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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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우리가 알게 된 것들

 

 

페미니즘 이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굉장히 익숙한 단어다.

익숙한 단어이기는 한데 사실 생각해보면 잘 모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제대로 페미니즘을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가 쓴 페미니즘 책이다.

페미니스트 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면 아마도 왜곡된 페미니즘적 인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그런 것일 수 있다.

페미니즘 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스트란 어떤 사람일까?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데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지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p. 5)

이 책은 저자가 2003~2019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기에 쓰여졌느냐에 따라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기성찰이 지속적으로 이루진 것이 글속에 반영됐음을 읽어가며 알 수 있었다. 시기별로 순서대로 글이 배치된 것은 아니지만 흐름을 짚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 흐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의 변화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내기 위해 그동안의 글을 정리하고 개고하면서, 대략 2009년 부터 페미니즘이 다시 부흥했다고 알려진 2015년까지 5~6년간 글 청탁이 거의 끊겼던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됐다. 이 시기는 대부분 매체에서 여성면 자체가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 1980년대 여성운동이 성장하면서 페미니즘은 확산되어 갔으나 2009년즈음 부터 쇠퇴되었다고 한다. 고사 직전의 페미니즘을 되살려 낸 것은 2009년데이트강간약-물뽕사건, 2010년 검사성접대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이 쌓이면서 여성 대중들에 의해 페미니스트 선언이 나오는 필연적 배경이 되었고, 페미니즘은 부활했다. 하지만 근래의 페미니즘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도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이견은 있었지만 지금 같은 형태였던 적은 없었다. 평등은 차이를 무시하기 위한 수사로 사용되었고, 자유는 전례 없이 모욕당했고, 혐오는 새로운 무기가 되었다. 역사는 쌓이기도 전에 크고 작은 실수가 밝혀지면 즉각 삭제되었다. 비판적 사고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자리뺏기 싸움이나 내부 갈등으로 치환하고, 상대의 절멸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자기 편을 모으는 걸 운동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곳곳에 나타났다. 놀랍고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로 사는 한 결코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선 내가 아닌 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지만 혼자는 싫고,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하기도 하며, 자유는 언제나 위험을 담고 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언제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냈다. 이 책은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알게 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p. 11)

글들은 여기저기 칼럼식으로 기고되었던 글인만큼 길지 않아 금방금방 읽힌다. 그 짧고 굵은 내용 속에 맘에 와 박히는 문장들이 여러 곳에 있었다.

모든 운동과 이념이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순간 억압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배웠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p. 22)

1장 첫번째 글에서 저자는 트랜스여성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 한다. 그때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다시한번 다짐하듯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며 여성운동을 하던 저자도 트랜스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 실수를 인정한다.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되면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알게 되고 나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위선이다. 위선에 대한 자책감 을 경계하며 다시한번 다짐하는 저자의 고백은 왠지 울림이 길었다...

정체성의 정치가 신자유주의와 만나 다양성의 목록 하나를 더하는 식으로 축소된 요즘, 진정한 불온세력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p. 24)

불온세력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사실 불온세력이 아닐수도 있다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집단은 예측가능하며 따라서 불온하게 되지 않도록 막아진다. 정말 위험한 세력은 저자의 말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선택에 의해 사회의 색이 달라질 수도 있다.

수치심을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를 움직이게 한 마음은 수치심과 정의감이었다.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게 해주고, 정의감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해준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기 어렵다. (p. 34)

저자는 참 멋진 아버지를 두었고 멋진 어머니를 두었다. 권김현영 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을때 부모의 성이 같아서 김김현영이라고 쓰는 것은 이상하니 그냥 김현영이라고 쓰고 있을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성운동 한다면서 왜 이름을 그렇게 쓰냐고 외할머니의 성을 쓰면 어떠냐고. 저자는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권김현영이 되었다. 아버지의 모임 단톡방에 불법성폭력동영상이 올라왔을때 그런 것을 올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아버지는 천년같은 단톡방의 정적을 이겨내시면서 딸의 의견을 지지해주었다. 이런 부모님덕에 저자의 생각이 어디에 편향되지 않게 잘 자리잡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서 일본인 여성을 한국인 청년이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저자도 한국인으로서 화나고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본여성의 계정에 많은 한국인들이 대신 사과하는 것을 보고 그 일본여성은 "한국인들이 왜 사과를 하지" 하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사과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과하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 사건을 보며 페미니즘적 사고를 했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가 직접 사과하는 것은 맞고 주변 사람이 대신 사과해주는 문화가 이상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부모세대가 저지른 제국주의의 폐해를 자신들이 사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사과를 영원히 할 수 없겠구나...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

낙태문제 에 대해 "이미 태어난 생명에 대한 예의' 를 먼저 생각하는 것

생리대 유해성 문제가 터졌을때 남성전문가가 나와 생리대 사용법교육같은 무지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어이없는 상황

한국같은 고도의 가족중심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존중의 근거가 아니라 협박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

진보진영 남성들이 남성 권력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욕망했다는 것

결혼 자체를 부역으로 취급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무너진 사회에서만 가능한데, 가부장제가 무너지기는 커녕 돈독한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서 결혼이 여성에게 부역행위인지를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 현실 은 토론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토론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 서로의 말이 옳다며 침튀기며 소리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토론이란, 정말 좋은 토론이란

좋은 토론이 되려면 사회자, 촉진자, 발제자, 청중 모두 토론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궁금한 것을 상대에게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반론하며 자신의 논지를 점검할 수 있따는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질문을 명목으로 자기과시적인 연설을 하거나 선동하며 혐오 발화를 할 때 모두가 제지할 수 있다.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걸 기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토론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향력만을 과시하려는 사람은 토론에서 논박되었어도 전혀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 ... 겨우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 토론할 상황을 만들어놓았는데, 저런 이들이 공론장의 주요 스피커로 취급되면 성차별이 있다는 이야기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것이 토론이 아니라 퇴행이라고 보는 이유다. (p. 67)

제대로 된 토론문화가 정착된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인권적인 측면부터 공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권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 연대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강력하고도 유용한 개념이다. 그 때문에 인권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자고 하는 것은 인권의 불가능성을 사고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좀더 정치적으로 강력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만들어내는 사회관계를 포함해서 인간이 만들어진다고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을 지향한다거나, 여성인권이 아니라 보다 전체적인 인권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식의 말들이 휴머니즘과 인권을 가장 탈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 페미니즘과 여성인권운동이야말로 인간의 조건과 개념 자체를 질문하고 재구성하는 가장 혁명적인 휴머니즘이자 가장 급진적인 인권운동이다. (p. 91)

페미니즘에 대해서 좁은 범위의 의미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해 폭넓은 사고의 방향을 알려준다.

