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중산층 사회 -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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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고도성장의 끝, 세습 자본주의가 시작됐다!

 

 

82년생 김지영에게도 완벽히 공감하진 못했었다. 하물며 90대생, 젊다기보다 어려보이는 그들의 생각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회격차는 심화되고 민주주의의 시도는 시끄러움으로 피곤해지는 가운데, 늙어 사라질 세대의 목소리가 여전히 큰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현역이 될 90년대생들의 처지를 좀더 이해하고 싶었다. 기성세대가 보기엔 하나같이 자신들보다 모든 면에서 누리고 자란 세대인데 뭐 그리 불평불만이 많은지 견뎌보라 호통치고, 이러한 꼰대들의 잔소리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무시하는 젊은세대의 간극을 좁히려면 그들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필요했다. 이 책이 그 초석이 되어주길 기대했다.

20대의 불평등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삶이 평등하지 않다는 데 있지 않다. 불평등이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다차원적이라는 질적 특징에 있다. 그 불평등은 학력·소득·직업·인맥·문화적 역량의 복합적인 결합으로서, 부모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격차가 그대로 자녀의 인적자본 격차로 체화되는 것이다. 흔히 이 격차는 능력의 격차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출신 계층의 격차라는 사실을 '나머지' 게층에 속한 오늘날의 '20대'는 삶의 단계마다 피부로 깨친다. (p. 5)

이 책은 거의 논문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프롤로그에 대강의 핵심적 주장들이 들어있고, 앞으로 풀어낼 글의 구성을 알려주며, 에필로그로 본문에 미처 담지 못한 번외적 마무리주장으로 맺고 있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용자료들과 세세히 구분되는 소단원들은 글의 뼈대를 이루면서 정리를 하고 있기도 했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문제의식은 이 책의 결론에 벌써 근접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본질은 부모 세대인 50대 중산층의 학력(정확히는 학벌)과 노동시장 지위를 바탕으로 그들의 자녀에게도 동일한 학력과 노동시장 지위를 물려주는 데 있다. 세습 중산층의 자녀가 '번듯한 일자리'를 독식하는 게 2019년의 20대가 1999년 또는 2009년의 20대와 다른 점이다. 이렇게 심화된 '격차 고정'은 결혼, 주택 등 생애주기에서의 기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p. 12)

세습은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문명이 기록하는 모든 역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세습은 이루어져 왔다. 다만, 공식적인 계급이 사라진 것이지만 계급이 사라지면서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재분배된것은 아니기에 세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식에의 평등은 물질적 평등을 추구했고 그 해소되지 않는 불평등이 세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회가 변한만큼 획득의 방법과 평등의 방법도 변해왔다. 그러나 평등을 경험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내부자와 외부자의 극심한 차이는 중세 유럽 도시의 '성 안 사람'들이란 표현에서 '부르주아지'라는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가 나왔던 것을 연상케 한다. 부르주아지는 원래 중세 성벽에서 귀족이 거주하는 내성과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외성 사이 지역에 거주하는 상공인, 법률가, 의사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중세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하자 이들은 농민들과 다른 전문적 지식과 재산을 갖는 하나의 집단으로 일컬어졌다. 또 중세시대 성 안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고 봉건적 인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성벽 안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재산 및 거주 기간등을 동료 부르주아지 집단으로부터 까다롭게 심사받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기업 정규직, 공무원등이 되는 것이다. "일자리의 양이 적은 것이 아니라 번듯한 괜찮은 일자리 창출이 적은것" 이 숨겨진 '진짜' 문제였던 것이다. (p. 32)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는 노동자와 vs 관계에 있는 명칭이었다. 자본을 가진 자와 못 가진자의 구분이었다. 자본은 왕권처럼 세습되었고 부르주아는 거대자본 소유자 처럼 여겨졌다. 그러한 거대한 세습은 눈에 띄어 누구나 알고 암묵적으로 혹은 어쩔수 없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애초에 부르주아지는 조금 가졌고 조금 다른 계층이었다. 지금의 중산층 이랄까. 그 중산층 세습의 문제는 일상에서 쉽게 체험되는 만큼 더 심각하게 다가올 수 있는 세습문제였다.

지금과 같은 노동시장의 극심한 이중 선별 구조가 형성된 것은 200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1980년대생부터라고 할 수 있다. (p. 37)

일반계 고교 진학 증가는 고교 졸업 학력으로 취업 가능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나타난 결과다. 대학 학력을 갖추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다. (p. 48)

2010년 이후 노동시장에 진입한 80년대 후반생 또는 90년대생은 이전과 비교해 대기업 일자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특히 일반 사무직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줄어들었다. 취업 희망자들이 최우선 목표로 삼는 대기업-일반 사무직의 안정된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경쟁은 이전보다 더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p. 65)

 

성장만 하던 경제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 성장속도에 맞추어진 다른 것들의 속도는 늦추기가 힘들었다. 삶의 수준에 대한 눈이 높아졌고, 교육기회는 확대되었으나 평균이 왜곡하는 질적 차이는 더 벌어진 상태였다. 취업자수에 맞춰 교육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문제는 더욱 커졌다. 고학력이 될 수록 임금에 대한 기대는 높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악순환은 시작되었다. 치열한 경쟁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취업경쟁에서 입시경쟁에서 초중등교육까지...

