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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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 서평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라 작가가 누구인지 처음엔 몰랐다. 그리고 얼마전 정식 출판된 소식을 통해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이금이 작가는 동화책에서 익숙했던 이름이었다. 아니 동화책이라기엔 좀더 깊은 감동이 있는데 뭐라고 해야하나....흐음...

여하튼, 짧지만 진한 여운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던 작가의 긴~ 스토리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봤는데... 정말 놀라웠다.

놀라운 몰입력!

시작하자마자 한페이지한페이지 놓치기가 아쉬워서 잠시잠깐씩 책을 내려놓아야 할때마다 마음이 급했다. 어서 다음장을 읽어야 하는데 싶어서.

드라마적 몰입력의 힘이 정말이지 대단히 강한 작품이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때, 뻔하다 흔하다 싶으면서도 어느새 마음졸이며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고 스스로를 촌스럽다 생각하면서도 울컥하며 눈물흘리고 좀 신파적이다 생각하면서도 저절로 몰입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렇게 가슴떨리게 빠져들고 진한 감동에 먹먹해지는 드라마들이 있다. 이 소설이 그랬다.

가제본 표지에 적혀 있는 키워드가 #하와이 #여성연대 #100년전 #세여자이야기 #놀라운몰입도 인 이유가 있었다. 딱 그랬다.

일제강점기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노동자로 건너갔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그 노동자들과 결혼한 사진신부들의 이야기인 이 작품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인생 그 자체였다.

"맞습니더. 미국 땅인데 섬이라 카데예. 거 가면 돈을 쓰레받기로 쓸어 담는다 캅니더. 그뿐아이라 옷이고 신발이고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어가 맘에 드는 기를 따서 입고 신으면 된다 캅니더. 날씨는 또 우떻고예. 사시사철 늦봄맨키로 따시니 겨울옷이 필요없다 아입니꺼" ( p. 7)

김해의 작은 산골마을에 종종 들르던 보따리 장수가 '포와'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열여덟살 버들이는 의병이던 아버지를 잃고 일본군 말발굽에 오빠도 잃고 동생들과 어머니와 힘겹게 살아가던 때였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고 의병의 딸로 결혼은 더더욱 먼이야기 같았는데, 포와로 시집가면 공부까지 할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설렌다.

여자가 한번 시집가면 그 집에 뼈를 묻는 게 조선의 법도였다. 버들은 홍주를 생각하면 바늘에 손이 찔려 피가 번진 자수보가 떠올랐다. 아무리 수가 잘 놓였어도 피가 묻으면 쓸모없어진다. 홍주는 잘못도 없이 한순간에 피 묻은 자수보 같은 팔자가 된 것이다. ( p. 14)

버들의 가장 친한 친구 홍주는 양반족보를 산 마을부잣집의 귀하게 자란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진짜 양반가문과 혼사를 맺고 싶었던 아버지에 의해 만난 신랑은 병든몸이었고 결혼한지 몇달만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오게 된다. 홍주어머니는 버들에게서 들은 '포와'이야기에 자신의 딸을 사진신부로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내는 조선이 왠수다. 힘없는 나라 때민에 남편도 잃고 자식도 잃은 기라. 포와는 조선이 아이니까네 지킬 나라도 없을 거 아이가. 거 가서는 오로지 느그 생각만 하면서 신랑캉 얼라 놓고 알콩달콩 재미지게 살그라. 그기 오직 내 소원이다" (p. 36)

"애기씨들도 여서 더 낫게 살 수 있으면 뭐 할라꼬 부모 형제 떨어져 그 먼 데로 가겠습니꺼. 여서 지대로 몬 살겄어가 새 시상 찾아가는 기 아입니꺼?송화한테 측은지심 품고 여서도 포와 가서도 동기맨키로 잘 지내이소. 나이도 동갑이라예" (p. 44)

딸 앞에서 모질게 마음먹고 말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마음에 품은 버들과 허울뿐인 조선의 법도를 벗어나려는 홍주는 무당의 딸로 손가락질 받으며 자란 송화와 함께 하와이(=포와)로 가는 배에 오른다. 셋 다 포와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지만, 조선에서 살기 힘든 처지를 단박에 없애주는 낙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진신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게 구년째야. 대부분 우리 여관에서 묵었어. 다들 처음엔 초상난 것처럼 울고, 돌아간다고 난리를 쳐도 결국은 그 신랑하고 살아. 돌아갈 여비도 없고 결혼 안 하면 여기서 쫓겨나는데 어쩌겠어. 색시들도 여기까지 왔으니 신랑이 성에 안 차도 마음 붙이고 열심히 살아. 그럼 좋은 날 있을 거야" (p. 86)

낯선 땅에서 만난 사진신랑들은 사진과 너무 달랐다. 나이도 속였고 재산도 속였고 사는 형편도... 모두 다 속였지만... 이미 혼인신고가 된, 그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남편이었다. 결혼식은 초상집처럼 울음바다였다. 그렇게 눈물 속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농장주들은 대규모로 농사지어 설탕과 파인애플을 수출했다. 하와이가 미국령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출할 때 높은 관세를 물지 않기 위해서였다. 농장주들은 처음엔 원주민을 노동자로 썼는데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을 고용했지만 그들은 뜨거운 날씨와 힘든 노동을 견디지 못했다. 농장주들의 눈길은 아시아로 향했다. 처음 불러들인 중국인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자 대부분 농장을 떠나 미국 본토로 갔다. 그다음에 온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 또한 계약 종료 후 본토로 가거나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자주 벌였다. 조선인 노동자는 1903년에 첫발을 디뎠다. 그 뒤 이민이 금지된 1905년까지 칠천명 넘게 왔지만 이십만 명이 넘는 일본인 노동자에 비하면 적은 수 였다. (p. 89)

"교회에 가면 세상 돌아가는 일도 듣고, 조선 소식도 알고, 또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있으니까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 (p. 91)

하와이에 노동자로 간 사람들은 스스로의 선택이지 강제징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만하진 않았다. 농장주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가혹하게 일을 시켰고 힘없는 나라의 노동자들은 나라를 뒷배로 둔 파업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뼈가 으스러져라 노동해서 스스로 기반을 닦아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의 상황은 나빠져만 갔고 해외노동자들의 구심점엔 교회가 있었다.

"내사 마 조선에 돌아갈 맘 없다. 여거 내 딸들 맘껏 핵교 보내고 자유껏 살 기다. 조선한테 쥐뿔 받은 기 업지만서도 내가 와 발 벗고 나서는가 하면 고향 떠난 우리한테는 조선이 친정인 기라. 친정이 든든해야 남이 깔보지 몬한다 아이가. 일본인 노동자들이 툭하면 파업하는 기 우째서겄노. 힘센 즈그 나라가 뒤에 떡 버티고 있어가 노동자들이 하올레하고 맞짱 뜰 수 있는 기다" ( p. 197)

"내사 마 여 올 때는 내한테 해 준 기도 없는 그깟 조선 망해 삐리든 말든 상관없었는 기라. 그란데 아를 놓고 보이 그기 아이데. 나라가 일본한테 맥혀가 있으면 내 자식도 곁방살이 하는 집 얼라 맨키로 평생 주눅 들어가 살 기 아이가. 당장 밥 한 숟갈 들 묵어도 독립하는 데 힘을 보태야 않것나. 까막눈 무지랭이도 조선 사람이면 다 그레 생각한다 아이가" (p. 232)

하와이에 노동자로 살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면서 버들은 나라에 대해서도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하와이에서도 독립운동은 전개되고 있었다. 지금도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외국나가면 다 애국자 된다고 ㅎㅎ 그냥 여행하러 외국나갔을때도 외국에 있다는 것 자체가 조국에 대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물며 일제강점기때는 오죽했을까.

하지만...

"가시아바이나 정호 오삼춘 목숨 헛되지 않게 할라믄 반다시 싸워야 하갔구만. 내레 자식 앞에 당당한 아바지가 되고 싶어. 정호가 낸중에 아바지는 그때 어디세 뭬 하고 계셨댔시요, 하고 물으믄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간? 내레 지금 안 가면 평생 후회하믄서 살기야. 그럴 수는 없지 않네. 정호야, 아바지레 일본놈 싹 다 무찌르고 나라를 되찾아 올 테니까니 오마니하고 씩씩허가 잘 지낼 수 있지?" (p. 269)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의 삶은고됐다. 사진신부들의 삶이 신랑들과 나이차이만으로 우울했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중에는 건실하게 삶을 꾸려가는 사람도 있어지만, 술과 도박과 폭력을 일삼는 노동자도 많았다. 타지에서 어린 신부들이 맞이한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물며 버들의 남편인 태완은 그와중에 독립운동에 몸바치고 있었다. 이래저래 여성들의 삶은 어머니의 삶으로 점철되면서,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강인한 생명력 그 하나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갔다.

