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중산층 사회 -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고도성장의 끝, 세습 자본주의가 시작됐다!

 

 

82년생 김지영에게도 완벽히 공감하진 못했었다. 하물며 90대생, 젊다기보다 어려보이는 그들의 생각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회격차는 심화되고 민주주의의 시도는 시끄러움으로 피곤해지는 가운데, 늙어 사라질 세대의 목소리가 여전히 큰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현역이 될 90년대생들의 처지를 좀더 이해하고 싶었다. 기성세대가 보기엔 하나같이 자신들보다 모든 면에서 누리고 자란 세대인데 뭐 그리 불평불만이 많은지 견뎌보라 호통치고, 이러한 꼰대들의 잔소리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무시하는 젊은세대의 간극을 좁히려면 그들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필요했다. 이 책이 그 초석이 되어주길 기대했다.

20대의 불평등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삶이 평등하지 않다는 데 있지 않다. 불평등이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다차원적이라는 질적 특징에 있다. 그 불평등은 학력·소득·직업·인맥·문화적 역량의 복합적인 결합으로서, 부모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격차가 그대로 자녀의 인적자본 격차로 체화되는 것이다. 흔히 이 격차는 능력의 격차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출신 계층의 격차라는 사실을 '나머지' 게층에 속한 오늘날의 '20대'는 삶의 단계마다 피부로 깨친다. (p. 5)

이 책은 거의 논문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프롤로그에 대강의 핵심적 주장들이 들어있고, 앞으로 풀어낼 글의 구성을 알려주며, 에필로그로 본문에 미처 담지 못한 번외적 마무리주장으로 맺고 있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용자료들과 세세히 구분되는 소단원들은 글의 뼈대를 이루면서 정리를 하고 있기도 했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문제의식은 이 책의 결론에 벌써 근접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본질은 부모 세대인 50대 중산층의 학력(정확히는 학벌)과 노동시장 지위를 바탕으로 그들의 자녀에게도 동일한 학력과 노동시장 지위를 물려주는 데 있다. 세습 중산층의 자녀가 '번듯한 일자리'를 독식하는 게 2019년의 20대가 1999년 또는 2009년의 20대와 다른 점이다. 이렇게 심화된 '격차 고정'은 결혼, 주택 등 생애주기에서의 기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p. 12)

세습은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문명이 기록하는 모든 역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세습은 이루어져 왔다. 다만, 공식적인 계급이 사라진 것이지만 계급이 사라지면서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재분배된것은 아니기에 세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식에의 평등은 물질적 평등을 추구했고 그 해소되지 않는 불평등이 세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회가 변한만큼 획득의 방법과 평등의 방법도 변해왔다. 그러나 평등을 경험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내부자와 외부자의 극심한 차이는 중세 유럽 도시의 '성 안 사람'들이란 표현에서 '부르주아지'라는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가 나왔던 것을 연상케 한다. 부르주아지는 원래 중세 성벽에서 귀족이 거주하는 내성과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외성 사이 지역에 거주하는 상공인, 법률가, 의사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중세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하자 이들은 농민들과 다른 전문적 지식과 재산을 갖는 하나의 집단으로 일컬어졌다. 또 중세시대 성 안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고 봉건적 인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성벽 안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재산 및 거주 기간등을 동료 부르주아지 집단으로부터 까다롭게 심사받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기업 정규직, 공무원등이 되는 것이다. "일자리의 양이 적은 것이 아니라 번듯한 괜찮은 일자리 창출이 적은것" 이 숨겨진 '진짜' 문제였던 것이다. (p. 32)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는 노동자와 vs 관계에 있는 명칭이었다. 자본을 가진 자와 못 가진자의 구분이었다. 자본은 왕권처럼 세습되었고 부르주아는 거대자본 소유자 처럼 여겨졌다. 그러한 거대한 세습은 눈에 띄어 누구나 알고 암묵적으로 혹은 어쩔수 없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애초에 부르주아지는 조금 가졌고 조금 다른 계층이었다. 지금의 중산층 이랄까. 그 중산층 세습의 문제는 일상에서 쉽게 체험되는 만큼 더 심각하게 다가올 수 있는 세습문제였다.

지금과 같은 노동시장의 극심한 이중 선별 구조가 형성된 것은 200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1980년대생부터라고 할 수 있다. (p. 37)

일반계 고교 진학 증가는 고교 졸업 학력으로 취업 가능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나타난 결과다. 대학 학력을 갖추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다. (p. 48)

2010년 이후 노동시장에 진입한 80년대 후반생 또는 90년대생은 이전과 비교해 대기업 일자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특히 일반 사무직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줄어들었다. 취업 희망자들이 최우선 목표로 삼는 대기업-일반 사무직의 안정된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경쟁은 이전보다 더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p. 65)

 

성장만 하던 경제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 성장속도에 맞추어진 다른 것들의 속도는 늦추기가 힘들었다. 삶의 수준에 대한 눈이 높아졌고, 교육기회는 확대되었으나 평균이 왜곡하는 질적 차이는 더 벌어진 상태였다. 취업자수에 맞춰 교육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문제는 더욱 커졌다. 고학력이 될 수록 임금에 대한 기대는 높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악순환은 시작되었다. 치열한 경쟁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취업경쟁에서 입시경쟁에서 초중등교육까지...

문제는 여성 몫 증가와 남성 몫 감소가 2010년 이후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페미니즘 이슈'에 중산층 남성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그들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 악화가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p. 79)

'질 좋은 일자리'가 지방에 있어도 가장 좋은 몫은 서울 명문대 졸업생의 차지인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서울 소재 명문대와 지방대의 위계질서는 엄격하게 유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 100)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이래 빼앗기고 저래 빼앗기는 느낌은 실제로 그것이 빼앗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30대만 해도 개천의 가재, 붕어, 개구리들에게 어느 정도는 열려 있던 서울 4년제 대학 진학 기회가, 20대에게는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부모가 고졸-블루칼라일 경우 자녀의 서울 4년제 대학 입학 확률은 30대에 비해 20대에게서 극히 낮아졌다. 초대졸-판매직이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p. 120)

여러 차례 언론 기사로 알려졌다시피 사교육 산업은 80년대 학번 운동권들의 호구지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의 대치동을 만들었다. 대치동이 한국 교육산업의 실리콘밸리 같은 입지를 확고히 한 결정적 계기는 2000년대 초에 이루어진 '쉬운 수능'과 '논술 강화'였다. 전직 운동권 출신들이 대학교 재학 당시 '세미나'하듯 학생들을 가르치는 논술학원이 급격히 세를 불려나갔다. (p. 128)

아버지 학력이 높을수록, 그리고 부모 소득이 많을수록 자녀의 자기학습 시간이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하게 관찰되었다. (p. 142)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개천에서 가재나 붕어라도 나오곤 하던 것도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한다. 교육환경은 곧 개천이 되었다.

