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농장 책세상 세계문학 5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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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조지 오웰의 작품은 엄청나게 유명해서인지 안 읽었는데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기에 더 그런것 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렇게 대충 아는 것과 온전히 작품을 읽는 것은 천지차이의 깨달음을 준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이라 해도 나는 그닥 관심없는 작품들이 종종 있었는데 몇달전 책세상 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새로 나온 번역도 좋았지만 작품 뒤에 실린 독후감이 참 좋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독후감은 백민석 소설가가 썼는데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그동안의 내 비호감을 변화시켜 주었다. 이번 <동물농장>은 장강면 소설가가 쓴 독후감이 실려 있었는데 역시 현실비판적 공감도를 높여주는 촌철살인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동지 여러분, 오늘날 우리 동물들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우며 덧없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 최소한의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몸에 남아 있는 힘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죽어라 강제 노동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주인이 더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휴식은 무엇인지 아는 동물은 이 잉글랜드 땅에 단 한 마리도 없을 겁니다. 이 땅에서 자유로운 동물은 하나도 없다, 이말입니다. 동물의 삶, 그것은 비참한 노예의 삶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우리의 운명이며 자연의 섭리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너무나 척박해서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p. 13)

동지 여러분! 오늘 밤 내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인간과 맞서 싸우는 것, 즉 반란입니다! (중략) 동지 여러분, 남은 생애 동안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십시오! 무엇보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을 여러분 후손에게도 전달하십시오! 미래 세대들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투쟁을 이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동지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굳은 결의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논리에 유혹당해서도 안 됩니다. (중략) 우리 동물들끼리 단결해야 합니다. 투쟁을 위해 투철한 동지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우리의 적이고, 동물은 모두 우리의 동지입니다. (p. 16) 우리는 모두 힘을 합해 인간과 맞서 싸우되 절대로 그들을 닮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승리를 쟁취한 뒤에도 인간이 저질러온 악행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p. 17)

매너 농장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농장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농장주는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뿐 동물들에 대한 애정도 배려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이든 돼지 한마리가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들려준다. 동물들은 그 연설을 듣고 각성해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소설의 앞부분에서 대놓고 설명해놓은 이상사회를 뒤로 가면서 슬금슬금 너무나 자연스럽게 파괴시키는 것을 읽다보면 작가의 탁월한 표현에 저절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죽은 돼지 영감의 가르침을 다듬어서 '동물주의'라는 사고체계를 만들어낸 동물들은 비밀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서로서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배고픔에 지쳐있는데 채찍질까지 당하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농장을 장악하게 된다. 매너농장이라는 간판은 내리고 '동물농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건 후 영리한 돼지들의 지휘에 따라 동물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농장을 운영해간다. 합의하에 만들어낸 7대강령에 대해 보다 쉽게 각인시키기 위해 하나의 금언으로 압축하는데, 그것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였다. 하지만 너무나 똑똑한 돼지들은 점차 교묘하게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귀한 우유와 사과는 돼지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돼지들의 지배에 점점 예속되어 가는 중이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돼지들은 힘든 두뇌 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이 농장의 전반적인 경영과 관리 업무를 모두 우리가 맡고 있다, 이겁니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동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건 다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p. 43)

그러다 동물농장 사회는 전복됐다. 사나운 개들을 앞세운 돼지 한마리가 모든 권력을 강제적으로 장악해버렸다. 동물들은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노동하고 점점 더 많이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인간지배 아래 있던 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돼지들의 말에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은 수년 전 인간 타도를 목표로 뭉쳤을 때 모든 동물이 꿈꾸던 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고, 메이저 영감이 맨 처음 반란을 언급했던 그날 밤, 동물들이 기대했던 것은 공포와 살육으로 얼룩진 미래가 아니었다. 클로버가 머릿속에 그렸던 미래는 굶주림과 채찍질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동물이 평등하며,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였다. 메이저 영감이 연설하던 날 밤, 클로버가 앞다리를 구부려서 어미잃은 새끼오리들을 보호했던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야말로 클로버가 꿈꾸는 동물농장의 참모습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영 딴판이었다. 동물들은 사나운 개가 사방에서 으르렁대며 어슬렁거리는 바람에 아무도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데다 동룓르이 자아비판을 한 뒤 잔인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p. 92)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여전히 돼지들이 시키는데로 죽어라 노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어느새 지도자격 돼지였던 나폴레옹은 모든 성공과 행운의 주인공으로서 온갖 대단한 칭호의 수식어를 이름앞에 붙이도록 했다. 동물농장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대통령 후보자는 단 한마리의 돼지 뿐이었으므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하늘너머 세상엔 '슈가캔디 마운틴'이 있어서 영원히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까마위 모세의 말을 예전엔 다 무시했지만 이제 동물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돼지들은 쫓아냈던 모세를 농장에 살게 했다.

농장은 전에 비해 훨씬 부유해졌지만, 동물들의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돼지와 개들은 예외였다. (p. 131) 동물들의 삶은 하루하루 힘겨웠다. 동물들이 바라는 것이 모두 충족되지는 않았다. 충족되기는 커녕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농장의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p. 134)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동물들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버텼다. 자신들이 이루어낸 성과가 동물농장의 존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압축적인 표현이 바로 변해버린 강령이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 (p. 136)

돼지들이 두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한때 이웃 농장에서는 이곳 동물 농장의 훌륭한 경영주에게 적대 감정, 아니 정확히 말해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었던 게 사실입니다. (p. 138) 하지만 이제 그런 의구심이 말끔히 해소된 겁니다! 오늘 나와 내 동료들이 이곳을 방문해 직접 농장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둘러본 결과,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략) 이 농장의 하급 동물들은 전국의 그 어떤 동물들보다 많이 일하면서도 먹이는 더 적게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농장 운영 방식입니까? (p. 139) 돼지 여러분에게 골치아픈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층민들이 있지요! 푸하하! (p. 140)

앞에서 한 돼지 영감이 했던 연설을 상기해 보라. 지금의 농장 상황이 더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질 것이다. 인간처럼 굴고 인간과 어울리는 돼지들의 모습을 창밖에 보던 농장 동물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다시 돼지의 얼굴로, 또다시 인간의 얼굴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동물들은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인지 끝내 구별하지 못했다. (p. 143)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길다.

