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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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편집자, 편집장으로 콘텐츠의 꿈을 집요하게 실현해온

고경태의 30년 그 시간의 기록

 

 

굿바이 라는 인사는 헤어질때 하는 말이다. 문득 인사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영어엔 시간대별 인사가 있다. 아침, 점심, 저녁. 그냥 합쳐서 헬로 해도 되겠지만.... 한국어는 존칭과 시제가 있을뿐 아침, 점심, 저녁 시간대별 인사의 구분은 없는 듯 하다. 그저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하셨어요 ...

왜 뜬금없이 인사말에 대한 생각을 했냐하면 읽는 내내 왜 제목이 '굿바이, 편집장' 이었는지가 머릿속에 떠다녔기 때문이다. 왜 헤어지는 인사로 책을 시작하는가... 아마도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 달랐기에 적응하느라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어쩌면 '헬로, 편집장' 을 기대하며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건 없었다. 그저 간략한 정보를 보고 편집장을 해본 사람이 쓴 편집에 관한 책일 것 같아 궁금했다. 이때 내가 생각했던 편집은 '책' 에 대한 편집이었다. 예전엔 '편집' 이라는 건 그저 교정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글쓴이들의 소감에서 항상 편집자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글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같은 소설을 읽어도 출판사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점점 더 궁금해져 갔다. '편집' 이란게 뭘까?

이 책은 '책' 에 대한 편집이야기는 아니었다. 신문과 잡지의 편집이야기 였다. 저자는 한겨레에서 신문-한겨레21-씨네21을 두루 거친 베테랑 편집장이었다.

궁금했던 책편집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간지-주간지 의 편집 이야기도 좋았다. 더구나 '한겨레' 였다. 항상 좋았던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매체다. 그곳의 이야기들이 몹시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겨레 신문의 창간과 한겨레21의 창간은 내 인생에서 격동의 시간들과 맞물려 있다. 그 신문을 읽고 그 주간지를 기다리며, 특히나 '만리재에서' 라는 한겨레21 의 첫글을 나는 가장 좋아했었다. 송구스럽게도 그 때의 편집장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어떤 기사보다 울림을 주던 편집장의 글을 보며 나는 진한 여운을 느끼곤 했다. 아....멋있다! 라고.

내가 한창 읽었던 초창기의 한겨레21 편집장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한겨레 이야기에서 나는 세월의 변화를 새삼 느꼈다. 사회의 뜨거움에서 문화의 뜨거움으로 흘러왔달까... 그 흐름이 다시 정의의 뜨거움으로 갈 수 있을까.... 뭐 개인적으로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읽게 되는 책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이 책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담을 기록한 책이기에 회고록 처럼 읽히는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장으로서의 그 시간들이 편집장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뭔가 지침을 준다기 보다는 자신의 편집장으로서의 시간들에 굿바이를 고하는... 그래서 '굿바이, 편집장' 이라는 제목에 슬슬 적응이 되어가는...

종이신문으로 한겨레신문을 본지가 언제던가... 너무 오래되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part1 에서 '토요판의 탄생' 에 대해, 그 치열했던 시간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신문지면의 편집과 기획에 이런 노력들이 들어가고 있었구나 새삼 알게 되서 다음에 신문을 보게 된다면 굉장히 꼼꼼하게 보게 될 것 같다.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해보려 자꾸 시도해보게 될 것 같다.

어색함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자연스럽지 않을 때다. 질서에 어긋나 보일 때다. 질서란 무엇인가. 오랫동안의 약속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으레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으로 묵인되어온 방식이다. 어느 날 다르게 하면 어색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이상하다" 는 평이 쏟아진다. 원래의 자리와 방식으로 돌아가면 마음이 편하다. 비난도 사그라진다. 미련하게 어색함의 강을 계속 헤엄치면 어떻게 되는가. 조심! 강 한가운데서 물귀신이 될 수 있다. 강을 무사히 건너 신천지의 뭍에 오르면 어색함을 참신함으로 바뀐다. (p. 77)

저자는 기획자로서의 참신함을 늘 시도해온 편집장이었던 듯 하다.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참신하고 새로운것 보다는 익숙하고 편안한걸 좋아한다. 기획은 1도 못하는 사람이랄까... 그런면에서 저자가 시도해온 것들, 그 연속된 도전들이 용기있어 보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그 용기를 꺽는 환경이 아니라 북돋워주는 환경에서 마음껏 용기내볼 수 있었던 것이... 역시 한겨레?!

<한겨레21> 창간 경험은 나의 원형질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한겨레 안에서 매체와 섹션을 기획하는 동력이 됐다. 그 힘이 없었다면 나중에 그 무엇이든 창간 작업에 뛰어들 용기와 염두를 내지 못했으리라. <한겨레21>은 늘 나의 기준점이었다. <한겨레21>에서 얻은 그 영감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먼저 자유 라고 답할 것 같다. 그냥 자유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자유였다. (p. 122)

감당할 수 없는 자유 속에서 처음엔 불안해하다가 스스로 성장의 기록을 만들어낸 경험은 정말 아무때나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물론, 자유보다 중요한건 개인의 역량과 의지일 것이다. 자유만 만끽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면 결국 자유가 없던때보다 더 뒤로 도태된다. 자유는 노력과 성장이라는 결실을 맺을 때 더 큰 자유로 돌아오는 부메랑이 아닐까...

사실 아이디어는 무턱대고 떠오르지 않는다. 탐색하고 노력한 만큼 떠오른다. 한 분야에 대해 끈덕지게 취재하고 자료를 찾고 사람을 만나면서 몰랐던 사실들을 밝혀나갈수록 새로운 의문거리가 생겨나고, 그 자체가 기획 아이디어가 된다. 제보자들이 나타나 뜻하지 않은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무엇인가에 꽂히면 꽂힐수록 아이디어가 벌때처럼 내 머리를 공격한다. (p. 130)

사람들은 대부분 1번의 발견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발견이 있기전에 99번의 시도 있었다. 100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을때 1번의 발견이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다. 100번 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99번의 시도 없이 100번째의 발견은 없다. 그 99번의 시도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100번 200번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이디어도 백지상태에서 순간 번쩍 떠오르는 게 아니다. 그 찰나의 섬광전에 사실 기나긴 생각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거저 얻는건 없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쾌도난담' 이 저자가 생각해낸, 국어사전엔 없는 말이었다는 거다. 한겨레21 1999년 10월에 첫 선을 보인 쾌도난담은 시작과 동시에 화제성을 몰고 왔었다. 그 이후로 비슷한 시도들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고... 저자가 발굴한 필자와 인터뷰이 들은 지금 대단해진 사람들이 참 많았다. 저자의 안목에 감탄스럽다. 저자는 기획이나 편집에 있어서 늘 '재미'를 추구했다. 그 점이 내가 읽었던 초창기의 한겨레21에서 가장 변화된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 '재미' 가 가미된 한겨레를 읽어오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다. 그때의 공감대를 가졌다면 이 책이 더 반가웠을 것 같아서... 그 시도들이 안정화된 지금의 '재미'들에 이미 익숙해진채 그 때의 도전들을 몰랐던건 미안하지만, 그야말로 초단위로 변하는 세상 아닌가? 이러한 세상의 흐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는 것도 의미있었다.

