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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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구 자유의 이야기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소녀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기까지



이 책의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 는 1986년 미국 아이다호서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아버지로 인해 16년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기초 교육 과정을 모두 건너뛴 채로 대입자격시험을치렀고, 17세에 대학에 합격하면서 배움의 과정을 시작했다. 2008년 최우수 학부생상을 받으며 브리검 영 대학교를 졸업했고, 게이츠 케임브리지 장학금 수상자로 지정되어 200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방문 연구원을 지냈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뒤 2014년에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ducated] 는 2018년 출간되자마자 미국 출판계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타라가 태어나고 살았던 아이다호 웜크릭은 초기 아메리카이주민들의 정착지들 중에서 모르몬 교도들의 정착지였다. 종교를 잘 모르지만, 책에서 읽혀지는 모르몬교도들의 모습은 청교도주의의 한 분파인가 싶었다. 극한의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모르몬교는 학교와 병원과 사회체제의 간섭?을 거부하고 그 인위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오직 신의 뜻에 따라 자연적 치유의 힘과 영적 기도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그들 중에서도 타라의 아버지는 광신도였다. 세계의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재산이 생기기만 하면 비상식량과 비상연료를 모으고 그 모아놓는 장소를 넓히는데 집중하면서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절대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지 않고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서 모르몬교성경만 읽는 사람이었다.


첫째 토니오빠는 어린시절이나마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었고 일찍 집을 나가 자립했지만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고 사업에 실패하자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둘째 숀 오빠는 어린시절 학교를 조금 다녔지만 학업보다는 주먹에 소질이 있었고 자립했지만 뒷골목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폭력을 일삼았다.

셋째 타일러 오빠는 스스로 공부를 찾아하는 사람이었다. 음악듣기를 즐겼고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람이었으며 내강외유형으로 타라에게 대입시험과 대학생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넷째 오드리 언니는 청소년기에 마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조금씩 독립을 준비하여 십대후반에 결혼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집안일을 했다.

다섯째 루크 오빠는 아주아주 조금 학교경험이 있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아버지와 한시도 떨어질 새 없이 아버지의 일을 하며 살았다.

여섯째 리처드 오빠는 영특했지만 어려서부터 타라와 함께 형들과 아버지의 압력에 눌려있었으나 타일러의 권유로 대입시험에 통과하며 새로운 삶을 찾는다.

일곱째 타라 는 위의 기억나지 않는 토니오빠와 폭력적인 숀 오빠와 집안머슴 같은 루크 오빠와 공감대 형성할 틈도 없이 독립한 오드리언니 보다 그누구와도 달랐던 타일러 오빠와 친구같던 리처드 오빠의 영향을 받으며 아버지의 광신을 익히며 자랐지만 돌아온 숀오빠의 폭력에 의한 자극과 집을 떠난 타일러 오빠의 새삶에 대한 자극으로 집이 아닌 다른 세상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다.

조울증과 우울증과 조현병 사이에서 어느 항목에 적당할지 모르겠는 아버지의 광신성은 그나마 논리가 있었으나, 숀오빠의 폭력은 종교를 빙자한 사이코패스적 폭력이었고 타라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타라의 가족에게는 다른 세상에 살게된 타라는 악마이고 폭력으로 점철된 숀은 회개만 하면 다 용서되는 일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는... 처음엔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큰 사고 이후 점점 아버지화 되어간다.


타라가 이야기하는 가족사는 정말 이상하고 이상했다. 끈끈한 가족애로 똘똘 뭉쳐있지만 광신과 맹신은 가족이 용납해서는 안될 것까지 용납하게 했고 그러면서도 가족을 끊어내지는 않으며 끊임없이 사랑했다. 이 가족이 속한 모르몬교 사회에서도 이 가족은 희한하고 독특한 가족이었지만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마을의 지도자격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보다보면 생업과 연결되어 있었다.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경제적으로 부모의 사업에 얽혀 있는 넷은 그곳에 머물렀고 셋은 그곳을 떠났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넷과 박사학위를 가진 셋의 틈은 점점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타라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죽을때까지 어머니와 갈등했다. 폭력적이고 성질 급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을 두고 직업을 가지고 직장에 나갔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죽을때까지 유지했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된 선택을 죽을때까지 자극했다. 모르몬교 집성촌에서 만난 타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십대 초반에 결혼을 했고 어머니는 외가와 연을 끊다시피 해야 했다. 타라의 아버지가 토니를 스물 둘에 낳았고 숀을 낳을때는 병원이 아닌 산파를 고용했으며 루크를 낳을때부터는 출생신고를 하지 않기로 했고 서른살이 되었을때 아들들을 학교에서 그만두게 했다. 4년 후 전화를 없앴고 운전면허 갱신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보험에 드는 것도 중단했다. 그리고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마흔살이 되던해 위버가사건에 대한 인식왜곡으로 인해 그의 머릿속은 내내 종말과 전쟁으로 치달았다.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극히 병적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병증에 물들어 갔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결정들, 사람들이 함께 또는 홀로 내리는 결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하나의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들이 한데 뭉쳐 퇴적층을 만들고 바위가 되듯이. (p. 75)


