쁜 것은 개인들의 탓만 할수는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저자의 전방위적 쓴소리는 페미니즘 영역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초래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리더십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대통력직보다 더 낮은 관직에도 우리는 전사 문화의 기준을 적용한다. 여성 후보들에게 우리는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강한' 이미지를 주는 언사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p. 203)

'섹스와 강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들은 여성들과 함께하는 세상에 살 자격이 없다. (p. 200)' 라는 문장이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많은 남성들에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예전 스타일의 전형적인 남성성의 틀을 깨는 데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p. 220" 고 말하면서도 '남성에게 여성과 더 비슷해지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제 남성들에게 여성과 남성이 '모두 될 수 있는 것'처럼 되라고 요구해야 한다. (p. 231)' 라고 말한다. 미국대통령들을 예로 들면서 과거 대통령들이 전쟁이슈로 어떻게 자신들의 리더십을 강조했는지 보여주면서 그런 자리에 오르고 싶은 여성도 전사의 이미지를 요구받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퍼지면서 부드럽고 여성적?!인 신남성들이 늘어나게 되긴 했지만 이러한 모습에 만족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여성이 남성화되고 남성이 여성화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적이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같아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목표여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표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인식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는 여성에게 해가 되는 자료를 찾는 작업에 착수한 우리 시민 모임이 성경부터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읽은 책이니 이 세상의 사악함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원리를 적용했을 뿐이다. "이리 모여 보세요" 나는 동료 시민들에게 말했다. "미즈 위원회의 그 용감한 사람들이 구강성교 놀이나 채찍과 사슬의 쾌락을 보고도 견뎌 냈으니 우리도 용기를 내서 창세기를 견뎌 봅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근친상간(롯과 그의 딸들), 단체 할례, 간음, 그리고 씨를 여기저기 뿌리는 이야기들등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이 아무리 뜨거워도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을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계속 견뎠고, 결국 성차별주의의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중략) 이브와 그의 딸들이 슬픔 속에서 자손을 낳을 것이라는 저주가 나오기도 하고, 자손을 낳는 것만이 유일하게 여성이 해야 할 일인 듯한 암시가 수없이 언급되었다. 군중 앞에서 여성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차별 철폐 같은 문제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삭의 후손이 세세손손 널리 퍼져나가며 가부장적 왕조를 확소히 하는 것을 용인하는 듯한 묘사도 많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매우 변태적인 문구들도 있었다. 이것이 가정 폭력을 권장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 249)

저자의 시니컬한 문장은 때론 속시원하다가도 때론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통쾌함이 더 컸다. '페미니즘은 과거에 지녔던 비평의 칼날이 무뎌지면서 역설적이게도 동화주의자 개척자들, 즉 새로운 여성 기업가들이 하는 경험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다. 현재 주류를 이루는 페미니즘으로 성차별이라는 장애물로 생긴 문제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성공' 자체가 갖는 슬픈 공허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p. 261)' 라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들과 다르게 포기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았음을 설명하고, 여성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추정하는 순진한 페미니즘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우리는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남성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기관에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침투해서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p. 269)' 고 말한다. 또한, 배우와 모델등 주목받는 사람들이 폭로하는 미투운동도 알아야 겠지만 미투조차 할수 없는 노동하는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앞서 건강문제가 잠시 등장했긴 하지만 질병문제가 아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건강에 관한 지적도 흥미로웠다. 대표적으로 마음챙김 문화 같은 것 말이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바이오 해킹과 마음챙김으로 영생을 이루겠다는 그들의 꿈이 실현가능한지 따져보고, 병원과 의료계 현장으로 뛰어들어 현대 의학이 증거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 예방의학이 무병장수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정말인지 샅산이 돌아본다. 그리고 피트니스 센터와 웰니스 업체를 찾아 안티에이징의 비법을 제공한다는 그들의 프로그램과 제품이 실제로 효력이 있는지 살핀다. 그리하여 이 모든 산업과 열풍의 근간이 되는, 우리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과연 '과학적'으로 사실인지 검증한다. 이를 갈무리한 책 <건강의 배신>을 2018년 출간 (p. 293)' 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 읽은 글들이 꽤 오래된 글도 함께 묶인 책이라는 점에서 주제별로 좀더 심층적으로 파고든 저자의 책들이 모두 궁금해진다. 저자는 과학적으로 검증됐다고 하는 것들도 제대로 검증하고 검증돼지 않은 것들은 더 검증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세는 종교문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출현하고 인간의 모습을 한 기독교의 '아버지'같은 신이나 너무 추상적이어서 어떤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을 섬기게 되면서 동물들은 소위 '인간의 상상력 신전'에서 추방당하게 됐다. 이 변화는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서기 700년 사이에 일어났고 지금까지 이 현상은 항상 인류가 진보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축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이변화가 야만스러운 짐승을 숭배하는 꼴사나운 모습에서 완벽하고, 지극히 선한 신을 숭배하는 품위 있는 모습으로 진보했다는 것이다. 축의 전환 이후의 시대에 생겨난 종교들에서는 이전의 의식 중 일부에 대해 '불결'하다고 선언했고 그런 종교에서 숭배하던 대상들은 모두 인간보다 열등한 것으로 재분류했다. (p. 298)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소규모 공동체 혹은 '원시'사회에서는 신이 복수로 존재했고 남성적, 여성적 신이 모두 있었으며, 눈에 띄는 도덕적 가치관은 부재했다. 제우스에서부터 야훼, 바알에 이르기까지 거의 사이코에 가까운 이 신들은 피의 희생을 제물롱 요구하고 인종 학살을 교사하는가 하면 심지어 제우스의 경우 연쇄 강간범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논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욥이 자기가 겪은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신이 준 대답은 사실상 "그냥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였다. (p 314) '축의 시대'는 유라시아 지역에서 철기로 된 무기가 나오면서 엄청난 전쟁이 계속됐던 시기다.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권력( 왕, 그리고 후에 황제)이 필요하다. 이 권력자들은 추종자들을 완전히 힘으로만 다스리는 것이 위험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 317)