성실성, 성취동기, 자존감 등 '품성' 이라고 이야기 되는 비인지적 능력 격차가 부모의 계층에 따라 발생함을 보여준다. 흔히 이야기 하는 '집안 좋은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속설은 정말로 참이다. 양육환경이 좋은, 즉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학력이나 직업 등 사회적 지위도 뒷받침되는 계층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는 인지적 능력뿜만 아니라 비인지적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대치동 학원가 등을 통한 교육 투자는 결실을 맺는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다. 계층이다. (p. 144)

아직은 이렇게 단정짓고 싶지 않다 나는. 개천은 없어졌지만 노력은 아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확실한 결실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미 가진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개인의 능력과 의지와 노력에 따른 결실이 아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직은.

한국에서 90년대생들은 전문직이나 대기업 일자리를 가진 부모가 확보한 경제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괜찮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 세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이 이전 세대가 경험한 불평등과 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p. 147)

달라졌다. 달라지긴 했다. 누리고 자란 만큼 욕심이 있을 수 있을텐데, 삶의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아져 있을 텐데, 그러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현실이 더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세습을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느낀 첫 세대 90년대생들의 다양성은 당연한 결과인듯 하다.

중산층이나 중상위층 출신 여성들은 자신의 계층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중간 이하 계층 출신 여성들은 "결혼을 해도 경제적으로 지금의 삶보다 나아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혼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양상이었다. (p. 163)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비혼과 미혼율 이 높아져 가는 것이 경제적인 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돈만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경제적 안정 말고도 많이 있다. 그 다른 행복들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텐데...

'586'이란 단어는 단순히 세대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80년대 '학번'인 60년대생으로 대기업 화이트칼라로 일하는, 세습 중산층의 첫 세대를 가리키는 계급적 지위를 의미한다. (p. 181)

 

586 세대가 정치판에서만 의미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혁명을 이끌어낸 세대는 자식들에게 혁명을 가로막고 있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1960년대생이 맞이한 '기회'는 1970년대 중후반 중화학공업화와 그에 따른 경제 구조의 고도화에서 시작됐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전문·기술직이나 관리직 수요가 늘어났고, 이 자리들은 1980년대 전후해 대학에 입학하고, 1980년대 중후반 졸업한 인력들로 채워졌다. 흔히 이 세대의 높은 대학 진학률에만 주목해 '대졸자가 늘었기 때문에 그만큼 계층화가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노동시장이 기업 등 민간의 노동수요에 의한 일종의 '파생시장'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잇다. (p. 186,187)

중상위층의 소득 몫 증가는 수출 대기업의 급격한 성장과 그로 인한 도시 화이트칼라 또는 전문직 급여생활자들의 소득 증가가 원인이었다. (p. 199)

 

대졸자가 늘어서 계층이 분화된 것이 아니라, 대졸자에 대한 기업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에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것이라는 지적은 의미있게 다가왔다. 결과를 중심으로 해석하다 보면 의외로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곤 한다. 원인파악은 반드시 필요하다. '승리의 역사'가 함께했던 60년대생의 근로생애는 성장기이자 황금기였지만 그 승리가 이루어진 결과를 누리고 자란 세대가 성취해야 할 승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쥔 세대는 승리감을 만끽했지만, 최초가 남아있지 않은 세대는 방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개인의 능력 차이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사회가 어느 정도 메워주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30~50대는 계층에 관계없이 균질한 답을 내놓은 반면, 20대는 출신 계층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장을 드러냈다. (p. 225)

중상위층 20대는 동일 계층 여성과 명문대 진학과 번듯한 일자리 취업을 놓고 예전보다 격렬한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분노한다면,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사회경제적 약자로 살아가는 20대는 연애와 결혼시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약자'라는 현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분노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경우에도 명문대를 나오고 남성 못지 않은 능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남성 우위인 사회에 분노하는, 진정한 능력본위 사회를 희구할 수밖에 없는 중상위층 여성과 여성 차별적 노동시장에서 월200만원을 밑도는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중층적인 차별을 겪는 하위층 여성 사이에서 젠더 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같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p. 245)

20대라는 연령대는 청년이라는 말 하나로 포괄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소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노동시장 진입을 전후로 하는 생활세계의 경험이 상이하다. 20대라는 연령 집단도 각기 다른 소집단으로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게 더 현실에 들어맞는 인식일 것이다. 요컨대 그럴듯한 '담론'을 정교한 '실증'으로 대체할 시기가 온 것이다. (p. 246)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세대별 주요 특징은 청년층 장년층 노년층이 됐건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가 됐건 크게 묶어 하나의 의견으로 표현되곤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20대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을 듯 하다.

지금의 20대가 586세대의 정치 기획에 냉소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세대 차원의 기득권'을 가졌거나 '상류 계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공정한 게임의 핵심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p. 263)

현재 20대들은 앞으로 상당 기간 정치적 선호가 형성되지 않은 비면역 유권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30대 중반 정도가 되는 2022년 대선이나 2024년 총선을 전후로 해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불만과 비당파적 성향이 강한 유권자 집단이 이슈가 될 것이다. (p. 266)

 

세대별 의견으로 묶여지지 않는 지금의 20대는 지금의 노쇠한 정당들을 갈아치울 첫 세대가 될 것 같다. 비당파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기존 정당들의 순서가 뒤집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새로운 정당에 대한 출현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경제에서는 주류가 되기 힘들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끌어낼 최초의 세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90년대생 또는 2000년대생들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세대이지만 정작 능력에 걸맞은 대우는 받지 못하는 불우한 세대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곤 했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자랑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결혼을 꿈꾸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이러한 종류의 담론은 왜 교육 투자가 급증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살펴보지 않고 단순히 '교육의 확대' 정도로 언급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부모 또는 교육의 당사자인 자녀들이 왜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과 시간을 교육 투자에 투입하느냐다. 그것은 성장률의 급격한 하락 또는 저성장기 진입과 연결짓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보다 더 늘어난 인적자본 투자와 한정된일자리 사정이 맞물리면서 결국 인적자본 투자의 군비 경쟁 강도는 강화된다. 그리고 그 군비 경쟁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중상위층과 나머지 계층의 격차는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p. 279)

국내세습은 진화하여 해외로 진출했다. 이제 정말 중상위층 계층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해외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이 빠져나갔다고 해서 빈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를 가진 사람도 열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지라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이라도 세습시켜주기 위해 부모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세습을 끊을 수 없다면 격차를 줄이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지금의 불평등이 상위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의 격차뿐만 아니라 상위 10퍼센트와 나머지 90퍼센트의 심각한 격차 문제에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세습 중산층은 그 격차를 '능력의 차이'로 포장하며, 자신의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계층 지위를 물려주고자 노력한다. 그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사회적 계층이동을 가로막는지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 해결의 단초가 있을 것이다. (p. 292)