왜냐하면 저 상황은 80여년전 조지 오웰이 쓴 저 문장은 여전히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오웰은 사회 정의에 민감한 작가로서 진실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그는 '폭로하고 싶은 거짓이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진실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거짓과 진실은 악과 선, 억압과 자유, 굴종과 저항을 대신하는 말이었다. (p 147) 조지 오웰이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발표한 1933년부터 마지막 작품인 <1984)를 출간한 1949년까지 17년이다. 이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 전체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피를 흘리던 비극의 시기로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소련 스탈린의 스탈린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의 양상이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공포와 광기에 휩싸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말살되고 곳곳에서 끔찍한 살상이 자행되었다. 오웰은 작품을 통해 그런 잔인무도한 시대에 저항하고, 폭력성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는 특히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p. 150~151) <1984>에서도 그렇지만 <동물농장>을 보면 작가 오웰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일조차 쉽게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망각은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하고, 사회 정의나 윤리적 원칙이 제자리걸음 치게 한다. 오웰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사실을 환기하려고 <동물농장>을 쓰지 않았나 싶다. 오웰은 말한다. '그것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라고. (p. 154~155) -작품해설 中-

전체주의... 망각... 역사의 반복... 뼈때리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전체주의가 과연 저 냉전시대에만 있었을까? 망각하던 대중들이 지금은 과연 자각하는 시민들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시대를 역행하는 역사의 반복이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독후감을 쓴 소설가의 문장이 내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 했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그 선량하고 이상적인, 동시에 얄팍하고 선정적인 구호가 회의를 중단시키고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막는다. 모든 구호가 그런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논의가 오가지 않는 사회, 각론이 부실한 사회, 대신 맹목적인 열성 지지자와 그럴싸한 구호와 선정적인 음모론이 넘치는 사회를 진심으로 염려한다. 그런 사회는 전체주의를 향한 내리막길에 있다. 여기서 지금의 한국 현실을 떠올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리라. 오웰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예언자다. (p. 166~167) - 장강명(소설가) 독후감 中 -

지금 한국 현실에서 읽어야 할 단 하나의 소설을 골라야 한다면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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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완전해석 장치청의 중국 고전 강해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 판미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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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명쾌한 도덕경 강해, 지금 시대에 맞춰 풀어낸 인생의 깊은 지혜

쉽고 정통한 도덕경의 결정판

동양고전 하면 공자맹자장자노자 뭐 이런 이름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왠지 친숙한 동양고전이 더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멀고먼 서양고전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서양고전에 대해선 1도 모르니까 고전이건 현대물이건 다 새롭고 동양고전은 그래도 들은 풍월이 있으니 뭐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예 모르는건 또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닥 어렵지도 않고 생각보다 내용도 술술 넘어간다는 걸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느꼈었다. 요즘 세상이 또 좀 좋은가?! 한자를 몰라도 읽을 수 있게 나온 책들이 수두룩 하다. 그렇게 친절한 동양고전 읽기~! 로 이번엔 노자의 도덕경을 읽게 됐다.

노자는 이이李耳 또는 이백양李伯陽이라고 불렸으며 사후에는 노담老聃으로도 불렸다. 담聃은 시호, 즉 세상을 떠난 뒤 붙여지는 호칭으로 귀耳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이와 노담은 의미가 통한다. 노자의 자는 백양伯陽이다. 백伯은 첫째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형제간 항렬을 따질 때 백伯, 중仲, 숙叔, 계季 혹은 맹孟, 숙叔, 계季 라는 용어를 썼다. 역사서에서는 노자에게 형제가 있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백伯이라는 글자에서 노자의 항렬이 첫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는 항렬이 둘째이다. 그의 자가 중니衆尼이기 때문이다. (중략) [사기]에는 총 세 명의 노자가 등장한다. (p. 13) 노자는 이 같은 주나라 국가 도서관 관장직을 30년간이나 맡았기 때문에 특히나 학문의 소양이 깊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의 직책이 수장리가 아닌 수장사였다는 점이다. 종종 노자가 수장리였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리는 비교적 낮은 직급의 관리이다. 이를테면 공자가 위리委吏를 맡았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창고를 관리하던 말단 관리를 의미한다. 사史는 이와 달리 지위와 계급이 무척 높았다. (p. 17)

동양고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중국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중국인 학자들이 아무래도 전문가일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고전연구와 강의의 권위자 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두꺼운 벽돌책의 모양새가 주는 부담감에 비하자면 내용은 학자풍이 아니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되고 있는 편이라 읽기에 그리 어렵진 않았다. 노자 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와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니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가 용이한 고전읽기에 적합한 시작이라고 보여졌다.

공자왈 할 때 공자가 이름이 아니라는 것정도는 알았지만 그래도 이름이 공구 니까 공씨성을 가진 어른이겠거니 했기에 노자라하면 노씨성을 가진 어르신에 대한 존칭인줄 알았었는데 이씨 성이었다니.

[노자]는 [도덕경]으로도 불리늰데, 이는 [노자]가 '도경'과 '덕경'의 두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노자]는 최소한 세 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통행본이고, 다른 하나는 백서본, 나머지 하나는 죽간본이다.통행본은 주로 위진 시기 왕필이 주석한 것이고, 백서본은 1973년 후난성 창사 마왕퇴의 한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갑, 을 의 두 가지로 나뉜다.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초반의 판본으로 글자 수는 5000여 자에 달한다. 죽간본은 1993년 후베이성 징먼 곽점 초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갑, 을, 병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전국시대 중반의 판본으로 글자 수는 2000여 자에 달한다. 이 세 가지 판본을 비교하면 통행본과 백서본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배열 순서가 다르다는 점이다. (p. 25~26) 본서는 통행본을 주요한 저본으로 삼고 죽간본과 백서본을 참고로 삼고자 한다. (p. 29)

고전은 항상 원전번역서로 읽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 이유중의 하나는 고전의 원전번역서는 출처와 해석의 근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본내용을 읽기전 고전해석서로서의 근거를 상세히 설명해주어서 좋았다.

[노자]는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가치를 지닐까? 조금만 역사를 돌아보면 [노자]의 영향력이 [논어]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어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유명인사 한비자는 법가를 집대성한 사람으로 그의 저서 또는 [한비자]라고 불리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그가 바로 그의 저서에 [노자]를 수록하였을 뿐 아니라 주석까지 달았다. (중략) 이런 점에서 [노자]는 [한비자]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이싿. [사기]가 노자와 한비자를 [노자 한비자 열전]으로 한데 엮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노자]에 주석을 달았던 이들 가운데 신분이 황제인 사람이 다섯이나 된다. (중략) 역사적으로 [노자]를 해석했던 책은 무척이나 많다. 어떤 이는 [노자]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노자]를 해석하여 중국의 본토 종교인 도교 창립의 길을 열었는데, 그가 바로 동한 시기의 장도릉이다. (p. 29) 장도릉은 이렇나 노자를 교주로 받들고 '오두미교' 즉 도교를 세웠다. (p. 30) 그 외에도 수많은 불교 승려가 [노자]를 풀이했다. (중략) 노자는 [주역]을 은연중 풀이해고 공자는 [주역]을 대놓고 풀이했다. (p. 31) 노자는 소를 탔고 공자는 말, 즉 말이 끄는 수레를 타서 서로 달랐다. 왜일까? 소와 말은 두 사람의 다른 사상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두 개의 문화적 부호로, 노자가 음을 중시하고 공자는 양을 무겁게 여겼음을 설명해 준다. [주역]을 읽었다면 말이 건괘, 즉 양의 강건함인 '양강'을 상징하고 소는 곤괘, 즉 음의 부드러움은 '음유'를 대표함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p. 37)

노자의 철학이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영향력을 끼쳐왔음에 대해 저자는 강조하고 역설한다. 쉽게 쓰인 손자병법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후 장자의 <제물론>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도교의 출발점이 노자였다고 하는 내용을 읽으니 놀라웠다. 특히나 종종 등장하는 공자와 대조하는 내용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고 결국 같은 뿌리로 보이는 그런 비교 내용이 나올때마다 무척 흥미로웠다. 이 책은 노자에 관한 책이므로 저자는 당연히 공자의 철학보다 노자의 철학을 우대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철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노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도교나 불교 그리고 공자의 철학을 함께 곁들여 주어서 그또한 흥미로웠다.