대학사회의 변화는 향후 대중정치 방향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대학 사회에 불고 있는 대표성의 위기와 정치의 내용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분병한 변화는 이제 선출된 이후 결과에 '승복'하는 식의 정치는 더는 없다는 것이다. (p. 105)

학생운동은 옛말이고 대학교에 학생회조직은 사라진줄 알았다. 그냥 과거이고 추억속에 남은 것이겠거니 했는데, 저자는 정점에 있었을때나 바닥이라는 위기에 있을때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낸다. 2008년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나는 그저 실패한 기억이라고 생각했었다. 상실과 좌절의 꺾임이었따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때의 그 시도가 있었기에 이후의 사회적 논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현실이 바뀐 것은 없는데, 실망이 희망이 되는 묘한 느낌이 들면서 내 생각의 프레임이 살짝 돌려지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조차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데도, 역차별 담론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고 정치적 상상력을 닫아버린다. ... 법,제도적 기반 없이 급조된 여성전용 혹은 여성친화를 내세운 정책들은 역차별을 발생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성차별을 강화한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기반하거나 성별분업 문제에 대한 고민없이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만든 정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p. 108)

그러고 보니 여성을 위한 정책들이 사실 강제성을 띤 법으로 정해진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러한 유명무실한 시도만으로도 역차별 논란은 거세고 그러면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시도들은 사라진다. 눈치챌 새도 없이...

여자와 남자의 뇌 차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언제나 인기를 끈다는 저자의 글을 보며 사실 나도 그러한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구분이 서로의 이해를 돕는다고 그냥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차별을 당연시하는 기반이 되는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여성의 인권은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착취당하는 최악의 상태를 전시해야 공감을 얻는다. 반면에, 남성의 인권은 잠재적인 피해 가능성과 인간으로서 명예훼손에 대한 우려만을 이야기해도 공감을 얻는다. 여성과 아이에 대한 학대는 그들의 약한 위치 때문에 분노를 일으키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쾌락을 자극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정말 불편해하는 장면은 권력자의 눈물과 상처이다. (p. 134)

그러고 보니 그랬다. 여성은 피해가 겉으로 보여야 동정심이라도 얻고 남성은 그럴 가능성만 있어도 바로 들고 일어난다. 그리고 약자들이 항상 저 위에 있는 강자들을 걱정한다. 왜일까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자신들인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피해자의 곁을 지키며 정의롭게 살악려는 이들에게 꼭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분노로 인해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우리 일상생활의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그 힘을 길러야 한다. (p. 152)

일상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여성혐오와 싸우는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무기라기보다는 족쇄에 가깝다. 전략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은 이미 실패를 거듭해왔다. 사회가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 전략으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p. 227)

저자는 지속적으로 연대와 여성들의 목소리를 응원한다. 글쓰는 여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글을 보며 사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에 자기만의 글을 쓰는 여자는 많은데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글 부족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노가 단순히 음란이 문제가 아니라 폭력이 문제라는 것, 아동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가 사실은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 아동복지예산이 거의 바닥이라는 것, 여성주의 자기방어운동이 단순히 신체적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등 문제를 지적하면서 대안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글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면서도 일단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수 있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싫은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저자가 알게 된 것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알아야 할 내용들이었다.

선입견을 갖지 말고 같은 인간의 이야기로 인권의 이야기로 읽어간다면 분명 가슴깊이 박히는 내용들이 있는 책이었기에 나는 이 책을 페미니즘책으로 국한짓고 싶지 않다.

아집에 갖힌 페미니즘이 아니라 퇴행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진화하는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의 생각이 아니어야 한다.

다시 알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 속에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함께 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람의 이야기로 읽혀졌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은 원래 그런 것인것 같다. 한쪽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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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메러디스 메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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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소녀와 양봉가 할아버지,

그리고 신비로운 '꿀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표지 中)

 

 

저자의 어린시절을 담은 회고록인데 소설처럼 읽히는 이 책은 굉장히 자연친화적이고 소설보다 더진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다. 감동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가슴아픈 실화라고 해도 글을 읽으며 울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책 말미에... 울컥 했다...

1980년 열살이었던 저자는 양봉가인 할아버지와 양봉장에서 벌떼를 만난 기억으로 책은 시작된다.

꿀벌은 가족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혼자서는 하룻밤도 이겨내기 어렵다. 여왕벌이 죽기라도 하면 일벌들은 여왕벌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벌통을 뒤지고 다닌다. 그러다 봉군은 쇠약해지고 꿀벌들은 사기가 꺾여 꿀을 따러 다니지 않고 그저 기신기신 벌통 주변만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 가족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p. 16)

저자는 5살때 외갓댁으로 왔다. 부부싸움이 잦았던 부모는 결국 이혼을 했고 5살이었던 저자와 3살이었던 남동생을 데리고 엄마는 친정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이기를 포기했다. 하루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았다. 어린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한 메러디스(저자)를 다시 살게 해준 것은 외할아버지와 꿀벌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꿀벌 이야기는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꿀벌 세계의 내면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인간 세계의 외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수록 나와 자연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나는 꿀벌들이 '서로를 얼마나 살뜰히 보살피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언제 무리를 지어 어디로 갈 것인지 같은 문제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결정하는지, 또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지' 등을 배워나갔다. 심지어 벌에 쏘이는 경험조차 내게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꿀벌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주지 못한 고대의 지혜를 꿀벌들이 갖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게 참고 버티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지난 1억년간 꾸준히 지구상에 존재해온 꿀벌이었다. (p. 18)

 

나는 벌 한마리만 윙윙거리며 주변을 맴돌아도 몸서리치며 무서워하는 타입이다. 가만이 있으라는 옆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팔을 휘저으며 벌을 쫒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꿀벌을 존경하게 되었다. 다음에 꿀벌이 내 주변에서 윙윙거린다면 참고 살펴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나이에 이혼을 경험한 메러디스의 엄마는 그 좌절감을 버텨내지 못했다.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메러디스와 남동생은 조부모의 손에 컸지만, 사실 남매를 키운것은 꿀벌이고 꿀벌이 사는 자연이었다. 조부모는 의식주를 해결해주었지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준 것은 꿀벌이고 자연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독신이었지만 이혼녀였던 할머니와 결혼했다. 그때가 할머니 마흔 할아버지는 세살 연하였고 메러디스의 엄마는 이미 열아홉 다큰 처녀였다.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난 메러디스의 엄마는 꿀벌과 자연을 미처 알지 못한채 떠났고 다시 돌아왔을때는 꿀벌과 자연도 자식도 그 무엇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메러디스 처럼 자연에서 치유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그 버스에 이끌렸다. 날 지켜줄 수 있는 밀페된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잠수함이나 버스처럼 세상과 동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올라 정말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꿀버스 안에 있으면 따뜻하고 안전할 것 같았다. 버스 안에 있는 아저씨들이 나를 초대해서 그들의 비밀 모임에 끼워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손수 만들어내는 방법을 내게도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벌집들을 주고받고, 또 한사람씩 번갈아가며 유리 단지를 들고,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받아가며 마치 춤추는 것처럼 조화롭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 버스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버스가 내게도 행복을 심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아직 묻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답과 같은, 아주 중요한 것이 버스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저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p. 78)

이 책의 원제가 the honey bus 이다. 꿀버스.