우리가 몰랐을까? 저 먼나라 같은 상위1퍼센트 뿐만이 아니라 상위 10퍼센트라는 중산층의 세습을? 세습이 과연 상위10퍼센트에서 그칠까? 아니다. 얼마나 물려주는지 어떤것을 물려주는지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세습은 어떤식으로든 이루어져 왔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서 해결하지 못해 왔을까? 너무 잘 알아서 이용해온 것이 아니고? 해결의 단초는 이해를 넘어 공평의 기준정립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불만족은 불평등을 낳지만 만족은 인정을 낳기 마련이므로...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구 자유의 이야기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소녀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기까지



이 책의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 는 1986년 미국 아이다호서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아버지로 인해 16년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기초 교육 과정을 모두 건너뛴 채로 대입자격시험을치렀고, 17세에 대학에 합격하면서 배움의 과정을 시작했다. 2008년 최우수 학부생상을 받으며 브리검 영 대학교를 졸업했고, 게이츠 케임브리지 장학금 수상자로 지정되어 200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방문 연구원을 지냈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뒤 2014년에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ducated] 는 2018년 출간되자마자 미국 출판계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타라가 태어나고 살았던 아이다호 웜크릭은 초기 아메리카이주민들의 정착지들 중에서 모르몬 교도들의 정착지였다. 종교를 잘 모르지만, 책에서 읽혀지는 모르몬교도들의 모습은 청교도주의의 한 분파인가 싶었다. 극한의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모르몬교는 학교와 병원과 사회체제의 간섭?을 거부하고 그 인위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오직 신의 뜻에 따라 자연적 치유의 힘과 영적 기도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그들 중에서도 타라의 아버지는 광신도였다. 세계의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재산이 생기기만 하면 비상식량과 비상연료를 모으고 그 모아놓는 장소를 넓히는데 집중하면서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절대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지 않고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서 모르몬교성경만 읽는 사람이었다.


첫째 토니오빠는 어린시절이나마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었고 일찍 집을 나가 자립했지만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고 사업에 실패하자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둘째 숀 오빠는 어린시절 학교를 조금 다녔지만 학업보다는 주먹에 소질이 있었고 자립했지만 뒷골목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폭력을 일삼았다.

셋째 타일러 오빠는 스스로 공부를 찾아하는 사람이었다. 음악듣기를 즐겼고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람이었으며 내강외유형으로 타라에게 대입시험과 대학생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넷째 오드리 언니는 청소년기에 마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금씩 독립을 준비하여 십대후반에 결혼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집안일을 했다.

다섯째 루크 오빠는 아주아주 조금 학교경험이 있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아버지와 한시도 떨어질 새 없이 아버지의 일을 하며 살았다.

여섯째 리처드 오빠는 영특했지만 어려서부터 타라와 함께 형들과 아버지의 압력에 눌려있었으나 타일러의 권유로 대입시험에 통과하며 새로운 삶을 찾는다.

일곱째 타라 는 위의 기억나지 않는 토니오빠와 폭력적인 숀 오빠와 집안머슴 같은 루크 오빠와 공감대 형성할 틈도 없이 독립한 오드리언니 보다 그누구와도 달랐던 타일러 오빠와 친구같던 리처드 오빠의 영향을 받으며 아버지의 광신을 익히며 자랐지만 돌아온 숀오빠의 폭력에 의한 자극과 집을 떠난 타일러 오빠의 새삶에 대한 자극으로 집이 아닌 다른 세상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다.

조울증과 우울증과 조현병 사이에서 어느 항목에 적당할지 모르겠는 아버지의 광신성은 그나마 논리가 있었으나, 숀오빠의 폭력은 종교를 빙자한 사이코패스적 폭력이었고 타라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타라의 가족에게는 다른 세상에 살게된 타라는 악마이고 폭력으로 점철된 숀은 회개만 하면 다 용서되는 일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는... 처음엔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큰 사고 이후 점점 아버지화 되어간다.


타라가 이야기하는 가족사는 정말 이상하고 이상했다. 끈끈한 가족애로 똘똘 뭉쳐있지만 광신과 맹신은 가족이 용납해서는 안될 것까지 용납하게 했고 그러면서도 가족을 끊어내지는 않으며 끊임없이 사랑했다. 이 가족이 속한 모르몬교 사회에서도 이 가족은 희한하고 독특한 가족이었지만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마을의 지도자격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보다보면 생업과 연결되어 있었다.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경제적으로 부모의 사업에 얽혀 있는 넷은 그곳에 머물렀고 셋은 그곳을 떠났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넷과 박사학위를 가진 셋의 틈은 점점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타라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죽을때까지 어머니와 갈등했다. 폭력적이고 성질 급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을 두고 직업을 가지고 직장에 나갔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죽을때까지 유지했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된 선택을 죽을때까지 자극했다. 모르몬교 집성촌에서 만난 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십대 초반에 결혼을 했고 어머니는 외가와 연을 끊다시피 해야 했다. 타라의 아버지가 토니를 스물 둘에 낳았고 숀을 낳을때는 병원이 아닌 산파를 고용했으며 루크를 낳을때부터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기로 했고 서른살이 되었을때 아들들을 학교에서 그만두게 했다. 4년 후 전화를 없앴고 운전면허 갱신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보험에 드는 것도 중단했다. 그리고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마흔살이 되던해 위버가사건에 대한 인식왜곡으로 인해 그의 머릿속은 내내 종말과 전쟁으로 치달았다.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극히 병적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병증에 물들어 갔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결정들, 사람들이 함께 또는 홀로 내리는 결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하나의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들이 한데 뭉쳐 퇴적층을 만들고 바위가 되듯이. (p. 75)


웜크릭은 여전히 있고 모르몬교도 여전히 있을 것이며 타라의 가족들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타라와 그 가족이 내린 그 선택들이 모두 합쳐져서 그들의 가족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포함되어 만들어진 모르몬교의 흐름은 미국의 퇴적층 일부를 쌓아올리고 있을 것이다. 전에 읽은 <면역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면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냥 논리로서만 파악했는데 지금와보니 종교가 들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미국사회의 중심이 유대교세력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타라의 아버지는 종말을 대비해 다양한 최신 총기류도 모으고 있었다.