웜크릭은 여전히 있고 모르몬교도 여전히 있을 것이며 타라의 가족들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타라와 그 가족이 내린 그 선택들이 모두 합쳐져서 그들의 가족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들이 포함되어 만들어진 모르몬교의 흐름은 미국의 퇴적층 일부를 쌓아올리고 있을 것이다. 전에 읽은 <면역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면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냥 논리로서만 파악했는데 지금와보니 종교가 들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미국사회의 중심이 유대교세력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타라의 아버지는 종말을 대비해 다양한 최신 총기류도 모으고 있었다.


우리집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온전히 혼자서 방향을 찾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맡은 일을 끝내면 뭐든 혼자 배울 수 있었다. 우리 중 비교적 자기 조절이 더 잘되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가장 그렇지 못한 아이들중 하나였다. 그래서 열 살이 되도록 내가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은 유일하게 모스 부호뿐이었다. 내가 그것을 꼭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가 고집했기 때문이다. <전화선이 끊어지면 이 동네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우리 가족밖에 없을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늘 모스 부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우리뿐이라면 도대체 누구랑 의사소통을 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p. 85)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 타고나는 것에 대해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같은 환경에 있었지만 누구는 의문을 가졌고 누구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의문을 가졌던 사람은 앞으로 나아갔으나 의문을 갖지 않은 사람은 머물거나 되돌아갔다. 늑대소년 이야기도 생각났다. 아기때 숲속에 버려졌던 소년은 끝내 사회화 되지 못했다. 중세 어느 왕이 했었다는 실험?도 생각났다. 아기들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줬을때 타고난 언어능력을 보려던 그 시도는 모든 아기들의 죽음을 불러왔다. 혼자서 방향을 찾는 다는 것도 기본적인 양육이 있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타라는 광신적 종교가정이었으나 버려진 아이는 아니었다. 타라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일을 시켰다. 폭우가 쏟아질때 나무에 물을 주는 일이라도 시켰다. 하지만 비록 모르몬교역사서만 읽을지라도 긴긴시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붙들고 있었던 그 끈기가 말로 저자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드디어 12월 31일이 됐다. 아침 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침착했지만, 그 평온함 뒤에서 나는 흥분감, 염원 같은 것을 감지했다. 몇 년 동안 총을 땅에 묻고, 음식을 비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할 것을 경고함녀서 지내 오지 않았던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예언서를 읽었다. 그들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를 놀렸고, 비웃었다. 오늘 밤이면 그동안의 오명을 씻울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12시가 됐다. 텔리비전은 여전히 웅웅거렸고, 거기서 나오는 빛이 카펫 위에서 춤을 췄다. 나는 우리 시계가 빠른 걸까 생각했다. 부엌으로 가서 수도를 틀어 봤다. 물이 아직 나왔다. 아버지는 꼼짝 않고 앉아서 텔리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12시 10분. 나는 텔리비전 화면이 깜빡거리다가 꺼지기를 기다렸다. 이 마지막 사치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몇 초 후, 세상이 뒤집혀서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기 시작하면 잃게 될 이전 삶에 대한 향수에 벌써부터 젖어 들었다.

향수는 피로감으로 변했다. 1시 30분이 조금 지난 후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버지를 흘낏 봤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보다 더 작아 보였다. 온몸에 깃든 실망감이 너무도 아이 같아서, 순간적으로 신은 어떻게 아버지의 소원을 이렇게 외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버지와 같은 충실한 종, 노아가 방주를 짓기 위해 자진해서 고통을 받았듯, 그렇게 주님을 위해 고통을 자처한 아버지의 소원을 말이다. 그러나 신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p. 149,150,151)


아버지의 종말론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광신은 더 굳건해졌고, 교통사고로 아내가 뇌진탕을 겪어도, 건설현장사고로 아들이 떨어져 뇌를 다쳐도, 화재로 아들이 다리전체에 화상을 입어도,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의 뇌수가 밖으로 흘러나와도 아버지는 그 누구도 병원에 보내지 않았고 자신이 화재에 얼굴이 녹아내리고 손가락이 뒤엉켜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때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 모든 큰 사고들에서도 누구하나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은총이 되고 신의 목소리가 되어 곧 그 자신이 영적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온갖 약초와 오일을 제조하고 먹이던 어머니는 그 마을의 치료사이사 경제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영적 존재의 아내가 되었다.