세상은 진화한다. 새로운 문제의식과 실천력을 가진 사람들 덕분이다. 낡은 것을 부드럽게 두드려 부수고, 온건한 방법으로 손질하고, 또는 그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속삭여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뜻밖의 물건, 뜻밖의 가치로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가슴을 적셔주는 이들 덕분이다. 현실의 부조리에 관해 비판을 하거나 창의적 대안을 제시하는 미디어 종사자들도 마찬가지다. 편집장이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맞닥뜨린 문제마다 주인 의식으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편집을 책임지는 편집장이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찍는 새로운 점 하나로 지구별은 멋지게 돌아간다. 오늘도 새로운 태양은 뜬다. 나도 늘 새로운 일과 마주치고 싶지만... 몰려드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 (p. 453~454)

저자는 편집장일에서 떠났다. 지금은 작은 온라인언론사를 경영하고 있다. 30년 해온 편집장의 일을 떠나며 저자는 두려움이 몰려든다 하지만, 그보다는 태양같은 열정이 그 두려움을 압도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드커버책도 아닌데 하얀 겉표지를 벗겨내면 새빨간 표지가 타오르고 있다. 진화하는 저자의 열정처럼.

편집장직에는 굿바이를 날렸으나, 매일 아침 헬로우를 던지는 대상에 대해 저자가 어떤 뜨거운 길을 개척해갈지 문득 궁금해지면서, 내인생의 편집은 어떻게 하고 있는 중인가도 갑자기 생각해본다. 나는 무엇에 굿바이 를 날리고 무엇에 헬로우를 던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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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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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일본은 조선, 중국과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나?

일본인에게 바다는 두 가지 의미였다. 중화 문명과 교류를 막는 장애물이자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패막이, 발달한 항해술을 갖춘 유럽이 이 천혜의 요새를 무너뜨렸을 때 일본은 커다란 관제에 직면한다. <일본인 이야기1>은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의 일본을 조명하여 그 첫번째 포문을 연다. 역사를 움직이는 우연의 힘, 그리고 그 우연을 행운으로 바꾸는 개인의 결단이 역동적이고 장대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표지 中)

 

 

아주아주 예~전에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를 재밌게 읽으며 그것이 마치 진짜 역사인양 알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고나서야, 서양고전을 원전번역본으로 읽으며 그것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 이야기> 라는 제목을 봤을때 로마인이야기 라는 제목이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픽션인양 논픽션인양 그저 가볍고 재밌게 읽을만한 책이겠거니 하며 시작한 책이었다.

하지만 읽어나갈 수록 달랐다. 00인이야기 라는 연관성은 딱 제목까지였다.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앞으로 돌아가 저자의 이력을 다시 보았다. 저자는 문헌학자이고 규장각 연구원이었다. 시오노나나미와는 급이 달랐다. 이 책은 읽을 수록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하면서도 허구인것처럼 읽혀지는 것이 일본에 대해서 이렇게나 몰랐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해 반일감정이 높을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일본에 대해서는 사실 무턱대고 깔보려는 경향이 있긴 하다. 일본자체 보다는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고 일본을 판단하려는 생각이 강하긴 하다. 태평양 초입에 뚝 떨어져 있는 섬나라로서의 일본에 대해 대륙으로 통하는 길은 한반도 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그들의 문명줄이라도 잡고 있었던 듯 역사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반도 옆에 너무 가깝다 싶게 붙어 있는 일본만 봤었다.

하지만 범위를 조금만 넓혀 보면 일본은 남북으로 긴 섬나라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중국남부와 동남아시아와도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도 자체적으로 가능했고, 지금의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한반도보다 훨씬 활발했다. 게다가 대서양으로 가는 바닷길이 아닌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해 가는 바닷길에서의 거점으로 활용도가 높은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다. 따라서 서양문명이 봤을때 한반도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다. 굳이 개척하거나 와볼 필요가 없는 위치였다. 캐내갈 자원도 없고 무역도 안하는 나라인데다 지정학적으로도 중국과 필리핀, 일본과 직접 교류가 가능한데 굳이 들를 필요가 없는 땅이 한반도였다. 일본이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갈때 오히려 중국 한곳만 바라보고 있던 답답한 곳이 한반도였다. 저 멀리 바다로 나가지 않고 대륙만 보고 있던 곳이 한반도였다. 일본입장에서는 가장 가깝고 편리한 통로로서 한반도의 활용가치가 높으니까 계속 건드릴 수밖에 없지만, 중국이 공산국가가 아니었다면 사실 현대에 와서도 별다른 지리적 중요성을 가질 이유가 없는 곳이 한반도였다. 이러한 생각들을 아마도 처음 하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한반도에 살면서 우물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지리적 범위의 확대를 새삼스럽게 깨우쳐주고 있었다. 서양고전을 읽을땐 그저 먼나라 이야기로서 내나라 역사와 굳이 연결시키지 않았고, 동양고전을 읽을땐 중국고전으로서 철학적 개념만 깨달을 뿐 동양의 범위를 한중일로만 국한 짓고 있었는데, 일본을 일본 자체로 보면서 그 모든 것의 범위를 확장시켜야 겠구나 라는 것을 정말 너무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정말 너무도 새삼스러워서 놀랐다;;; 대충 알고있던 역사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달랐다.

동남아시아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한 네덜란드지만,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명,청대 중국의 도자기나 비단, 일본의 은을 거래하는 데서 오는 이익이 워낙 크다 보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이 두 나라 정부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네덜란드가 자신들보다 군사력이 뒤떨어지는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거침없이 무력행사를 하던 것에 비하면, 동중국해 지역에서 조용히 무역에만 종사한 것은 분명 독특한 모습입니다. (p. 26)

동중국해 연안 지역의 한 겹 바깥에 존재하는 연해주를 러시아가, 베트남을 프랑스가, 미얀마를 영국이 각각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동중국해 연안 지역의 류큐,타이완,조선을 두고 경쟁한 것은 유럽 국가가 아닌 청나라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후신인 중화민국과 '대일본제국'은 결국 중일전쟁에서 무력 충돌합니다. 이렇게 유럽 국가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들끼리의 패권 경쟁을 펼친 곳은 전 세계에서 동중국해 연안 지역이 유일합니다. (p. 28)

 

중국이나 일본은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펴지 않았다. 무역에 큰 관심을 갖고 활발히 대응했다. 중국은 영역이 워낙 넓고 중화 라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이 워낙 확고한 역사를 유지해왔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자체적인 문화가 굉장히 독특한 곳이었다. 태양신의 현신 덴노를 현대까지도 숭상하고 신도 라는 국교가 유일종교라고만 알았는데, 일본땅에서 기독교의 흥망성쇠가 있었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일본의 운이 얼마나 좋았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종교와 산업의 구분이, 이념과 이익의 구분이 얼마나 다른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분제도가 달랐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처럼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되는 신분사회가 아니었다. 황제가 있었으나 상징이었을 뿐 정치와 무력의 핵심우두머리는 늘 따로 있었고, 직업의 귀천은 있었으나 그것은 우리네의 신분제와는 많이 달랐다. 신분의 억압이 약했다는 것은 그래서 계층이동이 비교적 자유롭게 가능했다는 것은 그렇게 타고난 처지와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신분이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신흥종교의 평등사상이 조선에서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서양문물의 흡수에 거리낌이 없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운이 좋은 시기가 정말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애니미즘 토속신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도...

