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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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일본은 조선, 중국과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나?

일본인에게 바다는 두 가지 의미였다. 중화 문명과 교류를 막는 장애물이자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패막이, 발달한 항해술을 갖춘 유럽이 이 천혜의 요새를 무너뜨렸을 때 일본은 커다란 관제에 직면한다. <일본인 이야기1>은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의 일본을 조명하여 그 첫번째 포문을 연다. 역사를 움직이는 우연의 힘, 그리고 그 우연을 행운으로 바꾸는 개인의 결단이 역동적이고 장대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표지 中)

 

 

아주아주 예~전에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를 재밌게 읽으며 그것이 마치 진짜 역사인양 알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고나서야, 서양고전을 원전번역본으로 읽으며 그것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 이야기> 라는 제목을 봤을때 로마인이야기 라는 제목이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픽션인양 논픽션인양 그저 가볍고 재밌게 읽을만한 책이겠거니 하며 시작한 책이었다.

하지만 읽어나갈 수록 달랐다. 00인이야기 라는 연관성은 딱 제목까지였다.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앞으로 돌아가 저자의 이력을 다시 보았다. 저자는 문헌학자이고 규장각 연구원이었다. 시오노나나미와는 급이 달랐다. 이 책은 읽을 수록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하면서도 허구인것처럼 읽혀지는 것이 일본에 대해서 이렇게나 몰랐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해 반일감정이 높을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일본에 대해서는 사실 무턱대고 깔보려는 경향이 있긴 하다. 일본자체 보다는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고 일본을 판단하려는 생각이 강하긴 하다. 태평양 초입에 뚝 떨어져 있는 섬나라로서의 일본에 대해 대륙으로 통하는 길은 한반도 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그들의 문명줄이라도 잡고 있었던 듯 역사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반도 옆에 너무 가깝다 싶게 붙어 있는 일본만 봤었다.

하지만 범위를 조금만 넓혀 보면 일본은 남북으로 긴 섬나라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중국남부와 동남아시아와도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도 자체적으로 가능했고, 지금의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한반도보다 훨씬 활발했다. 게다가 대서양으로 가는 바닷길이 아닌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해 가는 바닷길에서의 거점으로 활용도가 높은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다. 따라서 서양문명이 봤을때 한반도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다. 굳이 개척하거나 와볼 필요가 없는 위치였다. 캐내갈 자원도 없고 무역도 안하는 나라인데다 지정학적으로도 중국과 필리핀, 일본과 직접 교류가 가능한데 굳이 들를 필요가 없는 땅이 한반도였다. 일본이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갈때 오히려 중국 한곳만 바라보고 있던 답답한 곳이 한반도였다. 저 멀리 바다로 나가지 않고 대륙만 보고 있던 곳이 한반도였다. 일본입장에서는 가장 가깝고 편리한 통로로서 한반도의 활용가치가 높으니까 계속 건드릴 수밖에 없지만, 중국이 공산국가가 아니었다면 사실 현대에 와서도 별다른 지리적 중요성을 가질 이유가 없는 곳이 한반도였다. 이러한 생각들을 아마도 처음 하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한반도에 살면서 우물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지리적 범위의 확대를 새삼스럽게 깨우쳐주고 있었다. 서양고전을 읽을땐 그저 먼나라 이야기로서 내나라 역사와 굳이 연결시키지 않았고, 동양고전을 읽을땐 중국고전으로서 철학적 개념만 깨달을 뿐 동양의 범위를 한중일로만 국한 짓고 있었는데, 일본을 일본 자체로 보면서 그 모든 것의 범위를 확장시켜야 겠구나 라는 것을 정말 너무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정말 너무도 새삼스러워서 놀랐다;;; 대충 알고있던 역사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달랐다.

