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잘 살면 왜 안 돼요? - 교실 밖 실전 사회 탐구
이치훈.신방실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 혼자도 벅찬 인생, 동병상련은 없다!

혐오, 내 일이 아니니까 신경 끌래요. 비트코인, 부자가 되기 위해 투자할 거에요. 플라스틱, 편해서 쓰는 건데요. 그런데......

나만 잘 살면 왜 안돼요?>>

 

처음에 제목을 읽었을 땐, 나만 잘살면 왜! 안돼요? 라고 읽었다. 이 경우 나만 잘 살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나만 잘살면 왜안돼요? 였다. 이 경우 나만 잘 살면 안된다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책이, 이 책의 출판사인 북트리거 의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이었다.

연달아 읽을 생각은 정말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버렸다;;; 이 책 목차를 보고서야 음? 하는 느낌에 다시 표지를 보니 앗! 했다는...


두 책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저자의 이력도 비슷한 언론계이다. 이 책의 저자는 KBS다큐전문PD다.

읽고 보니 저자의 이력은 책에서 내용을 풀어내는 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이 기자다운 재기발랄함이 있다면, [나만 잘 살면 왜 안돼요] 는 다큐다운 해설이 있다고나 할까.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이 발칙한 생각을 제안한다면, [나만 잘 살면 왜 안돼요] 는 변화된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도록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의 네 시간에 나누어 수업하듯 구분되고 있다.

첫째시간 - 다양한 사회, '약자'는 무시해도 될까? 에서는

한국사회를 집어삼키고 있는 혐오와 나홀로족시대로서 혼자가 편한 사람들과 세계에서 한국까지 번져온 페미니즘 물결과 함께사는 우리를 위한 다문화 사회 에 대하여 풀어내고 있다.

혐오를 할 수도 있고, 나혼자 편하게 살 수도 있으나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한국인과 비한국인이 평등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둘째 시간 - 경제와 자본주의, '나'만 혼자 잘 살면 될까? 에서는

새로운 세상으로 일컬어지는 4차산업혁명 시대와 투자와 투기 사이에서 인식되고 있는 가상화폐와 핫플레이스에 드리운 그늘인 젠트리피케이션 과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이 노출되고 있는 감시사회 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식으로 열리고 있는지, 가상화폐 보다 그 기본적인 블록체인 기술을 어떻게 구분지어 생각해야 하는지, 젠트리피케이션과 도시재생이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 기술이 발달할 수록 개인의 정보에 대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 알려주고자 한다.


셋째시간 - 자연과 인간, 무조건 '편리'한 게 좋을까? 에서는

바다롤 떠도는 죽음의 알갱이라 불리는 미세플라스틱과 저개발 빈민국에 필요한 적정기술과 재앙이 되어 지구를 덮치고 있는 환경호르몬의 심각성과 식량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고취시킨다.

플라스틱이 얼마나 위해한지 함께사는 세계인으로서 어려운 국가들을 위한 진정한 착한 기술은 무엇인지 환경호르몬과 GMO 작물과 식량산업의 문제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며 반성하게 된다.


넷째시간 - 대중문화, '재미'만 있으면 모든 게 용서될까? 에서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 언어파괴, 유튜브혁명, 온라인게임 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아이돌의 팬덤문화 변화와 특정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파괴의 유행과 넘쳐나는 유투브 영상과 중독이 염려되는 온라인게임에 대해 겉으로 보이는 현상들을 파고들어 깊게 생각해야 할 기준들을 생각해보길 권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엔 양면이 있는 듯 하다. 다 나쁘기만 한것도 다 좋기만 한것도 없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일부는 장점이고 일부는 단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양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관점,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청소년 학생을 둔 학부모나 청소년 또래가 읽으면 세상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경험을 시켜줄 책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서술 목적은 [중용]이 조선 사회에서 과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한손에 [중용]을 들고 떠나는 문화사 산책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

저자는 역사가이자 역사 칼럼니스트 라고 한다. 독일과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역사 강의를 하면서 펴낸 책들도 다 역사관련 책들이다. 책들을 살펴보니 특히 조선시대 중반부에 해당하는 시기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중용] 이라는 책이 등장한 것은 적어도 2400년 전이라고 한다. 조선의 굵직한 선비들은 다른 책들을 먼저 공부한 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중용]을 꼽았다고 한다. 3천500여 글자수로 이루어진 비교적 얇은 편에 속하는 학문서적인 [중용]이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학자들에게 꾸준히 읽혔던 이유는 무엇일까 를 연구하다 보니 조선시대의 학문적 흐름을 깨달은 저자가 펴낸 이 책은, [중용]을 철학적으로 깊이 분석하고 해설하는 데 목적을 둔 책이 아니라고 한다. 철학적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중용]의 본문인용과 해설은 일부분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보며 시대적 의미를 되짚어보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조선처럼 엄격한 제왕학 수업은 없었다.>>


