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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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몸으로 제안하는 슈필라움의 심리학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부터 바꿔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불안 없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슈필라움!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텐티티다!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쓰고 파마머리를 한 유쾌한 이미지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저자의 책을

몇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발칙한 제목에 끌려 읽었었는데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한 글들이 전혀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심리학에 여성학과 아동학이 있지만 남성학은 없는 이유가 남성심리는 아동심리와 같기 때문이라는 믿거나말거나 명언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 문화심리학자라기보다는 남성심리학자로서의 꽤 괜찮은 이미지를 주었다고나 할까.


첫기억이 좋았기에 새로나온 저자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처럼 시종일관 유쾌하긴 했으나 전에비해 본인만 유쾌해졌달까.


슈필라움의 심리학 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저자는 슈필라움 이라는 공간적 단어를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심리학자의 눈에는 슈필라움 이라는 단어가 아주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이 단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놀이 와 공간 이 합쳐진 슈필라움 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슈필라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

저자는 심리학자로서 나름 잘 나갔었다. 교수로서 방송강연에도 자주 출연했었다. 책도 꽤 많이 팔렸다. 그러다 일본에 그림유학을 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여수에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짓고 있는 중이다. 그림그리고 글쓰면서. 남자들은 자신만의 공간이 꼭 필요한데 현대엔 그게 없다보니 자신만의 공간인 자동차안에서 그 공간을 지키려 공격성이 높아지고 자신을 가로막는 다른 차를 못 참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들이 행복해지려면 자기처럼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과 능력 있는 저자와 같은 처지의 남자가 저자처럼 마음만 먹으면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비단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적 존재이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갖고 싶다. 나도 갖.고.싶.다. 슈필라움!


'슈필라움'을 꿈꾸며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삶을 '조선일보'에 '김정운의 여수만만'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그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한다. 여수에 짓고 있는 자신만의 슈필라움에 생각보다 지출이 초과되고 있어서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고 한다. 음... 이질감이 확;;;


은근 톡 쏘는듯 하면서 유쾌한 문체는 여전히 재밌게 읽혔다. 사이사이 사진이나 그림들도 많아서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대학시절, 여름방학이면 '일찍 배가 끊기는 섬'이 최고였다. 마지막 배가 떠난 항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 친구에게 진짜 착한 표정으로 '오빠 믿지?' 를 연발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때 그 '오빠 믿지?'의 청춘들이 이제 늙수그레한 엄마, 아빠가 되어 자식들에게 수시로 그런다. '엄마는 아들을 믿는다!' '아빠는 우리 딸을 믿는다!' 젠장, 그런 믿음은 없다. 서로 잘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가?


타인이 나와는 '다른 생각' , 경우에 따라서는 '틀린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진정한 신뢰가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이건 정말 주요한 이야기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강요다. '엄마는 믿는다' 또는 '아빠는 믿는다' 고 이야기 할 때 '자녀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부모, 자식 관계만이 아니다.

초반에 읽은 위 구절이 인상깊었다. 시원시원하고 빵빵터졌다. 하지만 슬슬 그런 분위기는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4차 산업혁명'은 독일에서 이미 존재하던 '인더스트리 4.0' 이라는 개념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디지털화하지 않고는 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독일 제조업의 구조를 '인더스트리 4.0'이라는 개념으로 혁신해보자는 거였다. 이 '구호'를 클라우스 슈바프는 학술적 용어처럼 들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슬쩍 바꿔치기했다. 이따위 얼치기 용어를 한국 사회는 마치 엄청난 사회변혁을 예고하는 학문적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종말을 고하는 초연결, 초지능 사회를 아주 낡은 산업사회적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이야기다. '담론적'이어야 할 학문적 개념을 '단언'하는 사회는 아주 '후진 사회'다.

