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메러디스 메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상처 입은 소녀와 양봉가 할아버지,
그리고 신비로운 '꿀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표지 中)
저자의 어린시절을 담은 회고록인데 소설처럼 읽히는 이 책은 굉장히 자연친화적이고 소설보다 더진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다. 감동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가슴아픈 실화라고 해도 글을 읽으며 울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책 말미에... 울컥 했다...
1980년 열살이었던 저자는 양봉가인 할아버지와 양봉장에서 벌떼를 만난 기억으로 책은 시작된다.
꿀벌은 가족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혼자서는 하룻밤도 이겨내기 어렵다. 여왕벌이 죽기라도 하면 일벌들은 여왕벌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벌통을 뒤지고 다닌다. 그러다 봉군은 쇠약해지고 꿀벌들은 사기가 꺾여 꿀을 따러 다니지 않고 그저 기신기신 벌통 주변만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 가족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p. 16)
저자는 5살때 외갓댁으로 왔다. 부부싸움이 잦았던 부모는 결국 이혼을 했고 5살이었던 저자와 3살이었던 남동생을 데리고 엄마는 친정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이기를 포기했다. 하루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았다. 어린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한 메러디스(저자)를 다시 살게 해준 것은 외할아버지와 꿀벌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꿀벌 이야기는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꿀벌 세계의 내면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인간 세계의 외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수록 나와 자연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나는 꿀벌들이 '서로를 얼마나 살뜰히 보살피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언제 무리를 지어 어디로 갈 것인지 같은 문제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결정하는지, 또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지' 등을 배워나갔다. 심지어 벌에 쏘이는 경험조차 내게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꿀벌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주지 못한 고대의 지혜를 꿀벌들이 갖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게 참고 버티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지난 1억년간 꾸준히 지구상에 존재해온 꿀벌이었다. (p. 18)
나는 벌 한마리만 윙윙거리며 주변을 맴돌아도 몸서리치며 무서워하는 타입이다. 가만이 있으라는 옆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팔을 휘저으며 벌을 쫒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꿀벌을 존경하게 되었다. 다음에 꿀벌이 내 주변에서 윙윙거린다면 참고 살펴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나이에 이혼을 경험한 메러디스의 엄마는 그 좌절감을 버텨내지 못했다.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메러디스와 남동생은 조부모의 손에 컸지만, 사실 남매를 키운것은 꿀벌이고 꿀벌이 사는 자연이었다. 조부모는 의식주를 해결해주었지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준 것은 꿀벌이고 자연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독신이었지만 이혼녀였던 할머니와 결혼했다. 그때가 할머니 마흔 할아버지는 세살 연하였고 메러디스의 엄마는 이미 열아홉 다큰 처녀였다.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난 메러디스의 엄마는 꿀벌과 자연을 미처 알지 못한채 떠났고 다시 돌아왔을때는 꿀벌과 자연도 자식도 그 무엇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메러디스 처럼 자연에서 치유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그 버스에 이끌렸다. 날 지켜줄 수 있는 밀페된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잠수함이나 버스처럼 세상과 동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올라 정말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꿀버스 안에 있으면 따뜻하고 안전할 것 같았다. 버스 안에 있는 아저씨들이 나를 초대해서 그들의 비밀 모임에 끼워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손수 만들어내는 방법을 내게도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벌집들을 주고받고, 또 한사람씩 번갈아가며 유리 단지를 들고,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받아가며 마치 춤추는 것처럼 조화롭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 버스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버스가 내게도 행복을 심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아직 묻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답과 같은, 아주 중요한 것이 버스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저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p. 78)
이 책의 원제가 the honey bus 이다. 꿀버스.
할아버지가 오래된 군용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채밀공장?!이었다.