할아버지가 오래된 군용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채밀공장?!이었다.

꿀이 가득한 벌집틀에서 꿀을 채취하는 그 작은 버스 안은 달콤한 꿀이 넘쳐나는 곳이자 달콤한 시간이 넘쳐나는 장소였다. 유일하게 행복을 주는 장소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벌에 쏘이지 않고도 벌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매슈와 내게 모든 생물은 각자 내면의 정서적 삶을 지니고 살아가는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 꿀벌들이 이토록 다정한 존재라면 그 사실을 내가 직접 배워보면 어떨까? 나는 아직 언제나 주변 곳곳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p. 91)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곳에 있는데 어쩐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고 또 누구도 나를 불쌍히 여길 일이 없었다. 이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아빠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엄마를 둔 아이도 아니었다. 꿀벌들은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벌들이 불러주는 노랫소리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 꿀벌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는 선택권이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내게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에 깔려 무너지는 앞날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앞날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p. 119~120)

꿀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 만큼은 마음이 느긋해지고 편안해졋다. 근심을 내려놓고 벌들과 그들의 행동에 정신을 쏟고 있으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보이지 않던 온갖 생명이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그런 생명들을 지켜보다 왠일인지 내 문제가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위로받는 것 같기도 했다. (p.144)

 

다섯살에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세계는 할아버지에게서 꿀벌세계를 배워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는듯 이해되어져 갔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자연이 주는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된다. 꿀벌세계의 경이로움은 어린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해 그 복잡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머릿속이 뒤숭숭할때 규칙적인 생활은 의외의 안정감을 준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벌어지던 5살 소녀에게 규칙적인 꿀벌의 생활은 안정감을 주었고 그 안정감은 삶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심어주었다.

읽으면서 저자의 유년시절중 저자가 표현하는 고통을 작게 보이게 할 만큼 부러운 지점들이 있었다. 1975년 5살 (우리나라 나이로 하자면 6살?!) 소녀가 유치원에 가서 비틀즈의 음악을 들었을때 대성통곡을 한다. 그 음악은 아빠가 좋아했던 음악이었고 아빠와 추억이 깃든 음악이었다. 추슬러지지 않은 감정이 드러난 그다음날 부터 유치원선생님은 음악수업시간이 될때마다 메러디스를 다른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옛날 벌써 유치원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림치료를 했다는 것이 소설적 감동과 또다른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정말 너무 멋진 분이었다.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생채기가 날때마다 다독여 주고 엄마가 내뱉은 의붓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도 어린 소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었다.

"음, 의붓- 이라는 건, 이 경우에 그저 할아버지가 한 명 넘게 있는 행운아라는 뜻이지"

할아버지는 누구를 할아버지로 삼고 싶은지 내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건 내게 쉬운 선택이었다. 할아버지의 삶은 뒤엉킨 가족사로 복잡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받아들여줄 여유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는 어른이었고,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주는 일을 즐겼으며, 우리의 의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부모가 마따히 해야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었다. (p. 207)

 

벌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새록새록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했다.

벌들의 역할이 생각보다 자세히 구분되어 있어 신기했고, 눈보라가 치든 38도가 넘는 무더위 속이든, 벌통이 어디에 위치해 있든 간에 벌통 내부의 온도는 항상 35도 언저리로 유지한다는 것도 신기했고 (꿀벌이 온도계 없이도 이토록 정확하게 온도를 유지하는 비결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다고 한다) 벌통을 검사와던 와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벌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머리를 한 방향으로 향하고 날개를 서로 맞물린 채 대군처럼 빈틈없이 정확한 자세로 정렬해 알을 보호하는 모습은, 그것도 밖에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유모벌들이 외부적 환경에 갑작스레 노출됐을때 맞은 비로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알을 보호해주는 벌들을 보며 메러디스는 깨닫는다.

비를 막아주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유모벌들은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새끼들의 부모가 아니었다. 그 새끼들의 부모는 여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여왕벌의 자손을 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스스로 위험에 처하는 길을 택했다. 유모벌들은 내동생과 내게 부모 역할을 대신 해주는 우리 할아버지처럼 새끼 벌들의 대리 부모인 셈이었다. ... 각각의 벌들은 서로를 똑같이 사랑했고 벌통 안은 '의붓' 과 '친' 사이를 구분 짓지 않았다. 그렇게 벌들은 내게 진짜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p. 212)

할아버지는 항상 꿀벌들과 함께 했고 꿀벌을 통해 메러디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꿀벌을 관리하고 꿀을 채집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 바라기만 하는 이들에게 찾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대가를 얻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또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메러디스는 체득한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꿀벌들을 돌봐주고 있는 것으로 알다가, 사실은 벌들이 할아버지와 메러디스와 나아가 인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까지 배우게 된다. 자연은 그런 존재다.

할아버지와 꿀벌과 자연속에서 살았지만 엄마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엄마' 가 아닌 채로 엄마로서 한 집에 존재 했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소유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제 내 것이고, 다시는 엄마의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엄마라는 이유로 이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어떤 안도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냥 엄마를 견디며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언젠간 엄마 곁을 평생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그저 엄마 말을 따르고 엄마와 부딪히지 않으면 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은 넘마 밑에 깔린 채 속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내 정신까지 엄마에게 갇혀 있을 필요는 없었다. (p. 353)

엄마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그 집은 내가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위험한 장소였고 그저 생존하기 위한 곳일 뿐이었다. (p. 368)

나는 우리를 버리고 싶어 하는 엄마의 행동에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바라왔다. 그런 행동이 엄마의 선택에서 비롯된 거라는 가능성을 없애려면 다른 비난할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엄마가 뭔가에 중독되어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약물에도 전혀 손대지 않았다. 엄마는 늦은 시간까지 외출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낯선 사람과 남겨두지도 않았으며 남자들을 집에 들이는 일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보호시설에 입원한 적이 없었고 또 노숙자였던 적도 없었다. 도박도 하지 않았다. 종교적 광신도도 아니었고 일 중독자도 아니었다. '엄마' 라는 역할을 버리고 자식의 삶을 아예 망쳐버릴 만한 그 어떤 일에도 빠져 있지 않았다. (p. 400)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장하는 내내 상처만 쌓여갔다. 집은 위험했고 할아버지 곁 만이 안전했다.