저자의 직설적 표현이 거북하기까진 아니었던것 같은데 이번 책에 나오는 저자의 '단언'들은 좀 거북스런 곳이 많았다. 나도 4차산업혁명 이니 뭐니 호들갑 떠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렇다고 저자만 알고 다른이들은 다 몰라서 4차산업혁명을 사회적 이슈로 화두로 삼고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후진사회가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용어 좀 쓴다고 해서 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충이 취급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나는 유시민 작가가 몹시 불편하다. TV를 켜면 매번 그가 나온다. 그의 '구라'는 갈수록 현란해진다. 게다가 그가 쓴 책까지 모조리 잘 팔린다. 그게 나는 그냥 힘든 거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잘 생겼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아주 간단히 제쳤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가면 꼭 새 책을 내서 내 책을 끌어내리는 혜민 스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따돌렸다. 그는 '스님' 이고 나는 '남자'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wow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책의 본문중에 자주 저자 자신의 외모부심을 드러내는데... 거울 안보시나? 유시민이 잘 생겼다는 게 아니라 김정운도 잘 생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대놓고 불편한 사람을 불편하다 말하시면서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먼저 찾으시니 나도 대놓고 말해본다. 나는 당신의 글이 몹시 불편하다! 당신이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책은 읽기에도 불편한 구성의 책이었다. 사진과 그림이 많은 건 분위기 전환도 되고 눈요기도 되고 좋은데, 문제는 문장을 끊어버린다는 거다. 예를들어,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하고 뒷장은 양면에 사진이다. 다시 한장 더 넘기면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나같은 경우 한문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 사진의 장을 거꾸로 넘겨 그 앞페이지의 문장을 시작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이렇게 글의 중간에 문장을 끊고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 앞 문장을 다시 볼려고 페이지를 다시 거꾸로 넘기곤 해야 했다. 이건 내 기억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여튼 불편하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체험이 탈출구다.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각종 평론가의 시사 프로그램 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존재의 불안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문화와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이토록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 쉽게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허걱!', '세상에나!'로 시작하는 스마트폰 문자에 자꾸 손이 가거나, '집단 불안' 마케팅이 반복되는 TV리모컨을 집어 든다면 당신은 교양이 없거나...... 이번 생은 틀린 거다!

헐... 또 할 말을 잃는다... 고상하게 미술관 가시고 음악회 가시는 저자가 그토록 어려운 이론을 그토록 쉽게 설명했는데도 내 삶에는 미술관이나 음악회는 여전히 생소한 단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교양이 없거나 나의 이번 생은 틀린거라고 저자가 말한다면 저자에게 가요 한곡 틀어주련다. 장기하 의 '그건 니 생각이고'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1 도 없다. 나도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의 중요성에 아주 공감하는 사람이다. 갈수만 있다면 나도 자주 가고 싶은 곳들이다. 다만 갈 만한 상황이 못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기현상이 바로 '냉소주의' 다. 죄다 비겁한 미래 예측 을 퍼 나르며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전능한 신 놀음'을 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비겁한 미래 예측이 난무할수록, 아주 자세하게 과거를 기억애햐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숨기기에 능한 냉소주의' 와 '말 바꾸기에 능한 냉소주의' 가 난무한다. 한쪽은 '은폐한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다른 쪽은 '거짓말한다'고 상대방을 비난한다. 해결책은 아주 디테일한 기억뿐이다. 은폐했던 과거, 수시로 거짓말했던 과거를 아주 자세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미래가 열린다.

동감이다.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은폐하고 거짓말하는 냉소주의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 이 '기억나지않습니다' 아닌가?! 저자여, 실력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친한 분들에게 알려주소, 당신들이 한 일을 기억하라고.


세계사의 전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통해 한국은 세계10위권의 경제적 부를 얻었다. 그러나 상호 인정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실펀하는 일은 건너뛰었다. 당시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한국 사회의 엄청난 사건들은 그렇게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줄 알았던 '상호인정'이라는 근대 시민사회의 근본 원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갑질, 무시, 모멸감 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담론과 산업화 세대의 급격한 정치적 몰락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문제'였다는 거다.

제대로 된 이념을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사건의 핵심을 인간적 도리 같은 윤리문제로 축소시킨다. 왠지 꼰대 분위기가 풍기는데... 아니나다를까


과거 독일에서 십삼년, 일본에서 사년을 사는 동안 나는 아주 심각한 '국수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전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우울'이다.