조선시대의 세자 교육은 철저한 편이었다. 학문을 하는 세자가 임금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시대의 학문적 흐름과 당쟁의 판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독서할 때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 는 성리학자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라는 문장을 보며 주입식 교육이 오랜 역사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외우기만 하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외우고 나서 신하들과 스승들과 제자들과 그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필수로 여겼다. 그런데 암기만 남고 토론은 사라졌다는 것이 갑자기 씁쓸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라면 어느 경우에나 부합하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성리학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 대응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황적 또는 상대적인 해법을 강구했다.>>

 

서양의 고대철학이 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았던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학파가 있는가 하면 세상의 이치와 근본을 탐구하는 학파도 있었다. 이러한 학파는 형이상학적일 수 밖에 없다. 서양의 고대철학에서 다양한 갈래가 생겨나고 자연과학철학이 형이상학철학 못지않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아시아의 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기준없이 두루뭉술했던 것도 아니었다. 비록 유교 성리학 이라는 학문이 비대하게 발달하긴 했으나 서양과 동양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객관적이다 상대적이다 라는 표현은 대표성을 배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록의 기록이라고 해서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기록은 주관적이다. 기록자의 구구한 변명 또는 자기합리화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가는 한시도 기록을 떠날 수 없으나, 기록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의 일기인 일성록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같은 자료에서 다양한 자원을 발굴해 여러 책을 써온 저자로서의 마인드는 좋은 것 같다.


[중용]이 조선에 수용된 것은 14게 말 이라고 한다. 15세기부터는 선비들의 필수서적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이 책은 조선 사회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중요한 처방전을 제공하며 세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저자는 태종부터 정조사이의 왕과 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중용]이 중심에 있던 사회를 다루다 보니 그리 된 것이겠지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조 이후의 조선시대가 더 궁금하다. 정조 이후 학자들은 대체 어느 학문을 숭상했기에 그리 되었던 건가 싶어서....


<<16세기 후반 조선의 선비들은 [중용]을 통해 큰 용기를 얻었다. 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실패로 인해 정지,사회적 전망은 어두웠다. 많은 선비들은 비관론에 빠져 있었다. 이때 [중용]에 담긴 희망의 메시지, 곧 '나 한사람의 도덕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이 책의 주장은 선비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와도 같았다. 이제 그들은 추악한 정치,사회적 현실 앞에서도 결코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정신적 자양분을 얻었다.>>


아쉽다. 본인만의 자아성찰에 머무르게 한 그 희망이 조선시대 학자들에게 시대적 실천의 의무에서 떠날수 있는 자유를 준것 같아서...


<<17세기 전반, 조선의 선비들도 형이상학적 사유의 한계를 조금씩 실감했다. 그들이 제아무리 형이상학적 연구에 매달려도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비들은 이제까지외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당장에 김장생의 경우만 해도 그러했다. 그는 예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제창했다.>>


안타깝다. 형이상학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실천지침을 예학에서 찾다니... 예학은 추후 궁내법도에 대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네마네 초상을 몇년 치러야하네마네 하는 당쟁으로 그 학문의 한계를 드러낸다... 제사를 4대(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지내는 것도 여기 기원을 둔다.


<<17~18세기 조선에는 한 가지 끔찍한 사회문화적 현상이 나타났다. 선비를 '사문난적'이라 손가락질하며 배척하는 사건이었다. 누가 사문난적인가. '사문'은 유교적 질서요, 이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난적'이었다. 그때는 주희를 비판하는 사람이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조선 건국 이래 대궐에서는 왕세자를 위한 서연과 국왕을 위한 경연이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조선의 왕은 성리학의 믿음직한 수호자로서 선비들의 학문적 논쟁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단호한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왕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권력을 강화할 수도 있었으니, 그가 재판관의 역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왕이 학문에 공을 들여 경지에 이른 후 신하들에게 학문적 재판관 역할을 했던 시기는 별로 없다. 당쟁을 이용해서 왕의 정치력을 높였던 시기도 길지 않다. 한가지 학문에 집중했던 폐쇄성은 결국 서로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권력다툼의 도구가 됐을 뿐이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정치투쟁과 경전해석을 별개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가치관의 다원성을 인정하기가 불가능한 선비들이 되어있었다. [중용]의 대가 라는 사람들이 [중용]에 반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아이러니


물론 주류가 우물안의 개구리들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꾸준히 자신만의 해석과 세상에의 적용을 위해 용기있게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도 있었다. 다만 항상 소수였다는 것이...


<<천주교 서적의 전래를 계기로, 조선의 선비들은 초자연적 존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세기의 실학자들은 사물에 관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연구방법을 창안했다. 적당한 여건만 갖춰졌다면 그들은 한국의 역사적 운명을 새롭게 개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실학자들의 연구가 좀더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조이후 왕권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이후에 그렇게 빨리 일본에게 침략당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들은 늘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의심을 품어야 한다. 의심이 없으면 배워도 굳건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의심이란 쓸데없이 믿지 않거나 우물쭈물하면서 우유부단하게 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저러해서 옳은 줄을 알면, 반대로 이러저러해서 잘못된 점이 있는 것도 함께 살펴야 한다. 이것이 보고 아는 것이다. 만일 그런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틀린 것을 옳다고 주장해도 나는 대응할 길이 없다.>>

