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한 여자가 있다.
무채색의 이 여자는딱 봐도 아파 보인다.
여자가 말하는 듯 [ Doing Harm } 이라는 글씨가 여자의 입을 가리고 있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이기도 한 'Doing Harm' 은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있어! , (나를) 아프게 하고 있어! 로 해석된다.
아픈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며 그 시선을 받은 사람에게 당신이 자신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픈데 더 아프게 하는 사람... 이 책은 아픈 여성과 이 여성을 더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인 'Doing Harm' 은 'Do no harm'(환자에게 위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의사결정 절제 명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는 환자의 몸, 정신,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하게 되는데 득이 되는 방향의 개입을 하라는 명제보다 해가 되는 개입을 하지 말라는 명제가 먼저 나온다는 것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있는 서문에서부터 이미 위협적이다. 치료가 먼저가 아니라 해치지 말라는 것이 먼저였다는 것이, 이미 고대때부터 그러한 인식하에 환자를 대하라고 했다는 것이, 그게 얼마나 실천이 잘 되지 않았으면 여전히 이 짧은 문장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개요는 <1부> 내용이다.
< 눈 감고 무시해온 구조적 문제> 라는 제목 아래 '지식의 간극' 과 '신뢰의 간극' 으로 나위어 어느 방향에서든 여자의 고통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풀어낸다.
<2부 - '남성 중심' 체계 속에서 사라진 여성> 과 < 3부 - 히스테리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질병들> 은 그 실제적 사례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촘촘하게 저자가 조사한 내용들을 설명한다.
어찌보면 동어반복적인 내용들이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한다 - 의사는 믿지 않는다 - 여성의 병이 심해지지만 감내할 수 밖에 없다
혹은
여성이 아프다고 말한다 - 의사는 정신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 여성의 병이 심해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치료를 받게 되지만 다른 곳에서 다른 여성은 이 여성의 전철을 밟고 있다.
전형적인 서양스타일로 쓰여진 보고서 형태의 책으로 연역식인 구조는 첫장 시작부터 결과는 알고 들어간다.
'의사는 여자의 고통을 믿지 않았다'
이 문장을 증명해내는 증거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450여 페이지 내내 아픈 여성들과 믿지 않는 의사들을 보며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으면서도 중간에 놓을수도 없이 다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보수적인 미국의 의료현실에 대해 새삼 놀랐다.
백인남성우월주의가 너무나 뼛속깊이 박혀 있어서 환자에게 공정해야 할 의사가 너무나 선입견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놀랐다.
서양의학의 역사속에서 난자당한 여성의 몸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아픔들이 끔찍했다.
미국의료체계는 우리네와 달라서 더 안되 보이기도 했다.
미국의료체계는 일단 의료보험이 개인부담이라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다. 마약성 진통제가 횡행한 곳이라 중독자가 많다 보니 환자를 중독자로 무시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동네 가까운 병원의 주치의에게 먼저 진료받으면서 초기에 오진되는 경우 상급병원으로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서양의학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여성의 고통은 정신병이자 히스테리로 치부되어 온 서양의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여성의 질병에 대해 제대로 연구도 교육도 발달해오지 못한 곳에서 여성의 질병은 다 엄살로 치부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의료체계 만큼은 미국보다 우리가 나은 것 같다.
우리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귀찮아서 안가면 안갔지 부담되서 안가지는 않는다. 의료보험이 국가주도라는 것은 굉장한 복지혜택이다. 동네병원에 갔는데 진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병원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고 다른 병원들이 멀지도 않다. 상급병원들로 가는 것은 예약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무시당하는 수준은 아니다. 아파서 응급실에 갔는데 진통제 처방받으려고 하는 중독자로 의심받는 경우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의료산업-로비스트-정치권 으로 인한 약물남용이 없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서양의학이 기본체제이기는 하나 오랜 세월 동양의학과 함께 해온 우리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신체적 아픔이 생길때 한의원에 가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학기기 에서 증명되지 않아도 맥을 짚고 침맞고 뜸뜨면서 안정을 찾게 되는 경우도 꽤 많다. 적어도 아프다고 말할때 여성이라고 해서 무시당하는 경우를 겪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미국은 같은 질병과 같은 증상이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신병으로 치부해 버린다고 하니 오랜 관습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의료현장에서의 차별은 차치하고라도 임상실험 과 처방기준에 대해서는 공감가는 바가 컸다.
임상 연구와 진료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문제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약의 복용기준은 성인남성 기준이다.
그런데 임상연구 대상에서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동물실험에서도 수컷생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놀라웠다. (심지어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아지는 폐경기 관련 연구 조차도 남성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진행했다;;;) 여성이든 암컷이든 호르몬주기 때문에 임상실험의 조건이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남성만 수컷만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증명된 약을 남성기준의 양으로 처방받고 있는 여성의 몸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의 호르몬 주기 때문에 남성과 그토록 다르다면 오히려 여성과 암컷을 대상으로 테스트해봐야 더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남성이 잘 걸리는 병에 대한 연구가 먼저이고, 남성은 고통을 여성보다 잘 참는다는 편견아래 여성의 고통은 심인성이다 라고 진료하고, 남성에게 잘 듣는 약으로 개발된 약을 똑같이 처방받고, 여성의 질환은 후대를 생산하는 부인과 외에는 관심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 되어온 현실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차올랐다.
의료체계가 다른 미국에서는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발달이 과학의 발달보다 빠르게 움직여 여성환우들의 단체 활동이 큰 힘을 얻고 있었다. 의사에게 인정받지 못한 질병을 지닌 여성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연구단체를 지원하여 새로운 질병임을 인정받고 교육시킬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단체들의 노력이 중요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주로 서양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배우고 서양에서 개발된 약을 들여오고 서양에서 전파된 기술을 배우는 국내 의료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의사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오진을 당하고 무시당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가? 의료체계는 우리가 나을지라도 의료계를 바꿀 수 있는 외부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훨씬 무력하다.
'잘 연구되었으며 놀랍도록 위협적인 책' 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처럼 이 책은 탄탄하면서도 가슴아픈 공포를 주는 책이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라지만 절반의 인류로서 인정받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입지가 너무 드러난 책이라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일수록 널리 알려져야 뭐하나라도 개선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의료현실이 똑같지는 않더라도 의료계에서의 성,젠더 차별에 대해, 고정관념에 빠지기 쉬운 오래된 전통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수록 더욱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모르면 어쩔 수 없어도 알고 나면 똑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의료계에서 불신을 경험한 사람들도 의료계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껍고도 무거운 책이지만 그 묵직함이 더이상 가벼이 여겨지지 않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