우리집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온전히 혼자서 방향을 찾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맡은 일을 끝내면 뭐든 혼자 배울 수 있었다. 우리 중 비교적 자기 조절이 더 잘되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가장 그렇지 못한 아이들중 하나였다. 그래서 열 살이 되도록 내가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은 유일하게 모스 부호뿐이었다. 내가 그것을 꼭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가 고집했기 때문이다. <전화선이 끊어지면 이 동네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우리 가족밖에 없을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늘 모스 부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우리뿐이라면 도대체 누구랑 의사소통을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p. 85)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 타고나는 것에 대해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같은 환경에 있었지만 누구는 의문을 가졌고 누구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의문을 가졌던 사람은 앞으로 나아갔으나 의문을 갖지 않은 사람은 머물거나 되돌아갔다. 늑대소년 이야기도 생각났다. 아기때 숲속에 버려졌던 소년은 끝내 사회화 되지 못했다. 중세 어느 왕이 했었다는 실험?도 생각났다. 아기들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줬을때 타고난 언어능력을 보려던 그 시도는 모든 아기들의 죽음을 불러왔다. 혼자서 방향을 찾는 다는 것도 기본적인 양육이 있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타라는 광신적 종교가정이었으나 버려진 아이는 아니었다. 타라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일을 시켰다. 폭우가 쏟아질때 나무에 물을 주는 일이라도 시켰다. 하지만 비록 모르몬교역사서만 읽을지라도 긴긴시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붙들고 있었던 그 끈기가 말로 저자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드디어 12월 31일이 됐다. 아침 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침착했지만, 그 평온함 뒤에서 나는 흥분감, 염원 같은 것을 감지했다. 몇 년 동안 총을 땅에 묻고, 음식을 비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할 것을 경고함녀서 지내 오지 않았던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예언서를 읽었다. 그들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를 놀렸고, 비웃었다. 오늘 밤이면 그동안의 오명을 씻울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12시가 됐다. 텔리비전은 여전히 웅웅거렸고, 거기서 나오는 빛이 카펫 위에서 춤을 췄다. 나는 우리 시계가 빠른 걸까 생각했다. 부엌으로 가서 수도를 틀어 봤다. 물이 아직 나왔다. 아버지는 꼼짝 않고 앉아서 텔리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12시 10분. 나는 텔리비전 화면이 깜빡거리다가 꺼지기를 기다렸다. 이 마지막 사치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몇 초 후, 세상이 뒤집혀서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기 시작하면 잃게 될 이전 삶에 대한 향수에 벌써부터 젖어 들었다.

향수는 피로감으로 변했다. 1시 30분이 조금 지난 후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버지를 흘낏 봤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보다 더 작아 보였다. 온몸에 깃든 실망감이 너무도 아이 같아서, 순간적으로 신은 어떻게 아버지의 소원을 이렇게 외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버지와 같은 충실한 종, 노아가 방주를 짓기 위해 자진해서 고통을 받았듯, 그렇게 주님을 위해 고통을 자처한 아버지의 소원을 말이다. 그러나 신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p. 149,150,151)


아버지의 종말론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광신은 더 굳건해졌고, 교통사고로 아내가 뇌진탕을 겪어도, 건설현장사고로 아들이 떨어져 뇌를 다쳐도, 화재로 아들이 다리전체에 화상을 입어도,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의 뇌수가 밖으로 흘러나와도 아버지는 그 누구도 병원에 보내지 않았고 자신이 화재에 얼굴이 녹아내리고 손가락이 뒤엉켜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때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 모든 큰 사고들에서도 누구하나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은총이 되고 신의 목소리가 되어 곧 그 자신이 영적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온갖 약초와 오일을 제조하고 먹이던 어머니는 그 마을의 치료사이사 경제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영적 존재의 아내가 되었다.


립글로스를 처음 발랐을 때 숀 오빠는 나를 창녀라고 불렀다. (p. 187)

열다섯살쯤 되었을 때, 마스카라와 립글로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숀 오빠는 아버지에게 읍내에 나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 즉시 내가 임신했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나는 남자애와 입을 맞춰 본 적도 없었다. 임신이 어떻게 되는지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고함을 질러 대는 중에도 무지가 내 입을 막았다. 그들의 질책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변호도 할 수 없었다. 며칠후, 내가 임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 나는 <창녀>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보탰다. 이제 <창녀>라는 단어는 행동보다는 본질에 관한 묘사가 됐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숀오빠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내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를 규정해 줬다.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p. 315)

어릴 때 나는 때가 오면 신이 일부다처제를 다시 부활할 것이고, 내세에는 나도 여러 명의 아내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배웠다. 나의 자매 아내들의 숫자는 내 남편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더 숭고하게 산 사람일수록 더 많은 아내가 주어질 것이다. (p. 383)


책을 읽을 수록 모르몬교는 이슬람교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종교 다 잘 모르지만, 가부장적 남성의 권위와 일처다부제의 당연성과 모든 이가 지극히 종교적 삶을 일상으로 하면서도 여성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종에 가까운 그런 면과 무엇보다 여성의 순결에 대한 인식이.... 숀은 타라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살인직전상태까지의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부모는 그것을 폭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믿는 신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우리 가족이 읍내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교회에 가긴 하지만 종교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했다. 다른 사람들은 겸양을 <믿었지만> 우리는 실천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지만> 우리는 주님의 손에 치유를 맡겼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믿었지만> 우리는 실제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우리 가족만이 진정한 모르몬교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대학, 이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 간극의 거대함을 실감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우리 가족과 함께하지 않으면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었다. 그 사이에는 발을 걸칠 자리가 전혀 없었다. (p. 254)


저자가 처음 입학한 대학은 모르몬교도들이 다니는 대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저자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것은 집을 떠나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그녀가 집을 떠나올수 있었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또한 그들의 신이 내린 선택 아닐까? 타라가 아버지의 말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신의 뜻일까?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그들의 저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 편견이 가미된 주장들을 서로 교환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내가 배운 역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운 역사와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p. 373)


저자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저자가 알아왔던 세상을 이해하고 저자가 알아가야 할 세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학문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저자가 자신의 생각과 위치를 선택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지침일 것 같다. 역사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곧 저자 자신을 연구하고 배우는 과정이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 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 목을 눌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새로운 역사를 썼다. 과거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했다. 무게를 지닌 것은 미래뿐이었다. (p. 424)


타라는 자신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지만, 그의 가족도 그녀를 악마의 소굴에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의 가족은 하나둘 그녀 대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는 그녀의 부모에게 굴종하고 타라에게 등을 돌렸다.


언니를 잃었을 때 나는 가족 전체를 잃었다. 아버지가 오빠들도 모두 방문해서 언니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부인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모르는 이방인의 주절거림과 다름없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내가 너무 멀리 와버렸고, 너무 많이 변해 버렸고, 그들이 여동생이라고 기억하는 무릎에 딱지 앉은 어린 소녀와 너무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언니가 나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역사를 뒤집을 희망은 거의 없었다. 내가 교육을 받기 위해 치르는 대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화가나기 시작했다. (p. 454~455)


숀에게 같은 폭력을 당했던 오드리는 타라에게 이제라도 바로잡자고 먼저 제의를 했었다. 하지만 오드리의 시도는 실패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하게 장악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타라의 시도는 시작도 못하고 좌절됐다. 결과적으로 타라는 타지에 떨어져 있는 이방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쪽 가족을 잃자 저쪽 가족을 얻었다. 모두가 다 아버지와 엮여 있지는 않았다. 특히나 타일러는 광신도 집단 가족이 아닌 공부하는 동생인 타라의 말을 믿어주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p. 471)

오래된 불만들을 끊임없이 들먹이며 탓하기를 멈춘 후에야, 아버지의 죄와 내 죄의 무게를 견주는 것을 멈추고 내 결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등식에서 완전히 뺀 후에야 가능해진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그럴 만큼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p. 505)

나와 아버지를 가르고 있는 것은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된 자아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그 열여섯살 소녀는 늘 거기 있었다.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두 사람이었고, 내 정신과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소녀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집 문턱을 넘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p. 506,507)


한 사람의 자아가 성장하기까지 이렇게 파란만장 할 수가 있을까. 이것이 정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대에 일어난 일이라니.