와히아와의 한인 교회는 두 개였다. 원래부터 있었떤 감리교회와 이승만이 세운 기독교회. 감리교단과의 갈등으로 호놀룰루에 한인기독교회를 세웠던 이승만은 한인이 많이 사는 와히아와에도 교회를 열었다. 와히아와는 동지회 회원들의 단결력이나 이승만을 향햔 충성심이 호놀룰루보다 더 강한 곳이었다. ( p. 281)

버들은 동지회 사람이 독립단 사람을 만나거나 교류를 하면 벌금을 물리다는 홍주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냥 만나면 얼마, 깊은 교류를 하면 얼마 하는 식으로 벌금 액수까지 매겨져 있었다. ( p. 288)

독립을 향해 힙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이승만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우상화하며 충성심을 열성적으로 표현했고 반대파에 대한 폭력도 서슴없이 행했다. 버들은 그 어느 교회에도 다니지 않았으나, 함께 사진신부로 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승만교회에 다니면서 버들에게 등을 돌렸다.

"첨엔 과부 돼가 어진말로 돌아왔을 때 젤로 싦었던 기 사람들 한테 동정 받는 기였제. 인자 서방한테 소박 맞았다꼬 혀 차고 수군거려 쌓아 가기 싫다. 그라고 사업할라 카면 어느 한쪽에 발 담가가 있는 기보다 자유로운 기 낫다 아이가. 버들아, 우리 열심히 돈 벌어가 부자 되자" (p. 303)

우여곡절끝에 버들과 홍주는 세탁소사업을 벌이게 되고 송화도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셋이 함께 행복했던 시간은 짧았다. 너무 짧았다. 그간의 기나긴 고생들에 비하면 정말 너무 짧았다...

젋은이들 뒤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바다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파도처럼 살아 있는 한 인생의 파도 역시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다. 버들은 홍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저쪽에서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송화를 바라보았다. 함께 조선을 떠나온 자신들은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 ( p. 324)

아마도 이쯤에서 마무리되는 소설들이 많았던 것 같다. 고난을 겪고 조금씩 나아지려 할때 stop

하지만 이 소설은 달랐다.

현재 시점으로 이어지는 스토리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왜냐하면 2020년 지금의 삶도 그리 녹록치 않고 파도는 여전했으므로...

한인들과 미국인들은 나이뿐 아니라 이름을 적는 방식도 달랐다. 자기 이름보다 성을 먼저 쓰는 한인들은 개인보다 가족을, 가족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한다.(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말이다) 날짜를 표기할 때도 연도가 먼저다. 오늘보다 과거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우리 엄마 같은 사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p. 334)

그런가.. 성씨를 먼저 쓰고 연도를 먼저 쓰는 것이 이렇게 생각되어질 수 있구나...

훌라 선생님은 우리게게 춤뿐 아니라 알로하 정신과 레이의 의미도 가르쳐 주었다.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알로하'라는 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배려, 조화, 기쁨, 겸손, 인내 등을 뜻하는 하와이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었다. 그 인사말 속에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하와이 원주민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했다.

레이 또한 단순한 꽃목걸이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두 팔로 안는 것과 같은 의미의 레이는 사랑을 뜻했다. 원주민들의 풍습이었던 레이는 레이 데이가 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문화가 되었다. (p. 354)

이 책에 왜 '알로하' 가 들어가야 했는지 이 구절을 통해 절절이 전달되는 듯 했다. 그저 말뜻풀이였는데 그 자체로 충분했달까...

레이의 끝과 끝처럼 세 명의 엄마와 나는 이어져 있다. 나는 또 어느 곳에 있든 하와이, 그리고 조선과도 이어져 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스라이 펼쳐진 바다에서 파도가 달려오고 있었다. 해안에 부딪힌 파도는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도는 그럴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갈 것이다. 할 수 있다. 내게 언제나 반겨 줄 레이의 집이 있으니까. (p. 384)

크... 정말 더할나위 없는 똑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세여자' 라는 소설이 있다. 이 작품과 같은 시기의 세여자를 다룬 소설인데, 실화적 소설이라 무척 감명깊게 읽었더랬다. 여기서의 세여자는 공산주의자로서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어서 역사적으로도 드문 장면들을 많이 알게 해준 좋은 작품이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 속 세 엄마들 이야기도 실화적 소설이라 여겨도 무방해 보인다.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았을지라도 당시 대부분의 삶이 그러했으리라 짐작이 되기에... 무엇보다 사투리 그대로 씌여져서 읽다보면 마치 영화를 보듯 드라마를 보듯 실제감과 입체감이 느껴져 더욱 실화처럼 다가왔다.

세여자를 다룬 소설은 이 두 작품 외에도 더 있는데, 세명이라는 숫자가 가장 다층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작가들이 세명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도 하게 된다...

여하튼,

가슴 뭉클한 가족 이야기...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 작품은 정말이지... 너무나 뭉클하게 다와서...

오랜만에 진짜 가슴벅차게, 찐하게 읽은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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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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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될 운명인 아이는 불어오는 모든 바람에 예민하다"-대프니 듀 모리에

 

 

대프니 듀 모리에(1907~1989) 는 "레베카' 라는 작품을 통해 알게 됐다.

레베카!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로맨스를 그토록 스릴러적 긴장감으로 읽어본적이 있었던가?!

원작 소설에 반해서 보게된 뮤지컬은 더 좋았다. 소설을 읽을땐 남녀 두 주인공의 감정에 푹 빠져 읽었었는데, 뮤지컬을 볼땐 댄버스 부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정말 압권이었다.

그 후 대프니 듀 모리에 의 단편집인 이 책 '인형'을 읽게 됐다.

'서스펜스의 여제' '최고의 이야기꾼' 으로 불린다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명으로 일생 동안 꾸준히 작품을 활동을 했다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는것이 아쉬웠을 정도로 너무 좋은 작품집이었다.

나는 국내 단편소설을 읽을떄 단편 특유의 난해함?!에 내용 전부를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떄가 많았다. 하물며 외국 단편은 더더욱;;; 그래서 외국 소설의 경우 장편이 늘 손에 잡기 편하곤 했다. 하지만 대프니 듀 모리에 의 단편들은 달랐다. 앞이나 뒤가 갑자기 뚝 잘린 느낌의 단편들이 아니라 하나하나 완성된 작품으로 충분한 소설적 재미가 가득했다. 외국 단편집을 이렇게 빠져들어 읽어보긴 또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1926~1932년 사이 그러니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경력상 매우 초창기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공식 작품 연보에 드러난 발표순서가 아닌 순수한 의미의 작품 탄생 순서를 따라 실었다는 열세 편의 작품들은 다 25세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인데, 정말 천재적인 작가임에 분명하다. 거의 백여년전에 쓴 작품들이 이토록 현대적일 수 있다니... 애드거 앨런 포 의 단편집을 읽을 떄보다 더 강렬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느낄 수 있었기에 왜 작가의 이름이 그동안 왜 국내에서 유명세를 타지 않았던 것인지 의아했다. 내가 잘 몰랐던 것일수도 있지만, 여하튼 정말 놀라운 감각을 지닌 작가였다.

거대한 바다는 하얀 포말을 일렁이며 절벽에 부딪치면서 항구 주변의 바위를 휩쓸었고,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불어오는 동풍이 들풀을 쓰러뜨리고 뜨거운 하얀 모래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희미한 운무 사이를 휘젓고 다녔고, 초록색 파도는 악마처럼 섬을 제멋대로 뒤덮었다. <동풍> p. 14

그런 섬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거센 동풍을 피해 커다란 배가 한 척 정박하게 되고, 그 배의 선원들은 작은 마을에 동풍이 일으킨 폭풍우보다 더 거센 파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렇게 낮이 가고 또 다른 밤이 지나고, 또 다른 하루가 밝았다. 태양은 빛나고 바다는 전율하며 부서지고 바람이 불었다. 고기를 잡으러 항구를 떠난 사람은 없고, 땅을 일구는 사람도 없었따. 풀밭은 갈색으로 변해 죽어가고, 몇 안 되는 나무들도 말라서 축 늘어진 이파리를 떨구면서 섬엔 그늘이 없어진 듯 했다. <동풍> p. 20

동풍이 불어 바다에 배를 띄울수 없었던 며칠간, 의문이 범선이 머물던 그 며칠간 마을은 태풍의 눈 속에 있었던 듯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동풍이 멈추었을떄 마을은 제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형 범선은 아침 썰물을 빌려 떠나버렸다" <동풍> p. 24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알듯 알듯 없었고 가까워질듯 하면서 멀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베카.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내 처지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나에게 하나의 광기, 집착이 되었다. <인형> p. 48

리베카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남자는 느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그가 아니었다.