문제는 여성 몫 증가와 남성 몫 감소가 2010년 이후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페미니즘 이슈'에 중산층 남성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그들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 악화가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p. 79)

'질 좋은 일자리'가 지방에 있어도 가장 좋은 몫은 서울 명문대 졸업생의 차지인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서울 소재 명문대와 지방대의 위계질서는 엄격하게 유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 100)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이래 빼앗기고 저래 빼앗기는 느낌은 실제로 그것이 빼앗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30대만 해도 개천의 가재, 붕어, 개구리들에게 어느 정도는 열려 있던 서울 4년제 대학 진학 기회가, 20대에게는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부모가 고졸-블루칼라일 경우 자녀의 서울 4년제 대학 입학 확률은 30대에 비해 20대에게서 극히 낮아졌다. 초대졸-판매직이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p. 120)

여러 차례 언론 기사로 알려졌다시피 사교육 산업은 80년대 학번 운동권들의 호구지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의 대치동을 만들었다. 대치동이 한국 교육산업의 실리콘밸리 같은 입지를 확고히 한 결정적 계기는 2000년대 초에 이루어진 '쉬운 수능'과 '논술 강화'였다. 전직 운동권 출신들이 대학교 재학 당시 '세미나'하듯 학생들을 가르치는 논술학원이 급격히 세를 불려나갔다. (p. 128)

아버지 학력이 높을수록, 그리고 부모 소득이 많을수록 자녀의 자기학습 시간이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하게 관찰되었다. (p. 142)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개천에서 가재나 붕어라도 나오곤 하던 것도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한다. 교육환경은 곧 개천이 되었다.

성실성, 성취동기, 자존감 등 '품성' 이라고 이야기 되는 비인지적 능력 격차가 부모의 계층에 따라 발생함을 보여준다. 흔히 이야기 하는 '집안 좋은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속설은 정말로 참이다. 양육환경이 좋은, 즉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학력이나 직업 등 사회적 지위도 뒷받침되는 계층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는 인지적 능력뿜만 아니라 비인지적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대치동 학원가 등을 통한 교육 투자는 결실을 맺는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다. 계층이다. (p. 144)

아직은 이렇게 단정짓고 싶지 않다 나는. 개천은 없어졌지만 노력은 아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확실한 결실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미 가진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개인의 능력과 의지와 노력에 따른 결실이 아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직은.

한국에서 90년대생들은 전문직이나 대기업 일자리를 가진 부모가 확보한 경제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명문대 졸업장과 괜찮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의 자녀 세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이 이전 세대가 경험한 불평등과 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p. 147)

달라졌다. 달라지긴 했다. 누리고 자란 만큼 욕심이 있을 수 있을텐데, 삶의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더 높아져 있을 텐데, 그러한 상황에서 맞닥뜨린 현실이 더 좌절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세습을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느낀 첫 세대 90년대생들의 다양성은 당연한 결과인듯 하다.

중산층이나 중상위층 출신 여성들은 자신의 계층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중간 이하 계층 출신 여성들은 "결혼을 해도 경제적으로 지금의 삶보다 나아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혼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양상이었다. (p. 163)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비혼과 미혼율 이 높아져 가는 것이 경제적인 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돈만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경제적 안정 말고도 많이 있다. 그 다른 행복들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텐데...

'586'이란 단어는 단순히 세대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80년대 '학번'인 60년대생으로 대기업 화이트칼라로 일하는, 세습 중산층의 첫 세대를 가리키는 계급적 지위를 의미한다. (p. 181)

 

586 세대가 정치판에서만 의미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혁명을 이끌어낸 세대는 자식들에게 혁명을 가로막고 있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1960년대생이 맞이한 '기회'는 1970년대 중후반 중화학공업화와 그에 따른 경제 구조의 고도화에서 시작됐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전문·기술직이나 관리직 수요가 늘어났고, 이 자리들은 1980년대 전후해 대학에 입학하고, 1980년대 중후반 졸업한 인력들로 채워졌다. 흔히 이 세대의 높은 대학 진학률에만 주목해 '대졸자가 늘었기 때문에 그만큼 계층화가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노동시장이 기업 등 민간의 노동수요에 의한 일종의 '파생시장'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잇다. (p. 186,187)

중상위층의 소득 몫 증가는 수출 대기업의 급격한 성장과 그로 인한 도시 화이트칼라 또는 전문직 급여생활자들의 소득 증가가 원인이었다. (p. 199)