 

저자가 인용한 이익의 글이다. 대학자로서 [중용]을 새로 해석하고 책을 편찬한 깨어있는 지식인의 말은 지금도 의미가 고스란히 다가온다. 나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책을 읽을 때도 가져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중용]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지만, [중용]이 어떤 책인지 알려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학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학문을 탐구했고 중요하게 여겼던 생각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생각이 시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나누었던 순간들
장자자 지음, 정세경 옮김 / 도도(도서출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중국에서 1천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장자자의 최신작

깊은 밤의 이야기꾼 장자자가 들려주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긴 이야기

원벤진 작은 가게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작은 반짝임>>

학창시절 세계고전문학을 읽고 소설을 꽤 읽었어도 중국소설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세계고전문학에서 세계는 서양과 동의어이긴 하다.

'사람아 아 사람아' 가 기억나는 첫 중국소설이었다. 읽을때 혁명소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 이 작품은 그냥 소설일 순 없었다. 그런데 한 방송에서 오상진씨가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이 책이라고 해서 놀랐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김소영씨가 추천해주어서 읽게 된 책이었는데 이후로 가까워졌다고... 젊은 세대가 아직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었고,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했다.

판타지와 SF를 좋아하는 편이라 읽가보니 류츠신의 단편집을 읽게 됐었는데, 과연 떠오르는 SF계의 샛별 다웠다. SF가 아니라 과학소설이라고 따로 불러야할 만큼 탄탄한 기반을 갖춘 작품세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읽고 나니 과거의 중국소설과 미래의 중국소설을 읽었는데 가운데가 뻥 뚫렸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그 한가운데를 메꿔줄 작품으로 이 소설을 만났다. 이 소설은 현대의 중국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고향은 훗날 하나의 점이 된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한자리를 지키는 외로운 섬처럼 말이다.>>

 

류스산은 작은 산속마을에 사는 소년이다. 작은 가게를 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산다. 외할머니는 평생 그 가게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늘 도시로 나가는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고향이 어떤 의미로 자리잡을 지 열살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할머니, 하늘은 왜 저렇게 높아?"

"저기 저 구름들 안 보이냐? 저게 다 하늘나라 날개라 그래.">>

 

소년은 아빠가 누구인지 모른다. 엄마는 네살때 소년을 버리고 떠나서 소식이 끊겼다. 소년에겐 외할머니 뿐이었다. 궁금한 것이 생겼을때 물어볼 사람은 외할머닌 뿐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어느순간 부터 할머니에게 더이상 묻지 않았다. 엄마에 대해 물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20대의 젊은 뤄 선생은 살면서 이렇게 자율적인 생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이 열 살짜리 소년에게 경외심을 느끼면서도 이 아이의 어린 시절은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내용일지라도 작가들의 문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의외의 곳에서 빵 웃음을 터지게 한다. 자율적인 생물이라니 ㅍㅎㅎㅎ 류스산은 독특한 소년이었다. 늘 공책에 적어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2003년 여름, 그들은 모두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린 시절은 동화와 같았고, 이것은 그들의 동화 속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도라에몽의 진구가 됐고, 청샹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슬이가 됐다. 하지만 뜻밖에도 청샹의 본래 역할은 '퉁퉁이' 였다.

"돈 내놔!">>

 

평화롭고 작은 시골마을에 도시여자아이가 전학을 온다. 하얗고 텔레비전 드라마 여주인공 처럼 예쁜 아이. 그런데 전학온 날부터 그 여자아이는 시골아이들을 골려 먹는다. 반전 ㅋㅋ


<<계획에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류스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시장에서 모의고사 시험지를 샀지만 문제를 풀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모든 문제를 외우는 것뿐이었다. 류스산은 공책에 '중점고등학교에 합격한다'라고 썼지만 이루지 못했고 여기에는 여러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다.>>

 

모의고사 문제들을 외운다고 해서 똑같은 문제들이 시험에 나오는 게 아니다. 하물며 모의고사 문제들을 다 외우지도 못한다. 류스산의 문제해결능력은 갈수록 태산이다;;; 자율적인 생물은 너무 자율적이라 모든 문제를 혼자서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만다;;;


<<이도저도아닌 관계로 철저히 일 년을 보내며 2013년 동지가 됐고 무단은 수속을 마치고 이 작은 도시를 완전히 떠나려 했다. 왜 하필 오늘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올해의 생일 선물로 이별을 받고 싶었으리라.

사랑을 잃을 때까지 류스산은 자신이 그리던 미래가 사실은 과거였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요즘 사람들이 어디에 잘 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공장과학소설 작가가 아니라서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도시를 그릴 줄 몰랐다. 그는 생물학자가 아니라서 인체 기관이 교체될 수 있는 의료 환경을 그릴 줄 몰랐다.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서 투자 기회가 빠르게 대체되는 자본시장을 그릴 수 없었다. 그는 아는 것이 없어서 모든 사람이 만들어내는 미래 세계에서 자신의 가정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그려낼 수 없었다. 그는 열심히 미래를 약속했지만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살았던 조그만 진의 생활을 먼 미래인 것처럼 달력만 바꿔 되풀이해서 그리고 있을 뿐이다.>>

 

류스산이 대학생활을 할때 만났던 첫사랑 무단을 그는 너무너무 사랑했다. 하지만 류스산은 도시에 떠있는 섬 같은 자아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스스로에 대해 너무 몰랐다. 도시에 살고 싶어했지만 도시에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자신만 몰랐다.