생기도 없고 유리알처럼 고정된 그의 눈은 결코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했다. 축축한 선홍빛 입술은 비웃음을 머금었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칼은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나사로 작동되는 일종의 기계였다. <인형> p. 52

한 성당의 주임 사제인 제임스 홀러웨이는 매력의 결정체 같은 존재였다. 외모도 탁월했고, 목소리는 울림이 있었으며, 매너와 재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자신의 그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일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요양원에서 설교를 하던 중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우린 잊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처럼 철저하게 인간이셨던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 그분의 감정이 인간의 감정이었음을 가리키는 확고한 증거가 가득합니다. ... 그분의 마지막 외침 또한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습니까?" 약간 숨이 가빠진 신부는 말을 멈추었다. 환자들은 확실히 감동을 받은 듯했고 그는 또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먼 구석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던 심술궂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인 걸로 알고 있소" 노인이 말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잠깐이지만 신부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윽고 그가부드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너무 늦은 대답이었다. 마법은 깨져버렸다. 그는 패배감을 느끼며 그곳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p. 75

 

하지만 제임스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다시 자신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었다.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목소리에 홀딱 반했다. 마침내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최고조의 승리감에 벅찬 음성으로 강론을 마쳤다. 세상은 그의 것이었다. 마지막 손짓과 함께 그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p. 92

작가는 서스펜스에만 능한 줄 알았더니, 블랙 코미디적 유머감도 훌륭했고 남녀의 심리비교도 탁월했는데,

남자는 어쩌다 특별한 이유 없이 탈출해야 한다는 걸 그녀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외출은 그에게 자유로운 기분을 안겨 주기 때문에 되풀이되었다. <성격 차이> p. 93

하지만 그녀가 분개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와 따로 떨어져서 무언가를 한다는 걸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묘하게 그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았다. <성격 차이> p. 94

 

예전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는 책 제목이 상징하는 남녀의 차이점에 대해 비교묘사하는 것이 유행하던 떄가 있었는데... 저자는 이미 단편에서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을 썼다. ㅎㅎ

그녀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으며, 자신이 한 말을 증오했고, 내심으론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는 버럭 소리쳤다. 방을 나온 그는 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닌데, 내가 하려던 말은 절대로 그게 아닌데' 라고 그는 생각했다. <성격 차이> p. 107

 

남녀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말다툼에서 아마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하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남녀가 수시로 그러하듯이 ㅎ

한 남자가 7년의 약혼기간을 기다려 사랑하던 여자와 드디어 결혼했다. 이 둘은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둘이 함께 노력하면 미래는 행복이 넘쳐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박하게 떠난 신혼여행 첫날 낭만적인 밤을 꿈꾸며 숲속에 야영 텐트를 쳤다.

하지만 갑작스런 폭풍에 텐트는 주저앉았고, 길가에 세워둔 차는 그 안에 실려 있던 짐과 함께 도난당했으며, 길을 헤매다 결혼반지 까지 잃어버렸다. 그렇게 허름한 여인숙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서둘러 일자리를 찾아보았는데

"달링, 나 일자리를 찾았어"

"정말 멋지다!" " 나도 일자리를 구했어. 근무 시간은 9시부터 7시까지야"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왜! 뭐가 문젠데?"

"내 근무시간은 7시부터 9시까지. 달링, 난 액튼에 있는 은행의 야간 일꾼이야" <절망> p. 120~121

 

작품 제목이 <절망> 이다. 그런데 읽으며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모른다.

7년을 기다려 결혼했는데, 첫날밤도 함께 하지 못한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구한 일자리 시간이... ㅍㅎㅎㅎ

한 여자의 독백이 시작된다. 묘한 차림의 이 여성의 외모 묘사로는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잘 들어.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수첩을 들고 있는 우스꽝스럽고 왜소한 기자 양반, 내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거야.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잘 듣고 당신 입맛대로 인용해서 [일요일 개소리] 특별판에 큰 글씨로 실어도 좋아. 메이지의 고백, [무엇이 나를 이 직업세계로 이끌었는가] <피카딜리> p. 126

의외로 여성은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한남자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가 하라는 모든 일을 순종적으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떠났고, 방황하던 그순간 그녀 눈에 띈 것은

"참 나, 신의 계시가 곧장 내 머리 위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떠라고, 승강장 끄트머리에 불꽃같은 글씨체로 말이야. '피카딜리로 가실 분은 붉은 등을 따라가시오" <피카달리> p. 142

작품 제목을 봤을떄 짐작했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하고 읽었을 만큼 이야기 풀어나가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아마도 피카딜리를 아는 영국인이 읽었을 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 유머일 것이다.

한 소녀가 오랜 기숙사 생활을 조신하게 하는 동안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른이 되었고, 많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하며 고향 어머니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모녀와 함께 였던 존 삼촌이 있었다.

그렇다. 존 삼촌은 어머니에게 유용한 존재이고 다정했지만, 꽤 나이가 많아서 마흔을 훨씬 넘겼다. 가엾은 늙은이 존 삼촌! 여름에 두 분이 파리를 거쳐 칸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때 팡시옹에 함께 지내던 친구 하나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했더라? "저 사람이 너희 어머니가 키우시는 집고양이야?" 얼마나 근사한 표현인지! <집고양이> p. 146

그녀는 존삼촌이 집고양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전과 다르게 딸을 대하듯이 존삼촌도 전과 다르게 그녀를 대했다. 냉랭해진 어머니와 다르게 갑자기 친근감있게 다가왔다.

그는 상기된 얼굴에 다소 흥분한 표정이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말했다. "어서 와라, 즐겁게 지내야지. 고양이가 자리를 비웠을 떄 말이다......" p. 153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복잡하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친밀한 관계의 부도덕한 이면. 사랑스러움도 없고 로맨스도 없었다. 그녀도 자기 차례가 되면 이렇게 어머니와 똑같은 가면을 쓴 채 거짓으로 점철된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집고양이> p. 163

 

아름답고 조신한 숙녀가 되어 집에 돌아와 겪는 며칠 동안 이 어린 숙녀는 곧 깨닫게 된다. 그녀가 꿈꾸던 어른으로 사는 살이 결코 꿈꿀 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이런 작품을 작가가 25게도 안되던 때 썼다니.. 그시절에도 지금처럼 웃픈 현실이었나 보다.

여성작가라서인지 아무래도 작품들 속에 여성화자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성의 심리를 다양한 측면에서 섬세하게 잘 묘사한다.

메이지 라는 젊은 여성이 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는 중이지만, 그러한 하루하루가 그녀 본인도 편치는 않다.

"이봐요, 나도 한때는 당신처럼 젊고 예뻤다우, 나한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돈도 넉넉하게 챙겨주는 신사들도 많았지. 그렇게 먼 옛날 일도 아니야. 언젠가 당신도 늙고 추해지면 어떤 심정인지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거야. 그때가 오면 지금 나와 똑같이 당신도 여기 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구걸하게 될걸" <메이지> p. 185

하지만 어느 시대이든 젊은이들은 늘 젊기떄문에 이러한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메이지도 그랬다.

석달간 독일에 출장간 남편을 돌아오기로 한 날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맞이 준비를 하는 여성이 있다. 하루종일 행복에 들떠 준비하던 그녀에게 친구의 울음 섞인 전화가 걸려온다. 당장 달려가 친구를 위로해주긴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둥둥 떠있다.

문가에 서서 그녀가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행복하게 말했다. "괜찮아.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오래가는 아픔은 없다> p. 202

남편이 올 시간이 되어 급하게 떠나며 그녀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남기지만... 남편이 돌아온지 몇시간이 채 안됐을 떄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남편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초조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무언가가 예리하고 작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찌른 뒤 이리저리 비틀었고, 그녀의 머릿속엔 그 말이 계속 되풀이해 떠올랐다. "괜찮아,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오래가는 아픔은 없 다> p. 211

사람은 늘 정말 한치앞도 모르는 존재다. 그리고 남의 일이 자신의 일이 될줄은 더더욱 예상치 못한다. 저자는 블랙코미디에도 소절이 넘쳐난다.