노자의 탁월함은 하늘의 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인간사를 미루어 설명하며 인간의 도를 밝힘으로써 천지에 대응한 데 있다. [노자]철학의 핵심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도道'이고, 도의 내적 함의를 한 글자로 총괄하며 바로 '무無'이다. 이는 사마천이 '인위적인 작위 없이 스스로 변화하며 맑고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 바르게 한다'고 말한 것과 통한다. (중략) 많은 사람이 '도'가 지나치게 심오하고 분명하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노자는 친절하게도 후대인들이 어려워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를 두 가지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자연계의 '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의 '아기'이다. (p. 38)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번잡함이나 초조함이 사라진다. 많은 사람이 내게 [주역] [노자]와 같은 고서가 오늘날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다. 이런 고서들이 이 시대에 하는 역할은 내가 감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최소한 세 가지의 쓸모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적어도~하지 않게 하는' 세 가지 인데, 첫째 사람들을 자살하지 않게 하고, 둘째 우울하지 않게 하며, 셋째 치매와 같은 정신적 노화를 늦추거나 걸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p. 50)

저자는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상당히 길게 [노자]의 철학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들을 해준다. 노자와 노자의 사상 그리고 노자가 그런 철학을 생각했던 배경들을 알게 되고 이후 어떻게 노자의 사상이 해석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노자에 대해 판단한 것까지 고스란히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저자는 노자를 읽는 이유에 대해 세가지 쓸모를 이야기하지만 그 이유들이 딱히 내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들과 다른 이유들로도 현대에 노자를 읽을 이유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전읽기란 항상 읽는이 각자에게 나름의 쓸모를 찾아주기 마련이다.

본문의 구성은 무척 효율적이다. 먼저 주제를 제목으로 삼고 한자로 된 원문에 한자음이 덧붙여져 있다. 그 한자 풀이를 옆에 실었고 그 뒤로 '쉬운말' 이라는 짧은 풀이와 '해석' 이라는 긴 풀이가 이어진다. 따라서 한번에 이 한권을 완독해도 되지만 1장씩 읽어도 되고 짧은 해석들만 읽어도 되고 긴 해석들만 읽어도 되고 이 책의 읽는 방법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1장부터 81장까지 읽고나면 노자의 5000여자를 모두 읽게 되는 것이다.

5000자라고 하면 되게 많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많지도 않다. 5천자를 대충 81로 나누면 1장에 60여자가 되는데 한자 60여개로 이루어진 문장을 한글로 풀어쓰면 좀 길어지긴 하지만 한글이 60개 쓰여있다고 생각해보면 60개의 글자가 차지하는 분량은 한문단 정도의 분량이다. 그렇게 80여개이 문단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페이지는 비교적 짧은 단편에 가까울 것이다. 책을 세는 단위 '권'이라는게 옛날에 죽간에 쓰느라 길게 쓰지 못하므로 여러 죽간묶음들을 수레에 담아 시작된 단위인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지만 한 수레의 책을 읽게 되는 셈이므로 많다면 많을 이 분량에 대해선 개인차가 있을 것이나 여하튼 읽을만한 분량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노자의 사상을 한 글자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분명 '도道'일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도'를 0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행行'과 '지止'가 합쳐진 형상이다. '행'은 대로를 가리키고 '지'는 발가락이니 사람이 발을 이용하여 대로를 걷는 모습이다. 금문에서는 각각 길과 머리의 상형자인 '행行'과 수首'가 만나는 모습으로 발전하는데 그때 이미 추상화가 시작되어 '머리로 깨달은 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게 딘다. 소전에서는 길과 머리가 만나는 회의자가 되어 그 뜻을 계승하였다. 그뒤 해서의 형태로 지금까지 쭉 사용되었다. '도'는 처음에는 유형의 길을 의미했다가 점차 무형의 '도리' '이치' '방법'등의 의미로 변용되었고, 그 함의도 갈수록 풍성해져서 길, 경로, 방법, 생각의 갈래, 법칙, 서술 등의 다양한 개념을 아우르게 되었다. 노자의 도는 바로 생각의 큰 길을 뜻하여 천지만물, 자연생명을 인식하는 방법의 도이자, 천지만물 자연생명의 근원적 도이며, 운동하고 변화하는 법칙의 도이다. (p. 68)

갑골문을 표기할 수 없어 0자로 대체하긴 했는데 중국고전이니만큼 한자풀이는 필수였기에 저자가 들려주는 글자풀이는 무척 재미있었다. 글자는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사람의 생각이 변할수록 그 글자도 변하는 것을 보며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길'이라는 것은 의외로 철학적인 무엇인가 보다. '이력'의 한자에 대해 깨닫게 된 이후 다시한번 '길'의 철학에 대해 읽고보니 참 오묘한 심정이 들었다.

'시始'는 계집아이, 소녀이고 '없음'은 마치 이러한 계집아이, 소녀와도 같다. '있음'의 단계는 만물의 어머니다. '모母'라는 글자의 형상은 여女라는 글자에 두 개의 점이 찍힌 모습인데 이 두 개의 점은 여성의 유방으로 성숙한 여인을 상징한다. 이리하여 도는 없음과 있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없음'은 첫 번째 단계이며 계집아아니 소녀를 뜻하고 '있음'은 두 번째 단계로 어머니이자 젊은 부인을 가리킴이 분명해졌다. (p. 74) 없음에서 있음에 이르는 길은 계집아이에서 어머니가 되고 소녀에서 젊은 부인이 되는 과정이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지만 없음은 만물을 직접 생산할 수 없고, 오직 '있음'이라는 단계에 이를 때에만 만물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p. 75) 노자는 여성을 높이고 자주 여서의 비유를 들었던 반면 공자는 남성을 숭상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노자가 공자보다 앞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모계사회가 먼저 있었고 그 뒤에 부계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음의 성질을 숭상하고 여성을 높인 데는 전형적인 모계사회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공자가 남성을 숭상하고 양의 성질을 높인 것에는 전형적인 부계사회의 사상이 엿보인다. (p. 76)