유럽 세력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지역들이 분열되어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럽 세력이 접근해올 당시 일본도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일본도 전쟁에 패한 지역에서는 노예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들 일본인 노예들은 승리한 지역으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거나, 유럽 상인들에게 넘겨져 전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조선인 노예가 일본인 노예들이 수출되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부산과 일본을 거쳐 전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 대항해시대 당시 전세계의 무역 흐름에서 보았을 때 일본과 조선에서 일어난 노예 거래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p. 40,41)

노예 라는 말은 저~기 멀고먼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만 사용된 말인줄 알았다. 층층이 쌓인 노예선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본인과 조선인 노예에 대한 표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읽은 것 같다. 조금은 충격적이면서도 조금은 부끄러웠다. 노예란 흑인노예와 동의어인줄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내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나 싶은 것이...

여하튼 일본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다르게 이 시기 통일을 이루었고, 이 통일 세력은 서양문물과 만났을때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세계를 넘보겠다는 야망까지 품게 된다. 서양과의 만남은 세계관까지 확대시켰다. 일본은 중화문명 이외의 문명에 대해 조선보다 훨씬 일찍 인정했고,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문명은 이제 중화문명과 유럽문명 두 가지가 되었으며,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게 하는 유럽문명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1613년 일본은 자체능력으로 로마에 사절단이 다녀옴으로써 더욱 확실히 유럽을 깨닫게 된다. 일본은 이때 이미 바다를 통해 중화문명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한반도와 한반도 주민들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와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장한 과정은 결코 무능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중국해 연안 지역을 생각할 때 대체로 중국과 일본이 비슷한 경로를 밟고 조선이 예외적인 길을 갔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만은 중국과 한국이 비슷한 길을 걸었고 일본이 예외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경제사 연구자 로이드 이스트만은 중국은(그리고 한반도 역시)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산업 근대화에 진입했지만, (하필이면) 예외적인 국가인 일본이 가까이 있다 보니 그 과정이 과소평가되어왔다는 지적입니다. (p. 118)

일본은 여러가지 면에서 예외적이었다. 일본은 의외로 차근차근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성장해왔다. 중국과 한국은 특히 한국의 성장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이지만, 일본 옆에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한 면도 있다고 하니... 일본은 전쟁전이나 전쟁후나 두고두고 우리의 숙적이 될 수 밖에 없는 나라인가 보다...

기존에는 유력한 영주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전국시대 일본이 분열에서 통일로 향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성장한 피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잇코잇키 같은 아래로부터의 봉기를 무사 계급이 진압하면서 쇼군 권력이 탄생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국시대의 전개 및 통일 정권의 성립을 잇코잇키 세력과 영주들 간의 충돌로 설명하려는 최근 경향은, 개별 영웅들 간의 경쟁을 강조하고 그들 개인사와 가족관계, 인상적인 몇몇 전투로 전국시대를 설명해온 통속적인 접근방식을 수정하는 시도라 하겠습니다. (p. 156)

16세기는 일본이 서양문물과의 접촉과 성장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지만, 기본의 불교세력과 시민세력 그리고 신흥종교인 카톨릭세력의 부흥이 활발히 움직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로 연결되는 무력집단의 성장은 일본내의 종교운동과 맞물려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기에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일본 통일 과정에서 카톨릭 세력이 등장한 것은 훗날 가톨릭 국가들을 대체할 세력을 필요로 하던 지배층에게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나타났을 때처럼 행운으로 작용했다는 저자의 말이 몹시 와닿았다. 일본 무력집단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를 적절히 이용하고 마지막에는 둘다 없애버렸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와 다른 현대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이용한 후 버렸고 한국은 지속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현대랄까...

신앙과 무역을 분리하는 이러한 정책은 오다 노부나가와는 구분되는 히데요시의 독자적인 정책입니다. 훗날 도쿠가와 막부가 신앙과 무역을 분리해서 접근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에게 나가사키 테지마의 거주를 허가한 정책의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중세 일본-유럽 교섭사 연구자인 마쓰다 기이치는 이러한 유럽과의 외교야말로 히데요시의 외교 정책 가운데 진정으로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요약하자면 히데요시 정권과 도쿠가와 일본, 명나라와 청나라도 가톨릭 세력이 정치,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유럽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중국과 일본은 같았고, 조선을 달랐습니다. (p. 246)

유럽의 중세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피가 흘렀고, 이슬람의 성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종교과 무역을 분리시킨 일본을 보며 정말 다른 문화성을 지닌 민족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영국도 유럽에서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지만 헤엄쳐 건너갈 해협이 있을만큼 가까워서인지 역사문화적으로 유럽과 분리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일본은 그에 비하면 꽤 많이 떨어져 있는 섬나라라서인지 독자적인 발달이 점점더 일본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중화사상과 일화이념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가 더욱 고달프게 느껴진다...

동남아시아 연구자인 최병욱 선생은 베트남과 버마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과 태국이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서구 열강이 품은 의지의 강도 차이로 설명합니다.

'프랑스는 중국 배후 시장으로의 진출이 필요했으며 그 통로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한 메콩의 확보가 필요했고, 영국은 같은 이유로 버마를 거치는 배타적 육상로를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과 국경을 접하지 않은 태국은 영국, 프랑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p. 278)

 

서구 열강의 최종 목표는 청나라, 즉 중국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물론이려니와 일본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중화문명은 일본에게도 조선에게도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 같다. 중화에 동화되는 것과 중화에 가려지는 것 사이에서 조선과 일본은 적어도 유럽에게 밟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본은 바다로 나가면서 양날의 검을 버리고 스스로의 검을 만들었다. 우리는??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도 끝맺지 못하고 유럽과의 문제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남겨집니다. 두 과제에 대해 이에야스는, 조선과는 국교를 재개하는 방향을 택하고, 유럽 문제에서는 교역 상대국을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 국가에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 영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두가지 결정이 그후 거의 3백년간 일본의 대내외 관계를 결정짓게 됩니다. (p. 291)

일본과의 이야기에서 16세기 라면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을 침략당한 조선의 입장이 아닌 쳐들어온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내용들은 당시의 일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 옛날부터 경제적인 선택을 해온 일본인에 대해 참 여려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상업적인 이익을 중요시한 일본지배층도 자신의 권위보다 저 먼바다건너 종교적 우두머리에게 복종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일본내의 종교세력을 뿌리뽑아 버린다.