새로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타라의 변화를 변신이라 할 것이고, 그녀의 어린시절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탈바꿈이라 할 것이고, 그녀의 동네사람들은 허위라 할 것이고, 그녀의 친족들은 배신이라고 부를 테지만, 그녀는 교육이라 불렀다. 그녀가 스스로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자아는 온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원래 그녀였고 온전한 그녀가 되었다. 타라의 비망록인 이 책은 교육이란 무엇인지 종교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인지 복합적으로 고민하게 했던 특별한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보는 그림 -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김한들 지음 / 원더박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가만히 나를 붙잡아 준 것들



저자의 직업은 큐레이터다. 화가보다도 어쩌면 가장 많은 작품을 보는 사람이 아마도 큐레이터일 것이다. 드라마에서 고급지게 표현되는 전문직 큐레이터가 보는 그림은 어떨지 궁금했다. 저자는 현대미술사와 비평 강의를 하는 교수이기도 하고,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쓰기도 한다.


책을 읽어보니 이제 갓 서른즈음 되었을 법한 나이로 짐작된다. 십대 후반부터 유학생활을 했고, 방학이면 유럽을 여행했고, 졸업 후 바로 취직이 되었으며,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자연이 생각났을때 제주도에 전시관 겸 사무실을 살뻔할 만큼의 경제적 기반이 있고, 한강에 걸어서 혹은 뛰어서 운동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인 압구정에서 싱글라이프를 살고 있는 여성이다. 내가 왜 이렇게 책의 본질적 내용과 상관없는, 책에서 부수적으로 조금씩 어쩌다 등장한 이런 조건들을 늘어놓고 있느냐하면, 처음엔 자꾸 저자의 본심을 외면하고 저자가 가진 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봤던 나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어차피 여유가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 아닌가?! 하루하루 먹고살기 팍팍하고 오늘내일 어찌살지 답답한 일상에 미술이 예술이 끼어들 틈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림을 보고 예술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막상 보고나니 경험하고 나니 그림이 삶에 주는 영향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문자는 말보다 좁고 말은 그림보다 좁았다. 문자로 씌여진 것들에서 행간을 읽는 것보다 말로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나았고, 말로 규정되지 전의 그림들이 주는 생각들이 더 낫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삶의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문제였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그림이 주는 위안이 필요했을 수도 있는데... 잘 몰라도 그림을 보며 느끼는 개개인의 생각들은 다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므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다 혼자보는 것이다.


그림 보는 게 좋아지면서 이런저런 그림관련 책들을 읽었었다. 고전적 그림에 대한 해설서부터 역사적 그림에 대한 풀이가 좋은 책도 있었고, 미술사적 인문학책도 좋았는데, 그림에 대한 해석을 너무 개인기분파로 하거나 상관없는 글과 그림을 엮어내는 책들은 읽기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달랐다.


이 책은 예사롭지 않다. 큐레이터 체험 에세이도, 작품 감상 에세이도 아닌 이 책은, 미술과 시가 일상인 사람, 그가 인용한 화가 모란디의 말처럼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과 주변과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한 기록이다. (p. 4)


문소영 미술전문기자가 쓴 추천사 의 이 부분이,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의 시간이 저녁이면 좋겠습니다' 라는 머릿말의 저자의 말이,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음을 책을 다 읽고 확실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의 스펙들에서 느끼던 내 개인적 삐딱함을 순화시켜줄 만큼 그림을 사랑하는 진심이 있었고, 공감력 떨어지는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그림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적 감성이 있었다. 확 타올랐다가 곧 꺼지는 열정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엮어대는 가벼움이 아니라, 부엌에서 대를 이어 지켜내는 불씨 같은 열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에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는지 차분하게 다가오는 의미감이 있었다.


그리움은 그림, 글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는다' 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긁는다' 는 손톱이나 뾰족한 기구 따위로 바닥을 문지르는 행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종이 위에 형태로 긁어내면 그림, 문자로 긁어내면 글, 그리고 마음 속에 긁어 새기면 그리움이다. (p. 86)


'긁는다' 에서 그림과 글과 그리움이 생겨났다라... 점토판에 기호를 새기고 절벽 바위에 그림을 새기던 것에서 그리움이 나왔던가... 무언가를 남긴다는 행위는 곧 그리움 이던가... 그리움은 추억과는 또다른 느낌의 말이다. 그리움은 애정과는 또다른 느낌의 말이다. '곁에 있어도 나는 네가 그립다' 라는 말처럼 그리움은 저자가 그림을 보며 느끼는 마음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을까.


슬픔이 가진 힘을 믿는다. 앞으로 나아감도 슬픔을 버릴 때가 아니라 슬픔을 안고 극복해 낼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계단이 된다. 그것을 밟고 서서 조금 더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시면 그만이다. (p. 102)


이 책은 우울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큼하지도 않다. 그저 아침의 찬란한 빛보다는 한낮의 환한 빛보다는 저녁의 어스름한 빛을 보며 읽는 것이 어울리는 책이다. 아주 깜깜한 밤이 되기 전의 그 시간의 분위기를 가진 책이다. 별빛이 오기전 노을이 어울리는 그런...


팀 아이텔은 평소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스냅숏을 찍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화면 속 배경과 인물을 점차 간소화하여 절제된 구성의 화면을 만든다. 결국 어디인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보편적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딘가 익숙하고 나와 닮은 듯한 장소와 인물에 자신을 반영하게 된다. 해석의 문은 활짝 열린다. 사실 예술은 우리 삶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 단어로 정의 내리기에는 범위가 넓고 경계가 모호하며 그림으로 묘사하기에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어쩌면 이렇게 축약과 함축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다 말해 주지 않기에 여운을 남긴다. 남아 있는 운치는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내 안에 머문다. 그리고 반복적인 회상은 결국 내가 나아간다는 방증이 되어 준다. 나는 거기서 더 큰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 오늘도 문득문득 떠올려 보는 것이다. (p. 109~110)


책속에 많은 그림이 등장하진 않는다. 4명의 화가의 작품이 조금 실려 있다. 그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작가들의 특성과 그들이 그린 그림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굳이 그림을 보지 않아도 저자가 인용한 몇점의 그림만으로도 왠지 그 느낌이 전달되고 있어서 좋았다. 그중 팀 아이텔 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것이 가장 좋았다.


