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몸으로 제안하는 슈필라움의 심리학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부터 바꿔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불안 없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슈필라움!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텐티티다!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쓰고 파마머리를 한 유쾌한 이미지의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저자의 책을
몇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발칙한 제목에 끌려 읽었었는데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한 글들이 전혀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심리학에 여성학과 아동학이 있지만 남성학은 없는 이유가 남성심리는 아동심리와 같기 때문이라는 믿거나말거나 명언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 문화심리학자라기보다는 남성심리학자로서의 꽤 괜찮은 이미지를 주었다고나 할까.
첫기억이 좋았기에 새로나온 저자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처럼 시종일관 유쾌하긴 했으나 전에비해 본인만 유쾌해졌달까.
슈필라움의 심리학 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저자는 슈필라움 이라는 공간적 단어를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심리학자의 눈에는 슈필라움 이라는 단어가 아주 특별하다. 흥미롭게도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이 단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놀이 와 공간 이 합쳐진 슈필라움 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슈필라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
저자는 심리학자로서 나름 잘 나갔었다. 교수로서 방송강연에도 자주 출연했었다. 책도 꽤 많이 팔렸다. 그러다 일본에 그림유학을 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여수에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짓고 있는 중이다. 그림그리고 글쓰면서. 남자들은 자신만의 공간이 꼭 필요한데 현대엔 그게 없다보니 자신만의 공간인 자동차안에서 그 공간을 지키려 공격성이 높아지고 자신을 가로막는 다른 차를 못 참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들이 행복해지려면 자기처럼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과 능력 있는 저자와 같은 처지의 남자가 저자처럼 마음만 먹으면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비단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적 존재이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갖고 싶다. 나도 갖.고.싶.다. 슈필라움!
'슈필라움'을 꿈꾸며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삶을 '조선일보'에 '김정운의 여수만만'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그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한다. 여수에 짓고 있는 자신만의 슈필라움에 생각보다 지출이 초과되고 있어서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고 한다. 음... 이질감이 확;;;
은근 톡 쏘는듯 하면서 유쾌한 문체는 여전히 재밌게 읽혔다. 사이사이 사진이나 그림들도 많아서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대학시절, 여름방학이면 '일찍 배가 끊기는 섬'이 최고였다. 마지막 배가 떠난 항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 친구에게 진짜 착한 표정으로 '오빠 믿지?' 를 연발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때 그 '오빠 믿지?'의 청춘들이 이제 늙수그레한 엄마, 아빠가 되어 자식들에게 수시로 그런다. '엄마는 아들을 믿는다!' '아빠는 우리 딸을 믿는다!' 젠장, 그런 믿음은 없다. 서로 잘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가?
타인이 나와는 '다른 생각' , 경우에 따라서는 '틀린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진정한 신뢰가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이건 정말 주요한 이야기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강요다. '엄마는 믿는다' 또는 '아빠는 믿는다' 고 이야기 할 때 '자녀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부모, 자식 관계만이 아니다.
초반에 읽은 위 구절이 인상깊었다. 시원시원하고 빵빵터졌다. 하지만 슬슬 그런 분위기는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4차 산업혁명'은 독일에서 이미 존재하던 '인더스트리 4.0' 이라는 개념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디지털화하지 않고는 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독일 제조업의 구조를 '인더스트리 4.0'이라는 개념으로 혁신해보자는 거였다. 이 '구호'를 클라우스 슈바프는 학술적 용어처럼 들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슬쩍 바꿔치기했다. 이따위 얼치기 용어를 한국 사회는 마치 엄청난 사회변혁을 예고하는 학문적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종말을 고하는 초연결, 초지능 사회를 아주 낡은 산업사회적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이야기다. '담론적'이어야 할 학문적 개념을 '단언'하는 사회는 아주 '후진 사회'다.