16~17세기 중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가톨릭이 사회적으로 더욱 중대한 의미를 띤 곳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6~17세기 일본의 피지배층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는 자진해서 가톨릭을 받아들인 경우도 많고, 영주가 강제 개종시킨 사례 또한 많았습니다. 출발점이 어떠했든 일본 전역에서 숱한 순교작 ㅏ나오고 19세기 말까지 가톨릭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 또한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16~17세기 일본을 다른 비유럽권 국가들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가톨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인구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인이 가톨릭을 깊이 믿었으며, 이것이 일본 지배잗르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p. 336)

일본의 절은 막부로부터 제도적, 경제적으로 안정을 보장받는 대신 철저히 체제 순응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이는 가톨릭 세력을 억압하는 수단인 동시에 체제 저항적이었던 잇코잇키와 같은 불교 세력을 회유하는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p. 378)

 

일본내에서의 기독교 흥망성쇠는 비교적 짧았다. 의욕적인 선교활동도 본국에서 무력적 지지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힘없이 사라져갔다. 유럽 본국에서는 종교적 선교활동만을 위해 멀고먼 일본땅까지 군함을 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무역으로만 관계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 판단했다. 서양종교의 싹을 말린 일본은 무력집단의 통일과 함께 종교적 통일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다. 다신교적 일본종교 신도 는 여전한 그들의 사상적 뿌리이다. 아마도 석기시대부터 시작됐을 애니미즘적 종교는 오랜 전통의 기독교보다 더 이전부터 이어져 온 종교일 것이다. 경제와 학문의 다양성은 받아들였으나 종교와 이념의 다양성은 철저히 배척한 일본의 역사가 지금의 일본을 형성했다.

도쿠가와 일본이 이른바 쇄국을 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유럽에서 보았을 때의 관점일 뿐입니다. 당시 일본은 쓰시마를 통해서는 조선과,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유럽 및 청나라와, 사쓰마를 통해서는 류큐왕국과, 홋카이도 최남단의 마쓰마에를 통해서는 아이누 및 북방 민족들과 활발한 교섭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최근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쇄국' 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그 대신 쓰시마, 나가사키, 사쓰마, 마쓰마에 를 '네 개의 창구' 라고 일컬으며,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외교, 무역 관계를 설명하고 잇습니다. (p. 386)

일본의 역사교과서 내용이 몹시 궁금하긴 한데,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한반도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해서까지 일본의 역사를 독자적으로 세우는 일본은 유럽에서 보는 시각까지도 고쳐쓰고 있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이러한 역사연구의 흐름은 반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우리의 역사연구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우리의 역사연구도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닌 세계속에서의 한국을 볼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야 하지 않을지...

16~17세기 유럽문명과 만난 일본은 세계관을 넓히면서 경제적 인 부를 쌓기 시작했고, 17~19세기 일본엔 조선의 과거제와 같은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이 없었기에 다양한 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놈이라고 치부하기엔 일본 고유의 특성이 너무나 강렬했고, 뚝떨어진 섬나라라고 하기엔 바다가 너무나 많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핵폐기물이며 쓰레기를 가장 많이 바다에 버리고 있다는 일본을, 세계대전의 죄값을 제대로 치룬적 없는 일본을,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에서 잘먹고잘살고 있는 일본을 지구는, 세계는, 바다는 언제까지 보호해 줄까?

다섯 권으로 구성된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번째 권이라는 이 책은 16~17세기의 전환기를 다루고 있다. 17~18세기 중반을 다룰 2권 <백가쟁명>, 18~19세기 전반을 다룰 3권 <북로남왜>, 메이지유신 전후를 다룰 4권 <일본의 두 번째 기회>, 19세기 말~ 패전 전후를 다룰 5권 <보통국가에의 지향과 좌절> 까지 앞으로의 시리즈 도 기대된다. 이야기책이라고 하기엔 스토리가 약하고, 역사책이라고 하기엔 역사에 대한 판단이 꽤 많이 들어가 있는 이 책은 가독성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내용들에 신기해하며 읽게 되는 책이었다. 너무나 몰랐던 일본에 대해 현재 정세분석만 하는 책보다는 역사적인 맥락으로 일본을 알아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앞으로의 시리즈에도 관심이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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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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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만들어낸 고기는 우리의 식탁과 이 세계를 얼마나 달라지게 할 것인가

사육과 도살이 사라진 미래가 온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생명공학의 결정체 클린미트!

더 나은 지구를 위한 첨단과학 최전선의 경이로운 이야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는 내 인생책 중 한 권이다. 앞서 읽었던 무수한 역사책과 철학책과 과학책을 통틀어 이렇게 혁신적이면서도 잘 융합한 책이 없다 싶었었다. 그 유발 하라리가 <클린 미트> 의 서문에서 도발적으로 묻는다. "두 개의 미래,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한쪽의 미래는 기존대로 공장식 사육에 의해 인간이 고기를 먹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인구가 더더더 많은 고기를 먹으며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의 미래는 공장식 사육 없이 도축 없이 지구환경개선에 큰 변화를 가져오면서 동물복지를 고려한 청정고기를 먹는 것이다. 이렇게 양면을 보면 한쪽을 선택하기 쉬운 것 같지만, 의외로 이 문제는 굉장히 복잡다단할 수 있음을 책을 읽어나가며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어려운 선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해야하는지 조금씩 수긍해 나가게 된다.


이 책에서는 미국에서 현재 진행중인 다양한 생명공학 관련 스타트업 회사들의 도전이 소개되고 있다. 과학자들이 왜 벤처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는지 미국식 경제논리에 의해 업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설명되어지고 있다.


2011년에 세워진 Modern Meadow 는 실험실에서 고기와 가죽을 만들어내는 최초의 상업 벤처 기업이다. 모던미도의 포르각스 는 소 없이도 고기와 가죽을 만드는 공정을 개발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스테이크 칩 한조각을 맛본 저자는 깜짝 놀란다. 정말 '고기' 같아서! 저자는 이렇게 세계 최초로 클린미트를 시식하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수많은 동물 생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과연 받아들일 것인가? 축산업의 해악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미래 식량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도 천연자원의 고갈에 허덕이는 우리 지구는 앞으로 늘어날 수십억의 인구를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을까? 1960년 이후 인구가 2배 늘어날 동안 동물 생산물의 소비는 5배 증가했다 ... 예측에 따르면 2050년에는 90억~100억 명의 인구가 지구상에 발을 딛고 살게 된다. 그중 대다수가 서양인, 특히 미국인처럼 호사스럽게 먹을 여유가 생긴다면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양의 땅과 다른 자원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 미국에서 식용으로 쓰이는 동물의 숫자가 지구상의 인구보다 많다. 그리고 이 동물들은 거의 평생 동안 농장이 아닌 수용소나 다름없는 공장 안에 갇혀 산다. (p. 21)

닭 한 마리가 알에서 시작해 진열대에 오르기까지 1갤런(약3.78리터)짜리 물통 1,000개 분량의 물이 필요하다. 즉 저녁 식탁에서 닭 한 마리를 줄이면 6개월 동안 샤워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을 절약할 수 있다. .. 달걀 하나당 물50갤런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닏. 50갤런이면 욕조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양이다. 1갤런을 생산하기 위해 물900갤런이 필요한 우유는 또 어떤가. 이 정도면 목욕탕도 채울 수 있다. ... 지금처럼 고기, 우유, 달걀을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싶다면 현재 수준과는 비교도 안 될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p. 22)


모든 것의 발전에는 가속도가 붙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시기를 혁명이라고 부른다면 지금의 클린미트 관련 내용은 분명 혁명적이다.