저자는 '민족'은 원래 없었던 말이라고 한다.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와 '종족'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 '민족', '종족' 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거라고. 나도 뭐 민족이라는 말로 끼리끼리 뭉치는 듯한 뉘앙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좀 거북하다. 한민족으로 보자는 말이 아니라 다른 국가로서 이민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같은 언어를 쓰는 동질감이 높은 존재로서 포용하는게 아니라 남한만을 동질의 민족으로 보는 저자의 편협한 국수주의적 시각이 불편한 거다.


별 고민 없이 거론되는 베트남식, 중국식 개혁 개방은 결코 대안이 아니다. '동네 형'이 잘사는 것과 '우리 형' 이 잘 사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매번 추석이면 겪지 않는가? 통일은 정치,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통일은 심리학이다.

북한을 생판 남으로 보는 국수주의자라면서 이럴 땐 '우리 형' 이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자는 '동네 형'으로 보고 이야기를 풀었어야 하는게 논리적 맥락이 맞는 거 아닌가?


저자의 슈필라움은 분명 부러운 공간이다. 특히나 벽면을 가득채운 책장과 책들에 둘러쌓인 공간에 대한 저자의 로망은 나의 로망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공간을 가지게 됐지만 나는 언제 가질 수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샘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글이 더이상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들어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성취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습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 아니라 멋지고 포용적으로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웠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바닷가에 멋진 작업실을 갖고 있다면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너무 자기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는 것 같다. 저자에게는 나와 너무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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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앤 마더
엘리자베스 노어백 지음, 이영아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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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ell Me You're Mine

소설은 대부분 원제목이 확 와닿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원제목의 여운이 길다.

딸아 너는 내거야! 내거라고 말해!!


20년 전 죽은 딸이 눈앞에 나타났다

두 엄마와 딸, 여성 셋이 펼치는 최고의 심리 스릴러

'아동 실종'이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실을 주제로 독자를 사로잡다

아동실종이라는 주제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아이를 둔 부모라면 단어만으로도 가슴떨리는 공포이기에...

나는 김영하 작가를 안좋아하는데 그의 단편 중에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이 있다. "아이를 찾습니다"

마트에서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부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감쪽같이 아이를 유괴당한다. 부모는 미친듯이 아이를 찾아 헤매고 시간은 흐르고흘러 엄마는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아빠는 생업도 버린체 매일 아이의 사진이 실린 전단지를 나눠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를 되찾는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라고 믿는 여자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그여자가 죽으면서 친부모의 존재를 갑자기 알게 된다. 십수년만에 만난 부모와 아이는 낯설고 불편하다. 아이는 죽은 제엄마가 유괴범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미친여자가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초라한 집에서 지친기색의 남자가 아빠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빠는 그토록 찾아헤매던 아이를 찾았으나 그사이 아내는 미쳤고 집안경제는 파탄났으며 사춘기의 아들은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유괴사건을 다룬 소설은 대부분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피폐해져가는 순간을 다루기 마련인데, 한참후 다시 만났을때의 상황을 표현한 작품의 삭막함이 읽기에 너무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찾아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단순함이 아닌 것은 신선했지만 찾고난 현실이 찾기전보다 더 어려워진 상황이 너무 씁쓸했다. 그렇게 불편한데 왜 그토록 아이를 찾아헤맸던 것일까 작가의 차가운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

마더앤마더 는 극단적 모성의 양끝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소설이었다. 아동실종 사건을 바탕에 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이 너무 다른 두 엄마.


두 엄마의 사랑과 집착, 희망과 광기가 맞붙다

이사벨의 진짜 엄마는 누구인가

오래전 잃었던 딸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여자 - 스텔라는 행복한 가정을 꾸린 성공한 심리치료사다. 이사벨이라는 젊은 여성을 처음 만났을 때, 스텔라는 그녀가 자신의 딸 알리스라고 확신한다. 20년 전 가족 휴가 때 비극적으로 익사했다는 아기. 그녀는 정말 그 알리스일까?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위험이든 감수할 각오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여자 - 세르스틴은 딸 이사벨을 사랑한다. 이사벨은 아버지가 죽은 뒤 행동이 이상해졌고 급기야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심리치료사가 이사벨의 인생에 끼어들어 위험한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세르스틴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영원히 딸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싸우는 여자 - 이사벨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을 구한 후 그것이 끔찍한 실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후로부터 그녀 자신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험에 빠뜨를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데...