엄마에게는 가는 곳마다 쫓겨나게 행동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드러나는 엄마의 독선이 늘 수치심을 안겼다. 엄마의 분노는 상황에 따라 정도는 달랐으나 언제나 기본 값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p. 335)

엄마는 다른 사람을 결코 사랑할 수 없게끔 철벽을 치고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훈련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으며 자랐던 것이다. 엄마도 혼란에 빠져 있는 보호자였다. 엄마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p. 411)

엄마가 나를 때렸고 엄마의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다면, 분명 또 다른 누군가가 엄마의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친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는게 있는지 물었다. 엄마는 기본적인 사실만 알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생때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때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 할아버지의 누나를 데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단둘이 남겨졌고 그 아버지에게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곤 했다고. 엄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맞았다고 했다. (p. 413)

 

폭력은 대물림된다. 자각하고 반성하고 그 강도를 약하게 낮출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대물림된다. 그 대물림이 끝나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가능해진다. 부모에게 과거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의 상처를 떠안을 수는 없다. 부모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고 해서 자식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각자의 몫이다. 메러디스의 엄마는 방임했다가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었다 하는 자신의 엄마가 유일한 가족이었고 둘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지 못했다. 하지만 메러디스 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가 있었고 꿀벌의 세계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와 매슈를 데리고 빅서로 나갔고 수확기가 되면 꿀버스에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할아버지의 양봉 수업에 숨어 있는 진지한 의미를 알아듣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우리가 비아콘텐타에 갇히지 않고 사고의 틀을 확장할 수 있도록 꾸준히 우리를 자극했다. 엄마가 아닌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었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게 적절한지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꿀벌을 예로 들어 은유적으로 설명하곤 했다. 꿀벌이 살아가는 모습에 녹아 있는 숭고하고 경탄스러운 삶의 방식은 곧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인간이 마땅히 지키며 살아가야 할 기준과도 같았다. (p. 374)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잘 자라 좋은 대학에 합격하여 집을 떠나게 된 메러디스는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꿀벌버스에서 할아버지와 동생과 꿀을 채집한다.

우리 셋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꿀단지를 주고받으며 발레단 단원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것이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게 될 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다는 느낌.

"있잖니" 할아버지가 정적을 깼다. "너희 할머니하고 결혼했을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단단다"

할아버지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아이를 키울 일이 없을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꿀이 나오는 주둥이를 닫고 일어나더니 양팔을 넓게 벌려 우리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그랬는데 무슨 행운인지 너희 둘이 나타났단다"

그 순간 기쁨이 폭발하여 온몸이 짜릿해졌다. 내게도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내 벌집은 바로 이곳, 할아버지의 꿀 버스 안이었다. (p. 424)

 

여기서 울컥 했다. 정말 울뻔 했다.

논픽션의 감동과 소설적 감동이 함께 존재하는 글은 처음이었다.

5살 소녀가 20살이 되기까지 여정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메러디스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에게? 누구에게 감정이 쏠렸든 여하튼 간에 다시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설명할 수가 없다...

에필로그 시점인 2015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메러디스에게 벌들을 부탁했다. 그 벌들은 자신의 벌통 속 벌들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벌들이었고 세상의 생명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말한 벌들의 의미를 메러디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메러디스의 벌집이었던 할아버지의 꿀버스는 이제 없지만 세상 곳곳에 할아버지가 있음을 메러디스는 알 수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자연 어디에든 있었다. 메러디스도 알고 나도 왠지 알 것 같았다.

허니버스는 정말 달콤하고 거대한 벌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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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마야 뒤센베리 지음, 김보은.이유림.윤정원 옮김 / 한문화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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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성 편견으로 진료실에서도 차별받는 여성의 아플 권리에 대한 보고서

나쁜 의학과 게으른 과학이

여성을 무시하고 오진하고 병들게 한 진실에 대한 보고서 (표지 中)

 

 

표지에 한 여자가 있다.

무채색의 이 여자는딱 봐도 아파 보인다.

여자가 말하는 듯 [ Doing Harm } 이라는 글씨가 여자의 입을 가리고 있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이기도 한 'Doing Harm' 은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있어! , (나를) 아프게 하고 있어! 로 해석된다.

아픈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며 그 시선을 받은 사람에게 당신이 자신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픈데 더 아프게 하는 사람... 이 책은 아픈 여성과 이 여성을 더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인 'Doing Harm' 은 'Do no harm'(환자에게 위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의사결정 절제 명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는 환자의 몸, 정신,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하게 되는데 득이 되는 방향의 개입을 하라는 명제보다 해가 되는 개입을 하지 말라는 명제가 먼저 나온다는 것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있는 서문에서부터 이미 위협적이다. 치료가 먼저가 아니라 해치지 말라는 것이 먼저였다는 것이, 이미 고대때부터 그러한 인식하에 환자를 대하라고 했다는 것이, 그게 얼마나 실천이 잘 되지 않았으면 여전히 이 짧은 문장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개요는 <1부> 내용이다.

< 눈 감고 무시해온 구조적 문제> 라는 제목 아래 '지식의 간극' 과 '신뢰의 간극' 으로 나위어 어느 방향에서든 여자의 고통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풀어낸다.

<2부 - '남성 중심' 체계 속에서 사라진 여성> 과 < 3부 - 히스테리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질병들> 은 그 실제적 사례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촘촘하게 저자가 조사한 내용들을 설명한다.

어찌보면 동어반복적인 내용들이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한다 - 의사는 믿지 않는다 - 여성의 병이 심해지지만 감내할 수 밖에 없다

혹은

여성이 아프다고 말한다 - 의사는 정신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 여성의 병이 심해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치료를 받게 되지만 다른 곳에서 다른 여성은 이 여성의 전철을 밟고 있다.

전형적인 서양스타일로 쓰여진 보고서 형태의 책으로 연역식인 구조는 첫장 시작부터 결과는 알고 들어간다.

'의사는 여자의 고통을 믿지 않았다'

이 문장을 증명해내는 증거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450여 페이지 내내 아픈 여성들과 믿지 않는 의사들을 보며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으면서도 중간에 놓을수도 없이 다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보수적인 미국의 의료현실에 대해 새삼 놀랐다.