1장부터 앞부분은 해설이 상당히 긴 편인데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원문 풀이만 하면 사상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이기에 독자를 위해 당연한 저자의 선택인 것 같다. 81장으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소설처럼 맥락이 필요한 문장들이 아니므로 순서는 그닥 크게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반복적인 개념이 나오므로 처음엔 이러한 상세한 설명이 무척 유용하다. 노자나 공자나 모두 옛 선현들은 주역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동양사상 하면 아주 간단하게는 음양과 오행의 조화 라는 표현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대분은 음은 어둡고 별로 안 좋은 것 양은 밝고 좋은 것 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노자가 음을 더 중시했다니, 첫 문장부터 여성의 신체를 빗대어 있음과 없음 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다니, 놀라웠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선악과 미추로 나뉘면 그것은 곧 도덕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본질이 아닌 두 번째이자 나중의 것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 자연 만물, 더 나아가 인류 자체를 선악과 미추로 구분한다. 이 때문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함을 싫어하게 되며, 그러다 결국 분쟁이 초래되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는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중략) 원래 하늘과 땅 사이에는 소위 인의라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도의 경지이다. 그래서 선악과 미추를 나누거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천지자연의 경지로 돌아가야 한다. (중략) 노자게 보기에 미추와 선악은 모두 대립하는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자 사물이 '있음'이라는 두번째 단계에 도달해야만 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 보완하고 서로 이루어주는 관계이다. 만일 아름다움이 없으면 추함도 없을 것이고, 선이 없으면 악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형이하에 속하여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시간,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현실의 삶에서 소위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느다는 큰 일깨움을 준다. (p. 95)

노자는 어째서 이러한 사상을 제시했을까? 전국시대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역대 제왕들 또한 함부로 행동함이 그 도를 넘어섰다. 그래서 노자가 말한 성인과 공자가 말한 성인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공자의 성인은 인의를 중시하지만 노자가 말한 성인은 인의를 중시하지 않는다. 인의가 중시하게 된 이유는 바로 대도가 무너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도가 있었더라면 인의를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본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이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인의를 들먹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인의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p. 99)

그래서 [노자]는 신하가 읽는 것이 아닌 제왕께 바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남면지술南面之術'이라고 불렸다. (p. 101)

노자의 철학에서 놀라운 것은 노자의 사상이 제왕에게 바쳐진 철학이었다는 점이었다. 무위 라던가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던가 하는 식의 노자의 사상에 대한 이미지는 가진자들보다는 가지지못한자들의 사상으로 더 알려지지 않았나? 그렇게 위로와 힐링의 측면으로 설명한 책들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정치철학적으로도 경영철학적으로도 저자가 풀어주는 노자의 사상은 가진자들에게 하는 쓴소리였다.

공자와 노자는 그 출발점은 완전히 일치하지만 공자는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서령한 반면 노자는 정면이 아닌 이면에서 접근하여 설명한다. 하나가 정正을 말했다면 다른 하나는 반反을 말하여 음陰을 들어 양陽을 내세우는 식이다. 공자는 당시 사회가 예약이 붕괴하고 백성이 서로 다투며 도적이 횡행하는 모습을 보고 인의를 높여 군자는 군자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다. 즉 예의를 중시하고 법칙을 준수하여 사회윤리의 강령을 세워야 함을 정면에서 직접 주장한 것이다. 이와 달리 노자는 반대 면에서 출발하여 오히려 어짊과 덕을 갖춘 사람을 추존하지 말라고 한다. (p. 106)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 같은 대립을 없애고 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재물이나 능력있는 사람, 희귀한 물건을 숭상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노자가 '뜻을 약하게 하고 뼈는 강하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략) 욕망이 없다면 천하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 것이고, 소위 지혜자라고 하는 이들이 활개를 칠 곳이 사라져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다. (p. 110) 즉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행하지 않고 자연에 부합하고 순응하며 사람의 본성을 따라 행하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는 공자보다 한층 더 높은 고지에서 철저하게 세상을 바라봤다고 할 수 있다. (p. 111)

공자는 지혜와 인의를 강조하여 후대 유가는 공명사상을 인 의 예 지 신 이라는 오덕으로 귀결시켰지만, 노자는 도리어 '인을 끊고 의를 버린다' '영명함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 고 하여 인의나 지혜를 모두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얼핏 보기에는 노자와 공자가 완전히 상반된 양상인 듯 하지만, 사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문제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동일하다. (중략) 공자는 예악이 붕괴한 사회의 혼란을 정면에서 직시하고 이것이 인의예지신을 중시하지 않은 결과라고 여겼지만, 노자는 그것의 반대 면에서 사회의 혼란을 보았다 .예악의 붕괴는 인의예지신을 강조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신을 지나치게 많이 강조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므로 오히려 우리는 잃어버렸던 맑고 고요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이다. (p. 160)

노자의 음의 사상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공자의 양의 사상에 대한 물음표가 생겨나기 마련인데 저자는 이에 대해 반복하여 강조한다. 공자의 사상엔 오히려 한계가 있고 노자의 사상엔 한계가 없다고. 노자의 책 한권 읽었다고 그의 사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규칙을 강조하는 것이 되려 그 규칙이 무너졌기 때문이기에 그럴수록 그 규칙을 더더 강요하기보다는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라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어떤 한가지를 강조한다는 것은 그 강조로 인해 이득을 보는 자들이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음이 무시되고 양이 강조 되면서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비방하면서 그러한 분리적 사고로 인한 결정이 누구에게 유리해졌나? 기준과 구분은 결국 차별과 억압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무법천지 세상으로 내버려 두자는 말은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無에 대해 무위에 대해 조금은 알것도 같다는 말일뿐.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고 기린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17장에 나오는 경구의 일부이다. 아~! 싶지 않은가? ㅎㅎ 이러한 감탄이 고전을 읽는 맛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자와 공자, 석가모니 등 동방의 성인은 하나같이 심령과 심성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며 맑고 비어 있어 외부 사물을 관찰하고 조명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지만, 서양의 주류 사상가와 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는 조급함과 초조함, 불안함이 있으므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봤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서양인이 외재적 추구와 외재적 실증, 경험 지식을 중시하게 된 사유의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이 두 가지 사유방식을 비교하면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나는 둘 사이에 옳고 그름은 없으며 각자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체엇 출발하면 사람의 심령은 맑고 깨끗하며 잠재능력은 거대하다. 조급함은 심령의 본질이 아니라 다만 심령의 외재적 표현일 뿐이다. 오직 심령의 깨끗하고 순수한 본질로 회귀해야만 비로소 거대한 잠재력을 발휘하여 외부 사물을 인지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외재적 추구가 지나쳐 경험적 지식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반면, 내적 실증, 내적 추구의 능력은 크게 퇴화되는 상황이다. 덮어놓고 외적 추구만 할 거이 아니라 반드시 내적 실증, 내적 추구를 훈련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야 한다. (p. 426)

사실 도를 닦고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우리네 문화권에선 그닥 새롭지 않은 문화이다. 그러나 '마음챙김' 이라면서 서양에서는 종교 외의 내적 단련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과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느쪽 이 더 낫다거나 먼저라거나 하는 식의 생각은 말자. 코로나시대에 외떨어진 심정을 다독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원래 하던 방식으로 '나'를 '나의 마음'을 '나의 상태'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수련에 대해 늘 가까이 접해온 사람들이다.