저자는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작가로 이 작품이 첫 소설이라고 하는데 첫 작품부터 대박이 난 것 같다.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스톡홀름에 살면서 출산 휴가 중 이 심리스릴러를 쓰기 시작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감성이 우리정서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드릭 베크만 의 오베라는 남자를 시작으로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사회 주변에 사는 이웃들 같아서 친숙했는데, 마더&마더 도 거부감 없이 너무 익숙한듯 읽혔다. 영미소설을 읽을때 느끼는 정서적 거리감이 없어서 신기했다. 저 멀고먼 북유럽반도와 우리의 정서가 이렇게 비슷하다니.


이사벨은 남다른 성장기를 보냈다. 집이외에 어느곳도 놀러가보지 못하고 친구도 사귈 수 없었고 정서적으로 늘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인생을 속속들이 다 알려고 하고, 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싫어한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고 사람들은 위험해, 오래전부터 이렇게 믿어온 사람이다. 아무도 믿지마. 큰일나. 그리고 그건 내게 독이 됐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 아주 다른 인생을 살았다.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나 혼자만의 외로운 별.

이사벨은 아빠의 응원으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드디어 독립을 한다. 처음 나와본 사회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활기에 넘쳤으며 자신이 괴물인것만 같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사랑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독립후 얼마안되 아빠의 죽음으로 엄마와의 갈등이 시작되지만 엄마외에도 자신의 곁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있었다.


스텔라는 어린 나이에 알리스를 낳았지만 엄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기를 너무 사랑했다. 그런데 아기가 유괴됐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다들 아기가 죽었다고만 한다. 그 상처를 공유해주는 남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들도 있지만 단 한번도 잃어버린 딸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다 갑자기 알리스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 스텔라는 혼란스럽다.

자식을 애도하는 건 외로운 일이다. 그리움과 상실감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알리스가 살아 있따는 걸 알게 된 지금 그 슬픔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돌아온 것이 왠지 슬프기도 하다. 행복에 겨워 기뻐 날뛰며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데. 하지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뿐이다. 그 오랜 세월 도둑맞은 시간.

세르스틴은 고독한 사람이다. 상처가 낫지 않게 점점 헤집으며 사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결국엔 이 아이도 깨달을 것이다. 그저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오로지 내 딸이 잘되기만 바랄 뿐이다. 이사벨도 이해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인형같던 딸이 성인이 되었다. 세르스틴과 이사벨은 그 간극을 아빠이자 남편인 한스의 죽음으로 건널 수 없는 강 이편과 저편에 서게 된다. 이사벨은 세르스틴과 다른 삶을 선택했다. 함께하는 삶.

하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와야 한다. 엄마의 주장대로 나를 잘 키우고 인도해줬다면 엄마가 나를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사벨의 독립은 세 여자의 독립이기도 하다. 아이가 자라서 당연하게 해야 할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와 상처를 기억하느라 피폐해진 엄마의 독립을 부추긴다. 이 작품은 세 여자의 인생독립기 이기도 한 소설인 셈이다.

범인이 누구일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소설도 재미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알겠는데 알면서도 몰입되는 스릴러의 재미는 남다르다. 이 책은 스릴러의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면서 여성의 심리묘사가 탁월한 작품이었다. 인물심리에 빠져들어 읽다가 나도 미쳐가는 줄 ㅎㅎㅎ


미국여성작가중에 샬롯 퍼킨스 길먼 의 누런벽지 라는 단편이 생각난다. 심약한 여자의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묘사가 그 미쳐가는 과정이 묘하게 공감가는 단편이었는데, 마더&마더의 심리묘사도 그랬다. 고집스럽고 갈팡질팡하고 혼란스러운 세 여자의 심리에 집중하느라 마음이 지쳐갈때쯤 휘몰아치듯 순간에 끝나버린 결말은 조금은 급작스러워서 다 읽고 나서 멍 해지지만 곧 다시 찬찬이 생각하게 된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구조의 소설이라서 왠지 언젠가 극장에서 다시 보게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잡생각이 나지 않게 훅 읽히는 재밌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역시 재밌고 볼 일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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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산다는 것 -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게랄드 휘터 지음, 박여명 옮김, 울리 하우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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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속 저자를 한참 바라보게 되는 책이었다. 깊이있는 눈빛 온화한 미소 중후한 매력이 너무 멋있어서 ㅎㅎ