<<류스산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어째서 할 수 없는 걸까. 어째서 공책에 쓰는 글들은 갈수록 멀어지는 걸까. 어째서 행복하지 않을까. 어째서 동지에는 늘 눈이 내릴까. 어째서 중요한 사람은 꼭 떠나려 할까.>>

 

류스산의 소중한 공책에 써있던 다짐들은 점점 의미가 없어져 간다. 점점 실행되는 것들이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류스산은 기억나지 않은 엄마와의 이별도 첫사랑과의 이별도 받아들이는데 오래 걸렸다. 너무너무너무너무 오~래 걸렸다.


<<십 년이 흐른 어느 날, 류스산과 청샹은 다시 만났다.>>

중국판 '소나기' 일 뻔했던 인연은 대학생이 되서 다이 이어진다. 류스산은 그것이 우연인줄 알았다.


<<그는 다른 어떤 남자보다 눈물이 많았다. 즈거도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스산, 너 그렇게 울면 부끄럽지 않아?" 하지만 류스산은 즈거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뭔가를 받아들이지 못해 울지만 그는 모든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어 우는 것이며 눈물은 그러기 위해 장단을 맞추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류스산은 어렸을 때부터 잘 우는 아이였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는 것을 울 수 있을 때는 몰랐다.


<<류스산은 본래 나약한 인간이었다. 어렸을 때 누가 길에서 싸우고 있으면 맞고 있는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인 니우따텐이라 해도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 어른이 된 뒤에도 사과할 수 있으면 사과하고, 굴러야 되면 굴렀다. 그는 무단과 2년을 사귀면서도 물어봐야 할 것조차 물어보지 못했으며 가장 용감했던 때가 바로 어제와 오늘이었다. 이렇게 나약한 자신이 비틀거리다 진흙탕에 자빠져 상고머리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 류스산은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마음이 아렸다.>>

류스산은 잘 울고 나약한 남자다. 첫사랑이 떠날때도 울고 그녀가 만났던 진짜 애인에게 얻어터지는 순간에도 분노보단 슬픔이 먼저이고 어렸을때의 정말 첫사랑이 다시 찾아와도 누군지 모르는 멍청한 남자다. 하지만 빗속에서 얻어터지는 류스산에게 두 여자는 서로 우산을 씌어주려 한다.


<<대학생활 내내 류스산은 그의 강의를 들으며 열심히 필기했지만 배먼 F학점을 받았다. 그런 류스산을 보며 교수는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다는 옛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겨우겨우 지방대학에 갔지만 너무도 성실하게 공부했지만 F학점을 받는 류스산. 교수에게 썩은 나무로 여겨지는 줄도 모르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졸업을 하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대학졸업장은.


<<"류스산 파이팅!"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는 그 누군가가 청샹이란 걸 알았다. 참 무서운 아이였다. 남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할수 있든 없는 그녀는 마음대로 파이팅을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는가. 게다가 그녀는 입으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상대를 질질 끌어서라도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일상이 뒤죽박죽 되는 것 같았다>>.

십년만에 다시 만난 청샹과의 며칠은 뒤죽박죽 된 것 같았겠지만, 그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는 것을 그만 모르고 있었다. 그만.


<<그는 지금껏 파이팅하며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아왔다. 그도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재수없고, 무능하며, 볼품없는데다 지질하게 눈물이나 흘리는 이런 인생 말이다. >>

류스산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매순간 정말 너무너무 열심히 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나 되고 싶지 않았던 가장 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된 자신을 보게 됐다. 무능한 찌질이.


<<"류스산은 잘 울기는 해도 울수록 강해지는 놈이야" >>즈거가 청샹에게 한 이 말은 청샹이 갸우뚱 했듯이 이부분을 읽을 때는 나도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하지만... 정말!


<<"나보고 평생 사귄 친구들 버리고 도시에 가서 모르는 사람 사귀라고? 넌 어떻게 네가 가진 건 필요없다고 하고 왜 없는만 갖겠다고 하냐?" >>

도시로 가자는 외손자에게 할머니가 하는 말은 생각보다 깊이 마음에 박힌다. 이미 가진건 필요없다고 하고 없는 것만 갖겠다고 하는 철부지의 투정...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그런 젊은 시절을 보냈다.