예전에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육식주의' 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면서 모든 동물 생명체에 대한 공감을 호소한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이 책처럼 사람들에게 '가치관' 을 통한 변화를 유도했었다. 하지만 가치관의 더딘 변화를 기다리지않는 과학기술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구의 증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과학의 발달로 유지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적어도 효율성 측면에서는 분명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클린미트의 핵심은 효율성 보다 의외로 '윤리'기반에 대한 현실적 벽을 마주하고 있다. 클린미트를 정말 고기 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까? 고기를 먹어야 하냐는 질문과 무엇이 고기인가 에 대한 질문은, AI 발달에 의한 무인자동차의 기본적 윤리기준에 대한 논쟁을 떠오르게 하면서, 과학의 발전 속도에 사람들의 인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또한번 드러내는 것 같았다.


무엇이 천연 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냐는 질문에는 명확한 대답이 없는 실정이다. 인간이 유전적으로 선별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던 동물(개의 거의 모든 품종)은 천연인가? 오늘날 우리가 먹는 육계는 빠르게 성장하여 비만해지도록 유전적으로 선별된 종이다. 이런 과정은 '천연'과는 거리가 멀지만 장을 보면서 이 점을 신경 쓰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p. 277)

칠면조 세포 배양 과학자 기번스는 "가축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이라고 했다. 기번스는 엄청난 동물애호가다. 하지만 기번스는 우리가 가축을 덜 키워서 야생동물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땅을 남겨두었더라면 이 세상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가축이나 우리 인간에게 더 나은 장소가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p. 289)

철학자 리스 서던은 도축하는 순간이 슬플지라도 잠깐 지구의 삶을 즐겼다가 빠르게 죽는 소가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서던은 '죽음이 없는 고기' 를 '애초에 죽일 목숨이 없던 존재' 라고 일침을 날린다. (p. 290)

몇천 년 혹은 고작 몇백 년 전에 가축이 된 동물들에게 '멸종'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에는 의문이 든다. 만약 인간이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남기기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개 품종을 갑자기 키우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이들이 없는 상태를 '멸종'이라 볼 수 있을까? 동물의 가축화, 즉 야생동물을 선택적으로 교배하여 인간에게 생존을 의지하는 유순한 존재로 만든 과정은 또 다른 질문거리다. 하지만 이런 동물의 부재를 어떤 단오로 표현하든 도덕적으로 중요한 의문임에 틀림없다. (p. 291)


'기준' 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클린미트가 고기냐 에서부터 그동안 인간이 고기를 먹기위해 행동해온 역사를 되돌아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은 정말 다양한 입장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해되고 인식되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과학은 쉬지않고 새로운 도전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포농업은 근육세포나 피부세포 등 살아 있는 세포의 증식을 유도하여 식품이나 의복을 만드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무세포농업은 효모, 세균, 조류, 진균 등 미생물을 다루며, 지방이나 단백질 등 살아 있지 않는 특정 유기물 분자를 생산하는 영역을 포함한다. 무세포농업에서는 동물 생산물을 제조하는 과정에 동물이 쓰이지 않는다. 실제 동물의 생검으로 세포를 얻는 방법을 지양하고 효모나 기타 미생물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들 업체들이 동물없이 만드는 단백질은 동물 생산물에 포함된 목표 단백질과 완전히 동일하다. 달리 표현하면 청정고기 생산자들은 세포를 '원료'로 식품을 만들지만 무세포 식품업자들은 세포를 '이용'해 식품을 얻는다. (p. 236)


실험실 배양액 속에서 만들어지는 세포고기인 클린미트도 이제 겨우 알게 됐는데, 아예 동물세포도 필요없이 DNA 서열변경 만으로도 만들어내는 무세포농업이라니... 과학은 수시로 사람을 우물안개구리 로 만들어버린다. 직접 씹어먹는 고기 는 현실적으로 아직 제품으로 상용화되어 나온 것이 없지만, 무세포농업 제품은 이미 현실속에 구체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웠다. 그리고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GMO 와의 차이에 대해서도 소비자로서 큰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겠구나 싶어서 현실속에서 좀더 정확하고 빠른 정보가 확산되었으면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등유는 석유에서 추출한 것으로 고래 기름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저렴한 대체제였다. 1854년 게스너가 등유를 상용화했을 당시 미국 포경 선단은 전 세계의 바다를 돌며 매년 8,000마리 이상의 고래를 잡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고래 기름 대신 등유로 집 안을 밝히면서 19세기 전반 동안 매년 증가하던 미국 고래 선단의 숫자가 급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p. 48)

마찬가지로, 더우나 추우나, 비가오나 눈이 오나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던 불쌍한 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고함을 치던 소리가 도시의 거리를 가득 채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욕시에 어찌나 말이 많았는지 1880년 미국 정부가 전문위원회를 소집하여 1980년에 도시가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만장일치로 뉴욕시가 100년 안에 말똥에 파묻혀서 사라질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결국 거리의 말들을 노동에서 해방시키고 뉴욕시를 말똥으로부터 구한것은 인도적인 감정이나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과 무관했다. 등유가 고래를 살렸듯이 내연기관이 주요 교통수단으로 말을 대체했다. 말을 구한 것은 사회운동이 촉발한 도덕적 논증이 아닌 어느 발명가의 상상력이었다. 심지어 당시 대중은 차를 원하지도 않았다. (p. 49~51)


현실에서의 인식수준이 어떠하던 간에 한번 발견된 과학적 사실은 현실을 바꿀 위력을 갖고 있음을 역사속에서 우리는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현실적 필요가 모든 가치들에 당위성을 부여해 주기도 한다. 전세계 인구가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이상, 클린미트는 점점 더 핵심적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동물복지, 환경, 식품 운동가들의 노력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공장식 사육이 지금도 미국 축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사람들이 싼 것을 찾는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미국산 동물 생산물이 밀집식 사육 시설에서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식품을 선택할 때 윤리나 환경을 중시하는 소수 소비층도 존재하겠지만 대부분의 일반인은 가격과 맛 그리고 편의성에 중점을 둔다. 공장식 고기 생산이 지구에 미치는 나쁜 영향이 점점 사람들 머릿속에 인식되고 있지만 밀집식 사육 시설에서 만들어진 고기의 수요를 꺾으려면 인식만으로는 역부족이다. (p. 82)