꿀이 가득한 벌집틀에서 꿀을 채취하는 그 작은 버스 안은 달콤한 꿀이 넘쳐나는 곳이자 달콤한 시간이 넘쳐나는 장소였다. 유일하게 행복을 주는 장소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벌에 쏘이지 않고도 벌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매슈와 내게 모든 생물은 각자 내면의 정서적 삶을 지니고 살아가는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 꿀벌들이 이토록 다정한 존재라면 그 사실을 내가 직접 배워보면 어떨까? 나는 아직 언제나 주변 곳곳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p. 91)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곳에 있는데 어쩐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고 또 누구도 나를 불쌍히 여길 일이 없었다. 이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아빠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엄마를 둔 아이도 아니었다. 꿀벌들은 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벌들이 불러주는 노랫소리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 꿀벌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는 선택권이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내게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에 깔려 무너지는 앞날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앞날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p. 119~120)
꿀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 만큼은 마음이 느긋해지고 편안해졋다. 근심을 내려놓고 벌들과 그들의 행동에 정신을 쏟고 있으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보이지 않던 온갖 생명이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그런 생명들을 지켜보다 왠일인지 내 문제가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위로받는 것 같기도 했다. (p.144)
다섯살에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세계는 할아버지에게서 꿀벌세계를 배워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는듯 이해되어져 갔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자연이 주는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된다. 꿀벌세계의 경이로움은 어린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해 그 복잡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머릿속이 뒤숭숭할때 규칙적인 생활은 의외의 안정감을 준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벌어지던 5살 소녀에게 규칙적인 꿀벌의 생활은 안정감을 주었고 그 안정감은 삶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심어주었다.
읽으면서 저자의 유년시절중 저자가 표현하는 고통을 작게 보이게 할 만큼 부러운 지점들이 있었다. 1975년 5살 (우리나라 나이로 하자면 6살?!) 소녀가 유치원에 가서 비틀즈의 음악을 들었을때 대성통곡을 한다. 그 음악은 아빠가 좋아했던 음악이었고 아빠와 추억이 깃든 음악이었다. 추슬러지지 않은 감정이 드러난 그다음날 부터 유치원선생님은 음악수업시간이 될때마다 메러디스를 다른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옛날 벌써 유치원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림치료를 했다는 것이 소설적 감동과 또다른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정말 너무 멋진 분이었다. 어린 소녀의 마음에 생채기가 날때마다 다독여 주고 엄마가 내뱉은 의붓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도 어린 소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었다.
"음, 의붓- 이라는 건, 이 경우에 그저 할아버지가 한 명 넘게 있는 행운아라는 뜻이지"
할아버지는 누구를 할아버지로 삼고 싶은지 내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건 내게 쉬운 선택이었다. 할아버지의 삶은 뒤엉킨 가족사로 복잡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받아들여줄 여유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는 어른이었고,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주는 일을 즐겼으며, 우리의 의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부모가 마따히 해야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었다. (p. 207)
벌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새록새록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했다.
벌들의 역할이 생각보다 자세히 구분되어 있어 신기했고, 눈보라가 치든 38도가 넘는 무더위 속이든, 벌통이 어디에 위치해 있든 간에 벌통 내부의 온도는 항상 35도 언저리로 유지한다는 것도 신기했고 (꿀벌이 온도계 없이도 이토록 정확하게 온도를 유지하는 비결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다고 한다) 벌통을 검사와던 와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벌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머리를 한 방향으로 향하고 날개를 서로 맞물린 채 대군처럼 빈틈없이 정확한 자세로 정렬해 알을 보호하는 모습은, 그것도 밖에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유모벌들이 외부적 환경에 갑작스레 노출됐을때 맞은 비로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알을 보호해주는 벌들을 보며 메러디스는 깨닫는다.
비를 막아주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유모벌들은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새끼들의 부모가 아니었다. 그 새끼들의 부모는 여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여왕벌의 자손을 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스스로 위험에 처하는 길을 택했다. 유모벌들은 내동생과 내게 부모 역할을 대신 해주는 우리 할아버지처럼 새끼 벌들의 대리 부모인 셈이었다. ... 각각의 벌들은 서로를 똑같이 사랑했고 벌통 안은 '의붓' 과 '친' 사이를 구분 짓지 않았다. 그렇게 벌들은 내게 진짜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p. 212)
할아버지는 항상 꿀벌들과 함께 했고 꿀벌을 통해 메러디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꿀벌을 관리하고 꿀을 채집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 바라기만 하는 이들에게 찾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대가를 얻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또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메러디스는 체득한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꿀벌들을 돌봐주고 있는 것으로 알다가, 사실은 벌들이 할아버지와 메러디스와 나아가 인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까지 배우게 된다. 자연은 그런 존재다.