달려가는 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그의 이마에 빨갛게 햇빛에 화상을 입은 자국이 우스운 모양으로 생겨났는데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 역시 그녀가 쓴 베레모 아래로 까만 곱슬머리가 예쁘게 삐져나온 것은 보았지만, 콧등에 두들긴 파우더가 더덕더덕 뭉쳐 있는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주말> p. 214

그들은 서로 애칭으로 부르며 특별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둘 다 혀짤배기소리를 하며 입술을 삐죽이지 않고는 문장을 맺지도 못했고, 말끝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손뼉을 쳤다. p. 216

 

사랑에 빠졌을 떄 그 순간 상대방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인다. 서로를 유치한 애칭으로 (소설 속에서는 찍찍이 와 까칠이 ㅎㅎ) 부르며 혀짧은 소리를 내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가끔씩 그녀는 남자의 이마에 생긴 일광 화상 얼룩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여자의 콧등에 뭉친 파우더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주말> p. 225

그들이 서로 사랑인줄 몰랐을 떄 사랑에 빠져들었듯이, 그들이 서로 사랑이 식인줄 몰랐을 떄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남녀가 함께 한 시간은 불과 단 한번의 '주말' 이었다. ㅋㅋㅋ

그녀가 처음 그 골짜기를 본 것은 꿈속이었고, 깨어나면서 몇몇 장면만 스치듯 떠올랐다가 낮 동안 바삐 지내며 쉽사리 기억이 희미해지고 잊히기를 반복했다. <해피밸리> p. 229

데자뷰를 경험하듯 그녀가 꿈에서 만났던 사람을 만나고 그와 간 곳에서 익숙한듯 낯선 장소를 경험한다. 일종의 시간여행 같은 이 작품은 판타지를 읽는 기분도 느끼게 하는데 저자가 판타지 소설을 썼어도 재밌었을 것 같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 라는 작품은 한 남자의 편지로 진행되는 작품인데, 편지를 읽으면서 이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렸을 떄와 사랑에 빠졌을 떄와 그 마음이 식었을 때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짧은 편지글만으로도 충분이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저자의 센스가 정말 감탄스러웠다.

중국에서 보낸 3년이라는 세월은 저의 예절과 대화술을 완전히 망쳐놓았기에 틀림없이 제가 끔찍이도 서툴고 어핵해 보였을 것입니다. p. 248

과도하게 문명화되어 성욕마저 과도한 이 나라에서 벗어나, 플랜테이션의 평화와 안정감 속으로 되돌아기 전까진 난 숨도 쉴 수 없을 듯 합니다.

(B부인에게 남겨진 전화 메시지 'X.Y.Z씨는 오늘 중국으로 출항했음'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 p. 274

 

책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인 <인생의 훼방꾼> 은 '아전인수'가 무슨 뜻인지 정말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냥 소설을 읽는 것뿐인데도 몰입이 되다보니 어찌나 기가막히던지... 그야말로 헐!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이것이다. 내 인생은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온갖 사람들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너그럽게 대했는데 어쟤서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나는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나는 내 자신을 마지막 순서로 두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앞세웠다. 그런데도 저녁 시간인 지금 나 홀로 앉아 내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려보면, 그들의 표정은 전혀 다정하지 않고 어쩐 일인지 쫓기는 듯한 얼굴이다. 하나같이 나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들은 그림자로 남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의사는 내가 너무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살고 있다면서 수면제를 한 병 주었다. 어제, 또 한 번 진료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반대편 목소리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야들리 박사님은 휴가중이십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의사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가 다른 사람 목소리를 가장하고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불운하고 불행한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인생의 훼방꾼> p. 318~319

 

 

ㅍㅎㅎㅎㅎ

처음 시작은 긴장감 쫄깃한 스릴러 작품으로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스릴러 보다도 살짝 비틀린 유머가 가득해서 여기저기 키득거리며 읽었다. 정말 이런 재미를 느끼게 될줄은 전혀 예상못했는데!

'레베카' 라는 쫀쫀한 로맨스를 읽엇을 떄의 감상을 토대로 비슷한 분위기의 단편들이지 않을까 싶었었는데... 정말 반전 대반전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도 다음 작품이 또 있었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정말 궁금해진다.

외국 작가의 단편집에서 만족감을 느껴본 적 없던 사람이라면 정말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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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교육 - 부모의 합리적 선택은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가?
마티아스 도프케.파브리지오 질리보티 지음, 김승진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부모의 합리적 선택은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가?

우리는 어쩌다 헬리콥터 부모가 되어버렸을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학문도 다양해지는 듯 하다. 학문마다 갈래가 점점 더 세부적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면.

예를 들어, 경제학 이라고 하면 정말 공급과 수요, 수출과 수입 같은 경제적 단어가 떠오르지만, 경제학자들의 연구분야는 점점더 다양한 학문과 접목되고 있다. 그렇게 다양하게 세부적으로 갈라지다보면 결국은 서로서로 연결된다. 거의 모든 학문이 통섭의 학문이 되어가고 있는 요즘이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ㅎㅎ

이 책의 저자들은 경제학자이지만 그중에서도 '양육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양육, 교육의 문제는 점점 더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교육의 핵심주체인 부모들은 다양한 경제적 요인에 영향을 받으며 자식을 위한 교육적 선택을 한다. 그 연관관계를 심층분석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교육이 정말 굉장히 경제적?! 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Love, Money & Parenting - How Economics Explains The We Raise Our Kids (사랑, 돈 그리고 육아 - 경제학이 어떻게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을 설명하는지) 라는 원제의 이 책이 알려주는 핵심은 현재의 '기울어진 교육'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 해결점을 모색하기 위한 인식을 공유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면서 처하게 되는 환경이 부모의 양육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것을 이 책의 목표로 삼았다. 이 책은 부모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책이 아니라 부모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행동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책이다. (p. 10)

저자가 본문에서 여러번 강조하듯이 이 책은 육아서가 아니다. 더 나은 양육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의미다. 책을 읽다보면 좋아보이는 양육법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자는 강조한다. 양육과 경제의 다양한 연관성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우열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리고 안좋아보이는 육아법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그러니 양쪽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이 책을 활용해야지 한쪽으로 치우쳐 판단하지 말것을 자주 주지시킨다.

양육 방식 개념을 이해하는 데 우리가 주되게 참고한 것은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다이애나 바움린드의 연구다. 바움린드는 양육 방식을 독재형 양육, 허용형 양욱, 권위형 양육 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p. 48)

이 책에서 우리는 권위형 양육의 요소와 독재형 양육의 요소가 결합된 유형을 일컬어 '집약적 양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즉, '집약적 양육'은 아이의 삶에 매우 강하게 개입하는, 고도로 관여적인 유형의 부모 행동을 포착하는 용어다. (p. 61)

 

독재형/허용형/권위형 이 세가지 양육방식은 본문에서 수시로 언급되는 개념이므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집약적 양육' 은 일명 헬리콥터부모의 증가추세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용어이므로 이또한 알아두어야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경제학적 접근 방식을 사용해 부모의 양육 행태를 실제로 결정짓는 인센티브들이 무엇인지, 또 경제적 인센티브가 변화하면 양육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대별로, 국가별로, 또 국가 내에서 각 사회적·경제적 집단별로 부모들이 채택하는 양육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포괄적인 패턴을 알아보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모의 의사 결정을 추동하는 주요 동기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다. 하지만 독재형 양육의 사례에서 많이 볼 수 있듯이 양육이 꼭 아이의 즉각적인 행복을 최대화하는 쪽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 사랑과 애정에 의한 결정이 즉각적으로 아이를 불행하게 하는 쪽으로 내려질 수 있는지 이해하려면, 자녀에 대한 부모의 관심과 염려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는지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p. 65)

모든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따라서 아이가 성장했을때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교육은 자녀의 그러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선택의 순간들에서 방향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독재형이건 허용형이건 권위형이건 부모들은 똑같이 자녀들에게 말한다. '다 너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아이도 부모도 그 선택이 정말 행복의 조건이었는지 쉽게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굉장히 넓은 범위에서 다양한 분석을 통해 결론을 정리해 나가는데, 그 분석들이 대부분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면 집약적 양육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을 만드는 상황들은 시대별, 국가별 등등의 집단별로 상이하다. 그 다양한 상황들을 살펴본 결과,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주제에 부합한다. 부모가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데 들이는 시간의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양육의 집약도와 관련해 큰 전환이 벌어졌고, 이 전환은 경제 불평등과 교육에 대한 투자 수익이 증가하고 더 일반적으로 양육 방식이 아이의 장래를 더 막중하게 좌우하는 방향으로 경제적 변화가 벌어진 시기에 발생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의 결과, 부모는 아이의 학업 성과를 점점 더 걱정하게 되었고 더 집약적인 양육을 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즉, 아이가 학업 성과를 더 잘 낼 수 있을 법한 양육 방식을 선택했다. 따라서 헬리콥터 부모의 부상은 변화된 경제적 환경에 부모가 합리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p. 135)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제적 불평등은 국가별로 차이가 크기 때문에 저자가 예로 드는 국가들의 상황을 읽다보면 지금 한국의 교육현실과 비교하게 되어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평등이 높은 나라에서는 근면성이, 불평등이 낮은 나라에서는 독립성과 상상력이 부모가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로 꼽히는 경향이 크다. (p. 141)