저자는 신경생물학자로서 뇌과학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통찰을 대중에게 친숙한 언어로 전하는 독일의 대표적 지성인이라고 한다.​ 


기술만능주의와 환경적 재앙 그리고 기업의 착취와 개인들의 탐욕 등 존엄을 잃은 세계에 지금 가장 절실한 삶의 방식은 '존엄'을 생각하고 찾아내는 것이라고, 죽음이 존엄하길 원한다면 삶부터 존엄해야 하지 않겠냐고, 존엄하게 사는 것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인간 두뇌의 처리 능력을 넘어선 정보를 폭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로 지나치게 분주하며,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고, 온갖 추축과 편견, 평가와 의도의 포로가 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인간은 어느새 순식간에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다.

며 저자는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서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저자는 존엄이란 무엇이고 인간에게 존엄이란 무엇인지 탐구하여 그 결과를 독자와 공유하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존엄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타인에 의해서만 다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때에도 존엄성은 상처를 입는다.

존엄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공동체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서로의 교류속에 배워가는  존재인데 존엄을 알지 못하는 삶은 상대방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존엄하게 살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존엄을 깨닫고 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되고 존중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남을 위해 존엄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존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유지하며 지금처럼 살아갈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다.

지금처럼 지구를 소모하고 산다면 지구에서 인류는 얼마나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파괴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을 찾아 그곳으로 이주하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그럴리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금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한, 그 행성 또한 머지않아 지구처럼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인간다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하면서 저자는 그 해답을 '존엄'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존엄이라는 관념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인간 뇌의 조직과 기능 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하나의 '표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성향이라고 한다. 존엄하지 않은 행동은 단기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전략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존엄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도 한다. 개인의 행복한 삶과 모두의 공존을 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지켜줄 관념을 따라가야 함을 저자는 주장한다.


존엄성과 뇌에도 열역학 제2법칙이 관련된다고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이란, 에너지가 자연의 모든 현상에 고르게 분배된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기 조직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우리의 뇌는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그 해결책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효과가 있는 방법은 뇌 기능의 원리이기도 한 '단순화'작업이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단일 움직임들을 조정할 목적으로 상위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내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한다. 우리가 사고방식, 태도 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 개인이 지닌 삶의 태도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해온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과 태도 역시 우리 뇌에 뿌리를 내린 상위 행동패턴에 따라 조정되고 형성되는데 이것은 유년기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유치원교육에서 존엄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경험을 중요시 여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때로는 긍정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인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 표상을 만든다. 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그에 대한 신념이 생기는데 이 관념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될 때 우리 뇌에는 특별한 내적 표상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바로 '존엄'이라는 표상.

동물에게는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는 신경망이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걷고 먹이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경망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체 태어나는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다른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 태어난 이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인간다움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내면에 지닌 존엄이라는 나침반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알고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은 아주 깊은 내면에서부터 존재한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내면의 나침반, 이 나침반을 통해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세상을 살아갈 수 잇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수단으로 취급당한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보다 노련하게 이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익힌다. 하지만 자신의 존엄함을 인식한 사람은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성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이미 자신의 존엄을 인식하고 있기에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곧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타인의 존엄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엄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생각보다 존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하는 시대라고 요구한다. 이토록 존엄하지 않은 인류의 발전을 그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멈출 있겠느냐며. 존엄한 행동으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킬 뿐 아니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지고 보여주어야 한다고. 자라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도록 도울 기회가 아직 있을 것이라고.


자기 존엄성을 인식하는 능력은 그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 명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존엄함이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위해 책임을 지는 태도의 문제다. 얼마나 존엄한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존엄함을 인지하고 상대방을 존엄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을까?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나는 나의 존엄함을 인식한 사람일까?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인간의 생각에 맞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스스로 바꾸는 것.