할아버지와 꿀벌과 자연속에서 살았지만 엄마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엄마' 가 아닌 채로 엄마로서 한 집에 존재 했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소유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제 내 것이고, 다시는 엄마의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엄마라는 이유로 이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어떤 안도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냥 엄마를 견디며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언젠간 엄마 곁을 평생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그저 엄마 말을 따르고 엄마와 부딪히지 않으면 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은 넘마 밑에 깔린 채 속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내 정신까지 엄마에게 갇혀 있을 필요는 없었다. (p. 353)
엄마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그 집은 내가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위험한 장소였고 그저 생존하기 위한 곳일 뿐이었다. (p. 368)
나는 우리를 버리고 싶어 하는 엄마의 행동에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바라왔다. 그런 행동이 엄마의 선택에서 비롯된 거라는 가능성을 없애려면 다른 비난할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엄마가 뭔가에 중독되어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약물에도 전혀 손대지 않았다. 엄마는 늦은 시간까지 외출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낯선 사람과 남겨두지도 않았으며 남자들을 집에 들이는 일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보호시설에 입원한 적이 없었고 또 노숙자였던 적도 없었다. 도박도 하지 않았다. 종교적 광신도도 아니었고 일 중독자도 아니었다. '엄마' 라는 역할을 버리고 자식의 삶을 아예 망쳐버릴 만한 그 어떤 일에도 빠져 있지 않았다. (p. 400)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장하는 내내 상처만 쌓여갔다. 집은 위험했고 할아버지 곁 만이 안전했다.
엄마에게는 가는 곳마다 쫓겨나게 행동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드러나는 엄마의 독선이 늘 수치심을 안겼다. 엄마의 분노는 상황에 따라 정도는 달랐으나 언제나 기본 값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p. 335)
엄마는 다른 사람을 결코 사랑할 수 없게끔 철벽을 치고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훈련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으며 자랐던 것이다. 엄마도 혼란에 빠져 있는 보호자였다. 엄마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p. 411)
엄마가 나를 때렸고 엄마의 아버지가 엄마를 때렸다면, 분명 또 다른 누군가가 엄마의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친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는게 있는지 물었다. 엄마는 기본적인 사실만 알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생때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때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 할아버지의 누나를 데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단둘이 남겨졌고 그 아버지에게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곤 했다고. 엄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맞았다고 했다. (p. 413)
폭력은 대물림된다. 자각하고 반성하고 그 강도를 약하게 낮출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대물림된다. 그 대물림이 끝나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가능해진다. 부모에게 과거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의 상처를 떠안을 수는 없다. 부모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고 해서 자식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각자의 몫이다. 메러디스의 엄마는 방임했다가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었다 하는 자신의 엄마가 유일한 가족이었고 둘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지 못했다. 하지만 메러디스 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가 있었고 꿀벌의 세계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와 매슈를 데리고 빅서로 나갔고 수확기가 되면 꿀버스에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할아버지의 양봉 수업에 숨어 있는 진지한 의미를 알아듣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우리가 비아콘텐타에 갇히지 않고 사고의 틀을 확장할 수 있도록 꾸준히 우리를 자극했다. 엄마가 아닌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었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게 적절한지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꿀벌을 예로 들어 은유적으로 설명하곤 했다. 꿀벌이 살아가는 모습에 녹아 있는 숭고하고 경탄스러운 삶의 방식은 곧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인간이 마땅히 지키며 살아가야 할 기준과도 같았다. (p. 374)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잘 자라 좋은 대학에 합격하여 집을 떠나게 된 메러디스는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꿀벌버스에서 할아버지와 동생과 꿀을 채집한다.
우리 셋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꿀단지를 주고받으며 발레단 단원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것이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게 될 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다는 느낌.
"있잖니" 할아버지가 정적을 깼다. "너희 할머니하고 결혼했을때 내 나이가 마흔이었단단다"
할아버지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아이를 키울 일이 없을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꿀이 나오는 주둥이를 닫고 일어나더니 양팔을 넓게 벌려 우리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그랬는데 무슨 행운인지 너희 둘이 나타났단다"
그 순간 기쁨이 폭발하여 온몸이 짜릿해졌다. 내게도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내 벌집은 바로 이곳, 할아버지의 꿀 버스 안이었다. (p. 424)
여기서 울컥 했다. 정말 울뻔 했다.
논픽션의 감동과 소설적 감동이 함께 존재하는 글은 처음이었다.
5살 소녀가 20살이 되기까지 여정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메러디스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에게? 누구에게 감정이 쏠렸든 여하튼 간에 다시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설명할 수가 없다...
에필로그 시점인 2015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메러디스에게 벌들을 부탁했다. 그 벌들은 자신의 벌통 속 벌들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벌들이었고 세상의 생명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말한 벌들의 의미를 메러디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메러디스의 벌집이었던 할아버지의 꿀버스는 이제 없지만 세상 곳곳에 할아버지가 있음을 메러디스는 알 수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자연 어디에든 있었다. 메러디스도 알고 나도 왠지 알 것 같았다.
허니버스는 정말 달콤하고 거대한 벌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