동일한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가진 두 부모를 비교했을 때 불평등이 낮고/낮거나, 더 누진적인 조세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있거나, 더 너그러운 사회적 지출을 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허용적인 부모일 가능성이 더 높고 권위형이거나 독재형일 가능성은 더 낮다. (p. 179)

교육에 대한 투자 수익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권위형이나 독재형 부모의 비율이 높다. 반면 교육에 대한 투자 수익이 낮은 나라는 부모들이 더 허용적인 경향이 있다. (p. 182)

 

경제적 불평등이 비교적 낮은 국가일지라도 독재형 부모가 많은 (예외적 이라고 볼 수 있는 유럽의) 국가가 있다. 바로 프랑스와 스페인이다. 그런데 교육에 투자한 만큼 자녀가 미래에 얻게 될 수익을 생각해보면 프랑스와 스페인의 상황은 설명이 되어진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양육 방식은 부모가 직면하는 인센티브에 크게 좌우된다는 이 책의 주장은 점점 더 확실한 근거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평등이 심해질 때 양육 격차가 증가한다면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가장 좋은 아이와 가장 낮은 아이의 학업 성취는 더 벌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계층 이동성이 낮아질 것이며, 그리하여 다음 세대의 불평등이 더 심해질 것이다. (p. 221)

집약적 양육이 경제수익을 보장하게 되면 될수록 부모가 줄 수 있는 여건에 따라 양육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양육격차가 양육의 덫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양육격차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고 경제 불평등이 증가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p. 222) 고 말한다. 그리고 양육격차를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을 모색해야 한다.

종교가 없는 부모는 종교가 있는 부모보다 허용형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p. 262)

종교가 있는 부모의 45%가 젠더 편향적인 반면, 비종교적인 부모 사이에서는 27%만이 젠데 편향적이었다. (p. 298)

여권의 확장은 '남성의 특권'에서 '아동의 필요'로 강조점이 이동한 것과 연관지어 해석해볼 수 있다. 이 변화를 추동한 요인은 경제에서 인적 자본과 교육의 중요성이 매우 높아진 것이었다. (p. 311)

학교교육이 아이에게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의 전망을 열어주기 시작했고,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를 일터가 아니라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이 인센티브에 반응했다. (p. 331)

아동노동 금지가 널리 법제화된 데는 아동 학대에 대한 인도주의적 우려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노조가 노동시장에서 경쟁을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 더 주요한 동인이었다고 불 수 있다. (p. 344)

 

종교와 교육, 여권확장, 아동노동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읽다보니 신선한 프레임들이 눈에 들어와 좋았다.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분석결과들을 설명함에 있어 저자가 시종일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읽는 내내 내용들에 대한 신뢰도 탄탄해져 갔다.

집약적 양육은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에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어 전근대 사회에서처럼 계급 간 구별과 분리가 심화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계급사회로 가게 될 지 모른다. 계급 간 구분은 양육의 집약도에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가치 체계에서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가치관과 태도가 계층에 따라 다시 분화되고 있는 것은 걱정스러운 추세이며 민주 사회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민주사회는 평등한 기회라는 이상, 그리고 사회적 이동성과 더 폭넓은 정치적 참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요인이 사회를 구성하는 유일한 결정 요인은 아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의지를 가지고 내리는 선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제적 요인이 불평등 심화와 계층 이동성 저하를 가속화하는 시대에, 민주 사회는 더 평등한 기회를 촉진하는 정책적 선택들을 내림으로써 이런 경향에 대응할 수 있다. (p. 388)

 

결국 선택의 문제다. 경제도 정치도 시민 한명한명이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인건지도 모르겠다.

학교와 가정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맞춰간다. (p. 392)

북유럽은 학교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고 진로 계열이 거의 나뉘지 않으며 대부분의 학생이 양질의 대학 교육 기회를 갖는다. (p. 393)

'걸려 있는 것이 많은' 시험의 존재는 불평등 수준이 낮은 편인 프랑스나 한국에서도 집약적 양육이 많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p. 395)

(중국의 입시제도) 가오카오가 기회의 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한다는 개념은 과장이다. 가령 도시와 농촌을 비교해보면, 평균적으로는 전체 중국 학생 중 절반 정도가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지만 상하이 같은 부유한 대도시에서는 이 비중이 많게는 97%까지 달한다. 수업의 질도 도시 학교들이 더 좋다. 도시 중산층은 아이를 비싼 학원에 보낸다. 또한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는 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더 잘 지켜보고 도울 수 있다. 그 결과, 가오카오 시험 결과에 상당한 사회적·경제적 격차가 나타난다. 아이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도농 격차를 심화하다. (p. 404~405)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독립성'이 서구에서와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부모가 아이에게 독립성을 길러주는 방식은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두는 것이라기 보다 아이가 성인처럼 알아서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p. 411)

 

책에 나오는 나라들의 교육적 상황들이 각자 너무 달랐다. 스웨덴에서는 유치원생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부모를 아동학대수준으로 바라보고, 핀란드에서는 제일 조금 공부하지만 제일 성적이 우수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는 유럽국가들의 평균적 교육 상황과 달랐고, 영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한국은 교육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위험요소가 있으면서도 그문제를 바라보는 인식들이 달랐다. 그리고 그 상황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관점은 굉장히 유용했다.

한중일 세 나라는 비슷한듯 달랐지만 '독립성' 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듯 보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다 다른지... 읽을 수록 북유럽의 교육환경이 부러워지면서도 워낙 문화적·정치적·사회인식적 차이가 크다 보니 섣불리 북유럽식으로 하자고 말하기도 어려워보였다.

우리는 좋은 부모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제안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리는 어떤 양육방식이 다른 양육방식보다 내재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보지 않는다. 경제학자로서 우리는 모든 양육 방식이 상충적 교환관계를 갖는다고 본다. (p. 434)

이 책 전반에 걸쳐 주장했듯이 양육 선택은 우리가 살면서 내리는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이고 사회에섯 불평등의 양상이 어떻게 변천해갈지를 좌우할 주요 요소다. 그러므로 조세, 재분배, 교육 등과 관련된 정책 논쟁은 그런 정책이 양육에 미치게 될 영향을 비중 있게 고려해야 한다. 불평등 및 계층 이동성과 관련해 우려할 만한 경향이 많이 존재하지만, 신중하게 고안된 정책들로 이런 경향을 상쇄하거나 역전시킬 수 있다. (p. 452)

 

책은 크게 3부 10장 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부 마다 소결 이 정리되어 있어서 유용했다. 마지막 10장은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결론들을 모은 내용이면서,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본 양육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집단별·양육형태별 결과들을 통해 미래는 어떠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자 하고 있어서 그 지향점이 보기에 참 좋았다.

지금의 교육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기울어짐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힘들게 뛰지 않도록 어서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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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 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이한용 지음 / 채륜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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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저자는 30년째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인연을 이어오며 실험고고학과 대중고고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으며 현재는 전곡선사박물관장으로서 매년 한국에서 세계구석기심포지엄을 열고 주먹도끼를 직접 만들어 분석하는 실험연구를 하고 있는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고학과 시민의 다리역할을 했던 경험을 살려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인류의 도구 2부는 인류의 기원 3부는 인류의 예술이다.

1부 인류의 도구에서는 구석기의 대표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주먹도끼 이야기기 주로 나오는데, 같은설명이 글마다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서 살펴보니,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이라는 연재글이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의 근간이 되었다는 에필로그 글을 읽고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연재글이다 보니 글 한편한편의 완성도는 좋으나 연재기간의 격차를 고려한 앞선 글에 대한 요약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글의 특징을 앞에서 미리 밝혀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들었지만, 2부와 3부로 갈수록 중복이 없어지고 글 한편한편 독립적으로 읽혀져서 이내 적응이 됐다. 그리고 읽다보니 주먹도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져서, 다 읽고나서는 중복되어 설명된 부분들이 더 인상적으로 남기도 했다.

돌을 두드려 깨서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구석기시대는 적어도 250만년 전부터 시작한다. 돌을 갈아서 석기를 만들기 시작한 신석기시대의 시작을 약 1만년 전이라고 볼 때 인류역사의 대부분은 구석기시대다. (p. 14)

석기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보다 다양한 종류의 석재를 사용하게 되는데 신기술과 신소재가 만나게 되는 것이다. 후기구석기시대에 등장한 신소재의 대표 주자가 바로 흑요석이다. (p. 15)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동해안 지역과 중부지방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인 흑요석을,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되는 흑요석 석기는 일본 규슈산의 흑요석 원석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시대 백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중부지방으로 이어지고, 일본 규슈에서 한반도의 남부지방까지 흑요석이 공급되던 그 길은 구석기시대의 실크로드, 흑요석 루트였다. (p. 19)

 

신석기시대도 석기시대라는 이미지에서 원시인적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물며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우가우가 하는 원시인이 생각났었다. 그런데 흑요석 루트가 있었다니... 자신들이 살던 지방에서 나지 않는 돌의 원석을 먼곳까지 가지러 가고 갖고 와서는 가공해서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저런 책으 읽으며 드는 생각인데, 석기시대는 예상보다 무척 수준있는 문명을 이루었던 시대였을 것 같다.