 

대졸자가 늘어서 계층이 분화된 것이 아니라, 대졸자에 대한 기업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에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것이라는 지적은 의미있게 다가왔다. 결과를 중심으로 해석하다 보면 의외로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곤 한다. 원인파악은 반드시 필요하다. '승리의 역사'가 함께했던 60년대생의 근로생애는 성장기이자 황금기였지만 그 승리가 이루어진 결과를 누리고 자란 세대가 성취해야 할 승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쥔 세대는 승리감을 만끽했지만, 최초가 남아있지 않은 세대는 방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개인의 능력 차이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사회가 어느 정도 메워주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30~50대는 계층에 관계없이 균질한 답을 내놓은 반면, 20대는 출신 계층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장을 드러냈다. (p. 225)

중상위층 20대는 동일 계층 여성과 명문대 진학과 번듯한 일자리 취업을 놓고 예전보다 격렬한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분노한다면,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사회경제적 약자로 살아가는 20대는 연애와 결혼시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약자'라는 현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분노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경우에도 명문대를 나오고 남성 못지 않은 능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남성 우위인 사회에 분노하는, 진정한 능력본위 사회를 희구할 수밖에 없는 중상위층 여성과 여성 차별적 노동시장에서 월200만원을 밑도는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중층적인 차별을 겪는 하위층 여성 사이에서 젠더 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같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p. 245)

20대라는 연령대는 청년이라는 말 하나로 포괄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소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노동시장 진입을 전후로 하는 생활세계의 경험이 상이하다. 20대라는 연령 집단도 각기 다른 소집단으로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게 더 현실에 들어맞는 인식일 것이다. 요컨대 그럴듯한 '담론'을 정교한 '실증'으로 대체할 시기가 온 것이다. (p. 246)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세대별 주요 특징은 청년층 장년층 노년층이 됐건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가 됐건 크게 묶어 하나의 의견으로 표현되곤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20대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을 듯 하다.

지금의 20대가 586세대의 정치 기획에 냉소를 보내는 것은 단순히 '세대 차원의 기득권'을 가졌거나 '상류 계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공정한 게임의 핵심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p. 263)

현재 20대들은 앞으로 상당 기간 정치적 선호가 형성되지 않은 비면역 유권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30대 중반 정도가 되는 2022년 대선이나 2024년 총선을 전후로 해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불만과 비당파적 성향이 강한 유권자 집단이 이슈가 될 것이다. (p. 266)

 

세대별 의견으로 묶여지지 않는 지금의 20대는 지금의 노쇠한 정당들을 갈아치울 첫 세대가 될 것 같다. 비당파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기존 정당들의 순서가 뒤집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새로운 정당에 대한 출현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경제에서는 주류가 되기 힘들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끌어낼 최초의 세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90년대생 또는 2000년대생들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세대이지만 정작 능력에 걸맞은 대우는 받지 못하는 불우한 세대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곤 했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자랑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결혼을 꿈꾸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이러한 종류의 담론은 왜 교육 투자가 급증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살펴보지 않고 단순히 '교육의 확대' 정도로 언급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부모 또는 교육의 당사자인 자녀들이 왜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과 시간을 교육 투자에 투입하느냐다. 그것은 성장률의 급격한 하락 또는 저성장기 진입과 연결짓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보다 더 늘어난 인적자본 투자와 한정된일자리 사정이 맞물리면서 결국 인적자본 투자의 군비 경쟁 강도는 강화된다. 그리고 그 군비 경쟁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중상위층과 나머지 계층의 격차는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p. 279)

국내세습은 진화하여 해외로 진출했다. 이제 정말 중상위층 계층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해외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이 빠져나갔다고 해서 빈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를 가진 사람도 열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지라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이라도 세습시켜주기 위해 부모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세습을 끊을 수 없다면 격차를 줄이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지금의 불평등이 상위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의 격차뿐만 아니라 상위 10퍼센트와 나머지 90퍼센트의 심각한 격차 문제에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세습 중산층은 그 격차를 '능력의 차이'로 포장하며, 자신의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계층 지위를 물려주고자 노력한다. 그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사회적 계층이동을 가로막는지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 해결의 단초가 있을 것이다. (p. 292)

우리가 몰랐을까? 저 먼나라 같은 상위1퍼센트 뿐만이 아니라 상위 10퍼센트라는 중산층의 세습을? 세습이 과연 상위10퍼센트에서 그칠까? 아니다. 얼마나 물려주는지 어떤것을 물려주는지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세습은 어떤식으로든 이루어져 왔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서 해결하지 못해 왔을까? 너무 잘 알아서 이용해온 것이 아니고? 해결의 단초는 이해를 넘어 공평의 기준정립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불만족은 불평등을 낳지만 만족은 인정을 낳기 마련이므로...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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