고기 수요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도 중요하지만, 더 현실적인 문제는 산업과 제도적 측면이다. 동물의 생산, 사육, 도축을 담당하는 대형 기업은 물론, 수십억 마리의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재배하던 작물 농업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미국 대두의 최대 구매자는 두부 업체가 아니라 축산업체다. 대두 생산자들은 미국인이 고기 대신 두부나 풋콩 등 콩 제품을 섭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오히려 콩의 소비량이 줄기 때문이다. 고기수요를 맞추기 위해 농장을 만드느라 자연을 훼손하고 그 동물들을 먹이느라 재배지를 넓히기 위해 또 자연을 훼손하고 그 많은 동물들을 도축하느라 폐기물이 또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현실을 굳이 보려 하지 않는다. 축산업자들과 비료업자들이 든든하게 그러한 현실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클린미트가 등장했다. 아직은 대부분 위기감을 못느끼며 무시하고 있지만, 우리는 '코닥필름' 이 어떻게 망했는지 알고 있다.


입맛은 변하게 마련이고 식품을 생산하는 사람들도 변해야 한다. 소비자의 취향이 급변하는 일은 식품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행사 대신 익스피디아 예약 사이트가 생겼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넷풀릭스의 대약진으로 블록버스터 비디오 대여점이 없어졌다고 눈물 흘린 사람이 있는가? 한때 우리가 필요로 했던 모든 직업은 비교우위에 있는 산업이 등장함에 따라 점차 사라지게 된다. (p. 117)


우리는 사라지는 직업들에 대해 항상 예민하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걸린 문제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라지는게 있으면 새로 생기는게 있기 마련이다. 변화를 눈여겨보고 빠르게 준비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지키기 위해 버티는 것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빌 게이츠는 2016년 인터뷰에서

"앞으로 우리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농업 분야의 인공 고기도 그중 하나이며 이미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기는 온실가스의 주범이기도 하죠. 고기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동물학대 등 수많ㅇ느 문제를 피해갈 수 있으며 더 적은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몇 년간 식물성 고기 개발을 지원해왔던 빌 게이츠는 2017년 브랜슨, 잭 웰치 등 업계 거물들과 함께 청정고기 분야에도 투자를 시작했다. 브랜슨은

"우리는 30년 안에 더 이상 어떤 동물도 죽이지 않고 모두 동일한 맛의 청정고기나 식물성 고기를 먹게 되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할아버지 세대가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던 모습을 돌아보며 옛날에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p. 28)


세계 경제의 흐름을 유도하는 사람들이 세포농업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상황이다. 우리는 이 분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만큼 연구가 되고 있는가? 이러다 미국산 도축 고기는 안 먹더라도 미국산 클린미트를 전량 수입해 먹게 되는 건 아닐까? ;;;


사실 사람들이 어떤 필요를 동물에 의지하지 않게 되어야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도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19세기에 불을 밝히는 주연료로 등유가 고래 기름을 대체하자 고래 복지에도 관심이 쏟아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발명되자 사람들은 말을 더 감상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p. 294)

인간의 위대한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여 행위와 감정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러 증거들을 통해 확인되었다시피,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논리적인 신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하고 싶은 행동에 신념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이 끊임없이 하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행동이 고기를 먹는 것이다. (p. 297)

기업과 비영리단체 그리고 여기 소개된 사람들은 물론, 앞으로 몇 년 내에 새로 생겨날 수많은 스타트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도록 효율성을 높여줄 것이다. 그들은 기후변화와 환경보호에서부터 세계의 기아와 동물학대까지 우리 세계가 직면한 무수한 문제의 해결책을 개발할 것이다. 고기와 동물 생산물을 세포나 작은 분자로부터 만들고 이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동물들을 배제한다면 현재 기존 축산 업계에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효율성의 증가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으킬, 또 다른 녹색혁명이다. (p. 299)


이 책에서 읽는 내용 거의 모두가 새로 알게되는 것들이었다. 정말? 의구심이 들었다 아...그랬었지... 회의감이 들었다가 그렇다면? 가능성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고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클린미트를 먹어보고 싶기도 했다. 쉽게 생각하자면 클린미트는 그야말로 더 깨끗하고 더 마음편한 고기이지 않은가?!


이 책은 지극히 미국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미국인이 쓴 책이니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올해 읽었던 '침묵의 봄' 이나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라는 책과 같은 형식으로 쓰여진 책이라 읽는 내내 조금씩은 쉬어감이 필요한 책이었다.

내가 미국식으로 쓰여졌다 표현한 이 책들은, 미국식 문장과 한국식 문장이 다른 것처럼 서술 구조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영어는 주어와 서술어가 먼저 나오지만 한국어는 주어를 시작으로 서술어로 문장을 마무리한다. 어떤 주장을 펴내는 책들이 미국책인 경우 주장은 시작부터 이미 나와있다. 주어와 서술어를 알고 시작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다 읽어야 하는데 그게 같은 주장에 대한 반복적인 증명들 일 수밖에 없어서 한국식 서술구조에 익숙한 나로서는 읽기가 쉽진 않았다. 주어를 시작으로 내용이 이러이러이러하니 결론이 이렇다 라고 풀어주는 한국식 서술구조를 가진 책이 아무래도 읽기엔 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 좋은 책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준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책은 다가올 미래에 꼭 필요한 질문들과 도전들을 담고 있었다. 그 질문이 한국에서도 물어지고, 그 도전들이 한국에서도 시작되길 응원해 본다. 클린미트를 먹더라도 나는 한국산 청정고기를 먹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때문에라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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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한 고양이
최은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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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시점 짧은 소설

작은 이웃과 가까워지는 열 편의 짧은 소설

 

 

이 책은 고양이와 관련된 아주 짧은 단편소설 10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길래 이렇게 한 권으로 그 작가들의 글을 모아 읽을 수 있다니~ 하며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더구나 나는 개 보다는 고양이가 좋은데,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이 대부분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공통점을 알게되니 왠지 더 반갑기도 했다.

네 마리 고양이를 만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는 최은영 작가의 '임보일기' 는

아끼던 고양이와 사별 후 주차장에서 구조한 고양이를 임시보호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담은 작품이다.

임시보호란 그야말로 임시보호다.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래서 위험에 처한 길냥이를 지나칠 수 없어 구조하지만,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적당한 가족을 찾을 때까지 임시로 보호하는 기간...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한 시간은 온통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 끝이 어떨 것일지를 다 알면서도, 다시 시작하려 하는 사람이었다. ...