<<2016년 초여름, 류스산은 어딘지 모를 곳에서 깨어났지만 어쩐지 고향에 돌아온 듯한 환상이 보였다. >>

환상은 무슨. 첫사랑을 못잊고 직장도 못구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술에취해있던 외손자를 할머니가 트랙터에 묶어 싣고 왔다. 고향집 그의 방에. 정말 대단한 할머니다!!! (할머니에 대한 묘사는 김수미 버전의 욕쟁이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뚝딱뚝딱 맛난 밥상을 차려내면서 국자를 휘두르고 욕을 쏟아내는 ㅎㅎ)


<<즈거는 언젠가 류스산에게 유행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는데 1선 도시는 현재를 살고, 2선 도시는 거기서 3년 뒤쳐져 있으며, 그 이하의 도시는 거기서 다시 3년 더 뒤처져 있다고 했다. 또한 현에 속한 작은 진들은 적어도 그보다 3년이더 뒤쳐져 있다고, 따라서 산속 마을의 유행이 일어나면 이미 도시에선 유행이 한참 지난 뒤인 셈이다. 즈거는 우울한 목소리로 이는 드넓은 우주와 같아 내가 보는 찬란한 별들이 마음을 사로잡지만 사실 그 별은 무수한 광년을 넘어온 것으로, 자신이 볼 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 일 수도 있다고, 그래서 즈거는 무수한 광년의 빛을 거슬러 올라 1선 도시에서 성공하고 싶다고, 꿋꿋하게 말했다.>>

중국은 도시에 등급이 있나보다. 시골마을 청년들은 3선도시에 나가서 2선도시로 진출해 1선도시에 살고 싶지만... 별빛이 과거의 빛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뒤쳐진 유행처럼 읽고 나니 별빛이 감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시골에서 도시로의 상경... 그 의미와 기분을 우리도 모르지 않는다.


<<류스산은 어렴풋이 무단과 2년에 걸친 동지가 떠올랐다. 그는 무단에게 밤이면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고, 그녀에게 들려줄 노래와 기타를 배울 수도 있었으며, 무단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기다리는 일에만 자신의 모든 힘을 썼다.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대가 떠나기를 기다린 걸까 아니면 스스로 포기하기를 기다린 걸까?>>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류스산. 엄마를 기다리고 사랑을 기다리는 류스산은 자신의 노력이 기다림 뿐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거지? 이 멍충이.


<<두 사람과 류스산은 달랐다. 그는 슬품의 침묵이었지만 두 사람은 고집의 침묵이었다. 슬픔의 침묵은 시간이 깨주며 두 줄기 강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반면 고집의 침묵은 스스로 깨야 하며 그들의 고집으로 인해 강물이 마를지라도 가로막힌 둑을 무너뜨리겠다는 뜻이다.>>

친구의 커플을 보며 자신의 사랑했던 모습을 생각해보는 류스산. 그의 사람은 한방향으로 결코 모아질 수 없었던 것임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서서히 깨닫는 류스산.


고향에 돌아와서 보내는 시간들을 <<류스산은 인생을 좀먹고 있다고 느꼈지만 청샹은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말했다. >>고향에서 다시 만난 청샹은 여전히 에너자이저 였지만 한번도 그의 곁을 떠난적이 없었다. 그걸 그만 모른다.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멍하니 청샹을 보고 있던 류스산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린 시절 만났던 여자아이는 그의 자전거 뒤에 타고 작음 얼굴을 그의 등에 기댄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은 곧 죽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제 어른이 됐고 여자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밤의 반딧불이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하며 날아다니는 것처럼 언제 어둠 속으로 사라져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중국판 '소나기' 여주인공은 도라에몽의 퉁퉁이였지만, 여전히 반딧불이였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류스산은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며 기어코 산을 올라야 했다. 이런 고된 산행은 그의 인생과 꼭 닮은 것 같았다. 이를 악무는 것도 이미 소용이 없고 쓰러져 죽지 않으며 그렇다고 위로 오를 수도 없는, 스스로 파이팅을 외치며 한 걸음을 옮기는 데에 온힘을 다해야 하는 그의 인생 말이다.>>

류스산의 인생은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산 인생이 아니었고, 류스산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으며, 류스산이 가졌던 꿈은 꿈일 뿐이었고, 류스산이 하찮게 생각했던 것은 결국 제일 소중한 것이었다. 그걸 아주 힘들게 천천히 깨닫는다. 하지만 멍청할 만큼 순박하고 답답할 만큼 진중한 어설픈 류스산은 겨우 스물네살의 청년이었다. 인생이라는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빠진 청춘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저런 작품들이 떠올랐다. 어린시절의 에피소드는 '소나기' 가 떠올랐고, 찌질한 사랑은 '사랑의 사막' 이 떠올랐고, 돌아온 고향에서의 일상은 '리틀 포레스트' 와 '고령화 가족' 의 장면들이 혼합되어 떠올랐다. 특히나, 할머니가 해주시는 요리들이 자주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될 따마다 그 밥상을 가족이 아닌 식구로 함께 하여 가족의 느낌을 충족시킬 때마다, '리틀 포레스트'의 계절 밥상과 '고령화 가족'에서 윤여정의 끊임없는 밥상 장면이 이 소설의 정서와 굉장히 친밀하게 닿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나름 잘 어울렸다.