'무위無爲'로 행하고 '무사無事'로 일삼고 '무미無味'로 맛을 본다. 크든 작든 모두 원한을 은덕으로 보답한다. 어려움을 해결할 때는 쉬운 일부터 착수하고 대업을 이룰 때도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하고 천하의 큰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시종 큰일을 하지 않아서 결국 그의 위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승낙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임을 얻기 어렵고, 일을 지나치게 쉽게 보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늘 일을 어렵게 여겨서 결국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p. 525~526)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땐 이런 명언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또 어디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꽃길만 걷자 라는 말을 처음 봤을땐 이런 축언이 어디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 뒤에 결코 축언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어려운 일은 어렵게 생각하고 어렵게 풀어야 하고 쉬운 일은 쉽게 여기고 쉽게 풀어야 한다. 어려운 일을 쉽게 쉬운 일을 어렵게 해내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꽃길만 걷다가는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도 일어나지 못할 수가 있으며 청춘이 당연히 아픈줄 알다가는 청춘에 골병들어 노년까지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차근차근 모든 것을 처음처럼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는 분명 어려우나 그러한 태도를 키워나갈때 결국 많은것들에 대한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 한다.

백성들이 열 가지 백 가지 기물이 있어도 쓰지 않게 하고

백성들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다니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늘어놓을 일이 없다.

백성들이 다시 새끼를 꼬아 그것을 사용하게 한다.

음식을 맛있게 여기고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풍속을 즐겁게 여긴다.

이웃 나라와 서로 바라다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p. 631)

80장의 경구이다. 여기서 시대적 차이로 인해 새끼를 꼬는 것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상고 시대에 백성들이 사물 혹은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나머지는 그대로 의미를 생각해보면 될 문장이다. 저자는 마지막 문장에 대해 왕래가 잦으면 시비도 늘어나는 법이니 굳이 교류해서 무엇하겠는가 자족하고 살면 된다 라고 풀이하지만 나는 왠지 그 풀이로 만족이 되진 않는다. 자칫하면 서로 나몰라라 하고 살라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노자의 사상을 81장 중에서 80장정도까지 읽었으면 그 의미는 아니란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굳이 왕래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

선한 자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지혜로운 자는 해박하지 않고

해박한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고

남에게 모두 베풀어도 자신은 더욱 가지게 되고

남에게 모두 주어도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베풀 뿐 다투지 않는다. (p. 637)

노자의 사상 5000여자 중에서 그 81장 중에서 마지막 경구이다. 마지막 문장이라고 해서 꼭 핵심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 책을 마무리하기에는 좋은 문장인것 같아서 옮겨왔다. 잘은 몰라도 그냥 딱 노자 같달까 ㅎㅎㅎ

도덕경 이라고 하니 왠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책보다 더 예의범절 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주지만 막상 읽어보면 훨씬 자연적이고 하릴없는 순리를 느끼게 되는 책이었다.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이 빈털터리 헐벗은 원시인이 되자는 소리가 아니라 선으로 충만하고 깨달음으로 평온한 상태라는 것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되면서 조금은 관조적인 사람이 되어 느긋해지는 기분이 되기도 했다. 두툼한 벽돌책을 완독했다는 만족감에 뿌듯해하는 여전히 '있음'적 사고를 하는 나 이지만 '없음'으로써 가득해지는 경험을 한 시간 만큼은 충분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래도 조금은 '무위'를 깨달았다고... ㅎㅎ

공자의 논어가 의욕을 일으키는 책이었다면 노자의 도덕경은 그러한 의욕이 부질없음을 알게 하는 책이었는데 그동안의 나의 무력이 게으름때문임을 알면서도 나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그 게으름의 탈출구를 조금은 찾은 것도 같다. 항상 열심히 할 수는 없다. 매일 앞만 보며 달려갈 순 없다. 때론 열심하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바깥의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길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종종 노자의 無를 상기하며 사는 것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고, 가득채워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냄으로 단단해지는 것을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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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대 -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백승종 지음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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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역사를 움직이는 힘과 원리를 찾아서

저자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김경집 교수의 추천사를 믿고 궁금해진 책이다. 동서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현재를 분석해 줄 수 있는 우리사회의 학자가 있다는 발견은 큰 기쁨이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고 세계사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누가 누구를 지배했는가 즉 제국의 역사를 배워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역사시대 이후 시간의 흐름은 어느 한곳에만 집중적으로 흐른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각 시대별로 집중적인 시간대의 역사를 배운다. 그것은 때론 효율적이기도 하고 때론 불가피하기도 하기에 그중에서도 더욱 집중적으로 추린 이 '제국의 역사'는 대중교양서로 읽기에 쉽고 간결하여 좋은 책이었다.

세계사를 제국의 역사로 간략하게 추리면 로마제국 → 몽골제국 → 오스만제국 → 대영제국 → 독일제국 → 현대의 세계제국들 (미중소) 순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딱 이 순서로 전개되며 현대에 와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삼국을 함께 다루는데 세계제국의 역사에 깊게 관여된 것이 근현대 이기에 이또한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에서는 그 제국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하고 현재시점에서의 논평도 곁들임으로써 역사를 과거로도 현재로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역사를 읽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일 테니까.

이 세상에 좋은 역사책이 얼마나 많은가. 매달 쏟아져 나오는 책만 해도 몇십 권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나까지 제국의 흥망을 다룬 책을 쓸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한 번도 세계를 호령한 적이 없는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제국의 역사를 바라보면 어떨까. 영국이나 미국, 독일과 일본 같은 강대국의 입장과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한국 시민의 눈으로 여러 제국의 과거를 응시하자고 다짐하였다. 역사란 매우 복잡한 입체여서 바라보는 각도와 방향이 달라지면 제국의 후예들이 그린 역사의 풍경화와는 다른 그림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일었다. (p. 12)

저자의 말마따나 세상엔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가 또 매일 쏟아져 나오는 책이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책을 읽자고 들면 사실 그 많은 책들이 다 양질의 책들은 아니기에 때론 정말 꼭 필요한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은 없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잘 몰라서일수도 있지만 내가 봤을땐 역사책도 그 수많은 종류중에서 한국인 저자의 한국인의 관점으로 분석한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외국인들이 쓴 벽돌같은 역사서들을 읽을때마다 늘 세계사를 한국인의 관점으로 분석한 책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저자는 로마제국 쇠락이 준 교훈으로 포퓰리스트가 판을 쳤던 것을

몽골제국 쇠락에서는 '몽골은 대칸이 살아 있을 때는 후계 문제를 결정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후계를 둘러싼 분쟁이 거의 언제나 반복되었다. (p. 112)' 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층의 내분을

오스만제국에서는 '이슬람화가 깊숙이 진행되자 학문과 예술이 도리어 낙후하였다. 여기에 군주들의 정복욕이 지나쳐 군사 비용을 과도하게 지출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지배층의 내분이 겹쳤다. 같은 시기 이웃한 유럽 대륙에서는 각종 혁명이 일어나 사회가 날로 혁신되었으나 오스만제국은 도리어 침체에 빠졌다. (p. 131)' 에서 느껴지듯이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짚어준다.