누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물으면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플라뇌르!

플라뇌르는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 단어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도시의 곳곳을 특별한 목적없이 순간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걷다가 예쁜 빵집이 보이면 가게 앞에 서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피고, 좁은 골목이 보이면 그 끝은 어디일지 몸을 옆으로 뉘어 넣고 걸어가 본다. 빠르게 또는 느리게 걸으며 인상적인 장소는 기록으로 남긴다. 평범해 보이는 순간을 관찰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술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그들을 도시를 몸소 경험하며 그 속에서 미적, 시적 영감을 얻는 자들로 묘사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린 태도가 참으로 부럽고 가지고 싶다. 확고한 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 의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신선하고 새롭게 만드는 힘이 생겨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p. 177~178)


비교적 작고 짧은 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뇌르'적 태도를 이미 갖추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그림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호기심은 그림을 걷는 플라뇌르인 저자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그림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그림에 대한 기대가 늘 샘솟고 그림과 관련된 글을 쓰며 정리하는 생활을 살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본 젊은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가 보는 그림들이 궁금해지면서 언젠가 어느 전시회에서 팜플렛에 저자의 이름이 있다면 그림들을 보기도 전에 그 그림들이 좋아질 것 같다.

 

저자가 좋아하는 화가들인 전병구, 박광수, 카츠의 그림들도 좋았지만,

팀 아이텔의 그림들이 가장 좋았다.

나중에 팀 아이텔 전시회를 한다면 보러 가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가장 꾸준히 한 일은 '니아 먹는일'

본격 나이 탐구 에세이

지금 사는 세상은 젊으나 늙으나 처음 살아보는 세상이다

 

 

저자는 갱년기 안면홍조는 수줍음으로, 가슴 두근거림은 설렘으로 포장 중 이라는 작가이다.

자신의 소개를 이처럼 하는 것으로 책의 분위기는 유쾌한 분위기는 시작부터 드러난다.

다양한 글을 쓰는 작가이고 두 아들의 엄마이자 주부로서 바쁘게 살던 50대 초반의 저자는 몇년전 폐경을 맞은 후 갱년기에 접어든 몸의 쇠퇴에 대해 나이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지금의 생활에 대해 지금의 나이에서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생각들을 적은 글이 이 에세이 집이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호르몬의 흥망성쇠가 뚜렷다다고 볼 수 있다. 평생 생성되는 정자와 달리 난자는 유한개이고 그 유한성의 끝은 폐경이다. 사춘기는 남녀 모두 겪지만 갱년기는 폐경후 여성의 몸과 정신에 어쩌면 사춘기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족적을 남긴다. 딱 갱년기에 접어든 저자의 나이는 이런저런 변화의 시점이다. 50대의 여성이 쓴 에세이를 몇 권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갱년기 삶의 우울함을 떨쳐낸 극복기 처럼 쓴 에세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저자는 일찌감치 자신의 자리를 챙겨가는 삶을 살아왔고 그랬기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갱년기 우울증은 겪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갱년기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저자의 에세이를 시작하는 그림 몇 페이지는 어찌됐든 저자에게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처방약이 필요했음을 저자의 스타일대로 보여주고 있다.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걸 아시는지? '늙다'는 움직임과 과정이지만 '젊다'는 어떤 상태나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늙어갈' 수는 있지만 '젊어질' 수는 없다 (p. 10)

본문 첫 페이지에서 본문 글도 아닌 ( ) 안에 쓰여진 보조문장이 wow 싶었다. 그랬구나...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랐다. '늙다' 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것이, 그래서 늙어갈 수는 있지만 젊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동사와 형용사의 구분이 신선하면서도 굉장히 의미가 강한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중요한 건 '변화'다. 변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변하지 않음'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우정', '한결같은 마음, '언제나 처음처럼' 등등의 말을 여기저기다 마구잡이로 갖다 썼다. 좋은 말,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그런 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게다가 변하지 않는 것이 꼭 옳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음이 아집과 관성, 무기력의 증거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귀찮아서 안 변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변하려면 안 쓰던 것을 신경을 써야 하고 모르던 것을 새로 알아야 한다. '아, 아무일이라도 생겨라' 하는 마음이 젊은 마음이다. '제발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으면' 하면 늙은 것이다. (p. 45~46)

소설과 극본, 시나리오를 두러 써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자의 문장은 재치있으면서 편한하게 읽힌다. 나이들수록 변화는 귀찮거나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꼰대가 되기는 쉬워도 어른이 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변화가 전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변하는 게 좋은 것이 있고 변하지 않아야 좋은 게 있다. 그 구분을 할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변화를 위해 배울 준비가 되있는 자세가 겸손이 아닐까.

나이가 든다 해도 쇠락과 비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채워지는 내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일을 믿으며 오늘을 산다. 연습이란 그런 것이다. (p. 139)

저자는 에너자이저 경향이 있어 보인다. 아들 둘이 고학년이 되었을때 자신만을 위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다양한 운동도 꾸준히 배우고, 그림도 배우며 일정시간은 카페에서 글도 쓴다. 그러한 여력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러한 에너지가 있었기에 남들보다 활기찬 갱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나이들어 가면서 비움보다는 자신을 위한 채움을 하고 있다. 나이든다고 늙어간다고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나이대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온갖 책들이 비움을 강조한다. 뭔 문제만 있으면 비우라고들 한다. 하지만 채워진게 있어야 비울수도 있는 법이다. 바쁘고 열심히 사느라 비워진 내안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나이들어가며 받게되는 선물같은 시간들이다. 누군가를 위한 시간보다 나를위한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을 쇠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할 듯하다.

운동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녔다. 가기 싫은 발걸음을 어떻게든 스포츠센터까지 옮기게 만든 에너지가 뭐였을까?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두 돌 된 애를 어린이집에 맡겼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운동한다고 애를 맡겼으니 그 시간에 꼭 운동해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이 있었다. '엄마가 얼른 몸도 마음도 튼튼해질게. 그래서 더 많이 놀아줄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정신과 약과 비싼 상담 치료 대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p. 155)

두 아들이 어릴때 저자는 우울증을 겪었다. 바쁘고 치이는 반복되는 일상이 하릴 없이 눈물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약은 듣지 않았고 상담은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의사의 권유로 운동을 하면서, 처음엔 그야말로 꾸역꾸역 다니면서 몇년이 지나서야 운동의 건강한 매력이 저자에게 통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저자는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을 하고 이제는 하루라도 빠지면 몸이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적응이 됐다. 그 사이 몸도 정신도 건강해졌다.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 와 초보엄마의 좌절감은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적인 병은 뚜렷이 신체적으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기에 경제적 부담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헛돈 쓰는 것 같고 소용없는 것 같고 그래서 더 나아지지 않는 악순환...