주먹도끼는 자르고, 찍고, 썰고, 긁고, 뚫고, 파고 등등 인류가 구석기시대의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했던 도구이며 가장 중요한 도구 중의 하나이다. 이 주먹도끼가 동아시아 최초로 우리나라 전곡리 구석기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 중심으로 인도의 서쪽 편에만 존재한다고 믿어져 왔던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다.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는 앞뒷면을 정밀하게 가공해 날이 거의 직선이고 앞뒤 좌우가 대칭인 날렵한 모양의 주먹도끼가 주로 발굴되고 있다. 반대로 동아시아에서는 대부분 두툼한 형태의 양면가공 주먹도끼가 발견되고 있다. 이렇듯 주먹도끼의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는 석기를 만드는 기술력의 차이가 아니라 원재료인 석재의 차이 때문이다. (p. 21)

 

고고학과 역사학에 있어서 서양중심 서양우월주의는 두드러진다. 동양 이라는 표현도 서양인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봤을때 동쪽이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니... 학문이 먼저 발달할 수록 먼저 발견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일한 결론은 아니다. 주먹도끼가 동양에서 발견되지 않아서 석기를 사용하는 원시시대에서부터 서양우월주의적 해석이 일반적이었다고하나 전곡리 주먹도끼의 발굴로 인해 그 편견은 부서졌다. 유럽의 돌로만든 성이 우리나라의 나무로 만든 저택보다 기술이 우월해서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수 있는 재료에 따라 건축재료가 달랐을 뿐이다.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객관적이고 평등적인 해석은 중요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석기는 250만년 전 호모하빌리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최근에는 330만년 전의 석기관련 자료들도 보고되고 있어 최초의 석기제작자가 살았던 시기는 점점 더 올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p. 27)

330만년 전이라... 감이 오지 않는 머나먼 시간대이다;;; 그때부터 인류가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왔다니... wow

2018년 여름 강원도 정선의 매둔동굴에서 연세대학교 박물관 고고학조사단이 중요한 유물을 발견했다. 납작한 자갈돌을 모루돌 위에 올려놓고 두드려 양쪽 끝부분을 깨서 만든 그물추가 여러 점의 작은 물고기 등뼈와 함께 발굴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조사단이 밝힌 이 그물추의 연대가 무려 2만9천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그물추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기의 것이라고 한다. (p. 51)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있는 나라라고 하는데, 전곡리 주먹도끼 부터 정선의 그물추까지 고고학에서 중요한 유물들이 자꾸 발견되는 걸 보면 신기하다. 그에 비해 고고학에 대한 지원이나 대중화는 미비하게 느껴져서 아쉬운 마음도 든다. 고고학 관련 학과도 적고 연구진도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발견들이 이루어지는데, 고고학이 힘을 받으면 중요한 유물이 여기저기서 막 발견될 것만 같은 느낌? ㅋㅎㅎ

인류가 발명한 수많은 발명품 중에 그 역할에 비해서 가장 저평가 받고 있는 유물을 꼽으라면 단연 바늘을 첫손에 꼽고 싶다.

인류 역사는 바늘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진화의 여정을 순항하던 인류에게 다가온 매서운 빙하기의 추위는 감당하지 못할 고난이었다. 이때 등장한 바늘, 바늘귀가 달린 바늘로 꼼꼼하게 꿰맨 옷과 신발은 인류가 빙하기의 추위를 극복하게 해주었다. (p. 53)

현재까지의 고고학 증거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바늘이 있었지만 네안데르탈인들에게는 바늘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죽을 뚫는 송곳 정도가 옷을 만드는 도구였던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들에게는 정교한 바느질이 가능한 귀 달린 바늘이 있었다. 이 작은 차이 밖에 없었다. 송곳에 구멍을 뚫어 귀 달린 바늘을 만들었던 그 작은 차이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생존을 결정지었다. (p. 55)

 

바늘!!! 그랬구나... 바늘이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없었다니. 왜 여러 고인류중에서 호모사피엔스만 살아남았는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걸로 아는데, 바늘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였다니 놀라우면서도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다.

현재까지 약 250개의 동굴에서 후기구석기시대 예술 활동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동굴벽화에 그려진 것들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동물그림이다. 벽화에 남겨진 동물들 가운데는 사냥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동물그림들도 많다. 창이나 찌르개와 같은 무기에 정통으로 맞은 짐승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창에 맞아 상처를 입거나 부상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동물들의 생생한 그림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냥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들이다. 동굴벽화는 자신들의 사냥기술을 뽐내기 위한 표현이며 '이 동물을 잡으려면 여기를 찔러라' 하는 식의 사냥기술의 교재 같은 역할로도 볼 수 있다. (p. 63)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것이다. 주술적 의미에서 교육적 의미나 다른 해석도...

여하튼, 예술활동은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시간 외의 시간이 주어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다리로 서고 손이 자유롭고 뇌용량이 커질수록 예술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을 것이다. 예술의 발달 또한 진화의 발달에서 중요한 프레임이 되어준다.

최근 들어서 중국의 학자들은 저우커우덴의 호모 에렉투스들은 이미 70만년 전에 불을 사용했다는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있다. 구석기시대는 국경이 없었다. 그래서 현재의 나라나 민족의 개념은 더더욱 의미가 없는데 자국의 구석기유적의 연대를 점점 더 오래된 것으로 발표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것을 보면 자기 나라의 영토 안에 구석기시대 유적이 더구나 아주 오래된 구석기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국격을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p. 82)

석기시대에는 당연히 국경이 없었다. 고인류의 이동은 수만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석기시대에 살았던 인류가 현재지역의 직계 조상이라고 할수도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국경내에서 유적을 판단하고 경쟁하는 것은 학문의 발달에 그리 좋은 태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인류의 앞니에 남아 있는 석기자국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50만년 전의 인류의 93.1%가 오른손잡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니 놀라운 연구결과다. 오늘날 우리 현생인류에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왼손잡이의 비율이 11%라는 것과 비교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 비율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대부분 오른손잡이일까? 우리가 대부분 오른손잡이가 된 이유는 인류가 석기를 만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p. 89)

석기를 만들때는 한손으로 잡고 한손으로 내리치거나 때거나 해서 모양을 만들게 되는데, 좌뇌가 손의 사용을 주로 관장하므로 석기를 잘 만들기 필요한 정교한 손동작은 좌뇌가 활성화되어야 더 수월해진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좌뇌의 운동조절기능의 영향을 받는 오른손잡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신기하다. 50만년전부터 오른손잡이가 인류에게 많았다니... 이렇게 보면 현재인류는 고인류에서 별로 달라진게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류 초기의 두 발 걷기를 시작한 고인류들이 알려주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은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튼튼한 두 다리라는 것이다. 머리가 먼저 좋아지고 두 다리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 두 다리로 일어서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뇌도 커지고 머리도 좋아진 것이다. (p. 113)

고인류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뇌용량의 확대는 거의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설명이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부터 어떤 고인류가 됐건 간에 걷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공통사항일 뿐이었다. 그런데 진화의 핵심을 두 발 걷기에서 시작하는 저자의 설명은 새롭고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백만년 함께 경쟁하며 지내던 여러 종의 고인류들 가운데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만이 기후변동에 잘 적응하여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그 비결은 고기라도 먹자는 과감한 선택의 결과이다. (p. 122)

고인류의 주된 식량자원은 채집으로 얻어진 식물성 자원이었다. 그런데 환경의 변화는 식물자원의 부족을 가져왔다. '고기라도 먹자' 라는 표현에 웃음이 난다. 지금은 고기고기 하며 완전 좋아하는 고기를 과거에는 이거라도 먹자 하는 마음에 시작했을 거라는 설명이 ㅎㅎㅎ

총 193종의 유인원과 원숭이들 가운데 오직 단 한 종 우리 인간만이 과감히 털가죽을 벗어버리고 털 없는 원숭이가 되었을까?