백인남성우월주의가 너무나 뼛속깊이 박혀 있어서 환자에게 공정해야 할 의사가 너무나 선입견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놀랐다.

서양의학의 역사속에서 난자당한 여성의 몸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아픔들이 끔찍했다.

미국의료체계는 우리네와 달라서 더 안되 보이기도 했다.

미국의료체계는 일단 의료보험이 개인부담이라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다. 마약성 진통제가 횡행한 곳이라 중독자가 많다 보니 환자를 중독자로 무시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동네 가까운 병원의 주치의에게 먼저 진료받으면서 초기에 오진되는 경우 상급병원으로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서양의학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여성의 고통은 정신병이자 히스테리로 치부되어 온 서양의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여성의 질병에 대해 제대로 연구도 교육도 발달해오지 못한 곳에서 여성의 질병은 다 엄살로 치부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의료체계 만큼은 미국보다 우리가 나은 것 같다.

우리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귀찮아서 안가면 안갔지 부담되서 안가지는 않는다. 의료보험이 국가주도라는 것은 굉장한 복지혜택이다. 동네병원에 갔는데 진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병원가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고 다른 병원들이 멀지도 않다. 상급병원들로 가는 것은 예약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무시당하는 수준은 아니다. 아파서 응급실에 갔는데 진통제 처방받으려고 하는 중독자로 의심받는 경우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의료산업-로비스트-정치권 으로 인한 약물남용이 없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서양의학이 기본체제이기는 하나 오랜 세월 동양의학과 함께 해온 우리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신체적 아픔이 생길때 한의원에 가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학기기 에서 증명되지 않아도 맥을 짚고 침맞고 뜸뜨면서 안정을 찾게 되는 경우도 꽤 많다. 적어도 아프다고 말할때 여성이라고 해서 무시당하는 경우를 겪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미국은 같은 질병과 같은 증상이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신병으로 치부해 버린다고 하니 오랜 관습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의료현장에서의 차별은 차치하고라도 임상실험 과 처방기준에 대해서는 공감가는 바가 컸다.

임상 연구와 진료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문제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약의 복용기준은 성인남성 기준이다.

그런데 임상연구 대상에서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동물실험에서도 수컷생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놀라웠다. (심지어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아지는 폐경기 관련 연구 조차도 남성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진행했다;;;) 여성이든 암컷이든 호르몬주기 때문에 임상실험의 조건이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남성만 수컷만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증명된 약을 남성기준의 양으로 처방받고 있는 여성의 몸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의 호르몬 주기 때문에 남성과 그토록 다르다면 오히려 여성과 암컷을 대상으로 테스트해봐야 더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남성이 잘 걸리는 병에 대한 연구가 먼저이고, 남성은 고통을 여성보다 잘 참는다는 편견아래 여성의 고통은 심인성이다 라고 진료하고, 남성에게 잘 듣는 약으로 개발된 약을 똑같이 처방받고, 여성의 질환은 후대를 생산하는 부인과 외에는 관심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 되어온 현실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차올랐다.

의료체계가 다른 미국에서는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발달이 과학의 발달보다 빠르게 움직여 여성환우들의 단체 활동이 큰 힘을 얻고 있었다. 의사에게 인정받지 못한 질병을 지닌 여성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연구단체를 지원하여 새로운 질병임을 인정받고 교육시킬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단체들의 노력이 중요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주로 서양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배우고 서양에서 개발된 약을 들여오고 서양에서 전파된 기술을 배우는 국내 의료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의사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오진을 당하고 무시당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가? 의료체계는 우리가 나을지라도 의료계를 바꿀 수 있는 외부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훨씬 무력하다.

'잘 연구되었으며 놀랍도록 위협적인 책' 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처럼 이 책은 탄탄하면서도 가슴아픈 공포를 주는 책이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라지만 절반의 인류로서 인정받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입지가 너무 드러난 책이라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일수록 널리 알려져야 뭐하나라도 개선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의료현실이 똑같지는 않더라도 의료계에서의 성,젠더 차별에 대해, 고정관념에 빠지기 쉬운 오래된 전통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수록 더욱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모르면 어쩔 수 없어도 알고 나면 똑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의료계에서 불신을 경험한 사람들도 의료계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껍고도 무거운 책이지만 그 묵직함이 더이상 가벼이 여겨지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여성의 증상은 '모두 머릿속에서 생긴' 증상이라는 고정관념이 의학 지식으로 굳어졌다.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이 상호작용하면서 고치기 어려운 수준까지 고착되었다. 여성에게 더 많이 생기는 질병과 증상,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해 의사가 단순히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 환자가 질병을 호소해도 무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사에게 여성 환자는 신뢰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선입견이 있어서 여성의 증상을 무시하는 걸까? 지식의 부재일까? 신뢰의 부재일까? 내 생각에는 양쪽 모두다.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은 이 지점에서 너무나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의학은 여성의 몸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의 질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성의 질병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의학은 여성의 몸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 이 책은 의학계에 있는 몇몇 성차별주의자를 골라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의학계에 편견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에 대해 다룬다. 여성에 대해 특정 편견을 가진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 모두와 보건의료 종사자들이 어떻게 무의식적인 편견을 체화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최고의 의사들조차도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잘 모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의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들 역시도 여성 건강에 대해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p. 28)

몸은 항상 아플 수 있고, 의사는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과학이 곧장 사람의 몸에 얽힌 신비를 모두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젠더가 그러한 실수의 요인이 되어서도, 미지의 지식으로 남겨져서도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고 치유하려는 의학적 탐구가 계속 진행되어, 여성의 고통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의학에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를 기대한다. (p. 39)

모든 세대의 의사는 현시대의 이론과 기술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 현재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병은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정확한 검사법을 갖춘 미래의 의사조차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들을 통합적인 질병으로 취급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집어넣을, 잡동사니로 가득 찬 진단 범주를 만드는 데' 안주한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심인성 원인으로 돌리면서, 의학은 '의사의 무오류성과 의학의 전지성'을 주장한다. 히스테리는 여전히 '적절하지 않은 증상을 던져버리는 의학의 쓰레기통' 으로 남아있다. (p. 119)

증상이 이상하고 낯설다고 해서 질병이 실재가 될 수 없다고 믿어야 하는가? 우리의 실험실 검사가 오래된 질병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질병들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건강한 회의주의' 는 의사에게 귀중한 자질이지만, 이 회의주의자가 환자에게 향할 때는 의료계 전체가 새로운 의학 수수께끼를 풀 수 없게 될 것이다. (p. 368)