근현대로 올수록 복잡해지는 사회만큼 쇠락의 원인도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모순적 상황에 가끔 쓴웃음을 짓게 되곤 하는데 내겐 영국이 가장 그랬다.

초서의 시에서 보듯 영국인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돈에 관한 욕망을 자유롭게 말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이 무척 발달한 나라였다는 말이다. (p. 170)

대영제국이라고 말하였는데, 제국이라면 보통 한 명의 군주 또는 지배 집단이 여러 언어를 사용하거나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다민족을 다스리는 국가다. 제국의 맨 꼭대기에는 흔히 '황제'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영제국은 황제 국가를 자칭한 적이 없었다. 대영제국은 '모국'인 영국과 그 통치를 받는 여러 식민지로 구성되었(중략)다. (p. 171)

영국의 대학은 산업 현장과 긴밀하게 공조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지 못한 채 퇴조를 겪었다. (p. 227) 전성기인 19세기에 지나치게 넓은 식민지를 획득한 것이, 영국에는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이 되었다. 그러나 대제국의 수도 런던은 19세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본을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런던은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p. 228)

세계사에서 '제국'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나라였던 영국은 산업혁명과 과학혁명과 의회제등 현대사회적 요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태동한 곳이지만 여전히 왕실이 존재하고 귀족문화가 우대받고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돈에 관한 욕망이 집중적인 곳이기도 하다. <부의 흑역사> 나 <머니랜드> 같은 책을 보면 세계 곳곳의 온갖 불법적인 돈들이 어떻게 영국에서 합법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데 가장 상류층의 문화를 고수하는 나라에서 가장 저급한 돈을 취급한다는 아이러니가 어찌보면 너무 자연스러운 결합이라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독일제국의 역사를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는데 '그들은 근대국가를 너무 늦게 출범하였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회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뒤늦게 산업화를 맹목적으로 추진하다시피 하여 부작용이 숱하게 발생하였다. (p. 284)' 라며 정치적 낙후를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사실 독일에 제국이라는 호칭을 붙이는것부터가 논란의 주제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독일이 '제국'이었나? 왜 제국인가? 로마나 이슬람 영국처럼 전세계적 영토를 지배한 적도 없고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네덜란드 처럼 근대 식민지를 많이 개척한 나라에 무조건 붙이는 호칭이 제국은 아닌데 왜 독일제국 이라 하는가? 아마도 로마제국이후 로마황제의 관이 신성로마제국으로 연결되고 교황과의 권력다툼이 주로 일어난 곳이었기에 독일제국이라고 부르는 것 같긴 하지만 독일을 제국으로 부르는 역사가 세계대전으로 쇠락한 독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 맥락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은 좀 아쉬웠다.

자 이제 익숙한 시대인 근현대에 이르렀다. 저자는 100년전 동아시아 삼국의 엇갈린 운명이 일본은 어떻게 승승장구 했고 청나라와 조선은 어떻게 쇠락했는지 살펴본 후 현대의 세계제국들이라 할 수 있을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중국에 초점을 맞춘다.

'혹자는 소련이 종말을 맞게 된 원인을 조지H.W.부시 대통령에게서 찾는다. 1980년댕 고르바초프는 조지H.W.부시 대통령과도 협력적 관계가 이어지기를 소망하였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 부시 대통령은 철저히 외면하였다. (p. 392)' 를 읽으며 부시 대통령 부자가 세계사에 악영향을 끼친게 참 많구나 싶었다. 최근 이슬람역사 관련 책을 읽었는데 중동분쟁의 가장 큰 원인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라고 할 수 있있다.

'오늘날 미국의 보호주의자들은 미국의 경제성장은 관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그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p. 401)' 과거엔 중국이 조선에게 대국이었다면 지금은 미국이 한국에게 대국의 이미지가 있지 않나?! 그러나 미국에 대해 우리가 정말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세계정세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 요인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푸틴은 2020년 초 그들의 복고적 정서를 이용하여 영구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는 2036년까지 권좌를 지킬 수 있다. 그보다 2년 앞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자신을 종신 주석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현대의 차르와 황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평생 집권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재자의 운명이란 갑자기 종말을 맞을 수가 있다. (p. 411)

미국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19세기의 최강대국 영국이 걸어간 길을 미국도 답습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를 보면 모든 강대국의 운명이 그러하였다. 정점을 지나면 얼마 후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p. 412)

제국이라는 호칭을 땅덩어리 크기로 붙인다면 현대의 제국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미국이 맞을 것이다. 땅덩어리 크기가 군사력이나 자본력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늘 비슷하게 여겨졌던 것도 같다. 제국이라하면 일단 커야 하니까?! 그래서 지금도 각자의 영토와 영해를 넓히려고 전쟁을 불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제국들이 각자의 독재로 방향을 잡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를 지배하려면 보편적 이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p. 413)' 라면서 저자는 과거의 제국이 평화를 구축했던 시기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글쎄... 각박해져가는 현실에서 그게 될 수 있으려나...

유럽은 날이 갈수록 더 미국식 경제 관념에서 이탈하고 있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입지는 미국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심각한 갈등 요인을 갖고 있지 않다. (p. 415) 중장기적으로 보면 초강대국의 역할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덩치가 큰 근대적 민족국가는 국제 무대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한계는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중략) 그들은 구시대의 유물이다. (p. 466) 장차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과 노르웨이, 한국 등의 역할에 주목하는 시대가 반드시 올것이다. 이들 강소국은 국제무대에서 노골적으로 자국의 지배적 위치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기술과 혁신을 토대로 역사의 첫길을 열어가는 그야말로 '스마트'한 나라가 아닌가. (p. 467)

저자는 제국의 시대를 살펴보면서 한국의 미래를 밝게 점치며 책을 마무리 한다. 나도 그러한 희망에 기대보고 싶지만 지난 선거는 미국의 트럼프 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기에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한 시민들이 흔들리는 이 사회를 잘 지탱해주기를 바란다. 제국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제국이기에 쇠락했을 수도 있다. 한국은 제국이길 바랐던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다행일 수 있다. 우리는 작은 만큼 빠르게 스마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제국이 아니기에 쇠락을 견디고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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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파 - 조선의 마지막 소리
김해숙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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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대한제국 최초의 국립극장에 올라 소리판을 뒤흔든

여성 소리광대 허금파 실화소설

실화 주인공을 다룬 역사소설이다보니 책날개의 저자 소개 아래에 인물소개가 실려 있었다.