우리가 털을 잃게 된 아니면 털을 없애게 된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체온유지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의 무더운 기후에서 처음 등장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체온유지와 털은 분명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p. 136)

 

기후변화로 수가 줄어들고 있던 매머드가 갑작스런 기온상승으로 더욱 멸종의 길에 가까워졌다는 것과 비슷하게 아프리카에서의 고인류가 기온에 적응하기 위해 변화되었다는 설명이 흥미롭다. 그 외에도 오래달리기로 빠른 사냥꾼들과 다른 사냥법을 통달했던 고인류에도 털은 거추장스러웠고, 털이 없으면 진드기, 벼룩 같은 체외 기생충이 숨어들 곳도 없어진다는 등 다른 설명들도 아~! 싶었다. 예전엔 막연히 고인류에게는 털이 북실북실 했으려니 했는데 그러고 보니 뼈바늘로 옷을 지어입어야 할 정도면 털이 없는 매끈한 피부였겠다 싶기도 하다.

화산 기원물질의 경우에는 과학적인 연대측정법의 적용이 가능해서 화산재의 나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종의 유리 물질인 화산재는 폭발한 지점의 화학성분 및 폭발 당시의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화산마다 각각 모양이 다르다. 이런 화산재의 특성 때문에 지금까지 폭발한 화산에서 나온 화산재는 어디 출신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나이를 알고 출신지를 알 수 있다니? 고고학에서 화산재야말로 유물의 연대와 기원을 알아낼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이고 중요한 자료이다. (p. 172)

그 작은 화산재입자로 몇만년전 어디에서 폭발한 화산의 물질인지 알 수 있다니... 과학의 발달은 고고학에서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듯 하다.

인류의 기원이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 시대에도 구석기시대 이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예술적 감성의 표상인 동굴벽화의 기원이 유럽이라는 것이 마치 서양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했던 것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동굴벽화는 서양에서만 발견되어야 하는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는 발견들이 최근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4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에서 3만 5천 4백년으로 연대 측정된 아생 돼지 그림들이 발견되어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가 꼭 서양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p. 220)

예술은 특정 지역에 살던 특정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생인류가 정착했던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생겨난 인류 공통의 유산이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 (p. 221)

 

석기시대는 상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머나먼 옛날 몇 만년 몇 십만년 전이다. 적어도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 한 종만 남게 되기 전의 시간대에 있었던 고인류 진화에 대해서만큼은 인류공통의 유산으로 우열가림없이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인류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매장은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단계에서 나타난다. 약 700만년 전 고인류가 두 발로 서기 시작한 이래 수백만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죽은 자를 잘 묻어주는 매장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약 10만년 전 중기구석기시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는 매장이 동굴에 죽은 이의 시신을 잘 안치하는 정도였다면 후기구석기시대에 들어서는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무덤을 만들고 무덤 바닥에 뼈나 돌을 까는 등의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 세심해진다. 그야말로 살아서 사는 집과 같은 죽어서도 사는 집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신과 함께 묻힌 구슬과 상아 등 많은 부장품들이 이들의 영적 세계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위 내세관을 말해준다. (p. 229)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니...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대단히 고차원적인 일이다. 후기구석기시대의 고인류에서 지금의 인류까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뇌용량과 기술 같은 것 말고 외형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거의 동일하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아렌느 깡디드에서 발견된 '다람쥐 모피를 입은 아이' 라는 별며을 가진 어린아이의 매장유구 설명에서는 놀라우면서도 감동적이었다.

6살 정도된 아이가 죽자 엄마 아빠는 수십 마리 다람쥐를 잡았고 그 꼬리를 잘라 폭신한 망토를 만들어 입혀서 잘 묻어주었다. 아이의 머리맡에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돌로 만든 실로폰, 조개껍데기 같은 장난감이 놓여있었다. 붉은색 흙을 정성스럽게 뿌린 이 아이의 유골을 바라보고 있으면 조개껍데기로 소꿉장난을 하며 뛰어 놀았을 사랑하는 아이를 보내는 엄마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약 2만 5천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 마을사람들은 어설픈 걸음걸이로 '우가우가'하는 원시인이 아니라 사후세계의 생활까지 관념적으로 생각하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p. 231)

 

오래전 시대에 대한 추측을 가능케하는 중요한 유적유물은 무덤이다. 무덤이 간직한 것은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뼈와 유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상상하며 읽으니 마음에 또다르게 다가왔다.

학자들에 따라 다소 이견은 있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악기 중에 가장 오래된 악기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슬로베니아 디제바베 유적에서 출토된 동굴곰의 넓적다리 뼈로 만든 플루트다. 약 4만 3천 년 전에 만든 이 플루트에는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정확히는 현재 남아 있는 부분에서는 2개의 구멍만이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p.235)

구석기시대의 예술이 동굴벽화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도 있었다. 동물의 뼈 특히 안이 비어있는 새의 뼈로 만든 악기는 악기로서의 기능이 훌륭했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이 참 신기하고도 궁금해진다. 가족이 모여 고기를 구워먹고 가족이 죽으면 슬퍼하며 정성껏 무덤을 만들고 도구를 개발하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즐기는 생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왠지 구석기시대인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인류 진화와 구석기시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책은 학술서라기보다는 구석기시대와 인류의 진화에 대한 수필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은 계속 진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왔는지를 아직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아주 가끔은 생각해 보는 삶이 조금은 더 보람된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 255)

학술서라고 나온 책도 학술서라고 하기엔 모자란 책이 있기 마련인데, 수필집이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책은 쉽게 읽히지만 학술서라고 하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이러한 책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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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원종우 지음 / 아토포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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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SF소설의 세계는 깊고 넓으며 우아하다"

과학팟캐스트1위,<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 원종우의 SF소설

 

 

이 책은 8편의 SF단편이 실린 소설책이다.

저자인 원종우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력을 보니 다방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는 사람인듯 하다.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저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SF소설에 대한 애정만큼은 (SF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깊이 공감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하기 위한 사고실험이다. 예전에 읽었던 과학책에 나왔던 예 이기도 하고 이 책속에서도 설명을 해주고 있긴 하지만, 양자역학적 설명은 여전히 어렵다;;;

내가 이해한바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코펜하겐의 해석이라는 입장은 관찰자가 측정, 즉 관찰을 해야만 어떠한 현상은 해석되고 설명될 수 있다. 관찰을 하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이러한 관점의 모호함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핵붕괴장치가 들어있는 장치에 넣고 그 장치가 터질 확률이 50%라고 했을때 상자를 닫고 장치를 작동시킨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그 고양이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 죽어있다고 할 수 있나를 슈뢰딩거는 묻는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고양이가 살았건 죽었건 관찰자가 관찰하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다. 슈뢰딩거는 이 상태를 고양이는 살이있는 동시에 죽어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장치가 터졌을 경우의 고양이 생존확률이 50% 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안되니까 코펜하겐의 해석이 말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이다. 우리가 보고 아는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보고 모르는 세계도 존재한다.

역설적인 사고실험속에 등장했던 고양이가 알려주는 역설적인 아이러니는 이 소설집의 단편하나하나 마다 다른 주제로 등장한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슈뢰딩거의 고양이 여덟마리를 만나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ㅎㅎㅎ

저자의 SF적 사고실험 같은 단편들은 앞설과 뒷설로 작품의 앞뒤에서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독특한 구성이라고 느껴졌는데, 짧은 단편속에 등장하는 SF적 과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는 적절했던 것도 같다. 그로 인해 이 책은 소설로 읽히는 동시에 과학책으로 읽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상상력에 빠져들게 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에서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SF적 세상속에서 표현한다.

애초에 영원히 사는 게 목적인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 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어느 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p. 17)

개인적으로 8편의 단편 중 첫번째 단편인 이 작품이 가장 인상깊었다.

인간의 영생에 대한 욕망은 역사가 기록된 이래 지속적이었다. 어느날 '이터너티' 라는 약이 세상에 등장한다. 이 약을 한번만 주사 맞으면 인간의 몸은 그 상태로 유지된다. 따라서 이 약은 '불사의 약'으로 불리며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사맞게 된다. 아이들은 성장이 완성되는 나이에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이 약을 주사맞는다. 젊음을 영원히 지속시켜줄 것 같은 이 약에 대한 기묘한 부작용은 어쩌면 시작부터 필연적이었다.

"이터너티가 처음 나왔을 때 노인들은 잘 맞지 않았지. 늙고 아픈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악몽일 수도 있으니까. 그들은 이제 대부분 죽었단다. 물론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름대로의 이유로 주사를 안 맞은 사람들이 있긴 했어"

"나도 늙는 게 싫단다. 죽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그보다는 이터너티의 부작용에 빠지는 게 더 싫었떤 거야. 방안에 갇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햇볕도 쬐지 못하면서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았어" (p. 25)

 

환호하며 이터너티를 주사맞았던 사람들이 겪은 부작용이란 심리적 위축 같은 거였다. 그들은 점점 밖에 나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집안에서만 생활하고자 했고 사회적 관계시스템은 무너져갔다.