의학계가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증거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질성 질환이 19세기에 히스테리, 신경쇠약, 신경증장애 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는지, 그래서 21세기까지 오진되고 있는지 의학계는 잊어버렸다. 다발성 경화증, 측두엽간질, 자궁내막증, 자가면역질환 처럼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질병도 히스테리나 신경쇠약과 '모든 측면에서 구별할 수 없었다는 사실' 은 무시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계속 변화하는 수많은 느슨한 진단명들의 유사점은 어쩐지 심인성 기원의 증거라고 여겨지지만, 이것은 그저 여전히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p. 375)

결국 자신들의 역사를 잊은 사람들은 그 역사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지구의 온도는 높아지고, 서식지는 변하고, 환경 독소는 점점 많아지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다음 모퉁이를 돌면 언제나 새로운 질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 426)

여성의 신뢰를 되찾는 것은 의료계의 몫이다. 그에 필요한 변화 중에는 의료체계 전체와 관련된 거대한 문제도 있다. 이는 시행하기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도 있다. 바로 여성의 말을 듣는 일이다. 여성이 아프다고 말할 때, 여성을 믿어라.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수많은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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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샘과 함께하는 시간을 걷는 인문학
조지욱 지음 / 사계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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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펼쳐진 길들이 역사적 장소로 재탄생한다.

사회를 잇고, 문화를 엮고, 경제를 지탱해 온

세상의 모든 길을 걷는 인문학 여행! (표지 中)

 

 

참 좋은 책이었다. 뜬금없이 시작부터 결론적으로 그랬다. ㅎㅎ

현직 고등학교 지리선생님인 저자 소개를 보니 그동안 지리를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책들을 여럿 펴내신 분이었다.

이 책또한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고 청소년이 읽어도 쉽고 재밌게 읽힐 것이라 생각되는 책이었다.

비교적 얇은 두께에 부담도 없고 사이사이 적절한 컬러자료 인용도 보기에 편하고 무엇보다 예쁘다. 내 기준에는 예쁜 책이다. 그래서 좋다. ㅋ

'시간을 걷는 인문학' 이라고 제목지어졌지만, 이 책은 '시간' 이나 '인문학' 이 아닌 '걷는' 에 방점이 찍힌 책이다.

간략히 표현하자만 '길 이야기' 이다.

세상엔 많은 길이 있고 그 길은 연결되어져 있기도 하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샛길이 있기도 하다.

길을 따라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수도 있지만 이길저길 둘러보며 정처없이 유랑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이길도 갔다가 저길도 갔다가 천천히 걷다가 문득 뒤돌아 보면 이런 길을 내가 걸어왔구나 하는 소소한 감상을 주는 책이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길 이야기라서

멀고멀어 가볼수 없을것 같은 세계어느곳의 길이 아니라서

이런길에 한번쯤 가봐야 겠다 싶은 곳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길' 에 대해 다양한 잡학다식도 많이 알려준다.

서울지하철이 모든 역과 구간에서 휴대전화와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지하철이라는 것,

경북 문경의 토끼비리 라는 절벽길이 있었기에 왕건이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

인천 대교는 정부가 보유한 자산 중 가장 비싼 자산이라는 것,

지하철이 다니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지하 터널은 서울 방화동과 상일동 사이에 놓은 지하철 5호선 터널이라는 것

청계천이 바닥에 방수처리를 하고, 전기로 물을 끌어올려 흐르게 하는 인공하천이라는 것(전력난에 허덕이는 국가에서 전기먹는 하마라고나 할까;;;),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가장 많이 로드킬 당하는 고라니가 중국과 한국에서만 사는 귀한 동물이라는 것,

무엇보다 '조선의 길' 이야기는 당시 서양인들이나 일본인들에게 조선이 미개하다는 왜곡된 인식을 주게된 배경을 설명해 주어서 좋았다. 그들이 어찌 생각했던 우리라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이라는 구한말 선교사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그도 '조선의 길' 에 대해서는 혀를 찼다. 하지만 조선이 최소한의 도로망을 가졌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자라고 미개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에 우리 땅을 여행한 러시아 사람 루벤초프는 조선의 길을 보고 질려 버렸다. 사람은 많이 사는데 길이 원시적이라고 느낀 것이다. 그는 '아마도 조선은 도로를 만들 줄 모르는 모양' 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나 정치가들 중에서도 루벤초프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 백성 대부분은 수레를 이용하기보다는 걸어 다녔고, 화물을 운반할 때도 동물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끄는 손수레나 지게를 많이 사용했다. ... (p. 37)

우리 민족은 고조선부터만 따져도 무려 931회에 달하는 침략을 당했다. 이는 약 3년에 한 번꼴로 전쟁을 했다는 소리다. 이런 경험 탓에 우리 민족에게는 '넓은 도로는 적에게 유리하여 영토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러다 16세기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도로 건설에 소극적이다 못해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곧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강하게 믿게 되었다. (p. 39)

우리 조상이 도로 건설을 소홀히 한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의 육상 교통망(도로망)은 있었다. 우리 땅의 육상 교통망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신라 때 오늘날 우편 제도와 같은 '우역제도' 가 시작되었고, 7세기 이전에 전국적인 교통,통신 체계가 수립되었다. (p. 40)

일본은 우리 땅에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죄다 빼앗아 그 손실을 채우려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길이었다. 조선은 도로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식량이든 지하자원이든 마음껏 가져갈 수가 없었다. 이에 일본은 1906년에 차도국을 신설하고, 1907년부터 주요 간선 도로를 보수하거나 새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빼앗을 물건이 있는 곳에서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로 이어졌다. (p. 47)

 

'길'은 경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길을 통해 문물이 오가고 교류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유로 새로운 '길' 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경제를 핑계로 쓸모없는 길을 만든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반도 대운하계획 - 아라뱃길' 이다.