이 소설은 청춘의 성장기 일수도 있고, 한결같은 사랑의 로맨스 일수도 있고,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가족소설 일수도 있다. 답답할 만큼 무능해 보이는 청년의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한결같은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씨를 보며 동네떠도는 아이까지 거두는 할머니의 밥상을 보며, 때론 화도 났다가 때론 슬프기도 했다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키득키득 웃으며 읽게 되는 이 책은 다 읽고 나서야 한결 편안해진 마음을 느끼게 된다. 모든 소설이 어느 나이에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혀질 테지만, 청춘을 지나온 내가 읽은 후엔 그땐 그랬지..하며 미소짖게 되는 소설이다. 청년에겐 공감을 장년에겐 아련함을 노년에겐 애잔함을 안겨줄 소설이었다. 중국할머니의 따듯한 고향집 밥상같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답게 삽시다 - 미운 백 살이 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을 위하여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운 백 살이 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을 위하여

그때는 인생이 이렇게 길 줄 알지 못했다. 살아갈 날이 너무 짧아서가 아니라 너무 길어서 생긴 후회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될까요? 여든 여섯, 이시형 박사가 들려주는 인생 담론! 나이듦의 미학!>>


에세이를 안 좋아해서 잘 안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마음이 끌렸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화병'을 세계정신의학용어로 만드신 분이고, 한평생 꾸준히 한방향을 향해 살아오신 게 존경스러웠다.

나이를 제대로 먹은 어르신의 나잇값 하라는 말씀은 꼰대의 잔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난 왜이렇게 표지에 마음이 왔다갔다하는건지;;; ^^;;;


<<나이가 들면 마음의 상처마저 더디게 아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라기보다는 선입견이다. 나이가 들면 오히려 이제껏 살아온 연륜으로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져야 한다. 그리고 빨라진다는 게 뇌 괴학의 증언이다.>>


저자는 여든여섯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은퇴 아닌 현역 이다. 정신과의사로서 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날 지언정 마음은, 정신은 오히려 더 좋아질 수 있는 연륜의 미덕을 제대로 보여주고 계신 분이다.


글 사이사이 문인화 몇 점이 실려 있는데, 본인의 작품이다. <<문인화를 제대로 그리려면 최소한 오십은 넘어야 한다. 인생의 내공이 어느 정도는 쌓여야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그래야 삶의 경험을 함축하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 공감한다. 나는 젊어지고 싶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나이들어 가는 것이 좋다. 점점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문인화를 그리지는 않지만 나이를 어느정도 먹어야 뭔가 깊이를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노인을 불편해하는 인식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노인들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은퇴를 하고 났으니 이제는 물러나 앉아 다 차려진 밥상을 받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 다음 세대를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일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나이가 저절로 존경심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존경은 공짜가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디서든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를 '미운 몇 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속이 시원하다. 이런 입바른소리를 여든여섯의 학자가 말씀해주시니 더할나위 없이 좋다. 나잇값은 이렇게 치루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미운 백 살이 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을 위하여' 이다. 그렇다 어느새 백세 시대가 되었다. 책은 글자크기도 큰 편이고 여백도 많은 편이다. 다시 말해, 부제에서 말한 어른들이 읽기 편한 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어른들이 많이 읽을까? 적어도 아직 어르신 소리 듣기 전 세대인 나같은 어른 세대들이 먼저 읽으며 마음준비하기 좋을 책이긴 하다. 내가 여든 여섯이 되었을 때 이정도의 마인드는 있어줘야 하지 않겟는가.


<<살아 있는 한 우리에게는 늘 내일이란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일을 어떻게 살면 좋을지 늘 고민해야 한다.


선례를 고집하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휴식이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쉼표를 찍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휴식이 일상이 되면 그것 역시 노동이나 다름없어진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데 그날 꼭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것은 나 하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주변 모두를 위한 일이다. 온전히 독립한 하나의 존재로 사는 것이다. 끝까지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다 죽을 수 있는 삶의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모든 문명도 시들어갈 때가 가장 감성적이다.


겸손하지 못하거나 자기 욕심이 많은 이들은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짧고 굵게 의미로 다가오는 명문장들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온갖 지식과 지혜, 경험과 기술, 정보들은 다 빚이다. 빚은 꼭 갚아야 한다. 내가 받은 것을 이 사회에 모두 돌려주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한 전문직이거나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평생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빚쟁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잘되면 내가 잘나서 잘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기까지 하다.

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평생이 빚을 지며 산 세월이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 내 머릿속에 든 것들을 다 내놓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받는 인세와 강연료도 대부분 문화원의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다.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에 한 푼이라도 더 쓰려고 하는 일이지 내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세상의 빚쟁이 라고 까지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세상이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어? 라는 편이다.;;; 다만 책을 비교적 많이 읽어온 편이었고 여유가 좀 생기기 시작하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좋은 책들이 정말 많았다. 끊임없이 새 책들이 나오고 있었다. 책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읽는 책, 다 읽고 나서 서평이나 짧은 글 정도의 자료를 남기면 책을 찾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 무엇을 더 할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은 계속 읽게 될 것 같으니 일단 책에 대한 활동이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아서 열심히 읽고 쓰는 중이다.