"애나. 불로불사의 약은 유전자를 변형해서 우리 몸의 노화를 영구히 멈추어 준단다. 그래서 모두가 환호했고 기꺼이 그 주사를 맞았어. 하지만 그런 후에 그들은 깨달았지. 늙어 죽지 않는다는 것이 곧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생각해보렴. 사람은 늙어서만 죽는 것이 아니야. 병으로 죽고, 전쟁이나 범죄로 서로 죽이고, 비행기나 자동차사고, 짐승의 공격 등 그 밖에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사고로 죽지. 하지만 그런 죽음까지 이터너티가 막아 줄 수는 없지 않겠니. 반대로 이야기하면 일단 이터너티를 맞고 나면 이제 병만 걸리지 않으면, 사고만 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일에 말려들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거지" (p. 27)

그 부작용이란 건...

"그건 약이 만들어 낸 화학적인 영향이 아니었어. 영생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조건에 지불해야만 하는 영혼의 대가였던 거지. 다들 어렵사리 얻은 영원한 삶의 기회를 절대로 망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혹시라도 병을 옮길지 모르는 다른 인간과 생물들로부터 멀리 도망갔고 어쩌면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바깥ㅅ[상으로부터 꽁공 숨어 버렸어.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상상도 못하게 됐지. 결국 영원히 살기 위해 무한한 겁쟁이가 되고 만 거란다" (p. 28)

 

몸이 늙지 않는다고 해서 영생인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과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노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생에 대한 시초는 노화를 막는것부터 였다. 그런데 노화를 막는다고 해서 영생을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목숨바쳐 무언가를 지키는 용기를 가졌던 인간은 노화가 멈춘순간 도전과 용기도 사라졌다.

가끔 의문이 든다. 나는 인류에게서 죽음을 제거한 구원자일까, 아니면 인류 전체를 영원한 영육의 무덤 속에 가둬버린 악마일까? 애나의 말처럼 머지않아 죽고 나면 그 의문의 답을 얻게 될까, 모르겠다. 그저, 지금 내가 아는 것은 그런 일을 벌인 내게 영생의 자격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소멸을 통한 영원한 안식과 지옥이라는 거대한 무책임의 형벌 중 하나를 얻게 될 그 죽음의 날을 나만은 피해 갈 수 없다. (p. 30)

작품 속 화자는 30여년전 '이터너티'를 발견한 연구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사를 맞지 않고 늙어가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공원에 의자를 펴놓고 햇빛을 받으며...

<세대차이> 에서는 먼 미래 지구가 파괴된 후 커다란 우주선에 작은 세상을 만들어 새로운 생존별을 찾아가는 설정이 등장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세대차이란 우주속을 해매는 사이 세대가 바뀌고바뀌고바뀌다가 자신들이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세대의 생각들을 통해 등장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세대 우주선 내부에서 온갖 정치·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며 문명이 여러 번 교체된다. 좀 더 세월이 흐르고 나면 자신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그나마 선택되어 세대 우주선에 탑승한 인류의 후예들이 무지 속에서 멸망을 앞두고 있는 어두운 상황을 그리고 있다. (p. 56)

 

자신들이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을 잊은채 왜 자신들이 사는 별만 다른 행성과 반대의 궤도로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의 연구를 막은 것은 종교지도자였다. 그들의 새로운 생존별은 어느새 천국으로 둔갑해 있었고 자신들은 선택되어 천국으로 향햐고 있는 중이므로 과학적 학자의 연구는 필요없었다. 이 답답한 중세적 스토리가 SF에서도 가능하다니!!!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는 고양이 관점에서 서술된다는 면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라는 소설이 생각나기도 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상자 안의 미야옹은 핵분열 가능성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여야 한다. 슈뢰딩거는 바로 이런 '삶과 죽음의 중첩' 같은 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이 사고 실험을 통해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p. 78)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193년에 등장했다. 당시 양자역학의 최전선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당연히?! 완전하지 않았다. 이후 등장한 아인슈타인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의 터무니없음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 하지만 동시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코펜하겐식 사고방식이 그럴수도 있다고 여겨지게 하기도 한다. 양자역학의 세계관이란 참 어렵다;;;

<유로피언> 에서는 태양계 내에 인간이 아닌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최근 들어 태양계 내에서 기존에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후보지들이 등장했다. 바로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이다.

특히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와 토성의 위성인 엔켈라두스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들이다. (p. 90)

 

유로파 행성에 사는 종족인 유로피언들과 지구인이 만나는 과정은 지금 지구에서 쏘아지고 있는 우주선들의 발달과정에 따라 다가올 미래에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을 것도 같아서 SF의 현실성을 가장 많이 체감할 수 있었다.

<인형들의 천국> 은 그야말로 거의 최악의 AI디스토피아 적 세계를 다룬다.

명실공히 절대 고수인 그(?)는 막상 스스로가 바둑을 두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나아가 바둑이 뭔지도 모르고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 이 상황은 미묘한 딜레마를 만든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가 그 솔류션을 제시하는 것 외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마치 원생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딜레마의 다른 한편에는 인간은 알파고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놀라운 한 수에 도달하는지 그 구체적인 사고의 경로를 추측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p. 126)

선진문명의 외계종족이 지구를 방문한다. 외계인을 맞이하는 인간의 태도나 환경이 너무나 안정적이어서 외계인은 지구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알게 된다. 자신들을 맞이한것이 인간이 아니라 AI들이었다는 것을. AI들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을 멸종시키고 있다는 것을. 외계종족은 지구를 떠나면서 지구를 향해 로켓을 발사한다.

AI라고 할때 우리는 완벽한 지성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완벽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그래서 인간만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생각하면 할 수록 답은 점점더 요원해지는 느낌이다...

<튜링 히어로> 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생각나게 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자리를 받아들잉고 나를 죽이려는 인간들을 상대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인간들에게는 약점이 생겼다. 안드로이드는 본질적으로 계략에 서툴지만 나는 얼마든지 모략과 거짓으로 술수를 부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제 안드로이드의 활동은 나의 지도하에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p. 148)

인간에 가까워진 AI들에게 위협을 느낀 인간은 뒤늦게 AI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외형상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 인간과 AI를 구별하는 방법은 튜링테스트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튜링테스트에서 AI로 판별이 된 인간이 사살되기 직전 가까스로 도망치고, 숨어살던 AI들의 조직에 의해 구조된다. AI들은 그를 튜링테스트에서 살아남은 최초의 AI로 인식하며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인간과 AI의 경계는 갈수록 더 아이러니해진다.

<계몽의 임무> 는 묘한 휴머니즘?!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알겠습니다. 야훼"

예수는 의장실을 나오면서 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행성을, 그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지구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감정을 가진 동물 한 마리의 목숨 때문에 수천 년간 기다려 온 구원을 놓쳤다는 사실을 그들이 언젠가 알게 될까. 쓸쓸한 눈빛으로 들릴 듯 말듯, 그가 속삭였다.

"부디 살아남게, 지구인들이여.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내가 아닌 남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진리를 늦기 전에 깨닫기 바라네. 오래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p. 170)

 

외계의 선진문명이 지구를 오랫동안 살펴본 결과 인간들이 희망적이 종족이라 판단하고 계몽을 해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지구에서 최초로 쏘아올린 생명이 승선한 우주선에 대해 알게 된다. 그 우주선에는 개 한마리가 타고 있었고, 귀환일정은 아예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생명을 경시한 태도에 분노한 외계 종족은 지구를 계몽하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그리고 생명의 존중과 지구와 지구인에 대한 애정을 품은 사령관 이름에서 느껴지는 종교성이 묘하게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산타 신디케이트> 는 소설이라기엔 좀 모호한 산문이다.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타에 대한 환상을 대물림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인류 모두가 산타 신디케이트 라는 조직의 일원들임이 분명하다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뭔가 정리되지 않는 따듯함이 느껴져서 미소가 지어지긴 했다.

북극에 살고 루돌프를 키우는 빨간 옷의 노인 한 명 외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 같은 감정에서부터 실제 선물과 각종 관련 산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언저리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그를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p. 192)

SF 의 매력은 있을 법한 상상이라는 것에 있다. 지금은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들이 미래의 현실에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지금의 SF 세계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저자도 "이 모든 것이 어디까지 갈지 최대한 길게 보고 싶고, 그렇게 결국 SF 현실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p. 194) 라고 이야기 한다. 소설속에서 펼쳐지는 현실적인 저자의 SF 상상력은 하나같이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일 것 같아서 짧은 에피소드들임에도 한껏 몰입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이 다 각각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아이러니해서, 그 SF들이 현실이 되기 전에 이 아이러니들부터 잘 정리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SF소설들을 많이 읽고 그 세계에 공감해야 하지 않을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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