더 정을 주지 않으려고 이름조차 짓지 않 았는데도, 피부를 맞대고 맥박을 느낀 다정한 존재의 무게가 가벼울 수는 없었다. (p.21)

 

동사의 위기에서 구조한 한 줌 고양이를 2년 만에 '혹시 타고 다니는 건 아니냐'고 의심받는 거대 고양이로 키워냈다는 조남주 작가의 '테라스가 있는 집' 은 고양이의 실종과 만남을 한 커플의 결혼과 파혼으로 연결하여 운명과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거짓말처럼 고양이가 돌아왔다.

유성을 만나고 결혼을 결심하고 준비하던 모든 시간이 꿈같았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삶에서 가장 무겁고 중요한 일이 홀린 듯 흘러와버렸다. 유성과 지나 자신, 또 결혼 생활 자체에 대해 꼼꼼히 알아보고 검토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오기에 건넜다. 꼭 이번 신호에 건너야 하는 것도 아닌데, 목적지가 길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는 그 발걸음에 스스로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 37)

방심한 모습으로 낮잠을 자는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정용준 작가는 '세상의 모든 바다' 에서 사라져 가는 마을에 홀로 남아 바다에 갔다는 부모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백설과 떠돌이 트럭기사 무운의 인연을 고양이가 이어주고 있는 작품이다. 순박한 사랑과 자연의 조화에 대해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마음 약한 사람이 실망을 이기지 못해 우울하게 얼굴이 내려앉은 듯 파스칼의 표정이 딱 그랬다. (p. 54)

이제 인연이 닿지 않는 친구는 궁금하지 않지만 그 집 고양이는 가끔 생각난다는 이나경 작가의 '너를 부른다' 는 한 소녀가 고양이에게 하는 독백이다. 언니가 돌보던 길냥이들의 대장격인 '그림자' 라는 고양이에게 잃어버린 언니의 복수를 이야기하는 소녀의 슬픈 고백이다.

그림자야, 언니는 네가 특별하댔어.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만 언니는 그렇게 믿었어. 그러니 정녕코 네게 신통한 능력이 있어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간곡히 바라건데 내 소원을 좀 들어주렴. ... 그러니까 꼭 좀 부탁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와. (p.76)

 

20년차 집사라는 강지영 작가의 '덤덤한 식사' 는 화자가 고양이 영혼이다. 길냥이 어미를 잃고 용감한 형제의 도움으로 생명을 이어가던 냥이가 전염병으로 죽었으나 그 영혼이 형제의 곁을 맴돌며 지켜본다. 동물병원에 살게 되었으나 녹록치 않은 현실에서 덤덤히 살아가는 자신의 형제를...

너는 다나에게 발톱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흔해빠진 겁쟁이 고양이가 아니란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바늘과 가루약과 처방식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 너는 10퍼센트에 속하는 고양이였지만 자신의 생존조차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p. 87)

 

고양이 눈, 고양이 입, 고양이 소리, 사람들은 비난조로 말하지만, '저 피사체 좀 치워버리라' 는 그의 말처럼 그것이 결코 비난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이제는 누구라도 알듯 저자도 알게 된듯 박민정 작가는 '질주' 에서 피사체가 되었던 20살 새내기 여대생의 상처를 들춰낸다. 이제 상처가 아니라는 듯. 하지만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는 건 생생한 기억이 여전히 상처라는 증거 아닐까....

암막커튼을 쳐 컴컴한 방 어딘가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건사하지 못한 고양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쏘다녔다.

어둠 속에서 윤성 선배가 뱃살이 늘어져 보일 만큼 뚱뚱한 고양이의 뒷목을 잡고 들어 올리며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이것 좀 어디 갖다 버려라. (p.97)

 

지난 봄에 꽃나무를 잡고 자는 고양이 얌이를 만났다는 김선영 작가는 '식초 한 병' 에서 얌이의 꽃나무를 잡고 자는 장면을 그대로 담아낸다. 작가들에겐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작품 하나로 풀어내질수도 있구나 싶은 것이 신기했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고양이 얌이는 사실 누구에게나 곁을 내주고 있는 고양이 이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얌이의 행동은 작가의 마음도 아무렇지 않게 풀어준 듯 했다.

내가 살던, 내가 알던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내가 세상 이편에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시간이다. 어린 내가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의 학비를 대라는 엄마의 말에 접어야 했던 일이었다. 안락한 일상을 유지해줄 것 같은 남자를 만났으나 나보다 더 안온한 일상을 원하는 남편 때문에 미루어졌고, 뒤이어 오로지 나에게 의지하는 한 생명을 맞고 키우느라 또 눌러야 했다.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특히 남편은 이제야 그런 걸 해서 뭐 하냐고 괜히 헛힘 쓰지 말라고 했다.

얌이는 지금 어떤 시간일까, 어젯밤 얌이의 울음소리는 더욱 애잔했다. (p. 123)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삶은 그다지 무겁지도 슬프지도 불행하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얼마든지, 얼마든지. (p. 131)

 

빵집 앞 풀숲에서 발견된 검은 새끼 고양이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김멜라 작가는 '유메노유메' 에서 인간으로 변한 고양이 유메의 이야기를 한다.

유메는 고양이와 인간을 넘나들며 미애의 꿈에 찾아와 미애를 위로했다.

까많고 말랐던 새끼 시절, 잠든 미애의 가슴에 올라와 한없이 여린 숨결로 미애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그 밤들처럼. (p. 152)

 

묘령 열다섯 살 고양이와 살고 있다며 이 문장이 오랫동안 과거형이 아니게 되기를 바란다는 양원영 작가는 '묘령이백' 에서 이백살이 넘은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고양이가 어느새 할머니 나이가 됐지만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바람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저승차사가 데려가야 하는 반려동물들 영혼 중에서 유일하게 데려가지 못하는 묘령이백이 ㅎㅎ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저승사자가 되려면 성격이야 어쨌든 심성이 착해야 하는데, 심성이 착하니 성격이 아무리 괴팍해도 동물의 미련을 쉬이 끊질 못하는 것이다. 생전 닳을 만큼 닳아 사람을 싫어하는 차사도 예외는 없다. 애초에 놈들에게 모질게 구는 자들은 지옥에 끌려가 없기도 하고.