<<나이가 들어서 쓸쓸하다느니 고독하다느니 얼른 죽어야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세상의 빚쟁이'라는 인식이 없는 이들이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당장 그 방법을 짜내느라 한가하게 나이 타령을 하고 앉아 있을 틈이 없어진다. 일이 힘에 부치면 반나절도 좋고, 이틀에 한 번도 좋다. 무슨 일을 하든 시간이 얼마나 되든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일을 놓지 않는 것이다. 건강하게 늙어가는 비결은 다른 것이 없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과 내가 사회를 위해 아직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간 닦은 경험들을 활용하며 아직 내가 속까지 녹슨 깡통은 아니라는 뿌듯함을 심어주는 적당한 노동, 그것이 답이다.  

그게 어른답게 사는 길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함께 부대끼며 살 수 밖에 없다. 살아있는 한 내일은 오고 내일이 오기전 누구나 오늘을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내가 어떤 하루를 보내느냐가 쌓여서 내일을 만들 수 있다. 젊었을 때는 모른다. 모를 수 밖에 없다. 자기 앞길 찾아가기도 바쁜 게 일상이다. 그렇게 내 뒤로 이력이 쌓이다 보면 한치앞도 안보이던 앞길이 조금씩 미리 눈에 들어오는 때가 온다. 나이들었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그때 내가 세상에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고 어떻게 갚아야 할지 생각하는 삶과 여전히 내 삶에만 갇혀 있는 삶 중에서 어느 쪽의 내일을 만들어가야 하겠는가? 어른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렵지만 생각하며 늙어가야 할 텐데...


<<은퇴하고 할 일이 없다고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만 온종일 들여다본다면 진짜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상은 즉각적인 정보를 주고 몰입도가 높지만 그만큼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그 대신 책은 연속적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경계가 모호한 아날로그 사고를 대표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감성이 아날로그다. 디지털은 빠르지만 아날로그느 느리다. 디지털은 '대량'이 가능하지만 사적인 경험이 중요한 아날로그는 '대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책이 중요한 것이다. 책은 우리외 뇌를 깨어있게 하고 일을 하도록 만든다.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읽는 책은 치매 예방을 위한 보약과도 같다.>>

저자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활동적인 성격탓에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40대후반에 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나이들어 읽는 책은 깊이가 남다르다며 나이들수록 책을 읽으라고 조언한다.


<<'나이' 에 대한 존경심이 변하고 노인을 존경하지 않게 된 시대를 탓하기 전에 혹시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 가 된 것은 아닌지 나부터 살펴야 한다.>>


항상 남의 말은 하기 쉬워도 내 반성은 하기 어려운 법이다. 뼈때리는 말일지라도 옳은 말이면 새겨들어야 한다. 나도 어른이고 여든여섯의 노학자도 어른이다. 공원에서 장기두는 분들도 어른이고, 집안에서 시시콜콜 참견하시는 분들도 어른이다. 광화문광장에서 남의나라 국기를 들고 텐트치고 있는 분들도 어른이고, 죽는날까지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앞에서 집회연설을 하시던 분들도 어른이다. 나이만 먹었다고 다 똑같은 어른은 아니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고 생각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만 먹은 노인네가 되느냐 존경스러운 어르신이 되느냐는 자신의 선택이다. 선택하기 아직 힘들다면, 일단 귀부터 열어놓아야 한다. 저자의 말에 토달지 말고 일단 들어볼 일이다.


ps. '나는 죽을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라는 이근후 박사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또한 여든의 정신과의사로서 어른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 다양한 조언들을 해주고 있었고 무척 재미있고게 공감하며 읽었었다. '어른답게 삽시다' 의 이시형박사가 통통 에너지 넘치는 소년어르신 이라면 이근후박사는 중후하면서 위트넘치는 어르신 이랄까. 여하튼 두분 다 참 멋지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러바치는 심장 문득 시리즈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박미영 옮김 / 스피리투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괴이하고 음산한 분위기, 불안과 광기로 가득찬 심리 묘사로 근현대 환상문학과 추리문학을 창시한 에드거 앨런 포의 세계를 가장 시의적절하게 반영한 새로운 번역판!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 '에도가와 란포' 라는 필명,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레이먼드 카버의 빛나는 단편들, 스티븐 킹 이라는 하나의 세계, 이 모두는 에드거 앨런 포로부터 비롯되었다!>>

 

학창시절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도 읽었었는 줄 알았다.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봐서...

그런데 홈즈시리즈와 루팡시리즈만 읽었었나 보다. 책을 읽어보니;;;

에드거 앨런 포 (1809~1849) 는 정말 유명한 작가다. 독자들에게도 유명하고 작가들에게도 유명하다. 추리소설 고전중의 탑이 아닐까.


그의 생애는 결코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삶이었다.

순회극단의 배우였던 부모는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친척의 손에 자라면서 첫사랑에 실패후 큰 좌절을 겪는다. 사촌여동생과의 결혼했던 10년 남짓한 기간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으며 이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게 되지만, 아내와 사별후 절망에 빠졌다가 얼마안되 사망한다. 고작 마흔의 나이에...