립글로스를 처음 발랐을 때 숀 오빠는 나를 창녀라고 불렀다. (p. 187)

열다섯살쯤 되었을 때, 마스카라와 립글로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숀 오빠는 아버지에게 읍내에 나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 즉시 내가 임신했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나는 남자애와 입을 맞춰 본 적도 없었다. 임신이 어떻게 되는지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고함을 질러 대는 중에도 무지가 내 입을 막았다. 그들의 질책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변호도 할 수 없었다. 며칠후, 내가 임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 나는 <창녀>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보탰다. 이제 <창녀>라는 단어는 행동보다는 본질에 관한 묘사가 됐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숀오빠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내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를 규정해 줬다.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p. 315)

어릴 때 나는 때가 오면 신이 일부다처제를 다시 부활할 것이고, 내세에는 나도 여러 명의 아내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배웠다. 나의 자매 아내들의 숫자는 내 남편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더 숭고하게 산 사람일수록 더 많은 아내가 주어질 것이다. (p. 383)


책을 읽을 수록 모르몬교는 이슬람교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종교 다 잘 모르지만, 가부장적 남성의 권위와 일처다부제의 당연성과 모든 이가 지극히 종교적 삶을 일상으로 하면서도 여성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종에 가까운 그런 면과 무엇보다 여성의 순결에 대한 인식이.... 숀은 타라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살인직전상태까지의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부모는 그것을 폭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믿는 신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우리 가족이 읍내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교회에 가긴 하지만 종교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했다. 다른 사람들은 겸양을 <믿었지만> 우리는 실천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치유 능력을 <믿었지만> 우리는 주님의 손에 치유를 맡겼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믿었지만> 우리는 실제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우리 가족만이 진정한 모르몬교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대학, 이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 간극의 거대함을 실감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우리 가족과 함께하지 않으면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었다. 그 사이에는 발을 걸칠 자리가 전혀 없었다. (p. 254)


저자가 처음 입학한 대학은 모르몬교도들이 다니는 대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저자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것은 집을 떠나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그녀가 집을 떠나올수 있었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또한 그들의 신이 내린 선택 아닐까? 타라가 아버지의 말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신의 뜻일까?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그들의 저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 편견이 가미된 주장들을 서로 교환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내가 배운 역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운 역사와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p. 373)


저자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저자가 알아왔던 세상을 이해하고 저자가 알아가야 할 세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학문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저자가 자신의 생각과 위치를 선택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지침일 것 같다. 역사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곧 저자 자신을 연구하고 배우는 과정이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 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려 목을 눌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새로운 역사를 썼다. 과거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했다. 무게를 지닌 것은 미래뿐이었다. (p. 424)


타라는 자신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지만, 그의 가족도 그녀를 악마의 소굴에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의 가족은 하나둘 그녀 대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는 그녀의 부모에게 굴종하고 타라에게 등을 돌렸다.


언니를 잃었을 때 나는 가족 전체를 잃었다. 아버지가 오빠들도 모두 방문해서 언니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부인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모르는 이방인의 주절거림과 다름없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내가 너무 멀리 와버렸고, 너무 많이 변해 버렸고, 그들이 여동생이라고 기억하는 무릎에 딱지 앉은 어린 소녀와 너무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언니가 나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역사를 뒤집을 희망은 거의 없었다. 내가 교육을 받기 위해 치르는 대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화가나기 시작했다. (p. 454~455)


숀에게 같은 폭력을 당했던 오드리는 타라에게 이제라도 바로잡자고 먼저 제의를 했었다. 하지만 오드리의 시도는 실패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하게 장악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타라의 시도는 시작도 못하고 좌절됐다. 결과적으로 타라는 타지에 떨어져 있는 이방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쪽 가족을 잃자 저쪽 가족을 얻었다. 모두가 다 아버지와 엮여 있지는 않았다. 특히나 타일러는 광신도 집단 가족이 아닌 공부하는 동생인 타라의 말을 믿어주었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p. 471)

오래된 불만들을 끊임없이 들먹이며 탓하기를 멈춘 후에야, 아버지의 죄와 내 죄의 무게를 견주는 것을 멈추고 내 결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등식에서 완전히 뺀 후에야 가능해진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그럴 만큼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p. 505)

나와 아버지를 가르고 있는 것은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된 자아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그 열여섯살 소녀는 늘 거기 있었다.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두 사람이었고, 내 정신과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소녀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집 문턱을 넘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p. 506,507)


한 사람의 자아가 성장하기까지 이렇게 파란만장 할 수가 있을까. 이것이 정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대에 일어난 일이라니.

새로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타라의 변화를 변신이라 할 것이고, 그녀의 어린시절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탈바꿈이라 할 것이고, 그녀의 동네사람들은 허위라 할 것이고, 그녀의 친족들은 배신이라고 부를 테지만, 그녀는 교육이라 불렀다. 그녀가 스스로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자아는 온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 원래 그녀였고 온전한 그녀가 되었다. 타라의 비망록인 이 책은 교육이란 무엇인지 종교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인지 복합적으로 고민하게 했던 특별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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