이제는 발전의 방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관념과 인식을, 즉 내면의 나침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을 바꾸는 것... 죽음의 존엄성을 생각하기 전에 삶의 존엄성을 생각해야 하는 시대...내면의 나침반을 찾아야 하는... 저자가 알려준 나침반 '존엄함'에 대해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매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살아가겠다고. 자기 자신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신뢰 속에서 조금은 호기심 넘치는 삶을 살겠다고.

인공사회 첨단사회가 되어 갈수록 보다 더 인간다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책이 많은 것 같다. 기계처럼 소모되어지는 인간으로 살던 시대를 벗어나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일까? 기계처럼 소모되다가 사라질 위기이므로 인간만의 인간다움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일까? 시대의 변화는 늘 새로운 생각의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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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고민사전 : 청소년.학부모편 - 나를 믿어야 꿈을 이룬다 특서 청소년 인문교양 5
박상미 지음 / 특별한서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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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고민사전

나를 믿어야 꿈을 이룬다 - 청소년 학부모편

마음치유 안내자 박상미, 청소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학부모에게 공감, 소통의 솔루션을 주다

청소년을 둔 학부모들의 고민에 조언을 해주는 책인줄 알았는데, 청소년들의 상담내용을 옮긴 책이었다.​


저자는 청소년기부터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으나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고 스스로 대화화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강력한 힘은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본인의 회복경험을 토대로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글을 쓰고 다큐영화를 찍고 강연을 하고 있는, 경찰대학 교양과정 교수이자 교도소와 소년원에 가서 마음치유수업봉사를 하는 이야기꾼이다.


1장 상미 샘 이야기 에서는 기존에 했던 특강 3편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고

2장 청소년의 슬기로운 감정생활 에서는 청소년기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고민사례도 함께 제시하고 있고

3장 비밀의 방 - 마음상담실 에서는 저자가 상담했던 청소년들의 사례를 담고 있다.

4장과 5장은 부록같은 부분으로 성공한 청소년 방탄소년단과의 인터뷰와 본인의 이야기를 짧게 소개하고 있다.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꿈을 이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저는 마침내 그분들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곁에서 응원해주면서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대한을 발휘하고 마침내 꿈을 이룬다는 것이었어요.. 더 훌륭한 사람은 그런 '한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힘든 사람들에게 든든한 '한 사람'이 되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지난 시절의 고통이 현재의 스펙'이 되었다는 겁니다. 고통의 터널을 잘 통과한 사람일수록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고 있더라고요.

저자에게도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시기가 있었다. 중2때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안좋아지면서 부모의 잦은 싸움을 보던 시기 우울증과 악성그레이브스병이 왔고 좌절에 빠져있던 중3때 고등학교에 성적미달로 진학하지 못하는 고등학교 재수기간 1년을 보내게 됐다고 한다. 그때 저자의 아버지가 매일 시립도서관에 데려다 주면서 '딸아 지금 겪는 고통이 나중에 너처럼 마음 아픈 사람들을 살리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데 거름이 될거야' 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저자에게는 저자를 믿어주는 '한 사람' 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처럼 마음아픈 이들을 공감해주고 치유의 강연을 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자신만의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다. 자기자신이 힘들어 봤기 때문에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인데,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전문적인 조언들보다 비록 의학적인 면에서는 비전문적일지라도 이런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는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 이랄까...


저자 본인이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소년원의 청소년들과, 미혼모들과, 불우한 청소년기 때문에 범죄자가 된 재소자들의 마음치유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미성숙한 시기에 자신을 믿어주는 '단 한사람' 이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라도 공감해주고 힘을 낼 수 있도록 꾸준히 치유수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청소년기때 경험하는 뇌세포는 강화되고, 경험하지 않는 뇌세포는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청소년기때 다양하고 의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면 관련된 연결망이 강화되므로 청소년들에게 청소년기의 특징을 이해시키고 그땐 그럴 수 있다고 달래주며 힘들땐 참고하라고 조언해주는 내용들이 많았다. 청소년기의 큰 상처는 청소년기에 치유하고 극복해야지 내버려 두면 어른이 되서 언젠가 터지고 만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기란 힘든 일이므로 저자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어른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읽다가 웃음이 난 부분 있는데, 욕하고 싶을 때 특이한 식물 이름을 말하라고 하면서 두 가지 식물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존넨쉬름(독일 산 장미이름), 개쉽싸리(쌍떡잎 식물)