부모를 일찍 여의였으나 가난하게 자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의 멘탈과 심리는 유약한 편이었던 것 같다. 쉽게 망가졌고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11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에드거 앨런 포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우울함이 내 정신에 파고들었다. 견딜수 없다고 한 것은, 아무리 지독하게 황량하거나 끔찍한 자연 풍경에서라도 인간 심리는 시적이고 감상적인 반쪽짜리 즐거움을 얻게 되어 있는데, 여기선 그 기분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편 '어셔가의 몰락' 의 시작부터 저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저자의 작품들은 읽기 시작하는 순간 예상보다 강한 괴이함이 덮치면서 반쪽짜리 즐거움도 얻지 못하는 심정으로 독자의 기분을 압도한다.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 은 비교적 유쾌한 작품이다. 괴팍한 노인네에게서 결혼승낙을 받아내기 위한 재치와 노인네의 당황스런 반응이 웃음짓게한다.


'붉은 죽음의 가면' 은 가면무도회의 방들을 하나하나 설명해나가면서 벌써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구덩이와 추' 에서 주인공은 깨어나보니 감옥안이다. 빛한줄기 없는 캄캄한 방이다. <<깨어나서 한 손을 뻗어보니 옆에 빵 한 덩이와 물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라는 문장을 보며 '올드보이' 영화 가 생각났다. 영문도 모른채 갇혔는데 자다 깨보면 항상 놓여 있는 빵과 물주전자. 물론 내용은 영화와 전혀 상관없다. 하지만 섬뜩하게 조여오는 무언가가 동일하게 느껴진다.


'검은 고양이' 는 내가 가장 많이 들어본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제목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적 설정으로 많이 차용했다고 한다. 검은 고양이 이름은 플루토 이다. 사실 플루토는 저승신의 이름이다. 고양이 이름에서 어느정도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섬찟한 작품이다.


<<그렇다!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몹시. 몹시도 끔찍이 신경질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왜 나를 미쳤다고 할까? 그 병은 내 감각을 파괴하거나 무디게 한 것이 아니라 날카롭게 했다. 무엇보다도 청각이 예민해졌다. 천국과 지상의 온갖 소리가 다 들렸다. 지옥의 많은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미쳤단 말인가? 들어보라! 그리고 내가 얼마나 건강한지-그리고 얼마나 차분히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살펴보라>>

 

'일러바치는 심장' 의 첫 문장은 마치 저자의 독백처럼 들렸다. 작품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를 평생 괴롭혔던 불안과 신경증이 이런 문장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로 치면 싸이코패스격인 화자의 신경증은 정유정 소설에서 나왔던 악인들의 모습도 생각나게 한다.


'도둑맞은 편지' 에선 그 유명한 뒤팽 탐정이 나온다. <<의심할 의도로 간 사람의 의심을 강하게 확증시켜>> 주는 오류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뒤팽의 추리는 훗날 셜록 홈즈 를 탄생시켰고 괴도 루팡에 영향을 주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탐정이다.


'긴 상자'는 유쾌한 화자를 설정했지만 사실 되게 슬픈 내용이다. 슬픈 사랑도 괴이함으로 표현하는 저자의 표현방법은 참 일관적인것 같다.


<<전반적으로 내 눈에 들어온 모든 게 어딘가 상당히 괴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워낙 별별 사고방식을 지닌, 별별 관습을 따르는, 별별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다.>>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 을 발표당시 읽었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호탕하게 웃고 넘겼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의 정신병원은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정신병원과 정신병자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정상과 비정상의, 정신이 온전한 사람과 미친 사람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아몬틸라도 술통' 은 어찌 보면 '검은 고양이' 보다도 더 잔인한 내용일 수 있다. 폭력과 살의를 드러내는 사람과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 은 둘다 무섭지만 되돌아 보면 후자가 더 무섭기 마련이다.


'절름발이 개구리' 는 나름 통쾌한 복수극이다. 궁정안의 광대 난쟁이인 절름발이개구리는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광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을 무시하던 왕과 신하들을 제대로 속여넘긴다. 잔인하게 복수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은 정말 하나같이 괴이하고 음산하고 광기어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지금도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여기서 시작됐구나 싶은 장면들이 꽤 있다. 대단한 작가이긴 하다. 어렸을 때 탐정추리물에서 그쳤기에 망정이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안 읽은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 읽었으면 잠꽤나 설쳤을 것이다. ㅎㅎ 이번에 읽을 때도 대낮에 읽긴 했다;;; 스릴러 보단 공포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은 매력적이면서도 여전히 섬뜩하다. 추리소설의 고전이라 할 만 하다.


고전도 새로운 번역은 또 다르기 마련이다. 매일 쓰는 언어이지만 세월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언어이다. 고전을 고전어로 읽었을 때와 현대어로 읽었을 때는 분명 다르지 않을까? 나는 기왕이면 새로 나온 번역본을 좋아하는 편이다. 외국작품이라 어차피 원어로 읽지 못할 바에는 지금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번역본이 낫다. 이 책의 번역자가 올초에 읽은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의 번역자라서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 작품을 읽을 때도 아주 수월한 흐름으로 읽었었다. 에드거 앨런 포 의 작품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작지만 강한 이 책으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