저자의 직설적 표현이 거북하기까진 아니었던것 같은데 이번 책에 나오는 저자의 '단언'들은 좀 거북스런 곳이 많았다. 나도 4차산업혁명 이니 뭐니 호들갑 떠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렇다고 저자만 알고 다른이들은 다 몰라서 4차산업혁명을 사회적 이슈로 화두로 삼고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후진사회가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용어 좀 쓴다고 해서 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충이 취급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나는 유시민 작가가 몹시 불편하다. TV를 켜면 매번 그가 나온다. 그의 '구라'는 갈수록 현란해진다. 게다가 그가 쓴 책까지 모조리 잘 팔린다. 그게 나는 그냥 힘든 거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잘 생겼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아주 간단히 제쳤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가면 꼭 새 책을 내서 내 책을 끌어내리는 혜민 스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따돌렸다. 그는 '스님' 이고 나는 '남자'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wow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책의 본문중에 자주 저자 자신의 외모부심을 드러내는데... 거울 안보시나? 유시민이 잘 생겼다는 게 아니라 김정운도 잘 생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대놓고 불편한 사람을 불편하다 말하시면서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먼저 찾으시니 나도 대놓고 말해본다. 나는 당신의 글이 몹시 불편하다! 당신이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책은 읽기에도 불편한 구성의 책이었다. 사진과 그림이 많은 건 분위기 전환도 되고 눈요기도 되고 좋은데, 문제는 문장을 끊어버린다는 거다. 예를들어,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하고 뒷장은 양면에 사진이다. 다시 한장 더 넘기면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나같은 경우 한문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 사진의 장을 거꾸로 넘겨 그 앞페이지의 문장을 시작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이렇게 글의 중간에 문장을 끊고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 앞 문장을 다시 볼려고 페이지를 다시 거꾸로 넘기곤 해야 했다. 이건 내 기억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여튼 불편하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체험이 탈출구다.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각종 평론가의 시사 프로그램 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존재의 불안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문화와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이토록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 쉽게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허걱!', '세상에나!'로 시작하는 스마트폰 문자에 자꾸 손이 가거나, '집단 불안' 마케팅이 반복되는 TV리모컨을 집어 든다면 당신은 교양이 없거나...... 이번 생은 틀린 거다!
헐... 또 할 말을 잃는다... 고상하게 미술관 가시고 음악회 가시는 저자가 그토록 어려운 이론을 그토록 쉽게 설명했는데도 내 삶에는 미술관이나 음악회는 여전히 생소한 단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교양이 없거나 나의 이번 생은 틀린거라고 저자가 말한다면 저자에게 가요 한곡 틀어주련다. 장기하 의 '그건 니 생각이고'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1 도 없다. 나도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의 중요성에 아주 공감하는 사람이다. 갈수만 있다면 나도 자주 가고 싶은 곳들이다. 다만 갈 만한 상황이 못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기현상이 바로 '냉소주의' 다. 죄다 비겁한 미래 예측 을 퍼 나르며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전능한 신 놀음'을 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비겁한 미래 예측이 난무할수록, 아주 자세하게 과거를 기억애햐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숨기기에 능한 냉소주의' 와 '말 바꾸기에 능한 냉소주의' 가 난무한다. 한쪽은 '은폐한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다른 쪽은 '거짓말한다'고 상대방을 비난한다. 해결책은 아주 디테일한 기억뿐이다. 은폐했던 과거, 수시로 거짓말했던 과거를 아주 자세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미래가 열린다.
동감이다.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은폐하고 거짓말하는 냉소주의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 이 '기억나지않습니다' 아닌가?! 저자여, 실력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친한 분들에게 알려주소, 당신들이 한 일을 기억하라고.
세계사의 전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통해 한국은 세계10위권의 경제적 부를 얻었다. 그러나 상호 인정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실펀하는 일은 건너뛰었다. 당시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한국 사회의 엄청난 사건들은 그렇게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줄 알았던 '상호인정'이라는 근대 시민사회의 근본 원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갑질, 무시, 모멸감 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담론과 산업화 세대의 급격한 정치적 몰락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문제'였다는 거다.
제대로 된 이념을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사건의 핵심을 인간적 도리 같은 윤리문제로 축소시킨다. 왠지 꼰대 분위기가 풍기는데... 아니나다를까
과거 독일에서 십삼년, 일본에서 사년을 사는 동안 나는 아주 심각한 '국수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전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우울'이다.
저자는 '민족'은 원래 없었던 말이라고 한다.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와 '종족'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 '민족', '종족' 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거라고. 나도 뭐 민족이라는 말로 끼리끼리 뭉치는 듯한 뉘앙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좀 거북하다. 한민족으로 보자는 말이 아니라 다른 국가로서 이민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같은 언어를 쓰는 동질감이 높은 존재로서 포용하는게 아니라 남한만을 동질의 민족으로 보는 저자의 편협한 국수주의적 시각이 불편한 거다.
별 고민 없이 거론되는 베트남식, 중국식 개혁 개방은 결코 대안이 아니다. '동네 형'이 잘사는 것과 '우리 형' 이 잘 사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매번 추석이면 겪지 않는가? 통일은 정치,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통일은 심리학이다.
북한을 생판 남으로 보는 국수주의자라면서 이럴 땐 '우리 형' 이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자는 '동네 형'으로 보고 이야기를 풀었어야 하는게 논리적 맥락이 맞는 거 아닌가?
저자의 슈필라움은 분명 부러운 공간이다. 특히나 벽면을 가득채운 책장과 책들에 둘러쌓인 공간에 대한 저자의 로망은 나의 로망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공간을 가지게 됐지만 나는 언제 가질 수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샘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글이 더이상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 공간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들어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성취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습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 아니라 멋지고 포용적으로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웠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바닷가에 멋진 작업실을 갖고 있다면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너무 자기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는 것 같다. 저자에게는 나와 너무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