경인 아라뱃길 홈페이지에는 '1000년의 약속이 흐르는 뱃길', '800년 간 이어진 우리 민족의 염원'이라고 홍보되어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800년이 지난 지금, 조운 제도가 사라진 오늘날, 파나마 운하처럼 엄청난 거리를 줄이는 것도 아니고, 그 옆으로 번듯한 고속도로가 있는데, 왜 반드시 운하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 (p. 62)

2012년 국정감사에서 개통 후 5개월 간 운항한 화물선은 모두 10척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2조5천억 원이 들어간 경인 아라뱃길이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개통 이후 2019년 5월까지 7년간 화물처리 실적은 사업 계획 당시 예측치 4717만 통의 8.4%인 478만 톤에 불과했다. 더구나 경인 아라뱃길로 생긴 교량과 도로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이 매년 130억원씩 들어가고 있다. 또한 투자비 회수를 위해 아라뱃길 주변 지역을 개발해 레저,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인데 이는 추가 환경 훼손과 예산 낭비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여름철에는 녹조가 심해져 경인 아라뱃길의 수질은 5급수 '나쁨'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떄문에 수질 관리에 연평균 3억 6천만원 이상의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 (p. 63)

한반도 대운하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의 발전이 라인강 운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선 도로 교통과 철로 교통이 크게 발전하고, 운하 이용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도 정작 독일에서는 잘 알지도 못한다고 한다. (p. 169)

당시 이명박 정부는 운하 대신 '4대 강을 살린다' 는 구호를 앞세워 강을 파내고 보를 설치하는 등 22조원을 들여 엄청난 공사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니 진실이 가려졌다. 4대강은 홍수와 가뭄 조절 이전에 생명체도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해 갔다. (p. 171)

 

건설회사 출신 대통령으로 가장 큰 업적이 건설회사 배를 불려준 것 밖에 없는, 전두환 시대에서 '평화의 댐' 사기극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열성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현대판 사기극을 처벌할 수도 없는 현실... 그 예산을 복지에만 돌렸어도 등록금과 의료혜택과 연금에만 돌렸어도... 말해 무엇하리 입만 아플뿐...

바닷길은 진실을 알고 있다

동한 난류는 중부 지방에서 방향을 바꿔 울릉도와 독도로 가서 일본으로 흐른다. 또 가끔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서 시계 방향으로 감아 흐르기도 한다. 2000년 전 바람이나 해류에만 의지해 배를 띄워도 포항에서 동한 난류를 따라 울릉도나 독도에는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시계 방향 소용돌이를 이용해 왕복도 가능했다. 하지만 오키 군도에서 독도로 가려면 해류를 거슬러야하기 때문에 그 당시 배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독도는 우리 땅 맞다. (p. 67)

 

수천년을 흘러온 바다가 알고 있는 길, 해류의 흐름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왔던 한반도 백성이 알았던 바닷길, 길이 연결된 곳은 문화와 역사가 연결된 곳이다. 바닷길은 알고 있다. 독도가 한반도에 속해 있음을. 독도에 오려면 자연을 거슬러야 했던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결국 자연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길 뿐만 아니라 세계의 길 이야기도 있다.

그 유명한 로마의 길이나 페르시아의 왕도 는 이제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바닷길 이야기는 여전히 아픈 길이야기이다.

콜럼버스의 영광스러운 발견은 무역풍과 편서풍이 열어 준 바닷길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개척한 바닷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인디언'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다 붙였고, 카리브해의 여러 섬을 '서인도 제도'라 부르게 만들었다. 이것 뿐인가? 원주민들은 유럽인의 노예가 되어 사탕수수밭, 담배밭, 목화밭 등에서 죽도록 일해야 했고, 원주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유럽인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죽거나 유럽인이 옮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일로 이어졌다. (p. 95)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공적으로 놓여진 길의 역사는 사실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다. 길은 새로운 곳을 개척한다는 미명하에 미지의 땅을 수탈했다. 길이 유용해진 것은 사실 최근에서의 일이다. (사실 그 유용성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고대부터 근대까지 새로 놓여진 길을 가장 처음 밟는 사람들은 군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은 한국을 계속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나라로서 대륙으로 통하는 입구는 한반도 뿐이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산맥' 이라는 말이 일본 지리학자 고토가 20세기 초에 우리 산줄기에 붙인 이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학교다닐때 지리책에서 주구장창 외웠던 산맥들 이름이 일제잔재였다니...;;; 우리 조상은 산줄기를 대간, 정간, 정맥으로 불렀고, 그 중 으뜸이 백두대간 이라고 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1400킬로미터의 산줄기다. 우리 조상은 우리 땅의 산줄기를 1개 대간, 1개 정간, 13개 정맥으로 구분했다. 동,서 바다로 흘러드는 강을 나누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 하고, 거기서 갈라져 하나하나의 강을 나누는 산줄기를 정맥이라고 했다. 각 정맥의 이름은 대부분 강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백두대간은 우리 국토를 하나로 잇는 척추이자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정신줄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백두대간 곳곳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우리 민족의 일체감과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p. 111)

역사문제로 들어가면 일본이 가장 큰 문제지만 중국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대동강과 철령 이북의 땅은 과거 중국의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북한이 차지하고 있어서 큰소리 없이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중국이 철령 이북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날이 올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주장일 뿐 이미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철령 이북의 땅에도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다.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 신성시하며 벼농사를 짓고 온돌을 이용하는 같은 문화권을 형성했다. (p. 120)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옛날 고구려 땅인 간도나 연해주 지역만을 이야기하는 것인 줄 알았다. 철령이라는 지명을 처음 알게 됐는데 철령은 강원도 제일 위쪽 현재의 북한땅에 위치한 지역으로 백두대간의 중간지역이었다. 철령이북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주장은 곧 현재 북한 지역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한반도를 반으로 쪼개는 것이다. 일제치하가 끝나고 분단시대가 되지 않았다면 북한땅을 놓고 중국과 싸우게 됐을 지도 모른다.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땅과 고구려땅의 역사문제로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될 것이 예상되는데 현재 중국만한 강국이 없으므로 생각하면 참 암담하다... 다행이라면 역사문제는 다툼이 될 지언정 땅을 뺏고 뺏기는 식의 전쟁은 앞으로는 좀 어려울 것이라는 점?!;;;

'노가다'란 말이 있다. 공사장에서 막일하는 것을 이른다. 이 노가다란 말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인 경인선 건설 당시 무거운 침묵이나 레일을 나를 때 일꾼들끼리 호흡을 맞추기 위해 쓰던 구령이었다. 작업반장이 일본말로 "노(좋다, 으뜸)" 라고 구령을 붙이면, 나머지 일꾼들이 "가다(덩치, 모양)" 라고 후렴을 붙이며 무거운 것을 날랐다. 경인선은 우리 조상이 다소 우스꽝스러운 '노가다' 란 구령과 함께 땀 흘려 완성한 결실이었다. (p. 134)

'노가다' 라는 말이 어감상 일본말인줄은 알았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군산 지역에 "쌀 미" 자가 들어간 동 이름이 많은데 그것도 일제치하 때 군산항에서 쌀을 수탈해가던 사연을 갖고 있었다. 여전히 일본 침략 피해는 우리에게 진행중이다....