동남아시아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한 네덜란드지만,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명,청대 중국의 도자기나 비단, 일본의 은을 거래하는 데서 오는 이익이 워낙 크다 보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이 두 나라 정부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네덜란드가 자신들보다 군사력이 뒤떨어지는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거침없이 무력행사를 하던 것에 비하면, 동중국해 지역에서 조용히 무역에만 종사한 것은 분명 독특한 모습입니다. (p. 26)

동중국해 연안 지역의 한 겹 바깥에 존재하는 연해주를 러시아가, 베트남을 프랑스가, 미얀마를 영국이 각각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동중국해 연안 지역의 류큐,타이완,조선을 두고 경쟁한 것은 유럽 국가가 아닌 청나라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후신인 중화민국과 '대일본제국'은 결국 중일전쟁에서 무력 충돌합니다. 이렇게 유럽 국가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들끼리의 패권 경쟁을 펼친 곳은 전 세계에서 동중국해 연안 지역이 유일합니다. (p. 28)

 

중국이나 일본은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펴지 않았다. 무역에 큰 관심을 갖고 활발히 대응했다. 중국은 영역이 워낙 넓고 중화 라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이 워낙 확고한 역사를 유지해왔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자체적인 문화가 굉장히 독특한 곳이었다. 태양신의 현신 덴노를 현대까지도 숭상하고 신도 라는 국교가 유일종교라고만 알았는데, 일본땅에서 기독교의 흥망성쇠가 있었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일본의 운이 얼마나 좋았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종교와 산업의 구분이, 이념과 이익의 구분이 얼마나 다른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분제도가 달랐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처럼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되는 신분사회가 아니었다. 황제가 있었으나 상징이었을 뿐 정치와 무력의 핵심우두머리는 늘 따로 있었고, 직업의 귀천은 있었으나 그것은 우리네의 신분제와는 많이 달랐다. 신분의 억압이 약했다는 것은 그래서 계층이동이 비교적 자유롭게 가능했다는 것은 그렇게 타고난 처지와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신분이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신흥종교의 평등사상이 조선에서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서양문물의 흡수에 거리낌이 없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운이 좋은 시기가 정말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애니미즘 토속신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도...

유럽 세력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지역들이 분열되어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럽 세력이 접근해올 당시 일본도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일본도 전쟁에 패한 지역에서는 노예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들 일본인 노예들은 승리한 지역으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거나, 유럽 상인들에게 넘겨져 전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조선인 노예가 일본인 노예들이 수출되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부산과 일본을 거쳐 전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 대항해시대 당시 전세계의 무역 흐름에서 보았을 때 일본과 조선에서 일어난 노예 거래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p. 40,41)

노예 라는 말은 저~기 멀고먼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만 사용된 말인줄 알았다. 층층이 쌓인 노예선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본인과 조선인 노예에 대한 표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읽은 것 같다. 조금은 충격적이면서도 조금은 부끄러웠다. 노예란 흑인노예와 동의어인줄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내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나 싶은 것이...

여하튼 일본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다르게 이 시기 통일을 이루었고, 이 통일 세력은 서양문물과 만났을때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세계를 넘보겠다는 야망까지 품게 된다. 서양과의 만남은 세계관까지 확대시켰다. 일본은 중화문명 이외의 문명에 대해 조선보다 훨씬 일찍 인정했고,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문명은 이제 중화문명과 유럽문명 두 가지가 되었으며,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게 하는 유럽문명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1613년 일본은 자체능력으로 로마에 사절단이 다녀옴으로써 더욱 확실히 유럽을 깨닫게 된다. 일본은 이때 이미 바다를 통해 중화문명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한반도와 한반도 주민들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와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장한 과정은 결코 무능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중국해 연안 지역을 생각할 때 대체로 중국과 일본이 비슷한 경로를 밟고 조선이 예외적인 길을 갔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만은 중국과 한국이 비슷한 길을 걸었고 일본이 예외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경제사 연구자 로이드 이스트만은 중국은(그리고 한반도 역시)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산업 근대화에 진입했지만, (하필이면) 예외적인 국가인 일본이 가까이 있다 보니 그 과정이 과소평가되어왔다는 지적입니다. (p. 118)

일본은 여러가지 면에서 예외적이었다. 일본은 의외로 차근차근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성장해왔다. 중국과 한국은 특히 한국의 성장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이지만, 일본 옆에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한 면도 있다고 하니... 일본은 전쟁전이나 전쟁후나 두고두고 우리의 숙적이 될 수 밖에 없는 나라인가 보다...