책을 읽다보면 역사와 철학과 종교와 과학 그리고 이들 모두와 관계깊은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한다. 저자의 종교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따로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동시에 그래서 어떤 일관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참 늘 내내 용감했다. 저자는 말한다. '신처럼 보이는 것, 가령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별빛을 흩뿌리며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존재를 목격하더라도 그가 우리의 친구나 구세주일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침입자를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봐야 한다. 경외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p. 321)'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중산층 몰락 사회'의 단면들을 풀어낸다. '전통적 가치'의 유지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바쁨이 곧 능력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지적하며 화이트칼라의 몰락에 대해 '상황이 그렇게 안 좋다는데 왜 저항의 기미가 전혀 안보이는 걸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또다시 잠입취재를 결심한다. 개명하여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이력서를 꾸미고, 인맥을 만들고, 화장을 바꾸고, 인성까지 개조하는 대대적인 구직 프로젝트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2003년 11월부터 약 10개월간 이루어진 저자의 구직 체험을 바탕으로 2005년 <희망의 배신>을 출간한다. (p. 368)' 기업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워킹 푸어로 전락하거나 시름시름 죽어가는 '중산층 대참사'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이 책또한 지금의 국내상황에 접합되는 내용이 많지 않을까 싶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블루칼라가 트럼프를 뽑은 미국사회에서의 인종문제 또한 저자는 관심을 기울인다.

불행하게도 다른 인종들로부터 극도로 고립된 우리에게는 백인들의 행동에 내재된 자기 파괴적 성향, '서구 문명' 이라고 널리 알려진 이 행동의 폐해를 지적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 현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자. 우리는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대신 안쪽으로만 굽고, 배타적이 되었으며, 바보 같아졌다. (p. 373) 덜 불안하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사실 현재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계층 의식을 갖춘 좌경 정치 세력이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력이 부상하지 않는 것이다. 강력한 정치적 대안이 없으면 배고픈 자와 과식하는 자, 희망이 없는 자와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들의 분열로 갈라진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보다 더 근심스러운 것은 기울어 가는 중산층의 좌절감이나 최하층의 절박함을 평화적으로 배출할 정상적인 정치 통로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p. 390)

작금의 미국사회 분열에 대해서 저자는 '연대의 문화'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노숙인 문제만 하더라도 노숙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계속 그렇게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기다가는 '우리 모두가 노숙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p. 423)' 라며 사회의 다양한 몰락위기들을 깨달을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Don't forget to have a good time while you're doing things. Political work should not be work.

(일을 하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치적인 일은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즐거움은 저자가 알려주는 사회적 문제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일상은 늘 정치적일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자는 '지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이렇게 치밀한 분석을 날선 어조로 강하게 쓸 수 있는 저자가 패기 넘치는 나이일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1941년 생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쾌하게 분노하며 불평등의 연대기를 써내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HAD I KNOWN (나는 알고 있었다) 이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혹은 이제(책을 읽고 난 후)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우리나라에 저자와 같은 저널리스트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찾아보기 힘들다면 최소한 이 책이라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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