이런 된장에서 수박씨발라먹을 놈같으니 라거나 쌍시옷이나 자음들로만 욕하는 것 외의 참신한 용어를 알게 된것 같기도 ㅎㅎ


감정을 평소에 잘 표현할 줄 알아야 속에만 쌓이지 않게 되는데 자주 사용하는 감정어휘가 표로 정리되어 있고, 긍정적인 말들을 소리내어 말해보아야 긍정적 기운을 얻을 수 있는데 긍정적 단어들도 표로 정리되어 있어서 이 2가지 표의 단어들은 책상에 붙여 놓고 가끔이라도 의식적으로 사용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상담 사례들에서는 다양한 고민들과 조언들이 옮겨져 있었다.

분노조절이 안되요, 복수하고 싶어요, 왜 나만 상처받을까요, 사랑받고 싶어요,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열등감때문에 힘들어요, 이미 늦은것 같아요, 이성친구와 성관계까지 있을법한 이야기들 해봤음직한 고민들이 상담되고 있어서 청소년들의 사고방식이나 생각유형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청소년 학부모편이라고 되어 있지만 청소년들에게 말하듯이 서술된 글들을 읽으며 부모들은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왜 직접적으로 부모들에게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냐고 불만스러울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청소년들과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듯이 이 책을 읽게 함으로써 청소년들에게 공감해볼 것을 넌즈시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요즘 청소년들이 이래요 하면서 문제라고 하지 말고 공감하고 믿어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큰 아픔 이건 작은 아픔 이건 아픔 없이 자란 삶이 어디 있을까.. 그 아픔을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할 지는 결국 자기자신에게 달린 것이지만,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옆에 있다면, 좀 덜 힘들게 좀 덜 아프게 가까이에서 의지가 되는 어른 이 한 명 이라도 있다면 생각보다 잘 이겨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저자 본인이 그런 어른 이 되고 싶고, 이 책을 읽는 이도 그런 어른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어른일까? 그런 어른이 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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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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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더미북 으로 받은 책은 시집사이즈의 작고 얇은 가제본 책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작은 사이즈라 받았을때는 당황스러웠지만, 몇 쪽 안되는 글을 읽고 나서 본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반가움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몇 편의 글이 이렇게 매력적인데 본책은 얼마나 다양한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장소, 사람, 문화를 연구하는 지리학자는 여행에서 무엇을 보는가

여행지를 고르지만 말고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해야 합니다

역사를 알면 여행이 풍부해지듯이 장소에서의 의미를 끄집어내면 여행이 더 즐겁다

나는 여행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에세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하며 쓴 에세이는 더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자랑하는 듯한 여행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여행가서 왠 쓸데없는 개인적인 감상이나 끄적거린 글들은 더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행에서의 의미를 여행지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와 연결시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내겐 매력적이었다. 지리를 관광으로 보지 않고 여행을 개인적 경험으로만 여기지 않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넓혀주기 위한 인문 여행이 되려면 지리를 잘 아는 지리학자가 여행을 인문학적 으로 한다는 것 만큼 적합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행기에서 인문학을 어렵게 고전적 의미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저 좀더 폭넓은 사고의 프레임이라고나 할까.


여행은 이처럼 어느 하나 같은 곳이 없는 다양한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서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여행을 함께 해봐야 그 사람의 진정한 인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낯선곳에서의 여행을 함께 하다보면 돌발적인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시간을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감탄하게 되는 여행의 시간들은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이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면서도 살아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어느 책에선가 살아가는 것이 힘들때 살아있으므로 살아지는 데로 살뿐이라는 (표현은 달랐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의미상으로는) 구절을 읽고 인상깊게 남았었다. 그때는 살아 '가는' 것과 살아 '지는' 것에 대해 오랜 생각을 했었는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가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니 책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게 된다.