기존에는 유력한 영주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전국시대 일본이 분열에서 통일로 향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성장한 피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잇코잇키 같은 아래로부터의 봉기를 무사 계급이 진압하면서 쇼군 권력이 탄생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국시대의 전개 및 통일 정권의 성립을 잇코잇키 세력과 영주들 간의 충돌로 설명하려는 최근 경향은, 개별 영웅들 간의 경쟁을 강조하고 그들 개인사와 가족관계, 인상적인 몇몇 전투로 전국시대를 설명해온 통속적인 접근방식을 수정하는 시도라 하겠습니다. (p. 156)

16세기는 일본이 서양문물과의 접촉과 성장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지만, 기본의 불교세력과 시민세력 그리고 신흥종교인 카톨릭세력의 부흥이 활발히 움직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로 연결되는 무력집단의 성장은 일본내의 종교운동과 맞물려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기에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일본 통일 과정에서 카톨릭 세력이 등장한 것은 훗날 가톨릭 국가들을 대체할 세력을 필요로 하던 지배층에게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나타났을 때처럼 행운으로 작용했다는 저자의 말이 몹시 와닿았다. 일본 무력집단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를 적절히 이용하고 마지막에는 둘다 없애버렸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와 다른 현대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이용한 후 버렸고 한국은 지속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현대랄까...

신앙과 무역을 분리하는 이러한 정책은 오다 노부나가와는 구분되는 히데요시의 독자적인 정책입니다. 훗날 도쿠가와 막부가 신앙과 무역을 분리해서 접근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에게 나가사키 테지마의 거주를 허가한 정책의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중세 일본-유럽 교섭사 연구자인 마쓰다 기이치는 이러한 유럽과의 외교야말로 히데요시의 외교 정책 가운데 진정으로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요약하자면 히데요시 정권과 도쿠가와 일본, 명나라와 청나라도 가톨릭 세력이 정치,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유럽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중국과 일본은 같았고, 조선을 달랐습니다. (p. 246)

유럽의 중세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피가 흘렀고, 이슬람의 성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종교과 무역을 분리시킨 일본을 보며 정말 다른 문화성을 지닌 민족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영국도 유럽에서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지만 헤엄쳐 건너갈 해협이 있을만큼 가까워서인지 역사문화적으로 유럽과 분리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일본은 그에 비하면 꽤 많이 떨어져 있는 섬나라라서인지 독자적인 발달이 점점더 일본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중화사상과 일화이념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가 더욱 고달프게 느껴진다...

동남아시아 연구자인 최병욱 선생은 베트남과 버마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과 태국이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서구 열강이 품은 의지의 강도 차이로 설명합니다.

'프랑스는 중국 배후 시장으로의 진출이 필요했으며 그 통로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한 메콩의 확보가 필요했고, 영국은 같은 이유로 버마를 거치는 배타적 육상로를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과 국경을 접하지 않은 태국은 영국, 프랑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p. 278)

 

서구 열강의 최종 목표는 청나라, 즉 중국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물론이려니와 일본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중화문명은 일본에게도 조선에게도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 같다. 중화에 동화되는 것과 중화에 가려지는 것 사이에서 조선과 일본은 적어도 유럽에게 밟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본은 바다로 나가면서 양날의 검을 버리고 스스로의 검을 만들었다. 우리는??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도 끝맺지 못하고 유럽과의 문제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남겨집니다. 두 과제에 대해 이에야스는, 조선과는 국교를 재개하는 방향을 택하고, 유럽 문제에서는 교역 상대국을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 국가에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 영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두가지 결정이 그후 거의 3백년간 일본의 대내외 관계를 결정짓게 됩니다. (p. 291)

일본과의 이야기에서 16세기 라면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을 침략당한 조선의 입장이 아닌 쳐들어온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내용들은 당시의 일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 옛날부터 경제적인 선택을 해온 일본인에 대해 참 여려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상업적인 이익을 중요시한 일본지배층도 자신의 권위보다 저 먼바다건너 종교적 우두머리에게 복종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일본내의 종교세력을 뿌리뽑아 버린다.