오늘의 새 길이 어제의 길을 옛길로 만드는 일, 빠른 길이 느린 길을 죽이는 일이 전국 곳곳에서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은 과연 삶과 죽음처럼 당연한 것일까? 본래 속도란 빠름과 느림, 둘 다 가리키는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빠름만 뜻하는 말이 되었다. (p. 145)

과연 인간다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든다. 인간은 동물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물도 얻고 사냥감도 얻었다. 그런데 동물들은 인간들이 만든 길에서 그들의 이동로를 잃고, 서식지를 잃고, 심지어 목숨마저 잃고 있다. 30분을 빨리 가기 위해, 경제 발전을 위해,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든 인간의 길이 동물들의 공동묘지가 된 셈이다. (p. 166)

1987년, 제주 용머리 해안에 450미터의 산책로가 생겨났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한쪽은 절벽, 한쪽은 바다다. 산책로는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는 길이라 물때를 맞춰 가야 걸어 볼 수 있으며, 바람이 많이 불거나 파도가 거친 날은 입장이 제한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산책로가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 잠기는 시간이 길어져 하루 평균 4~6시간에 이른다. 산책로가 사라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지구 온난화가 그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해수면 상승으로 잠기는 곳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길이었다. (p. 181~184)

 

200페이지도 안되는 비교적 짧은 책에서 생각보다 많은 생각들을 건져내다 보니 읽은 시간보다 읽고나서 정리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책이었다. 가볍게 빠르게 재밌게 읽었는데, 무겁게 느리게 여운이 남는 책이었달까...

지리는 역사와 닿아있고 역사는 인문학과 연결된다. '길' 을 안다는 것은 그 길 위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동물들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인간들도 사냥감과 물을 얻으며 그 길을 더욱 단단히 밟았다. 단단해진 길은 도로가 되고 이제 사람이 아닌 자동차 기차가 다니고 언젠가는 땅위의 길보다 다른 길이 더 많이 이용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길' 은 시간을 품고 이야기를 품고 생명을 품고 있다. '길'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언제까지 빠르고 편리한 것만 쫒으며 살건지 걱정된다면 가끔은 '길' 과 '시간' 과 '이야기' 에 고개돌려봐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물음표를 떠안은 책이긴 했지만,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이다. 이렇게 쉽게 읽히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쯤 되돌아볼 시간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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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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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제로캐럿'의 이야기와 일곱편의 팬픽

본편과 팬픽이 교차되는 지금 가장 독특한 소설

 

무대 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 있는 당신에게 (표지 中)

나는 팬픽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처음 경험하는 독특함이었다.

여자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이야기를 본편으로 쓰면서 제로캐럿의 열성 팬인 '파인캐럿'이 쓴 팬픽이 중간중간 끼워져 있다.

'제로캐럿'의 아이돌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로캐럿의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한 가상의 소설 '팬픽' 은 소설속의 소설인 것이다.

 

 

 

 

 

 

 

이야기는 제로캐럿의 콘서트로 시작된다.

첫 콘서트이자 마지막 콘서트가 될 콘서트를 앞두고 멤버들 개개인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아이돌 그룹의 속사정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적응이 되어가는 사이사이 팬픽을 읽다보면 멤버들 자체의 성격과 팬픽속의 성격이 섞여들어서 나름 집중하며 읽어야 한다.

 

 

 

 

제로캐럿의 멤버는 처음엔 5명 이었다.

다인(김다인), 루비나(이수빈), 지유(이지은), 재키(홍재영), 준(송준희)

그러다 계약기간이 먼저 끝난 두 멤버가 탈퇴하면서 한 명의 멤버가 영입된다. 마린(최마린)

연습생 생활을 오래한 지유와 재키는 단짝이다. 외국에서 온 재키를 지유는 옆에서 보살펴 주었다. 탈퇴후 지유는 연기자가 되고 재키는 외국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루비나는 늦깍이 아이돌이다. 이십대 중반에 데뷔하여 첫 콘서트를 29살에 하게 되었다. 다인은 춤을 잘 춘다. 중학생때 별 생각없이 친구가 찍어올린 춤동영상이 대박이 나면서 아이돌로 캐스팅 되었다. 준은 노력파다. 다인의 실력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고 아이돌 데뷔를 함께 하게 된 후 다방면에서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으나 사실은 늘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멤버구성의 변화를 가져온 마린은 아역배우였다. 아역배우 생활을 오래하면서 익혀진 엔터테인먼트 능력은 별다른 노력없이 바로 아이돌캐스팅으로 이어졌다.

멤버마다 데뷔한 배경이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이미지와 아이돌 이후의 삶도 다르다. 아이돌 그룹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지금 국내에 넘쳐나는 아이돌 그룹들의 속사정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돌 그룹의 열성팬인 파인캐럿의 마음을 읽고 작가후기를 읽고 나면 '응답하라 1997' 도 생각나고, 몇몇 아이돌 그룹을 소설속 멤버들과 매칭시켜 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작가가 표현하는 'SM 처돌이' 까지는 아니었지만, 젝키보다는 HOT가 좋았고, 핑클보다는 SES가 좋았다. 작가가 열렬히 사랑했던 아이돌그룹 f(x) 도 좋아했다.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 1988 보다도 1994 보다도 1997 이 가장 좋았던 것은 HOT 빠순이가 주인공인 드라마 내용에 가장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1세대 그룹은 뭐니뭐니해도 HOT 다. 1997의 주인공도 팬픽을 썼다. 하이틴로맨스소설 시대에서 바야흐로 팬픽으로 넘어가는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

아이돌 그룹은 대부분 동성그룹이기 때문에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주인공을 쓴 팬픽은 멤버들간의 사랑 즉 동성간의 사랑을 다룬다. 팬픽에서의 동성애 코드는 일반 소설속 동성애코드와는 또다르다. 연령대가 낮은 만큼 학창시절의 설레임 가득한 로맨스와 친구같기도하고 연인같기도 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혼란은 동성이기때문에 오는 혼란이라기 보다는 사랑과 아직 사랑이 아닌 감정 사이의 혼란이다. 그래서 사랑소설로도 성장소설로도 읽게 되는 이야기가 된다.

 

 

 

학창시절 사소한 순간이 주는 설레이는 추억하나쯤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한창 뜨거운 나이에 좋아하는 연애인에 대한 사랑 가득한 팬심을 경험해본 사람은 또 얼마나 많던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HR인듯 팬픽인듯 드라마인듯 읽게 되는 이 소설이 주는 풋풋함은 의외로 어린나이가 경험한 인생의 희노애락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인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그래서 인생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인데 노래가 들리고 노래가 들리는데 추억이 되버린 기분을 주는 이 소설은 라스트 러브가 라스트가 아님을 처음에도 알겠고 끝에도 알겠는, 마지막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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