영어에 take place 라는 숙어가 있다. '사건이 발생하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 숙어를 직역하면, '장소를 취하다' '장소를 갖다' 라는 뜻이다. 인간들의 모든 사건과 현상이 반드시 장소를 취해야만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장소를 취하는 여정 속에서 이루어 졌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여행 역시 새로운 장소를 취하는 경험이기에 여행의 핵심은 장소다. 장소는 그렇게 인간 존재의 기반이 되는 필연적 무대다.

삶은 여행이다 라는 말은 흔하디 흔한 광고문구 같은 문장이었는데,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삶이 여행이다 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장소의 의미... 여행은 장소를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는 시간이고, 삶은 장소를 취하는 것이니 삶은 정말 여행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이 있다. 거꾸로 하면 보고 싶은 만큼 알아야 한다.

짧은 글이 담긴 더미북이었는데도 맘에 드는 문장이 꽤 여러 곳에 있었다. 특히 이 문장이 맘에 들었다. 알고 있는 문장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구절들은 더 깊은 깨달음을 준다. '보고 싶은 만큼 알아야 한다' 내가 비록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은 못되지만 요즘 책을 읽어대고 있는 (그냥 읽는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 읽어대고 있다는 느낌이라;;;) 것을 잠시 생각해 보니 내가 보고 싶은 게 많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는 자신의 몸속에, 즉 마음속에 국경이 내재되어 있다. 지리적 경계의 안쪽이나 바깥쪽 어디로든 마음속의 국경은 지워지지 않은 채 항상 여행자와 함께한다... 여행자의 몸과 함께 이동하는 국가와 국경은 여행자 자신을 항상 경계상의 존재로 사고하게 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글로벌화 시대에도 국경의 위상은 변함없이 굳건하다.

저자가 경험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외국에서의 경험을 나도 비슷하게 한 적이 있다. 한국이라는 국적은 늘 북쪽에서 왔냐 남쪽에서 왔냐 라는 질문을 동반한다.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분단국가 한국을 잘 모른다.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만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을뿐.

여행은 전혀 예기치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해준다. 경계 너머를 여행하며 경험하는 '나' 밖의 것들이야 당연히 낯설게 다가오겠지만, 그것들을 경험하는 나 자신조차도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경이롭다.

내가 경험한 여행들은 나 밖의 낯선 것들을 경험할 뿐이었다. 낯선 '나' 를 경험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낯선 나를 경험하는 여행이라...


지리학적으로 모든 장소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중심이나 주변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처럼 국가의 경계를 지워 버리고, 경계의 안쪽과 바깥쪽을 뚜렷이 구분해 위계적으로 바라보려는 삐딱한 시선을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 뒤에 연결되는 에피소드에서 호주 멜버른역 앞 여행 안내소에서 본 지도 이야기를 한다. 그 지도는 남반구와 북반구가 뒤지집혀있고 '호주는 저 아래에 처박혀 있지 않다' 라는 글귀가 큼직하게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 뒤집혀 있다고 말할 뿐이지 사실 뒤집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여행의 멋중에 하나는 이렇게 생각의 틀을 확 뒤집어주는 경험이 아닐까.


이미 공식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세계 곳곳의 지명 중에는 원래의 원주민 지명을 무시하고 서구 세력이 붙인 것들이 많다.

그 예시로 아메리카, 인디언, 인도네시아, 서인도제도, 라틴아메리카, 빅토리아폭포, 코트디아부르, 근동, 중동, 극동, 필리핀, 에베레스트산, 짐바브웨, 쿡제도 등 이름하나하나마다 놀랐다. 나도 모르게 서구적 사고로 그 지명들을 사용하고 바라보고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안되는데... 적어도 안된다는 것은 알아야 하는데... 제대로 보기 위해 결국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척도로 국가를 평가하는 습성이 얼마나 잘못되고 그것이 여행자들의 생각과 행동에 얼만큼 독이 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볼수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할땐 우와! 하고 동남아나 남미를 여행할땐 이런! 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자뻑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그들이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제3국을 여행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데.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여행은 잘 모르는 것을 인정하게 해주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다름을 이해하려면 결국 알아야 하고 그렇게 이러한 책이 필요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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