16~17세기 중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가톨릭이 사회적으로 더욱 중대한 의미를 띤 곳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6~17세기 일본의 피지배층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는 자진해서 가톨릭을 받아들인 경우도 많고, 영주가 강제 개종시킨 사례 또한 많았습니다. 출발점이 어떠했든 일본 전역에서 숱한 순교작 ㅏ나오고 19세기 말까지 가톨릭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 또한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16~17세기 일본을 다른 비유럽권 국가들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가톨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인구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인이 가톨릭을 깊이 믿었으며, 이것이 일본 지배잗르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p. 336)

일본의 절은 막부로부터 제도적, 경제적으로 안정을 보장받는 대신 철저히 체제 순응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이는 가톨릭 세력을 억압하는 수단인 동시에 체제 저항적이었던 잇코잇키와 같은 불교 세력을 회유하는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p. 378)

 

일본내에서의 기독교 흥망성쇠는 비교적 짧았다. 의욕적인 선교활동도 본국에서 무력적 지지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힘없이 사라져갔다. 유럽 본국에서는 종교적 선교활동만을 위해 멀고먼 일본땅까지 군함을 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무역으로만 관계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 판단했다. 서양종교의 싹을 말린 일본은 무력집단의 통일과 함께 종교적 통일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다. 다신교적 일본종교 신도 는 여전한 그들의 사상적 뿌리이다. 아마도 석기시대부터 시작됐을 애니미즘적 종교는 오랜 전통의 기독교보다 더 이전부터 이어져 온 종교일 것이다. 경제와 학문의 다양성은 받아들였으나 종교와 이념의 다양성은 철저히 배척한 일본의 역사가 지금의 일본을 형성했다.

도쿠가와 일본이 이른바 쇄국을 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유럽에서 보았을 때의 관점일 뿐입니다. 당시 일본은 쓰시마를 통해서는 조선과,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유럽 및 청나라와, 사쓰마를 통해서는 류큐왕국과, 홋카이도 최남단의 마쓰마에를 통해서는 아이누 및 북방 민족들과 활발한 교섭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최근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쇄국' 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그 대신 쓰시마, 나가사키, 사쓰마, 마쓰마에 를 '네 개의 창구' 라고 일컬으며,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외교, 무역 관계를 설명하고 잇습니다. (p. 386)

일본의 역사교과서 내용이 몹시 궁금하긴 한데,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한반도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해서까지 일본의 역사를 독자적으로 세우는 일본은 유럽에서 보는 시각까지도 고쳐쓰고 있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이러한 역사연구의 흐름은 반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우리의 역사연구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우리의 역사연구도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닌 세계속에서의 한국을 볼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야 하지 않을지...

16~17세기 유럽문명과 만난 일본은 세계관을 넓히면서 경제적 인 부를 쌓기 시작했고, 17~19세기 일본엔 조선의 과거제와 같은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이 없었기에 다양한 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놈이라고 치부하기엔 일본 고유의 특성이 너무나 강렬했고, 뚝떨어진 섬나라라고 하기엔 바다가 너무나 많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핵폐기물이며 쓰레기를 가장 많이 바다에 버리고 있다는 일본을, 세계대전의 죄값을 제대로 치룬적 없는 일본을,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에서 잘먹고잘살고 있는 일본을 지구는, 세계는, 바다는 언제까지 보호해 줄까?

다섯 권으로 구성된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번째 권이라는 이 책은 16~17세기의 전환기를 다루고 있다. 17~18세기 중반을 다룰 2권 <백가쟁명>, 18~19세기 전반을 다룰 3권 <북로남왜>, 메이지유신 전후를 다룰 4권 <일본의 두 번째 기회>, 19세기 말~ 패전 전후를 다룰 5권 <보통국가에의 지향과 좌절> 까지 앞으로의 시리즈 도 기대된다. 이야기책이라고 하기엔 스토리가 약하고, 역사책이라고 하기엔 역사에 대한 판단이 꽤 많이 들어가 있는 이 책은 가독성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내용들에 신기해하며 읽게 되는 책이었다. 너무나 몰랐던 일본에 대해 현재 정세분석만 하는 책보다는 역사적인 맥락으로 일본을 알아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앞으로의 시리즈에도 관심이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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