운동이 효과적이고 좋은 것이라는 건 알지만 꾸준히 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신체를 가진 나로서는 저자의 노력에 감탄할 뿐이다. ;;;

나는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살기란 얼마나 불편할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몸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없는 임신부가 이용하기에 대중교통은 얼마나 불친절한지 체험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평안에 손톱만큼이라도 지장을주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지 느끼게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약자, 주변부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 (p. 222)

나는 나이든 싱글이나 결혼한 신혼부부 지인이 생기면 아이를 꼭 낳으라고 조언하곤 한다. 결혼을 했건 안했건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내가 성장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자란다. 신체적 성장이 멈추면서 정신적 성장도 멈추었던 것이,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이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질 텐데...

평범한 사람이 무언가 계속 노력해서 '발전' 이라는 걸 하려면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한다.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재미도 있다. 그리고 재미가 있어야 계속할 수 있다. (p. 248)

완벽주의는 힘들다. 나이들면 더 힘들다. 그래서 나이들면서 좀 덜 하라고 내려놓으라고들 이야기 한다.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룰 꿈을 갖기 보다는 선택적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으나 늙으나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은 삶의 활력소이다. 하고 싶은 것을 잘해서 발전하고 싶은 것은 때로는 에너지가 되고 때로는 강박이 된다. 어느 나이에 무엇을 하던 재미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다.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나도 재미를 느끼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더 잘하고 싶어서 어느 순간 재미는 사라지고 힘들어지곤 하는데, '재미' 를 꼭 염두에 두어야 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마음은 18세 풍랑기 이고 장래 희망은 웃긴 할머니 인 저자의 유쾌 발랄 인생 성장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나이 먹을 수록 소화력도 떨어지는데 나이 때문에 체하면 정말 약도 없지 않겠는가 ㅎㅎ 누구나 공평하게 매년 한살씩 먹는 것 같지만, 그 나잇값을 하기는 쉽지 않다. 약이 없으니 조심해야지. 나이를 자~알 먹어 가는 과정중에 저자의 갱년기 에세이는 따듯한 공감과 편안한 일상을 공유하는 책이라 재밌게 읽었다. 설날 이라는 나이먹는 명절을 보내자마자 이 책을 읽고 나니 왠지 더 쑥쑥 읽히고, 명절의 피곤함도 가시게 해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 나이를 잘 먹어가 봐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통렬한 사회 비판과 해학적 인물 묘사로 만들어낸 가장 '디킨스다운' 소설이자 19세기 최고의 영국문학 완역본

차가운 도시 밑바닥에서 피오오른 선한 용기와 삶의 희망

영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단권 완역본



원전 완역본! 중요하다. 제목이 널리 알려지고 익숙한 책일수록 그 책이 축약본인지 중역본인지 완역본인지 아는 것은 내용 이해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원전 완역본 이라 할지라도 출판사와 번역가에 의해 얼마나 충실하게 번역되었는지도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현대지성 에서 나오고 있는 클래식 시리즈는 무척 반갑다. 익숙한 고전들에 대해 원전을 완역해 내고 있는 이 시리즈는 이전의 번역본들이 했던 실수들을 (원전에서 멀어졌던 번역을 다시 원전에 가깝게)수정하면서 현대적인 매끄러운 문장들로 가독성도 높이고 있었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중 4권 읽어봤는데, 그중 2권은 이전에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봤던 책이서 더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읽었던 4권 모두 좋았어서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어나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이자 영국인이 사랑하는 소설가라는 찰스 디킨스(1812~1870)의 작품을 원전 완역본으로 읽었던 첫 책은 '두 도시 이야기' 였다. 혁명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리와 런던을 오가는 러브스토리이자 역사소설 같기도 한 이 작품은 '가장 디킨스 답지 않은' 소설이라는데, 디킨스의 첫 책으로 읽고나니 내게 작가의 첫인상은 만연체의 지루한 문장임에도 몰입하게 되는 서사적 매력을 가진 소설가였다. 그런데 <올리버 트위스트> 를 읽으며 인상을 확 바꿔갖게 되었다. 완전 호감 급상승!!!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범죄자들과 런던 인구의 하류층에서 선정되었다는 것이 아주 조잡하고 충격적인 설정으로 보일 것이다. 사익스는 도둑이고, 페이긴은 장물아비이며, 소년들은 소매치기에다가, 주인공 소녀는 매춘부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가장 추하고 불쾌한 이야기에서도 가장 순수하고 선한 교훈이 얻어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이것이 널리 인정되고 확립된 진리라고 항상 믿어왔다. 이런 정신으로, 나는 모든 역경에서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선의 원리를 소년 올리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의 보편적 본성에는 최상과 최악의 색조들이 뒤섞여 있다. 상당 부분이 추악한 색조를 띠지만, 가장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자, 변칙이며, 일견 불가능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그것이 의심받는다면 나로서는 도리어 기쁘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상황이야말로 그것이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는 충분한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 ( 저자 서문 中)


디킨스는 서문에서 자신의 의도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하고 있다. 잡지에 연재되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 내면서 그동안의 독자들의 반응을 고려했을 이 서문은 저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구상했고 이런 인물들을 골랐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 의도만으로도 왜 영국인들이 디킨스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동정했다. 이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는 묘비명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디킨스는 누구도 애정어린 눈으로 보지 않았던 계층을 따뜻하게 보고 있던 작가였고, 따듯이 봐줄수 없는 사람들도 그 나름의 개연성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작가였다.


노부인은 지혜와 경험이 풍부한 여성으로, 무엇이 아이들에게 좋고 자기 자신에게 좋은지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주급에서 자기 몫을 더 크게 떼고 난 후, 교구 아이들에게 원래보다 훨씬 더 적은 몫을 할당했다. 노부인은 어떻게든 악착같이 끝을 모를 정도로 아이들의 몫을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뜯어내고 있었는데, 대단한 경험주의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p. 24)


디킨스 만의 풍자와 해학이 어떤 것인지 시작부터 느낄 수 있었던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우리나라 판소리를 생각나게 했다.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 표현방식에 있어 웃음이 나게 하고, 시작을 항상 주변적인 배경설명부터 해서 인물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까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고아 농장' 이라 할 수 있는 어린 고아들의 보육시설 책임자인 노부인에 대한 표현방식은 당시 빈민시설들에 대한 설명과 관리인들에 대한 표현에세 내내 유지되는데 그 반어적 설명들이 그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배로 느낄 수 있게 했다.