동물들의 영혼은 인간보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고, 특히 반려동물이라는 놈들은 제 주인이 저를 그렇게 학대해도 주인만 생각하는 미련한 놈들 천지다. 갓난쟁이와 아이들 영혼을 회수하는 부서와 더불어 차사들이 오래 버티지를 못한다. (p. 157)

여전히 건강해서 아무튼 나는 기쁘다. 기뻐하는 내가 참 싫다. 언젠가 네가 묘령천으로 불리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는 내가 참 싫다. 놈을 뒤로 하며 나의 한심함을 지독하게 곱씹는 것이다. 대체 고양이가 무엇이기에. (p. 169)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는 날은 기분이 좋고, 우주 어딘가에 고양이들이 모여 사는 행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조예은 작가는 '유니버셜 캣샵의 비밀' 에서 지구의 고양이들을 원래 행성으로 보내준다. ㅎㅎ

그날, 전 세계 곳곳에서 날아오르는 별똥별들이 목격되었다. (p. 189)

단편치고도 초경량 단편들이다 보니 순식간에 읽게 되는 이 작은 소설집은 때로는 따듯했다가 때로는 슬펐다가 때로는 처참했다가 때로는 다독여주다가 때로는 웃음짓게 한다. 고양이들이 독자를 들었다놨다 한다.ㅋㅎㅎ 그렇게 공공연히 볼 수 있는 고양이들을 공공연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무심한 존재는 가벼이 지나치게 되지만 다정해진 존재는 무게감이 생기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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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 터키에서 본 문명, 전쟁 그리고 역사 이야기
조윤수 지음 / 렛츠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거석문화의 웅장함을 보여준 괴베클리 테페,

히타이트 제국의 도시 하투샤

최초의 동서양 전쟁이 일어났던 트로이,

산 정상에 무덤이 있는 넴루트

바빌론,미타니 문명의 한 자락이었던 안티오크까지!

 

 

저자는 외교관으로 미국, 러시아, 독일, 싱가포르, 쿠웨이트, 터키에 근무했었다고 한다. 2014~2017 주 터키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외교관이라... 그야말로 꿈의 직업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다른나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멋있는 일 같고 새로울 것 같고 뿌듯할 것 같다.

젊어서는 일부러라도 많은 경험을 하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대학생이 되자마자 하고 싶은 일이 배낭여행이 아니던가. 그런데 37년간의 외국생활이라... 그것도 외교관으로서... 생각할수록 참 부럽다. ㅎㅎ

터키는 소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냥 별 생각없이 역사책에서도 소아시아라고 나오면 음~터키! 하며 그냥 읽었었는데,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니 하나의 국가를 왜 소아시아라는 대륙명칭으로 부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아마도 터키에 거의 모든 문명의 기원이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의미깊은 나라이다.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문명 사이에서 고대그리스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비단길을 통해 동양과 유럽을 연결시켰던 땅이다. 이 땅에 고대문명의 다양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문명의 집합소 처럼. 하나의 대륙으로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서양입장에서 보면 가장 가까운 아시아이자 아시아의 모든 곳 모든 것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 의아스럽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이라고 할때 내가 한국인의 입장에서 봐서 그런지, 동양은 극동아시아 서양은 유럽 으로 인식된다. 중동아시아라고 하는 것까지는 왠지 그냥 아시아 같긴 하다. 그런데 터키는 굉장히 예외적인 곳이다. 고대시대엔 트로이로서 고대그리스시대엔 페르시아로서 고대로마시대엔 동로마로서 지속적으로 유럽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땅인데 새삼스럽게 동양이라고 뚝 떼어내 버린 느낌이 든다. 터키가 오스만제국이 되지 않고, 이슬람화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유럽의 땅으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다른 대륙들과는 달리 연결된 유라시아 대륙으로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아무리 봐도 종교적 구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대 이슬람교. 성서라는 한 뿌리에서 출발한 영원한 앙숙같은 형제사이랄까.

여하튼 고대역사에 관심이 많던 나로서는 반가운 책이었다.

책의 본격적인 내용이 나오기 전에 제시된 터키의 유적 지도는 정말 감탄스러웠다. 이 넓은 땅에 이토록 골고루 온갖 문명,문화가 다 있다니!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저자는 대사로 있으면서 터키의 여러 발굴 현장을 다닐때 발굴단장이나 박물관장들의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분들과 함께 발굴현장을 볼 수 있었다니 얼마나 좋았을까. 게다가 터키에 불고 있는 한류열풍 덕분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환대를 받는 경험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하니 참 좋은 시절에 좋은 구경을 하셨다.

또한, 대사이기에 고대문명 발굴에 한국의 연구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적도 여러번이고 터키로 밀려온 시리아 난민을 위해서도 한국을 대표해 여러 편의를 제공해주었다는 내용을 읽으니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참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구나 싶고 정치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문화와 국가이미지관리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중책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에 계시는 한국인 외교관들은 어떤 활동들을 하실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저자는 외국의 문명을 보며 한국의 역사와 연결짓고자 하는 시도를 여러번 하고 있었다. 터키의 교류와 발굴 경험을 바탕으로 고구려, 발해, 백제, 가야의 발굴과 나아가 동서 문화 교류에도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여러번 표현하고 있다. 외국의 문명이 먼저이고 더 나은 것처럼 보는 것보다, 외국의 문명이 그러할때 우리의 문명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함께 보고자 하는 생각은 참 좋은 것 같다. 다만 학문적 토대가 약한 것은 좀 아쉽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국내 역사학자들이 더 분발해줘야 할 몫이다. 그러고 보니 국내 고고학 연구는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많이 알려졌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

터키 유적은 정말 파도파도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같은 곳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파야 할지 모를 만큼 많은 곳에 그 보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그 유적들의 사진들이 반가우면서도 좀더 자료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기도 했다. 그만큼 궁금한 곳이 많았다.

발굴초기인 괴베클리 테페 의 거석, 신석기 문명의 차탈회위크, 트로이 전쟁의 다른 관점, 아시리아의 식민도시였던 퀼테페, 철기의 제국이었던 히타이트의 하투샤, 미다스왕과 알렉산더 대왕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프리기아 고르디움, 크로이소스 왕의 사르디스, 아르메니아의 우라르투 반 등의 곳에서 고대 문명의 발자취를 볼 수 있었고,

이즈미르와 에페소스,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보드룸과 안탈리아, 가지안테프와 라오디게아, 아다나와 타르수스, 넴루트와 트라브존 에서 고대그리스,로마의 흔적을 너무나 진하게 느낄 수 있었고,

디브리아 와 콘야, 카파도키아와 사프란볼루, 앙카라와 이스탄불 에서 고대문명 대비 잘 알려지지 않은 셀주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흔적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터키는 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새로운 문명,문화가 없었던 때가 없었다고 할만큼 모든 시대를 품고 있었다.

너무나 다양했고 너무나 찬란했던 문명과 문화는 어디로 갔을까?

유적과 유물로 국가산업의 25%가 관광산업에서 부를 창출하는 터키에서 정치적 혼란과 불투명한 미래는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있을까?

과거를 먹고사는 현재의 터키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그 과거를 너무나 궁금해하는 사람으로서 터키는 역사의 나라다.

하지만 부를 창출하는 역사를 갖지 못하는 나라의,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터키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유럽의 문화를 선도하고 경쟁했던 나라임에도 지금은 과거의 역사로만 회자되는 터키는 그리스나 이집트처럼 몰락한 정도는 아니지만 몹시 불투명해 보인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쉽다. 터키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정말 굼금한 나라다.

지도와 사진 자료가 빈약하고, 내용도 학문적이 아닌 개인적 감상수준이지만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터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읽어봄직한 책이었다.

아~ 가보고 싶다!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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