허금파 1866?? ~ 1949??

여자는 소리를 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금기를 깬 최초의 명창 진채선 이후 두 번째로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여성 소리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연희극장 협률사 무대에 올라 창극 <춘향전>의 월매 역을 맡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예술 활동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철종 또는 고종 재위 무렵 김천에서 태어나 고창 동리정사에서 소리선생 김세종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20대에 관기였고 후처가 된 후 뒤늦게 동리정사에 들어가 한성으로 올라갔을 무렵이 이미 30대였던 그는 소리에 대한 꿈을 결코 놓지 않는 예인이었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의 소리꾼들과 함께 자리를 겨루던 때에도 남성 중심의 소리판에서 주역을 맡아 권력에 승복하지 않으면서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는 월매로 무대에 선다. 진채선의 명성에 힘입지 않고 스스로 최고에 오르고자 했던 그의 소리 인생은 세상을 떠난 지 70여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저 위에 적힌 삶 그대로 재현된다.

부족한 자료로부터 한 인물의 인생을 풍성하게 살려낸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겠으나 다큐가 아니라 소설이니까 허구적 요소가 이미 들어가는 장르이므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낼법도 했으련만 좀 부족하게 느껴졌다. 금파의 인생사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서 심정적 공감이나 몰입이 잘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시대사가 잘 풀어진 것도 아니어서 뚝뚝 끊기면 끊기는 대로 그냥 읽어야 하는 소설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구멍이 나면 구멍이 난대로 대충 건너뛰어가며 읽으면 그만인 전개라 딱히 인상적인 장면도 남는 문장도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는데 이러한 생경함은 작품뒤에 실려있는 '심사평'에서 좀 설명이 되는 듯 하다. (이 작품은 '제1회 고창신재효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뒤에 심사평이 실려있다.)

'제1회 고창신재효문학상'은 제한이 있다. '산·들·강·바다가 조화를 이룬 천혜의 자연환경과 고인돌 문화와 마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고대 문화의 중심지요, 유구한 역사를 통해 세계유산을 창조한 자랑스러운 땅 고창! 우리 고창의 이야기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담을 수 있는 장편소설' 한마디로 '고창의 역사·자연·지리·인물·문화등을 소재와 배경으로 한 작품'이어야 한다. (p. 251)

그러니까 제한요소가 너무 많은 상태에서 추렴된 작품이다보니 이조건저조건에 맞추려다 소설적 '맛'이 별로 없는 작품만 가능했던게 아닐까 싶은...

문학상에 대한 엄청난 자긍심도 그렇고 심사평에서의 엄청난 미사여구도 그렇고 좀 과하다 싶다. 좀더 독자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작품으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문학상으로 기억되려면 지나친 허세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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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헤어웨어 이야기 - 신화에서 대중문화까지
원종훈.김영휴 지음 / 아마존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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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에서 헤어웨어까지, 욕망의 역사를 훑어본다

역사의 재미는 이런저런 풍속과 문화의 이야기에서 찾아지는 경우가 많다. 머리카락의 역사라니 있을 법한 주제라는 생각에 구미가 당겼다. 그런데 헤어웨어? 언어의미적으로 볼때 가발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정확히 뭘까;;;

헤어웨어는 신어이다. Hair+Wear=머리카락을 입다 의미로 볼 때 맞지 않는 표현이다. 그래서 낯설고 생경한 말이다. 헤어웨어는 21세기 초반에 씨크릿우먼이라는 기업이 최초로 만든 용어이다. 현대에 들어와 가발이 부족한 머리숱을 감추기 위해 쓰는 용도로 선호되었다면, 헤어웨어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위해 입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p. 28)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은 '씨크릿우먼'이라는 외사의 대표이고 이 책의 부제는 '씨크릿우먼 헤어웨어 창립20주년 기념작품' 이다. 저자와 부제를 보건대 한 회사의 역사와 너무 밀접한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수도 있지만 책의 내용에서 '헤어웨어'가 두드러지진 않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머리카락은 가늘고 긴 세계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류의 각양각색 문화가 채색되어 있다. (p. 31)' 라는 생각은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하나의 주제가 될 법했고 가발관련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자신의 아이템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찾아봤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여졌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들만한 책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처름으로 가발을 애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발 탄생의 배경에는 이집트의 기후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집트는 덥고 건조한 아열대기후에 속한 탓에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이 많았다. 이러한 기후를 이기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발을 착용했다. 이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면서, 가발은 차츰 부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바뀌었다. 다시말해, 지리환경에 영향을 받은 발명품에서 문화적인 의미를 띠는 대상으로 변모해 간 셈이다. 또한 지중해 문명권인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에서도 가발을 즐겨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p. 25)

이집트인들의 그 머리모양새가 가발이었구나~ 그런데 가발쓰면 덥지 않나?? 하지만 뒤에서 다시 언급되는 이집트인들의 가발문화를 보면 그들에게 가발은 일종의 모자였던 것 같다. 역사의 시작은 신화이기 마련, 이집트 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등 다양한 신화 속에서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신선한 머리카락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루살카는 오늘늘 중부유럽과 러시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슬라브 신화 속 여인이다. 루살카와 거의 흡사한 이미지의 여인으로는 그리스로마신화 속 세이렌이 있다. 그러나 루살카는 기괴하고 저주스런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는다. 달콤함으로, 유혹의 그림자로 다가와 손을 내민다. (p. 49)

켈트족에게 머리는 가장 신성한 신체부위였다. 부연하면, 중세 시대 웨일즈에서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행위를 개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가장 큰 경멸과 죄악으로 여겼다. (p. 53)

헤라가 이리스를 보내 디도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리스는 단검을 들어 디도의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냈다. 그제야 디도의 영혼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유로워졌다. (p. 75)

메가라의 통치자는 니소스 왕이었다. 그리고 그의 딸이 스킬라였다. 니소스는 미노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스킬라는 짝사랑 앞에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 (중략) 니소스 왕의 머리카락은 온통 백발인데 정수리 부위에만 보랏빛 머리카락 몇 올이 자라 있었다. (p. 84)

포세이돈은 손자의 머리에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황금머리카락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프테렐라오스의 딸 코마이토가 적군 테베의 장수 암피트리온에게 사랑에 빠진 나머지 아버지를 배신한다. (p. 102)

압샬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로서, 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지닌 출중한 외모의 인물이었으리라. (p. 103) 도주하던 중, 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뒤어이며 허공에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 (p. 104)

신화 속에서 머리카락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은근히 많았다. 이러한 머리카락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가발의 역사또한 일찍부터 시작하게 한건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의 신화가 인간의 가발로 발전되었을때 가발은 미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게 가발은 사치스러운 물품이었고, 그러다 악마의 물품이 되버렸다. 다종다양한 문화가 기독교문화로 수렴되어가던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린 후에도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지속적으로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 가발 이었다.