낡은 밧줄의 실밥을 푸는 간단한 과정 속에서 교육과 기술이라는 두 가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올리버는 말단 교구관의 지시에 따라 꾸벅 감사인사를 올린 다음, 서둘러 커다란 보호소 건물로 끌려가서 거칠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 축복받은 나라의 자상한 법률에 따른 사례를 어디에서 이토록 고귀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다니! 가엾은 올리버! 올리버는 행복하게도 주위를 의식하지 못한 채 잠이 푹 들어서 생각도 못했겠지만, 바로 그 날 이사회가 올리버의 미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렸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이사회의 신사들은 아주 현명하고 깊은 철학을 지닌 분들로, 구빈원에 관심을 두게 되자 단번에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점인데, 바로 가난한 사람들은 구빈원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빈원은 공공오락을 제공하고 공짜 술집이자 1년 내내 아침, 점심, 저녁, 차를 얻어먹는 곳이니, 놀고먹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은 낙원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사회의 신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구빈원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든가, 아니면 바깥에서 빠르게 굶어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규칙을 세웠다. (p. 32~33)


신랄한 비난보다 비트는 문장이 상황을 더 극적이게 만든다. 어린 올리버의 처지는 더 딱하게 다가오고 구빈원 관계자들은 더 악독하게 다가오지만 그 총체적인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자꾸 나오니 이런것이 풍자와 해학인가 싶으면서 디킨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이 광경을, 배 속에서는 고기와 술이 썩어나고 얼음 같은 피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철학자들이 좀 보았으면 싶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개도 거들뗘보지 않을 진수성찬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말이다. 허기로 잔뜩 독이 오른 올리버가 고기뼈를 갈기갈기 찢어내듯 뜯어먹는 끔찍한 탐욕의 광경을 직접 목도하면 그 감상이 어떨까? 이보다 더 바라는 소원이 딱 하나 있다면 그 철학자도 똑같은 음식을 올리버와 똑같이 탐욕스럽게 먹는 것이다. (p. 59)


어린 올리버가 구빈원에서 장의사 도제로 넘겨져 받은 첫 식사는 살점이 너덜너덜 붙은 고기뼈였다. 구빈원에서는 멀건 귀리죽만 먹었는데, 주인네가 먹고 남긴 뼈다귀부스러기도 걸리버에는 처음 먹어보는 진수성찬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든 이들이 직접 겪어보기를 디킨스는 톡 쏘아붙인다기 보다는 은근히 힐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은 성실한 영국인들이 가장 먼저 당당하게 내세우는 자랑거리이므로, 모든 공적이고 애국적인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이러한 행위가 칭찬받을 만하다는 점을 굳이 독자들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자기 보호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사실은 심오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철학자들이 모든 대자연의 행위와 행동의 주된 원인으로 규정한 공리주의 법칙을 입증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철학자들은 아주 현명하게도 대자연의 절차를 공리와 이론의 문제로 좁혀놓았고, 대자연의 높은 지혜와 이치만을 단순하고 멋지게 칭찬함으로써 감정이나 너그러운 기분, 충동의 문제는 고려대상에서 치워버린 것이다. (p. 142)


올리버가 런던으로 도망쳐와서 소매치기 패거리들에 섞이게 되고 처음 소매치기 현장을 목격했을 때 너무 놀라 달아나다가 도둑으로 오인받아 잡히게 되는데, 이때 정작 소매치기를 했던 소년들은 올리버를 쫒기게 두고 도망간다. 이 상황을 두고 저자는 철학과 사상을 들먹여가며 풀어내는데 그 고급적 비꼬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저절로 피식피식 웃게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작품 전체내내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이런 날에는 굶주림에 지친 부랑자들이 수도 없이 텅 빈 거리에서 눈을 감는다. 이들의 죄가 무엇이건 이보다 더 쓰라린 세상에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터였다. (p. 258)


풍자와 해학 사이 끼어있는 이런 문장들은 순간순간 짧고 굵게 가슴을 파고든다. 웃다가 접하는 참혹함은 훨씬 더 극적으로 비통하게 느껴진다.


"구빈원 밖 구제라는 게요, 잘만 관리하면 교구의 안전 장치가 되지요. 가장 큰 원칙은 극빈자들에게 정확히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만 주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지쳐서 구걸하러 오지 않거든요" 교구관이 우월한 지식을 뽐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p. 262)


비참한 극빈자들의 삶을 우롱하는 극빈자 관계자들의 대화는 갈수록 기가 막히지만, 저자는 결말에 가서 기가막히게 마무리 처리도 깔끔했다.


"그 아이의 이야기 중에서 안 좋아 보이는 부분은 증명이 가능하고, 좋아 보이는 부분은 전혀 증명을 할 수가 없어요" (p. 338)


올리버가 전혀 증명할 수 없는 좋아보이는 부분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안좋아보이는 부분을 증명하던 허울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저자의 스토리구성능력은 탁월했다. 짜임새가 딱딱 들어맞아서 600여페이지 두께의 내용을 지치지 않고 읽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자신감에 찬 사람들만큼이나 가장 천박하고 타락한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약점이 바로 자존심이다. 낸시는 도둑과 악당들의 비참한 동료이자 천한 소굴에 버려진 부랑자였고, 늘 교수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을 오가는 인간쓰레기들과 한패였다. 이렇게 타락한 존재조차도 자존심 때문에 여성스러운 감정을 미미하게나마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낸시는 이런 감정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감정이야말로 낸시에게도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닳고 닳아서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된 인간성이었다. (p. 448)


디킨스가 이 작품의 여자주인공으로 표현한 인물은 낸시 였다. 소매치기일당의 멤버이자 난폭한 사익스의 애인인 낸시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면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밑바닥삶이었던 낸시의 현실적 존재감과 올리버와 엮이면서 순간순간 드러나는 인간애의 비현실적 감정은 디킨스가 논리로 설명되지 않지만 인정할수밖에 없는 감정을 지닌 인물로 내세운 대표적 캐릭터다. 그리고 읽다보면 어쩔수 없다는 낸시의 선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꾸준한 선함의 상징으로서의 올리버보다 더 종교적일 수 있는 인물인 것도 같다. 작품속에서 올리버는 지상에 강림한 천사같은 순수 그 자체 이지만, 타락한 천사같은 낸시를 보며 더 반성적인 삶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엔 올리버로 시작해서 내내 올리버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뒤로 갈수록 주변인물들과 삶이 조명되면서 올리버는 부수적인 존재로 밀려난다. 하지만 모든 사건의 중심엔 올리버가 있고, 모든 사람들의 엮어주는 존재는 여전히 올리버다. 수없이 악한 상황에 내몰리면서도 한번도 악함에 물들지 않는 올리버는 종교적 상징 같기도 하고 현실적 꿈 같기도 하다. 올리버의 환경을 통해 본 당시 극빈자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올리버의 삶을 통해 본 상징적 희망이라도 심어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작품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너~무 깔끔한 마무리라 읽는 내내 무겁게 마음을 누르던 안타까움들이 희석되는 듯 했다. 전에 읽었던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와 <올리버 트위스트> 는 한 작가의 작품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깔끔한 서사구조와 몰입도 높은 전개로 디킨스의 매력을 느끼기엔 둘 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현실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되, 시선이 따뜻한 작가를 좋아하는데 그런 작가 리스트에 디킨스의 이름을 굵직하게 새기게 한 <올리버 트위스트> 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