초판본에 따르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잡고 탑 꼭대기로 올라온 남자들은 왕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후에 다시 출간된 라푼젤 이야기는 순화되어 왕자만 등장한다. (p. 115)

클로비스1세는 사자의 갈기 같은 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이는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이었다. (p. 137) 왕의 긴 머리는 곧 왕의 권위와 권력을 의미했다. (p. 138)

시프의 머리카락은 온몸을 휘감을 정도로 길고, 황금빛이 눈부시게 감돌았을 것이다. 시프의 머리카락은 여신임을 증명하는 상징물인 셈이다. 또 하나의 의미가 숨어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추수를 앞둔 잘 여문 곡식이 자라는 황금 들판을 상징한다. 그래서 시프가 풍요와 수확의 여신이었던 것이다. (p. 143)

삭발례를 하면 정수리의 머리 모양은 원형과 십자가를 띤다. 십자가는 '신과 기독교, 그 자체'를 상징한다. (중략) 원형의 머리모양은 '그리스도가 스스로 죽음을 향하던 최후의 순간에 쓴 가시관'이었다. (p. 153)

유럽의 중세 여성들은 일평생 머리를 길러야 했다. (p. 162) 애냉의 기본형인 뽀족한 모양은 고딕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세인들은 교회에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은 뾰족한 첨탑을 설치하여,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신의 영광을 숭배하고 영원한 생명을 기원했다. 이런 의식이 애냉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에냉을 통해,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을 기원했고, 저 높은 하늘을 향한 간구와 영원을 기원했던 것이다. (p. 166)

대부분의 설화와 동화의 원작은 잔혹하기 마련인데 머리카락의 대명사적 동화인 라푼젤 또한 그러했다. 로마제국 시대까지 유행했던 가발문화는 프랑크왕국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본인의 머리카락의 길이로 상징이 바뀌었나 보다. 북유럽 여신 시프는 긴 머리카락을 자랑했고 프랑크 왕국의 왕들또한 사자갈기 같은 긴 머리를 자랑했다. 하지만 중세여인들의 긴 머리카락은 감추어져야 했으니 고깔 모양의 모자같은 에냉으로라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지금 보면 좀 우습기도 한 수도사들의 둥글게 다듬은 헤어스타일까지도 저런 종교적 의미가 있었을 줄이야. 머리카락은 늘 어떤 식으로든 상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줄리엣과 데스데모나를 이탈리아 태생으로 설정한 이유가 명확해졌다. 중세인들이 금발머리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을 멈추지 않았던 반면, 적갈색 머리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금기시하는 분위기마저 강했다. 적갈색 머리에서 강력한 냄새가 풍겨서 강렬한 내부열기로 가득한 존재하고 생각했고,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적갈색 머리를 악의 의미로 보기까지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여성의 오염된 월경의 피가 뒤엉킨 것으로 연상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두 여인의 금발머리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망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풍속이었다. (p. 173)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과 오델로의 데스데모나 가 금발이었구나;;; 사실 그리스로마인들은 금발이 아니었다. 그래서 포로로 잡아온 북방사람들의 금발로 가발을 만들어 쓰곤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금발에 대한 숭상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다 켈트족이 유럽사회의 권력을 차지하면서 금발이 곧 권력자의 머리색이 되었던 걸까 거기에 종교적 의미까지 더하고 황금에 대한 욕망까지 더하고 하면서 금발에 대한 판타지를 점점 더 키워나갔던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늘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더 큰 욕망을 가지는건지;;;

한때 루이14세는 가발 금지를 지시한 적이 있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 가발금지령을 내려 루이13세 때부터 궁중에서 유행하던 가발착용을 금지했다. 그는 숱이 많은 자기 머리를 좋아했고 가발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중략) 루이14세의 머리에는 지루성 낭포라는 혹이 있었다. 머릿속 혹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항상 가발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략) 루이14세는 침실 옆에 가발 전용 방까지 두었는데, 때와 장소에 맞춰 다양한 색깔의 가발을 애용했다. (중략) 국왕의 애용 덕분에 헤어패션의 유행이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일었다. (p. 189)

그렇게 유럽 귀족사회에서의 가발은 이런저런 변천사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미에 대해 읽어도 나는 여전히 영국 법정에서의 가발이 우스워보일 뿐이다. 프랑스에서 시작했으나 정작 프랑스에서는 사라지고 영국에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가발뿐만은 아니지만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귀족문화를 고수하는 영국사회가 다시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동서양 미인의 조건은 머리 모양에 있었다. 최대한 화려하고, 관능적으로 풍만하고, 가급적 높이 치솟은 상태로 치장하는 것,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은 가늘로 긴 머리카락을 어떻게 꾸미는지가 중요했다. 18세기 조선, 일본 에도시대, 프랑스 절대왕정, 그때를 살던 미인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에 온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예술적 감각을 발휘하는 데는 화가들보다 못지않는 솜씨를 지녔다. (p. 217)

가발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서양이야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책속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 헤어스타일부터 조선시대 가채까지 그리고 몽골식이나 일본식 헤어스타일 까지 동양의 머리카락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동양과 서양은 따로따로 역사를 만들어온 것 같지만 한걸음 떨어져 보면 비슷비슷해 보인다. 18세기에 이르러 더욱 비슷해진 문화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는데, 가발을 쓰던 가채를 쓰던 헤어스타일은 점점 더 크고 풍성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면 대중문화로서 더욱 다양한 상징과 스타일을 선보이게 된다. '앤디워홀의 은발머리가 가발이라는 사실, 앤디 워홀은 20대부터 탈모가 심해져 자연스럽게 은발머리가발을 착용했고, 은발머리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과감히 살렸다. (p. 252)' 처럼 흥미로운 스타의 헤어스타일 이야기부터 '가수는 입과 뇌와 눈빛과 몸짓과 의상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그 노래를 완성한다. (p. 255)' 처럼 헤어스타일에 따른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소설과 영화속 캐릭터와 인형의 머리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헤어웨어가 보편적인 패션의 장르로 정착될 것이다. 생물학적인 머리카락에서, 사람의 손길로 치장된 머리 모양과 헤어스타일로, 그리고 옷의 형태로 한 차원 더 진화한다는 의미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와 속성으로 또다시 변신할 것이다. (p. 303)' 라며 헤어웨어에 대한 호기심을 남기며 책을 마무리한다. 머리카락과 가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역사적 맥락이나 문화적 분석 같은 전문적인 해석은 없었지만 하나의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채집한 저자의 노력엔 박수쳐줄만 하다. 별생각없이 잡지처럼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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